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韓民族의 起源과 中心勢力
尹 乃 鉉 ( 檀國大學校大學院 院長) 2004-12-06
목 차
1.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지난날의 견해
2. 지난날의 견해가 지닌 문제점
3. 한민족의 기원지와 중심세력
Ⅰ.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지난날의 견해
그간 한민족에 대한 한국사 학계의 통설은 한민족은 濊・貊族과 韓族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盧泰敦, 「한국민족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적 고찰」 ꡔ韓國古代史論叢ꡕ 제1집,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1, p.10. 한민족의 구성을 濊・貊族과 韓族으로 본 것은 일찍이 那珂通世(「貊人考」 ꡔ史學雜誌ꡕ 5-5, 1894, p.34), 白鳥庫吉(「穢貊た果くて何民族と見做すべきか」 ꡔ史學雜誌ꡕ 44-7, 1933, p.103)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제출되었는데Hulbert(Hulbert's History of Korea, 1, p.32)나 臺灣의 芮逸夫(「韓國古代民族考略」 ꡔ中韓論文集ꡕ 一, p.39) 등도 이를 따랐다.
한민족의 구성을 그렇게 본 것은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에는 북부에 古朝鮮・扶餘・高句麗・東濊, 남부에 韓(三韓) 등이 독립해 있었을 것으로 본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북부에 있었던 여러 나라는 濊・貊族에 의해서 건국되었고 남쪽의 韓은 韓族에 의해서 건국되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이유 때문에 북쪽의 濊・貊族은 북방의 대륙족이고 남쪽의 韓族은 남방의 해양족일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북쪽의 濊・貊族에 대해서는 濊貊을 하나의 종족명으로 보는 견해와 濊族과 貊族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金貞培, 「濊貊과 濊와 貊」 ꡔ韓國民族文化의 起源ꡕ, 高麗大學校 出版部, 1973, pp.15~35 참조.
그런데 한국사에서 가장 일찍 등장한 나라는 고조선인데 고조선의 주민이 濊・貊族일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濊・貊族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濊・貊族의 기원이나 성격에 대해서 그간 학계에 비교적 크게 영향을 끼친 한국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崔南善은,
要하건데 黑海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파미르의 동북 갈래인 天山山脈으로 하여 알타이山脈・사얀山脈・야블로노이山脈을 따라 다시 남으로 轉하여 興安山脈・大行山脈 이동이 地, 朝鮮・日本・琉球를 包括하는 一線에는 park 中心의 信仰・社會組織을 가진 민족이 분포하여, 그 種族的 關係는 且置하고 文化的으로는 확실히 一連鎖를 이루고 있었다. 崔南善, 「不咸文化論」 ꡔ六堂 崔南善全集ꡕ 2, 玄岩社, 1973, p.75.
고 하여 위의 지역이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밝>을 <白>, <不咸>이라 하여 <不咸文化論>을 주장하고 위의 지역을 不咸文化圈으로 설정하였다. 윗 글, 「不咸文化論」, pp.43~76.
최씨의 不咸文化論은 위 지역에 거주했던 민족들의 상호관계보다는 문화적인 면을 밝힌 것이었지만 후에 한민족의 기원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로 하여금 위의 지역을 한민족의 기원과 연결시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申采浩는 한민족은 동쪽으로 이주해 왔음을 주장하면서, 인류의 발원지에 대하여 (甲) 파미르고원 (乙) 몽고사막이란 양 설이 있는 바 아직 그 시비가 확정되지 못하였으나 옛 언어를 참고해 보면 왕의 성을 해(解)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하였고 왕호를 불구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光輝에서 뜻을 치하였으며 천국을 환(桓國)이라 한 것은 광명에서 뜻을 취하였으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不咸山(지금의 白頭山)을 明月이 출입하는 곳ꠏꠏ광명신의 棲宿으로 알아 그 부근의 땅을 조선이라 칭하니 조선도 옛 말에서 광명이라는 뜻인데 조선을 후세에 吏讀字로 <朝鮮>이라 썼다고 하였다. 申采浩 著・李萬烈 註釋, ꡔ朝鮮上古史ꡕ, 螢雪出版社, 1983, p.104.
