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신유학과 서학의 세계관에 대한 차이점*
황준연**
* 이 논문은 2006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 (KRF-2006-013-A00129).
** 전북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주제분류】
동양철학, 유학, 서학(천주교), 宋學, 존재론, 세계관
【주요어】
太極, 理, 氣, 天主, 영혼, 邪獄, 마테오 리치, 토마스 아퀴나스, 朱熹, 성호 이익, 하빈 신후담, 순암 안정복, 단산 이호면
【요약문】
본고는 조선후기 서학(천주교)의 전래에 따른 서학과 유학의 갈등 양상을 그 세계관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1780년대 천주교 관계의 서적이 수입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講習會가 열렸다. 일부 지식인들은 서학을 신앙의 차원으로 수용하였는데, 그 결과 儒家 예절의 핵심인 祭祀를 거부하는 사건으로 진화하였다. 1800년대 들어서서 ‘辛酉邪獄’(혹은 迫害), ‘己亥邪獄’(혹은 迫害)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處刑당하거나 流配되어 考終命을 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의 이면에 서로 다른 세계관이 놓여있다. 서학(천주교)의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 神學(토미즘)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구체적으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저술 <천주실의>를 통하여 조선의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서학의 세계관은 외재적인 초월자로서 天主가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은 피조물로서 식물, 동물과는 달리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不滅의 영혼(soul)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유학의 세계관은 12세기 朱熹의 성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인바, 내재적인 태극(理)이 動하여 음양의 二氣가 확산 혹은 수축하는 힘으로 작용하여 만물의 존립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가의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遊氣의 상태로 잠시 머물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소멸한다고 본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 중에서, 성호 李瀷, 하빈 慎後聃, 순암 安鼎福 그리고 단산 李鎬冕 등과 같은 선비들은 <천주실의> 및 <영언려작>등의 서학 서적에 대하여 조목을 들어가며 비판을 가하였다.
조선 후기의 현실 세계에서 서학과 유학은 상호 ‘융화할 수 없는 차이점’을 들어내었다. 불행이 있었다면 자신이 등을 대고 있는 세계는 誤謬가 있을 수 없다는 맹목적 확신(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존심의 확대가 결국 충돌을 빚었고, 이른바 邪獄(혹은 迫害)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본고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초래되는 문제점을 검토함으로써, 문명간의 상호이해를 촉진하자는 점에서 작성되었다.
1. 머리말
인간의 역사는 ‘기억’의 역사이다. 기억을 전달하는 수단은 구전(口傳) 내지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구전에 의한 기억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주로 기록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상사의 내용 또한 이와 같은 기록의 역사 속에서 존재한다.
기록의 수단에 있어서 서적(책)이 미치는 영향과 비교될 것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때로는 한 두 권의 책이 사람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으로 明末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 Matteo Ricci(利瑪竇 : 1552-1610)의 한문 저서 ?天主實義?는 그와 같은 예(例)의 하나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 간간히 읽혀졌으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1] 유교 문화권에서 오랜 세월 동안 性理學의 ‘세계관’에 익숙하게 젖어 있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주실의? 및 또 다른 일련의 책들을 읽음으로써,2]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시간적으로 18세기, 주로 1750년-1850년 사이에 조선조 漢陽(현재의 서울), 성균관 泮村, 경기도, 전라도 그리고 중국 베이징(北京) 일원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놓고, 그 사건의 배경을 분석한다. 이와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동서양에 걸쳐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다. Aristotle(B.C. 384-B.C. 322), St. Thomas Aquinas (1225-1274), Matteo Ricci(1552-1610), 朱熹(1130-1200), 星湖 李瀷(1681-1763), 河濱 愼後聃(1702-1761), 順菴 安鼎福(1712-1791), 茶山 丁若鏞(1762-1836), 丹山 李鎬冕(1842-?), 李承薰, 丁若銓, 李蘗, 丁夏祥, 尹持忠, 權尙然, 黃嗣永 그리고 正祖 대왕 등이 그들이다.
이상 열거한 당대 인물들 가운데 조선조 지식인(독서인)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이 古終命을 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아래 목이 떨어졌거나, 혹은 유배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분명 悲劇에 속한다.3]
이와 같은 사건의 배경에 인간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놓여있다. 이때의 세계관이란 世界-觀(Welt-anschaung) 즉 “자연적 세계 및 인간 세계를 이루는 인생의 의의나 가치에 관한 통일적인 견해”라는 뜻이며, 그것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철학에서의 존재론적(ontological)인 개념을 말한다.
서로 충돌하는 세계관을 분석함에 있어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려운 일에 속한다. 그러나 기왕의 연구는 대부분 천주교 교회 측의 인사들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4] 유교(儒敎) 측의 연구 자료가 부족함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공평성을 상실한 것이며, 더 나아가 학문적 내용을 믿음(신앙)의 영역 속에 편입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본고에서 필자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초래되는 문제점을 검토함으로써 상호이해를 촉진하자는 것이지, 어떤 세계관이 더욱 타당하니까 여타 세계를 배척하고 그를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5]
본고에서 필자는 먼저 귀납적(inductive) 방법에 의존하여 事例들을 나열하고, 이어서 그와 같은 사건들이 전개되었던 근원적인 배경, 즉 ‘세계관’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고에서 필자가 사용하는 ‘西學’이란, 16세기 이후 중국 및 조선조에 전파된 ‘서양의 학문’을 말하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연과학 분야(예 : 幾何學 혹은 지리학, 천문학 등)를 배제한 ‘좁은 의미의 西學’ 즉 서양의 종교, 철학 그 중에서도 천주교(Catholicism)에 한정됨을 밝혀둔다.6]
1]마테오 리치의 저술 ?천주실의?를 처음 조선에 소개한 인물은 李睟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리치의 저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星湖 李瀷의 ?천주실의?에 대한 跋文이 있고부터라고 보아야 하겠다. 참고 ?星湖全書?(2) 「星湖續集」 권15, 天主實義辨 (여강출판사, 1984년 영인본). “天主實義者, 利瑪竇之所述也 …. 天主者, 卽儒家之上帝, 而其敬事畏信, 則佛氏之釋迦也 …. 耶蘇者, 西國救世之稱也.”
2] ?천주실의? 이외에 당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 이탈리아 선교사 Fran cesco Sambiaso(畢方濟; 1582-1649)의 저서 ?靈言蠡勺? 그리고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 Diadace de Pantoja(龐迪我; 1571-1618)의 저술 ?七克? 등을 들 수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西學에 대한 소개서 목록은 다음의 자료를 참조할 것.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15쪽 도표.
