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莊子』 養生主편에 나타나는 생명의 주인

rainbow3 2019. 12. 5. 22:51


『莊子』 養生主편에 나타나는 생명의 주인

- 생生을 바라보는 장자莊子의 시각을 중심으로 -



황 병 기*



【주제분류】동양철학, 중국철학
【주 제 어】장자, 양생주養生主, 양생, 진군眞君, 육체, 정신, 자연


【요 약 문】

이 글은『장자莊子』「양생주養生主」편의 구성체계와 내용분석을 통해 장자가 지향했던 철학적 관점이 장생불사長生不死와 같은 인간의 물질적 생명이나 또는 무한한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인간의 정신적 생명을 유지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 너머의 도道의 불멸성과 유전성을 지향한 것임을 논한 글이다.


장자에 따르면, 생명은 물질적 생명이든 정신적 생명이든 하나의 물리적인 존재이며 하나의 대상이다. 이런 류의 대상은 생사가 분명하고 사망하고 나면 재가 되어 소멸된다. 그러나 일체의 대상적 존재가 출현할 수 있는 까닭은 이 대상을 생성케 하는 원인,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양생주」편은 생명의 생사문제를 초탈할 것을 말하고 있는 장이다. 이는 ‘때에 편안하고 순종함에 거처한다[安時而處順]’는 구절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제한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상제의 속박에서 풀려남[帝之縣解]’이다. 생명의 주체이자 주재 능력을 가진 참 주인[眞君]은 “불은 전하여 내려간다[火傳]”는 것처럼 불에 비유되며, 이것은 곧 그칠 줄 모르는 자연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것이니 양생주養生主는 이 생의 주인[生之主] 즉 도道를 기르는 방법을 논하는 편이라고 하겠다.


* 한국국학진흥원 / 책임연구위원



I. 머리말


이 글은『장자莊子』「양생주養生主」편의 구성체계와 내용분석을 통해 장자가 지향했던 철학적 관점이 장생불사長生不死와 같은 인간의 물질적 생명이나 또는 무한한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인간의 정신적 생명을 유지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 너머의 도道의 불멸성과 유전성을 지향한 것임을 논한 글이다.


중국 선진先秦시기 도가道家의 대표학자인 장자는 그 이전 시기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점들을 수용하여 「양생주」편을 저술하였다. 후대의 주석가들이 이 ‘양생주’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두 가지 관점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양생주를 ‘생명을 기르는 요체’ 또는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의 주인을 기름’ 즉 생명의 요체를 가꾸어 기른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 양생사상은 특히 중국의 자생 종교인 도교道敎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중국 양한兩漢시기 초기도교의 대표 경전인『태평경太平經』을 비롯하여 다양한 도교 경전, 그리고 황로학黃老學의 이론 속에서 이러한 양생 담론은 정교하게 진전되었다. 위진魏晋시기에는 현학玄學의 대표학자이자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과 상수向秀가 직접적으로 양생을 중심으로 논쟁을 전개한 글을 남겼으며, 이전의 초기도교와 달리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신선도교神仙道敎이론이 성립하였는데 뛰어난 도교학자인 갈홍葛洪은 초기도교의 입장과 달리 장생불사長生不死를 통해 신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이때 다양한 양생의 방법이 동원되며, 특히 그의 독특한 신선사상과 맞물려 양생 방법이 구체적으로 확장되었다. ‘양생’ 하면 떠오르는 방법들, 복용하는 약물, 호흡 방법, 도인導引, 방중房中, 정신 수련, 내단內丹, 외단外丹등은 모두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양생養生’에서의 ‘생生’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는 여러 이설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은『장자』전편에 흐르는 사유를 도의 불멸성과 유전성을 주장하는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이 편의 체제와 내용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II. 「양생주」 편의 체제와 구성


1) 「양생주養生主」편의 구성 체계


‘양생주養生主’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의 논의들이 있어 왔다.
첫째는 생生자체를 중시하여 생生을 보양하는 양생養生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1)이고, 둘째는 생生의 주인이 되는 진군眞君을 보양하는 내용으로 풀이하는 논의이다.2)

앞의 주장은 다소 ‘위아爲我’로 표현되는 이기주의적 관점과 ‘위물爲物’로 표현되는 물질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하지만, 위아爲我이든 위물爲物이든 단순히 인간의 물질적 형체만을 유지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물질적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주재자로서의 정신적 생명까지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뒤의 주장은 인간의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 너머의 총체적인 우주자연의 법으로서의 도의 불멸성과 유전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학계에서 이러한 두 경향을 유물唯物주의 또는 유심唯心주의로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생生을 구성하는 육체와 정신, 또는 몸과 마음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이어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양생’에서의 ‘생生’은 곧 인간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며, 정신과 육체를 모두 아울러 총체적으로 말하는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은 몸과 마음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몸이나 마음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 보존한다는 것이 몸과 마음 어느 하나만을 유지 보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이 공존해야만 진정한 양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 도가의 한 방면에서 단약을 제조하여 복용하거나 도인술을 행하는 등의 몸 단련법을 만들어 왔다. 장자의 언설에서 인간의 생명을 보양하는 의미의 양생술적 사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장자莊子』전편에 흐르는 그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오히려 도道의 불멸과 영원성을 주장하는 도道실체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장자는 인간의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을 유지 보존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면서, 그 인생이 불멸하는 도의 한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양생주 편에서 무궁무진한 도의 유전과 불멸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생명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이 결코 인간의 생명만을 지키고 기르는 것을 옹호한다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양생주養生主」편은 삶의 주인[生之主]인 진군眞君곧 도道를 기르는 것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양생에 관련하여서는 가장 문제되는 편이 양생주 편이다. 이 편에 등장하는 몇 편의 우화와 장자 자신의 언설은 후대 이를 평가하는 학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곽상郭象3)은 ‘양생주’라는 편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대체로 생生이 기름[養]을 통해 보존된다면 양생養生은 지극한 이치이다. (그러나) 만약 기름[養]이 그 한도를 넘으면 기름으로써 생生을 해치게 되니, 양생의 주主가 아니다.4)"

