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다산의 仁 개념

rainbow3 2019. 9. 12. 13:15

다산의 인仁개념의 인식과 실천

 

금장태*

 

 

1. 인仁개념 인식과 실천과제

 

?논어?를 통해 제시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핵심의 주제는 ‘인仁’이라 할 수 있다.1] 따라서 공자가 “나의 도道는 하나로 꿰뚫었다[吾道一以貫之.<이인里仁>]”라고 발언한 데 대해, 제자인 증자曾子가 “선생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규정하였는데, ‘충서忠恕’가 바로 다산의 해석처럼 인仁의 실현방법이라면 공자의 하나로 꿰뚫은 도道는 ‘인仁’이라 하여도 아무 문제될 일이 없을 것이다. 공자는 “사람이 인仁하지 않으면 예법은 무엇에 쓰겠는가? 사람이 인仁하지 않으면 음악은 무엇에 쓰겠는가?[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팔일八佾>]”라고 말한 것도 예禮·악樂의 기본적인 교화敎化기능도 인仁이라는 인격의 도덕성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仁은 공자에 의해 도덕적 규범의 중심개념으로 제기되고 있는 만큼, ?논어?를 통한 도덕론의 이해는 인仁개념의 인식과 실현의 문제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실상에 밀착될 수 있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산이 ?논어?의 해석에서 ‘인仁’의 문제를 해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경학사상이 지닌 핵심적 과제의 하나라 할 수 있고, 인仁개념을 통한 인간관의 새로운 정립은 그의 사상 전반에 깊이 연관되고 있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인仁’의 문제에 대한 해명에서 다산은 인仁의 성립근거요, 실현기반으로서 인간의 ‘성性’(성품)개념 해석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나 ‘인仁’개념을 독자적으로 정의하면서, 그 개념적 의미를 다양하게 입증해가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실제로 다산의 사상적 전체면모는 그가 어떻게 인仁개념을 정의하고 실현방법을 제시하는지를 이해할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논어?의 해석을 통해 ‘서恕’를 중심으로 하는 인仁의 실현방법을 해명하는 데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인仁’이 여러 도덕규범의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도덕규범의 중추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 위치가 확인되는 만큼, 사실상 도덕적 실현은 인仁을 중추로 하는 다양한 도덕규범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그만큼 인仁의 실현에서는 효孝·제悌·충忠·신信을 비롯한 도덕규범들의 실천이 함께 가는 것임을 주목하고 있다. 곧 인仁과 다양한 도덕규범들의 연결 관계가 확인된다면, 인仁의 실현이 바로 도덕의 실현이 되고, 다산의 ?논어?해석에서 행인론行仁論이 바로 도덕론道德論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핵심적 도덕규범으로서 ‘인仁’개념을 해명하면서 다산은 특히 ‘인仁’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고 실현되는 것임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인仁의 실현은 단순히 도덕적 인격의 실현을 위한 과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사회적 질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곧 인간의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적 질서는 별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연결되고 서로 침투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인仁’개념에 대한 다산의 이해는 언제나 개인의 내면적 인격성과 사회의 공동체적 질서를 향하여 양방향으로 열려있는 것이요, 동시에 양쪽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바로 이 점에서 다산의 ?논어?해석체계가 지닌 전체적 구조를 보면, 개인내면성에 좀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인격론人格論과 학행론學行論의 문제는 행인론行仁論(도덕론道德論)을 열결 고리로 하여 사회질서 속으로 좀더 넓게 퍼져있는 예악론禮樂論과 치도론治道論의 문제와 사이에 서로 핏줄과 근육이 뻗어나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만큼 ‘인仁’의 문제는 ?논어?의 핵심문제요, 또한 다산의 ?논어?이해에서 중심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1] 다산이 30세 때(1791) 內閣(奎章閣)의 月課로 「論語對策」올렸는데, 이때 정조正祖임금이 제시한 질문 가운데서도 “‘인仁’이란 한 글자는 ?논어? 20편 전체의 주재主宰이다.”라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論語古今注, (附見)論語對策?(?與全?2集, 16卷, 39). “仁之一字, 二十篇主宰”

 

 

 

2. 인仁의 근거로서 인성

 

1) 인성 개념의 인식

 

⑴ 인성 개념-성상근性相近과 습상원習相遠의 해석

다산은 인간이 인仁을 핵심으로 하는 도덕규범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도덕성을 지향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고, 바로 이 근거를 성性이라고 본다. ?논어?에는 요堯가 순舜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면서 “그 중中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允執其中.<요왈堯曰>]”고 훈계한다. 여기서 다산은 “중中이란 하늘이 명한 성性이다. 사람의 성性은 지극히 선하니, 이 성性을 붙들어 지킬 수 있으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2]고 밝혔다. 곧 천명天命으로서 지선至善한 성性(인성人性)을 지킴으로써 천하에 인仁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인仁이 성性에 근거하여 실현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다산에서 드러나는 인仁개념 인식의 특성은 그의 인성人性개념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논어?해석에서 다산이 보여준 인성론의 견해는 공자가 “성품은 서로 가깝고, 관습은 서로 멀다[性相近也, 習相遠也]”라는 말과 “오직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겨지지 않는다[惟上知與下愚, 不移.<양화陽貨>]”라는 말을 연결된 말로 보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석하는 집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3] ‘성性’(성품)개념이 ‘습習’(관습)과 대비되고 있는 것은, 대조적인 두 개념의 비교를 통해 성性개념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다산은 ‘성性’을 ‘본심本心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本心之好惡]’이라 하고, ‘습習’을 ‘듣고 봄의 익숙함[聞見之慣熟]’이라 정의하여, 본심과 감각적 경험의 차이로 확인하면서, “덕德을 좋아하고 악惡을 부끄러워하는 성품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모두 같으니 이 때문에 본래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현인賢人과 친하게 지내는지 소인小人과 허물없이 지내는지의 습관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니 이 때문에 끝내는 서로 멀어지는 것이다”4]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명天命으로서의 선천적인 인간의 성품[人性]은 사람에 따라 차등이 없다는 인성동일설人性同一說과 사람이 생활 속에서 후천적으로 경험하는 데 따라 익숙해지는 관습은 사람마다 얼마든지 달라지게 된다는 관습부동설慣習不同說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산이 ‘성性’을 ‘본심本心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라 정의한 것은 성性을 성질의 측면으로 파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질인 ‘성性’의 주체가 되는 본심이 무엇인지 함께 밝혀져야 할 문제로 제기된다. 여기서 다산은 옛 경전을 점검하여 ‘대체大體’·‘도심道心’·‘성性’의 세 가지 연관개념을 제시한다.

곧 “옛 경전에서는” 허령虛靈함의 본체本體로 말하면 대체大體라 하고, 대체가 발현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심이라 하고, 대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말하면 성性이라 한다.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한다’는 것은 하늘이 사람의 태어나는 처음에 허령虛靈한 본체本體의 속에다 덕德을 좋아하고 악惡을 부끄러워하는 성性을 부여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성性을 본체本體라 이름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5]라고 밝혔다. 그것은 ?맹자?에서 제시한 ‘대체大體’를 인간의 본심으로서 영명靈明함의 본체라 하고, ?도경道經?(?순자?에서 인용됨)에서 말하는 ‘도심道心’을 대체大體의 작용이라 하고, 여러 경전에서 말한 ‘성性’을 대체大體의 성질로 규정하여 본심本心의 존재양상을 세 가지 영역으로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성性이란 기호嗜好와 염악厭惡로 명칭을 세운 것이다”6]라고 하여, 성性이 본체(실체)로서 대체大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체大體가 덕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로서 성질을 가리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그 덕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가 천성天性(타고난 성질)임을 경전에서 성性을 언급한 여러 구절에서 입증하고 있다.

 

2]?논어고금주?(?與全?2集, 16卷, 32). “中者天命之性也, 人性至善, 能執守此性, 則天下歸仁矣.”

3] 주자의 ?논어집주?에서는 공자가 말씀한 이 두 구절을 두 장章으로 나누고서 “아래 장章이 위 장章의 뜻을 이어서 말한 것[承上章而言]”이라 하여, 연속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나, 다산은 두 장으로 나누기를 거부하고 하나의 장으로 보고 결합시켜 해석하고 있다.

4] ?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9). “好德恥惡之性, 聖凡皆同, 以此之故, 本相近也, 親賢狎小之習, 甲乙有殊, 以此之故, 終相遠也.”

5] ?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0). “其在古經, 以虛靈之本體而言之則謂之大體(見孟子), 以大體之所發而言之則謂之道心(見道經), 以大體之所好惡而言之則謂之性, 天命之謂性者, 謂天於生人之初, 賦之以好德恥惡之性於虛靈本體之中, 非謂性可以名本體也.”

6] ?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1). “性也者, 以嗜好厭惡而立名.”

 

 