3]이러한 사건을 놓고 핍박과 수난을 당하였다는 뜻에서 ‘迫害’라고 부르던(천주교 교회의 입장), 혹은 邪敎를 처벌하는 獄事라는 뜻에서 ‘邪獄’이라고 부르던(유교 측의 입장), 그것은 부르는 사람의 선택의 문제이다. 필자는 경우에 따라서 ‘박해’ 혹은 ‘사옥’이라고 부르겠다.
4]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간행하는 연구지 ?교회사연구?, 제1집(1977년)부터 제25집(2005년)까지의 자료들을 검토하면 알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의 연구는 교회 측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되었으며, 천주교의 세계관에 의하여 유학(성리학)을 자리매김 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5]어떤 세계관이 타당한 것인지는 檢證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만일 누군가 오직 신념(믿음)에 의지하여, 자신의 세계관이 타당하고 다른 사람의 세계관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理性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차원으로 전락한다.
6]西學의 분야 중에서 조선의 선비들은 대체로 자연과학의 영역, 즉 지리학 ․천문학(曆法 포함) 등의 분야에는 매우 好意的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참고 李晬光 ?芝峰類說?, 券一 天文部 / 李瀷 ?星湖全書?(2) 「星湖續集」券15, 天主實義辨.
2. 사건(facts)의 전개
오스트리아가 낳은 천재 L.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사물(things)이 아니라 사건 (facts)의 總合이다.”(?트락타투스?1.1)7] 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조 후기 17세기-18세기 서학(천주교)의 수입과 더불어 이 땅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facts)은 한국사상사의 중요한 카테고리(범주)를 구성하며, 그것은 한국인의 세계의 일부이다. 이제 1783년(癸卯)-1840년(庚子) 사이에 조선 땅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facts)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8]
1) 1783년(癸卯) : 書狀官 李東郁의 아들 李承薰이 부친을 따라서 北京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량의 천주교 서적을 수입하였다.
2) 1785년(乙巳) :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李蘗 등이 中人 金範禹의 집에서 천주교 예배를 보다 적발되었는데, 秋曹에서는 양반 자제들을 훈방하는데 그치고 中人 신분인 金範禹만 流配 보내었다.
— 乙巳秋曹摘發 —
3) 1787년(丁未) : 이승훈, 정약용의 무리들이 성균관 근처의 마을[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講習하고 설법을 베풀었다. — 泮會事件 —
4) 1791년(辛亥) : 전라도 진산 땅에서 양반 지식인 尹持忠이 어머니가 죽었는데, 喪服을 입지 않고 弔問을 거절하였으며, 外弟 權尙然과 함께 神柱를 불태우고, 祭祀를 폐지하였다. 이 사건으로 윤지충, 권상연 등이 처형당하였다. ― 珍山事件 ―
5) 1800년 6월 正祖 대왕이 昇遐하였다.
6) 1801년(辛酉) : 純祖 원년.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黃嗣永이 충북 제천의 토굴 속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붙잡혔을 때 13,311字에 달하는 長文의 글이 새겨져 있는 명주천[帛書]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조선 천주교의 迫害 상황을 北京 천주교의 본당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 黃嗣永 帛書사건 ― 9]
7) 1801년(辛酉) : 황사영 백서사건 등과 관련하여, 黃嗣永, 黃沁, 玉千禧, 崔必恭, 柳恒儉, 尹持憲(윤지충의 동생), 丁若鍾(정약용의 형), 이가환, 이승훈 등과, 중국인 신부 저우웬모(周文謨)가 처형당하였다. 이때에 丁若銓은 흑산도로, 丁若鏞은 강진으로 귀양 갔다. 옥사에서 죽은 천주교도는 대략 300여명10]에 이른다.
― 辛酉邪獄(혹은 辛酉迫害) ―
8) 1839년(己亥) : 서양인 신부 앙베르(范世亨; Imbert), P. 모방(Pierre Maubant), J. 샤스탕(Jacques Chastan)이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정약종의 아들 丁夏祥, 劉進吉 등 천주교도 남녀 130여명11]이 죽음을 당하였다. ― 己亥邪獄(혹은 己亥迫害) ―
무엇이 이와 같은 죽음을 불러일으킨 것인가? 그보다도 무엇이 사람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위하여 공동체(국가)의 존립마져 위태롭게 하였는가?
7]Ludwig Wittgenstein, Tracatus Logico- Philosophicus, (Routledge & Kegan Paul Ltd., 1986): “Die Welt ist die Gesamtheit der Tatsachen, nicht der Dinge.”(1.1)
8]이하 李基慶․李晩采편, 김시준 譯, ?闢衛編?(명문당, 1987) 및 李鎬冕, ?原道考?(武橋書坊 同治戊辰=1868년) — UC Berkeley 동아시아 도서관 Asami 문고 카타로그 No. 26.23 —에서 발췌.
9]황사영의 ‘帛書’에는 可恐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원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倘得海舶數百艘, 精兵五六萬, 多載大砲等, 利害兵器, 兼帶能文解事之中士三四人, 直抵海濱, 致書國王曰, 吾等卽西洋傳敎舶也, 非爲子女玉帛而來, 受命于敎宗, 要救此一方生靈, 貴國容一介傳敎之事, 則吾無多求, 必不放一凡一矢, 又不動一塵一草, 永結和好, 鼓舞而去, 倘不納天主之使, 則當奉行主伐, 死不旋踵, 王容納一人而免全國之罰乎, 抑欲喪全國而不納一人乎, 王請擇之.” 참고 李基慶․李晩采편, 김시준 譯, ?闢衛編?(명문당, 1987), 399쪽. 조선 정부에 대한 위와 같은 협박 서한이 비록 몇 사람의 경망스럽고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지는 효과는 메가톤급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삿된 교리’[邪敎]를 다스리려고 구실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백서의 내용은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니겠는가?
10]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49쪽.
11]己亥年에 죽은 천주교도의 숫자는 流動的이다. ?벽위편? 자료에 의하면, 刑曹애서 처형한 인원은 남녀 40인, 物故한 인원은 25인이며, 捕廳에서 物故한 인원이 38인이고, 나머지는 放免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은 자는 많아야 100명 전후로 추정된다.(동 자료 김시준 번역본 340쪽 이하 참조). 그러나 최동희 교수는 ‘己亥邪獄’이라고 표현하면서, 법에 따라 죽은 사람이 70명이고, 억울하게 죽은 인원이 60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 50쪽.