4) 郭慶藩,『莊子集釋』(北京:中華書局, 1961), 115쪽. 郭象注,

“夫生以養存, 則養生者, 理之極也. 若乃養過其極, 以養傷生, 非養生之主也.”


이처럼 곽상은 인간의 생명을 양생의 방법을 통해 유지 보존할 수 있다면 양생만한 것이 없지만 양생이 지나치면 오히려 생명을 해치게 되므로 양생의 요체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곽상은「양생주」편을 양생의 방법이나 도를 언급하는 편으로 파악한 것이다. 양생하는 방법이나 도가 적절하지 않고 과도하면 생명 유지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육덕명陸德明5)은 뒤이어 이를 긍정하였다. 그는『경전석문經典釋文』에서 「양생주」편명의 의미를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양생養生은 이 편을 위주로 삼는다.6)"

6) 郭慶藩,『莊子集釋』(北京:中華書局, 1961), 115쪽. 陸德明釋文, “養生, 以此爲主也.”


육덕명은『장자』 전편에 각 편명의 의미에 대해 짧은 주석을 달았는데, 이말도「양생주」편명에 대한 주석이다. 아마도 당시의 양생과 관련된 내용이 대체로 양생주 편에서 기원한 것임을 말한 것으로 보여진다. 육덕명도 생명을 유지 보존하는 것이 양생의 방법을 요체로 담는다고 풀이한 것이다. 그들은 「양생주養生主」의 ‘주主’자를 ‘주요한 것’ 혹은 ‘중요한 것’이라는 뜻의 주主자로 풀고 있는데 이는 양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방법이나 도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7) 이렇게 파악하는 부류는 현대 중국의 조초기曹礁基8)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양생養生과 처세處世의 원칙을 양생지주養生之主, 혹은 양생지도養生之道라 하였다.

조초기의 말은 곧 양생하는 요체, 양생하는 방법의 의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곽상이 양생의 도를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극히 타당한 행위로 풀고 있는 반면에 조초기는 이 편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혼세混世철학이라고 규정하면서 당시 사회에 대한 소극적 반항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9)



1) 曹礎基는 양생과 처세를 지배하는 원칙을 養生之主혹은 養生之道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양생주」편의 사상을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소극적인 혼세철학으로 규정한다.(曹礎基, 『莊子淺注』, 中華書局, 1982. 42쪽 참조)
또한 중국 근대 서세동점의 시기에 노장 사상을 병적인 것으로 파악한 胡適은 「양생주」와「인간세」편의 인생철학에 대해 인생철학의 폐단으로 규정하고 그 폐단이 크면 일종의 아부로서 그릇된 길을 가고 구차하게 세상에 아첨하는 염치없는 소인을 양성하거나 그 폐단이 적으면 사회적인 괴로움이나 인생의 쓰라림도 모르는 채 홀로 낙천안명하여 자연에 맡기는 폐물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라고 혹평하였다.(胡適,『中國古代哲學史』[송긍섭 외역,『중국고대철학사』], 대한교과서, 1983. 299쪽 참조) 이는 호적이 장자의 양생주 사상을 일신의 장수나 장생을 추구하는 위아적 양생의 술수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2) 예를 들어, 현대의 勞思光은 장자의 사상을 形軀我를 부정하고 情意我를 긍정하는 사상이라고 하였다.(勞思光, 『중국철학사』, 삼민서국인행, 256-288쪽[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탐구당, 1986. 237-272쪽] 참조)

3) 郭象(?~312): 중국 晋나라의 玄學者로『莊子注』를 남겼다.

5) 陸德明(550?~630): 중국 수당 시기의 학자로 당나라 고조 때 국학박사를 지냈다. 626년『經典釋文』을 완성했고, 『莊子音義』등을 남겼다.

7) 南塘韓元震(1682~1751)도『莊子辨解』(奎章閣소장, 20板참조)에서 ‘主’를 ‘方’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도 또한 양생의 방법을 논하는 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8) 曹礎基(1937~ ): 중국 廣州人이며 華南師範大學중문과 교수로 퇴임하였다. 저서로『莊子淺注』,『莊子淺論』등이 있다.
9) 曹礎基,『莊子淺注』(중화서국, 1982), 42쪽 참조.



이와는 달리, 생명 보존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 너머의 도의 불멸을 강조한 주장들이 도교 집단 내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적 관점, 그리고 도가사상가 사이에서 등장하였다.


