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莊子의 수양론(修養論)과 마음치유

rainbow3 2019. 12. 3. 14:55


莊子의 수양론(修養論)과 마음치유*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오상아吾喪我’를 중심으로-**


박승현(朴勝顯)***



<요약문>
본 논문은 장자철학의 수양론을 ‘마음치유’와 연관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수양’은 실천을 의미한다. 수양을 통하여 도달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적 인간이란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한계 속에서 삶의 의미와 책임을 다 실현한 사람을 지칭한다.
동양에서 유가 도가 불가를 막론하고 다 이상적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데, 각기 ‘성인聖人’, ‘지인至人’, ‘부처’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양에서 이러한 이성적 인간의 실현 가능성을 언제나 자신의 내면적 근거에서 찾는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순결화’, 즉 수양修養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자에서 수양은 ‘비움’(손損)에서 시작된다. ‘비움’은 자기 극복, 자기개혁을 전제로 한다. 즉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비본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극복의 과정이 바로 자기치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고통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마음에서 찾고 있다. 장자는 마음을 인심人心(혹은 성심成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눈다. 성심은 도심과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성심成心은 일상적인 우리의 마음으로 좋지 못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도심道心은 transcendental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경지의 의미를 한다.

일반 사람들은 모두이러한 인심(성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시비분별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인심과 성심에 근거하게 되면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의 기준에 의하여 시비 분별을 하게 되고, 그것에 따라 의견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가 일어나서 분간이 생겨나게 되고, 결국 삶의 고통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심에서 도심으로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도심으로의 전환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전환을 수반하게 된다. 가치관의 전환은 바로 마음의 치유의 과정을 동반하게 된다.


주제어 : 장자, 마음치유, 인심, 도심, 수양


* 이 논문은 2010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361-A00008).
** 본 논문은 2014년 5월 8일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주체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장자의 수양론과 마음치유’를 수정 보완한 것임.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오상아吾喪我’와 마음치유
Ⅲ. 고통의 발생원인
Ⅳ. 고통의 극복
   1. 외물에 구속당하지 않기
   2. 도道의 관점으로 보기 - ‘이명以明’
   3. 무위자연의 길- ‘비움’
Ⅴ.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동양의 철학적 진리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어질 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만약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사유의 결과물로 끝난다면, 이른바 학문성은 담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직면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1) 따라서 동양철학은 언제나 삶의 진리를 체득하려는 수양의 문제가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2)


수양은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면 실천이다. 실천은 우리의 이성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게 해 가는 것을 말한다.3) 이러한 수양실천의 과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유가는 성인, 도가는 지인至人(혹은 진인眞人), 불가는 부처라는 이상적 인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적 인간이라고 하여 어떤 신과 같은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보다 완전한 인격체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한계성 속에서 타인과 경쟁하고 고통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루를 생존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 최종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고 분투하고 있다. 이상성이란 바로 인간이 벌이고 있는 이러한 분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성의 극복과 이상성의 실현에 관한 문제를 『莊子』의 「제물론」의 ‘상아喪我’의 개념을 중심으로 마음치유의 문제와 연결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철학적 관점에서 동양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字句 해석에 치중한 훈고학적 태도에 머물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그 속에 녹아 있는 삶의 보편적 문제의식을 읽어내려는 시도이다.4)


2500여 년전의 장자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느끼고 있는 고통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그것의 극복을 통하여 보다 이상적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된 문제의식에 속할 것이다.

장자는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물음에서 출발하여 인간들이 자발적인 수양의 과정을 거쳐서 ‘제물齊物’5) 즉 만사만물萬事萬物을 평등하고 온전한 관점(이것을 제일齊一이라고 부른다)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적 자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제물’이라는 것은 편견 없는 사고를 통하여 자기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 사물의 진상眞相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6)


1) 여기서 말하는 ‘학문성’은 과학성을 담고 있는 서양의 학문 개념을 가리킨다.
인간의 실존의 문제는 추상적 사고로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알프레드 쉐프는 “철학이 실천에 유용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자기 인식으로부터 삶에 실천적으로 유의미하며, 구체적인 통찰로 내려와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프로이트와 현대철학』,(김광명, 김정현, 홍기수 옮김), 열린책들, 23쪽]
이른바 서구 학문에서 중시하는 이론理論은 개념적 정의를 바탕으로 한다.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고, 보편적 개념은 비 실존적인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반면 동양철학의 진리 개념은 개념적 정의를 통한 추상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실존적 체득과 실천을 통하여 획득된 삶의 도리를 가리킨다.
2) 루 매리노프가 “사실 ‘철학’과 ‘실천’이라는 두 단어는 얼론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철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원제: Plato not Prozac, 이종인 역,해냄, 2000년, 24쪽)라고 말하고 있듯이 서양철학은 시작에서부터 자연에 대한 탐구와 객관적 지식을 중시하므로, 분석적이고, 이론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고, 또한 명확한 객관적 지식을 얻기 위한 인식의 방법론에 대해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수양이나 실천이란 개념은 서양철학에는 중시하지 않는다.
3)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칸트의 구분을 빌려온다면 객관세계를 설명하려는 이론이성과 구별되는 도덕이성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4) 철학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동양고전들을 단순히 자구적 해석에 치중하는 훈고학적 태도에 머물게 된다면 그러한 학문적 활동에 ‘철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5) 「제물론齊物論」을 읽는 두 가지 독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제齊 ‘물物’로 끊어 읽는 것이고, 다른 하는 제齊 ‘물론物論’으로 끊어 읽는 것이다. 여기서 ‘물物’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사사물물事事物物’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齊 ‘물物’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다 제일齊一(가지런하게 보려는것, 온전하게 보려는 것)이다.

두 번째 독법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읽게 되면 제일齊一하려는 대상이 ‘물론物論’의 범위 안으로 상당히 축소된다. ‘물론’이란 이론(theory)를 가리킨다. 장자는 당시에 유가와 묵가 등과 같은 대립적인 이론을 가지런히 하려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시비, 선악, 미추 등 일체의 비교되는 것이나 가치적인 것 그리고 상대적인 판단에 대하여 齊一하려는 것이다. (牟宗三, 「莊子<齊物論>講演錄 (一), 『鵝湖』總號 319, 3쪽 참조)
6) ‘만물과 하나가 된다’라는 주장은 초월적 영역으로 현상세계 내의 물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상 세계는 경험의 세계이고, 경험의 세계를 설명하는 논리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다. 그 속에서는 초월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자가 서 있는 지점은 바로 정신적 초월의 영역이다. 이것은 사실개념이 아니고, 수양을 통하여 도달하는 가치의 영역이다.