3. 서학(천주교)의 세계관—마테오 리치의 세계관
앞에서 말하였듯이 西學 곧 천주교의 세계관이 조선에 전파된 것은 이탈리아의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술 ?天主實義?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먼저 마테오 리치의 인물과 그 주장을 통하여 서학의 세계관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16세기 이탈리아 예수회(Society of Jesus) 소속 신부 마테오 리치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직접적인 인물로서 13세기 聖 토마스 아퀴나스(1225- 1274)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른바 ‘토미즘’ 神學은 시대를 1,0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테오 리치 신부의 입장에서 사상 계보를 압축하면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 Avicenna(Ibn Sina; 980-1037)12] → 토마스 아퀴나스 → 마테오 리치 본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존재론 혹은 아비신나 형이상학을 소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리치의 세계관(리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관을 수용하였다)에 대한 검토는 필요한 작업이다.
12]Avicenna (980-1037)는 11세기 아랍의 철학자로서 Ibn Sina라고도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해석은 12세기 Toledo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방세계에 소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Avicenna의 저술 ?형이상학?(Metap thysica)의 영향을 받아서, ?존재와 본질?(De Ente et Essentia)을 집필하였다. cf. Anthony Kenny, Aquinas on Being (Oxford Univ Press, 2002), p. 1.
3.1 마테오 리치의 補儒論
이탈리아 동북부 시골 마을 Macerata 출신인 마테오 리치는 1571년 8월 로마의 성 안드레아 뀌리날레(Santa Andrea’s Qurinale)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예수회의 견습수사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피렌체의 예수회 대학 그리고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학하였다.13]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 이론의 중심이 곧 ‘토미즘’ 철학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4]
1580년 司祭 서품을 받은 리치는 1582년 8월 중국의 아오먼[澳門 : Macao]에 도착하였고, 이후 광둥성 짜오칭[肇慶]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 선교의 길을 닦아나갔다. 사오저우[韶州] 거주시절에 ?四書?의 라틴어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난창[南昌]에서는 한문으로 ?交友論?을 저술하였다. 그는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향하는 끊임없는 역정을 결행하여, 난징[南京]을 거쳐서 드디어 1601년 베이징[北京]진입에 성공하였고,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중심부에 머물렀다.15]
마테오 리치의 선교 방법은 중국 문화와의 調和, 즉 ‘補儒論’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보유론’이 하나의 策略(tactic)에 속하는 것인지16], 아니면 고도의 선교 방법인지에 대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사대부의 同情과 이해를 쟁취하기 위하여 유교에는 긍정적이고 불교를 배척하였음은 사실이다. 17]
리치는 중국인이 孔子 혹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종교 의식(儀式)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유학(孔子의 철학)을 찬양한 까닭은 유학의 철학이 천주교의 ‘자연법칙’(i.e. 自然理性)과 符合되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인데, 그가 말한 자연법칙(자연이성)은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념이다.18]
마테오 리치의 입장이 이와 같이 유학에 대하여 조화 내지 附會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상, 그의 생전에 중국 정부와 큰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천주교 교단의 입장에서는 그의 선교 전략을 크게 성공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듯하다.19]
13]마테오 리치, 송영배 등 6인 옮김, ?천주실의?(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1쪽 연보. —이하 본고에서 필자가 언급하는 ?천주실의?는 다른 언급이 없는 한,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출판한 책을 말한다. -
14]마테오 리치의 로마 신학원의 학생시절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할 것. 林金水․鄒萍, ?泰西儒士利瑪竇?(國際文化出版公司, 2000) 제1장 羅馬學院的大學生活.
15] 마테오 리치의 生平에 대한 연구 자료는 다음과 같다:林金水․鄒萍, ?泰西儒士利瑪竇?(國際文化出版公司, 2000) /王玉川․劉俊餘, ?利瑪竇中國傳敎史?(上, 下) (光啓出版社, 民國75年) / 汪前進, ?西學東傳第一師 ― 利瑪竇?(科學出版社, 2000) / 빈센트 크로닌, 이기반 역, ?西方에서 온 賢者?(분도출판사, 1999) / 조너선 D. 스펜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산, 2002) / George H. Dunne, Generation of Giants - The Story of the Jesuits in China in the Last Decades of the Ming Dynasty -, (Notre Damme Univ. Press, 1962).
16]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文津出版社, 民國 81年), 9쪽. —이 책은 1991년 北京大學 博士論文으로 大陸地區博士論文叢刊의 하나로 출판한 것이다.—
17]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11쪽.
18]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57쪽. “自然理性이란 上帝의 영광이 人身上에 남아있는 흔적이다. 우리가 善惡을 辨別할 수 있는 것은 곧 자연이성의 빛(光)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연이성에 의존하면 보편적 善을 지향할 수 있고, 上帝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cf.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Ⅰ-Ⅱ, 94, 2. 再引用.
19]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의 死後, 계속 중국에 들어왔던 도미니크 수도회(Domini- can Order), 프란시스코 수도회(一名 방지거회; Franciscan Order) 그리고 빠리 外方傳敎會(MEP: Les Mission Etrangeres de Paris) 등이 모두 리치의 傳敎 방법에 대하여 반대를 표시한 점이 그것이다. 이들 교단들의 건의에 의하여, 1704년 교황 Clemens Ⅺ세가 중국 천주교도의 孔子숭배 및 조상 祭祀를 禁止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cf. 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17쪽 / Jacques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 31.
3.2 우주론(존재론)
세계관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카테고리(범주)로서 우주론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의 ‘우주’는 물리학 혹은 천문학에서 말하는 태양계 혹은 은하계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하여 세계를 의미한다.
천주교에서는 존재하는 세계는 천주(Deus)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 본다20]. 마테오 리치는 세계는 천주, 즉 ‘외재적인 초월자21]’가 目的因(Finalcause)을 실현하기 위하여 運動因(Efficient cause)을 부여한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說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의 延長이며 리치의 독창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23]. 만물이 천주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리치에 대하여 중국 선비는 자못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중국 선비가 말한다: 만물을 창조한 시조가 선생이 말하는 천주라고 한다면, 그 천주는 누구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까?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천주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만물의 시조요, 만물의 뿌리인 것입니다."24]
존재론(우주론)의 측면에서 볼 때, 전자의 질문은 “無에서 有를 창조해낸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하는 날카로운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후자(서양 선비, 즉 마테오 리치)는 “無始無終”으로 대답한다25].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에게 부여된 ‘良能’이라는 것이다
20] ?천주실의?, 39쪽. “論天主始制天地萬物而主宰安養之” / ?천주실의?, 191쪽. “昔者天主化生天地.”
21]마테오 리치의 표현으로는 天主이며 데우스(Deus)를 말한다. 참고 ?천주실의? 45쪽. “夫卽天主, 吾西國所稱, ‘陡斯’是也”
22]마테오 리치는 Aristotole의 ‘四因說’을 빌려서 Deus의 천지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 리치는 形相因(Formal cause)을 漢語로 ‘模者’, 質料因(Material cause)을 ‘質者’, 運動因((Efficient cause)을 ‘作者’ 그리고 目的因(Final cause)을 ‘爲者’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참고 ?천주실의? 50쪽 & 58쪽 각주 20). 이들 四因의 상관관계에 대하여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한자경, 「18세기 조선 유학자들의 ?천주실의?비판, ?철학연구? 제69집(철학연구회, 2005년 여름), 각주 16).