명청교체기를 살았던 육서성陸西星10)은 전진교全眞敎내에서 기존의 교설과는 다른 학설을 주장하여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후인들은 그의 학술을 내단동파內丹東派로 규정한다. 그는 양생주의 의미를 인간 생명 너머의 천리의 자연을 보존하는 것으로 보았다.


"양생주는 나의 생명의 요체를 기른다는 뜻이다. 내 생각으로는 앞의「제물론」에서 말한 ‘진군’에서부터 아래로 죽 통하는 내용이다. 진군이라는 것은 나의 참주인이다. 이 편은 사람들에게 천리의 자연에 따라 때에 편안하고 순리대로 살면서 장차 이익과 해악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삶과 죽음이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은 뒤에야 주인을 잘 모신다고 이른다.11)"

11) 陸西星,『南華眞經』養生主․總論, “養生主, 養其所以主吾生者也, 其意則自前齊物論中‘眞君’透下. 盖眞君者, 吾之眞主人也. … 此篇敎人循乎天理之自然, 安時處順, 將使利害不惊于心, 而生死無變于己, 然後謂之善養主人也.”


육서성은 인간의 생명을 주인 되게 하는 생명 너머의 천리天理를 기르는 것을 ‘양생주’의 의미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참주인이며 장자가「제물론」에서부터 말한 진군眞君이다.

육서성이 ‘양養’의 대상으로 말한 ‘기소이주오생자其所以主吾生者’는 “나의 생명을 주인으로 만드는 원인자” 곧 인간 생명의 주인인 천리(의 자연)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청대에 와서 유이즙劉爾楫도 육서성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여 ‘양생주’의 의미를 “나의 생生을 주主되게하는 원인을 기르는 것”12)이라고 풀이하였다.

「인간세」의 본문과『장자』의 정연한 철학 체계를 살펴볼 때 이와 같이 ‘주오생主吾生’하는 ‘소이所以’ 곧 진군眞君을 유지 보존하는 것이 양생주의 의미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 불교계의 저명한 사상가의 한 사람인 감산竷山13)은 불교적 관점으로 장자내편을 주석하면서 진군眞君은 바로 본성이자 청정심淸淨心이라고 보았다.


"이 편은 사람들에게 본성을 길러 생명을 온전히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니, 본성이 바로 생명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때에라도 편안하게 순리대로 살도록 가르치면서 몸뚱이를 기르는 것을 탐하지 않고 오직 청정함으로써 욕망에서 벗어나 본성을 기르도록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에 들어가는 공부이다.14)

14) 竷山,『莊子内篇注』「養生主․總論」, “此篇敎人養性全生, 以性乃生之主也. … 敎人安時處順, 不必貪求以養形, 但以清淨離欲以養性, 此示入道之功夫也.”


감산은 본성을 기르고 생명을 온전히 하는 것을 동일한 행위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 바로 본성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육체의 보존만을 탐하는 것은 생명을 기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고, 청정심으로 욕망을 떨쳐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감산은 생명 너머의 생명의 요체, 곧 본성이자 청정심의 유지 보존을 진정한 양생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현대 중국의 진고응陳鼓應은『노장신론老莊新論』에서 장자의 생명(生)은 육체(形)와 정신(神)의 조합이며, 인간 개인의 물질적 형체라는 기초 위에서 그것의 내재적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여, 장자가 물질과 정신의 이분적 구도 하에서 정신생명精神生命을 중시하였다는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양생주」편을 정신생명의 중요성을 천양한 편으로 규정하였다.15) 진고응이 말한 정신생명은 생명을 구성하는 양대 요소로서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구도에서 나온 용어로 생명을 초월한 도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양생주」편의 의미 깊은 문장들 속에는 “생지주生之主”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설명도 없으며 심지어 편을 통틀어 한 개의 주主자도 없지만, 이 편의 맨 마지막 문장이며 가장 중요한 문장인 “기름은 땔감이 되어서 수명을 다하지만 불은 전해져 내려가니 그 끝나는 곳을 모른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고 한 것을 보면, 매우 분명하게도 양생주는 진군眞君즉 도道또는 천리의 자연을 길러 얻는 것이지 육체[形骸]나 정신 방면에 착안한 것이 아니며 후대에 나온 도교道敎의 양생법養生法과는 관계가 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0) 陸西星(1520~1606): 명청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長庚, 호는 潜虚子이다. 揚州興化사람이다. 도교 이론의 수준을 높인 내단가의 한 사람이며 그의 학설을 별도로 內丹東派로 규정하기도 한다.

12) 劉爾楫,『南華因是』養生主․總論, “養生主, 養其所以主吾生也.”
13) 竷山(1546~1623): 명청교체기의 안휘성 사람으로 속성은 蔡, 자는 澄印, 호는 감산, 법호는 德清이다. 남경의 보은사에 출가한 뒤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 황태후가 하사한 대장경 및 금을 받아 海印寺를 건립하고 주지가 되었다.

15) 陳鼓應,『老莊新論』(중화서국, 1991), 170-174쪽 참조.



