역사

浿水說散考

rainbow3 2019. 11. 13. 12:46


浿水說散考 *
- 遼東浿水說의 흐름과 전망 -



이 승 수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국문 요약>


6세기 『水經注』의 기록 이래 浿水는 평양의 대동강이라는 학설에 별 이견이 없었다. 16세기 이후 이러한 견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몇몇 학자들은 여러 문헌을 근거로, 浿水는 요동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이러한 견해는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에 의해 계승되었고, 해방 이후 몇몇 학자들은 방대한 논거를 통해 이 학설을 더욱 정교하게 입증했다.

浿水의 문제는 고대사의 강역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매우 뜨거운 주제이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이상할 정도로 냉랭하다. 출판시장이나 온라인상에서 ‘浿水’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 단어로 검색되는 정기간행물의 학술논문은 5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이 분야에 있어 지식 형성의 계보와 유통 과정을 추적하기 힘들 정도로 학문적 대화와 지식의 교류가 마비되어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둘째, 앞의 이유와 관련해서 학계가 제공하는 정보가 지식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패수가 요동에 있었다는 국내 학설의 근거와 계보를 따지고 향후의 전망을 예측해본 결과이다. 이 주제는 국제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사학 및 중국의 중화사학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국내의 학문경향과도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학설이 학문 외적인 영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결과이다.

문헌기록을 근거로 할 때, 위만조선 이전의 패수는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었고, 향후의 논의는 이러한 전제하에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


주제어: 酈道元, 洪汝河, 成海應, 朴趾源, 申采浩, 鄭寅普, 리지린, 윤내현

* 이 논문은 한양대학교 2013년 HYU 연구특성화사업으로 지원받아 연구되었음(HYU-2013-T).


Ⅰ.


특정 사안에 대한 소문도 무성하고 담론도 넘쳐 그것에 관한 많은 정보가 축적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정작 관련 연구 성과를 찾아보면 너무 빈약하거나 정돈되어 있지 않아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재야 담론이나 온라인상에서 ‘浿水’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지만, 국회도서관에서 이 단어로 검색되는 정기간행물의 학술논문은 5편에 지나지 않는다.1)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이 분야에 있어 지식 형성의 계보와 유통 과정을 추적하기 힘들 정도로 학문적 대화와 지식의 교류가 마비되어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학설과 학설의 영향 관계와 비판-재비판, 반론-재반론의 과정이 명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앞의 이유와 관련해서 학계가 제공하는 정보가 지식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언비어는 중대한 상황에서 일상적인 보도와 통신이 제대로 구실을 다하지 못하여 그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때 생겨나는 뉴스”2)라는 사회학적 명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 역사학자들은 대중의 높은 신뢰는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 다음이나 네이버 등의 포털사이트에서 ‘패수’를 입력하면 , 패수의 위치 등에 대한 정보를 담은 개인 블로그의 글이 수백 건 검색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내용은 주류 학설 또는 교과서의 견해와 다른 것이다.

이는 제도권의 주류 학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마는 않는 제도권 밖의 담론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소산으로, 그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할필요가 있다.
2) 이효성, 「유언비어와 정치」, 『언론정보연구』25,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1988.



이 글은 ‘浿水의 위치’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 근원을 소급하면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燕行路의 현장에서 만났던 여러 물줄기에 대한 궁금증이다. 조선시대 연행로는 한국 고대사의 현장에 놓여있고, 거기서는 太子河, 渾河, 遼河(巨流河), 柳河, 羊腸河, 大凌河, 小凌河, 興城河, 燕臺河, 六股河, 狗兒河, 灤河, 還鄕河등 여러 강을 만날 수 있다.

이 강들에 배어있는 옛 사연들이 궁금했다. 다른 하나는 『사기』,「조선열전」의 독서 경험이다.

「조선열전」에 패수는 조선과 한의 경계로 7차례 등장하는데 두 나라를 동서로 가르는 물줄기였다. 楊僕의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배를 띄워 발해를 건너 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쳤다. 당시 조선의 영토는 사방 수천 리였다. 이 몇몇 조건을 고려하면 만조선의 수도는 지금의 한반도에 있을 수 없고, 浿水는 그 서쪽에 있어야 했다.


패수는 위에 나열한 여러 물줄기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고대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확인하면 간단히 풀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복잡해졌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청천강설이나 압록강설을 내세웠고, 요동패수설은 여러 갈래였으며, 두 입장 사이에는 진지한 대화가 부족하다.


답을 얻기는커녕 생각만 더 어지러워졌다. 문헌 속 浿水관련 기록은 산발적이고 단편적인데, 서로 내용이 어긋나기도 한다. 자료의 취사선택과 가설에 따라 해석이 제각각이다.

일제의 관변 사학자들에게는 역사왜곡의 혐의가 있다. 근래 중국은 국가 주도하에 대규모 역사 정리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고고학의 성과는, 본질적으로 왜곡의 가능성이 많은 데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과정을 공유할 수 없는 한계가 있어 악용될 우려가 있다.


역사는 권력 관계의 산물이며 결코 객관적이거나 순수하지 않다.3)

우리는 ① 역사 조건의 변동을 고려하여 기록에 감추어진 시대적 층차를 읽어내야 하는 과제 외에, ② 정치적 의도와 목적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도 살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보다 더 미묘한 문제는 ③ 국 연구자들 사이의 불신과 대화 단절인데, 이는 식민사학 ․ 중화사학과도 연결되어 있으면서, 지식의 공정하고 투명한 유통을 저해하고 있다. 대중의 불신과 더불어 재야 논의의 폭주를 불러온 이유이다.4)


이 세 가지 난관을 헤치고 실상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고대 패수의 위치는 어디인가?”라는 의문이 풀린 것도 아니다.