장자는 인간들이 고통을 갖게 되는 것은 유한한 존재로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비극성에서 연유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비분변是非分辨의 계열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을 장자는 마음에서 찾고 있다.

장자는 마음을 인심人心(혹은 성심成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눈다.7)

 성심成心은 장자의 고유한 개념으로 ‘선입관’ ‘편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심은 도심과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성심成心은 평범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좋지 못한 의미를 지고 있다고 한다면, 도심道心은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해야하는 이상적 경지를 의미한다.8)


일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성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시비분별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각자 자신의 삶의 기준에 의하여 시비 분별을 하게 되고, 그것에 따라서 의견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를 불러오게 되고, 분란이 생겨나게 되고, 결국에 삶의 고통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성심에서 도심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이 바로 수양의 과정인 것이다.

수양은 자기극복, 자기결단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도심으로의 전환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전환을 수반한다. 가치관의 전환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평가와 반성을 수반하게 된다.

수양의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편견에 치우친 관점에서 벗어나 한 차원 높은 관점으로 올라가서 사물과 사건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성심에서 도심으로 전환의 과정이 바로 마음치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편견에 치우치고, 불안한 마음(성심成心)에서 어떤 것에도 구속됨이 없는 자유로운 마음(도심道心)으로의 전환인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인간의 이상성 실현을 위하여 반드시 요구되는 성심에서 도심의 전환의 과정을 마음치유와 연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7) 이강수 교수는 『장자』에는 다양한 ‘心’에 대한 표현이 있지만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중인衆人의 심心 이고, 다른 하나는 인상적 인간인 지인至人의 심心이다. 지인의 심은 도道와 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인의 심은 보통 인간의 마음인 인심人心을 가리키고, 장자는 이것을 성심成心이라고 표현한다.(李康洙, 『道家思想의 硏究』,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4, 23-24쪽 참조)

본 논문에서는 ‘도심道心’이란 용어가 비록 『장자』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인심人心에 대비되는 말로써 이상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道心을 사용하고자 한다.
8) 牟宗三, 「莊子<齊物論>講演錄」(二), 『鵝湖』 總湖 第320호, 3쪽.



Ⅱ. ‘오상아吾喪我’와 마음치유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눈다고 하여, 각기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다른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성심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되면, 항상 사태를 온전히 보지 못하고, 하나의 시비분별의 순환 고리 속에 머물게 되어 고통과 부자유함을 발생시키게 된다. 만약 수양의 과정을 거쳐서 성심을 제거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본연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고, 그 진실함을 드러내게 되는 데, 그것을 우리는 道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9)


반면 성심은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으로, 습관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성심의 단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병’ 혹은 ‘철학적 병’10)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병은 가치 판단의 문제가 항상 개입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딜레마’, ‘직업상의 윤리적 갈등’, ‘현실과 이상을 통합시키는데 따르는 어려움’, ‘이상과 정서 사이의 갈등’, ‘의미⋅목적⋅가치의 위기’,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부모로서 자식을 양육하는 전략’, ‘직업 변경에 따른 불안’, ‘중년에 만나게 되는 인생의 위기’, ‘인간관계의 문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서 느끼는 낭패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혹은 본인의 죽음’ 등의 문제에 항상 부닥친다.11)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잘못된 습관이나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판단할 경우 언제나 혼란에 빠지고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어, 고통을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병이나 철학적 병은 오직 변화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것이지 약물에 의존하여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12) 따라서 마음의 치유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신념 체계와 세계관, 그리고 인생관에 대하여 다시금 점검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제물론」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범하게 되는 가치관과 인생관의 혼란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며, 또한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대립 속에서 오는 혼란과 고통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장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상세계에서 벌어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是非), 선함과 악함(선악善惡)의 문제, 아름다움과 추함(미추美醜) 등은 다 상대적인 가치판단에 관한 문제라고 규정한다.

만약 어떤 것을 옳다고 하면(시是), 그것과 상대되는 옳지 않음(비非)이 있게 되고, 어떤 것이 선하다고 하면 그것과 상대되는 악이 곧 바로 존재하게 되며, 어떤 것을 미美라고 규정하면, 곧 바로 그것과 상대되는 추(醜)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누구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름다움과 추함에는 일정한 표준이 존재하는 것인가? 시비와 선악에는 일정한 표준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장자는 만약 하나의 고정된 시비판단 기준을 선택하게 되면, 곧 바로 상대적 시비논쟁의 순환의 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본다.


9) 여기서 말하는 道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심리학적 마음(心)이 아니고, 수양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한 本心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마음(心)은 transcendental(초월적)한 것이다. 초월적이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10) 김영진은 ‘철학적 병’을 광신적인 나치즘과 파시즘이 가진 ‘광신주의’, 잘못된 도덕관이나 가치관을 가진 것, 왜곡된 이념적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임상철학』, 철학과 현실사, 24-50쪽 참조)

그리고 비트겐슈타인도 『철학적 탐구』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철학자의 치료는 질병의 치료와 비슷하다”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괴로워하는 문제를 철학적 혼동의 증상으로 보고, 그것을 일종의 영적인 병에 비유를 들고 있다.(칼 엘리어트, 『철학적 병』, 인간사랑, 21쪽 참고)
11) 루 메리노프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가치판단과 연관된 여러 가지 문제 상황을 위와 같이 열거하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위와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정상적 상황이며, 또 정서적 장애가 반드시 질병인 것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병’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판단하게 됨으로써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통 받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지, 심리학이나 정신과에서 규정하는 질병이라고까지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루 메리노프, 위의 책, 29-30쪽 참조)
12) 비트켄슈타인도 “한 시대의 병은 인간들의 생활방식의 변경에 의해 치유되고 철학적인 문제의 병은 오로지 변화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개인이 만들어낸 약물을 통해 치유될 수는 없었다.”라고 말한다(칼 엘리어트, 『철학적 병』, 인간사랑, 22쪽에서 재인용)



장자는 「제물론」 첫 부분에서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 관념의 대립으로부터 비롯되는 혼란을 극복하고, 나아가 만물제일萬物齊一을 실현할 기본적인 관념으로 ‘상아喪我’의 문제를 제기한다.