23]1268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De Anima; 라틴어本)에 대하여 commentary를 붙였으며, 그것은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후반부에 반영되고 있다. cf. Anthony Kenny, Aquinas on Being (Oxford Univ Press, 2002), p. 172.
24]?천주실의?, 56쪽. 이 경우의 중국 선비는 마테오 리치의 저술에서 대화체를 사용한 까닭에 등장한 가상의 인물을 말한다.
25]현대물리학의 상대성 이론(the theory of relativity)과 콴툼 이론(the quantum theory)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찾고자 한다. 이른바 “콴툼 물리학”(Quantum physics)은 “無에서 有를 얻을 수는 없다”(you can't get something for nothing)라는 해묵은 가설을 빠져나가는 구멍(loophole)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cf. Paul Davis, God & The New Physics, (Simon & Schuster Paperbacks, 1983), Preface ⅷ.
3.3 영혼설
마테오 리치는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三品說’을 따르고 있다. 리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魂에는 세 가지 품격이 있다고 말한다. 下品의 혼은 生魂이니 草木의 혼이 그것이다. 초목이 말라비틀어지면 혼도 소멸한다. 다음으로 中品의 혼이 있으니, 이는 覺魂으로 동물의 혼이 그것이다. 동물이 죽으면 혼도 따라서 소멸한다. 마지막으로 上品의 혼은 靈魂이니 인간의 혼이 그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신체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 한다.26]
① 식물 - 生魂(vegetative soul)을 가진 존재 - 下品 - 소멸
② 동물 - 覺魂(sensitive soul)을 가진 존재 - 中品 - 소멸
③ 인간 - 靈魂(rational soul)을 지닌 존재 - 上品 - 영원히 존재하며 不滅 27]
이와 같은 영혼의 이해에 대하여 茶山 정약용은 위 내용과 흡사한 주장을 하고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본성에는 三品이 있다. 초목의 본성은 생명[生]이 있으되, 도리[覺]는 없다. 동물의 본성은 생명도 있고, 도리도 있다. 우리들 사람의 본성은 이미 生과 覺이 있고, 신령[靈]스러우며 또한 착하다[善]. 상중하의 三級은 截然히 같지 않다.” 28]
사람의 혼이 동물의 혼과 다른 점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점에 대하여 리치는 장황하게 여섯 가지 항목을 나열하면서 그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29]
그는 동물은 永生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고, 오직 인간만이 ‘즐거운 곳’[樂地]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30]
외재적 존재로서의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중에서도 오직 인간의 영혼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와 같은 세계 인식은 인간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영혼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또한 동식물은 永生을 바라지 않고, 樂地(즉 천당)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26] ?천주실의?, 124쪽 참조.
27]이상 三品說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Ⅰ, Ques- tion 78, Of the Specific Power of the Soul (Benziger Bros. edition, 1947) 참조.
28] 丁若鏞, ?與猶堂全書? 2-84, 中庸講義 券一. 정약용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類似性에 대하여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것. cf. Donald Baker, “Thomas Aquinas and Chung Yagyong : Rebels Within Tradition” ?다산학? 제3호 (다산학술문화재단, 2002).
29]?천주실의? 129-137쪽 참조.
30]?천주실의? 141쪽
4. 유학(성리학)의 세계관 朱熹의 세계관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사상사에 있어서 유학은 先秦(B.C. 221년 이전) 시기의 유학과 12세기 이후 宋學으로 兩分된다. 전자의 중심인물이 孔子라면, 후자의 대표는 朱熹(1130-1200)이다. 주희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마테오 리치의 시대에 중국의 학문적 분위기는 송학(성리학)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리치가 上帝의 존재와 영혼 不滅을 증명함에 있어서 古學(즉 孔孟 유학)에 附合하고, 宋明 理學을 배척하였다는 사실은31] 하나의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그의 ‘補儒論’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4.1 우주론(존재론)
신유학, 즉 송학의 우주론은 北宋의 周敦頤(1017-1073)를 起點으로 하여 출발한다. 그의 주요 저작인 ?太極圖說?은 신유학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필수 자료이며,朱熹는 이를 발전시켜서 신유학(성리학)의 세계관을 확립한 것이다. 주희에 의하면, ‘태극’이란 만물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本然의 원리(本然之理)이며, 그것은 동시에 ‘無極而太極’이다.
‘무극’이면서 동시에 ‘태극’이라는 말은 ‘무극’이 有形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태극’ 자신이 내면상 否定의 因素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며, ‘태극’이란 별도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32] 그런데 ‘태극’이 움직여 陽을 낳고, 움직임이 極하여 靜하면 陰을 낳는다. 一動一靜하여 상호 뿌리(根)가 되면, 兩儀가 확립되는 것이다.33] 이와 같은 ‘태극’ 즉 ‘理’와, 兩儀 즉 ‘氣’의 개념은 송학의 기본적인 카테고리이며, 우주 본체론의 핵심 범주에 속한다.
朱熹에 의하여 정리된 ‘태극’은 ‘理’와 동일시되며, 우주 전체의 統體 질서로 존재하며, 동시에 만물에 모두 갖추어져서[各具] 존재한다. 이것이 ‘理一分殊’의 이론이다. ‘태극’은 만물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원리로 간주되고, 일종의 자기원인(causa sui)이며, 스스로 動靜하는 것이고, 무엇이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을 ‘리’, ‘기’와 관련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태극 = 理 : 만물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원리
氣 : 우주 전체를 흐르는 天地之氣(에너지)
여기에서 말하는 이른바 ‘태극’이란 天地의 생성에 앞서서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이며[强名], 태극이라는 별도의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34] 이때의 ‘氣’란 개체를 형성하는 生成의 힘이다. 이는 ‘확산하여 펼치는 힘’[陽氣]과 ‘수축하여 모이는 힘’[陰氣]으로 나뉘어 진다. 두 힘이 평형상태(equilibrium)가 되어서 恒常性(homeo-stasis)을 유지하는 것이 곧 존재의 모습이다. 평형상태가 깨어져 개체가 사라지는 것, 곧 ‘氣’가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이와 같은 송학의 세계관에 의하면, ‘외재적인 초월자’ 곧 Deus의 존재가 아니라, 태극 내부의 내재적인 에너지(氣)가 작용하여 만물이 이루어진다고 해석된다.
31]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86쪽.
32]馮達文․郭齊勇, ?新編中國哲學史?(下冊) (人民出版社, 2004), 67쪽.