⑵ 습상원習相遠의 양상-상지上知·하우불이下愚不移의 해석

다산은 ‘습상원習相遠’(관습은 서로 멀다)의 구절과 ‘유상지여하우부이惟上知與下愚不移’(오직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구절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곧 “상지上知는 비록 악인惡人과 더불어 서로 친숙해도 오염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우下愚는 비록 선인善人과 더불어 서로 친숙해져도 훈도薰陶되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습習이란 친밀해져 익숙해지는 것이요 배어들어 익숙해지는 것이지, 자신이 선을 함에 익숙하게 되거나 악을 함에 익숙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7]라고 하여, 습習이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나 익숙해진 주위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습習’을 수동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상지上知·하우下愚의 부이不移를 수동적 의미로 한정함으로써, 인간의 능동성에서 고착되어 변하지 않는 부이不移를 거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데 의도가 있다. 그는 “지知와 우愚란 지혜의 우열이다. 지知·우愚는 성性이 아니다. ······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그 성품에서는 서로 같고, 다만 그 지혜에 우열이 있을 뿐이다”8]라고 밝혀, 상등의 지혜로운 사람으로 ‘상지上知’와 하등의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우下愚’는 성품에 따르는 구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모하는 방법에서 무엇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아는 능력의 차이로 규정한다. 이 점에서도 상지上知·하우下愚의 차이란 단지 지혜와 능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요, 성품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확립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은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일에서는 상지上知의 성인聖人도 나날이 진보해가야 하는 것이지 잠지도 정지할 수 없는 것이며, 하우下愚의 경우도 나날이 악으로 빠져들고 있어서 잠시도 정지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만큼 상지上知나 하우下愚가 태어나면서 고정된 품성을 지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견해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다만 상지上知는 악을 보고도 악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이루었고, 하우下愚는 선을 보고도 선으로 나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악에 물들지 않거나 선에 나가지 못하는 ‘불이不移’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성품은 성聖·범凡과 지知·우愚에 따라 차이가 없는 동일한 성품이며, 인간은 선이나 악으로 향하여 얼마든지 향상과 타락을 할 수 있는 가변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지上知가 불이不移한다는 것은 악惡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의미 일뿐 태어나면서 덕이 완성되어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하우가 불이不移한다는 선善의 훈도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 태어나면서 선으로 향해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아니라 본다. 곧 노둔하지만 덕德을 이루어 상지上知에 올라간 자도 있을 수 있고, 총명하지만 덕德을 상실하여 하우下愚에 떨어진 자도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다산은 “그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상지上知라 하는 것이지, 상지上知이기 때문에 옮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요, 그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하우下愚라 하는 것이지, 하우下愚이기 때문에 옮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智·우愚란 자신을 도모함에서 교묘하고 졸렬한 것이지 어찌 성품의 등급이겠는가. ‘성품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단지 한 등급일 뿐이니, 어찌 상上·중中·하下의 세 등이 있겠는가. 상上·중中·하下 3등급의 이론은 천고千古의 큰 장애물이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9]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불이不移’(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지上知나 하우下愚라는 인격을 이루는 근본적 조건이 아니라 단지 상지上知나 하우下愚의 행동양상이 지닌 특징의 한가지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상지上知·중인中人·하우下愚로 인간의 성품을 나누고,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불이不移하지만 중인中人만이 위로 오르거나 아래로 떨어지는 이동移動이 가능한 것이라 하여, 성품을 3등급으로 나누는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산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성품을 3등급으로 나누어 놓는 것은 인간이 타고나는 성품을 등급화 함으로써 자신의 노력이나 행동에 의한 변화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심각한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

 

7]?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9). “上知, 雖與惡人相習而不受染汚, 下愚, 雖與善人相習而不受薰陶, 是不移也.···習也者, 親習也, 薰習也, 非謂本人習於爲善, 習於爲惡也.”

8]앞의 책, “知愚者, 知慧之優劣, 知愚非性也,···上知下愚, 其性亦相同, 特其知慧有優劣耳.”

9]?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1). “以其不移之故, 謂之上知, 非以上知之故, 不得不不移也, 以其不移之故, 謂之下愚, 非以下愚之故, 不得不不移也, 智愚者, 謀身之工拙, 豈性之品乎, 性相近, 只是一等而已, 安有上中下三等乎, 上中下三等之說, 爲千古之大蔀, 不可以不辨.”

 

 

2) 본연·기질설의 비판과 성의 선악설에 대한 검토

 

⑴ 본연本然·기질설氣質說의 비판

 

주자는 ‘성상근性相近’의 성性을 ‘기질氣質을 겸하여 말한 것[兼氣質言者]’이라 하고, 본연지성本然之性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가깝다고 할 수 없지만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지적함으로써, 성性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이중구조로 해석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다산은 우선 주자가 본연本然·기질氣質의 설說로서 심체心體를 곧바로 가리켜 은미隱微한 이치를 밝혀냄으로써 인간이 자기인식을 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로가 크다고 본연本然·기질설氣質說에 기초한 인성론人性論이 지닌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본연本然’이라는 명칭이 실리實理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주자의 인성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늘이 속마음을 내려준 것은 반드시 신체가 잉태된 이후에 있는 일이니 어찌 본연本然이라 할 수 있겠는가. 불가佛家에서 청정淸淨한 법신法身은 스스로 시작하는 때가 없으며 본래 스스로 존재하고, 하늘의 제조製造함을 받지 않아서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으므로 ‘본연本然’이라 이름붙이니, ‘본래本來의 자연自然함’을 말하는 것이다.10]

그러나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성령性靈은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면 본연本然이라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허령虛靈한 본체本體는 맹자孟子가 ‘대체大體’라 했으니, 이것이 그 바른 명칭이 되지 않겠는가.”11]

 

10]다산은 ‘本然’의 개념이 불교에서 온 전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4).

*楞嚴經曰, “如來藏性, 淸淨本然.”(第三篇)

*楞器經曰, “非和合者稱本然性.”

*又曰, “譬如淸水, 淸潔本然.”(第四篇)

*楞嚴經曰, “眞性本然, 故名眞實.”(第八篇)

*長水禪師語廣照和尙曰, “如來藏性, 淸淨本然.”(大慧語錄)

11]?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1). “天之降衷, 必在身形胚胎之後, 何得謂之本然乎, 佛家謂淸淨法身, 自無始時, 本來自在, 不受天造, 無始無終, 故名之曰本然, 謂本來自然也, 然形軀受之父母, 不可曰無始也, 性靈受之天命, 不可曰無始也, 不可曰無始, 則不可曰本然, 此其所不能無疑者也, 虛靈本體, 孟子謂之大體, 斯其不爲正名也乎.”

 

 

산은 먼저 하늘이 내려준 ‘속마음[衷]’, 곧 성性은 신체가 생겨난 다음에 부여되는 것임을 밝힌다. 이에 비해 ‘본연本然’은 불교의 용어로서 시작도 끝도 없는 ‘본래本來의 자연自然함’이니, 충충[性]을 본연本然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12] 여기서 다산은 인간 마음의 ‘허령虛靈한 본체本體[衷]’를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일컫는 것은 실상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맹자가 말한 ‘대체大體’를 그 바른 명칭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은 ‘허령虛靈한 본체本體’로서 인간의 심체心體의 명칭을 ‘대체大體’라 하고, ‘성性’을 ‘대체大體의 좋아하고 싫어함’이라 규정하고 있는 만큼, 성性의 개념을 해명하기에 앞서 ‘대체’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맹자는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大人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小人이 된다[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고자상告子上>]”라고만 말하였지만, 다산은 이 ‘대체大體’의 개념을 ‘영명靈明함의 본체[靈明之本體]’라 규정하였다.

우선 다산이 인간의 본심으로서 ‘대체大體’의 개념을 해명하기 위해서 인간과 다른 사물의 존재양상을 비교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모든 살아 있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존재 곧 생명체를 3등급으로 구별하여, 초목草木은 ‘생활함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금수禽獸는 ‘지각이 있으나 영명함이 없고’, 사람의 대체大體는 ‘이미 생활함이 있고 지각이 있으며 또 영명함의 신묘한 작용이 있다’고 그 차이를 밝힌다.13] 이처럼 인간의 대체大體는 초목의 ‘생활[生]’과 금수禽獸의 감각적 지각[知]에다 더하여 이성적 인식능력이라 할 수 있는 영명함의 신묘한 작용을 누적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산이 생명체의 존재양상을 이렇게 3등급으로 구별하는 견해와 매우 긴밀한 유사성을 보여주는 이론으로서, ① ?순자?(왕제王制)에서는 수화水火(유기이무생有氣而無生)·초목草木(유생이무지有生而無知)·금수禽獸(유지이무의有知而無義)·인人(유기유생유지역차유의有氣有生有知亦且有義)로 나누었고, 17세기 초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천주교선교사로서 ② 마테오리치(Mateo Ricci)는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심心을 수심獸心·인심人心으로 구분하고 성性을 형성形性·신성神性으로 나누면서, 혼魂(anima)을 생혼生魂(초목草木)·각혼覺魂(금수禽獸)·영혼靈魂(인간)으로 나누어 Aristoteles의 영혼론에 따라 혼삼품설魂三品說을 제시하였으며, ③ 카발레라(Caballera)는 ?천유인天儒印?에서 생성生性(초목)‧각차생지성覺且生之性(금수)‧영이차각생지성靈而且覺生之性(인간)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시하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다산은 인간존재가 식물도 지닌 ‘생명’과 동물도 지닌 ‘지각’과 인간만이 고유하게 지닌 ‘영명’함을 갖추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존재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곧 인간존재의 현실은 “모든 사물을 포함하여 빠뜨림이 없고, 모든 이치를 유추하여 깨달음을 다할 수 있으며,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함이 양지良知에서 나오니, 이것이 금수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다만 그 산천과 풍속이나 부모의 정기와 혈액을 받아 기질이 되니 맑고 혼탁하며 중후하고 경박한 층차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체大體는 이 기질에 갇히니 따라서 지혜롭고 우둔하며 소통하고 막히는 달라짐이 있게 된다”14]는 것이다. 여기서 다산은 인간의 대체大體는 타고나면서 지닌 지각능력인 ‘양지良知’에 따라 덕을 좋아하고 악惡을 부끄러워하는 성질을 지닌 동시에, 이 대체가 환경[山川風氣]과 유전[父母精血]의 요소에 따르는 기질氣質의 맑고 혼탁하며 중후하고 경박한 층차[無淸濁厚薄之差]에 얽매이면서 인간존재에는 지혜롭고 우둔하며 소통하고 막히는 달라짐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체의 본래 모습으로서 영명靈明함과 기질의 제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상황의 이중성으로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인간존재가 마음과 신체의 결합인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서도 영명한 대체와 신체적 욕구인 소체小體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면서 현실의 인간은 대체와 소체가 오묘하게 결합되어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12]성性을 시작이 있다고 하여 무시무종無始無終한 본연本然이 아니라는 견해는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영혼靈魂을 천주天主가 부여한 것으로서 시작은 있고 끝이 없는 것이고,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천주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는 설명과 연관시켜 이해해볼 수 있다.

13]?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1). “凡天下有生有死之物, 止有三等,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靈, 人之大體, 旣生旣知, 復有靈明神妙之用.”

14]앞의 책, “含萬物而不漏, 推萬理而盡悟, 好德恥惡, 出於良知, 此其逈別於禽獸者也, 但其山川風氣, 父母精血, 受之爲氣質, 不能無淸濁厚薄之差, 故大體之囿於是者, 隨之有慧鈍通塞之異.