이에 본고에서는 遼東浿水說의 흐름을 살펴 문제 해결의 범위를 좁히고, 이 문제에 대한 전망 및 제언을 공론에 부치고자 한다. 패수설이 워낙 多岐紛紛하여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논의의 가닥을 잡으려 한다.

째, 浿水가 요동에 있었다는 견해만을 살필 것이다. 이는 아직도 소수의견이다.

둘째, 일본이나 중국 학자의 논의는 배제한다.5)

중국의 사가들은 浿水의 위치와 관련하여 燕秦長城의 東端을 요하와 압록강 유역도 모자라 평양 부근까지 끌어오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6)

셋째, 문헌 사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연구 성과를 검토한다.
아울러 중국의 고고학 성과에 기대고 있는 연구 성과도 살펴볼 것이다.


아래는 이 조건에 맞는 요동패수설을 정리한 것이다.


학설

학자 (발표 연도)

비고

대동강설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 등 대부분의 관찬 사서

水經注의 영향

청천강설

韓百謙, 李丙燾(1933), 류학구(1992)

오강원, 송호정은 두 강을 함께 고려

압록강설

이익, 정약용, 노태돈(1990), 오강원(1998), 송호정(2008)

遼東說

遼東說박지원(1780)

열하일기

淤泥河說

신채호(1926)


渾河說

成海應, 김남중(2001), 서영수(2008), 박준형(2012)


 遼河說 洪汝河(1672) 
 大凌河說 리지린(1963), 崔棟(1969) 북한 학계
 六股河說 최은형(2010) 연변대 석사논문
 高麗河說 정인보(1946) 
 灤河說 문정창(1969), 윤내현 (1986) * 장도빈 


3)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당이 내세우는 슬로건 중 하나는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이다. (김병익 옮김, 문예출판사, 1999, 41,2쪽)

푸코는 “텍스트는 개인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지배담론과 저항 담론의 권력이 충돌하고 교섭한 결과물이며, 텍스트로서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하상복, 「닥터로우의 역사와 문학의 경계 공간」, 『현대영미소설』 11권 2호 (한국현대영미소설학회, 2004)에서 재인용)

4)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학계 밖에서 신랄한 비판이 있어왔다. 최근 간행된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책보세, 2013)는 그 발언의 방식이나 편향성 여부를 떠나 학계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5) 한국 학자들의 요동 패수설만을 검토하는 이유는 논점을 단순화하기 위해서다. 현재 패수 논의에는 너무 많은 조건들이 연루되어 있어, 전문가들도 그 가닥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이고, 이는 패수 담론장에의 참여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 담론의 배타적 독점을 원하는 국가 또는 지식 권력의 의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패수설에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의 영향 심한 상황이어서, 편의적으로 일시 그 간섭을 차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6) 한 예로 李健才, 「公元前3 - 公元前2世紀古朝鮮西部邊界的探討」, 『社會科學戰線』(1998년 5期).



아래 원본 확대 부분



Ⅱ.


패수설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문헌은 6세기 초 酈道元이 편찬한 『水經注』이다.

酈道元은 『水經』의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浿水源出樂浪郡鏤方縣, 流向東南, 過臨浿縣, 東流入海.”는 구절을 의심했다.


당시의 요동에서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는 물줄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본국을 방문한 고구려 사신을 찾아가 당시 패수로도 불리던 대동강의 흐름을 물어 확인하고는 『수경』의 기록을 오류로 간주했다.7) 이 견해는 이후 한국은 물론 중국의 패수 인식을 지배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많은 관찬 사서는 별 비판 없이 패수대동강설을 내세웠고, 17세기 이후에야 패수를 건너 평양에 갈 수 없다는(대동강은 평양 남쪽에 있음) 사실을 깨닫고는 청천강설과 압록강설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7) 『수경주』 권 14. “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爲遠,循遼東故塞 至浿水爲界. 考之今古,於事差謬,蓋經誤證也.”



[1] 확인되는 바로, 우리 역사상 浿水가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은 洪汝河(1620~1674)가 처음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홍여하는 燕나라 장수 秦開가 조선의 서쪽 땅 2000 리를 빼앗고 경계로 삼은 滿番汗을 당시의 遼陽으로, 漢나라 초 조선과 경계로 삼았던 浿水를 요양 서쪽에 있던 물줄기, 요하의 여러 지류 중 하나로 간주했다.


그에 따르면 요동 수천 리와 조선 8도의 땅이 모두 기자조선의 영역이었고, 요양의 옛 이름이 평양이었는데, 뒤에 箕子가 새로 옮긴 수도를 평양이라 칭하면서 대동강도 浿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8)

홍여하의 주장은 기자의 위상을 강조하고 위만을 정통에서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9) 관습적 통념에서 벗어나 고대의 지리 실상에 다가가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홍여하의 주장은 고조선의 영역 변천과 중심지 이동설의 기원인 셈이다.


8) 권 1, 「朝鮮紀下」. “按, 浿水在遼陽省西, 遼河甚衆, 浿水其一也. 遼東數千里, 今八州之地, 舊屬朝鮮, 悉爲箕氏所有. 周末爲燕略取, 置吏築鄣, 秦時空其地, 屬之外徼. 漢興還屬朝鮮, 復以浿水爲界. 東人稱大同, 亦曰浿水. 蓋以平壤本遼陽舊號, 而移稱於箕都故, 浿水亦移稱於大同耳.”

