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인격론 * 윤영돈 *
융(C. G. Jung, 1875-1961)은 20세기 초 심층심리학(depth psychology)의 발전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외과의사이며 교수였으며, 외할아버지는 히브리어 교수자격을 가진 목사였다. 청년기에 융은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을 좋아했고,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읽었으며, 칸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취리히대학 정신과 병원에서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 교수의 조수로 공부하였으며, 단어연상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통해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하였다.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융은 인간의 심층을 경험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99-1935)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지지자이자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와 달리 인간의 무의식에는 억압된 성적 욕구(리비도)뿐만 아니라 종교적 근원도 있으며, 인간의 삶을 성적 병인에 의한 결정론적 관점이 아니라 무의식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론적 관점으로 해명한다.
결국 융은 1913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과 결별하고,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을 창설하였다. 융은 MBTI 검사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심리유형론을 제시하였으며,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여 원형(archetype)과 집단 무의식의 존재를 밝혀냈다.
융은 문명 비판가로서 이원론과 기능주의 및 합리주의에 입각한 서구문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서구문명의 그림자를 해소하기 위해 요가나 주역과 같은 동양의 정신적 전통을 탐구하였다. 융은 현대인이 겪는 삶의 무목적성과 소외문제를 신화와 상징을 상실한 데서 찾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인간상의 회복을 강조한다. 융의 개성화 과정은 인격 완성의 여정이며, 궁극적으로 종교적 인간상을 전제하고 있다.
I. 융 심리학의 인간학적 관점
융의 심리학적 관점은 인간학적 관점에 맞닿아 있다. 융은 인간 정신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과 환자들의 체험은 물론이고 문학 및 예술작품, 철학사조, 종교적 현상, 인류학적 자료, 더 나아가 이상심리학(parapsychology)에 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융의 이러한 태도는 인간 정신을 어떤 단일한 현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totality)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융은 어떤 면에서 문화철학자 내지 문화비평가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심리학자이자 ‘마음의 의사’로 규정한다(이부영, 2002: 24).
융은 유물론과 실증주의와 같은 19세기의 결정론적 시각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융은 인간의 정신을 인과론적․기계론적 모델로 설명하는 철학적 경향을 거부하고, 인간의 정신을 물리적 세계와 상보관계에 있는 또 다른 우주이자 목적론적 체계를 지닌 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한다. 이러한 융의 관점은 프로이트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다.
융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학문적 차이는 그들이 만난 시점부터 노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리비도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정신 에너지인 리비도가 본성상 전적으로 성적이라는 관점과 정신병리는 유아기의 성적 갈등으로부터 기인한다는 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연구를 수행한다. 따라서 심리분석(psychoanalysis)의 과제는 심리적 장애에 대한 성적 병인을 밝힘으로써 그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융은 리비도가 오로지 성적인 것만은 아니며 모든 콤플렉스가 단일한 병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융의 목표는 “의학적인 심리학을 과거의 ‘환원론적 인과론’에서 해방시키고, 무의식이 개인적인 지평을 넘어서는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심리는 영혼의 과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분명한 목표지향성(목적론)을 가지며, 심리치료를 할 때 이러한 미래의 차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Wehr, 1989: 74).
둘째, 종교에 대한 이해방식이 상이하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강박관념에 사로집한 노이로제로 간주한 반면, 융은 신화와 종교를 본질적으로 마음의 건강하고 능동적인 기능의 산물로 간주한다. 더 나아가 융은 신화의 창작이 현대사회의 개인과 고대 원시 문화를 연결하는 정상적인 심리학적 기능이라고 제안한다.
셋째, 심리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의 성적 병인에 의한 인간 심리의 해석이 인과결정론을 중시하는 19세의 고전 물리학의 관점에 입각해 있다면 융의 동시성 이론은 아인슈타인과 파울리(W. Pauli, 양자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와 같은 20세기의 물리학적 관점과 친화력이 있다(Clarke, 1992: 11-13).
동시성(synchronicity)의 개념은 인간 정신의 바깥과 안 혹은 물질과 정신 간에 연계된 비인과적 연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양의 역(易) 사상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융은『역경』(I Ching)을 통해서 인과적 사고를 뛰어넘는 동시성의 원칙을 발견하였다(Wehr, 1989: 251). 인과적 사고가 원인과 결과의 직선적 사고라면, 동시성적 사고는 장(場)의 사고이다.
