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서 읽어낸 양생론과 생명관의 변화
정 우 진*
【주제분류】도가철학,수양론
【주 요 어】『장자』 ,양생,양신,양형,생명관.
【요 약 문】본고는『장자』를 통해 생명관과 도가 수양론인 양생론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검토한 결과물이다. 『장자』는 수세기 동안 지어진 다양한 사조의 원자료를 편집한 문헌이다. 『장자』라는 문헌을 통해 도가 양생론과 생명관에 관한 변화의 통시적 고찰이 가능하다. 도가 수양론인 양생은 생명을 길러내는 것에 관한 이론이다.생명을 길러내는 이론체계로서의 양생론은 생명의 의미 변화에 따라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내편에서 확인되는 『장자』양생론의 목적은 세상과의 온전한 합일 혹은 순연한 감응이다. 순연한 감응을 위해서는 개체적 나를 비워내야 한다. 개체로서의 나를 비우면 대상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전일(專一)적 체험에 이른다.그런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의 생명은 육체로서의 물리적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감응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이다.개체성에 구속되었던 정신을 잘 길러냄으로써 우주적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장자』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던 생명은 그와 같은 보편 정신이었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흡술이나 도인술 같은 양생술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후에 이런 양생술은 신이 아니라,육체를 길러내는 기법으로 재해석되었다.
『장자』「각의」편과 「달생」편에는 양형가에 대한 장자후학들의 논박을 볼 수 있다. 장자후학들은 양생의 생을 우주적 정신의 양육이 아니라,물리적 육체의 양육으로 해석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신을 기르는 양생을 형을 기르는 양형으로 해석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이다.이들의 논박을 통해 ‘양신→양형’이라는 변화와 그런 변화를 초래한 생명관의 변용 즉,‘신→형’을 읽어낼 수 있다.
*경희대학교 철학과
1. 들어가며
국내학자들에게『도덕경』과『장자』는 도가의 토대문헌으로 받아들여진다.그러나 이 생각은 후대에 재구성된 것이다. HaroldD.Roth는 이 문제점을 지적한다.
“전통적 관점과 달리 나는 노자와 장자가 도가의 유일한 문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현학(玄學)에 의해서 재구성되기 전까지는 노장이라는 도가학파가 있었다고 보지도 않는다.”1)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반드시 사상사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사상사는 현재적 문제의식에 토대해 과거를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구성된다.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노장을 단일한 학파로 보는 견해가 무의미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도덕경』과『장자』에는 양자를 하나로 묶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도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無爲’ 의 강령은 양 문헌에 공통적이다.그러나 두 문헌의 경향은 다르다.
『도덕경』은 통치술 쪽으로 경도되어 있다. 양생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도덕경』의 양생론은 통치를 위한 수단이라는 특성이 강하다. 자연관과 양생론은 『장자』쪽에서 두드러진다.
『장자』의 양생론은 통치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도가의 양생론은『도덕경』보다는 『장자』쪽에서 탐색되는 것이 적절하다. 『장자』양생론은 생명의 양육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따라서 양생론의 변화는 생명관의 변화를 함축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명관의 변화는 양생론의 변화를 의미한다.
현행본『장자』는 郭象(252-312)에 의해 편집되었다. 곽상은『장자』를 내,외,잡편으로 분류했다.
『장자』가 다양한 사조가 결합된 문헌이라는 뜻이다.
『장자』의 성립에 관한 논의는 리우샤오간(劉笑敢)등에 의해 상당히 잘 정리된 상태라고 평가받는다.2)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잘 정리 소개 된 바 있다.3) 그러나 현대적인 문헌고증이 시도되기 전부터 『장자』외잡편은 후대의 것이라고 보는 점에 관해서는 이설이 없었다. 시대를 달리하는 이질적 논문으로 구성되었다면,
『장자』내에서의 통시적 연구 즉,양생론과 생명개념의 변화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
『장자』의 생명관에 대한 논의는 국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적지 않게 발표되어 왔다.4) 그러나 기존의 논의는 생명개념자체에 대한 연구이거나,타자성의 극복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연구한 것이다.5)
마루야마 도시야끼(丸山敏秋)와 사와다 타키오(澤田多喜男)는 도가수양론인 양생을 양신,양형,양심 등으로 구분해서 연구했다.6) 그러나 이들은 양생을 구분했을 뿐,통시적인 측면에 집중해서 고찰하고 있지는 않다. 생명관의 변화와 연결 지어서 살펴보지도 않았다.
본고에서는『장자』에 토대해서 전국중후기부터 전한기 사이에 일어난 양생론과 생명관의 변화를 검토할 것이다. 이런 연구방법은 생명개념의 시대적 변화상을 보여 줄 뿐 아니라,도가 양생론의 변화와 상호관계도 엿볼 수 있게 할 것이다.
1)HaroldD.Roth,“TheLaoziinTheContextofEarlyDaoistMysticalPraxis”, Mark Csikszentmihalyi& PhilipJ.Ivanhoeed.,Religiousand Philosophical AspectsoftheLaozi(New York:StateUni.ofNew YorkPress,1999),p.61.
2)김충렬, 『노장철학강의』(서울:예문서원,2001),229쪽.“문헌 고증의 문제는 유소감의 반증적인 분류작업으로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3)강신주, 『장자의 철학』 (서울:태학사,2004),53~66쪽 참조.