 

 

“그 체體를 논한다면 다만 하나의 체體이지만, 오직 하나의 대체大體 가운데 초목草木처럼 생활을 포함하고, 금수禽獸처럼 지각하며, 또한 역상易象을 궁구하고 역수曆數를 계산하여 신묘神妙하고 영통靈通하니, 하나의 체體 가운데 세 가지 성性(생生·지知·령靈)이 정립鼎立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하나의 체體 가운데 세 가지 성性이 정립鼎立한다면 사람은 반드시 영묘靈妙가 이미 끊어졌어도 오히려 촉각觸覺할 수 있는 자가 있고, 촉각觸覺이 이미 끊어져도 오히려 생활生活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느 세상의 사람이든지 살면 전체가 살고 죽으면 전체가 죽는 것이지 이러한 차이가 생길 수 없으니, 그 오묘하게 결합하여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오묘하게 결합하여 분리될 수 없다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큼직하게 두 개의 체體로 확고하게 나눈다는 것은 아마 착오인 듯하다. 하물며 성性이란 대체大體의 전체적 명칭이 아니요,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치를 붙잡아 별도로 하나의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이것은 두세 가지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15]

 

15]앞의 책,

“若論其體, 只是一體, 惟一大體之中, 含生如草木, 知覺如禽獸, 又能窮易象算曆數而神妙靈通, 不可曰一體之中, 三性鼎立也,

若一體之中, 三性鼎立, 則人必有靈妙已絶而猶能觸覺者, 觸覺已絶而猶能生活者, 何世之人, 活則全活, 死則全死, 不如是之差池也, 其妙合而不能離, 居可知矣,

夫旣妙合而不能離, 則命之曰本然之性, 氣質之性, 磊磊落落, 確分二體, 恐亦有差舛者, 何況性也者, 非大體之全名, 執其好惡之理, 而別立一名, 斯又非可以指之爲二三者也.”

 

 

다산은 인간 마음의 본체는 그 속에 식물적 생성生性(생활)과 동물적 지성知性(촉각)과 인간고유의 영성靈性(사유)을 포괄하여 하나의 대체大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 생성·지성·영성의 세 가지가 솥의 세 발처럼 각각 정립鼎立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여기서 그는 이 세 가지 성性이 일체를 이루어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에 살거나 죽거나 함께 있지 하나가 죽어도 다른 것이 남아 있을 수는 없다고 본다.16] 이에 따라 그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갈라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성性을 대체大體의 기호嗜好[好惡]로 해석하는 그의 성性개념과도 적응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다산은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인간과 사물에 동일하게 부여되었다는 ‘본연지성인물개동설本然之性人物皆同說’에 대해 불교에서 끌어온 개념이라 규정하고 정면으로 거부입장을 밝히고 있다. 곧 한 사람의 임금이 내리는 명령도 직급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듯이 인간과 사물에 각각의 성품이 부여되었음을 강조하고, 순자荀子가 수화水火의 기氣, 초목草木의 생生, 금수禽獸의 지知, 인간의 의義를 계층적으로 제시하고 상층의 성性은 하층의 성性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이라 제시한 견해를 합리적인 것으로 본다. 오히려 그는 도의지성道義之性은 사람에게만 있고 사물에게는 없으니 각각 다르게 부여되었지만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인간과 사물이 공통으로 부여된 것이라 하여, 주자의 견해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17]

그는 주자의 ‘본연지성인물개동설本然之性人物皆同說’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이 동일한 본연지성을 지닌 만큼 사물까지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 하고, “하늘이 세상을 한 집안으로 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고 일월日月·성신星辰과 초목草木·금수禽獸로 하여금 이 집을 위해 받들게 한다”18]고 하여,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요, 일월日月·성신星辰과 초목草木·금수禽獸는 모두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인간과 동일한 성품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다산의 인물부동성론人物不同性論은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16] 생生·지知·영靈의 세 가지 성性이 분리될 수 없어서 함께 살거나 함께 죽는다는 주장은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생혼生魂·각혼覺魂은 시작과 끝이 있고, 영혼靈魂은 시작은 있지만 끝남이 없어서 생혼生魂·각혼覺魂이 소멸된 뒤에도 영혼이 불멸한다는 견해와 다른 점이다. 또한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 ‘영靈(사유능력)’이 없어져도 ‘지知(감각능력)’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고, ‘지知’가 없어져도 ‘생生(생활능력)’이 남아 있는 식물인간의 상태가 있을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 다산의 ‘생生·지知·영靈 일체설一體說’은 현실성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3-14). “氣質之性, 人物之所同得, 而若所云道義之性, 惟人有之, 禽獸以下所不能得, 今先正之言, 反以爲本然之性, 人物皆同, 而氣質之性, 人與犬不同, 顧安得無惑哉.”

18] ?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4). “天以世爲家, 令人行善, 而日月星辰草木鳥獸, 爲是家之供奉.”

 

 

⑵ 성性의 선악설善惡說에 대한 해석

 

다산은 성性개념을 ‘대체大體가 덕德[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성질’로 규정하는 만큼 성性은 선善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유교사상사에서는 맹자 당시부터 인성人性의 선善·악惡문제가 중요한 논쟁점이 되어왔고,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어 왔다.

다산은 먼저 후한後漢 순열荀悅의 ?신감申鑒?에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공손자公孫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양웅揚雄의 성선악혼설性善惡渾說, 유향劉向의 성정상응설性情相應說(성부독선性不獨善, 정부독악情不獨惡)의 다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맹자孟子·순자荀子·공손자公孫子·양웅揚雄의 네 가지 견해에 대해 각각의 주장이 근거하는 바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유향劉向의 견해는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제외하였고, 그밖에도 한유韓愈가 「원성原性」에서 제시한 성삼품설(상선上善·중가도상하中可導上下·하악下惡)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으로 부정하였으며,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대체大體의 본래 모습을 얻은 것이라 확인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산은 인성人性의 선악문제를 분석하는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밝히면서, “사람이란 신神(정신)과 형形(신체)이 오묘하게 결합하여 혼연하게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동하여 마음이 되는 것은 도의道義로 인하여 발동한 것이 있으니 도심道心이라 하고, 형질形質로 인하여 발동한 것이 있으니 인심人心이라 한다”19]라고 하여,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발동하는 두 가지 양상을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의 발동이라는 마음의 작용양상으로 성선악설性善惡說의 네 가지 주장을 조명하여, 각각이 지닌 ‘논거’와 그 성性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20]

 

19]?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7). “人者妙合神形, 而混然爲一者也, 故其發之爲心者, 有因道義而發者, 謂之道心, 有因形質而發者, 謂之人心.”

20] 같은 곳, “以其有道心, 故能明別善惡, 又能好德而恥惡, 終以至於殺身而成仁, 此孟子所謂性善之本也. 以其有人心, 故貪財好色, 懷安慕貴, 從善如登, 從惡如崩, 此荀子所謂性惡之說也. 道心爲之主而可使爲善, 人心陷其天則可使爲惡, 善惡成於行事之後, 而未定於生靜之初, 此公孫子所謂無善惡者也. 道心人心, 交發而胥戰, 此揚子所謂善惡渾者也.”

 

 

① 성선설性善說(맹자孟子): [논거] 도심道心이 있기 때문에 선善·악惡을 밝힐 수 있고, 또 덕德을 좋아하고 악惡을 부끄러워할 수 있어서, 마침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데까지 이른다./ [지시] 성性

 

② 성악설性惡說(荀子): [논거] 인심人心이 있기 때문에 재물을 탐내고 여색女色을 좋아하며 편안함을 생각하고 높은 벼슬을 부러워하니, 선善을 따르기는 올라가는 것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기는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다./ [지시] 성지인형이괴자性之因形而壞者(성性이 형形으로 인해 파괴된 것)

 

③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공손자公孫子): [논거] 도심道心을 주장으로 삼으면 선善을 하게 할 수 있으나, 인심人心이 그 하늘을 함몰시켜 악惡을 하게 할 수 있으니, 선악善惡은 행사行事한 다음에 이루어지고 태어나서 고요한 처음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는다./ [지시] 성지우형性之遇形, 공죄미분자功罪未分者(성性이 형形을 만났으나 공功·죄罪가 아직 갈라지지 않은 것)

 

④ 성선악혼설性善惡渾說(양자揚子): [논거]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 번갈아 발동하여 맞서 싸운다./ [지시] 성지우형性之遇形, 경태교전자敬怠交戰者(성性이 형形을 만나 경敬·태怠가 서로 싸우는 것)

 

 

다산은 맹자가 ‘성性’개념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성性의 어떤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치우쳐 있어서 성性의 본래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은 그 덕德을 좋아하고 악惡을 부끄러워함이니, 이것이 천명天命이요 이것이 본성本性이다. 오직 그 육신이 가두어 선을 가로막고 악으로 빠지는 도구가 되므로, 인심人心이 그 사이에 멋대로 발동하여 도심道心이 빠져들게 되는데, 이것이 어찌 본성本性이겠는가”21]라고 하여, 덕德(선善)을 좋아하는 본래의 성품이 순선純善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육신의 욕구에 사로잡혀 도심道心이 주도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주장하여 악에 빠지는 마음의 현실적 작용현상을 성性으로 보아 성악설性惡說이나 성선악혼설性善惡渾說 등을 주장하는 것과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성性이 선善하다[性善]’는 것과 ‘사람이 선善하다[人善]’는 것의 차이를 밝혀, “성性이 선善하다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성性이 덕德을 좋아하고 악惡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선善으로 기르면 성대하여 충만하고, 악惡으로 먹이면 불만스러워 굶주린듯하니, 본성本性이 순선純善함이 분명하다. 사람이 선善하다는 것은 이 선한 성性을 따라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닦아 끝까지 의義를 행하고 인仁을 이루어 그 덕德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22]라고 대비시킨다. 곧 성선性善이란 부여받은 바탕이 선을 좋아한다는 심체心體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요, 인선人善이란 이 바탕에 따라 선善을 실행하여 덕德을 이루는 도덕적 실행의 성과를 말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현실에서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 있더라도 그 성품이 선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만큼 인간이 도덕성을 실현하였는지 못하였는지를 평가하는 성과로서의 선악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도덕적 실천의 가능근거로서의 성선性善함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산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선善을 좋아하는 성性[人性]을 부여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인간존재는 하늘로부터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의지의 자율권[可善可惡之權]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21]앞의 책, “人之所以爲人者, 以其好德而恥惡, 此天命也, 此本性也, 惟其形軀相囿, 爲沮善陷惡之具也, 故人心得橫發於其間, 而道心爲之陷溺, 是豈本性也哉.”