“남곽자기가 탁자에 의지하고 앉아 하늘을 우러러 한 숨을 내쉬니 죽은 듯이 그 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제자인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말하길

“어떤 까닭입니까? 형체는 본래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같게 할 수 있고, 마음은 본래 식어버린 재와 같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어 있는 분이 이전에 탁자에 의지하고 있는 분 같지 않습니다.”

자기가 말하길 “언이여! 또한 좋지 않은가! 그대가 그것을 물은 것이! 오늘 나는(오吾) 나(아我)를 잃어버렸으니, 그대는 그것을 알고 있느냐?

그대는 인뢰(사람의 피리소리)를 들었지만, 아직 지뢰(땅의 피리소리)를 듣지 못하였고, 땅의 피리소리는 들었지만, 아직 천뢰는 듣지 못했구나!”13)

13)『莊子』 「齊物論」,

“南郭子綦隱机而坐, 仰天而噓, 荅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 曰: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机者, 非昔之隱机者也.」

子綦曰: 「偃, 不亦善乎? 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汝聞人籟而未聞地籟., 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해야할 두 관념은 바로 ‘그 짝을 잃어 버렸다(상기우喪其耦)’와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오상아吾喪我)’ 이다. 이 두 구는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짝(우耦)’이 무엇을 지시하는 것인지를 안다면 ‘아我’의 내용을 쉽게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문장을 통하여 볼 때 ‘상아喪我’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단지 인뢰人籟와 지뢰地籟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천뢰는 이해할 없다는 것이다. 장자의 주장에 따르면 천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상아喪我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그 짝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짝’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바로 몸과 상대되는 마음(心, 정신)을 가리킨다. ‘답언荅焉’은 몸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몸이 마치 맥이 풀려 축 널어진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몸이 기운이 없이 축 널어져 있는 것은 바로 그와 짝을 이루는 마음(정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짝(우耦)’이란 바로 ‘마음 혹은 정신’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14)


‘나(오吾)는 나(아我)를 잃어버렸다(오상아吾喪我)’에서 오吾는 주어에 해당하고, 아我는 목적어에 해당한다. ‘오상아吾喪我’는 바로 ‘망아忘我’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망아’는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인가?

여기서 ‘아我’는 ‘정신’ ‘생각’ ‘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망아’는 평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치 보기에 겉으로 보기에 넋이 나가있는 것 같은 상태, 혼이 빠진 상태와 같지만, 내면으로는 평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15)

혼이 빠진 이러한 상태 아래에서 우리의 마음이 기존의 고정된 형태 혹은 틀에 구속되지 않고, 해방되고, 비상하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서 비로소 ‘천뢰’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구속되어 있고, 무엇인가에 억매여 벗어나 있지 못하고, 항상 긴장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 고정된 형식에 의하여 구속되어져 있는 것이다. 마음과 정신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을 도가철학에서는 쇄탈灑脫이라고 한다. 매우 자연스럽고, 호방하면서도 구속됨이 없는 그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호방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마음과 정신이 기존의 고착화된 규칙이나 제도, 진부한 습관의 틀에 구속되지 않음을 흔히 본다.


구속을 제거하게 되면 자연히 우리의 지혜가 비로소 드러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난 마음과 정신을 통해서 비로소 인뢰와 지뢰, 그리고 천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인뢰는 생황과 같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이고, 지뢰는 자연의 온갖 구명에서 나는 소리라고 규정을 내리지만, 천뢰에 대해서는 의문구로 암시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지않고 있다.


14) 牟宗三, 「莊子<齊物論>講演錄(一), 4쪽 참조. 曹礎基는 ‘耦’를 眞君과 서로 대립된 ‘功’ ‘名’ ‘己’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요유의 無名, 無功, 無己와 연관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도 만물을 齊同하기 위해서는 私心과 편견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我’는 비본래적인 마음(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莊子淺注』, 中華書局, 1992, 17쪽) 그래서 陳鼓應도 ‘吾喪我’를 ‘정신활동이 신체에 의하여 제한 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莊子今注今譯』,(上), 中華書局, 1991, 34쪽 참조)
15) 만약 ‘망아忘我’를 곧 바로 ‘망심忘心’으로 해석하게 되면, 이른바 정신 줄을 놓아놓은 ‘정신병’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잊는다는 것은 우리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번잡한 마음,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마음이 식어버린 재와 같다’는 것은 자유가 스승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이 재와 같다는 것은 활동하지 않고 죽어버린 것과 같다. 마음이 죽었다는 것은 마치 ‘정신병’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인뢰’ ‘지뢰’란 현상만을 보고, 그 너머에 있는 ‘천뢰’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자유가 말하길 “지뢰는 온갖 구멍에서 나는 소리가 이것이며, 인뢰는 생황과 같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것입니다. 감히 천뢰에 대하여 묻습니다.”

자기가 말했다. “이른바 천뢰란 천만가지 구멍에서 불게 되면 소리가 각각 다르되 각기 스스로 멈추게 하고 모두 스스로 취하게 되니, 갖가지 천차만별한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은 누구이겠는가?”16)

16) 『莊子』 「齊物論」 “子游曰: 「地籟則衆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子綦曰: 「夫天籟者, 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그렇다면 천뢰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천뢰는 도가철학에서 말하는 ‘자연自然’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천뢰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쇄탈灑脫의 경지에 있음을 말한다. 마음과 정신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되면 비로소 천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철학에서 말하는 천뢰와 자연은 자유자재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자연’은 서양에서 말하는 natural world와 구별된다.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세계는 도가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不自然한 것이고, 다른 원인에 의하여 현재의 결과를 도출하게 되는 타연他然이다. 그것은 조건적인 것이다.