孫晋泰는 한민족은 몽고인종(황색인종)의 여러 종족 가운데 퉁구스족에 속하는 바 만주・시베리아 종족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孫晋泰, ꡔ朝鮮民族史槪論ꡕ -朝鮮文化叢書 11-, 乙酉文化社, 1958, pp.17~19.
, 李丙燾는 한민족의 근간을 濊・貊族으로 보고 濊・貊族은 만주족・몽고족・토이기족 등 우랄알타이어계의 공동조상에서 분파된 일족이라고 보았다. 李丙燾・金載元, ꡔ韓國史ꡕ -古代篇, 乙酉文化社, 檀紀 4292, p.10.
金廷鶴도 종래에 한민족을 퉁구스족으로 본 견해에는 아무런 학문적 근거가 없다면서 이를 부인하고 濊・貊・扶餘・高句麗 등의 한민족은 挹婁・勿吉 등의 퉁구스족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민족은 체질의 특징이나 언어・풍속 등 기본문화에 있어서 만주족・몽고족 등 알타이족에 가장 가까워 북방아시아에 연결되기 되기 때문에 한민족은 알타이족의 한 支派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출하였다. 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韓國民族」 ꡔ白山學報ꡕ 第1號, 1966, p.148.
金庠基는 濊・貊族의 이동과정을 구체적으로 논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북부 변경으로부터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았다. 상고시대에 東夷系의 종족은 중국의 변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줄기는 중국의 산동 방면으로 내려가 嵎夷, 萊夷, 淮夷, 徐戎 등이 되었고 다른 한줄기는 만주・한반도로 내려와 濊・貊・韓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金庠基, 「韓・濊・貊移動考」 앞 책 ꡔ東方史論叢ꡕ, pp.355~368.
金貞培는 한반도에 거주했던 신석기시대인들과 청동기시대인은 각각 다른 종족이었다고 보고 신석기시대인들은 시베리아에 널리 거주했던 古아시아족이며 청동기시대인들은 濊・貊族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앞 책, ꡔ韓國民族文化의 起源ꡕ 참조.
그는 신석기시대의 세김무늬질그릇과 곰숭배사상은 시베리아의 고아시아족의 문화인데 壇君神話에 보이는 곰토-템사상도 고아시아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金貞培, 「檀君朝鮮과 古Asia族」 윗 책 ꡔ韓國民族文化의 起源ꡕ, pp.161~179.
그리고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에는 중국의 산동성으로부터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濊・貊族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바로 민무늬질그릇을 사용했던 사람들로서 그전의 거주민인 古아시아인들을 누르고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보았다. 윗 책, ꡔ韓國民族文化의 起源ꡕ, pp.210~213.
金氏는 濊・貊族이 사용했던 청동기문화는 시베리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濊・貊族의 문화도 시베리아와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였다. 金貞培, 「韓國의 靑銅器文化」 앞 책 ꡔ韓國民族文化의 起源ꡕ, pp.106~159.
따라서 金貞培는 한민족은 古아시아족과 濊・貊族(韓族 포함)이라는 두 종족의 복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金元龍은 한반도와 만주는 구석기시대가 끝난 후 사람이 살지 않은 공백기가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되다가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신석기시대가 개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金元龍, ꡔ韓國考古學槪論ꡕ, 一志社, 1966, p.15.
ꠏꠏꠏꠏꠏꠏ, 「韓民族의 形成과 先史時代」 ꡔ韓國學入門ꡕ, 大韓民國學術院, 1983, p.8.