4)장자생명관에 대한 선행연구는 박현채, 『장자의 생명관 연구-타자성 극복 논리를 중심으로-』 ,성균관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2012,14~15쪽을 참조할 것.
5)박현채의 학위논문 『장자의 생명관 연구』(2012)와 강신주, 『장자의 철학』(서울:태학사,2004)는 모두 타자성의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장자철학을 고찰한 것이다.
6)丸山敏秋, 黃帝內經と古代中國醫學 (東京美術,1988);澤田多喜男,「先秦漢初期 養生思想の諸相」, 『中國古代養生思想の總合的硏究』 ,坂出祥伸編(平河出版社,1988).
2. 양신적 양생론과 정신으로서의 생명
익히 알려져 있는 포정해우 고사에서 ‘생명’과 생명을 기르는 ‘양생’ 에 관한 장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손이 닿는 곳,어깨로 기대는 곳,발이 밟는 곳,무릎이 구부리는 곳 마다 획획 소리가 나면서 칼이 움직이는 대로 싹둑싹둑 울렸다.그 소리는 모두 음률에 맞고,상림의 무악과도 조화로우며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그런데 포정은 기술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문혜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금,저는 신으로써 만났지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눈과 마음의 작용이 멎자, 정신의 작용만 남은 것입니다...그의 말을 듣고 문혜군이 말했다.“좋구나,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을 알게 되었다.”7)
7)『莊子』 ,「養生主」:庖丁爲文惠君解牛,手之所觸,肩之所倚,足之所履,膝之所踦,砉然嚮然,奏刀騞然,莫不中音.合於桑林之舞,乃中經首之會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得養生焉.
이 단락의 핵심은 양생에 있다.그러나 도대체 백정의 도축을 보고 양생의 도를 알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장자』전체를 살펴봐야 그 의미를 알수 있다.
감관의 작동에 의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虛를 성취했다는 말이다. 허는 거의 모든 문화권의 수양론이나 명상법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허의 대상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욕망,감정,지식과 같은 것들이다. 욕망과 감정은 일상의 범속한 사람들이 지니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감관을 통해 세상과 접한다.감관과 접하면 먼저 욕망이 일고 이어서 감정이 따른다.어떤 욕망도 성패를 떠날 수 없다.성공과 패배는 찰나적인 기쁨과 고통을 선사한다.「至樂」편에서는 이 점을 선언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높이는 것으로 부귀와 장수 그리고 선함이 있다.
즐기는 것으로는 몸의 편안함과 좋은 음식,좋은 옷,미인,좋은 소리가 있다.
낮춰보는 것으로는 빈천과 요절 그리고 악함이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몸이 편안치 못한 것,입으로 맛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눈으로 미인을 보지 못하는 것,귀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있다.만약 얻지 못하면 크게 근심하면서 두려워한다.그러니 그 몸을 위함에는 또한 어리석도다.8)
8)『莊子』 ,「至樂」:
夫天下之所尊者,富貴壽善也.,
所樂者,身安厚味美服好色音聲也.,
所下者,貧賤夭惡也.,
所苦者,身不得安逸,口不得厚味,形不得美服,目不得好色,耳不得音聲.,
若不得者,則大憂以懼,其爲形也,亦愚哉!
요지는 네 가지다.
첫째,호오 때문에 욕망이 생긴다.둘째,욕망은 심적 고통을 초래한다.셋째,심적 고통은 생명에 해롭다.넷째,자신을 위하는 행위가 결국은 해가 된다.
『관자』에서는 감관과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마음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와 같은 심성론 위에 양생론을 건설하고 있다. 주체로서의 마음이 욕정에 따라 떨리는 마음 즉, 意를 제어하고 고요히 만듦으로써 신을 초래하는 것이『관자』의 수양론이다.9)
『장자』에는 마음에 관한 세밀한 묘사가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감관과 그로 인한 지각이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참된 생명을 갉아먹는 다는 생각은『장자』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9)정우진,「선진시기 양심적 양생술의 전개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71권,2012.
"잠잘 때 혼은 세상과 만난다. 깨어있을 때는 몸이 열린다.함께 접하여 얽힌다. 매일 마음이 다툰다
...그 놓여남은 활과 같으니 시비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마치 중요한 맹세처럼 자신의 판단을 고집한다.그리고 그것(즉,자신의 판단을 견지하는 것)을 승리를 지켰다고 말한다.(그러나)그 때문에 진정한 생명이 가을겨울의 생명이 생기를 잃어가는 듯이 없어진다.10)
10)『莊子』 ,「齊物論」: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與接爲搆,日以心鬪
...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其殺若秋冬,以言其日消也.
감관으로 세상과 와중에 자극받은 욕망은 마음의 갈등을 초래한다. 세상과 접할 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입장의 관철을 승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장자가 제안하는 삶은 ‘나’를 고집하면서 감관을 통해 세상과 접하는 그런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자가 말하는 이상적 인간인 진인은 꿈도 꾸지 않고,근심도 없다.
“옛날의 진인은 잠잘 때 꿈을 꾸지 않고 깨어있을 때는 근심이 없다.”11)
11)『莊子』 ,「大宗師」:古之眞人,其寢不夢,其覺無憂.