근대의 서구문명은 근본적으로 선악의 이분법,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 근대 이성에 의한 탈신성화된 세계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유, 인과론적 사고, 기능주의와 합리주의로 특징 지워진다. 서구의 근대문명은 자연에 대한 지식은 풍부하지만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에 대한 지식은 매우 결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융은 서구문명의 그림자를 목격한다.
서구화된 문화에 젖어 있는 현대인은 과거 원시인들에게는 없었던 신경증으로 고통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인의 심신의 장애와 소외의 문제는 신화와 상징을 상실한 데서 기인한다(Jung, 1977: 94-95). 현대인의 고통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종교적인 태도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융은 “종교적인 관점(religious outlook)을 회복한 사람은 모두 치유되었다.”고 말한다(Jung, 1989: 224).
융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을 지향한다. 종교적인 욕구야말로 인간 삶의 전체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치유는 누미노제(Numinose, 성스러움 das Heilige)에 대한 접근에서 가능하다. 융은 서구 문명의 그림자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를 인도의 요가나 중국의『역경』에 나타난 영적이며, 상징적인 사유에서 찾는다(Karcher, 1999: 9-30).
II. 대극 관계로서 인격의 구성요소
낮과 밤, 탄생과 사망,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이라는 대극(大極, Gegensatz)의 관계는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대극성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ca.544-ca.484 BC)가 지적했듯이, 현상의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되는 세계이며, 낮과 밤, 추위와 더위, 사랑과 미움 등 대립되는 것들이 상호 투쟁하는 세계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현상의 세계가 상호 투쟁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1] 융은 세계와 삶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대립의 경향과 이중성을 발견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심층심리학의 아버지로 간주한다(Karcher, 1999: 31, 주9번).
우리의 인격은 의식(the consciousness)의 요소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대극 관계에 있는 무의식(the unconsciousness)을 포괄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은 상호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의식이란 정신세계 전체 중 극히 작은 부분을 구성한다. 우리는 인류학의 발달로 의식이 무의식에서 극히 최근에 분화되어 나온 산물임을 알고 있다. “영혼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의 나이는 수백만 년을 헤아린다. 개인의 의식은 땅 속에 있는 다년생 뿌리로부터 자라나 계절에 따라 개화하고 결실을 맺는 꽃과 열매에 불과하다. 뿌리의 존재를 함께 고려하는 사람은 진리와 보다 더 일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는 모든 것의 모체이기 때문이다.”(GW, V권, 12, Wehr, 1989: 74에서 재인용).
프로이트가 개인 무의식에 머무르는 반면에, 융은 집단 무의식에까지 나아간다.
개인 무의식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데 반해, 집단 무의식은 초개인적이며, 객관적인 것을 표현한다. 즉, 집단 무의식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개별적인 꽃의 뿌리와 같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유전되는 것은 개인 무의식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이다. 우리는 집단 무의식의 유사한 형식이 인종적인 교류가 전혀 없는 문화권의 전설이나 신화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융은 집단 무의식의 구성요소로서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정신적 요인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김성민, 2001: 30-31).
한마디로 원형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 인식과 행동의 본능적 패턴이다(Hogenson, 1998: 133).
원형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지, 그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형의 내용은 시대와 문화와 사람에 따라서 가변적이다.
무의식이 바다라면 의식은 그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과 같다. 그러한 의식의 중심에 해당되는 것이 자아(Ich, ego)이다. 자아라는 의식은 먼저는 자기 신체,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더 나아가 외부세계와 내면세계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기억에 의해 형성된다.
만일 자아가 없다면 인격의 성숙이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인 것이 의식화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필요하다. 사실 무의식은 그에 대한 자아의 태도에 따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반응한다(이부영, 2002: 65). 일반적으로 자아는 긍정적인 요소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인격의 요소 중 부정적이거나 열등한 것을 자아에서 몰아낸다. 한 사람의 인격을 구성하지만 자아에 포함되지 못한 내용들은 그림자(Shatten, shadow)가 된다.