신석기시대의 주민들은 시베리아지역에서 들어온 古아시아족이었는데 후에 만주와 한반도에서 지역화한 퉁구스족인 濊・貊族이 古아시아족을 흡수하여 한민족의 직계조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윗 글, 「韓民族의 形成과 先史時代」, p.8~11.
역시 한민족의 기원을 외지로부터의 이주민들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견해들은 학자에 따라 그 내용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들은 한민족을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로 보지않고 외지로부터의 이주민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한민족의 주체를 예・맥・한족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한민족을 외지로부터의 이주민으로 본 것은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수준은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Ⅱ. 지난날의 견해가 지닌 문제점
여기서 필자는 한민족을 외지로부터의 이주민으로 본 견해가 제출된 초기의 학계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가 제출되는 데에는 당시의 학문수준과 학계분위기가 상당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근대적 역사연구는 서구의 영향 아래서 시작되었다. 고대사나 고고학은 특히 그러하였다.
고대사 연구 초기의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은 스스로의 연구에 의하여 민족문제를 해결할만한 학문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고 고고학은 아직 성립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반도나 만주의 선사시대에 관한 고고학 자료는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거기에다 신화나 전설은 비과학적이라는 논리에 밀려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한반도와 만주에 원시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민족을 토착인들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기원을 서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이미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확인된 중앙아시아나 북부아시아지역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당시 학계의 상황은 한민족을 퉁구스족 또는 알타이족으로 보면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이 아닌 외래인으로 설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한 초기의 견해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견해는 동아시아문화에 비하여 서구문화가 고대부터 우수했다는 서구인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고고학이 초보단계에 있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구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였고 구석기유적은 1960년대에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와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석장리에서 발굴되었으나 그것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970년대였다.
신석기시대도 그 개시 연대를 서기 전 3000년대 이상으로 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金元龍, ꡔ韓國考古學槪說ꡕ 初版, 一志社, 1973, pp.56~59.
따라서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은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는 한반도와 만주에는 지금으로부터 70만년 전(100만년 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李鮮馥, 「신석기・청동기시대 주민교체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앞 책 ꡔ韓國古代史論叢ꡕ 1, pp.41~65.
이씨는 이 글에서 한민족의 기원을 북방으로 본 그간 학계의 견해에 대해서 잘못된 점을 비교적 자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구석기시대는 아직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 말기에는 진화가 끝나 지금 사람과 같은 현생인류가 출현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동물처럼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지역으로 나누어 거주민을 분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민족의 기원문제를 이 시기까지 소급해서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족의 기원은 붙박이생활에 들어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신석기시대부터 논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의 신석기시대 개시 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장 일찍 문화가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 온 黃河 유역과 비슷하다.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유적 任孝宰・李俊貞, ꡔ鰲山里遺蹟 Ⅲꡕ, 서울大學校博物館, 1988. 오산리유적의 연대는 일반적으로 8,000여 년 전으로 보고 있지만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를 보면 그보다 높게 1만년 전 이전으로 나온 것이 있다.
과 제주도의 고산리유적 임효재, 「한․일문화 교류사의 새로운 발굴자료」 ꡔ제주신석기문화의 원류ꡕ, 한국신석기연구회, 1995.
은 지금부터 1만여 년 전, 內蒙古自治區 동부의 興隆洼 유적, 楊虎, 「內蒙古敖漢旗興隆洼遺址發掘簡報」 ꡔ考古ꡕ 1985年 10期, pp.865~874.
河南省의 裴李崗 유적 開封地區文管會・新鄭縣文管會, 「河南新鄭裴李崗新石器時代遺址」 ꡔ考古ꡕ 1978年 第2期, pp.73~74.
嚴文明, 「黃河流域新石器時代早期文化的新發現」 ꡔ考古ꡕ 1979年 第1期, p.45.
등은 지금부터 8천여 년 전(서기 전 6000년)으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와 만주에는 신석기시대 이후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아왔음이 확인되었고 청동기시대의 개시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黃河유역보다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黃河유역에서 가장 빠른 청동기문화인 二里頭文化는 서기 전 2000년 경 Kwang-chih Chang, The Archaeology of Ancient China, Fouth edition, Yale University Press, 1986, p.315.