2) 「양생주養生主」편의 고증 문제


『장자』전편은 동시대의 동일 인물의 작품이 아니다. 내편 은 대체적으로 장자 당시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외편 과 잡편 은 후대의 작품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간주된다.16) 「양생주」편만을 따로 놓고 볼 때 이 편은 상당히 이른 시기에 편집된 것으로 고증할 수 있는 몇 가지 점들이 발견된다.
그 하나로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를 들 수 있다. 포정이 소를 잘 해체하였다는 고사는 당시에 유행하던 말이었다.17) 『여씨춘추呂氏春秋』「계추기季秋紀․정통精通」에도 포정해우의 기사가 있다. 「양생주」편에서는 포정해우의 고사를 아주 정교하게 그 정황을 묘사하였지만『여씨춘추』는 오히려 소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송宋의 포정은 소를 잘 해체하였는데 보는 것이 죽은 소 아닌 것이 없었고 3년이 지나서는 산 소를 보지 못하였다. 칼을 사용한 지 19년이나 되었는데도 칼날이 새로 간 듯하였으니 그 결을 따라서 소를 정성스럽게 다루었기 때문이다.18)"

18)『呂氏春秋』季秋紀․精通. “宋之庖丁好解牛, 所見无非死牛者, 三年而不見生牛, 用刀十九年, 刃若新磨硏, 順其理誠乎牛也.”


 『여씨춘추』에 등장하는 포정의 기사는 이것이 전부이다. 반면「양생주」에서는 포정이 소를 잡을 때의 심리와 그 동작들 그리고 그 정황들이 정말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여씨춘추』의 짧은 이 구절은 양생주 편이 없다면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잡한 기사가 간단한 형태로 압축되어 있어 원래의 고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문장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문자상에서 볼 때도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양생주」편에서는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해체하였다는 기사만 있지 포정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씨춘추』에는 송나라의 포정이라고 그 출신을 적시하였다. 「양생주」에서 그 출신을 적시하지 않은 것은 장주가 송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본국 사람의 일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장주가 송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여씨춘추』의 작자는 분명 그가 송나라 사람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므로 이것 또한 「양생주」편에서 인용한 고사라는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양생주 편 특히 포정해우의 기사는 『여씨춘추』이전의 초기 작품임을 알 수가 있다.19)


16) 狩野直喜,『중국철학사』(오이환 역, 을유문화사, 1986), 208-210쪽 참조.

17) 關鋒, 『莊子內篇譯解和批判』(중화서국, 1961), 157-159쪽 참조.

19) 張恒壽,『莊子新探』(호북인민출판, 1983), 75-76쪽 및 關鋒, 『莊子內篇譯解和批判』(중화서국, 1961), 157-159쪽 참조. 이 두 책에 자세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간략히 줄인다.



또 한 가지 노담의 사망에 관한 장도 전국시대 초기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가 된다. 『장자』에 나타나는 노자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20) 그 하나는 노자를 이상적인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우언寓言을 위한 가설적 인물로 상정하는 태도이다.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대종사大宗師」등에 나타나는 노자는 대개 이러한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노자를 여타의 이상적 인물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태도이다.

「덕충부德充符」, 「응제왕應帝王」, 「전자방田子方」「지북유知北遊」편 등이 이러하다. 또 다른 하나는 노자를 최고의 도덕적 이상 인물로 평가하는 태도이다. 「천운天運」편등이 이러하다.

이러한 편들 가운데 「전자방」편은 시기를 고찰하기 어려우나 소요유 는 비교적 초기의 작품이며 「천운」편은 비교적 후기의 작품이라는 것이 일반적 정론이다.『장자』전편을 시기적으로 고찰해 볼 때 후기로 올수록 노자의 지위가 점점 더 숭고하게 평가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전국 초기의『맹자』나『묵자』에는 노자가 등장하지 않다가『여씨춘추』에 와서 전자방 등과 함께 노자를 성인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진한 시대 이후에는 도가와 신선가가 모두 노자를 비조로 삼았으며 유가서 중에서 사마천의 저작에는 오히려 공자보다도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노자의 신성화는『장자』의 일부 편들과『여씨춘추』에는 이미 상식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생주 편에 나타나는 노자는 신성화되기 이전의 노자이다.

노담이 죽자 진일秦佚이 조문하면서 그를 ‘둔천배정遁天倍情’이라고 비판한 것은 전국 시대 중기 이후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비판인 것이다.21)


이와 같이「양생주」편은 장자 본인에 의한 초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장자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다음 장에서 그 의미와 지향을 논의할 것이다.


20) 張恒壽,『莊子新探』(호북인민출판, 1983), 76-78쪽 참조. 이 책에 자세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간략히 줄인다. 한편 참고로 關鋒은 이 노담과 진일의 고사에 대해서는 전혀 고증을 하지 않았다.
21) 張恒壽,『莊子新探』(호북인민출판, 1983), 74-75쪽. 장항수는 양생주 편의 맨 첫 구절 “나의 삶은 끝이 있으나 알아야 할 것은 끝이 없으니 끝이 있는 삶으로서 끝이 없는 것을 뒤쫓으면 위태로울 뿐이로다. 이미 이러함에도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뿐이다[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를 들어고증하고 있다. 그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생명의 유한성과 지식의 무한성과 같은 이러
한 지식에 대한 태도가『荀子』解蔽편의 지식론과 아주 흡사하고 순자가 장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순자 이전의 초기 작품임을 증명해준다고 고증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긍정할 만한 근거는 매우 희박한 듯하다.