개인의 무의식 가운데 자리잡은 그림자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며, ‘또 다른 나’(alter ego)이자 그 실재를 인정하기 싫은 ‘검은 형제’(dark brother)이다(Jacobi, 1951: 126, 128).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자아와 그림자가 대극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콩쥐와 팥쥐, 가인과 아벨,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동일인의 자아와 그림자 간의 대극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자아는 외부세계와 접촉하면서 여러가지 행동 양식을 익히며,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가치․태도를 습득하는데, 융은 이것을 페르조나(Persona)라고 부른다.
페르조나는 희랍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이라는 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일종의 역할기대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페르조나는 자아와 사회 간의 타협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페르조나는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가상이자 가면인 셈이다.
우리의 인격에는 이러한 외적 태도와 대극 관계에 있는 내적 태도가 있다.
융은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의식의 인격화에 있어서 영혼의 인도자(psychopompos)이자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내적 태도를 아니마․아니무스라고 부른다(Jung, 1974a: 16).
요컨대 페르조나가 자아와 외부세계의 접촉을 중재해 주는 요소라면 아니마․아니무스는 자아와 내면세계의 접촉을 중재해주는 요소이다(이부영, 2002: 82-83).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남성과 여성 안의 상반된 성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아니마는 남성에게서 여성적인 형태로, 아니무스는 여성에게서 남성적인 형태로 의인화하여 존재한다. 아니마․아니무스는 원형의 하나로서 인류가 지금까지 이성과 관계를 맺은 흔적들이 침전되어 그 틀이 형성된 것으로서 많은 집단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가령 아니마는 이브, 아프로티테, 성모 마리아 등으로 형상화되며, 아니무스는 아담, 아폴론, 헤라클레스 등으로 형상화된다. 물론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이성(異性)의 심상만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에도 투사되고 이념에도 투사될 수 있다.
가령 배는 전통적으로 ‘그녀’로 간주되었다. 배는 남성인 선장에게 있어서 자신의 아니마인 셈이다. 오늘날 많은 남성들은 자신의 아니마를 자동차에 투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 여성들은 그녀들의 아니무스를 히틀러에게 투사하여 열광적 지지를 보냈다. ‘위대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신흥 종교는 그 지도자에게 여성들의 아니무스가 투사됨으로써 융성하는 경우가 많다(이부영, 2002: 88-89).
1]이러한 관점은 상극(相剋)이면서도 상생(相生)의 관계를 맺고있는 동양의 음양변증법(Yin-Yang dialectic)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한마디로 동양의 음양변증법은 대대적(對待的, contradictory and complementary) 논리가 특징적이다(Kim Kyong-Dong, 2002). 동양적 사유에서 본 융 심리학의 윤리학적 함의에 대한 논의는 (Chin Kyo-Hun, 2001: 119-120) 참고.
Ⅲ. 대극의 통합․조절의 근거로서 자기(Selbst)
대극의 조절 및 통합 기능은 유기체의 중요한 특징이다. 모든 심리학적 법칙 중에서 가장 영묘한 것이 바로 대극에 서로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는 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대극 조절의 기능을 에낭티오드로미아(enantiodromia) 2] 라고 불렀다(Jung, 1977: 72). 융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대극적인 요소들, 즉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자기,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합하며, 조절하는 근거는 ‘자기’(Selbst, self)이다. “자기는 정신의 총체성(totality)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중심이다. 자기는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전범위이다. 자아가 의식의 중심인 것처럼,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총체성의 중심이다.”(Jung, 1974b: 41).
‘자기’는 칸트의 ‘물자체(Ding and sich)’에 비견할만하다. 자기(Selbst)의 총체성은 의식의 세계에 국한하여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자아(ego)이다. 이는 ‘불꽃의 중심’(Zentrale Feuer), 신과 분유하고 있는 부분,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의 ‘작은 불꽃’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기는 신을 닮은 인간의 의미와 본성을 해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기는 ‘네 안에 있는’(is within you)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초기 기독교적 이상과 같으며, 그 이상은 우리의 정신이 경험할 수 있는 궁극적인 목적(the ulitmate)이다(Jacobi, 1951: 150-151).
‘자기’는 상징을 통하여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 하나가 만다라(Mandala)이다.
‘만다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원(圓)을 의미한다. 만다라의 중심에는 각 종교에서 ‘신’이나 ‘최고의 진리’로 삼는 ‘자기’의 원형상들이 존재한다. ‘자기’가 원형으로 다루어지는 이유는 전체가 되고자 하는 힘이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체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분열을 지향하고자 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의식에만 집착할 경우,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며 결국 무의식이 의식화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경우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정신세계 간의 분열을 초래한다(이부영, 1998: 112-113).