22]앞의 책, “性善者謂天賦之性, 好德而恥惡, 養之以善則浩然以充, 餉之以惡則欿然以餒, 明本性純善也, 人善者率此善性, 正心修身, 畢竟行義而成仁, 以全其德者也.”

 

 

“다만 선善하지 않을 수 없다면 사람에게 공로가 없다. 이에 또 (하늘은)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 스스로의 주장을 들어서 선을 향하고자 하면 들어주고 악을 따르고자 하면 들어주니 이것이 공功과 죄罪가 일어나는 까닭이다. 하늘이 이미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性을 부여해놓고서 그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함은 흐름에 따라 그 하는 바에 맡겨두니, 이것이 신권神權의 오묘한 뜻으로 엄숙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왜 그런가하면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이미 분명하니, 이로부터 선을 향하는 것은 너의 공로요 악을 따르는 것은 너의 죄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23]

 

23]?논어고금주?(?與全?2集, 15卷, 12). “但不得不善, 人則無功, 於是又賦之以可善可惡之權, 聽其自主, 欲向善則聽, 欲趨惡則聽, 此功罪之所以起也, 天旣賦之以好德恥惡之性, 而若其行善行惡, 令可游移, 任其所爲, 此其神權妙旨之凜然可畏者也, 何則好德恥惡, 旣分明矣, 自此以往, 其向善汝功也, 其趨惡汝罪也, 不可畏乎.”

 

 

성품이 선善을 좋아하는 선善한 것이라는 사실은 타고난(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질일 뿐, 그 성질의 실현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지의 발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권한[可善可惡之權]’은 도덕적 자유의지를 의미하며, 다산은 성性이 선善함은 인간의 공功이 아니요, 오직 선을 할 것인가 악을 할 것인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데 따라 공功과 죄罪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도덕적 자유의지가 없이 본능에 고정되어 있는 동물과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다. 특히 다산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선한 성품을 부여받은 사실을 넘어서 자주적 결정권한을 부여받음으로 공功·죄罪가 판정된다는 사실에 대해 엄숙하고 두려워해야할 신권神權의 오묘한 뜻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그는 인仁이라는 도덕규범의 근거에 성性을 확인하고, 성性의 근원에 하늘을 발견하며 하늘에 대한 두려움에 도덕성의 근원적 기반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성人性의 선악문제와 기질氣質의 관계에 대해 다산은 “(기질은) 본성本性의 선善·악惡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선유先儒가 번번이 기질氣質의 청淸·탁濁으로 선善을 하고 악惡을 하는 근본으로 삼으니 착오가 없는 듯하다”24]고 하여, 성리설에서 인성人性의 선善·악惡을 기질氣質의 청淸·탁濁에 따른 것으로 설명하는 견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곧 다산은 선·악의 행위란 인간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인 만큼 타고나는 본성의 선함과도 구별되어야 하지만 역시 타고나면서 주어진 기질의 차이가 도덕적 행위의 일차적 원인이나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24]앞의 책, “其于本性之善惡, 了無關焉, 先儒每以氣質淸濁, 爲善惡之本, 恐不無差舛也.”

 

 

3. 인仁개념과 실천원리로서의 서恕

 

1) 인仁개념의 인식

 

공자는 제자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해 질문하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안연顔淵>]”이라 대답했다. 이에 따라 다산은 ‘인仁’을 정의하여, “인仁이란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자식이 부모를 향하고, 아우가 형을 향하고, 신하가 임금을 행하고, 수령이 백성을 향하는 것이요, 무릇 사람과 사람이 서로 향하여 애틋하게 사랑하는 것이다”25]라고 언명하였다. 여기서 다산은 ‘인仁’을 정의하면서, 공자가 말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의미를 ‘사람과 사람이 서로 향하여 사랑하는 것’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 그 의미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남을 향한 사랑으로서 나의 행위 가운데 한 가지 양상일 수 있다면,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는 해석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심화된 해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仁’개념의 인식은 「논어대책論語對策」에서도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인仁이란 두 사람이다. 옛 전서篆書에서는 ‘인人’자字를 중첩시켜 ‘인仁’자字로 삼았다. ······ 인仁이란 사람과 사람의 지극함이다. 자식이 부모를 효도로 섬기니 자식과 부모는 두 사람이고,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니 신하와 임금은 두 사람이고, 형과 아우는 두 사람이고, 수령과 백성은 두 사람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면, 창힐倉頡과 복희伏羲가 문자를 제작한 처음에 원래 행사行事로써 회의會意한 글자이다”26]라 밝히고 있다. 곧 ‘인仁’자字의 글자모양이 ‘인人과 이二’ 두 글자가 결합된 것이요, 옛 전서篆書에서는 ‘인인人人’으로 되어 있는 사실을 들어서, ‘인仁’자字가 두 사람 사이에 실행[行事]되는 도리를 의미하는 회의會意문자임을 지적한 것이다.

 

25]?논어고금주?(?與全?2集, 9卷, 4). “仁者嚮人之愛也, 子嚮父弟嚮兄臣嚮君牧嚮民, 凡人與人之相嚮而藹然其愛者, 謂之仁也.”

?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21). “仁者二人也, 子愛親臣愛君牧愛民, 皆仁也.”

26] ?논어고금주?(?與全?2集, 16卷, 40).「(附見)論語對策」, “仁者二人也, 其在古篆, 疊人爲仁, 疊子爲孫, 仁也者, 人與人之至也, 子事父以孝, 子與父二人也, 臣事君以忠, 臣與君二人也, 兄與弟二人也, 牧與民二人也, 由是觀之, 倉羲製字之初, 原以行事會意.”

 

 

‘인仁’개념은 인仁을 실행하는 방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제자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질문하자,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루에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顔淵>]”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① ‘자기를 이긴다[克己]’는 것은 ‘자기[己,我]’에게 대체大體와 소체小體의 두 가지 몸[體]이 있어서 대체大體가 소체小體를 이기는 것이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두 가지 마음[心]이 있어서 도심道心이 인심人心을 이기는 것이라 해석한다.

② ‘하루에 자기를 이긴다[一日克己]’는 것은 하루 동안 자기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힘써 행하는 것이라 확인한다.

③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란 인仁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인仁을 행하는 것은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요 남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두 사람이 함께 인仁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27]

 

먼저 다산은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이 ‘극기克己’(자기를 이긴다)를 ‘약신約身’(자기를 단속한다)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면서, 맹자孟子 이후 도맥道脈이 끊어져 한유漢儒의 경전 해석은 문자文字에서만 훈고訓詁를 하여,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구분과 소체小體·대체大體의 차별을 알지 못하며, 인성人性과 천도天道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28] 이에 따라 ‘극기克己’에서 수隋의 유현劉炫이 ‘극克’을 ‘이기는 것[勝]’이라 해석하고, 주자朱子가 ‘기己’를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身之私欲]’이라 해석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송학宋學이 지닌 의미까지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7]?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1). “己者我也, 我有二體, 亦有二心, 道心克人心則大體克小體也, 一日克己, 謂一朝奮發用力行之.···由己謂由我也, 仁生於二人之間, 然爲仁由我, 不由人也.(非二人與共成之)”

28] ?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1-2). “孟子之沒, 道脈遂絶,···漢儒說經, 皆就文字上, 曰詁曰訓, 其於人心道心之分, 小體大體之別, 如何而爲人性, 如何而爲天道, 皆漠然聽瑩, 馬融以克己爲約身, 卽其驗也.”

 

 

“맹자孟子가 본심本心을 산의 나무에 비유하고 사욕私欲을 도끼에 비유하였으니, 산의 나무에 대해 도끼는 큰 원수가 되는 것이다. ‘자기로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무수한 성인聖人과 성왕聖王이 한 가닥으로 대를 이어 전수해주는 오묘한 뜻이요, 긴요한 말씀이다. 이것에 밝으면 성현聖賢이 될 수 있지만 이것에 어두우면 금수가 되고 만다. 주자朱子가 우리 도道를 중흥中興한 시조가 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중용?의 서문을 지으면서 이 이치를 발명하였기 때문이다.

근세의 학자들이 송宋·원元의 여러 유학자들의 기氣·리理에 대한 논의와 속으로 선학禪學을 받아들이면서 겉으로 유학儒學을 내세우는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경전을 논의하고 해석함에 한결같이 한漢·진晉의 학설을 따르고자 하며, 의리가 송유宋儒에게서 나온 곳은 곡직曲直을 묻지 않고 한결같이 반대하는 것을 일삼았다. 그 한두 사람 심술心術의 병통은 버려둔다 하더라도, 장차 온 천하의 사람들이 겨우 얻은 바를 잃게 하고 겨우 밝힌 것을 어둡게 하여, 도도하게 휩쓸어 금수禽獸가 되고 목석木石이 되게 하니 작은 일이 아니다.”29]

 

29]?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2).

“孟子以本心譬之於山木, 以私欲譬之於斧斤, 夫斧斤之於山木, 其爲敵讎也大矣, 以己克己, 是千聖百王, 單傳密付之妙旨要言, 明乎此則可聖可賢, 昧乎此則乃獸乃禽, 朱子之爲吾道中興之祖者, 亦非他故, 其作中庸之序, 能發明此理故也,

近世學者, 欲矯宋元諸儒評氣說理內禪外儒之弊, 其所以談經解經者, 欲一遵漢晉之說, 凡義理之出於宋儒者, 無問曲直, 欲一反之爲務, 其爲一二人心術之病, 姑舍是, 將使擧天下之人, 失其所僅獲, 昧其所僅明, 滔滔乎爲禽何獸, 爲木爲石, 非細故也.”