물론 다른 이들보다 훨씬 많은 욕망을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욕망의 뒤에 따라 붙는 허망함은 무엇을 증명하는가?이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위의 인용문 바로 뒤에 장자가 처의 죽음에 대처하는 구절이 실려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자의 처가 죽었다.혜자가 조문했다.
장자는 막 다리를 벌리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혜자가 장자를 탓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처가 처음 죽었을 때는 나라고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시작을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라는 것은 없었다. 생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기마저도 없었다.
황홀한 가운데 섞여있다가 변하여 기가 있게 되었고,기가 변해서 형체를 이루게 되었으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있게 되었다.
이제 또 변하여 죽게 된 것은 춘추동하 사시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것이다.12)"
12)『莊子』 ,「至樂」:
莊子妻死,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莊子曰,不然.是其始死也,我獨何能無槪然!
察其始而本無生,非徒無生也而本無形,
非徒無形也而本無氣.
雜乎芒芴之間,變而有氣,氣變而有形,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장자는 운명적 패배인 죽음을 예시함으로써,적극적인 욕망의 완성을 부정한다.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났음을 지적하는 말을 부언함으로써,사회적 관습도 극복해야 할 편견임을 지적한다. 장자가 사회의 주류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찬양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그들은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지만 참생명을 살고 있는 이들로 묘사되고 있다.
백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포정해우의 고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포정이 감관과 지각으로 소를 접하지 않았다는 말은 욕망과 시비를 벗어났다는 말이다.그리고 신으로 만났다는 말은 개체적 ‘나’를 넘어서서 세상과 감응했다는 말이다. 이 해석은 위나라의 임금을 만나러 가는 안회에게 공자가 해준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나라 임금을 만나서 폭정을 그만둘 것을 설득하겠다는 안회에게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자가 말했다.너는 뜻을 한결같이 하라.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기로 들어라.귀는 듣는 것에 머물고,마음은 상징에 머문다.
기라는 것은 텅 비어있으면서 외물을 맞이하는 것이다. 도는 텅 빈 곳에 모이니,텅 비움이 바로 심재다.13)"
13)『莊子』 ,「人間世」:仲尼曰:「若一志,无聽之以耳而聽之以心,
无聽之以心而聽之以氣! 耳止於聽,心止於符.
氣也者,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虛者,心齋也.」
인용문의 ‘귀로 듣지 말고,기로 들으라는 것’은 앞의 ‘눈으로 보지 않고 신으로 만났다’는 포정의 말과 같다.
인용문을 정리하면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 텅 빈 곳을 보라.텅 빈 방에 흰 빛이 생겨나니 상서로움이 머무는 도다.
무릇 머물지 못하는 것,이것을 두고 좌치라고 한다.
무릇 (외부로 향하는)이목을 안으로 돌리고 (안에서 작동하는)심지를 밖으로 돌리면 귀신이 장차 와서 머물 것이다.”14)
김충렬은 이곳에 나오는 ‘虛室生白’ 의 ‘白’이 ‘순수정감’이라고 말한다.15)
14)『莊子』 ,「人間世」: 瞻彼闋者,虛室生白,吉祥止止.
夫且不止, 是之謂坐馳.
夫徇耳目內通而外於心知,鬼神將來舍.
15)김충열, 김충열교수의 『노장철학강의』(서울:예문서원,2001),306쪽.
김충렬의 해석을 포정해우의 ‘以神遇’에 적용하면,포정은 순수정감의 상태 즉 완전한 감응의 상태에서 解牛한 것이 된다.그런 경지가 양생의 목표라면 양생의 생명은 물리적 생명이 아니다.
“평생 힘써 일하나 끝내 성공을 보지 못하고 피곤하고 지쳐서는 갈 곳을 알지 못하니,슬프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그를 두고 죽지 않았다고 한들 무슨 이익됨이 있겠는가?”16)
16)『莊子』 ,「齊物論」: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人謂之不死, 奚益!
물리적 생명의 지속은 장자의 목표가 아니었다.그렇다고 양생의 생은 개체수준의 의식도 아니었다.
“그 몸이 변화함에 마음도 따라 변한다.또한 슬프지 아니한가?”17)
17)『莊子』 ,「齊物論」:其形化,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그렇다면 양생의 생명은 무엇을 가리킬까? 포정은 신으로 만난다고 했고,문혜군은 이것을 양생의 선례로 보고 있으므로,생명은 결국 ‘신’ 이다.
그러므로 양해군이 말하는 양생의 도는 결국 양신의 도를 말한다.그런데 이 때의 신은 어떤 의미일까?
정세근은 『장자』의 신개념을 신령의 신, 형신의 신,귀신의 신,新奇혹은 神氣의 신,신명의 신으로 나눈다.
이 중 형신의 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몸과 함께 쓰이고는 있지만 나의 마음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큰마음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은데,이것은...보편 정신을 뜻한다...단순한 신령스러움을 넘어 우주가 갖춘 정신의 능동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주목된다.”18)
그리고 정신에 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정신은 개인의 영역이면서도 우주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점은 형신의 신에서 보았던 것처럼 개별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는 용법이다.마음이 나의 마음과 큰마음으로 쓰이며 개인의 마음과 우주의 마음을 일컫는 것과 같이 정신도 개인의 정신에서 우주의 정신에로 확장되고 있다.”19)
18)정세근,「장자의 정신」, 『동서철학연구』64호,2012,166~167쪽.