반면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은 어떤 것에도 의지하는 바가 없는 무조건적인 자유의 경지이다.17) ‘자연’은 스스로 이와 같다고 하는 ‘자기여차自己如此’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의 경지다. ‘자유’라는 것은 다른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근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18)

그러나 세상천지에 스스로 이와 같은 것(자기여차自己如此)이 어디에 있는가?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건을 살펴볼 때 모든 사물은 서로 의지하여 있는 인과관계에 있고 조건적인 것이다. 조건적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이와 같은 것(자기여차自己如此)이 아니고, 자신의 주위의 것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존재하게 된다. 스스로 이와 같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영역이 아니고 초월적 영역이다. 초월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진 물리적 영역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다만 정신적 영역에서 가능한 것이다.
서양의 종교에서는 오직 신(하나님)만이 비로소 자유자재하고 自足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신을 말하고 않고도 이러한 경지를 수행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수양을 통하여 도달하는 ‘자연’의 경지는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세계가 아니고 고도의 수양을 통하여 도달한 ‘정신적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경지를 도심道心이라고 부르고, 도심을 통하여 천뢰의 경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19)


17) 牟宗三, 「莊子<齊物論>講演錄」(一)」, 『鵝湖』, 總號第 319.
18) ‘자유’를 말하면 곧바로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자유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이러한 인권의 의미를 뛰어넘어 정신적 영역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러한 자유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개념이 아니라 수양을 통하여 도달되는 정신적 경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19) 유가에서 말하는 ‘본심本心’, 왕양명이 말하는 ‘양심良心’은 모두 이러한 경지이다. 구체적 경험의 세계에서 접하게 되는 현실적 사물들은 다 조건적이지만, ‘본심’, ‘사단지심四端之心’ ‘양지良知’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반야’‘법신’ ‘해탈’도 무조건적 마음(unconditional mind)이고, 이것이 가치 판단의 표준이 되는 것이며, 자유자재하고, 자족적인 것이다. 이 모두는 수양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牟宗三, 「莊子<齊物論>講演錄(一)」, 5-6참조)



그리고 장자가 “갖가지 천차만별한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은 누구이겠는가?(노자기수아怒者其誰邪)”라고 의문을 표시하면서, 무엇인가 정확한 대답을 내어 놓지 않고 암시적으로 끝을 맺고있다.

그것은 천뢰天籟가 하나의 경지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의미(meaning)는 가지고 있지만 한정적 개념을 통하여 그것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뢰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을 바람이라 규정하게 되면, 또 다시 그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계속 이어지게 되면 끝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육조 혜능이 두 스님이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을 보고 그 원인을 다투는 고사에 비유해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바람이 부니까 깃발이 휘날린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날리고 나서 바람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계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하는 논쟁과 같이 끝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조 혜능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20) 천뢰도 혜능의 지혜로부터 이해해 볼 수 있다. 즉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부동심不動心) 천뢰가 드러나게 되지만, 마음이 한번 움직이게 되면 바람도 있고 깃발도 있게 되고, 모두 다 인과관계의 계열속으로 떨어지게 되어 어느 지점에서 최초의 원인으로 멈추어야 할지 말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장자는 “노자기수아怒者其誰邪?”라고 의문을 던지고, 대답하지 말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21)


장자는 세상의 시비, 선악, 미추 등의 가치 판단의 문제에 대해서 그 문제 상황 속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난 초월적 입장에서 접근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의 상대적 관점을 떠나서 보다 높은 관점에서 대상사물을 각자 자기의 특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모두 스스로 그러함(자기여차自己如此)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때 만사만물을 평등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일체의 것을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을 도道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세상의 소리인 지뢰地籟에 대하여 어떤 한 소리를 좋아하고, 다른 소리를 싫어하게 되면, 세속의 시비 분별의 계열 속으로 추락하여 道를 볼 수 없게 된다.

장자는 천지만물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데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가려지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현실생활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천뢰’를 이해하는 것은 인뢰와 지뢰를 떠날 수 없다. 인뢰와 지뢰를 거쳐서 비로소 ‘천뢰’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눈앞의 사물에 대하여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조금의 편견이 없고 어떤 편향됨도 없다면 이것 또한 현실적으로 대단히 높은 수양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이것 또한 많은 수양을 거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제물론」에서는 바로 눈앞의 사물을 온전히 바라보려고 하는 시도를 통하여 ‘정신적 자유의 경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인뢰와 지뢰를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온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천뢰’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식의 ‘현지玄智’이다.22)

시비, 선악, 미추美醜 등을 평등하고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이지적인 분석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사만물에 대하여 공평하고 온전하게 바라보고, 일체를 평등하게 놓아놓고, 어떤 편향된 집착이 없게 되면, 바로 천뢰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상아喪我’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은 ‘상아’에서 시작하여 수양의 과정을 거쳐 시비분별의식을 제거하고, 나와 나아닌 것을 구별하는 관념을 타파하여 만물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요구되는 것이 기존의 신념 체계와 세계관에 대하여 반성하고 점검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오상아’는 바로 편향되고 집착하는 마음(성심)에서 벗어나 사물을 평등하고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도심)으로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한 전환의 과정 속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나 자발적인 자기극복과 자아결단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양의 과정을 현대적 의미로 바로 보면 마음치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 정병조역해 『육조단경六祖壇經』,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자, 한 스님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인다고 말하고, 다른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면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 혜능이 말하기를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며,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는것이다.”(時 有風吹旛動. 一僧云風動 一僧云旛動 議論不已 能進曰 不是風動 不是旛動 仁者心動)
21)『道德經』56장의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는 의미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도道라는 것은 일반 사물과 달리 실제로 지시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개념을 통하여 규정하고 한정시키게 되면, 상대적 시비계열 속으로 빠져들어 도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

22) 도가철학의 지혜의 특징을 ‘玄智’라고 표현한다. 그러한 진리의 성향은 직선적이지 않고 곡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역설적이고 변증적인 면을 담아내는 오묘한 인생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노자 7장에서 “내몸을 뒤로 하는데 내 몸이 앞선다(後其身而身先)”와 같은 경우다. 여기서 ‘뒤로 한다’한다는 것은 스스로 물러나고, 양보하고, 겸양함을 말한다. 실생활에서 보면,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스스로 한없이 양보하고 겸양하여, 뒤로 물러나 있어도, 그러한 양보와 겸양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존경받고, 추앙받을 받아 사람들의 전면에 서게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Ⅲ. 고통의 발생원인