 

 

다산이 주자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높이는 대목이며, 그만큼 ‘자기로 자기를 이긴다[以己克己]’는 인간내면의 인심人心·도심道心 내지 대체大體·소체小體의 이중적 갈등구조에 대한 인식이 인간존재의 인식에서 핵심의 요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산이 당시 청대淸代 고증학에서 한학漢學(한대漢代 훈고학訓詁學)을 따르고 송학宋學(송대宋代 성리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태도에 대해 금수禽獸나 목석木石으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그가 성리학의 인성론이 지닌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갈등구조를 통한 인간 이해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은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인仁을 ‘본심의 온전한 덕[本心之全德]’이라 해석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단호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인仁의 명칭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단지 자기 한사람만 있으면 인仁이란 명칭은 세울 곳이 없다). 가까이는 오교五敎(오상五常의 교敎: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에서 멀리는 천하의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무릇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30]고 하여, 인仁이 본심本心에 내재된 덕성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쟁점은 공자가 안연顔淵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는 것[克己復禮]’라고 대답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설명한 사실이 ‘인仁’을 두 사람의 관계라는 해석과 충돌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점이다. 이에 대해 다산은 “공자의 이 대답을 보면 새롭고 기이한 것으로서 범상한 것을 벗어난 것이다. 마치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으로 대답하는 것과 같아서. 일깨워 격발시킨 것이요 평탄하고 순조롭게 말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음 단락에 그 까닭을 부연 설명하여, 내가 만약 스스로 닦으면[克己復禮] 사람들이 모두 순응해온다[天下歸仁焉]고 말하였다”31]라고 해명하고 있다. 곧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말한 것은 인仁에 대한 대답의 완성이 아니고, 천하의 사람이 순응해오는 ‘천하귀인天下歸仁’과 상응하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인仁의 본래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해명은 두 사람의 관계 속에 성립하는 것으로 보는 자신의 ‘인仁’개념을 일관하게 적용시키기 위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소 궁색한 해명으로 보이는 점도 있다. 오히려 ‘인仁’을 ‘사람을 향한 사랑[嚮人之愛]’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 규정하는 것은 인仁의 구현과정에서 전체적 양상을 파악한 것이라면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는 것[克己復禮]’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仁의 실천방법에서 주체적 조건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산은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서恕’와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직접적 연관관계로 ‘서恕’를 설명한 공자의 언급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옹야雍也>”, “施諸己而不願, 勿施於人.<중용中庸>”)이 모두 극기克己와 일치하는 것이라 하여, ‘극기克己’가 바로 ‘서恕’가 될 수 있음을 밝히기도 하며, 또한 “인仁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서恕에 힘쓰며, 서恕에 힘쓰는 자는 반드시 자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극기克己는 인仁을 추구하는 방법이지 인仁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극기克己’를 통한 ‘강서强恕’(서恕에 힘씀)의 실행과 ‘강서强恕’의 실행을 통한 ‘구인求仁’(인仁을 추구함)의 실천적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32]

 

30] ?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3). “仁之名, 必生於二人之間,(只一己則仁之名無所立) 近而五敎, 遠而至於天下萬姓, 凡人與人盡其分, 斯謂之仁.”

31]앞의 책, “看來孔子此答, 新奇出凡, 殆若問東而答西, 使之警發, 非平平地順下說話也, 故下段敷說其所以然曰我若自修(卽克己復禮), 人皆歸順(天下歸仁焉).”

32]?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5). “克己爲恕.”

?논어고금주?(?與全?2集, 14卷, 21). “求仁者必强恕, 强恕者必克己, 然克己是求仁之方, 非卽爲仁也.”

 

 

또한 안연顔淵이 ‘극기복례인克己復禮仁’의 실천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는 “예법이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법이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법이 아닌 것은 행동하지 마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안연顔淵>]”의 이른바 ‘사물四勿’로 대답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인간에게 예법이 아닌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도록 제시한 것임을 지적하고, “욕구(욕欲)라는 것은 인심人心이 하고자 하는 것이요, 하지 말라(물勿)는 것은 도심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은 하고자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고 하여 둘이 서로 싸우는데, 하지 말라는 것이 이기는 것을 극기克己라고 한다”33]고 하여, 마음속에서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갈등구조에 근거하여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다산은 설암선사雪菴禪師가 말한 것으로, “귀가 듣고, 눈이 보고, 입이 말하고, 몸이 행동하는 것은 노복奴僕이요, 마음이 그 속에 주장하여 지키니 주인主人이다. 주인이 총명함을 진작시켜서 노복奴僕에게 명령하면 모두 복종하여 명령을 받드니, 하지 말라는 것은 주인으로 노복의 말을 따르지 않게 하고 노복으로서 주인을 이끌지 않게 하는 것이다”34]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선학禪學이라 하여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그 비유의 적절함에 적극 찬동하는 뜻을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다산은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의 ‘일일一日’을 마융馬融·형병邢昺·주자朱子가 모두 ‘하루 동안’이라는 기간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거부하고, “하루아침에 선善으로 옮겨가 예법의 마당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35]라고 하여, ‘하루아침에’이라는 실천의 결의를 하는 계기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인仁은 두 사람의 일이니, 두 사람의 일이지만 오로지 책임은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그 공효功效를 설명하여, 하루아침에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면 천하의 사람이 귀화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36]라고 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실천이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자신이 결심하고 실천하는 공효功效가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퍼져 모든 사람을 감화시켜 인仁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인仁을 실현한다는 것이 오직 자신의 주체적 결심에서만 가능한 것이요, 그 실천의 성과와 더불어 실천주체로서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자가 “내가 인仁을 하고자 하면 인仁에 이르른다[我欲仁, 斯仁至矣.<술이述而>]”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확인되며,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다[爲仁由己]’는 구절도 인仁의 실천주체와 실천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33]?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2). “欲也者, 人心欲之也, 勿也者, 道心勿之也, 彼欲此勿, 兩相交戰, 勿者克之則謂之克己.”

34]?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4). “雪菴禪師云耳之聽·目之視·口之言·身之動, 是奴僕也, 心之主持于中, 是主人也, 主人精明振作, 令奴僕皆伏而稟令, 勿者不以主而聽奴, 不以奴而牽主, 勿者不以主而聽奴, 不以奴而牽主.” 다산은 주자가 이 말을 소개하여 후세 사람들이 알게 해준 사실을 칭송하고 있는데,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에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35]?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2). “一日克己, 謂一朝而遷善, 立身乎禮法之場.” 다산은 ?춘추?(昭公12년)에 근거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古語로서 공자가 인용한 말임을 확인한다.

36] ?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3-4). “仁者二人之事也, 二人之事而專責之於一人, 故孔子說其功效曰, 一日克己復禮, 而天下之人, 無不歸化.”

 

 

2) 인仁의 실천원리로서 서恕

 

⑴ 일관지도一貫之道와 서恕

공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꿰뚫었다)’라는 말을 두 번 썼는데, 증자曾子[參]에게는 도道로서 말하고, 자공子貢[賜]에게는 학學과 연관시켜 말하였다. 주자는 이에 대해 증자에게는 행行으로 말하고 자공에게는 지知로 말한 것이라 하여 그 차이를 대조시키고 있다.(?논어집주?, 8卷) 그러나 다산은 “일一이란 서恕이다. 서恕를 행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도 진실로 일관一貫이요, 서恕를 알아서 인仁을 힘쓰는 것도 역시 일관一貫이니, 지知와 행行으로 구별하여 차이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37]고 밝혔다. 곧 공자의 일관一貫하는 도道를 ‘서恕’로 확인하고, ‘서恕’가 인仁을 행하는 방법임을 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제자 증자曾子에게 일관一貫하는 도道를 제시하였을 때, 증자曾子는 그것을 ‘충서忠恕’라 설명하였고,<이인里仁> 자공子貢이 ‘한마디로 평생 동안 지켜야할 것’을 물었을 때 공자는 ‘서恕’라고 대답하였다.<위령공衛靈公> 여기에 ‘충서忠恕’와 ‘서恕’의 차이가 문제될 수 있다.

정자程子는 ‘충서忠恕’에 대해 충忠과 서恕를 천도天道·인도人道로 구별하거나, 무망無妄과 충忠을 행하는 방법으로 나누기도 하고, 체體·용用의 관계로 파악하기도 하여, 충忠과 서恕를 대비시키면서 충忠을 기준으로 보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38] 그러나 다산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충서忠恕가 곧 서恕이다. 본래 나누어 둘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니다. 하나로 꿰뚫었다는 것은 서恕요, 서恕를 행하는 것이 忠이다”39]라고 하여, 서恕를 일관一貫의 중심개념으로 삼고 충忠은 서恕를 하는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충忠’을 ‘속마음에서 사람을 섬기는 것[中心事人]’이라 하고, ‘서恕’를 ‘남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미루어 헤아리는 것[忖他心如我心]’이라 하여, 충忠이 서恕를 행하기 위한 방법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그는 공자가 말한 ‘나의 도[吾道]’란 인도人道요, 인륜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전제로, “무릇 인륜에 처한 것은 오교五敎·구경九經에서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에 이르기 까지 모두 하나의 ‘서恕’자字로 행한다”40]고 하여, ‘서恕’ 한 글자가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일관一貫의 실천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하나의 ‘서恕’자字를 붙들고 ?논어?·?중용?·?대학?·?맹자?에 가보면,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하나의 ‘서恕’자字를 풀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공자의 도道는 참으로 이 하나의 ‘서恕’자字일 뿐이다”41]라 하고, “사서四書는 우리 도道의 나침반인데, ?대학?과 ?중용?은 모두 이 ‘서恕’를 부연한 의리요, ?논어?와 ?맹자?는 서恕에 힘써서 인仁을 추구하는 것이 거듭 보이고 겹쳐 드러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공자의 도道는 하나의 ‘서恕’자字일 뿐이다. 이 한 글자를 붙들고 사람을 상대하면 인仁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42]고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인간관계의 모든 규범이나 사서四書의 모든 언급이 ‘서恕’로 일관되고 있으며, 공자의 도道가 바로 ‘서恕’ 한 글자로 꿰뚫고 있음을 강조하여, ‘서恕’가 도道의 중심개념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37] ?논어고금주?(?與全?2集, 16卷, 40).(附見)論語對策」, “一者恕也, 行恕以成仁, 固一貫也, 知恕而强仁, 亦一貫也, 不可以知行之別, 而疑其有異也.”

38]?논어집주?, 2卷, “程子曰,···忠恕一以貫之, 忠者天道, 恕者人道, 忠者無妄, 恕者所以行乎忠也, 忠者體, 恕者用, 大本達道也.”

39]?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20). “忠恕卽恕, 本不必分而二之, 一以貫之者恕也, 所以行恕者忠也.”

40]?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19). “吾道, 不外乎人倫, 凡所以處人倫者, 若五敎九經, 以至經禮三百曲禮三千, 皆行之以一恕字.”

41] ?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20). “執一恕字, 以臨論語中庸大學孟子, 其千言萬語, 無非一恕字之解, 夫子之道, 眞是一恕字而已.”