인데 비하여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시대 유적인 경기도 양수리의 지석묘 李浩官・趙由典, 「楊平郡兩水里支石墓發掘報告」 ꡔ八堂・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綜合調査報告ꡕ, 文化財管理局, 1974.
Chan Kirl Park and Kyung Rin Yang, “KAERI Radiocarbon MeasurementsⅢ” RADIOCARBON, vol. 16, no.2, 1974, p.197.
와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집자리 崔盛洛, ꡔ靈巖 長川里 住居址ꡕ 2, 木浦大學博物館, 1986, p.46.
및 遼西 지역의 夏家店下層文化는 서기 전 2500년 경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ꡔ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ꡕ, 文物出版社, 1984, pp.340~344.
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반도와 만주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다른 지역보다 결코 늦지 않았으며 문화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도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윤내현, 「사회진화상의 고조선 위치」 ꡔ고조선 연구ꡕ, 一志社, 1994, pp.90~131 참조.
따라서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지역에나 부분적인 이주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토착인들보다 다수였거나 주류를 형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 유골이나 유물 등의 고고학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그것을 통하여 한민족의 체질과 그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여졌는데 한민족의 체질특징은 한반도와 만주의 구석기시대 사람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사람들의 후손들이 계속 성장하여 한민족을 출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사람의 기원과 인종적 특징」 ꡔ조선전사ꡕ 1 -원시편,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pp.307~360.
장우진, ꡔ조선사람의 기원ꡕ, 사회과학출판사, 1989, 참조.
즉, 이렇듯 한국 옛 유형 사람들은 일정한 유형의 형태학적 특징을 규정하는 징표들의 유형학적 특성에서나 그 징표들의 절대적 크기에서 이웃의 옛 주민집단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이것은 한국 옛 유형사람들이 이웃 옛 주민집단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에 소속되거나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 이차적으로 형성된 지역적 변종인 것이 아니라 우리 조국 강토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 시초유형의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윗 책, ꡔ조선사람의 기원ꡕ, p.148.
는 것이다.
한국 옛 유형과 이웃 옛 유형집단의 얼굴 특징을 수치로 비교해 보면 평균관계편차가 중국 반파사람과는 0.81, 일본 쯔구모사람과는 2.51, 연바이깔사람과는 1.65, 자바이깔사람과는 0.79로 나타난다. 평균관계편차가 0.4보다 클 때는 통계학적으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며 그보다 작을 때는 그 차이가 우연적인 것이라고 보게 된다. 앞 책, ꡔ조선사람의 기원ꡕ, p.146.
따라서 이러한 결과는 한민족은 시초부터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고 형성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근대적인 고대사 연구가 시작되던 초기에 중국 학계에서도 중국 문화나 민족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다. 중국에 고고학이 들어오던 1920년대에 스웨덴의 학자 제임스 안델숑(James G.Andersson)은 채색질그릇으로 특징 지워지는 仰韶文化를 중국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 그와 유사한 문화가 발견되었던 지중해 연안과 연결시켜 고대 중국문화의 서방기원설을 주장하였다. J. Gunner Andersson, Children of Yellow Earth, MIT Press, 1973, p.224.
서방문화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중국인종의 서방기원설까지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과학적인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중국에 도입되어 河南省 지역의 仰韶文化 연대가 서방 지역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고대 중국문화나 중국인종의 서방기원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민족 외래설은 위와 같은 초기 중국학계의 영향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한민족과 다른 지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오류를 범하였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몇 가지 문화요소의 공통점이나 동질성이 바로 민족 이동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데 그간의 연구를 보면 공통점이나 동질성만을 찾는데 급급했을 뿐 차이점이나 이질성을 찾는데는 매우 등한하였다.