9) 박인호, 「동국통감제강에 나타난 홍여하의 역사인식」, 『퇴계학과 유교문화』54 (2013) 186쪽.



[2] 홍여하 이후 패수요동설은 100여 년이 지나서야 박지원(1737~1805)에 의해 제기된다.

박지원은 1780년 6월 연경 가는 길에 봉황산 아래를 지나며 이곳이 한때 고구려의 평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이를 실마리 삼아 고대사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고구려는 도읍하는 곳마다 평양이라 이름하고 주변의 강을 패수라 일컬었으니, 강역의 변동에 따라 永平, 廣寧, 遼陽은 모두 한때의 평양이었으며, 이와 더불어 浿水가 가리키는 물줄기도 옮겨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세의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의 변동은 고려하지 않은 채, 후대의 강역만을 기준으로 삼아 漢四郡을 압록강 안쪽으로 몰아넣고, 그안에서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 지리를 분배하여 대동강이나 청천강이나 압록강을 패수라 주장하니, 조선의 옛 강역은 싸우지도 않고 절로 줄어들었다고 개탄했다.[朝鮮舊疆, 不戰自蹙]


또 고대사 이해의 관건을 ‘浿水’의 위치 비정으로 파악하여, “옛 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한다. 패수가 정해지면 강역이 분명해지고, 강역이 밝혀진 뒤에야 고금의 사실이 부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0)

특정 시기 패수의 위치를 고증하지 않았지만, 浿水의 고증이 고대사론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浿水가 요동 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견해는 눈부신 성과이다.


10) 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 6월 28일조. 박지원은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가운데, 조선초 金崙의 발언 “(한사군은) 지금 우리나라 안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 영고탑 등의 곳에 있어야 한다.”는 발언을 소개했다. 이로 보아 일찍부터 이런 의견들이 개진되었는데, 기록이 일실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3] 한 세대 후배로 박지원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成海應(1760~1830)도 고조선과 고구려의 浿水가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한 학자였다. 그는 한나라 시대의 패수와 당나라 적 패수를 분별하고, 후자는 평양의 대동강을 가리키는 고정된 이름이었지만 한나라 시절의 패수는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의 논리는 간결하다. 『사기』, 「조선열전」의 기사를 분석하면, 당시 지리공간의 구도가 서쪽에서부터 遼東故塞- 浿水- 秦空地- 朝鮮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① 燕秦의 요새는 압록강을 넘지 못했는데 漢나라가 압록강을 지나 대동강을 요새로 삼을 수는 없었고, ②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도읍하는 것도 말이 안되며, ③ 涉何가 조선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해응은 酈道元이래의 평양대동강설을 간단하게 부정했다. 일부에서 제기한 압록강설도, 압록강은 馬訾水로 한나라 이래로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간단하게 일축했다.


그렇다면 한나라 시절 패수는 어떤 물줄기인가?

성해응은 ① “연나라 장수 秦開가 조선의 서쪽 땅 2천여 리를 빼앗고 滿番汗으로 경계를 삼았다.”(『魏略』), ② “番汗은 沛水라 하는데, 요새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한서·지리지』에 대한 顔師古의 주석), ③ “연나라 때 眞番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史記·朝鮮傳』),

이에 대한 세 주석 “玄菟는 본디 眞番國이다.”(應劭), “요동에 番汗縣이 있다.”(徐氏), “패수는 요동 요새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낙랑현에 이르러 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正義), ④ “조선과 연은 溴水를 경계로 삼았다.”(『魏略』) 는 네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다음의 명제를 도출했다.


“滿潘汗은 番汗이고, 番汗은 眞番이며, 眞番에 浿水가 있었는데 沛水나 溴水라고도 하였다.”

나름대로 여러 문헌 근거를 토대로 浿水가 당시 요동 지역에 있었음을 추리한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漢代의 패수는 『水經』의 小遼水, 즉 酈道元이 주해한 渾河로 비정했다.11)

성해응의 浿水渾河說은 그 가부를 떠나, 역사의 변동을 고려하고 여러 단계로 사료를 재구하여 추리하여 특정 물줄기를 패수로 비정한 것은 패수론의 진전이랄 수 있다.


11) 이 견해는 「浿水辨」(『硏經齋全集』 권 15)에서 논증되었고, 趙羲卿과 역사지리를 문답하는 가운데도 피력되었다.(권 13, 「答趙雲石羲卿書」)



하지만 성해응 이후로 100년이 지나도록 주목할 만한 패수요동설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여하, 박지원, 성해응의 견해가 일제 식민사학이 등장하기 전, 한국의 역사 해석이 식민사학이라는 작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시기 이전의 성과라는 점이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지식인들은 酈道元을 비롯한 중국 사가들의 관점을 의심 없이 내면화하였다.


이러한 인습이 팽배해 있던 시절, 보편의 견해를 의심하고 기록의 오류를 발견하여 그 이면에 숨은 실상을 통찰하려 한 것은 편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정신의 발현이다.

이들이 있음으로써 오늘의 패수요동설은 편협한 국수주의나 자국중심주의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패수에 대한 논의가 답보 상태에 있는 사이 조선은 국권을 상실했고, 학문의 조건도 일변했다. 그 사이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조선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했다.

고대사 연구에는 이제 단순한 사실 관계를 밝히는 차원을 넘어, 민족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미래와 전망을 설정하는 과제가 부과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절대적인 물력의 부족과 제도적 결함을 개인 능력과 정신력으로 메워야 했고, 그 결과는 제도권 안에서 과학적인 학문 성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패수요동설은 신채호(1880~1936)와 정인보(1893~?)에 의해 산출되었다.