42] ?논어고금주?(?與全?2集, 13卷, 44). “四書者, 吾道之指南也, 而大學中庸, 都是恕字之衍義, 論語孟子, 其言强恕以求仁者, 重見疊出, 不可殫指, 則夫子之道, 一恕字而已, 執此一字, 以之接人, 仁不可勝用也.”

 

 

주자는 ‘충서忠恕’를 해석하면서, ‘충忠’을 ‘자기를 다하는 것[盡己]’이라 하고, ‘서恕’를 ‘나를 미루어가는 것[推己]이라 하고, 추기一理의 체體[一理渾然]와 범응泛應의 용用[泛應曲當]으로 설명하여,43] 충忠과 서恕를 체용體用구조로 해석하고, 이에 따라 충忠을 전제로 서恕를 시행한다는 선후先後의 순서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이러한 주자의 견해에 대해 다산은 정면으로 비판한다.

 

 

“충忠과 서恕는 대대對待하는 것이 아니다. 서恕가 근본이 되고 행하는 방법이 충忠이다. 사람이 사람을 섬긴 다음에 충忠이라는 명칭이 있으니, 나 혼자 있으면 충忠이 없으며, 비록 먼저 스스로 자기를 다하고자 하여도 착수할 곳이 없다. 지금 사람들이 모두 충忠이 앞서고 서恕가 뒤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심히 잘못되었다. 충忠한 바로 그 때에는 이미 서恕한 지 오래되었다.

······ 지금 사람들이 알기로는 마치 먼저 한 가지 물건이 마음속에 있어서 충忠이 되고, 그런 다음에 스스로 이를 미루고 굴려서 발현하여 서恕가 되는 것이니,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와 같다면 공자는 둘로 꿰뚫은 것이지, 어찌 하나로 꿰뚫은 것이겠는가.”44]

 

43] ?논어집주?, 2卷, “盡己之謂忠, 推己之謂恕. ···夫子之一理渾然而泛應曲當.”

44]?논어고금주?(?與全?2集, 13卷, 44).

“忠恕非對待之物, 恕爲之本, 而所以行之者忠也, 以人事人而後有忠之名, 獨我無忠, 雖欲先自盡己, 無以著手, 今人皆認吾道爲先忠而後恕, 失之遠矣, 方其忠時, 恕已久矣.

···今人知之, 若先有一物在內爲忠, 然後自此推轉, 發之爲恕, 豈不大謬, 審如是也, 孔子二以貫之, 豈一以貫之乎.”

 

 

이처럼 성리학에서 충忠·서恕를 상대시켜보는 관점을 철저히 비판함으로써 ‘서恕’를 일관一貫의 원리로 확고히 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본체로서 덕이 ‘서恕’를 통해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행원리로 ‘서恕’를 정립하고 이를 실행함으로써 덕德을 성취하고자 하는 실천적 동력을 확보하는 데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증자曾子가 공자의 일관지도一貫之道를 충서忠恕로 해석한 것이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유가儒家에는 전도傳道의 법도가 없다”45]고 하여, 증자曾子가 대답한 것이 ‘전도傳道의 요결要訣’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일관一貫을 증자曾子가 ‘충서忠恕’로 말한 것이 도통道統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없고, 자공子貢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막혀서 그런 것이라 할 수 없다하여, 증자曾子와 자공子貢 사이에 일관지도一貫之道의 이해에 차등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46] 그것은 공자가 말한 일관지도一貫之道를 증자曾子가 ‘충서忠恕’로 설명한 것이 공자의 도를 새롭게 밝혀낸 것이 아니라, 공자의 근본적 가르침으로서 제자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로 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45]?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20). “此章非傳道之訣, 儒家無傳道法也.”

46] ?논어고금주?(?與全?2集, 13卷, 44). “曾子曰唯, 不必爲受道統, 子貢無對, 不必爲隔膜子, 曾子子貢之本無層級如是也.”

 

 

⑵ 서恕의 실천

 

다산은 ‘서恕’를 인仁의 실천원리로 확인하여, 인仁과 서恕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인仁은 인륜人倫의 이루어진 덕德이요, 서恕는 인仁을 이루는 방법方法이다. 이미 성숙한 것이 인仁이 되고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 서恕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순이 대나무가 되고, 연꽃봉오리가 연꽃이 되는 것과 같다”47]고 하였다. 곧 서恕를 실천하는 것이 인仁을 이루는 것이요, 그것은 길을 가는 것이 목적지에 가는 방법인 것처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인仁’을 설명하면서,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르고자 하면 남을 이르게 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옹야雍也>]”라 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위령공衛靈公>]”고 말한 것이 바로 ‘서恕’를 실천하는 것이요, 인仁의 실천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서恕는 자기와 남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恕’가 바로 공자가 말한 인仁의 방법으로서 ‘가까운 데서 취하여 견주어가는 것[能近取譬.<옹야雍也>]’이다. 다산은 이 말을 부연 설명하여, “가까운 데서 취하여 견주어가는 것은 법도로 헤아리는 것이요, 아래에서 취하여 견주어 위를 섬기고, 왼쪽에서 취하여 견주어 오른쪽과 사귀니, 맹자가 ‘서恕에 힘써서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데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48]고 언급한다.

곧 ?논어?에서 인仁의 방법으로 제시한 ‘능근취비能近取譬’는 ?대학?에서 말하는 ‘혈구絜矩’(법도로 헤아림)요, 맹자가 말한 ‘강서구인强恕求仁’(서恕에 힘써서 인仁을 구함<진심상盡心上>)으로 통하는 것이라 확인하고 있다. 그만큼 서恕는 사서四書를 관통하여 인仁의 실천방법으로서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47]?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31). “仁者人倫之成德, 恕者所以成仁之方法, 不是已熟爲仁, 未熟爲恕, 如筍之爲竹, 菡萏之爲芙蕖也.”

48]?논어고금주?(?與全?2集, 9卷, 22). “能近取譬者, 絜矩也, 取譬於下, 以事上, 取譬於左, 以交右也, 孟子曰强恕而行, 求仁莫近焉.”

 

 

다산은 공자의 일관지도一貫之道로서 ‘서恕’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실천되는 것임을 강조하여,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사람사이에서 살고 있는 만큼, 가까운 관계나 먼 관계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가 나 한 사람과 저 한 사람의 두 사람 사이에 교제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 도道는 무엇하는 것인가? 그 교제를 잘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에 예법禮法을 만들어 선善을 유도하고 악惡을 막으며, 일동일정一動一靜과 일언일묵一言一黙과 일사일념一思一念에 모두 법식과 금률이 있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나아가고 물러나게 한다.

그 문장으로 시詩·서書·역易·춘추春秋가 이미 천언만어千言萬語가 되고,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은 가지치고 잎이 벌어지며, 나누어지고 조각나며, 광대하고 질펀하니 끝까지 배울 수가 없지만 그 귀추를 요약하면 ‘교제를 잘하는 것’에 불과하다.”49]

 

49] ?논어고금주?(?與全?2集, 13卷, 43).

“吾道何爲者也, 不過爲善於其際耳, 於是作爲禮法, 以道其善, 以遏其惡, 一動一靜一言一黙一思一念, 皆有刑式禁戒, 俾民趨辟,

其文則詩書易春秋, 旣千言萬語, 而經禮三百曲禮三千, 枝枝葉葉, 段段片片, 浩浩漫漫, 不可究學, 要其歸, 不過曰善於際也.”

 

 

여기서 그는 공자의 도가 아무리 넓어도 그 최종적 귀결점을 한마디로 집약시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교제를 잘하는 것[善於際]’이라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유교의 전체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중심축으로서의 ‘도道’를 ‘선어제善於際’(교제를 잘하는 것)라는 인간관계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산은 공자의 도道를 이기설理氣說의 형이상학이나 자연철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구체적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질서를 추구하는 ‘인도人道’로 인식하는 토대 위에서 유교의 전체를 내다보는 시야를 재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산은 ‘교제를 잘하는 것[善於際]’이란 상하上下·전후前後·좌우左右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강요하거나 억압함이 없이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를 한 글자로 요약하면 바로 ‘서恕’라고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인간관계의 교제를 잘하는 실천방법으로서 ‘서恕’는 인간관계의 질서에 폐쇄되어 있는 ‘인도人道’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실현하고 하늘에 근원하는 방법으로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 ‘인도人道’임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 사람의 선·악을 살피는 것도 역시 두 사람이 서로 교제함에서 그 착한지 악한지를 감시하는 것이며, 또한 식욕·색욕과 안일安逸의 욕심을 부여하여 두 사람의 교제에서 그 다투고 사양함을 시험하며 그 근면하고 나태함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옛 성인聖人이 하늘을 섬기는 학문이란 인륜人倫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요, 곧 이 하나의 ‘서恕’자字가 사람을 섬길 수 있고 하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50]

 

바로 여기서 다산은 서恕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 사천事天과 사인事人을 결합시켜주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만큼 ‘서恕’는 인仁의 실천방법이요, 인륜人倫을 실천하는 원리이며, 일관一貫하는 도道의 발현양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50] ?논어고금주?(?與全?2集, 13卷, 44).

“天之所以察人之善惡, 亦惟是二人相與之際, 監其淑慝, 而又予之以食色安逸之慾, 使於二人之際, 驗其爭讓, 考其勤怠, 由是言之, 古聖人事天之學, 不外乎人倫, 卽此一恕字, 可以事人, 可以事天.”

 

 

4. 인仁의 실천방법과 효제충신의 규범

 

1) 인仁의 실천방법

 

인仁을 실천하는 구체적 과제로서 공자는 번지樊遲의 질문에 대해 “인자仁者는 어려운 일에 앞서고 이로움을 얻는 것은 뒤로 한다[仁者, 先難而後獲.<옹야雍也>]”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 “어려운 일에는 남보다 앞서고 이익을 얻는 일에는 남보다 뒤에 가는 것이 서恕이다”51]라고 하여, 남을 향한 사랑으로 서恕를 행하는 데에서 인仁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따라서 그는 공안국孔安國이 인仁을 하는 방법으로 ‘노고勞苦를 먼저 하고난 다음에 공功을 얻는 것[先勞苦而後得功]’이라 해석하는 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의 일이므로 서恕가 될 수 없고 인仁이 될 수 없음을 비판하다.