33] 周敦頤, ?太極圖說?.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참고 馮達文․郭齊勇, 같은 책(下冊,) 18쪽.
34]李覯, ?刪定易圖序論?. “吾以爲天地之先, 强名太極, 其言易有太極, 謂有此名曰太極者耳, 非謂太極便有形也.” 참고 馮達文․郭齊勇, 같은 책(下冊,) 18쪽.
4.2 영혼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란 물질적인 신체(body)와 정신적인 靈魂(soul)이 함께 공존한다고 본다. 중요한 사실은 그와 같은 공존의 형태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말하는 형상(form)과 질료(matter)의 형태가 아니라35], 형상(form)과 실체(subject)의 관계라는 점이다36].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屍體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리치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rational soul)을 지닌 上品의 존재이며, 신체는 죽더라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며 불멸한다는 것이다. 先秦 유학의 ?禮記?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보이는데, 形魄(body)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魂氣(soul)는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것이다.37] 이 내용은 주희에 의하여 더욱 구체화된다.
" 氣를 魂이라고 한다. 體를 魄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다만 많은 ‘기’가 있는데, 그 ‘기’가 다한 뒤에 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形魄은 땅으로 돌아가고 죽는다."38]
그렇다면 주희 또한 하늘로 돌아간 영혼을 不滅의 존재로 파악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주희는 결코 死後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주희는 말한다.
"만일 聖賢이 편안하게 죽었다면, 어찌 (그 氣가) 흩어지지 않고 怪異한 존재[鬼神]로 남아있겠는가! 黃帝와 堯․舜이 이미 죽었는데, 靈怪로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38]
그렇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제사 행위란 무엇인가? 조상에 대한 祭禮란 마테오 리치가 지적한 것처럼, 조상의 영혼이 不死의 존재로 남아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또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40]. 이에 대하여 주희는 “先祖가 세상을 떠나서 오래된 경우, ‘氣’의 有無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제사를 받드는 자손이 있는 것은, 필경 一氣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感通의 理’가 있기 때문이다.41]”라고 말하고 있다.
朱熹의 이야기는 다분히 不可知論的(agnostic)인 입장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고찰하면 결국 인간의 死後에 육체는 물론, 영혼도 消滅한다고 보는 것이다.42]
35]하나의 비유이지만, 형상(form)은 신유학에서 말하는 ‘理’ 개념과 유사하고, 질료(matter)는 ‘氣’ 개념과 흡사하다.
36]Anthony Kenny, Aquinas on Mind (Routledge, 1993), p. 28. / Summa Theologica, 1-2, 50,1.
37]?禮記? 郊特牲. “魂氣歸於天, 形魄歸於地.”
38]朱熹, ?朱子語類?, 卷三.
39]朱熹, ?朱子語類?, 卷三.
40] ?천주실의?, 140쪽. /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75쪽.
41] 朱熹, ?朱子語類?, 卷三.
42]朱熹의 견해는 靈魂(soul)이 영원히 不滅하는 것이 아니고, 잠시 머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가의 祖上祭祀는 헤아릴 수 없는 조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4代 정도에 한정된다. 사실 유가의 祭祀 행위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행위를 통하여, 살아있는 자의 결속(단합)을 도모하는 측면이 강하다.
5. 조선 유학자들의 서학 비판
서학(천주교)의 존재론의 근거는 天主가 ‘외재적인 초월자’로서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에 대하여, 유학(성리학)의 존재론은 ‘태극’ 내부의 내재적인 ‘기’(에너지)가 작용하여 만물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서학의 영혼설이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며 不滅하다는 점에 대하여, 유학의 영혼설은 영혼이란 잠시 떠도는 氣[遊氣]로 존재하지만, 결국에는 소멸한다는 것이다.
16세기 이후 이른바 ‘四端七情說’ 그리고 ‘人物性同異說’의 담론에 익숙한 조선의 선비 지식인들이 이와 같은 西學 이론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43]
5.1 星湖 李瀷(1681-1763)의 경우
성호 李瀷은 성리학(철학)의 측면에서는 晦齋 李彦迪과 퇴계 李滉의 흐름을 이어받았고, 經世學(실학)의 측면에서는 율곡 李珥와 반계 柳馨遠의 학풍을 따랐다. 그러므로 李瀷 학문의 경향은 기존 성리학을 ‘傳承’하는 보수적인 입장과, 새로운 학풍을 전개하는 ‘改新’적 경향이 공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右派’와 ‘左派’ 혹은 ‘信西派’와 ‘攻西派’ 등으로 갈래를 쳤다.45]
성호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자이다. 그의 主著의 하나인 ?四七新編?46]을 놓고 볼 때에, 그가 얼마나 순정한 유학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가 西學을 비판한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서학 비판은 ?천주실의?를 조선의 지식인층에게 소개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는 마테오 리치가 불교의 輪回說을 비판하는 점을 놓고 역으로 천주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한다.
"그렇다면 왜 유독 불교의 윤회설만이 잘못된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천당 지옥의 주장은 옳은 것인가?" 47]
李瀷은 이처럼 서학을 소개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그를 가리켜 “서학 수용의 선구자”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의 서학 비판은 이론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서학의 교리를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기고, 佛敎의 이론처럼 惑世誣民의 것으로 경계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므로 서학 비판에 대한 성호의 공로는 그 자신에게 있기보다는,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 가운데 攻西派(신후담, 안정복 대표)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43]이 분야에 대한 기존의 연구업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의 논문을 들 수 있다: 한자경, 「18세기 조선 유학자들의 ?천주실의?비판」, ?철학연구? 제69집(철학연구회, 2005년 여름).
44] ‘우파’란 유가의 입장에서 서학을 비판한 사람들로, 愼後聃․安鼎福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좌파’란 서학에 대한 학구적인 연구를 넘어서 신앙의 차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로, 權哲身(호 鹿菴; 1736-1801)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참고 姜在彦, ?조선의 西學史?(민음사, 1990), 150쪽.