19)정세근(2012),172쪽.
장자 는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않았다.어쩌면 그건 너무나 쉬운 것이었고,상식적인 것이지만,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나는 앞의 공자와 안회의 대화를 통해 또한 동시대의 다른 문헌속에서 언표난해한 이 방식의 대강을 그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의 인용문을 상기해 보라.
안회와 공자의 대화에서는 氣로 들으라고 했다.기로 듣는 것은 말을 듣지 말고 소리로 들으라는 말과 같다.그건 맹자의 ‘知言’과도 유사하다.
맹자는 무엇에 능한가라고 묻는 제자에게 자신이 지언을 잘한다고 한다.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치우친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무엇에 가려져 있는지를 알고 음난한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디에 빠져있는지를 알며,사특한 말을 들으면 그가 떠난 바를 알고,회피하는 말을 하면 그가 곤궁해하는 바를 안다.21)"
21)『孟子』 ,「公孫丑章句上」:詖辭知其所蔽,淫辭知其所陷,邪辭知其所離,遁辭知其所窮
맹자의 지언은 말의 문자적 뜻을 잘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그건 말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어조와 떨림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실한 내면, 정말로 전하고자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는 의미다.22)
같은 인사에서도 건방짐과 겸손함을 구분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장자』는 그것이 氣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진정한 접촉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지각 이전의 기이다. 『장자』는 세상을 一氣를 상정하고 만물을 그런 일기의 변화로 묘사한다.
"만물은 하나다.아름다운 것을 신기롭다 하고 흉한 것을 썩은 내가 난다고 한다.
그러나 썩은 내 나는 것이 화하여 신기한 것이 되고,신기한 것은 썩은내 나는 것을 바뀐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하를 통틀어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23)"
23)萬物一也,是其所美者爲神奇,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復化爲神奇, 神奇復化爲臭腐.
故曰: 通天下一氣耳.
그러므로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해 세상과 접하는 것은 일기에 참여하는 방법이다.24) 기로 들었다면 말로 전하지 말고 소리로 전해야 한다.그러므로『장자』는 기로 들으라고 말한 후,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너의 말이 받아들여질 것 같으면 울고,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멈춰라.”25)
운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소리로 전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말의 떨림을 알아챈다.엄마의 자장가 속에서 아이는 어떻게 엄마의 사랑을 잡아내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갓난아이나 동물마저도 쉽게 알아채는 그 진실을 위왕은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그것은 세상에 대한 호오 등을 일으키는 개체성 때문이다. 『장자』가 개체성을 허물기 위해 지속적으로 허를 주장하는 이유다.
기로 들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안회는 자신을 비운 상태에 도달했음을 고백한 후,그것이 허냐고 묻는다.
“안회가 말했다.제가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때는 진정 제가 있었지만,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일찍부터 회가 없었습니다.이를 허라고 할 수 있습니까?”26)
24)우제권은 기의 인지적 특성을 몸에 토대해서 설명한다.즉,장자의 세계관에 따르면 몸은 개체이자 전체이며 모든 지각과 인지 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우제권, 「장자의 심미적 생명미학연구」,『열린정신인문학연구』9집 2호,2008,93쪽.그의 논리는 논자와 다르지만,기에 단지 존재론적 측면뿐 아니라 인지적 측면도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부합한다.
25)『莊子』 ,「人間世」:若能入遊其樊而無感其名,入則鳴,不入則止.
26)『莊子』 ,「人間世」:顔回曰, 回之未始得使, 實有回也., 得使之也, 未始有回也.,可謂虛乎?
세상과의 접촉을 매개한다는 점에서는 신과 기의 위상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포정해우의 고사에서 말하는 신으로 만난다는 말과 공자가 안회에게 기로 들으라는 말이 사용된 맥락이 동일하다면,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기로 듣는 것이 바로 자유해방의 통쾌함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위왕의 말을 말이 아닌 기로 듣는데 성공했을지라도,안회는 정신적 자유의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회와 공자의 대화에서는 기로 들으라고 말할 뿐 신으로 만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포정은 자신의 기예 속에서 자유해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포정이 소를 도축하는 과정은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그것은 고대의 신비한 음악에도 잘 맞는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았다. 손이 닿고 어깨로 의지하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구부림이 모두 획획거리고 칼을 놀림도 휙휙하여 모두 소리에 맞았고, 상림의 춤에도 부합했으며,경수의 음률에도 적중했다.27)
27)『莊子』 ,「養生主」:庖丁爲文惠君解牛,手之所觸,肩之所倚,足之所履,膝之所踦,砉然嚮然,奏刀騞然,莫不中音.合於桑林之舞,乃中經首之會.
기로 듣고 소리로 울어서 감응시키는 것이 단순히 세상 속에 참여하는 진인의 처세법이라면, 신으로 만나는 것은 대붕이 소요하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포정해우의 고사가『장자』의 양생을 대표한다면, 『장자』의 양생은 나의 정신을 길러 천지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인 동시에,그 결과 9만 리를 치솟아 여섯 달 바람을 타고 자유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나의 정신과 우주의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다.개체성을 넘어선 순간 나의 정신은 우주의 정신이라는 본모습을 드러낸다.
LiviaKohn은 장자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장자철학은 “신비적 세계관에 관한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기술로서,..점진적으로 복잡해지는 영혼의 체험에 관한 설명과 체계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지적체계다.”28)
콘이 말하는 신비체험은 일기 즉,우주적 정신에 합일하는 순간의 주관적 상태다.