자기의 원형(archetype)은 부처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산신령이나 노현자(老賢者)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의 원형은 정신의 전일성과 전체성을 상징하며, 지남력의 원형(archetype of orientation)으로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지향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Jung, 1974a: 31-32).
한 마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God within us)으로 이해되는 자기원형은 대극 관계의 요소들을 통합시키며 조절하는 근거이자 내적인 치유의 동인이 된다. 대부분의 질병과 신경증(노이로제)이 분열과 부조화에서 기인하며, 자기(Selbst)의 회복은 정신의 전일성(wholeness)과 대극요소들 간의 조화를 의미한다(진교훈․윤영돈, 2003: 87-88).
자기 자신(Selbst)이란 어느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의 전체’를 말한다는 맥락에서 참된 의미의 개성(Individualität)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그 사람의 성품이자 그 사람의 ‘본성’이다. 자기 원형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마디로 자기라는 원형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하는 인간 무의식의 근원적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2]희랍어 “에낭티오드로미아”는 대극(대립)을 의미하는 enangtios와 달리기(경주)를 의미하는 dromos의 합성어이다. 모든 것은 언젠가는 반대쪽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Ⅳ. 인격 계발의 의미
융이 지적하는 현대 교육과정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인격(personality)의 계발을 아동이 수행해야하는 발달 과업으로 치부하고, 정작 성인에 대해서는 인격계발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은 전일성을 지니고자 하며, 일생을 통해 발달된다.
한마디로 인격의 성취는 전일적 존재의 완전한 실현을 의미한다. 물론 인격의 완전한 실현은 도달 불가능한 이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이정표의 기능을 한다. 인격을 계발할 때 대중이나 인습에 따른 선택은 자신의 전일성을 훼손한다. 그러므로 의지적이고 도덕적인 개별적 선택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계발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중으로부터 벗어나는 익숙하지 않은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격의 발달을 위해서는 ‘인습으로부터의 해방’(deliverance from convention)이 요구된다(Jung, 1981: 174-175).
참된 인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는 신의 법칙(law of God)처럼 기능하는 일종의 ‘부르는 소리’(소명, vocation)이다. 그 소리는 마치 새롭고 경이로운 길을 속삭이는 다이몬과 같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3] 에서 엿볼 수 있다(Jung, 1981: 176). 그것은 내적 인간(inner man)의 소리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법칙이기도 하다.
융에게 있어서 이러한 부르는 소리는 의식화되기를 원하는 무의식의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제도에서 신적인 것들을 제거시켜 버린 계몽된 현대인들은 이러한 무의식의 요구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둔감한 사람은 인습이라는 영혼없는 메카니즘에 따라 일상화된 삶을 사는 사람일 뿐이다(Jung, 1981: 178). 내면에서 ‘부르는 소리’(vocation)는 ‘그 자신의 법칙’(his own law)이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에 따르는 삶이 창조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는 불가피하게 모험이 따른다.
융은 참된 인격의 모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가령 예수는 자신의 부르심 4]에 대한 내적 소명을 순종하기 위해 로마 제국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마귀라는 객관적인 영혼의 유혹에 직면하였으며, 정복자이든 피정복자이든 모든 사람에게 깃들인 제국주의적 광기의 공격에 자신을 노출시켰다(Jung, 1981: 180).
자신의 내적 소명을 따른다는 것은 지극한 위험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내적 소명의 수행은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신경증 환자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이다(Jung, 1981: 181).
참된 인격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안의 영웅의 현실화에 상응한다. 그런데 참된 인격을 의미하는 내면적 영웅의 실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유혹과 같은 무의식의 부정적 요소에 직면하여 창조적으로 통합할 때 가능하다.
사실 ‘내면의 목소리’(inner voice)에는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열등한 것,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 가장 참된 것과 가장 사악한 것, 빛을 나르는 자와 루시퍼가 공존한다.5]
따라서 인격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대극의 암합’(coincidentia oppositorum)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격을 계발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이몬이라는 내적 음성이 가장 큰 위험이면서 필수불가결한 도움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극복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찾았던 것처럼, 인격을 계발하기위해서는 무의식에 잠재된 부정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내면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면의 길(interior way)을 중국의 고전철학에서는 도(道, Tao)라고 부른다.