III. 「양생주」편의 의미와 지향


「양생주」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생명의 유한성과 지식의 무한성을 지적하면서 “생명의 주인[生之主]”를 기르는 강령을 제출하고 그 결론으로서 “중中을 따라서 떳떳함을 삼는다[緣督以爲經]”는 명제를 도출시켰다. 그는 유한한 생명과 무한한 지식 사이에서 마땅히 중허中虛의 도리를 따라 자연의 이치에 순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부분은 우언寓言을 사용하고 있으며 포정이 소를 해체하는 고사를 통해 양생의 도를 밝히고 있다. 복잡한 사회의 모습을 뼈와 살이 뭉쳐있는 모양으로 비유하였고, “두께 없는 것으로서 틈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以無厚入有間]”는 방법을 사용하여 앞 부분의 “중中을 따라서 떳떳함을 삼는다[緣督以爲經]” 는 관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세상일을 처리할 때에도 포정이 하는 것처럼 “그 본래부터 그러한 것을 따르고[因其固然]” “하늘의 결에 따라서[依乎天理]” 자연적 이치에 순응함이 곧 ‘생주生主를 양養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포정이 소를 잘 해체하듯이 천리에 순응하는 생활의 구체적인 의미는 인간세 편22)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양생주」편은「인간세」편을 아울러 보아야 한다.


셋째 부분은 우리가 타고난 신체[形骸]는 양생의 주인은 될지언정 결코 생生의 주인은 아님을 설명하고 있는 장이다. 이 부분은 다시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우사右師의 외발[介]은 인위가 아닌 자연의 모습이며 이 비유의 요지는 육체적 조건이 나쁘면 생生도 또한 불완전하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다.

진펄 속의 꿩[澤雉]은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며, 속박되지 않으려는 그의 자유정신을 비유하고 있다. 진일秦失이 노담老聃을 조문한 비유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땅히 “때에 편안하고 순종함에 거처하여[安時而處順]” 삶과 죽음을 한결같이 보고 애락의 정에 구애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비유하였다.


마지막 넷째 부분은 이 편의 결론부로서, 도道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천리의 자연 혹은 진군眞君이 인류역사 속에서 연속적이며 불멸하다는 것을 땔감[薪]의 유한성과 불[火]의 무한성 혹은 연속성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양생주」편은 「인간세」편과 합해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양생주」편은 양생주의 의미를 제출했지만 그러나 어떻게 기르는지의 방법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실제로「인간세」편에 다 쓰여 있다.

「양생주」편과「인간세」편은 장자의 처세 원칙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두 편을 합해 보면 대체로 장자의 처세 철학이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미룬다.


22) 「人間世」편은「양생주」편에서 제시한 “중을 따라서 떳떳함을 삼음[緣督以爲經]”의 원칙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을 논하고 있다.



1) 지식의 무한성과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


「양생주」편은 “지知”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다음의 첫 구절은 생명의 유한성과 지식의 무한성을 언급하는 대표적인 언사이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지식은 무한하다.23)"

23)「양생주」 .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이처럼 분명히 사람들의 생명은 유한하고 지식은 무한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장자가 주장하는 본지가 아니다. 또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철학적 관점이 아니라 철학의 관점을 구성하는 내용일 뿐이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고 지식은 무한하다”는 말은 가지론可知論을 구성하는 주장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는 재료로 활용될 수도 있다.24)

그러나 장자가 얻어낸 결론은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좇는 것은 위태할 따름[以有涯隨無涯, 殆已]”이라 하여 오히려 불가지론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장자의 본지가 아니다.

여기에서 장자가 주장하려는 것은 불가지주의不可知主義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생의 주인을 기르는[養生主]’ 도와는 다른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급급해 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지식을 추구하는 자는 위태할 뿐[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이라는 사상은 「제물론齊物論」편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24) 關鋒,『莊子內篇譯解和批判』(中華書局, 1961), 155쪽.


"한번 그것을 받아서 사람의 형체를 이루면 잘 보존하여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사물(주변세계)과 서로 투쟁하고 마찰하여 그 가는 것이 말달리는 듯하고 그치지 않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종신토록 허덕여도 그 성공을 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노역에 고달파도 그 돌이킬 줄을 모르니 또한 애닯지 않은가! 사람들이 내가 죽지 않았음(살아있음)을 말한들 어찌 도움되리!

그 형체가 변화되면 그 마음도 같이 변화하니 어찌 큰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삶은 본래부터 이렇게 어리석은 것인가? 나만 홀로 어리석고 남들은 또한 어리석지 않은 것인가?25)"

25) 「齊物論.」

“一受其成形, 不亡以待盡, 與物相刃相靡, 其行盡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終身役役, 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 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人謂之不死, 亥益?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人之生也, 固若是芒乎?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


이와 같이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얽매이면 다른 사람과 투쟁하고 마찰하여 몸을 수고롭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해치게 된다. 즉 천수를 다 누릴 수 없고 오히려 “그 형체가 변화하면 그 마음도 따라서 그렇게 되기[其形化, 其心與之然]” 때문에 그 형체뿐만 아니라 그 형체의 주인 즉, 그 “생지주生之主”까지도 수고롭게 하며 해치게 된다.