그러므로 『장자』양생론의 생명은 개체적 정신이자 우주적 정신으로서 개체성을 넘어 우주와 합일될 수 있는 수단이자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8)Livia Kohn,Early Chinese Mysticism: Philosophy and Soreriologyin theTaosist Tradition(Princeton:PrincetonUni.Press,1992),p.34.
3. 양형적 양생론과 물리적 생명관의 대두
장자의 전략은 다양하다. 『장자』라는 글의 형식마저도 그런 전략이라고도 평가받을 수 있다.
RobertE.Allinson은 그런 입장에 서 있는 학자 중 한명이다.
“장자 전체가 관심을 기울이는 하나의 철학적 과제...그것은 바로 자기변화라는 과제다...나는 장자의 본문에 나타나는 내용상의 단절과 매우 완곡한 문학적 형식은 자기 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과 체계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29)
물론 『장자』의 우언, 중언, 치언에 일종의 의도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런 접근은 새롭지 않다.그런데 『장자』는 글의 형식뿐 아니라 글에 등장하는 인물마저 전략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건 태도와 행동을 재구성하고 삶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포정해우고사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단순히 포정과 같은 하찮은 기술자뿐 아니라 불구자도 종종 등장한다. 이런 이들을 등장시키는 까닭은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려는 데 있다. 개인의 成心뿐 아니라 개체에게 내화된 사회적 편견도 참된 생명을 획득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장자』가 불구자나 범죄자 등을 등장시키는 것은 정신적 자유해방을 누리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평할 수 있다. 『장자』에는 이처럼 글을 통한 전략 외에, 세상과 전일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전략이 있다.
RobertSantee는 ‘坐忘’과 ‘心齋’가 그런 기법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장자에는 사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제한과 한계를 비워내기 위한 기법으로,두개의 기본적인 경험적 과정이나 기법을 소개하고 있다.하나는 좌망이고 둘은 심재다.”30)
심재나 좌망의 요지는 모두 허와 허를 위한 비움에 있다.
“안회가 말했다.사지를 떨어뜨리고 총명도 내쫓고 형체를 떠나고 앎을 버림으로써 대통에 가까워진다.이를 일러 좌망이라고 한다.”31)
“ 비운 것이 심재다.”32)
심재나 좌망은 허에 도달하기 위한 명상법이다.심재의 재는 제관의 재계와 상통하고,좌망은 앉아서 호흡명상에 집중하다 망아에 빠진 상태와 부합한다.심재나 좌망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호흡명상법이나 도인법 등의 적극적인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33)
29)RobertE.Allinson,김경희 역, 장자: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서울:그린비,2004), 11쪽.
30)Robert Santee,“The Zhuangzi: A Holistic Approachto Healthcare and Wellbeing,” Livia Kohne di.,Living Authentically(Three Pines Press,2011),p.52.
31)『莊子』 ,「大宗師」: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此 謂坐忘.
32)『莊子』 ,「人間世」: 虛者,心齋也.
33)장자의 시기에 호흡술이 있었음을 확신시켜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흔히 호흡술의 증거로 예거되는 행기옥패명은 총 36자 중,중복되지 않고 한 번씩 사용된 글자는 오직 22자 뿐이다. 22자 중 논쟁이 되는 글자가 10개나 된다. 더군다나 행기옥패명의 글은 읽기에 따라 단순히 우주발생론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민승준은 이 명문의 성립시기를 전국중후기로 보고 있다.민승준,「행기옥명 명문고찰」,『서예학연구』23호,2013.그렇다면 행기옥패명을 근거로『장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호흡법이 있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논자가 확인한 바로는 확실한 자료중 가장 빠른 것은 마왕퇴발굴문헌인 십문이다.
십문에는 “장차 장수하고자 하면, 반드시 피부로 호흡해야 한다.”(將欲壽神,必以腠理息)는 말이 보인다.정우진,「마왕퇴발굴양생서 십문역주」, 도교문화연구 ,2010,347쪽
그렇지만『장자』내편에만 한정해도 현대인의 눈에 육체적 생명을 지향하는 도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두 곳을 들 수 있는데 하나는 「大宗師」에 나오는 진인에 대한 기술이고,둘은 「齊物論」의 그 유명한 천뢰,지뢰,인뢰가 보이는 부분이다.먼저,「제물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남곽자기는 궤에 의지해서 앉았다가 하늘을 향해 숨을 허하고 내뱉는다.그 모양이 마치 짝을 잃은 듯 하였다.안성자유가 입시하고 있다가 말했다. 어째서 입니까? 몸을 진정 고목처럼 만들 수 있고,마음을 다 타버린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지금 궤에 기대서 앉아계신 분은 어제의 그분이 아니십니다.
자기가 말했다. 앉아라,네 질문이 좋구나.오늘 나는 나를 잃었다.너는 그것을 아느냐.34)"
34)『莊子』 ,「齊物論」: 南郭子綦隱机而坐,仰天而噓,荅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机者,非昔之隱机者也.」
子綦曰:「偃,不亦善乎? 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噓는 호흡을 참다가 특별한 소리를 내면서 내뱉는 숨소리일 가능성이 있다.