[1] 신채호의 패수설은 전통 학문에서 근대 학문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비중을 따지면 전통 학문의 성향이 더 높아 보인다. 신채호는 고고학에는 문외한임을 자인하고, 또 거기에는 정치적 목적이 작용할 수 있음을 의심하여 아예 논거로 삼지 않고 문헌사료만을 검토하였다.


그가 설정한 패수설의 대전제는 박지원의 그것과 비슷하다. 고대 한국에서는 시대에 따라 지명이 옮겨 다녔는데, 平壤과 浿水는 언제나 짝을 이루었기 때문에, 두 지명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 하였다.

지금의 ‘평양-패수(대동강)’는 가장 마지막의 위치이기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가지고 전대 즉 ‘제1의 평양-패수’까지 덮어씌워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 검토한 결과 그가 내린 기원전 3,2세기의 평양-패수는 海城-蓒芋濼이었다.12)


燕나라가 조선 땅 2천리를 빼앗고 경계로 삼은 滿番汗(『위략』)과 역시 연나라가 장성을 쌓았다는 襄平(『사기』, 「흉노열전」)을 遼陽으로 간주하고, 漢나라가 여기서 물러나 浿水를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사기』,
「조선열전」)을 근거로, 요양 서쪽에서 浿水를 찾은 결과이다. 蓒芋濼은 현재 淤泥河로 일컬어지는, 海城과 蓋州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물줄기이다.13)


12)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평양패수고」(1929)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丹齋申采浩全集(中)』, 형설출판사, 1992, 45~67쪽]
13) 『遼史』, 「지리지」에는, 蓒芋濼水는 당시의 淤泥河이고 浿水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으며, 이 기록은 명청대에 간행된 여러 지리지에도 나와 있다.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신채호는 이들 기록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淤泥河는 청대 소설 『說唐後傳』에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곳으로 설정된 곳으로, 여기서 「淤泥河」란 경극이 파생되기도 하였다.



신채호는 패수설을 전개하면서, 김부식에서 정약용에 이르는 조선 사가들의 여러 견해를 검토하였지만 애초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역사의 실상에 다가갈 수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실상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열거한 문헌 중에 『열하일기』가 들어있다. 선인의 학설 중 유일하게, 浿水와 沛水는 지시 대상이 같은 명칭으로 요동에 있었다는 남구만의 견해를 인정했다.


남구만(1629~1711)은 浿水에 대한 여러 기록을 소개하는 가운데 遼東郡番汗縣에 있다는 沛水(『한서』, 「지리지」)와 『사기』, 「조선열전」의 浿水는 같은 것으로 요동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밝혔다.

어지러운 여러 견해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는데,14) 옛날 조선의 강물은 모두 ‘浿’라 불렀다는 책을 읽었다는 마지막 발언이 신채호에게 직관적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박지원의 견해는 신채호의 그것과 매우 근사해 보이는데, 부정적으로 평가한 데에는 기억이 흐릿했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신채호의 학설은 매우 과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하지만, 한편 그 전제와 논조가 다분히 주관적으로 흐른 경향도 있는데,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참고할 만한 학설중의 하나 정도로만 간주되고 있다.15)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는 관습적 통념뿐 아니라 식민사학과도 맞서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처했고, 크게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절박함도 안고 있었다. 물리적인 절대 열세의 상황, 중과부적의 형세, 정신의 과도한 절박함 등의 조건은 투쟁적이고 격앙된 어조를 낳았다.

이는 다시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강경투쟁론자의 이미지와 결합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채호의 독립운동가의 면모가 크게 부각된 대신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은 약화되었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존중되었지만, 그의 학문 성과는 강단사학계에서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외면당했고, 대신 재야 사학 쪽에서 각광을 받아왔다. 신채호 패수설의 탄생 배경이고 오늘의 위상이다.


14) 『약천집』 권 29, 「東史辨證, 浿水」. “諸書之錯亂如此, 誠難決定一處. 余昔時曾見一書, 云朝鮮之水皆稱浿, 猶中國北方之水稱河, 南方之水稱江. 今忘其書名, 不能更考, 而此言稍有理可通. 姑記之以俟知者.”
15) 여기에는 淤泥河가 요동반도 서쪽에 치우쳐 있는 작은 물줄기로 그 위치나 규모가 두 나라의 국경이 될 수 없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발표자 또한 어니하는 패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정인보의 패수설은 신채호의 그것에 비해 어조가 한결 담담하고 차분하면서 논거의 활용과 논리의 전개가 정교하다. 그리고 짧은 분량으로 많은 사실을 밝혔다. 정인보는 패수론의 맥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는 패수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遼東과 遼水를 알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또 후대의 大遼水와 小遼水를 논하기에 앞서 古遼水와 今遼水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전제했다.16)


『史記』의 여러 기록이 한입으로 燕秦장성이 동쪽으로는 遼東에서 끝남을 증언하고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燕秦장성의 東端이 산해관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오랜 상식이었고,17) 漢나라 초에는 이 요동의 옛 요새를 수축하고 그 동쪽의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삼은 게 분명하니, 당시 요동은 산해관 서쪽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동의 범위를 산해관 서쪽으로 잡아놓은 뒤에는, 『通典』과 『水經注』와 『晉書』의 기록에서 遼水가 孤竹지역을 흘렀던 물줄기임을 확인하고, 이를 지금의 灤河로 비정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위만조선 멸망 전까지 燕秦漢시대의 遼東(郡)은 난하 동쪽 지역의 명칭이었는데, 漢族세력이 동진함에 따라 지금의 遼河동쪽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遼東동쪽에 있던 浿水는 어디인가?