또한 공자는 제자 사마우司馬牛가 인仁에 대해 묻자, “행하기 어려운데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爲之難, 言之得無訒乎.<안연顔淵>]”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은 ‘인仁을 행하기 어렵고, 인仁을 말하기 어렵다[行仁難·言仁難]’고 해석하였는데, 주자는 ‘마음을 간직하기 어렵고 일을 행하기 어렵다[存心難·行事難]’고 해석하여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우리 인간의 일생 동안 행하는 일은 ‘인仁’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仁이란 인륜人倫의 사랑 인데, 천하의 일은 인륜人倫을 벗어나는 것이 있는가? 부자父子·형제兄弟·군신君臣·붕우朋友에서 천하의 만민萬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륜의 이치이다. 이것을 잘하는 자는 인仁이 되고, 이것을 잘못하는 자는 부인不仁이 된다. 공자孔子가 인仁 바깥에 일이 없음을 깊이 알았으므로 하기가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52]라고 밝혔다. 이처럼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인간관계의 질서로서 인륜人倫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만큼 인간의 삶에서 가장 포괄적인 행동원리가 바로 인仁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행위일반을 어렵다고 보았던 주자의 해석이 도리어 애매하고 인仁을 행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던 공안국孔安國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지적한다.

 

51] ?논어고금주?(?與全?2集, 9卷, 13). “艱苦之事先於人.得利之事後於人則恕也.”

52] ?논어고금주?(?與全?2集, 12卷, 5). “吾人之一生行事, 不外乎仁一字, 何則仁者人倫之愛也, 天下之事, 有外於人倫者乎, 父子兄弟君臣朋友, 以至天下萬民, 皆倫類也, 善於此者爲仁, 不善於此者爲不仁, 孔子深知仁外無事, 故曰爲之難.”

 

 

공자는 “인仁을 담당함에는 스승에게 사양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위령공衛靈公>]”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인仁이란 사람이 스스로 가진 것이요, 스스로 하는 것이니, 다툼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사양이 있겠는가”53]라 하여, 인仁을 심성心性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주자의 견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인仁을 할 수 있는 이치는 본심本心에 있고, …… 인仁을 행하는 근거도 본심本心에 있다. …… 그러나 인仁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行事한 다음에 이루어진다. …… 무릇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 본분을 다한 다음에 ‘인仁’이라 이름하니, 다만 마음속의 아득하여 아무 조짐도 없는 이치를 가리켜 인仁이라 하는 것은 옛 경전의 사례가 아니다. 인仁을 리理라고 하면 사서四書와 ?시詩?·?서書?·?역易?·?례禮?의 ‘인仁’자字란 모두 읽기 어려워지며, 단지 인仁을 담당하여 사양하지 않는 것만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니다.”54]

 

53]?논어집주?, 권8, “仁者, 人所自有而自爲之, 非有爭也, 何遜之有.”

54]?논어고금주?(?與全?2集, 14卷, 23). “可仁之理, 在於本心,···行仁之根, 在於本心,···若仁之名, 必待行事而成焉,···凡人與人之間, 盡其本分, 然後名之曰仁, 徒以虛靈不昧之中, 沖漠無眹之理, 指之爲仁, 非古經之例也, 以仁爲理則四書及詩書易禮凡仁字, 皆難讀, 不但當仁不讓爲難解也.”

 

 

이처럼 인仁을 마음에 내재한 이치로 보는 주자의 해석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단호하고 엄중한 것이었다. 그는 주자학을 하는 당시 사람들이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여도 될 수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면서, 그 하나로 ‘인仁을 만물을 낳는 이치라 인식하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하였다.55] 그는 인仁을 할 수 있는 이치나 인仁을 하는 근거도 본심本心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仁이라는 명칭이 행위를 통해 성립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仁의 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仁의 실천을 묻는 것이 인仁의 근본적 과제임을 확인한다. 그만큼 인仁의 실재는 그 가능근거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정에서 성립할 수 있는 것임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山을 좋아하며, 지자知者는 활동하고 인자仁者는 고요하며, 지자知者는 즐거워하고 인자仁者는 오래 산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옹야雍也>]”고 하여, 지자와 인자仁者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를 분리시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지자知者는 인仁을 이롭게 여기고, 인자仁者는 인仁을 편안히 여긴다[知者利仁, 仁者安仁.<이인里仁>]”는 공자의 말을 근거로 둘을 통합하여 파악하고 있다. 곧 그는 “그 마음을 수립함은 비록 다르지만 그 효과를 이룸은 모두 같으니, 인仁을 행함에서 벗어나 별도로 이른바 지智가 있어서 그 문호를 스스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지자知者가 구하는 것도 자기를 이루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56]고 밝혔다. 그만큼 다산은 인仁을 다른 덕목과 상대화시켜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 보려는 입장을 철저히 거부하고 인仁을 통해 모든 덕목이 포괄되고 수렴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5]?心經密驗?(?與全?2集, 2卷, 40), “今人欲成聖而不能者, 厥有三端, 一認天爲理, 一認仁爲生物之理, 三認庸爲平常.”

56] ?논어고금주?(?與全?2集, 9卷, 14). “其立心雖異, 其成效皆同, 非於行仁之外, 別有所謂智者自立其門戶也, 知者所求, 亦不外乎成己.”

 

 

또한 ‘인자仁者는 고요하다’는 말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은 “욕심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無欲故靜]”라고 해석했는데, 다산은 무욕설無欲說에 반대하면서, “인仁이란 서恕에 힘써 행하는 것이다[仁者强恕而行]”라는 자신의 인仁개념에 근거하여 구체적 인간관계에서 추구하는 의지와 욕구가 있음을 전제로 확인한다. 따라서 그는 “사물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로부터 베푸는 것으로, 그 형상이 후덕하여 사물에 혜택을 입히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한다”57]고 하여, 고요함의 의미가 인자仁者의 후덕厚德함이 그 자신으로부터 넘쳐 나와 만물에 미치는 기상氣象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인자仁者는 오래 산다’는 말에 대해, 포함包含은 “성품이 고요한 사람은 장수한다[性靜者多壽考]”라 해석하였지만, 이런 설명은 의가醫家의 양생養生법에 불과한 것으로 도道를 논하는 것이 못된다고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인자仁者도 단명短命한 경우가 있다는 현실을 들고, 인仁을 행하는 것이 연단술鍊丹術처럼 장수를 도모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인仁의 도道란 오래고 길게 갈 수 있으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천하를 교화하니, 그 기상氣象이 오래가고 멀리가기 때문에 그래서 ‘인자仁者는 오래 산다’고 말한다”58]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해석은 인자仁者의 모습을 그 덕에서 발현되는 기상氣象이 멀리 퍼지고 오래도록 지속된다고 해명함으로써, 견강부회하여 신비화하거나 술법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사람 사는 마을은 인仁함이 아름답다. 사는 곳을 선택하여 인仁함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里, 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리인里仁>]”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현鄭玄은 ‘인자仁者의 마을에 사는 것[居於仁者之里]’이라 하여, 인자仁者가 사는 마을을 선택하여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정현의 견해에 반대하여, “군자君子의 도道는 그 닦음이 나에게 있으며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만약 반드시 인자仁者의 마을을 선택하여 살아야 한다면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고 먼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니 가르침이 아니다”59]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이인里仁’이란 인자仁者가 사는 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에 살면서 내가 인仁을 행한다는 뜻으로 본다. 여기서도 다산은 인仁이 자신에게서 말미암아 실행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적용시켜 인仁의 실천주체로서 자신의 책임을 각성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57] 앞의 책, “此不求於物而先自我施之也, 其象爲厚德以澤物, 故曰靜.”

58]앞의 책, “仁之爲道, 可久可長, 不動其身, 而天下化之, 其氣象久遠, 故曰仁者壽.”

59]?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12). “君子之道, 修其在我, 無適不行, 若必仁者之里是擇是居, 則不責己而先責人, 非敎也.”

 

 

2) 인仁의 실천규범과 허물[過]의 성찰

 

공자의 제자 유자有子[有若]는 “효孝·제弟라는 것은 인仁을 하는 근본이다[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학이學而>]”라고 하여, 인仁을 실천하는 구체적 행동규범으로 효孝(효도)·제弟(공경)를 들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효孝·제弟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仁이란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는 것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러우면 인仁이 되니, 부모와 자식은 두 사람이다. 형兄을 섬김에 공경하면 인仁이 되니, 형兄과 아우는 두 사람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러우면 인仁이 되니, 임금과 신하는 두 사람이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림에 자애로우면 인仁이 되니, 수령과 백성은 두 사람이다.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에 이르기까지 무릇 두 사람의 사이에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은 모두 인仁이다. 그러나 효孝와 제弟는 뿌리가 된다.” 60]

 

‘인仁’이 두 사람 곧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인식 위에서 효孝·제弟·충忠·자慈 등 인간관계의 도리를 실현하는 규범은 모두 인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여러 규범들 가운데 효孝와 제弟가 근본적 규범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인仁’이 사람 사이에서 실행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명칭인 것처럼 “자식이 부모를 섬긴 다음에 효孝라는 명칭이 있게 되고. 젊은이가 어른을 섬긴 다음에 제弟라는 명칭이 있게 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긴 다음에 충忠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고. 수령이 백성을 양육한 다음에 자慈라는 명칭이 있게 된다”61]고 하여, 구체적 인간관계의 도덕규범도 모두 실행한 다음에 명칭이 성립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만큼 도덕적 행동규범과 도덕성의 조목은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고 성립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산은 맹자가 “인仁·의義·례禮·지智는 마음에 근본한다[仁義禮智根於心.<진심상盡心上>]”고 말한 의미를 분석하여, “인仁·의義·례禮·지智는 비유하면 꽃이나 열매이니 그 근본根本은 마음에 있다. 측은惻隱·차악差惡의 마음이 안에서 발동하면 인仁·의義는 밖에서 이루어지고, 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이 안에서 발동하면 례禮·지智는 밖에서 이루어진다”62]고 하여,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은 마치 꽃이나 열매처럼 바깥에서 드러난 것이지 땅 속의 뿌리처럼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인仁·의義·예禮·지智를 마음속에 내재한 덕이라 보는 견해를 거부하여, “오늘의 유학자들은 인仁·의義·예禮·지智를 네 개의 낟알처럼 사람의 뱃속에 오장五臟처럼 있어서 사단四端이 이를 따라 나오는 것이라 인식하니,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효孝·제弟도 덕德을 닦는 명칭이니 바깥에서 성립하는 것이요, 어찌 효孝·제弟라는 두 낟알이 사람의 뱃속에 간肝이나 폐肺처럼 있는 것이겠는가”63]라고 비판한다. 곧 그는 마음속의 사단四端에서 바깥으로 터져 나와 실행된 것이 사덕四德(인仁·의義·예禮·지智)라 밝힘으로써, 성리학에서 마음속의 사덕四德에서 바깥으로 사덕四端이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견해를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인내재설仁內在說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이나 그 실천규범으로서 효孝·제弟가 현실 속에서 실행을 통해 성립하는 것임을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효孝·제弟와 인仁의 관계를 좀더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효孝·제弟가 인仁이요, 인仁이 효제孝弟이다. 다만 인仁은 총명總名이니,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고 고아나 과부를 보살피는 것을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 효孝·제弟는 전칭專稱이니, 오직 부모를 섬기고 형兄을 공경하는 것이 그 실지가 된다”64]고 하여, 인仁이 효孝·제弟·충忠·신信의 구체적 실천규범을 포괄하는 전체적 명칭으로서 총명總名이라 하고, 효孝·제弟는 그 실천의 구체적 상황에 따르는 실지를 특정하게 가리키는 전칭專稱으로, 하나의 도덕적 실천행위에 대해 명칭의 범위가 다른 것일 뿐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분이 없이 전체가 있을 수 없으므로 부분으로서 효孝·제弟가 전체로서 인仁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60]?논어고금주?(?與全?2集, 7卷, 9). “仁者, 二人相與也, 事親孝爲仁, 父與子二人也, 事兄悌爲仁, 兄與弟二人也, 事君忠爲仁, 君與臣二人也, 牧民慈爲仁, 牧與民二人也, 以至夫婦朋友, 凡二人之間, 盡其道者皆仁也, 然孝弟爲之根.”