『漢書』「王襃列傳」에서는 ‘呴噓呼吸如僑松’이라고 했는데,顔師古는 주에서 “구와 허는 모두 입을 벌려 기를 내뱉는 것이다.”35)라고 말하고 있다.
35)『漢書』 ,「王襃列傳」:呴噓皆開口出氣也.
‘枯木死灰’는 그런 호흡법에 수반되는 신체의 변화로 볼 수 있다.그렇다면 ‘吾喪我’는 물론 호흡에 수반되는 주관적 체험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본고의 분류에 따르면 양형술이라고 해야 할 호흡법이 양신적인 전일적 체험의 수단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大宗師」의 내용도 익히 알려져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고,깨어있어도 근심이 없다.
먹을 때도 달게 여기지 않지만,숨은 깊고 깊다.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지만, 평범한 이는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
굴복한 이는 그 목으로 말하는 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과 같고,기욕이 심한 이는 숨소리가 얕다.
옛날의 진인은 생을 좋아할 줄 몰랐고,죽음을 싫어할 줄 몰랐다.36)
36)『莊子』 ,「大宗師」:古之眞人,其寢不夢,其覺無憂,
其食不甘,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衆人之息以喉.
屈服者,其嗌言若哇.其耆欲深者,其天機淺.
古之眞人,不知說生, 不知惡死.
진인은 생사를 넘어선 자유해방의 경지에 들어선 이상적 인물상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의 숨을 묘사한 대목이 흥미롭다. 그의 숨은 발뒤꿈치로 쉰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내용은 보다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일종의 호흡명상법(breathmeditation)으로 해석할 수 있다.37)
그리고 이곳에서도 호흡은 전일적 체험을 위한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장자』내편에서 호흡법과 같은 생리적 기법은 양신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윤래는 호흡법과 같은 기수련을 득도와 양생의 이념에 따라 구분한 바있다.
“기를 수련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학파 혹은 종파에 따라 목적을 양생에 두느냐 아니면 득도에 두느냐에 따라 달랐다.”38)
인용문에서 말하는 양생의 생명은 물리적 생명인 형일 것이다.그렇다면 조윤래는 기수련을 목적에 따라 둘로 나누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틀이 양신과 양형의 분기라는 문제에도 차용될 수 있다고 본다.
즉,신을 기르는 것은 양신론이고 형을 기르는 것은 양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논자가 아는 한,『장자』는 양신과 양형이 대척적으로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는 가장 빠른 문헌이다. 『장자』 와 유사한 시기에 성립된 어떤 문헌에서도 양신과 양형을 대척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양생에 관한 이설이 등장하지 않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刻意」편에는 “호흡법으로 묵은 숨을 내쉬고 새로운 숨을 들이마시며 곰처럼 목을 빼고 새처럼 쭉 펴는 것은 장수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이는 도인지사로 양형하는 사람이며 팽조와 수고가 좋아하는 것이다.”39)라는 문장과 “순수하여 잡되지 않고,고요한 가운데 한결 같아서 변치 않으며 담백하여 무위하고 움직이되 하늘을 따라 운행하는 것 이것이 양신의 도이다.”40)라는 말이 보인다.41)
37)종식에 관한 논의는 石田秀實,「踵息考」, 『中國古代養生思想總合的硏究』,東京,平河出版社,1988을 참고할 수 있다.이 논문에서 이시다는 종식의 생리적 토대에 초점을 맞춰서 논하고 있다.
38)조윤래,「도교의 치병관」, 도교학연구 ,2001,7쪽
39)『莊子』 ,「刻意」:吹呴呼吸,吐故納新,熊經鳥申,爲壽而已矣.,此導引之士.養形之人, 彭祖壽考者之所好也.
40)『莊子』 ,「刻意」:純粹而不雜,靜一而不變,惔而无爲,動而以天行,此養神之道也
41)「각의」편에 나오는 구취호흡을 단순히 호흡법이라고 해석한 것은 방편이다.실은 구취호흡이 토고납신과 대등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토고납신과는 다른 종류의 호흡법일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구취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馬繼興,『馬王堆古醫書考釋』 ,湖南科學技術出版社,825~26쪽을 참조할 것.
문장의 행간에서 어렵지 않게 육체로서의 생명을 기르고자 하는 양형에 대한 비판을 읽어낼 수 있다.그렇지만 팽조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데서, 또 장수하기 위할 뿐이라는 데서, 양형의 의의를 인정하는 태도도 엿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형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장자본연의 가르침인,虛無恬淡한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우주적 생명의 회복을 추구하는 양신의 목표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형의 세속적 효과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刻意」편의 저자들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들은 허무염담이라는 양신의 방식을 따르면 양형의 효과가 일어난다는 말을 덧붙여 두었다.
“평이하고 담박한 태도를 유지하면,우환이 들어오지 못하고 사기도 습격하지 못하다.”42)
邪氣의 습격은 한의학에서 외인을 이야기할 때,주로 사용하는 설명이다.그런데 흥미롭게도『황제내경』에서는 “정신이 안에서 지키면 병이 어디로 들어오겠는가?”43)라고 해서,내부의 정신이 사기를 막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내용은『 회남자 에서도 보인다.