45]이와 같은 학파 분열은 이익 학문의 양면성에 기인하며, 구체적으로는 “聖賢의 七情이 理發인가 혹은 氣發인가”하는 논쟁에서부터 촉발되었다. 신유학에서 말하는 ‘리발’ 혹은 ‘기발’의 문제는 가깝게는 조선조 중기 16세기 退․高(퇴계와 고봉) 및 牛․栗(우계와 율곡)간의 이른바 ‘四七論爭’의 핵심 논제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송학 자체의 세계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호학파의 갈래 또한 이와 같은 ‘리발’, ‘기발’의 논쟁 및 ‘人心’, ‘道心’의 담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李瀷의 문인들은 ‘四端’을 公의 영역에, ‘七情’을 私의 영역에 배치하고 담론을 전개한다. 문제는 ‘칠정’ 가운데에 기쁨[喜]과 분노[怒]의 감정이 私的인 것이 아니고 公的인 영역에 속할 때에,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었다. 퇴계는 ‘리발’의 입장이므로 ‘私心이 없는 公的인 기쁨과분노’[公喜怒]는 당연히 ‘理’가 발현하는 것이었다[公喜怒理發說]. 그러나 李瀷은 처음에는 퇴계의 ‘공희노리발설’을 지지하였다가 나중에 ‘공희노’는 ‘氣’가 발현하는 것[公喜怒氣發說]으로 수정하였다. 李瀷이 별로 利益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헷갈린 것은 그의 제자들이다.
46]李瀷의 35세 무렵의 저술. 그는 ?四七新編?을 晩年까지 곁에 두고 계속 朱墨을 대었다. 1권 1책(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 소장)의 이 저술은 1984년 여강출판사의 ?星湖全書?에도 수록되었다. 이 책의 또다른 필사본 1질이 UC Berkeley 동아시아 도서관 Asami 문고에 表題名 ?心經疾書?로 所藏되어 있으며(Asami 문고 카타로그 No. 26.31), 필자의 확인에 의하면 글자 일부가 국내본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한글 번역본으로 이상익 역 ?譯註 四七新編?(도서출판 다운샘, 1999)이 있다.
47] ?천주실의? 443쪽. 天主實義跋文. “則何獨輪回爲非, 而天堂地獄爲是耶?”
5.2 河濱 愼後聃(1702-1761)의 경우
성호학파 중에서 서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비판한 인물은 河濱 慎後聃이다.49] 그는 ?西學辨?을 저술하여 서학의 세계관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는데, 이를 감정적인 것으로만 볼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儒者로서 오로지 유학 경전만을 읽은 외골수는 아니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Francesco Sambiaso의 ?靈言蠡勺? 그리고 Giulio Aleni의 ?職方外記? 등을 상당히 신경을 써서 읽었다. 문제는 성리학자 신후담에게 이들 저술에서 나타난 세계관이 不道德하고, 利己心을 조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신후담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말하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主宰하며 安養한다”라는 말을 중요한 명제로 삼고 이를 비판한다.
"이른바 천주가 만물을 制作하고 主宰 ․ 安養한다는 것이 이 一篇의 가장 중요한부분이다. 그 말투를 보면 우리 儒家에서 上帝를 말하는 주장에 따름으로써眞實을 꾸미고, 虛僞를 숨기려는 것 같다. 천지가 천주의 제작으로 말미암아 형성된다고 말하면, 이는 理로도 증명이 안 되고 經書에서도 考證이 안 된다".51]
이처럼 신후담은 리치의 천주를 유가의 上帝와 비유함으로써 一見 리치의 주장에 표면상 동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리치의 개인적인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결코 증명[考證]할 수 없는 세계의 주장에 대하여 一針을 놓는다. 그는 매우 신중하게 리치의 說에 대하여 反旗를 올린다.
"천지가 開闢하는 일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다. ?易經?에서 太極이 兩儀를 낳는다고 하였다. ‘양의’란 음양 二氣인데 이것은 形而下의 器다. 태극은 一陰 一陽하는 所以인데 이것은 形而上의 道이다. 上帝가 비록 천지를 主宰는 하지만 천지를 制作한다고 말할 이치는 있을 수 없다." 52]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리치가 이해하는 ‘天主’(즉 Deus)의 개념과 신후담이 이해하는 ‘上帝’의 개념에 대한 차이이다. 전자는 외재적 초월자(인격자)로서의 ‘창조자’를 말하지만, 후자는 ‘理’ 혹은 ‘道’를 의미한다.53] 그러므로 신후담의 존재론은 朱熹의 그것처럼 ‘태극’ 내부의 내재적인 ‘氣’(에너지)가 작용하여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외재적 초월자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신후담은 이처럼 서학의 창조설을 부정할 뿐 아니라, 영혼설에 있어서도 견해가 다르다. 선교사 프란체스코 삼비아소(畢方濟)54]는 그의 저서 ?영언려작?에서 영혼(아니마)을 ‘自立體’ 혹은 ‘本自在’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바 있다. ‘자립체’란 아니마의 總稱으로 다른 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사물을 가리키며, ‘본자재’란 아니마에 대한 專稱이다55]. 신후담은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생각건대 畢方濟는 사람의 영혼이란 스스로가 體를 이루어서 다른 것에 의뢰하지 않기 때문에 自立體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날 때 먼저 형체가 있은 연후에 陽氣가 달라붙어 영혼이 된다. 朱子 또한 영혼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이 氣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영혼이란 형체에 붙어서 있는 것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이 氣 또한 아주 없어지는 것이다. 어찌 自立體 일 수 있겠는가?" 56]
하빈은 이와 같이 영혼(아니마)의 ‘自立性’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이란 신체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自立體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本自在’를 또한 부정하였다.
"이미 自立體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임을 안다면, 本自在라고 말하는 것은 공격하기 전에 저절로 무너진다. 그리고 영혼이 生魂 및 覺魂과 다르기 때문에 不滅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그럴 수 없다. 본래 영혼이 있고 또 生魂이 있고 또 覺魂이 있어서 세 가지[三者]가 독립하여 一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57]
하빈의 견해는 결국 영혼(아니마)은 소멸한다는 것이며, 식물․동물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이며,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세 가지 혼(三魂)은 不可分의 것이고, 다만 식물에 비하여 동물의 영혼이 조금 우수하고, 또한 동물에 비하여 인간의 영혼이 조금 우수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49]신후담에 대한 서양인의 연구는 다음 자료를 참조 할 것. cf. DonaldBaker, “The Use and Abuse of the Silhak Label: A New Look at Sin Hudam and his So Hak Pyon,” ?교회사연구?,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50]?천주실의?, 39쪽. “論天主始制天地萬物而主宰安養之”.
51] 신후담, ?西學辨?, 천주실의 首篇. 참고 李基慶․李晩采 편, 김시준 譯, ?闢衛編?(명문당, 1987), 72쪽.
52] 신후담, ?西學辨?, 천주실의 首篇. 참고 李基慶․李晩采 편, 김시준 譯, ?闢衛編?, 72-73쪽.
53]程子(程頤)가 “主宰한다는 쪽으로는 上帝라 한다”라거나, 혹은 朱子(朱熹)가 “만물은 上帝를 따라서 出入한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참고 李基慶․李晩采 편, 김시준 譯, ?闢衛編?, 72-73쪽.