61]?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14). “仁者, 人與人之盡其道也, 子事親然後有孝之名, 少事長然後有弟之名, 臣事君然後有忠之名, 牧養民然後有慈之名.”

62] ?논어고금주?(?與全?2集, 7卷, 9). “仁義禮智, 譬則花實, 惟其根本在心也, 惻隱差惡之心發於內, 而仁義成於外, 辭讓是非之心發於內, 而禮智成於外.”

63]?논어고금주?(?與全?2集, 7卷, 9-10). “今之儒者, 認之爲仁義禮智四顆, 在人腹中, 如五臟然, 而四端皆從此出, 此則誤矣, 然孝弟亦修德之名, 其成在外, 又豈有孝弟二顆在人腹中, 如肝肺然哉.”

64] ?논어고금주?(?與全?2集, 7卷, 10). “孝弟亦仁, 仁亦孝弟, 但仁是總名, 事君牧民恤孤哀鰥, 無所不包, 孝弟是專稱, 惟事親敬兄, 乃爲其實.

 

 

나아가 다산은 인仁의 실천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로서 ‘허물[過]’의 문제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허물[過]과 악(惡)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하여, “인仁에 뜻을 둔 사람은 아직 인仁을 이루는 데 못 미쳤다면 허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허물을 보고 인仁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뜻이 이미 수립되었으면 반드시 악행은 없을 것이다”65]라고 언급한다. 허물은 그 행함이 치우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仁을 행하는 데서도 치우쳐서 허물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허물을 보고 인仁함을 안다[觀過斯知仁矣.<이인里仁>]”는 공자의 말에서처럼, 인仁의 실행에서 치우침으로 일어나는 허물을 보면 그가 인仁을 지키려다가 저지른 과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仁을 지향하여 실행하는 것은 악惡과는 반대방향에 있는 것이므로, 인仁의 실천으로 향하는 방향에는 악惡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는 고쳐가야 하는 ‘허물[過]’과 단절해야하는 ‘죄악[惡]’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인仁의 실천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허물에 대해 관용적 이해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허물이 있는데 고치지 않으면 이것이 허물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위령공衛靈公>]”고 언급한 공자의 말에 대해, 앞에 말한 허물은 ‘과중過中’(중용을 지나친 것)이요, 뒤에 말한 허물은 ‘죄과罪科’라 해석하여, “허물이란 중용을 얻지 못한 것의 명칭이다. ……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은 죄과罪過이다”66]라 한다. 죄악은 허물과 다르지만, 허물을 성찰하여 고치지 않는 데서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임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65]?논어고금주?(?與全?2集, 8卷, 13). “過與惡不同, 志於仁者, 未及成仁, 不能無過, 故曰觀過知仁, 然其志旣立, 必無惡行.

66] ?논어고금주?(?與全?2集, 14卷, 19). “過者, 不得中之名,···若仍其過而不改, 則斯謂之罪過矣.”

 

 

5. 다산의 행인론行仁論이 지닌 특성

 

다산의 ?논어? 해석에서 자신의 관점을 가장 특징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부분이 바로 인仁개념의 인식과 인仁의 실천방법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는 주자가 ‘인仁’을 ‘만물을 낳는 이치[生物之理]’로 보고, 마음의 본체로서 성性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는 성리학의 본체론적 인仁개념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실행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 보는 실천성과적 인仁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인仁개념은 그의 실학적 인간이해와 인격실현의 방법론을 뒷받침하는 핵심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산은 자신의 인仁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그 근거로서 심성내면의 인식을 철저히 재점검하고 있다. 곧 그는 인仁의 가능근거가 되는 성性개념의 인식에서부터 성性을 본체의 리理로 규정하는 성리학적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내면의 실체를 가리키는 바른 명칭으로서 맹자가 말한 ‘대체大體’를 끌어들이고, 성性을 대체大體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好善惡惡: 好德恥惡]’ 기호嗜好의 성질로 본다. 따라서 그는 성性의 선악善惡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하여 기호嗜好[好惡]로서의 성性개념에 따라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기준으로 확립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인성人性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여 확립함으로써 그 기초 위에 자신의 인仁개념과 행인론行仁論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에서 성性의 선악善惡문제가 얽혀있는 복합적 현상을 해결하는 해석의 논리로 제기되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이 지닌 문제점을 예리하게 비판해갔다. 그러나 그는 인간존재의 구조가 신神(정신)과 형形(육신)의 결합이요, 마음이 대체大體와 소체小體의 결합이라는 이중구조에 따라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갈등구조로 확인하고 있으며, 바로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갈등구조로 제시한 점에서 그는 주자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있다. 이처럼 다산은 자신의 인간 심성과 도덕성의 이해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한학漢學이나 송학宋學의 어느 쪽에 대해서나 자유롭게 비판하고 섭취하는 입장을 지키고 있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다산의 인仁개념은 ‘인仁’이라는 글자의 형태가 ‘인人’과 ‘이二’의 결합이요, 옛 전자篆字에서 ‘인人’자字를 두 개 겹쳐서 ‘인인人人’으로 썼던 사실에 근거하여, 두 사람 사이 곧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라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도道 곧 유교의 도道가 한마디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교제를 잘하는 것[善於際]’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만큼 다산은 공자의 도道를 본체론적 관념으로 추상화시키는 이론을 깨뜨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는 ‘인仁’을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 규정하고, 인仁의 실현방법으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일치시켜가나 ‘서恕’를 행인行仁의 기본원리로 강조한다. 그는 공자의 도道가 ‘서恕’로 일관함을 강조하면서, 유교의 모든 경전과 의례는 물론이고, 인간사회의 모든 법도와 질서가 ‘서恕’라는 한 글자로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인간관계의 현실 속에서 ‘서恕’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을 벗어나면 인仁의 실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도道를 벗어나게 되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인仁을 실행하는 구체적 방법은 서恕의 실천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만, 이를 더욱 구체적 실천조목으로 제시하여, 인간관계의 구체적 경우에 따라 실천되고 드러나는 효孝·제弟·충忠·신信을 비롯한 다양한 도덕규범이 바로 인仁의 실천방법임을 확인한다. 여기서 다산은 효孝·제弟를 비롯한 구체적 실천규범과 인仁의 관계를 부분(전칭專稱)과 전체(총명總名)의 관계로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인仁은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실행되는 도덕규범의 구현 그 자체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다산의 행인론行仁論은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구체적 인간관계의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이요, 또한 그 구체적 인간관계의 실현은 인성人性의 선善함에 근거하여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인륜적 도덕규범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행인론行仁論의 인식을 통해 유교경전의 본래적 의미와 공자의 도道가 지닌 바른 의미를 해석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인간존재의 근본구조와 인간사회의 질서가 지닌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주제어: 논어論語, 인仁, 인성人性, 서恕, 효제孝弟.

 

 

 

 

Abstract

 

The Conception of ren(仁) in Tasan’s Interpretation of Lunyu(論語)


Keum Jang-Tae(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conception of ren仁 in Tasan(茶山)’s interpretation of Lunyu(?論語?) is important for his developing of a new concept of man.  While interpreting the concept of ‘renxing’(人性, human nature) as the foundation of ren, Tasan developed a peculiar concept of ‘ren’ based on the empirical and practical concept of man and detached from neo-Confucian theory. He underlines ‘run’ as existing within concrete human relationship and emphasizes that both the individual formation of moral personality and the collective organization of social order are integrated through ren.

He defines ‘ren’ as ‘love toward human beings’, presents ‘shu’(恕, forgiveness) which brings human relationship to unity as the principle of accomplishing ren, and attaches importance to xiaoti(孝悌, filial piety and fraternal duty) as the concrete virtues to practice ren within concrete human relationship.

 

Key words :  Lunyu(the recorded word and deed of Confucius as one of Confucian classics, 論語), ren(Confucian charity, 仁), renxing(人性, human nature), shu(恕, forgiveness), xiaoti(孝悌, filial piety and fraternal duty).

 

 

다산의 ?논어?해석에서 인仁개념의 인식

 

다산은 ?논어?해석에서 ‘인仁’개념의 인식은 새로운 인간관을 정립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는 인仁의 성립근거로서 ‘인성人性’개념을 해석하면서, 주자의 성리학적 이론에서 벗어나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독자적 ‘인仁’개념을 정립하였다.  그는 특히 ‘인仁’이 인간과 인간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것임을 주목하여, 인仁을 통해 도덕적 인격실현과 사회적 질서실현이라는 두 과제가 통합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인仁’을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 규정하고, 인仁의 실현원리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일치시켜가는 ‘서恕’를 제시하며, 인仁을 실행하는 구체적 조목으로 효孝·제弟의 구체적 인간관계 속의 덕목을 중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