정인보는 沛水와 浿水를 다른 물줄기로 보았다. 그리고 『水經注』의 浿水는 沛水가 되어야맞고, 『한서』, 「지리지」의 ‘遼東郡番汗’의 沛水에 대한 주석의 “西南入海”에서 西는 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수경주』의 “浿水源出樂浪郡鏤方縣, 流向東南”에 나오는 鏤方이 발해시대의 紫蒙縣(지금의 朝陽)임을 고증하고, 조양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은 大凌河임을 밝혔다. 沛水(=大凌河)는 한때 燕과 秦의 계선이었던 셈이다.


16) 『수경주』에서는 대요수와 소요수를 각각 오늘날의 遼河와 渾河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정인보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한족의 세력이 동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17) 최근 중국은 고고학의 성과를 내세워 연진 장성의 동단을 요하 유역, 압록강 유역, 심지어는 대동강 부근까지 확장하였다. 연진 장성의 동단은 패수는 물론 고조선의 강역, 한사군의 위치 등 고대사의 강역을 추리하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근거이다. 중국의 고고학 성과는 제한적이고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 때에는 이 계선이 한층 서쪽의 浿水로 옮겨지는데, 정인보는 산해관 근처의 高麗河18)를 이 패수로 비정했다. 고려하를 패수로 비정함에는, ‘高麗’라는 명칭과 함께 그 특유의 어석을 근거로 하였다.19) (어석 설명 약) 정인보의 해석은 많은 부분 리지린 연구의 선구가 될 정도로 과학적이지만, 사료의 글자를 임의로 바꾸거나, ‘高麗’라는 지명을 근거로 삼는 태도는 비합리적고 감상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어석 또한 설득력이 약하여 학문적인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밖에 일제강점기에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고조선의 영역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은 통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고조선의 서쪽 변계를 灤河로 비정하였는데, 막상 고조선 강역론에서 핵심이 되는 浿水와 汕水를 대동강과 그 상류로 봄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졌다.20)


18) 高麗河는 문헌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綏中지나 沙河鎭과 前衛鎭사이에 狗(兒)河(연행록에는 口魚河로도 기록됨)가 흐르고 이 근처에 狗河城子에는 성의 토벽이 남아있다. 명대의 성이 분명한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지금도 高句麗城으로 전승되고 있다.(2014년 1월 현장답사에서 인터뷰한 내용) 정인보가 말한 高麗河는 狗兒河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19) 『조선사연구 (상)』(서울신문사, 1946) [『정인보전집』 제 3책 (연세대출판부, 1983), 86~95쪽]
20) 장도빈은 『朝鮮歷史要領』(1924) 『朝鮮歷史大全』(1928), 『국사개론』(1954) 등에서 일관되이 고조선의 서북 변계를 난하로 비정하였으나, 『國史講義』(1946)에서는 浿水와 列(洌)水를 대동강으로 규정하여 의문을 남겼다.
장도빈의 저술은 『汕耘張道斌全集』(시사문화사, 1982)에 실려 있고, 저술의 시기는 박인호, 「산운 장도빈의 고구려 인식」, 『중앙사론』30 (2009)에서 확인.



이 시기 패수요동설은 주로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개진되었다.
신채호와 정인보의 경우처럼 어느 정도 과학적인 논증 방식을 갖춘 글도 있지만 드물었으며, 신채호와 정인보도 비과학적이라는 혐의를 완전히 벗겨내지 못했다. 이들은 비주류였다. 같은 시기 제도권 안에서는 충분한 물력과 제도의 지원을 받는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는 주로 대동강설이나 청천강설이 주장되었고, 이러한 학설은 체계적으로 전승 확장되었다.



Ⅳ.


해방 이후 대동강이나 청천강, 압록강이 패수라는 학설은 제도권의 학계 안에서 별 의심 없이 계승되었고, 교육을 통해 파급되었다. 여기에는 王儉城과 平壤, 漢四郡의 위치 등이 함께 연동되었다.

제도권 밖에서는 꾸준히 요동패수설이 제기되었지만 제도권의 공고한 체계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현대 학문의 과학적 태도와 논리적 분석으로 무장한 고조선 연구가 보고되었고, 요동패수설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 요동패수설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학자는 북한의 리지린이다.
리지린은 일제 식민사학의 불온성, 중국의 대국주의사학의 오만함, 그리고 고고학 연구의 자의성을 극복하기 위해 정교한 사료 비판이라는 무기를 선택했다. 그는 최대한의 중국 사료를 분석의 도구로 삼았고, 고고학의 성과는 보조 자료 이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모든 역사서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그 내용을 섣불리 부정하거나 변개하지 않았다. 고조선의 강역을 연구함에 있어 리지린의 최종 목적은 王儉城의 위치였고, 이를 밝히기 위해 먼저 『산해경』 을 기초로 고조선의 위치를 대략 발해 북단으로 잡고, ‘朝鮮’의 어원에 대한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사기』,「조선열전」에 대한 張晏의 集解)에 나오는 濕水, 洌水, 汕水가 모두 고대 灤河와 관련된 물줄기임을 고증했다. 다음에는 고조선의 영역 변동을 검토하고, 이어서 遼水와 浿水를 논증했다.

