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이제마의 사단론

rainbow3 2019. 9. 16. 21:48

이제마의 사단론*
* 이 논문은 2005년도 전남대학교 학술연구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최대우**
**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 겸임연구원.

 

 

【주제분류】유가철학, 한국사상
【주 요 어】사단, 심신사물, 혜각, 능행, 자율성
【요 약 문】
동무 이제마는 사상의학의 기초 이론을 성명론(性命論)과 함께 사단론(四端論)을 근거로 마련했지만 여기에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동무의 사단론을 종래의 유학과 대비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의 독자적인 면모를 밝혀내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관점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주자와 다산의 사단론을 동무의 견해와 비교하여 검토했다.

주자는 사단을 천리로 해석하여 형이상학적 이해를 시도했지만, 다산은 이러한 관념적 해석을 벗어나 인간의 자율성으로 사단의 실현을 설명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앞서 상제천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동무는 사단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도덕성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인간이 事․物과 관계하는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고 해석함으로써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동무의 관점은 천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이것은 사상의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무의 사단론은 의학적 지식과의 접목을 통해 인간의 종합적인 해석을 시도한 독창적인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 서 언

 

공자에 있어서 도덕 가치와 행위는 모두 인(仁)을 근거로 실현되고 구체화된다. 그런데 공자는 인을 실현한 이상적인 인간으로 성인을 제시하지만, 한 인간이 성인의 인격에 도달할 수 있는 근거나 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공자를 계승한 맹자는 도덕 실천의 가능 근거와 실현 방법을 제시하여 도덕적인 인격 완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는 도덕 실천의 가능 근거를 인성의 선함에서 찾으며, 성선(性善)의 증거로 사단(四端)을 제시한다. 맹자 이후 인성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이러한 형태의 주장은 순자(荀子, B.C. 289-239)의 성악설, 양웅(揚雄, B.C. 53-A.D. 18)의 성악혼설(善惡渾說), 한유(韓愈, A.D. 768-824)의 성삼품설(性三品說)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인성을 논하고 있지만, 인성은 대체로 선, 악 또는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논의된다.

 

인간의 성품을 보다 심화시켜 분석해 보려는 시도는 송대 성리학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성리학자들은 우주의 생성은 물론 인간의 성품도 이기(理氣)개념으로 해명한다. 이들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계승했다는 주자의 경전 해석 관점이다. 그의 해석은 중국 성리학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조 성리학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국 성리학을 수용한 조선조 성리학자들은 우주의 형성보다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는 대체로 이기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는 程․朱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정․주의 입장을 벗어난 인성의 해석은 다산의 성기호설에서 찾을 수 있다. 다산은 공맹 유학의 근본정신을 되찾는 입장에서 육경 사서를 재해석하고, 인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고자 한다. 그는 인성을 천리가 아닌 마음의 기호로 해석한다. 그리고 인간은 신형(神形)이 묘합(妙合)된 존재이기 때문에 기호에도 몸과 마음의 기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종래 인성을 단순히 선, 악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천리로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즉 다산은 성기호설을 단순한 주자학의 부정이 아니라 인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본고는 다산과는 또 다른 입장에서 제시된 동무 이제마의 인성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동무는 사상의학을 창시한 한의학자이다. 그리고 한의학의 전통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사상의학의 이론적 근거를 유학 사상에 둔다. 그런데 그는 유학 사상을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즉 그는 유학의 개념들을 몸과 결부시켜 설명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체화한다1]. 이러한 설명은 인성론에 있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동무의 인성론을 고찰하는 한 방법으로 그의 사단론을 검토하고자 한다. 사단에 대한 동무의 해석은 주자나 다산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사단론을 통해 그의 인성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사단 개념에 대한 검토, 동무의 사단에 대한 구조적 이해, 사단심의 실현 방법을 주자와 다산과의 대비적 관점에서 검토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과 대비되는 동무 사단론의 독자적 성격은 무엇이며,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1]졸고, 「동무 이제마의 사상설적 인간관」, ?철학연구?, 제85집 (2003), 309-313 참조 

 

 

2. 사단 개념

 