54]Francisco Sambiaso(畢方濟; 1582-1649)는 이탈리아 예수회 修士로서 1610년 아오먼(澳門)에 도착하였고, 1613년 이후 주로 베이징에 머물렀다. 중국의 독서인 徐光啓와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중국의 政變에 관여하였다. 1649년 광둥성 광저우(廣州)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 ?영언려작?은 그가 口述하고, 徐光啓가 筆錄한 것이다. 참고 姜在彦, ?조선의 西學史?, 108쪽.
55]‘自立體’가 영혼이 속해 있는 類개념이라면, ‘本自在’는 영혼이라는 種 개념의 種差에 해당한다. 참고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 91쪽.
56]신후담, ?서학변?, 영언려작 제1편.
57]신후담, ?서학변?, 영언려작 제1편.
5.3 順菴 安鼎福(1712-1791)의 경우
순암 안정복은 신후담처럼 星湖의 제자이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성호를 만난 것은 비록 몇 차례 되지 않지만, 성호가 미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다. 1757년(丁丑) 안정복은 성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올린다.
"요즈음 서양서를 읽었습니다. 그 학설이 비록 정밀하고 분명하지만 異端의 학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辯學遺牘?은 蓮池和尙과 이마두[리치]가 학문을 따진 글입니다. 스승님은 이 책을 보셨는지요?" 58]
이상 편지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안정복이 ?천주실의?, ?畸人十篇? 그리고 ?辯學遺牘? 등의 西學 서적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59]. 그는 이어서 西學의 영혼설(즉 鬼神說)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나선다.
"귀신에 대한 학설은 繫辭傳, 祭義 및 濂․洛의 여러 선생의 학설로써 그 정상을 알 수 있지만, 끝내 의심할 바가 있습니다. 곧 氣가 모이면 生하고 흩어지면죽어서 空無로 돌아갑니다. 西士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곧 氣가 모여 사람이 되고, 이미 사람이 된 뒤에 따로 靈魂이 있어서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本身의 귀신이 되어 영원히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흩어지는데 遲速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히 흩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옳지 않습니다."60]
순암은 여타 유학자들처럼 生死를 氣의 모임과 흩어짐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흩어진 氣(遊氣)가 잠시 머물러 있을 수는 있으나, 결국에는 소멸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순암의 서학 비판은 그의 저술 ?天學考?와 ?天學問答?에서 체계를 갖추고 진행된다. 그 중에서도 후자는 약 7,000字에 달하는 長文으로 서학 비판의 이론적인 체계를 구비한 것이다. 그는 서학에서 말하는 天主의 존재를 유가의 上帝와 유사하다고 보고, 이를 是認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를 섬기는 動機가 전혀 다른데 있다고 말한다.
"예수[耶蘇]가 세상을 구하는 뜻은 오로지 後世에 있으며, 천당과 지옥으로써 善을 권장하고 惡을 경계한다. 그러나 (유가의) 聖人이 道를 행하는 뜻은 오로지 現世에 있으며 明德과 新民으로써 敎化를 하는 것이다. 그 公과 私의 구별이 자연히 같지 않다. 어찌 조금이라도 後世에 福을 바라는 생각이 있겠는가."61]
순암에 의하면, 죽어서 후세의 천당에 가려고 천주를 받들어 福을 구하는 행위는 순수한 동기가 결여된 利己的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儒家는 순수한 동기인 明德과 新民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報償을 바라는 심리가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 치루어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의 길은 公이며, 서학의 길은 私라고 본다. 그리고 순암에게 있어서 上帝(곧 天主)의 主宰는 곧 ‘태극’ 즉 ‘理’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天’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主宰의 天인데, 天命의 性이니 혹은 天命을 두려워함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 天은 곧 ‘理’이다. 다른 하나는 形氣의 天인데, 이 天은 곧 ‘物’이다. 周敦頤의 ?태극도?는 孔子의 “태극이 兩儀를 낳는다”라는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主宰한다는 것으로써 말하면 上帝라고 한다.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으로써 말하면62], 太極 혹은 ‘理’라고 한다. 上帝와 太極 즉 ‘理’를 갈라서 말할 수 있겠는가? " 63]
이와 같은 순암의 이야기는 天主의 개념이 비록 上帝라는 용어와 동일언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가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순암의 경우 상제는 ‘理’ 혹은 ‘道’를 의미하며, 리치의 경우 천주는 외재적 초월자를 뜻한다.
58]안정복, ?順菴文集? 권2, 上星湖先生別紙(丁丑).
59] ?畸人十篇?과 ?辯學遺牘?은 모두 마테오 리치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전자는 의문이 없지만, 후자 즉 ?변학유독?의 그 作者에 대해서 의문이 있다. 이 책은 원래 李之藻가 편집한 ?天學初函? 가운데 들어있었던 것인데, 근래(1918년)에 陳垣이라는 인물이 이마두(리치)의 저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陳氏에 의하면 蓮池화상(그의 이름이 袾宏임)의 제자, 즉 雲棲 張廣湉(첨)이 의문을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孫尙揚은 이와 같은 설을 따라서 ?변학유독?의 전반부는 마테오 리치의 所作이지만, 그 후반부는 중국인의 저작으로 본다. cf. 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37쪽. ?辯學遺牘? 作者考.
60]안정복, ?順菴文集? 권2, 上星湖先生別紙(戊寅).
61]안정복, ?順菴文集? 권17, 天學問答 10張.
62]?중용? 終章의 구절.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63]안정복, ?順菴文集? 권17, 天學問答 21張.
5.4 丹山 李鎬冕(1842-?)의 경우
근래의 인물 李鎬冕은64] ?原道考?에서 서학 비판의 一場을 열고 있다. 그의 저서 ?원도고?는 순암 안정복의 ?천학고?의 영향을 받고 저술한 글로써 학문적 가치가 크다.65] 이호면은 ?원도고?에서 서학뿐만 아니라 당시 異端으로 생각되는 도교, 불교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비판의 영역을 넓혔다.66]
단산 이호면의 경우 그 이전 학자들보다도 서학에 대한 언급이 훨씬 자세하다. 그는 모세(摩西)의 10계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고, 또한 예수(耶穌)의 아버지 요셉(約色弗), 어머니 마리아(瑪利亞) 등을 거론하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67] 이호면은 서학의 이와 같은 현상적인 이야기이외에, 다음과 같이 그 내용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이 영혼[靈神]이 하늘에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은 곧 사람이 죽은 뒤 남은 ‘기’(餘氣)를 가리킨다. 원래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모의 精神을 받으며 그 ‘氣’가 알선하여 형체를 이룬다. 수십년을 살다가 ‘기’가 다하면 죽는다. 그러므로 ?五音集䪨?에 가로되,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죽으면 聻(적)이 된다고 하며, 또 만물은 시작이 있으면 끝(終)이 있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邵康節은 말하였다. ‘천지도 數가 다하면 사라지거늘, 항차 이슬과 같은 人命이 죽은 뒤에 남은 기[餘氣]가 있겠는가?’ 저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어떤 물건[何物]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68]
이상 丹山의 경우에도 앞선 儒者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은 뒤 잠시 남아 있는 氣는 있을지라도69], 결국 소멸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서학에서 말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란 없는 것이다.
