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문학

탈무드_교육의 길 2

rainbow3 2020. 3. 8. 23:42


탈무드 -  교육의 길 9.  


신은 인간이 만든 마을과 탑을 보기 위해 왔다. 
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말로,
여기서의 탑은 바벨탑을 이르는 것이다.
옛날의 여러 랍비들은 왜 신이 땅으로 내려와
바벨탑을 보려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성경에 의하면 그후 신은 바벨탑을 불태워 파괴하였다.
이에 대해 랍비들은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

'신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일을 시도하려면
반드시 여러 조건을 직접 확인된 뒤에 생각한 일을 하도록
가르쳐 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0. 


자기 혀한테 '모른다'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스스로 많이 아는 체하는 사람은,
헤엄을 모르면서 물에 뛰어드는 것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배움에 의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데,
배운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인정하는 것은 지성적인 일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1.


옳은 것을 배워 아는 것보다는 옳은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더 낫다. 
'행동은 말보다도 더 웅변적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여러가지 논리나 학문이란 것은 이를 바탕으로 한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리라.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손함이다'라든가
 '영리함보다는 친절함이 앞선다'는 격언도
'행동'이 말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태 사회의 옛 이야기를 통해 실제와 이론이 크게 다름을 알아보자.

옛날 어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1/2에 1/2를 더하면 얼마인가?]
먼저 손을 든 학생은 그 학급에서 성적이 제일 나은 아이였는데, '1/2이라고 대답하였다.

[1/2에 1/2을 더했는데, 어째서 1/2인가?
반쪽에다 반쪽을 보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선생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명해 주자
학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역시1/2입니다.]
선생님은 화가 나서 종이 한장을 학생에게 주며 직접 계산해 보라고 명령했다.
학생은 여전히 '1/2+1/2=1/2'이라고 계산하였다.

[왜 그렇게 되는지 다시 설명해 봐라]
선생님의 꾸중에 학생이 설명하였다.

[분수에서 분자의 1과 1을 더하면 2가 되고,
분모의 2와 2를 더하면 4가 되므로 이를 약분하면 1/2이 됩니다.]

[그렇다면 반으로 나눈 사과 1개가 되었으니,
계산에서도 '1/2+1/2=1'란게 증명되지 않았느냐?]
학생은 그러나 여전히 상반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반으로 나눈 사과처럼 실제로는 1이 되지만,
계산으로 하는 이론적으로는 1/2밖에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실제의 것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2. 


자기 결점을 쉽게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유태 민족이 즐겨 읽는 고전 가운데 하나인 <미드라쉬>에 보면,
"선한 곳에는 반드시 조그마한 악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현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발전시켜 가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인간이란 누구이고 단점과 부족함이 있으므로,
이 단점을 고치기 부단한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이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점을 지니고 있는 반면 남과 다른 장점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완벽한 현자가 없듯이 철저하게 무지몽매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단점보다도 장점을 더 많이 개발함으로써,
단점은 별것 아닌 사소한 것으로 제쳐버리도록 해야 한다.
장점을 보다 많이 늘어가는 것이 자기 단점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3.


생물 가운데 웃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 중에서도 영리한 사람이 웃는다. 
유태 민족만큼 생활에서 유머를 즐기는 민족도 없다.
고통 받을 때 웃음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그러한 웃음을 통해서도
많은 교훈을 얻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성실한 것은 물론 좋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지나치면 너무 굳어지게 되고,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도 좁아지고 만다.
하지만 유머와 기지, 해학은 사물에 대한 고정된 관념에서 약간 벗어나
신선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자연과학, 사회과학할 것 없이 진보라는 것은 언제나 연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떤 한 가지의 사실에서 남이 생각해 내지 못할 것들을 연상해 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 이것은 아인시타인의 말이다.
유머와 기지에는 남달리 빠른 두뇌의 반사작용 즉 연상 능력과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쉬임없는 자기 발전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유머는 천시되거나 사라져서는안된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4.


세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사람,
둘째는 자기가 슬기롭다고 자신하는 사람, 
셋째는 자기도 남도 모두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유태 민족은 지식이 많고 적고보다는 현명한가 아니면
어리석은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상들의 가르침을 잘 익혀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슬기로움이 있는 사람도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리하면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슬기롭고 현명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탈무드>를 독파하고 나면, 앞의 세 종류의 사람 가운데,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끝내는 슬기로운 사람들 속에 끼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5.


산양이 수염이 있다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 
필자도 수염을 기르고 있듯이 랍비들은 대부분 수염 을 기른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보면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 상처를 입는 것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개 생각한 랍비들은 자연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 면도기가 생겨 얼굴에 칼을 대지 않고 면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 면도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히브리어에서의 랍비는 '우리 선생님'이라 하는데,
이 말은 곧 유태인 지역의 지도자이며 지식을 갖춘 현자이다.
그러므로 '산양이 수염이 있다 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는 속담도
겉모양을 아무리 똑같게 꾸며도 속이 다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경구인 것이다.

'만약 수염의 모양으로만 평한다면 모르긴 해도 산양이 이 세상 제일의 현자일 것이다.
'또한 반대로 필자 자신이 수염을 길렀다 하여 내가 산양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6.