자기향상을 위한 자기평가와 자기반성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의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보다 나은 삶,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일상적 삶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갖고 있는 유한성과 한계성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전제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비극적 존재이다. 이러한 비극성을 온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비극성을 부정하고 회피하려고 몸부림치는 순간 인간에게는 ‘생’에 대한 집착과 영생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발생하게 된다. 태어나고 죽어가는 인간의 삶의 전체 과정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인간들은 비로소 유한성 속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희망하고 분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시간적으로 백세를 넘기기가 어렵다. 우리의 몸은 자연생물학적 생명이고, 생사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늘 그것을 뛰어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고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지닌 현상세계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형체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전환하여 무한을 추구하게 된다. 몸은 비록 유한하지만 정신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한을 추구하기 위하여 먼저 요구되는 것이 바로 지금 현재를 주목하는 것이다. 장자는 우선 인간존재의 유한성에 대하여 깊이 통찰하고, 그것에 대한 비극의식에서 철학적 출발점을 삼고 있다. 이러한 유한성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고통을 발생시키고 있으며, 시비분변의 혼란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장자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유한성에 주목한다. 인간은 무궁한 천지 속에 유한한 생명체로 주어져 있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의하면 인간은 공간적으로 지극히 좁은 영역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천지에 비교하면 조약돌만한 크기의 사해 속에, 그 사해에 비교하면 개미집 크기 밖에 안 되는 중국 속에 인간들은 아등바등 살고 있다.23) 광대무변한 천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인간존재는 얼마나 왜소할까?

장자는 이러한 왜소함을 묘소眇少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을 시간적으로 살펴보더라도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산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짧은 시간을 천리마가 조그마한 틈을 지나가는 것처럼 빠르다는 것으로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고 표현한다.24) 우주의 긴 시간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기간은 찰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가진 인간이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또한 어떤가? 「제물론」에서는 구체적 삶 속에서 시비논쟁을 벌이고 있는 대지, 소지. 대언, 소언 등의 예를 들면서 현실생활의 온갖 양상들을 비유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가장 총명하다고 하는 대지大知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보다 수준이 낮은 소지小知는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술수를 부리며 다투고 있는 것이다.25)

그러한 첨예한 대립 속에서 인간들은 잠을 잘 때는 혼과 백이 교접하여 꿈속을 헤매게 되고, 잠을 깨고 나서는 감각활동이 시작되어 접촉하는 외물들과 뒤 얽혀 하루 종일 긴장상태에서 마음으로 암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26)


23)『莊子』 「秋水」 “吾在天地之間, 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方存乎見少, 又奚以自多! 計四海之在天地之間也, 不似礨空之在大澤乎? 計中國之在海內, 不似稊米之在大倉乎? 號物之數謂之萬, 人處一焉. 人卒九州, 穀食之所生, 舟車之所通, 人處一焉. 此其比萬物也, 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
24)『莊子』 「知北遊」 “人生天地之間,若白駒之過郤
25) 이 부분의 해석은 曺礎基의 해석을 따랐다.(『莊子淺注』, 18쪽 참조)
26)『莊子』 「齊物論」 “大知는 해박하고 小知는 자세하게 분별하며, 大言은 맹렬하지만 小言은 수다스럽다. 잠잘 때는 心神이 혼란스러우며, 깨어나게 되면 형체는 편안하지 않아 접촉하는 것들과 싸우면서 날마다 마음으로 싸운다.”(“大知閑閑, 小知閒閒, 大言炎炎, 小言詹詹. 其寐也魂交, 其覺也形開, 與接爲搆, 日以心鬪.”)



또한 장자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련한 인간들에 대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즉, 남들과 서로 시비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 있어도 어떤 사람이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마치 화살처럼 빨리 나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잘 엿 보아서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가 말하지 않을 때는 마치 무엇인가 맹서하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승리의 기회를 엿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도 자신의 생각이 순식간에 사그라지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서 헤어나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생각이 고정되고 속박되어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죽음에 다가가는 마음은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때에 따라 즐겁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고, 비애를 느끼기도하고, 즐겁기도 하기도 하고, 우려, 탄식, 변덕, 고집, 경솔함과 방탕함과 교만하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생겼다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27)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외물들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을 소모하고, 자신의 본성을 상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일단 품수 받은 몸을 이룬 이래로 잃지 않고서 다하기를 기다린다. (인간을 포함한) 외물들과 서로 싸우고 서로 마찰하며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멈출 줄을 모르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종신토록 마음을 써서 피곤해지되 功을 이루지도 못하고 나른히 지쳐도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니 애달프다 아니 하겠는가? 사람들은 그것이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형체의 변화에 따라 마음도 함께 변하니 매우 슬프다 아니 하겠는가?”28)라고 말한다.

이것은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 대한 비애감悲哀感과 처량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비극의식에서 철학적 출발점을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몸, 즉 생명은 36,500일을 넘기기 어렵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을 보게 되어 있다. 어떤 인간도 이것을 피해가기 어렵다. 사실 우리의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끝이 나지만 우리의 정신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인간들이 정신적으로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면 상대적 시비계열 속에서 빠져나와 무한을 구하게 된다. 무한은 자유로운 자연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 마음이 죽어 있다고 한다면 ‘자연의 경지’에 도달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장자가 형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마음도 따라서 변해가는 것에 강한 슬픔을 표시(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한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비분란을 일으키는 고통을 낳는 직접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장자는 그 원인을 우리의 마음에서 찾는다. 잘못된 시비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사물과 사건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7)『莊子』 「齊物論」 “其發若機栝, 其司是非之謂也., 其留如詛盟, 其守勝之謂也., 其殺若秋冬, 以言其日消也., 其溺之所爲之, 不可使復之也., 其厭也緘, 以言其老洫也., 近死之心, 莫使復陽也. 喜怒哀樂, 慮嘆變慹,
姚佚啓態., 樂出虛, 蒸成菌. 日夜相代乎前, 而莫知其所萌. 已乎, 已乎! 旦暮得此, 其所由以生乎!”

28)『莊子』 「齊物論」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人謂之不死, 奚益!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대저 그 성심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구인들 스승이 없겠는가?