64]이호면은 1842년(壬寅) 출생의 인물로 字는 旅玉, 호는 丹山이다. 고종 15년 1878년(戊寅)에 別試 丙科 14로 급제하였다. 沒年은 알 수 없다. 순조, 고종년 간의 인물 尹秉鼎(1822-1889)의 ?巴江遺稿? 권3 李君斥邪文序에 이호면에 관한 소개가 있다. 참고 권오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돌베개, 2003).
65]이호면의 저술 ?原道考?는 국내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목판본(奎 12108)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別本이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 동아시아 도서관 Asami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Asami Collection 카탈로그 No. 26.23). 본고에서 필자는 同治 戊辰年(1868년) 武橋書坊에서 출판한 Asami 소장본을 底本으로 하였다.
66]UC Berkeley 아사미 문고본 ?원도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誕說(5장) 2) 仙說(2장) 3) 佛說(4장) 4) 原道說(1장) 5) 天學說(15장) 6) 地球辨說. 이상의 구성요소 중에서, 原道說은 유가의 道를 천명한 것이며, 책의 주요 내용은 서학(天學)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67]?원도고? 天學說, “耶穌釘死于十架.”
68]?원도고? 天學說, “且靈神昇天云者, 卽人死餘氣也 …. 故五音集䪨曰, 人死爲鬼, 而鬼死作聻, 又萬物有始者有終. 故邵康節曰, 天地猶從數盡而晦滅, 況草露人命之死後餘氣乎 …. 彼云昇天者, 指何物而謂歟.”
69]上文의 ‘聻’(적)을 필자는 영원히 죽지 않은 氣가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잠시 남아있는 遊氣로 본다.
6. 맺음말
앞서 말하였듯이 ‘태극’ 즉 ‘리’는 정통 성리학의 核心 범주(카테고리)에 속한다. 마테오 리치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만물의 제1원인에 대하여, ‘理’ 혹은 ‘태극’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에 해당할 수 없다70]”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문제와 직면한다.
"제가 보기에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의 그림[圖]은 단지 홀수와 짝수의 형상(form)을 취하여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추상적 관념’[虛象]이기에 실제적 내용[實]이 없는 데도, [천지 만물의 근원으로서] 믿을 만한 이치[理]가 있겠습니까? 태극이 오직 ‘理’라고 해석된다고 해도, 천지 만물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71]
이치의 이와 같은 宋學 개념의 이해는 사실 그 본질을 투명하게 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사용한 개념 중 虛와 實의 개념이 불분명하며, 또한 “태극이 오직 ‘理’라고 해석된다고 해도, 천지 만물의 근원이 될 수는 없다”는 데 있어서는 我田引水격의 억지스러운 태도가 엿보인다. 그는 애당초 ‘리’ 혹은 ‘태극’을 격하시키기 위하여 자신만의 논리를 동원한 것이다.72]
그러나 성호 李瀷에 따르면, ‘태극’(理)은 음양 二氣, 즉 만물을 생성하는 寂然不動의 존재(원리)이다. 그 자신은 未動하면서 만물을 能動시키는 존재이다.73] 그것은 원래 무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님에도, 이미 말하였듯이 억지 이름(强名)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無極’이면서 동시에 ‘태극’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서학(천주교)의 세계관은 유학(성리학)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를 놓고서 최소한 어느 하나는 잘못이라고 진단하는 경우도 있겠지만74], 필자의 판단으로 그것은 견해 차이의 문제이지 是非의 증명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세계관의 차이 혹은 그를 바탕으로 한 권력 다툼의 결과가 조선조 후기 이 땅에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facts)을 야기 시켰다.
왜 조선조 후기에‘邪獄’(혹은 ‘迫害’)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상호 ‘융화할 수 없는 차이점’(irreconcilable difference)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자신이 등을 대고 있는 세계는 결코 誤謬가 있을 수 없다는 맹목적 확신(믿음)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존심의 확대 및 권력의 쟁취가 결국 충돌을 빚었고, 이른바 邪獄(혹은 迫害)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내부적인 엔트로피(entropy)가 서서히 증가하여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韓末 서양문화에 대한 탄압으로 연결되는 불행한 역사의 始發點이 되었다. 이점 유가 지식인들의 獨尊 내지 自慢心의 결과라고 볼 것이다.
천주교 측의 반성은 없을 것인가? 이른바 ‘제2차 바티칸 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 기간(1962년-1965년) 제261代 교황, Giovanni 23세에 의하여 공표된 결과는 무엇을 말하는가?75] 만일 이 개혁이 200년만 앞섰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70] ?천주실의?, 98쪽. “物之無原之原者, 不可以理以太極當之.”
71]?천주실의?, 83-87쪽. “吾視, 夫無極而太極之圖, 不過取奇偶之象言 … 況虛象無實, 理之何依耶? … 若太極者止解之以所謂理, 則不能爲天地萬物之原矣.”
72]예수회 소속 선교사로서 마테오 리치의 목적은 결국 선교 자체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리’ 혹은 ‘태극’을 格下시킴으로써 宋學(성리학)의 세계관을 攻破하려고 시도한 것은 하나의 策略일 수 있다. 리치의 유학 이해 수준에 대한 비판은 다음의 자료를 참조할 것: 崔基福, 「明末淸初 예수회 선교사들의 補儒論과 性理學 비판」, ?교회사연구? 제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 한자경, 「18세기 조선 유학자들의 ?천주실의?비판」 / 孫尙揚, ?明末天主敎與儒學的交流和衝突? 106쪽. 서구의 종교학자 중에도 마테오 리치의 ‘태극’에 대한 서술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한 사람이 있다. cf. Jacques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 27.
73] ?星湖全書?, 제7권 四七新編. “理本非如槁木死灰, 必修未動而能動.”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 동아시아 도서관 Asami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別本(필사본) ?四七新編?에는 상기 문장이 “理非如枯木死灰”라고 되어있다.(Asami Collection 카탈로그 No. 26.31 참고)
74]Paul Davis, God & The New Physics, (Simon & Schuster Paperbacks, 1983), p. 7.
75] 周知하다 싶이 조선조 후기 한국 천주교와 유교의 갈등은 주로 祭禮(典禮) 문제를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典禮 문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 김종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전례 토착화」, ?교회사연구?, 제2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참고 문헌-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