맹자는 고자(告子)와의 논쟁에서 사단설을 제시하여 인성의 선함을 증명한다.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한 송대 이후 유학자들의 경우 사단 곧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을 인간의 보편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대체로 이견이 없으며, 조선조 유학자들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사단을 이해하는 데에는 학문적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동무 역시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하지만 그의 사단에 대한 해석은 종래와는 다르다. 필자는 동무의 사단론을 검토하기에 앞서 송대 성리학과 조선조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주자와 다산이 어떠한 해석상의 차이를 보이는지를 간략히 검토하고자 한다. 사단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무의 해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우주는 물론이요 인간의 심성까지 이와 기로써 설명한다. 정이천은 성(性)을 理(천리)로 해석하였는데, 이를 계승한 주자는 사단을 인간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주자는 사덕과 사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정(情)이요 인의예지는 성(性)이다. 심(心)은 성정을 통섭한 것이다.

단(端)은 실마리이다. 정이 발함으로 인하여 성의 본연을 볼 수 있으니 마치 물건이 가운데 있으면 실마리가 밖에 나타남과 같은 것이다."2]

2] 朱熹, ?孟子集註? 공손추 上:

惻隱羞惡辭讓是非 情也 仁義禮智 性也 心統性情也

端緖也 因其情之發 而性之本然 加得而見 猶有物在中 而緖見於外也.

 

 

주자가 단을 실마리(緖)로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실마리의 사전적 의미는 헝클어진 실 머리나 사건의 첫 머리를 가리킨다. 실의 내용물이나 사건의 실체는 한 눈에 알 수 없지만 실마리를 통해 이들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인의예지의 성, 즉 사덕 역시 잠재되어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으나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정이 발현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단이 발동하기 전에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지만 바깥 사물을 감촉하면 그 가운데에 자체 조리와 형식이 있어서 마음이 응하게 된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본 순간 인(仁)의 理가 응하여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거나, 종묘나 조정을 지나갈 때 예(禮)의 理가 응하여 공경의 마음이 발동되는 것 등이 그 예이다3]. 이것이 주자가 단을 사단이 드러나는 실마리로 해석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주자는 단을 머리(頭端)가 아닌 꼬리(尾端)로 해석하기도 한다. 측은한 마음은 性이 발현되어 나오는 곳인데, 이곳을 통하여 그 본체를 알 수 있고, 流行으로 인하여 그 근원을 알 수 있으므로 미단(尾端)이라고 한다4]. 그는 서(緖)와 미(尾)의 언어적 논리의 모순을 체용(體用)의 논리로 해명한다. 체용의 논리로 말하면 체가 있는 이후에 용이 있으므로 단을 尾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종(始終)의 논리로 말하면 사단은 시발처가 되므로 단은 실마리이다. 따라서 단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의 서와 미는 모순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5]

 

그런데 단을 해석하는 주자의 의도는 서와 미에 있지 않다. 단은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사덕이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일 뿐이다. 단 해석의 근본 의도는 사덕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추리해 내려는 데 있다. 주자는 사덕을 미발의 본연지성이라고 믿고, 단의 해석을 통해 이를 증명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그는 단의 해석을 통해 사덕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성이라는 사실을 검증하고자 한 것이다. 요컨대 주자의 주장은 사덕이란 인간의 선천적인 보편성이며, 이 보편성은 측은, 수오, 사양, 시비 등의 사단 즉 실마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3]주희, ?주자대전?, 권58, 「答陳器之」(問玉山講義): 如赤子入井之事感 則仁之理便應 而 惻隱之心於是乎形, 如過廟過朝之事感 則禮之理便應 而恭敬之心於是乎形.

4]주희, ?주자어류?, 권95, 程子之書一 : 蔡 季通問康叔臨云 凡物有兩端 惻隱爲仁之端 是頭端 是尾端. 叔臨以爲尾端. … 先生云 不須如此分. … 惻隱是性之動處. 因其動處以知其本體 是因流以知其源 恐只是尾端.

5]주희, ?주자대전?, 권59, 「答何巨元」: 四端之說 若以體用言之 則體爲首而用爲末 若自 其發處而言 則發之初爲首而發之終爲末 二說亦不相妨.