한반도-만주지역과 몽고 또는 시베리아지역의 문화를 비교해 보면 공통점과 동질성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더 많은 차이점과 이질성이 있음이 분명한데 그 점에 대해서는 유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생활양태에 있어서 그들은 유목인이지만 한민족은 농경인이다. 따라서 의식주 등 생활양태나 문화성격이 현저하게 다르다.
근본적이고도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무시하고 몇 가지의 유사성만을 들어 동일문화권이라거나 동일종족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문화는 전파된다. 한민족은 지리적으로 북방의 유목민들과 인접해 있었다. 유목민들은 이동생활을 하므로 문화를 먼 곳까지 빨리 전파시킨다. 따라서 한민족과 북방의 여러 지역 사이에는 문화의 교류가 많고 빨랐던 것이다. 문화의 공통성은 그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기원을 논하는데 있어서 먼저 밝혀야 할 것은 그 문화의 개시 연대이다. 그러한 작업 없이는 어느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만주지역과 몽고, 시베리아 등지에서 유사한 문화가 발견되면 바로 그것을 한국문화의 원류인 것 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고대문화가 북방에 전달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몽고에는 고대에 匈奴族이 살았다. 그러나 匈奴族은 西漢과 東漢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서방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보르치긴족이 얼구나하(額爾古納河) 유역으로부터 蒙古로 이주하였다. 이 종족은 후에 징기스칸을 배출하고 蒙古帝國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얼구나하는 고조선의 북쪽 국경이었고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는 동부여가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르치긴족은 고조선 또는 부여의 후손이었거나 인접한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르치긴족이 몽고로 이주할 때에 한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갔고 그 후 그것이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古아시아족이라 불리는 시베리아 거주의 동아시아계 인종도 고대 한민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 ꡔ魏書ꡕ 「豆莫婁傳」과 ꡔ新唐書ꡕ 「流鬼傳」에는 고대에 부여족의 일부가 연해주를 지나 북쪽 먼 곳으로 이주하여 豆莫婁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연해주 북쪽 먼 곳이라면 시베리아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그 지역에 거주하는 동아시아계 사람들은 부여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고대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을 신석기인들은 古아시아족, 청동기인들은 濊・貊族으로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그 오류가 구체적으로 지적된 바 있으므로 앞 글, 「신석기・청동기시대 주민교체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참조.
자세하게 논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질그릇의 문양변화나 청동기 사용 같은 새로운 문화 출현이 반드시 주민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동일한 주민에 의한 문화의 변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 출현한 문화 요소를 제거하면 석기나 농작물, 주거형태 등 대부분이 이전의 것을 계승하면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黃河유역에서 裴李崗文化로부터 仰韶文化와 龍山文化를 거쳐 二里頭文化로의 변천은 질그릇의 색깔이나 문양에서 현저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을 새로운 주민의 출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참고가 된다.
한민족을 濊・貊族과 韓族으로 나누어 보거나 濊・貊族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그 영토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 거주민 전체가 한민족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신석기시대 초부터 한반도와 만주의 각 지역에서 붙박이생활에 들어가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을 북방계(대륙족, 濊・貊族)와 남방계(해양족, 韓族)로 나누어 설명하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렵다.
Ⅲ. 한민족 기원지와 중심세력
고조선에는 扶餘, 孤竹, 高句麗, 濊, 貊, 追, 眞番, 樂浪, 臨屯, 玄菟, 肅愼, 靑丘, 良夷, 楊州, 發, 兪 , 沃沮, 箕子國, 沸流, 荇人, 海頭, 蓋馬, 句茶, 藻那, 朱那, 辰, 韓 등의 渠帥國(諸侯國)이 있었다. 윤내현, 「한민족의 형성과 출현」․「고조선의 국가구조」 앞 책 ꡔ고조선 연구ꡕ, pp.132~169․426~486.