먼 데서부터 차츰 논점을 왕검성으로 좁혀 들어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패수를 알기 위해 遼水를 먼저 공략한 것은 정인보의 방식과 똑같지만, 훨씬 많은 방증 자료를 동원하여 해석의 정확도를 높였다. 遼水외에, 燕秦長城의 東端부근에 있는 것으로 여러 사료에 나오는 襄平, 遂城, 碣石(山), 遼東(郡), 肥如(縣) 등의 지명을 다단계로 고증하여, 漢初의 요동은 右北平(永平)에서 灤河동쪽에 걸친 지역이었으며, 당시 遼水는 灤河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한반도의 여러 강들 중에서 동남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水經注』의 패수 관련 기록을 오류로 간주하였지만, 리지린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22자 기록 “浿水源出樂浪郡鏤方縣, 流向東南, 過臨浿縣, 東流入海.”을 분석한 다음의 이유를 들어 패수는 대릉하라고 주장했다.21)

① 요동에서 동남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다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대릉하 외에 없다.

② 대릉하의 옛 이름은 白狼水(báiláng)인데, 浿水(pèi)와 발음이 유사하다. 이두로 읽을 경우 白狼과 樂浪(부루나)의 발음이 유사하다.

③樂浪鏤方縣은 후대의 紫蒙縣인데(『요사』, 「지리지」 2, ‘東京道’), 顧炎武가 『당서』, 「지리지」에서 인용한 “平州有紫蒙․白狼․昌黎等城, 蓋平州之境, 契丹之南界也.”(「營平二州記」)에 따라 紫蒙이 昌黎와 廣寧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 논리가 성근 부분이 있긴 하지만, 추론 과정이 정밀하고 논거도 풍부하여 패수설의 새 지평을 연 결과로 평가할 만하다. 참고로 리지린이 비정한 王儉城은 요동반도 북쪽의 蓋平(蓋州)이다.


리지린의 요수난하설과 패수대릉하설은 그 접근 방식이나 결론이 상당부분 정인보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없어 의아스럽다. 또 리지린의 연구가 그 성과에 비해 한국 학계에서 인용되는 빈도가 낮은 점도 의문이다.


21)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는 1963년 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89년 열사람출판사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요수와 패수 등에 대한 논의는 제 1장 「고조선의 력사 지리」(11~96쪽)에 실려 있다.



[2] 이후 패수요동설은 한동안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리지린에 대한 동조는 물론 전면적 반론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러한 국면을 깬 연구자는 윤내현이다.

윤내현은 1983년 「箕子新考」를 필두로 고조선에 관한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했고, 이는 1994년 900쪽에 이르는『고조선 연구』로 집성되었다.

패수에 대해서는 이 책의 3장 2절 ‘고조선시대의 浿水’에서 집중 논의되었다.

윤내현의 연구는 리지린의 성과를 안고 출발했는데, 그보다 영역이 넓고 논거가 풍부하다.


윤내현은 패수 관련 자료 총람하고, 고조선 국경의 패수를 비정하기 위해 두 가지를 전제한다.

① 고조선시대의 패수여야 하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키는 사료를 분석한다.

②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지역에 있는 패수여야 한다.

遼水분석을 통해 한나라 초 遼東郡은 灤河하류 유역에 있었음을 입증하고, 여기서 番汗縣또한 이 일대에 있었음을 이끌어냈다. 당시 番汗縣은 요동군에 속해 있었고(『한서 ․ 지리지』), 이에 대한 주석에서 應劭는 汗水를 소개했는데, 汗水는 濡水의 한 지류였기(『수경주』) 때문이다.

滿番汗을 난하 유역의 遼東郡소속으로 본 것은 윤내현패수설에서 매우 중요하다. 燕나라가 조선과 경계로 삼은 滿番汗을, 한나라는 더 서쪽으로 끌어와 浿水로 삼았기 때문이다. 浿水는 滿番汗경내를 흘렀던 濡水(汗水, 遼水, 灤河) 동쪽에 있을 수 없다. 이를 토대로 윤내현은 浿水를 난하로 규정하였다.22)

遼水는 浿水이면서 오늘날의 灤河가 되는 셈이다. 윤내현은 패수난하설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대 제가의 설을 비판하는데, 특히 이병도와 노태돈(1990)의 청천강설이 집중 과녁이 되었다. 하지만 이 비판에 대한 반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한편 윤내현은 정황상, 그리고 접근 방법과 해석의 과정에 있어 리지린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방대한 책에서 리지린의 연구성과가 거론된 것은 단 4차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윤내현은 표절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2) 윤내현, 『고조선연구』(일지사, 1994).



[3] 윤내현 이후의 본격적인 패수요동설은 2010년 최은형에 의해 이루어졌다.23)

최은형은 연구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酈道元이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본 뒤에 내세운 패수대동강설의 허위성,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출토 유물을 앞세워 청천강설을 주장한 이병도와 송호정, 그리고 부분적인 논거로 패수한반도설을 주장하는 일본과 중국 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사기』와 『수경주』의 기록을 패수설 도출의 양 축으로 삼았다.


최은형의 견해가 특별한 것은 『수경(주)』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이 책의 권 14에는 濕余水, 沽水, 鮑句水, 濡水, 大遼水, 小遼水, 浿水가 소개되어 있다.

浿水는 낙양 기준으로 동북쪽의 맨 마지막 강. 조선과의 국계였기 때문에 이 너머의 강은 기술하지 않은 것이다. 이중 濕余水는 북경 동북쪽의 溫楡河, 沽水는 白河의 상류, 鮑句水는 潮河로, 濡水는 灤河로 비정함에 별 이론이 없다. 북경 위도를 기준으로 이들 강 사이의 거리는 160km 정도이니 강 사이의 거리는 대략 50km 남짓이다. 그런데 灤河와 遼河사이의 거리는 가장 가깝게 이어도 400km가 넘는다.