 

 

그러나 다산은 사덕을 선천적 보편성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단’의 원의를 분석해 보면 실마리의 의미가 아니요, 다른 하나는 덕은 선천적인 보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산은 단이나 덕의 개념을 고경에 전거를 두고 해석한다. 단 개념의 해석에 따라 사단의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는 단의 원의를 매우 중요시 한다. 경전의 원의를 추적해 보면 단은 대체로 시작 내지는 시점의 의미로 해석된다. ?중용?의 ‘造端’, ?좌전?(文公 元年)의 ‘履端’, ?禮記?(曲禮)의 ‘更端’6] 등을 보면 단은 모두 시초 또는 시작의 의미이다7]. 그는 ?맹자요의?에서 단이 시작의 의미로 해석되는 더 많은 예를 제시한다8].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맹자가 自註하여 “불이 처음 타는 것과 같고(始然), 샘물이 처음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始達)”고 한 두 개의 始字가 단의 뜻을 뚜렷이 드러낸다고 주장한다9].

이로 미루어 보면 단은 보편성으로서의 사덕이 드러나는 실마리가 아니라 무엇인가 처음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趙岐가 단을 “사람은 모두 인의예지의 首를 가지고 있기에 이를 인용한 것이라”고 해석한 端首說을 사단 해석의 정론으로 수용한다.10]

 

단 개념은 덕(德) 개념과 관련지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주자가 사덕을 인간의 보편성으로 이해하여 “人․物이 태어날 때 각기 부여받은 理로 인하여 健順․五常의 덕을 삼는다”11]라고 한 것은 이른바 性卽理說에 근거한 주장이다. 이 설에 따르면 인간은 보편성으로서의 덕을 부여받고 태어난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고, 종묘나 조정을 지나갈 때 공경의 마음이 발동하는 것은 이미 인이나 예의 리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을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心之德 愛之理)라고 해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자는 이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덕을 보편성으로 부여받는다고 생각한다.

 

6]화제를 바꾸어 다시 말을 꺼내는 시초.

7]정약용, ?詩文集? 권19, 「答」李汝弘 39쪽 참조.

8]정약용, ?孟子要義? 권1, 23쪽 참조.

9]같은 곳: 孟子親自注之曰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兩箇始字 磊磊落落 端之爲始 亦旣明矣.

10]장복동, ?다산의 실학적 인간학?,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2, 69쪽 참조.

11]주희, ?중용장구?, 1장.

 

 

그러나 다산은 이러한 덕 개념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공자의 인 개념은 성즉리설로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을 행함(爲仁)은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한다. 위인(爲仁)의 爲字는 힘써 행하는 것 또는 착수해서 결과를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爲의 字意로 보면 인은 결코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덕은 인륜관계의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개념이다12].

효제충신이나 인의예지의 덕은 행하지 않는다면 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본래 성은 선을 좋아하는데, 선을 좋아하는 감동에 따라 발하는 마음 역시 선한 것이다. 바로 이 선한 마음을 확충해가면 인의예지의 덕이 되는 것이다. 즉 덕은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륜관계에서 선한 마음을 확충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은 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로써 보면 인간의 성은 하나의 가능태일 뿐이며, 완성된 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단 해석에 대한 이상의 검토는 주자와 다산의 학문적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들의 입장은 덕을 선천적 보편성으로서 주어진 완성된 형태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인륜관계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는 것으로서 가능성의 형태로 이해할 것인가로 정리할 수 있다. 단 개념의 해석 차이는 물론 덕 개념 이해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사단에 대한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다산이 주자학을 벗어나려는 궁극적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무는 이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사단을 해석한다. 동무의 사단론은 사상의학의 기초 이론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단을 ?맹자?에 근거를 두면서도 종래와는 다르게 해석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제 장을 달리하여 동무는 사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12]주 8)참조.

 

 

3. 사단의 구조적 이해

 

동무는 ?동의수세보원? 1장에서 ‘성명’을 논한 다음 2장에서 ‘사단’을 논한다. ?보원?이 그의 주저인 점을 감안하면 사상의학 이론의 핵심이 이 두 장에 정리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사단은 ?보원?에 앞서 저술된 ?격치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시간적으로 보면 격치고에서 먼저 사단을 논한 다음 보원에서 완성시킨 것이다.