이러한 거수국의 종족들이 고조선이라는 국가조직 속에서 연합되어 민족을 출현시켰다. 濊와 貊은 지금의 遼西지역에, 韓은 한반도에 위치하여 한민족 형성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와 맥, 한만을 한민족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濊・貊族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면 왜 나라 이름을 濊・貊이라 하지 않았을 것인가. 한민족을 濊・貊族으로 보는 학자들은 濊・貊族이 한반도와 만주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앞 책, ꡔ韓國民族文化의 起源ꡕ.
그러나 그것은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이다. 고조선 말기에 지금의 遼西지역에 衛滿朝鮮이 건국되고 그 지역에 다시 漢四郡이 설치되자 遼西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 주민들은 遼東 지역과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윤내현, 「열국시대의 시작과 변천」 ꡔ한국 열국사 연구ꡕ, 지식산업사, 1995, pp.31~55.
이에 따라 그들의 거주 지역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고조선시대에 濊・貊族은 지금의 遼西 지역에 위치해 있었을 뿐 遼東지역이나 한반도에는 거주하지 않았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에 일어난 遼西 지역 주민들의 이주와 확산은 濊・貊族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고 肅愼・夫餘・高句麗・沃沮 등도 마찬가지였다. 윗 글 참조.
한반도와 만주에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구석기시대에 떠돌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붙박이 생활에 들어가 수많은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후기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일정한 지역 안에 있는 여러 마을들이 연맹을 맺어 마을연맹체(고을사회)를 형성함에 따라 종족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와 만주에는 많은 종족이 출현하였다. 숙신・부여・고구려・예・맥・옥저 등 한국사에 일찍이 등장하는 종족들은 마을연맹체시대부터 존재했던 종족일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던 많은 마을연맹체 종족 가운데 가장 강한 마을연맹체 종족이 다른 마을연맹체 종족을 복속시켜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고조선이 건국됨에 따라 한민족의 형성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형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 지역 토착인들의 연합이 계속 확대되어 궁극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ꡔ後漢書ꡕ 「東夷列傳」에는 한반도와 만주의 주민들을 모두 東夷라고 부르면서, 東夷는 모두가 토착인들인데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기고 혹은 冠이나 고깔을 쓰고 옷에 수를 놓아 입으며 그릇은 俎와 豆를 사용한다. ꡔ後漢書ꡕ 卷85 「東夷列傳」. “東夷率皆土著, 憙飮酒歌舞, 或冠弁衣錦, 器用俎豆.
고 하여 한반도와 만주의 주민들은 모두 토착인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민족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심이 되었던 종족은 어느 종족이었을까? 그것은 고조선 건국의 중심이 된 마을연맹체(고을사회) 종족이었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壇君神話에 의하면 고조선을 건국한 중심세력은 桓雄族이었다. 桓雄이나 桓因의 桓은 환하다는 뜻이고 雄은 아들(수컷)을 뜻함으로 桓雄은 桓因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桓雄은 그 종족이 하느님과 밝은 것(태양)을 숭배하는 종족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桓雄族은 한족, 아사달족, 조선족 등으로도 불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桓은 한으로도 읽혀져 韓族으로도 불리었고 고조선의 첫 도읍은 아사달이었는데 아사달은 “아침 땅”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朝鮮으로 한자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李丙燾, 「檀君說話의 解釋과 阿斯達問題」 ꡔ韓國古代史硏究ꡕ, 博英社, 1981, pp.40~41.
단군신화에는 환웅족이 마을연맹체를 형성할 때 곰족과 범족이 참여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곰족은 고구려족, 범족은 예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ꡔ後漢書ꡕ 「東夷列傳」에 濊族은 범을 섬긴다고 하였고 高句麗族은 큰 굴을 섬긴다고 하였는데, 고구려족이 섬긴 굴은 단군신화에 곰이 여자로 진화한 동굴을 연상하게 하며 일본인들은 고대 문헌에 나오는 高句麗 또는 高麗를 고마라고 읽는데 이것은 곰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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