酈道元의 주석대로라면 기술의 균형이 맞지 않을뿐더러, 그 사이의 비교적 큰 강들인 靑龍河, 六股河, 煙臺河, 興城河, 小凌河, 大凌河, 羊腸河, 柳河 태자하, 압록강이 빠진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최은형은 대요수에 대한 기록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수경』에서 大遼水에 대한 설명은 “塞外衛皋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부터 흘러 요새로 들어가, 요동 襄平縣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房縣서쪽을 지나고 다시 동쪽으로 安市縣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로 간추릴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襄平縣이다.

정인보까지는 별 의심 없이 襄平을 오늘의 遼陽으로 간주했지만 그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최은형도 “襄平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후한서』권 74하, 「袁紹劉表列傳」의 注) 등 몇몇 기록을 근거로 한 대 양평의 치소가 盧龍(右北平, 永平) 일대이며, 이 부근을 흐르는 강은 灤河임을 도출했다. 여기서 최은형은 종래의 濡水灤河說을 부정하고 유수는 還鄕河로, 소요수는 靑龍河로 비정했다. 청룡하는 동북쪽에서 발원하여 노룡현 부근에서 난하에 합류하는 물줄기이다. 그리고 『사기』, 「조선열전」의 분석을 더하여, 당시 한나라의 동북쪽 마지막 강이자 조선과의 경계였던 패수를 六股河24)로 비정했다.


최은형의 주장은 논리가 다소 소루하고 安市縣등 풀어야 할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패수를 정면으로 문제 삼아, 기존의 논의에서 놓친 몇몇 사실들을 거두었고, 요동패수설의 지평을 확대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23) 崔恩亨, 「浿水問題新考- 以漢與衛滿朝鮮國界之浿水爲中心」, 延邊大석사학위논문, 2010.

24) 조선 전기에는 六州河, 후기에는 六渡河로 일컬어졌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綏中縣을 지나 발해로 들어가는 물줄기이다.



Ⅴ.


지금까지 살펴본 요동패수설 중에서 한국 제도권 학계에서 제출된 것은 윤내현의 연구가 유일하다. 그렇다면 윤내현 외에 현재 한국 학계에서의 패수론은 없는가? 많지는 않아도 꾸준히 펼쳐지고 있다.

국회도서관에서 ‘패수’로 검색된 논문은 노태돈(1990), 오강원(1998), 송호정(2008),서영수(2008), 박준형(2012) 다섯 편이고, 김남중(2001)은 다른 경로로 찾은 논문이다.


이 여섯 편은 모두 나름대로 패수의 위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 중 노태돈, 오강원, 송호정은 청천강설을 기본으로 압록강도 고려에 넣었고, 김남중, 서영수, 박준형은 모두 패수를 渾河로 규정하고 있다.

이 중 노태돈과 그 원류에 해당하는 이병도의 학설은 윤내현에 의해 조목조목 비판되었으므로 생략하고, 나머지 다섯 편 논문을 간략하게 검토하여 패수설의 전체 구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1]  오강원은 20쪽의 논문 중에서 10여 쪽을 제설의 검토에 할애했다.25)

대동강설에 대해서는 별 논평을 하지 않았고, 압록강설과 청천강설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반면 리지린의 대릉하설은 간략하게 과소평가했고, 윤내현의 난하설은 燕秦長城의 요하 유역 阜新縣(의무려산 북쪽)에 이르렀다는 중국 고고학계의 연구 성과를 들어 부정했다. 패수론의 대전제로 한중일 학계의 유력 견해는 청천강설과 압록강설임을 내세웠다.


그 공통 근거는 다섯 가지이다.

① 연진 장성의 동단은 요하 중류 유역까지 이르렀다.

② 燕秦漢代遼東郡은 현재의 요동 지역과 일치한다.
③ 기원전 4~2세기 청천강을 경계로 고고문화상이 확연히 구별된다,

④고고학 발굴 성과로 보아 낙랑군 조선현은 현재의 평양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⑤ 洌水는 현재의 대동강이다.

이중 ②와 ⑤에 있어서는 리지린과 윤내현의 방대하고 체계적인 문헌 고증을 아예 무시하였다. 뚜렷한 논거 없이 酈道元의 견해를 지지하고, 『한서·지리지』의 沛水에 대한 설명은 맞고, 『水經』과 『說文』의 浿水관련 기록을 오류로 단정했는데, 그 유일한 근거는 고고학의 성과이다.


그는 소위 한중일 학계를 내세워, 遼東外徼와 長城東端의 위치를 정해두고 거기에 사료를 끼워 맞추었다. 이 논문의 결함은 사료 비평의 불성실성과 비과학성이다.


25) 오강원, 古朝鮮의 浿水와 沛水, 강원사학 13․14 (1998)



[2] 송호정은 출발부터 고고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26) 오강원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고고학 성과를 기준으로 문헌 기록을 재단한다. 이를테면 한초 遼水와 襄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인보와 리지린과 윤내현이 자세히 고증하였지만, 논박이나 새로운 고증 없이 지금의 遼河와 遼陽으로 규정하였다.


燕秦長城동단의 위치는, 長城유적에 대한 연구 성과를 들어 너무도 간단하게 遼河유역으로 단정하였다. 하지만 논거로 제시한 劉謙(1982)과 馮永謙(1996)의 논문은 모두 명나라 때 축조한 邊牆(중국학계에서의 이른바 明長城) 관련 연구 성과이다. 설사 명나라 변장 관련 연구 성과가 아니더라도, 중국의 고고학 성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고고학적 해석으로 사료 해석을 재단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선행 연구 업적에 대한 진지하고 세심한 검토를 생략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26) 송호정, 「古朝鮮의 位置와 中心地문제에 대한 고찰」, 『韓國古代史硏究』58 (2010)



[3] 선행 연구 성과를 검토하지 않고 고고학의 성과로 지리를 비정하는 성향은 패수혼하설을 주장한 김남중, 서영수, 박준형의 연구에서도 반복된다.