 

동무의 사단론 검토는 일단 사단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무의 사단에 대한 이해 방식과 내용은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무의 사단론이 맹자의 사단설에 연원한다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사단을 이해하는 방식과 내용이 앞장에서 살펴본 주자나 다산과 같은 전통적인 관점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단에 대한 동무의 이해 방식은 종래와 어떻게 다른가. 동무의 사단 이해 방식은 먼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존재구조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단론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萬物은 身이 사는 곳이고, 身은 心이 사는 곳이고, 心은 事가 사는 곳이다."13]

13]이제마, ?격치고? 儒略 1. 事物: 物宅身也 身宅心也 心宅事也.

 

이 구절은 ?격치고?의 첫 번째 언급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 언급은 ?격치고? 전체 내용의 기저를 이루는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동무는 이 대전제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사단론을 전개한다. ?보원?의 첫 장, 첫 구절에서도 그는 자신의 사상의학 이론이 어떠한 기저 위에서 전개되는가를 먼저 밝히고 있다14].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물장을 포함한 ?격치고?의 내용 전개는 모두 유교 경전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5]. 사상의학 이론이 비록 의학 이론이요 또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론은 반드시 유교 경전에 근거를 두고 검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열거한 物․身․心․事는 ?대학? 1장 “物有本末 事有終始” 절과 8조목을 결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추상적 표현이지만 사는 곳으로 풀이한 宅자(사는 곳)는 동사로서 몸이 만물이라는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방식으로 풀이하면 마음은 몸에, 일(事)은 마음에 존재하게 된다. 동무는 이것을 대학의 8조목에 적용하여 물․신․심․사는 각기 修齊․誠正․格致․治平을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16].

이것은 유학의 이상인 修己 治人을 물․신․심․사로 대체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물․신․심․사는 각기 독립적 개체를 지시하는 개념인 동시에 유기적 관계에 있는 개념이다. 대학의 “物有本末” 절은 학문적 입장에 따라 해석상 차이가 있지만, 본말과 종시를 헤아리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동무는 이 행위 주체인 인간을 다시 심신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물론 다산도 이미 심신의 두 측면을 모두 중시하여 인간을 신형묘합(神形妙合)의 존재로 파악한 예가 있다. 다산의 논의는 지금까지 소외된 몸의 측면을 마음과 같이 동등한 측면에서 논의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무는 더 나아가 심신을 사․물과의 구조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14]졸고, 「동무 이제마의 성명관」, ?범한철학?, 제33집 (2004), 88쪽 참조.

15]이제마, ?격치고? 권2, 29쪽, 反誠箴: 此箴名義 依倣易象 而乾兌箴 尊道中庸 坤艮箴 欽德大學.

16]같은 책, 권1, 1쪽. 事物장: 萬事大也 一心小也 一身近也 萬物遠也. 治平大也 格致小也 誠正近也 修齊遠也.

 

 

동무는 먼저 심신이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구조화하여 설명한다.

 

 

"心은 事에 응하는데 박통하고도 주밀해야 하며, 事는 심에 흘러들어 가는데 살피면서도 공손히 해야 하며, 身은 物에 行하는 것인데 定立하고도 경건해야 하며, 物은 身을 따르는 것인데 싣고도 效를 나타내야 한다."17]

17] 같은 곳: 心應事也 博而周也 事湊心也 察而恭也 身行物也 立而敬也 物隨身也 載而效也.

 

 

설명에 의하면 심신과 사물은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있는데, 심과 신은 각기 사와 물에 응하는 주체요, 사와 물은 객체로서 심과 신에 응한다. 심신에는 각기 慧覺과 能行의 능력이(선천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심신은 사물에 대한 勤止와 誠決의 대응이 가능하게 된다18]. 심․신․사․물은 聚․群․散․居의 형식으로 존재하는데, 심신이 사물과의 성공적 대응을 위해서는 비록 혜각과 능행의 능력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仁義禮智로써 능행하고 혜각해야 한다19]. 다소 복잡하고 생소한 이상의 설명은 다음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심은 사와 신은 물과 대응하는 관계에 있다.

둘째, 심신에는 각기 혜각과 능행의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주체적 대응이 가능하다.

셋째, 혜각과 능행의 능력은 인의예지의 도덕적 행위 능력을 의미한다.

 

18]같은 곳: 一物止也 一身行也 一心覺也 一事決也, 勤以止也 能以行也 慧以覺也 誠以決也.