“정신이 안에서 몸을 지켜 밖으로 넘쳐나지 않으면 지난날의 그 이전을 볼 수 있고,미래의 뒷날을 볼 수 있다.”44)
『관자』에서도 정신은 허무염담의 방식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삼가 그 집을 치우면 정이 장차 스스로 올 것이다.”45)
그러므로 이런 구도는 초기도가문헌에서 공유하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42)『莊子』 莊子 ,「刻意」:平易恬惔,則憂患不能入,邪氣不能襲
43) 素問 ,「上古天眞論」:精神內守,病安從來
44)『淮南子』,「精神訓」: 精神內守形骸, 而不外越, 則望於往世之前, 而視於來世之後.
45)『管子』 ,「內業」: 敬除其舍, 精將自來
「각의」편에서 말하는 효과는 『관자』사편에서 말하는 물리적 효과의 발전적 양상이다.
“정이 존재하여 절로 생겨남에,그 밖은 안녕하여 내장을 우물의 근원으로 삼는다. 넓고도 화평하여 기의 연못이 된다. 연못이 마르지 않음에,사지가 견고하게 된다.우물이 마르지 않으면 구규가 완전히 통하여 천지를 궁구하고 사해를 덮을 수 있다.속으로는 미혹된 뜻이 없고 밖으로는 사기의 재앙이 없다.”46)
『관자』보다는 「각의」편이 조금 더 구체적이지만, 양신의 방식과 그 효과라는 기본구도는 부합한다.
「각의」편에서는 양형을 비판하면서도,양신으로도 그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달생」편의 논조는 약간 다르다.
"양형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필요하다.(그러나)사물에 남음이 있다 해도,몸을 기르지 못하는 이가 있다.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형이 필요하다.그러나 형을 잃지 않았는데도 생명을 잃는 이가 있다.
생명이 옴을 막을 수 없고,그 떠남도 제지할 수 없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양형으로도 생명을 보존하기에 족하다고 하지만,실로 양형으로는 생명을 보존하기에 부족하니,어찌 양형이 일삼을 만한 것이겠는가?
일삼기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반드시 행하면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47)"
47)『莊子』 ,「達生」:
養形必先之以物, 物有餘而形不養者有之矣.
有生必先无離形, 形不離而生亡者有之矣.
生之來不能却,其去不能止.
悲夫! 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而養形果不足以存生,則世奚足爲哉!
雖不足爲而不可不爲者,其爲不免矣
「각의」편의 전략이 타인을 인정하는 태도위에서 비판하는 것이었다면, 「달생」편에서는 상대를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물이 필요하다는 것은,몸을 먹여 살리는 조건으로서의 음식이나 기타의 보양식을 말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생명과 형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을 뿐,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의 생명과 형의 구도는 형신의 구도로 해석될 수 있다.이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헌으로 우회해야 한다.
『회남자』 「原道訓」에 보이는 다음 구절은 形神觀의 전범을 보여준다.
“형은 생의 집이요, 기는 생명을 채우는 것이며,신은 생을 제어한다.”48)
『회남자』에서는 형과 신 사이를 생과 기가 매개하고 있다. 이것과 비교하면 장자 「달생」의 내용은 간단하다.생명 안에 기와 신을 포함해서 이해해야 한다.49)
따라서 「달생」편의 생을 氣나 神으로 대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상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인용문을 다시 보면,좀 특이해 보이는 구절이 눈에 띈다.
형을 잃지 않았는데도 생명을 잃는 이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건 주로 희노애락 등의 內因으로 인한 사망,그 중에서도 외관상으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어 보이는 사망을 말할 것이다.그리고 의식이 없는 상태도 포함될 것이다.고대 중국인들이 의식이 없는 경우를 죽음과 동일시했을 가능성은 이런 추정을 강화한다. 예를 들어,편작은 괵땅을 지나다가 방술을 잘 아는 중서자로부터 태자의 병과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에 관해 상세히 듣는다. 그러나 편작전의 괵태자에 관한 이야기 속의 죽음을 오늘날의 죽음으로 볼 수 없는 정황이 몇 군데서 보인다.50) 현상자체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에게 생명은 단순한 물리적 생과는 다른 일종의 소통력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의식이 없어진 상태를 죽음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48)『淮南子』 ,「原道訓」:夫形者生之舍也 氣者生之充也 神者生之制也
49)기와 신을 생명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을 수 있다.그러나 형,생,기,신을 형과 생명이라는 두 범주 안에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분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50) 즉,태자가 죽었는데도 태자를 살리기 위해 제례를 지내고 있는 점-“태자는 어떤 병입니까.도성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병기의 평유(치)를 바라는 기도가 뭇 일(衆事)보다도 중요합니까.”(太子何病,國中治穰過於衆事?)-과 편작이 태자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하면서 태자가 숨을 쉬고 있고,사타구니가 여전히 따뜻할 것이라고 말하는 점 - 시험 삼아 궁중에 들어가 태자의 몸을 진찰해 보십시오.틀림없이(當)(태자의)귀가 울리고 코가 벌렁거릴 것인데,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태자의 양쪽 장딴지를 따라가며 음부에 이르면,틀림없이 아직도 온기가 있을것입니다.(試入診太子,當聞其耳鳴而鼻張,循其兩股以至於陰,當尙溫也) - 그리고 편작의 치료를 원하는 왕이 태자의 소생을 원한다고 말하는 점 - 선생이 계시면 살겠지만 선생이 계시지 않으면,태자는 버려져서 도랑과 골짜기나 채우고 영구히 돌아올 수 없습니다.(有先生則活,無先生則弃捐塡溝壑,長終而不得反) - 에서 그런 추론을 할 수 있다.이상의 인용은 『史記』「扁鵲倉公傳」에 의함.