하필 갈마들임을 알아서 마음으로 스스로 얻음이 있는 사람(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이라야 그것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그것과 더불어 참여함이 있으니, 마음에 미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시비가 있다면 이것은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이르렀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29)

29)『莊子』 「齊物論」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无師乎?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심成心은 장자의 전문용어이다. 성심이란 습관이 쌓여서 이루어진 마음이다. 모든 사람은 다 습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고, 자신만의 특이한 경험적인 습관, 가정교육, 그리고 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교육에 근거하여 자신의 마음의 양태를 닦아가고,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생각을 가치 판단의 표준으로 삼아간다.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다 각기 자기 방식대로 시비판단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세계에서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고,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객관적 표준이 존재하지 않고, 상대적 진리관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러한 현상적인 모습을 보고서 ‘누구인들 스승이 없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이든 우매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다 ‘성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시비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삶에 있어서 자신들이 가진 각각의 성심이 바로 시비의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각종 是非를 가리는 문제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각각의 표준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따라서 성심이 있어야 비로소 시비쟁론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A를 긍정하고 B를 부정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시비표준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이러한 성심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나의 경험과 교육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경험과 교육이 다르기 때문에 그가 가진 성심도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성심이 없거나, 아직 성심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면 시비가 존재할 수 없고, 그것을 나눌 표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시비 판단의 주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시비판단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것은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장자는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현상계인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는 사이에 사물 사건의 변화에 매몰되고, 시비분별의 틀속으로 빠져들어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심에서 도심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고통의 극복


1. 외물에 구속당하지 않기


성심에서 도심으로 전환은 바로 ‘정신적 자유’의 경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앞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것은 반드시 고도의 수양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거나, 산만하고, 분산되어 있으면 이러한 일이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산만하고 분산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외적인 어떤 것들에 억매여 있기 때문이다. 장자 수양론의 출발점은 바로 어떠한 사물과 사건에 의해서도 동요되거나 상해 받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이다. 그래서 장자는 ‘외물로써 자신을 해하지 않는다’(불이물해기不以物害己)는 사상을 주장한다.


이 명제는 『장자』 「추수」의 북해약과 하백의 대화중에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리理에 통달하고, 리理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권변에 밝고, 권변에 밝은 사람은 물로써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30)고 말한 것에 연유한다. 인간의 비극성은 바로 인간들이 물物에 의존하며 그에 구애받고 속박당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31) 외물에 속박당하고 구애받는 것은 바로 자신이 외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성심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는 항상 이러한 외물에 집착하고, 조작하게 됨으로써 도리어 자신이 상하게 되고 고통을 낳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사회적 계층과 신분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이 각기 다른 환경에 살아가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세속적인 이익에 매몰되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소인은 몸바쳐 이利를 추구하였으며, 선비는 몸 바쳐 명名(명예, 공명심)을 추구하였으며, 대부는 몸 바쳐 봉지封地를 추구하였으며, 성인은 몸 바쳐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이들 여러 사람이 하였던 일은 서로 같지 않으며, 명성도 다르지만 그들이 본성을 다쳐가며 몸 바쳐 외물을 추구 한 것은 동일하다.”32)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작은 이익에 집착하게 되면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이에 장자는 “신명을 수고롭게 하여 하나를 만들려 하지만, 그것이 같다는 것을 모르니, 이것을 朝三이라고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고 하는가? 원숭이 기르는 사람이 상수리를 나누어 줄 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이라’고 하자 많은 원숭이들이 모두 성내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아침에 네 개저녁에 세 개씩이라’하자 많은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명과 실이 바뀌지 않았는데, 즐겁고 화내는 감정이 작용하니 또한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성심에 말미암는 것이다).”33)라고 비판한다.
장자는 원숭이를 비유를 들었지만 실상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과 사건에 대하여 하나의 측면만을 바라보고 쉽게 자신의 감정이 동요된다. 그리고 삶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삶의 가치를 판단하기 보다는 현재의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이득이 되면 기뻐하고, 조금 불편하면 쉽게 화를 내곤 한다. 그러나 삶의 전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좋고 싫음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가 많다. 장자는 바로 이러한 ‘현지玄智’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 때문에 성인은 시와 비의 쟁론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균평自然均平의 이치에서 (마음)을 쉬게 하나니, 이를 일러 양행兩行이라고 한다.”34)는 한 방법을 제시한다.


30)『莊子』 「秋水」 “知道者必達於理, 達於理者必明於權, 明於權者不以物害己.”
31) 장자는 현상계의 사물과 사건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 개념, 요수夭壽, 성훼成毁, 피차彼此, 대소大小, 정조精粗, 귀천貴賤, 미추美醜, 이해利害, 유무有無, 종시終始 등 갖가지 관념과 희喜⋅노怒⋅애哀⋅구懼⋅오惡⋅욕欲등 일체의 정감情感까지도 물物의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장자는 자연 및 사회의 사물 사건은 물론 자아의 심리 생리적 제 현상들도 물物로 간주 하였다.(강수,『노자와 장자』, 길 1997, 168-176쪽 참조)

32)『莊子』 「騈拇」 “小人則以身殉利,士則以身殉名,大夫則以身殉家,聖人則以身殉天下. 故此數子者,事業不同,名聲異號,其於傷性以身爲殉,一也.
33)『莊子』 「齊物論」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狙公賦芧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34)『莊子』 「齊物論」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흔히들 장자 제물론의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자는 구체적 삶의 현상에서 일어나는 시비분변의 계열에서 초월하여 전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보면 반드시 是와 非가 있게 마련인데 장자는 어떻게 초월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여기 장자가 말하는 시비의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장자가 말하는 시비는 과학에서 말하는 시비가 아니고, 예속禮俗에서 말하는 시비이다. 과학적 진리는 이것과 저것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분법에 근거한다. 그러나 장자의 의도는 세속에서 고정화된 예속에 관한 이분법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예속의 규범이나 제도에도 분명 시비가 있다. 나는 나의 방식을 긍정하고, 다른 사람은 다른 방식을 긍정할 수 있다. 이것은 각자가 처한 자연적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달라진다. 자신의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할 수만은 없다. 만약 자신의 것을 고집하는 순간 바로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분란이 생겨나게 된다. 장자가 ‘제일齊一’, 즉 평등하고 온전한 관점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집’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면서 종교적 신념으로 인하여 장례절차 문제 때문에 형제간에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형은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고, 동생은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기독교식 장례절차를 고집하다, 형의 방식으로 조문객을 맞이하면 동생이 보지 않고, 기독교 방식에 따르는 동생의 조문객을 대할 때는 형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엄숙해야할 장례식 분위기를 사소한(?) 감정의 싸움으로 망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장자의 입장으로 돌아보면, 이것은 자신의 시비 분별의 집착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면 ‘장례’가 갖는 근원적 의미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된다. 즉 장례는 한 사람의 삶을 마감해 주는 마지막 숭고한 절차이라면 어떤 방식도 다 가능할 것이다.