19] 같은 곳: 萬物居也 萬身群也 萬心聚也 萬事散也 仁以居也 義以群也 禮以聚也 智以散也.

 

 

이상의 내용에서 도덕과 관련된 동무의 견해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도덕 행위는 천이 아닌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천인합일 지향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때문에 도덕성은 언제나 천과의 관계 속에서 논해지지만 그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학문적 입장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동무는 천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사물과의 관계 안에서 도덕 실현의 방법을 모색한다. 도덕은 천과의 추상적 관계가 아니라 사․물과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떻든 동무의 해석은 도덕에 대한 또 하나의 독자적인 이해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도덕은 혜각과 능행의 능력에 의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천은 인간에게 혜각과 능행의 능력을 주었으며, 이 혜각과 능행이 도덕을 생겨나게 한다20]. 따라서 혜각과 능행은 곧 사물과 대응하는 심신의 구체적 능력을 가리킨다. 심신은 이 능력을 발휘하여 인의예지 등 모든 도덕적 선을 실현하게 된다21]. 이 주장을 종래 천인합일 지향의 관점과 비교하면 도덕의 실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동무는 혜각과 능행의 능력을 도덕적 행위의 근간으로 생각한 것이다.

 

20]이제마, ?보원? 성명론 30, 31장: 天生萬民性以慧覺 萬民之生也 有慧覺則生 無慧覺則死 慧覺者德之所由生也. 天生萬民命以資業 萬民之生也 有資業則生 無資業則死 資業者道之所由生也.

21]같은 곳, 32장: 仁義禮智忠孝友悌 諸般百善 皆出於慧覺 士農工商田宅邦國 諸般百用 皆出於資業.

 

 

동무는 심신에 주어진 혜각과 능행의 능력이 어떻게 도덕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이른바 심신사물 사단론을 제시하여 설명한다. 종래 사단 개념과의 차이를 고려하여 먼저 동무가 제시하는 사단 개념부터 살펴보겠다.

 

 

"용모와 말(言)과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일(事)의 사단이요,

분별하고 사유하고 묻고 배우는 것은 마음의 사단이며,

굽히고(屈) 풀고(放) 모으고(收) 펴는 것(伸)은 몸의 사단이고,

지와(志) 담과(膽) 려와(慮) 의(意)는 물(物)의 사단이다."22]

22]이제마, ?격치고? 권1, 1쪽, 事物장:

貌言視聽事四端也

辨思問學心四端也

屈放收伸身四端也

志膽慮意物四端也.

 

 

동무의 설명에 따르면 심신사물에는 각기 貌言視聽, 辨思問學, 屈放收伸, 志膽慮意의 사단이 있다.

事사단의 모언시청은 ?서경? 「洪範」의 五事. 즉 貌言視聽思에서 思를 제외하여 四象으로 구조화한 개념이요, 心사단의 변사문학은 ?중용? 明辨 愼思 審問 博學 篤行의 五弗措에서 역시 행(독행)을 제외하여 사상으로 구조화한 개념이다.

身사단의 굴방수신에서 굴신은 몸을 직선적으로 굽히고 펴는, 방수는 몸을 모으고 푸는 몸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리고 물사단의 志膽慮意는 사물에 대한 심신의 意志를 사상으로 구조화한 개념인데23],

志와 膽은 신, 慮와 意는 심의 작용이다.

그런데 심신사물이 하나의 四象 구조를 이루지만, 심신사물에도 각기 사단이 있으므로 동무의 사단은 아래와 같은 복합적 구조를 이룬다.

 

 

事四端: 貌 言 視 聽

心四端: 辨 思 問 學

身四端: 屈 放 收 伸

物四端: 志 膽 慮 意

 

 

동무는 왜 복합적 구조로 사단을 설명하는가? 그는 종래의 사단론에 대한 비판이나 자신이 전개하는 사단 개념에 대한 설명이 없이 오직 복합구조 속에서 새로운 사단론을 전개한다. 이 새로운 사단론의 전개는 사단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복합구조의 이해는 동무 사단론 이해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23] 같은 책, 권1, 16쪽 天時장: 不誠其意 莫盡人意 不正其心 莫盡人慮 不修其身 莫盡人膽 不一其力 莫盡人志.