의식은 생명의 중요한 양상이므로 의식이 떠난 경우를 죽음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물론 이런 추정은 고대 중국인들이 숨이 끊어진 경우를 죽음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단지 그들에게 죽음의 외연이 보다 넓을 것이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생명이 떠났다는 것은 형신론에서 말하는 신의 떠남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생」편의 저자가 말하는 양생은 양신이라는 소결에 도달한다. 「달생」편에는 이런 추정을 확신시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다만,형과 정으로 생명을 설명할 뿐이다.
“형이 완전하고 정이 회복되면 하늘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51)
그렇지만,이것은 형과 생의 구도보다는 형신의 구도로 조금 더 나아간 것이다.
「각의」편에는 양신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순수하여 잡됨이 없고,정일한 가운데 변함이 없으며 담백한 가운데 무위하고 움직임에는 하늘을 따라 행하는 것,이것이 양신의 도이다.”52)
양신의 내용은 허무염담을 핵심으로 한다.그런데 이 구절의 바로 앞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몸이 수고로운데도 쉬지 않으면 못쓰게 되고,정을 사용함에 그치지 않으면 소갈 된다.”53)
이 구절의 精은 「달생」편에서 말하는 形精에 대응한다.허무염담하여 무욕하고 무심한 것을 양신의 도라고 하면,그것은 동시에 정신의 지나친 사용을 막는 방식이기도 하다.
「달생」편이나 「각의」편에서는 모두 양형과 양신을 대립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생」편에는 양신이라는 구절이 보이지 않지만,양형과 양신의 구도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었고, 「각의」편에서는 명확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양신과 양형의 대립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淮南子』「精神訓」에서는 “묵은 숨을 내쉬고 새로운 숨을 들이마시며 곰처럼 목을 빼고 새처럼 쭉 펴며 오리가 목욕하듯이 하고 원숭이가 팔을 채듯이 하며 솔개와 호랑이처럼 보는 것은 양형의 사람”54)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泰族訓」에서는 “치신은 양신이 최고고 그 다음이 양형이다.”55)라고 말한다.
『회남자』에서는 양형이 양신보다 수준이 떨어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더 나아가 신과 형을 비교하는 글마저 보인다.
“신은 형보다 귀하다.신이 제어하면 형이 따른다.”56)
양신을 양형보다 고평가하는 이런 태도와는 무관하게 양형의 등장은 양생론의 변화를 보여준다. 장자후학의 시기에 양형의 흐름이 대두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양생의 의미변화 즉,양신에서 양형으로의 변화 혹
은 양형의 분화는 물리적 개체생명으로 바뀐 생명관의 변화를 함축한다.
51)『莊子』 ,「達生」:夫形全精復, 與天爲一
52)『莊子』 ,「刻意」:純粹而不雜, 靜一而不變, 惔而无爲, 動而以天行, 此養神之道也
53)『莊子』 ,「刻意」:形勞而不休則弊, 精用而不已則竭
54)『淮南子』 ,「精神訓」:吹呴呼吸 吐故內新 熊經鳥伸 鳧浴蝯躩 鴟視虎顧 是養形之人也
55)『淮南子』 ,「泰族訓」:治身 太上養神 其次養形
56)『淮南子』 ,「詮言訓」:神貴於形也 故神制則形從.
4. 나가며
『장자』의 세계는 하나의 기가 너울대는 마치 바다와 같은 것이다. 그런 세계관에서 개체는 一氣의 化로 설명된다.기를 통해 세상에 접함으로써 개체는 전체로서의 일기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기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말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런 이유로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기로 들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위나라에 들어가면 울라고 말한다. 말하라거나 설득하라는 말이 아니라 울라고 말했다!
언어는 상대를 굴복시키지만,소리는 상대를 감응시킨다. 기로 듣고 소리로 말함으로써 듣고 말하는 이는 말하고 듣는 이와 하나가 된다. 이처럼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쉬운 일이다. 그건 결코 지적인 과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본래 일기이므로 그저 개체성을 넘어서기만 하면 된다. 그런 개체성을 넘어서면 일기로서의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것을 장자는 천지의 정신과 왕래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우주적 정신 그것이 장자가 말했던 본래의 생명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우주적 생명을 회복하기 위한 양생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大宗師」와 「齊物論」에는 호흡술로 해석될 수 있는 기법의 흔적이 보인다. 이런 양생술은 육체의 건강이 아니라 우주적 정신의 획득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그러나 장자후학의 시기에 이르면 호흡술이나 도인술과 같은 기법들은 물리적 육체의 건강을 추구하는 기법으로 변용되는 현상이 있었다. 이 점은 「각의」편과 「달생」편에서 장자후학들이 육체의 건강을 추구하는 이들을 논박하는 대목에서 해석해낼 수 있다. 장자 본래의 취지를 지키고자 했던 장자후학들은 이들을 양형가라고 불렀다.그리고 자신들을 양신가라고 불렀다. 양형가들은 양생의 생을 개체의 육체로 이해했다.우주적 생명인 정신에서 개체적 생명인 육체로의 변화는 양신에서 양형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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