서영수는 27쪽의 논문 중 태반은 『사기』의 체제 및 고조선 관련 내용 소개에 할애했는데, 이는 이 분야 연구자에게는 기초적인 사항에 지나지 않는데, 해석도 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패수에 대해서는 80, 81쪽에서 다루었는데, 달랑 「泉南産墓誌」에 근거하여 간단하게 渾河로 비정하였다.

 하지만 「泉南産墓誌」는 위만조선 멸망 후 800년이나 지나서 지어진 것이니 사료 적합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논증의 과정 없이 주장만 내세워 설득력이 없다.27)


김남중은 선행 연구 성과는 조금도 참고하지 않고, 襄平布의 출토 유물을 근거로 遼東郡의 동단을 遼陽일대로 잡고, 碣石과 遼水의 위치 또한 논증을 생략한 채 遼河부근으로 보아, 燕秦시기 조선은 천산산맥 동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를 토대로 그 서쪽에 있는 渾河를 패수로 비정하였다.28) 박준형 또한 중국의 고고학 성과에 무비판적으로 기대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燕秦長城의 동단이 요하 선까지 나타나고 요동군의 치소가 襄平(遼陽)이었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패수를 요하 이서 지역의 대릉하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런 점에서 패수를 대릉하서쪽에 있는 난하로 보기 힘들다.”고 단언하였는데, 이 발언의 근거는 서영수와 이형구의 논문이다.

여러 세대에 걸친 연진 장성의 동단과 양평의 위치에 대한 방대한 고증은 ‘고고학적 성과’라는 단 한 마디로 폐
기처분되고 만다.29)


27) 서영수, 「『史記』 古朝鮮史料의 構成분석과 新解釋1」, 『단군학연구』 18 (2008)
28) 김남중, 「衛滿朝鮮의 領域과 王儉城」, 『한국고대사연구』22 (한국고대사학회, 2001).

29) 박준형, 「기원전 3∼2세기 고조선의 중심지와 서계의 변화」, 『史學硏究』108 (2012)



표에서 보다시피 국내의 제도권 사학계에서도 점차 요동패수설이 지지를 받아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문헌 사료를 일견만 해도 위만조선 시기 패수는 압록강 안쪽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고학의 성과로 강역이나 지리를 비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절에서 살펴본 연구들은 지나치게 고고학의 성과에 기대고 있음에 반해, 문헌 사료 연구의 방대한 성과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고고학 성과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칫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 중심의 사관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



Ⅵ.


지금까지 한국에서 전개된 요동패수설의 대략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요동패수설은 대략 3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셈이다. 하지만 여러 학설들은 불규칙하게 산포되어 있고 서로 단절되어 있어 계보를 형성하지 못한다. 근대 이전은 그렇다 해도, 정인보는 신채호를 인용하지 않았고, 리지린은 정인보를 거론하지 않았으며, 윤내현은 리지린과의 대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채호와 정인보의 견해는 그 과학성과 현대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재야사학의 성과로 간주되었다. 리지린의 학설은 거의 인정받지 못했으며,리지린과 윤내현 사이의 학문적 영향 관계는 가려져 있고, 윤내현의 성과는 국내 학자들에게 있어 진지한 검토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 삼중의 불신과 단절 속에서 패수 관련 지식은 정상적으로 유통되지 못했고, 이는 재야 담론의 양산을 불러왔다.


현재 패수론과 관련하여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관련 연구자들 사이의 진지하고 성실한 학문적 대화이고, 이를 통해 연구자들 사이는 물론 대중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박지원과 신채호의 문제의식에는 지적 흐름이 있고, 리지린은 정인보에게서 학문의 실마리를 얻은 것이 분명하다. 윤내현은 리지린의 성과를 낱낱이 반영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서영수와 오강원과 송호정 등이 패수를 거론하면서 리지린과 윤내현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우회한 것은 작게는 개인의, 크게는 우리 학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자해 행위나 다름이 없다.

혹 일부의 연구자들이 배타적으로 내부 결속만을 도모한다면 신뢰도는 바닥나고, 대중들은 스스로 지식을 산출하고 담론을 형성하려 할 것이다. “人必自侮然後, 人侮之.” 다채롭고 역동적인 대화가 결여된 학문 영역에는 불량 지식들만 부유하게 된다.


역사 해석과 기술에는 정치보다 더 정치적인 속성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패수를 해석하기 위해 걸러내고 극복해야 하는 정치적인 요소들이 가중되었다. 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은 엄존하고, 중국 고고학의 성과는 중화사관의 조종 아래 물량 공세를 펴고 있는데, 학맥과 파벌에 의한 학문 왜곡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본고는 패수설에 대한 일종의 메타 논의이다.


다종다기한 패수설 중에서 한국 학자들이 제기한 요동 패수설만을 논의한 것은, 역사 해석에 작동하는 정치권력의 의도를 최대한 배제하여 논점을 간략하게 하고 싶었고, 또 그 안에 진실의 근사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패수설은 제각각으로 어지럽기 그지없다. 진지한 학문적 대화를 통해 지식의 형성과 유통이 역동적인 패수설의 계보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고대 패수의 후보로 거론된 강의 물줄기.


<참고문헌>-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