기독교식이든 전통적 방식이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종결’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절차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장점을 다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장자가 말하는 ‘시비양행是非兩行’의 논리이다. 이것은 세속의 이분법적 가치 관념을 타파하고, 절대적 관념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외물로써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不以物害己)는 내용은 부귀나 공명을 포함한 외물과 희로애락 호오 시비 등 자아의 내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정감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훼상毁傷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를 반성해보면 대부분 어떤 사물과 사건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장자는 바로 ‘물’의 구속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정신 자유의 경지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도道의 관점으로 보기-‘이명以明’


성심에서 도심으로의 전환은 다른 말로 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장자는 사물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구분한다.

장자는 “도道로써 사물을 보면 사물들 사이에 귀천이 없으나 물物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자기는 귀貴하다고 하고 상대방은 천賤하다고 한다.”35)라고 말한다.

도道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체의 것을 평등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들 사이에 피차, 시비, 소대, 성훼成毁, 귀천, 미추美醜, 선악 등의 대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물物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개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물들 사이의 피차, 시비, 대소, 성훼, 귀천, 미추,선악 등의 가치적 구분이 따라오게 . 제물론에서는 이것을 ‘以明’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명의 관점에 대하여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5)『莊子』 「秋水」 “以道觀之, 物無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물物은 피彼 아닌 것이 없으며, 시是 아닌 것이 없다.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보이지 않고, 스스로 안다고 여기면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피彼가 시是에서 나온다고 하면 시是도 피彼에 말미암게 된다. 피彼와 시是는 동시에 생기는 말이다.

비록 그러하나 생生하자마자 사死요, 사死하자마자 생生하며, 가可하자마자 불가不可하고, 불가不可하자마자 가可하게 된다.

시是따라 비非따르고 비非 따라 시是 따르니, 이 때문에 성인이 이에 말미암지 않고 천天에 비추어보는 것은 또한 이에 맡기는 것이다.

시是도 피彼이며 피彼도 시是이니, 피彼도 하나의 시비是非요 차此도 하나의 시비是非니 과연 피시彼是가 있는가? 과연 피시彼是가 없는가?

피彼와 시是가 그 짝을 얻을 수 없는 것을 도추道樞라고 하나니 추樞를 비로소 얻게 되면 그것이 환중環中이다.

그로써 무궁에 응하리니 시是도 하나의 무궁이라면 비非도 하나의 무궁이니라.

그러므로 이명以明만한 것이 없다”36)

36)『莊子』 「齊物論」

“物无非彼, 物无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여기서 장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분법의 타파이다. 장자는 이것(시是)은 언제나 저것(피彼)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것 혹은 저것 홀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것과 저것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고 있어서 하나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可’도 마찬가지로 ‘불가不可’를 전제로 성립된다.


‘시是’도 역시 ‘비非’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시是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과 대립되는 ‘비非’가 있게 마련이고, 시비是非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눈에는 시비라는 것이 고정된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반드시 일정한 시비 표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에는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비 기준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수학자들로 같은 주장을 펼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이분법의 타파는 수학이나 과학적 영역에서 말하는 이분법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속에서 말하는 시비이다.37)


장자는 시와 비의 이분법을 타파한 것을 ‘도추道樞’라고 표현한다. 추樞는 문의 지도리를 가리키니 도추는 일체 사물사건들의 중추이며 중심관절이란 뜻이다. 중심에서 바라보면 어떤 것도 다 용납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장례절차처럼 기독교식이든 전통적 유교방식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매장문화에 대해서 말해보면 ‘매장’이든 ‘화장’이든 어떤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 고집할 수 없다. 다 각자의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方生 方死의 논리를 전개한다.

방方은 ‘..하자마자 곧’의 뜻이다.

생生하자마자 곧 사死이고 사死하자마자 곧 생生하며 가可하자마자 곧 불가不可하며 불가不可하자마자 곧 가可하다는 것은 우주만물이 한 순간도 그침 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순환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멸生滅에 집착하는 것은 물物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고,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생은 곧 사에로 사는 곧 생에로 변화하므로 생사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도以道’ 즉 ‘이명以明’의 태도로 예속禮俗 중에 발생하는 시비, 선악, 미추 등을 평등하고 온전하게(제일齊一)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도의 관점 또는 이명의 관점에 선다는 것은 마치 깊고 긴 꿈속에서 깨어나 밝은 태양 아래에서 사물 사건을 보는 것과 같다.


37) 牟宗三 「莊子<齊物論>講演錄」(四), 『鵝湖月刊』322호, 1쪽 참조.



“꿈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아침에 깨어나서 목 놓아 울고, 꿈에 목 놓아 울던 사람이 아침에 깨어나서 사냥하듯이 즐거워하나니, 그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 또 그의 꿈을 점치다가 깨어난 뒤에야 그것이 꿈인 줄을 알 것이다. 또한 크게 깨침이 있은 뒤에야 이것이 그의 큰 꿈임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하여 세밀히 따져서 환하게 안다고 여기며, 임금은 존귀하고 말 기르는 사람은 고루하다고 하나니, 공자와 너는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꿈이라고 하는 것도 꿈이다. 이러한 말은 그들 어리석은 사람들이 듣고서 터무니 없다고 여길 것이다. 만세 이후에 한 번 그것을 풀어 낼 수 있는 대성을 만난다면 이것은 마치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38)

38)『莊子』 「齊物論」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 牧乎, 固哉! 丘也與女,皆夢也.,

予謂女夢, 亦夢也. 是其言也, 其名爲弔詭. 萬世之後而一遇大聖, 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이상의 재료로써 보면 인간들은 꿈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러한 일체의 꿈에서 깨어나 대각을 성취한 뒤에야 그간의 삶이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무지로부터 벗어나 대각을 이루지 못하는 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대각을 성취해야 비로소 피차 소대 시비 성훼 생사 선악 미추 시간 공간 등 일체의 분변세계를 돌파하고 무대의 소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시비분변이 소멸된 이 세계는 물과 나의 구별조차 없어진다. 그래서 장자는 제물론 결론에서 나비의 비유를 들어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기분 좋게 느낀 나머지 장주는 자기 자신인지를 몰랐다. 갑자기 깨어보니 놀랍게도 장주 자신이었다. 장주가 꿈꾸어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꾸어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物化라고 한다”39)라고 말하면서 만물과 일체가 된 자유로운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物化는 사물들 사이의 차별을 소멸하고 물과 나가 동화하는 의미를 가리킨다. 장자는 여기서 물과 나 사이의 구별을 해소하고 만물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부정하는 만물과 하나가 되는 ‘만물일체’를 나타낸다.