자연히 이것은 ‘생의 주인을 기르는[養生主]’ 도가 아니며, ‘생의 주인을 해치는[害生主]’ 도이다. 지식의 추구는 “위태할 따름[殆而已矣]”이므로 이와 같은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른바 “생의 주인을 기름[養生]”을 실천할 수가 있다. 즉 생명의 참 주재자인 진군眞君을 배양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생의 주인을 기르는 도道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 장자는 오히려 어느 정도 현실감을 가지는데, 도道를 기르는 것을 매우 실제적인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세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을 행하고도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악을 행하고도 형벌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26)"

26) 「養生主」.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장자에 의하면 도는 바로 이미 선善을 행하지도 않고 악惡을 행하지도 않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일체 “부득이함에 맡기는” 것이다. 인간세에서 보면 이것은 전혀 장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장자의 관념 안에서는 본래 선악이 차별이 없는 것이고, 이른바 선도 없고 이른바 악도 없으며 이른바 ‘부득이’한 때 이것을 하거나 아니면 저것을 하는 것이 자연히 모두 마음에 편안하여 이치를 얻는 것이다. 계속하여 그는 양생주의 강령을 제출하는데 “중을 따라서 떳떳함을 삼음[緣督以爲經]” 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중을 따라서 떳떳함을 삼음[緣督以爲經]”인가? 곽상의 주에서 말하기를, “중中을 좇아서 상도常道로 삼는다[順中以爲常也]”라 하였는데 말이 상세하지 않아 저의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독督’은 가히 ‘중中’으로 훈고할 수 있다.27) 그리고 그것은 장자의 철학 관념상 ‘허虛’라고 말할 수 있다.
독督은 또한 포정의 고사에서 나타나는 ‘틈 있음[有間]’이다.『묵자墨子』에 “유간有間, 중야中也”28)라는 말이 있다. 고형高亨은 이곳의 ‘중中’을 다음과 같이 풀었다.


"틈이 있다[有間]는 것은 두 물체가 서로 긴밀히 붙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틈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두 물체의 가운데[中]이다. 그러므로 ‘틈이 있는 곳은 가운데이다[有間, 中也]’라고 하였다.29)"

29) 高亨,『墨子新箋』(山東人民出版社, 1961) 卷10, 經上. “有間謂兩體不相切依, 尙有空隙, 爲兩體之中, 故曰, ‘有間, 中也’.”


이처럼 중中과 간間은 서로 의미가 같은 것이며 공허空虛, 공극空隙곧 빈틈이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른바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은 바로 ‘중허中虛의 도를 따라 떳떳함을 삼는다’는 뜻이다.


27) 曹礁基는 명예와 형벌의 중간 지대를 ‘督’이라 한다.

28)『墨子』, 經上제40.



2) 양생의 달인 - 포정庖丁


「양생주」편의 우화는 포정의 고사로부터 시작되는데, 포정이 소를 풀어내는 모습이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있다. 그 기본 사상은 이러하다.


"저 마디가 있는 것은 틈이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다. 두께가 없는 것[無厚]으로 틈이 있는 곳[有間]에 들어가니, 넓고 넓어라, 그 칼날을 움직이는 데 반드시 남는 곳이 있구나.30)"

30)「養生主」.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 其于遊刃必有餘地矣.”


이와 같이 ‘두께가 없는 것[無厚]으로 틈이 있는 곳[有間]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생의 주인을 기르는[養生主]’ 도이며, ‘그 칼날을 움직이는 데 반드시 남는 곳이 있구나’라는 구절은 바로 ‘중허를 좇아서 떳떳함을 삼은[緣督以爲經]’ 상태의 모습 또는 그 경지를 형용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잘하는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서 양생의 도를 얻었다[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는 이 한 구절은 문혜군의 탄사이면서 그가 의도하는 최종 목적지를 말한 것이다.


포정이 소를 해체할 때에는 ‘틈이 있는 곳[有間]’을 찾아 칼을 쓰되 단단한 뼈를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칼날을 보호한다. 문혜군文惠君은 포정의 이야기를 듣고 양생주의 도를 체득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의 뼈가 결합된 곳에도 역시 ‘틈이 있는[有間]’ 곳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혼탁(뼈와 근육이 뭉쳐있는 곳)해도 역시 ‘틈이 있는[有間]’ 것이어서 ‘두께 없는[無厚]’ 칼날로 그 틈에 들어가니 가히 칼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만일 ‘두께 없이[無厚]’ 살 수 있다면 인간세의 틈바구니 즉 ‘틈[間]’에 들어간다 해도 자연스럽게 그 생의 주인, 곧 진군를 보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세 속에 살면서 인간을 떠날 수 없으니, 만일 ‘주변 세계[物]와 서로 다투고 마찰한다면[與物相刃相靡]’ 곧 ‘그 형체가 변화하면 그 마음도 그와 함께 변하는[其形化, 其心與之然]’ 지경에 이르게 된다. 곧 형체로 말미암아 정신을 해치는 결과를 빚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두께 없는 것[無厚]으로서 틈 있는 곳[有間]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세」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또 (천진무구한) 어린애가 되면 (나도) 역시 그와 더불어 어린애가 되고, 그가 또 분수없이 행동하면 역시 그와 더불어 분수없이 행동하고, 그가 또 한계 없이 행동하면 역시 그와 더불어 한계 없이 행동한다.31)"

31) 「人間世」. “彼且爲嬰兒, 亦與之爲嬰兒, 彼且爲無町畦, 亦與之爲無町畦, 彼且爲無崖, 亦與之爲無崖.”