“도는 그것의 목적지를 향하여 거부할 수 없도록 진행되는 물의 흐름과 같다. 도에 거한다는 말은 실현, 전일성, 도달된 목적지, 사명의 완수를 의미한다.”(Jung, 1981: 185-186).
다시 말해서 도에 거한다는 말은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존재의미의 완전한 실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참된 인격의 계발은 도에 따른 삶이라 할 수 있다.
3] “저에게는 무엇인가 신의 음성 혹은 다이몬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 저에게는 이것이 아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요, 어떤 음성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나타날 때에는 언제나 제가 무엇을 하려 할 때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만류하지만, 어떤 일을 하라고 재촉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Plato, Apology, 31d) “(나 자신과 남의 삶을 검토하는 것은) 신탁과 꿈을 통해서, 또 신이 인간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명할 때 사용하시는 온갖 방법으로 명하신 것입니다.”(같은 책, 33c).
4]예수의 내적 소명은 ‘자기 안에 있는 아버지’(요한복음 10:38; 11:10-11,20: 17:21,23)로부터 온 것이다. “나는 그(아버지)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2:50).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15:15)”
5]융은 기본적으로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한다.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루시퍼(Lucifer)는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존재하는 일종의 원형이다. 우리의 태도여하에 따라 루시퍼는 글자 그대로 ‘빛을 나르는 자’(lux / light + fer / bringing)가 될 수도 있고 사악한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좋은 것은 불행하게도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더 좋은 것이 나타날 때, 좋은 것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신은 선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신이 선하다면) 신은 더 선할 수 없다.’고 말한다.”(Jung, 1981: 185).
Ⅴ. 인격 완성의 여정 : 개성화 과정
인격 완성의 여정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 소명’, 즉 무의식의 요구를 의식화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도토리가 참나무로 성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인격은 미분화된 상태로부터 분화과정을 거쳐서 통일된 인격으로 발전한다.
융은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사람들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을 통해 본래적인 자기(Selbst)에 이르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융은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는 과정을 ‘개성화의 과정’(process of individuation)으로 명명한다(Franz, 1996: 173).
개성화(individuation)란 우리의 인격이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in-divide)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개성화란 인격을 통합시켜 전일성(wholeness)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김성민, 2001: 92).
자기 원형(原型)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도록 하는 무의식에 잠재된 근원적인 가능성(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eidos과 같은)이라고 한다면, 자기실현은 이러한 가능성을 자아의식이 수용하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를 말한다.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서 비로소 의식과 무의식의 합일이 가능하다(김성민, 2001: 37-38, 72-73, 320-321; 이부영, 2002: 119-120).
우리의 인격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깊은 토양에서 발아하여 충만한 자기의식적인 삶에서 꽃피우고 자기를 실현하는 유기체로서 발달과 성장의 자연스러운 순환과정을 갖는다(Clarke, 1992, xiv). 이러한 맥락에서 개성화 과정은 인격 완성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개성화 과정은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자의 통합, 아니마·아니무스의 분화 및 통합, 자기 인식이 그것이다.
개성화 과정의 첫 단계는 ‘그림자’(Shatten, shadow)의 통합 단계이다.
그림자는 부정하고 싶은 ‘또 다른 나’이자, 그 실재를 인정하기 싫은 ‘검은 형제’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망각한 채로 가면(persona, 사회적 자아)을 쓰고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자를 망각하는 한 자기인식은 불가능하다. 사실 융의 그림자 개념을 토대로 할 때,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콩쥐와 팥쥐, 가인과 아벨은 동일인의 자아와 그림자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 의거할 때, 니체(F. W. Nietzsche, 1844-1900)가 주목한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아폴론적 요소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성과 차이를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두 요소 중 어느 하나만을 추구할 때 삶은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떠난다면, 아폴론 역시 우리를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디오니소스적인 지혜는 아폴론적 요소를 매개로 드러날 수 있다. 6] 그림자의 자각은 우리의 전일적인 자아-인격(ego-personality)이 직면하는 도덕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림자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도덕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한다는 것은 인격의 어두운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다(Jung, 1974a: 8).