현상계에서는 차별과 구별이 있지만, 초월적 절대의 세계에서는 분별이 없으며 만사만물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齊一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의 차별을 떠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사건들을 제일하게 봄으로써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거나 구애받음이 없이 절대적인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본다.


39)『莊子』 「齊物論」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 「物化」.”



3. 무위자연의 길- ‘비움’


‘도道로 본다는 것’ 즉 ‘이명以明’으로 본다는 것은 비움의 과정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것을 장자는 무위자연으로 설명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장자에서 ‘자연’은 어떤 것에도 구속됨이 없는 독립을 의미하는 정신적 자유를 말하고 있음을 밝혔다.

자연은 정신적(spiritual)인 것이고,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40)

자연을 말하게 되면 무위無爲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무위함 속에 이미 자연이란 말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무위는 무사(무사無私)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조작하려는 마음을 제거해가는 과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무한한 욕망이나 이기심에 흐르는 것을 막고, 그것을 넘어서게 되면, 우리의 행동은 자유로울 수 있고,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위의 결과가 바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사사로움이 없는 무사無私의 경지, 즉 허심虛心의 경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허심의 경지에 따른다는 것은 바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의 이치에 따라 살게 되면 외물의 속박과 상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이치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장자가 제시하는 이상적 삶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허심으로 자연을 따르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특수한 종류의 위도공부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장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비워가고 또 비워가는 ‘손지우손損之又損’의 방법을 제시한다.41) 그리고 또한 ‘심재心齋’ ‘좌망坐忘’42)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심재’는 마음속의 욕념을 씻어내어 허령불매虛靈不昧의 경지, 虛心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을 말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망추구의 성향들을 제거해 버리면 마음이 텅 비게 되고, 마음이 텅 비게 되면 곧 우리의 마음 작용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아서 허령虛靈하게 되는 것이다.43)

그리고 ‘좌망坐忘’은 외물을 잊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것인 본질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형식적인 예악이나, 내용 없는 도덕관념 등이다. 이러한 것은 형식화 외재화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하고, 인간들을 구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장자는 외물을 잊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잊어버리라는 ‘망기忘己’를 주장한다.
망기는 망형忘形과 망심忘心으로 나누어진다. ‘망형’은 감관의 작용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보고 듣고 있다는 의식조차도 없이 보고 듣는 것을 가리킨다. 망심은 일체의 심리작용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사려분별작용’⋅ ‘감정작용’⋅ ‘의지작용’이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세계와 사회는 물론 일체의 외부 사물들과 나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의 경지에로 진입한다. 이러한 경지가 바로 장자가 말하는 고차원의 자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는 바로 참다운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은 비움의 과정으로 대표되는 위爲道의 수양공부 거쳐 자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도가에서는 자아의 본성을 덕德이라고 한다. 이 덕은 천지만물의 본체인 도가 개체에 내면화된 자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덕의 움직임은 도와 마찬가지로 자연自然하다.

만약 어떤 개인이 특수한 종류의 수련을 거쳐 자아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가 그의 본성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아의 본성인 덕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비본래적인 자아로부터 참다운 자아, 즉 진아眞我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40) 牟宗三, 『中國哲學19講』, 90쪽 참조.

41)『莊子』 「知北遊」.
42)『莊子』 「大宗師」참조.
43)『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참조.



Ⅴ. 나가는 말


본 논문은 장자철학의 수양론을 ‘마음치유’와 연관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다. ‘수양’이란 개념은 서양철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양’은 실천을 의미한다.

수양을 통하여 도달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적 인간이란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한계 속에서 삶의 의미와 책임을 다 실현한 사람을 지칭한다. 동양에서 유가 도가 불가를 막론하고 다 이상적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데, 각기 ‘성인聖人’, ‘지인至人’, ‘부처’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양에서 이러한 이성적 인간의 실현 가능성을 언제나 자신의 내면적 근거에서 찾는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순결화’, 즉 수양修養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자에서 수양은 ‘비움’(손損)에서 시작된다. ‘비움’은 자기 극복, 자기개혁을 전제로 한다. 즉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비본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극복의 과정이 바로 자기치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제시하는 이상적 인간은 자유를 실현한 인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수양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한 정신적 경지를 의미하는 자유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속으로부터 탈출을 의미한다.

장자는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고통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마음에서 찾고 있다.


장자는 마음을 인심人心(혹은 성심成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눈다. 성심은 장자의 고유한 개념으로 ‘선입관’ ‘편견’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성심은 도심과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성심은 일상적인 우리의 마음, 다시 말해 평번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좋지 못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도심은 transcendental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경지의 의미를 한다.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있는 인성(성심)은 일상생활 속에서 생겨나는 습속과 자신의 경험, 그리고 자신이 받은 교육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인심(성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시비분별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인심과 성심에 근거하게 되면 인간은 각자 자신의 삶의 기준에 의하여 시비 분별을 하게 되고, 그것에 따라 의견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가 일어나서 분간이 생겨나게 되고, 결국 삶의 고통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심에서 도심으로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도심으로의 전환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전환을 수반하게 된다. 가치관의 전환은 바로 마음의 치유의 과정을 동반하게 된다. 수행을 통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을 획득하게 되면, 자신의 구체적 삶의 영역에서 진실한 생명을 드러내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장자가 수양을 통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한다고 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을 도외시하거나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자가 “마음으로 그 빛을 품고서 세속에 머문다”(화광동진和光同塵)44)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고 맑게 함과 동시에 그 진실감을 구체적 현실 속에서 펼쳐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은 단순히 이론적 탐구의 영역에서 머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 마음치유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고통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실천적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것이다.


44)『老子道德經』, 56장.



<참고 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