당나귀가 예루살렘에 가도 역시 당나귀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또한 이름난 성도이다.
지금의 뉴욕이나 파리처럼 옛날의 예루살렘은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지였고 아울러 유행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당나귀라는 동물은 중동 지역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운송을 위한 가축인 동시에
보통 우매하고 어리석은 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그래서 '당나귀가 예루살렘가도 나귀는 역시 나귀'라는 말은
어리석은 자는 뉴욕과 도쿄를 드나들어도 역시 어리석다는 뜻이다.

당나귀한테 대학모를 씌우고, 가슴에 훈장에 달고,
큰 귀에 황금 귀고기를 매어단다 해도 역시 당나귀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도 속에든 것은 없는 자가 겉치레만 힘쓰는 경우가 많다.
값진 보석들을 치렁치렁 매달고,
무슨무슨 직함을 문패처럼 새겨가지고 다니며 뽑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을 바뀌어 말하면 좋은 금고는 항상 속이 비어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바로 당나귀와 인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사
람은 예루살렘을 다녀오면 한 두가지도 배워 온다는 점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7.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자기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유태 현자 중의 한 사람인 야라쉬닐은 말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들이 많은 교양을 쌓으면서
신앙에 충실한 경건한 유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자녀가 자라서 또 부모가 되면 역시 자기 아들이 경건한 유태인이 되기를 빈다.
하지만 부모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많은 교양을 쌓아
경건한 유태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자기 아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보다도 훨씬 적은 것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8.


아들에게 근면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에게 절도를 가르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탈무드>에 있는 격언이다. 어느날 학생이 랍비한테 물었다.
 [어째서 아들에게 부지런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을 절도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까?]

랍비는 곧 대답하였다.

[자기 자식에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가르치는 부모는
자식에게 포도밭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
울타리가 쳐진 포도밭에는 여우같은 동물이 들어가지 못하듯이
잘못된 생각이 자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19.


신은 항상 어느 곳에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신은 어머니를 창조하셨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 요셉이 어머니가 가깝게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인사하기 위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룩하신 성령이 오고 있다. 나는 일어나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자식에게 있어서의 부모 특히 어머니는 존재 가치의 전부이다.
물론 유태인 가정에서도 남자인 아버지가 호주로서 모든 책임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자식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막중하고 너무나도 큰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애정은 바닥이 없을 만큼 무한정이다.
'어머니, 어머니', 이 말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것인가?
그래서인지 어머니에 대한 격언은 많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는 문고리가 없는 문과 같다.'

이 격언을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에겐 너무도 가혹하기 때문이다.

어느 어머니이고 자기 자식이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나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런 속담도 있다.

'어머니의 눈은 유리눈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의 잘못이나 결점은 보이지 않는다.'라든지
'어머니가 두르고 있는 앞치마는 자기 아들의 잘못을 감싸줄 만큼 크다',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이나 결점을 숨겨주는 베일이다'
이런 종류의 격언은 누구나 어릴 때 많이 들었을 것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20.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아이로서 나이를 한살씩 먹을 뿐이다. 
30, 40세의 아이, 아니 60세의 아이, 사람은 누구이고 아이일 뿐이므로,
아이들과 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성질이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성장 과정에서 귀하게 컸는가,
가난하였는가, 부모의 교육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늘 따라다니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의 성격을 알아보고 싶다면, 그의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된다.

인간은 어릴 때 이미 인격이 완성된다는 말과 같이
아이들한테 온갖 정성을 다쏟아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이들이다.
수염이 있는 아이, 주름이 잡힌 아이, 허리가 굽은 지팡이 짚은 아이... 오
직 아이들이 어른으로서, 노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탈무드 -  교육의 길 21.


어리석은 자의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자의 노년은 황금기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나이를 먹는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에 무엇에 힘써야 할 것인가?
옛날 랍비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노년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노년기를 맞이하기 위한 자기 창조를 시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젊어서부터 노인을 공경하게 된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무슨 일을 하느냐'하는 것보다는
'어던 모습의 인간이냐'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물질 만능과 소비 문화가 조장된 사회에서는
'어떤 모습이 인간'보다는 '무슨 일을 하는 인간'이 더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자연히 활동적인 인간이 더 성공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각종 매스컴의 광고에서 보아도 젊음의 매력과 활기찬 의욕에
지나친 박수를 보내고 있을 만큼 젊음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비록 나이를 먹오 장년이 되고,
이어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끊임없이 활동적인 모습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의 노년은 바로 실패의 모습이며, 계절로 보면 겨울철인 것이다.
실패와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회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가혹한 미래인가?
이 격언이 틀림없는 인간 사회의 현실이라면
우리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가혹한 사회에 살고 있단 말인가?

탈무드 -  교육의 길 22.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노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나이보다 젊은데요'하는 말 을 듣기 시작하며, 벌써 노년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 뒤 좀더 나이를 먹게 되면, 화장실에서 나올 때 바지의 단추 잠그는 것을 자주 잊게되고,
더 늙게 되면 바지의 단추 여는 것을 잊게 된다.이것은 유태인들의 유머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는 안정과 평화가 있다.
나이 먹은 노인의 잔소리는 아무리 많아도 조용하며,
게다가 젊은이게 선행을 하도록 권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인들이 특히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미 나쁜 행위를 했거나 그런 일들을 보여줄 만한 힘이 없어서이다.
어쨌든 악행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는 밝은 사회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어느 사회이고 노인들은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다.
젊은 시절에 노인을 공경한 자만이 자신이 나이 먹어 노년이 되었을 때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노년기가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게 되리라.
경로 사상의 아름다운 윤리는 이렇듯 동서와 고금에 통하는 근본적인 인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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