이러한 행동은 바로 ‘두께 없는 것[無厚]으로서 틈이 있는 곳[有間]에 들어가는’ 실제의 모습이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두께 없는 것[無厚]’이라는 이 개념은 장자의 독창이다. ‘두께 없는 것[無厚]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두께가 극소점에 도달한 어떠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일정한 두께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관념 안에 존재할 뿐이다. 장자의 ‘두께 없는 것[無厚]’이라는 개념은 바로 그의 기본 범주인 ‘의존함이 없는 것[無待]’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는 전혀 장자의 독창이 아니다.32)

『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백정 탄坦은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의 소를 해체하는데 칼은 단단하지 않아도 칼날은 틈에서 노닌다”33)라 했고,『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이르기를 “송나라의 포정이 소를 해체하는데 보이는 것이 죽은 소 아닌 것이 없었다. 3년이 지나서는 산 소를 보지 못했다. 칼을 사용한 지 19년이 되었으나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간 것 같았으니 소의 결을 따라 소를 정성스럽게 다루었기 때문이다”34)라 했고,『회남자淮南子』에는 “백정 토吐는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의 소를 해체하는데 칼은 털을 자를 수가 있으며, 포정은 칼을 19년이나 사용하였지만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간 것 같았다. 왜인가? 비어있는 틈에서 칼을 놀렸기 때문이다”35)라 했다.


이처럼 포정해우의 고사는 당시에 유전되어 꽤 확산되었다. 모두 매우 고도의 소잡는 기술을 가진 자들인데 그와 같은 사람은 많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전하여 듣고 말이 변하여서 약간 달라진 것이다.


하나의 철학체계를 분석하는 데에는 반드시 철학적 관점과 또 이 관점을 구성하는 자료를 구분해야 한다. 서로 다른 철학자는 동일한 자료를 활용하여도 서로 다른 관점을 만들어낼 수가 있고 심지어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관점도 나올 수 있다. 장자는 우언이라는 자료를 활용하여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우언 하나하나가『장자』전편에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적 관점의 자료로 활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포정해우의 고사도 장자의 전체적 관점의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32) 關鋒,『莊子內篇譯解和批判』(중화서국, 1961), 157-159쪽 참조, 여기에서 관봉은 포정의 고사에 대한 자세한 고증자료를 열거하고 있다.
33)『管子』권10, 制分. “屠牛坦, 朝解九牛, 而刃可以莫鐵, 則刃遊閒也.”
34)『呂氏春秋』권9 季秋紀․精通. “宋之庖丁好解牛, 所見無非死牛者, 三年而不見生牛,用刃十九年, 刃若新磨硏, 順其理誠乎牛也.”
35)『淮南子』권11 齊俗訓. “屠牛吐, 一朝解九牛, 而刀可以제毛, 庖丁用刀十九年, 而刃如新部硎, 何則? 遊乎衆虛之間也.”



3) 생명의 참주인


세 번째 부분은 세 가지 비유를 들고 나서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 번째 비유인 우사右師의 외발[介]은 인위가 아닌 자연의 모습이며 이 비유의 요지는 육체적 조건이 나쁘면 생生도 또한 불완전하다는 관념을 깨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는 우사가 다리 하나를 잘리게 된 것을 그는 왜 “이것이 하늘 때문”36)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논증에 이르기를 “하늘이 낼 때부터 외발로 만들었다. 사람의 형상은 두 다리를 가진 것이니, 이로써 그것이 하늘 때문이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겠다”37)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의문은 남는다. 월형을 받아 다리 하나를 잘리었는데도 왜 하늘 때문인가?

왕선겸王先謙은 「덕충부德充符」편에 나오는 세 올자兀者와 이 장에 나오는 개자介者와는 다르며, 개자介者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 난 것[人生]이고 올자兀者는 사람이 겪는 후천적인 상해[人患]라고 생각하였다.38) 그의 말대로 장자의 철학 체계를 보면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명命의 관념이다. 장자에게는 사람의 일[人事] 역시 천명天命이 아닌 것이 없다. 자연에서 품부받은 형체는 명에 말미암은 것이고, 후천적으로 상해를 입는 것도 명命에 말미암는 것이다. ‘명命’이란 곧 천명天命이며 자연의 법칙이다.


『장자』에서는 천인天人이 나누어지지 않고 합일적이다. 그래서 우사右師가 월형을 받아 다리 하나를 잘린 것도 하늘 때문이며, 사람이 하늘에서 두 다리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양생주」의 내용이 결코 형체를 보양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두 번째 비유인 진펄 속의 꿩[澤雉]은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며, 속박되지 않으려는 그의 자유정신을 비유하고 있다. 장자의 이 비유는 양생이 음식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비록 육체가 편안하더라도 정신이 소요자재할 수 없다면 일신의 편안함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 번째 비유인 진일秦失이 노담老聃에게 조문한 고사는 생사문제의 초탈을 설명한다.