개성화 과정의 2단계는 아니마·아니무스의 분화 및 통합과 관련되어 있다.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는 이성(異性)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우리 내면의 요소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니무스의 본성은 남성의 외적인격으로서 페르조나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여성 안의 내적인격으로서의 남성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니마의 본성은 여성의 외적인격으로서의 페르조나를 규정하며, 남성 안의 내적인격으로서 여성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개성화 과정 2단계의 중요한 과제가 드러난다. 바로 개별자는 생물학적인 성과 내적 인격으로서의 이성성(異性性)의 특징을 분화․발전시키고,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은 전인(全人)으로서의 성장에 필요불가결한 요건이라 하겠다(진교훈·윤영돈, 2003: 91).
남성성이 합리적, 논리적, 주장하는 특성인 로고스로 상징된다면, 여성성은 결합하고, 참여하며, 관계를 맺는 에로스로 상징된다. 남성성이 우리를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적인 요소와 관련되며, 외적세계의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권위, 규율, 규범과 관계가 있다면, 여성성은 사람이나 사물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이론화보다는 구체적인 감정을 중시하며, 막연한 미래보다는 현재적 삶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양육하고 보살피는 능력과 관계되는 불변성, 안정성, 보수성의 토대를 마련한다.
융은 개성화 과정에서 아니마․아니무스의 분화와 통합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으며, 개별자는 자기 내면에 있는 이성(異性)을 발견하고, 그 이성(異性)의 인도를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을 성적인 범주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통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은 자웅동체(雌雄同體)인 안드로진(androgyne)이나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 7] 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C. G. Jung, 1974a: 24).
개성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자기 인식(self realization)과 관련된다.
자기실현에서 중요한 물음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보다는 ‘원래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자기(Selbst)는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며, 불교적 의미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불성(佛性)’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자기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방향과 목적(telos)을 규정하는 형상(eidos)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성화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은 종교적 인간이해를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융은 교회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는 사람을 모든 면에서 지원했다. 요컨대 자기인식은 무엇보다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길이며, 또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길이기도 하다(진교훈·윤영돈, 2003: 92).
6]니체와 융의 공통점으로 둘 모두 유년시절부터 기독교에 시달렸다는 점, 본래적인 자기(Selbst)에 이르는 길(니체의 표현으로는 초인, 융의 표현으로는 개성화의 과정)이 어렵다는 점, 선악의 이분법을 지양한다는 점, 갈등과 고통이 없다면 의식이 퇴행한다는 실존적 관점, 어두움의 사상(니체의 경우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면, 융의 경우 무의식), 창조자로서의 전일적 자기의 강조, 헤라클레이토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삶의 영역에 있어서 니체는 미학적 차원을 중시했다면 융은 종교적 차원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J. L. Jarrett(ed. & abr.), Jung’s Seminar on Nietzsche's Zarathustra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introduction’ 참조.
7]안드로진(androgyne)은 남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nēr의 2격(genitive)인 andros와 여성을 의미하는 gynē의 합성어이며, hermaphrodite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합성어이다.
Ⅵ. 결론
융의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물리적으로 환원시키거나 인과론적으로 설명하는 사상적 경향을 거부하였으며,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관점을 지양하면서 대극의 조화라는 전일적 관점을 토대로 자신의 심리학을 정립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삶의 궁극적 목적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Clarke, 1992: xiv).
우리의 인격을 구성하는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그림자,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는 상호 대극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대극 관계를 통합하고 조절하는 것이 자기(Selbst)이다.
융에 의하면 인격의 계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면에서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무의식의 부름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도(Tao)를 따르는 삶과도 같다. 우리의 내면세계나 우리를 둘러싼 현실세계에는 대극의 관계가 지배적이기에 참된 인격의 계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극의 암합’(coincidentia oppositorum)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
개성화 과정은 평생을 거쳐 진행되는 것이지만 특히 인생 후반기(중년)에 있어서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의 성격을 갖는다. 그림자의 자각은 인내와 겸손을 요구하는 도덕적인 작업이고, 아니마․아니무스의 분화와 통합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 즉 양성성을 균형있게 계발하는 작업이며, 자기의 인식은 ‘원래 내가 무엇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명과 관련된다. 인격 완성의 여정이라 할 수 있는 개성화 과정은 자기를 통찰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무의식에 있거나 무의식으로 가라앉은 자기를 검토하여 자기의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를 우주 질서와 일치시키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종교적 인간상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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