“마침 온 것은 선생이 때가 되어 온 것이고, 마침 간 것은 선생이(자연에) 따른 것이다”39)는 말은 생사 문제를 초탈하여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생과 사의 변화는 있어도 자연自然의 사망은 없다.

따라서 당연히 양생지도는 육신의 장생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곧 “때에 편안하며 순응함에 거처하여 슬픔과 기쁨이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40) 이것이 곧 장자가 지향하는 자유이다.


이상의 세 비유는 모두 생명 자체가 생명[生]의 주인이 아니며, 양생의 도가 생명 자체의 유지 보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생지주生之主’는 생명의 주인인 도道, 곧 진군眞君을 지칭하는 것이며, 인간의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 너머의 우주적 생명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장자에게서 도道, 자연自然, 천리天理, 명命등으로 표현된다. 「양생주」편은 생지주生之主를 기르는 것에 대해 논한 편이다. 곧 두께 없는 것[無厚]으로 틈 있는 곳[有間]에 들어간다거나, 때에 편안하고[安時] 순종함에 거처해야[處順] 기쁨과 슬픔[哀樂]이 개입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양생주」의 결론은 아래의 말에 압축되어 있다.


"기름은 땔감이 되어 수명을 다하지만 불은 (계속하여) 전해 내려가며 끝날 줄을 모른다.41)"


육신의 사망은 있어도 자연의 사망은 없으며, 육신은 사망하더라도 도는 영원히 유전하며 불멸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장자의 철학에서 진인眞人의 정신세계는 불멸인 것이다.

이 결론구는 앞부분에서의 “중을 따라서 떳떳함을 삼음[緣督以爲經]”, “하늘의 결에 따름[依乎天理]”, “두께 없는 것으로 틈 있는 곳에 들어감[以無厚入有間]”, “때에 편안하고 순종함에 거처함[安時而處順]”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 땔감은 그 생명을 유한하게 다하지만 불은 영원하게 지속된다는 것, 즉 ‘인간의 생명[薪]은 다해도 자연[火]은 유전한다’는 것에 있다. 이를 통해 장자는 생명 너머에서 그 생명을 주관하는 원인자 또는 주재자로서의 도道의 실체를 긍정하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진정한 참주인임을 주장한 것이다.


36)「養生主」. “天與? 其人與? 曰, ‘天也, 非人也’.”
37)「養生主」. “天之生是使獨也. 人之貌有與也, 是以知其天也, 非人也.”
38) 王先謙,『莊子集解』(『諸子集成』본, 상해서점, 1986.), 20쪽. “案, 此與德充符篇三兀者不同. 介者, 人生. 兀者, 人患.”

39)「養生主」.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40)「養生主」.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
41)「養生主」.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IV. 맺음말 : 생사를 초월하는 자연


「양생주」편의 결론은 “기름은 땔감이 되어 수명을 다하지만 불은 (계속하여) 전해 내려가며 끝날 줄을 모른다”는 말에 압축되어 있다. 곧 생명의 유한성과 자연의 불멸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먼저 장자가 생사 문제를 초월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엄격히 말해 생명은 대상적 존재이지 주체는 아니다. 장자는 생명이 만물 가운데 하나로서 만물과 동급의 존재임을 설명하면서, 생명은 진군眞君이 아니고 생사에 매인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생명은 물질적 생명이든 정신적 생명이든 하나의 물리적인 존재이며 하나의 대상이다. 이런 류의 대상은 생사가 분명하고 사망하고 나면 재가 되어 소멸된다. 그러나 일체의 대상적 존재가 출현할 수 있는 까닭은 이 대상을 생성케 하는 원인,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체의 만물은 모두 생사의 과정에 있으므로 우연한 계기로 존재하는 만물은 이미 존재한 뒤에 또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물리적 존재로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명을 얻는 것은 때를 만나서 태어나는 것이고 잃는 것은 운명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바로 ‘생사生死’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결코 유전하는 존재가 아니며 유전하는 형태도 아니다. 정신은 육체가 우연히 태어나고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체의 집착을 벗어날 수 있을 듯하지만, 그 정신도 육체의 소멸과 함께 소멸되는 존재이다. 정신은 무한한 우주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하지만 유한한 육체에 갇혀 제한된 우주만을 전우주인 양 착각하며 살다가 육체와 함께 사망하고 만다. 육체와 정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생명은 그래서 그 우연한 생명을 편안하게 여기고 그 필연적인 죽음을 따라야만 한다.


「양생주」편은 생명의 생사문제를 초탈할 것을 말하고 있는 장이다.

이는 ‘때에 편안하고 순종함에 거처한다[安時而處順]’는 구절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제한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상제의 속박에서 풀려남[帝之縣解]’이다.

생명의 주체이자 주재 능력을 가진 참주인[眞君]은 마지막 결론구에서 말한 “불은 전하여 내려간다[火傳]”는 것처럼 불에 비유되며, 이것은 곧 그칠 줄 모르는 자연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것이니 「양생주養生主」는 이 생의 주인[生之主] 즉 도道를 기르는 방법을 논하는 편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