 

 

이 복합 사단 구조 이해의 관건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대응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겉으로 보면 身사단은 몸의 움직임의 정도를, 그리고 物사단은 인간의 의지를 분류하여 구조화한 것이다. 五事의 思는 모언시청과는 달리 심사단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리고 五弗措의 篤行은 身사단의 영역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사사단과 심사단에서 각기 제외시킨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경전의 개념까지 과감하게 변화시켜 사단으로 구조화한 이유는 다른 데에서 찾아야만 한다. 동무는 사단 개념을 단지 대응관계로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心身事物은 심과 사, 신과 물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있다. 즉 심신은 사물에 應하고 行하는 주체로서 대응하고, 사물은 심에 모이고 신에 따르는 대상으로서 응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心은 事에 응하므로 博․周하고, 事는 심에 모이므로 察․恭하며, 身은 物에 행하므로 立․敬하고 物은 身을 따르므로 載․效를 나타내야 한다24]. 이러한 관계는 복합구조의 설명에 있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본래 ?중용?의 博學, 審問, 愼思, 明辨에서 박․심․신․명하는 것은 학․문․사․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심사단에서의 학․문․사․변하는 것은 박․심․신․명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심사단의 학․문․사․변은 심이 갖추고 있는 능력으로서의 사단을 의미하며, 박․심․신․명은 심사단의 발현 목표가 된다. 동무가 肅․乂․晢․謀해야 邈․廣․大․蕩할 수 있다고 한 것은25] 학․문․사․변의 심사단이 박․심․신․명의 목표가 된다는 것을 잘 드러내 준다.

 

身사단의 굴․방․수․신은 積․廓․弘․豁하려는 욕구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 욕구로 인해 利․勇․謀․知가 서로 趨․助․成․救하게 된다26]. 이 욕구는 곧 부․귀․현․달의 추구를 의미하는데, 부․귀․현․달의 道는 인의예지에 있다27]. 따라서 굴․방․수․신은 부․귀․현․달을 추구하는 주체이며, 부․귀․현․달은 신사단의 대상으로서 외물이다.28]

 

24]주17) 참조.

25]같은 책, 권1, 8쪽 天下장: 辨所以明也 肅極邈也 思所以愼也 乂極廣也 問所以審也 晢極大也 學所以博也 謀極蕩也.

26]같은 책, 권1, 9쪽, 天下장: 屈所以積也 利相趨也 放所以廓也 勇相助也 收所以弘也 謀相成也 伸所以豁也 知相救也.

27]같은 곳: 富之道仁也 故所止不恃富也. 貴之道義也 故所動不恃貴也. 顯之道禮也 故所遇不恃顯也. 達之道智也 故所決不恃達也. 같은 곳: 仁之所行利與重焉 義之所行勇有奇焉 禮之所行謀亦至焉 智之所行知又切焉.

28]같은 책, 권2, 52쪽 坎箴장: 貧富外物也 住着存中也. 貴賤外物也 廉隅存中也. 顯困外物也 敦敬存中也. 窮達外物也 計畫存中也.

 

 

事사단 貌․言․視․聽의 대응 대상은 다른 사람(對衆)과 자신(守己)으로 나누어진다.

다른 사람과 대응하는 모․언․시․청은 敬․忠․誠․信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肅․乂․晢․謀이고,

자신을 지키는(守己) 모․언․시․청은 狂․僭․豫․急하지 않으려는 것인데, 이것이 곧 恭․從․明․聰이다.

따라서 경․충․성․신하려 하고, 광․참․예․급하지 않으려는 것은 모․언․시․청에 갖추어진 능력이고,

숙․예․절․모와 공․종․명․총은 그 능력을 실현한 결과이다.

이처럼 숙공, 예종, 절명, 모총은 도심․인심의 모․언․시․청에 의해 이루어지므로29] 모․언․시․청은 對衆과 守己에 대응하는 능동적 주체다.

 

物사단의 志․膽․慮․意는 천심과 인심의 지․담․려․의로 나누어진다.

천심의 지․담․려․의는 항상 濟․整․和․周하려 하는데, 이것이 惻․羞․辭․是이고,

인심의 지․담․려․의는 모두 奪․欺․妬․竊하지 않으려는 것인데, 이것이 隱․惡․讓․非이다.

따라서 제․정․화․주하려 하고 탈․기․투․절하지 않으려는 것은 지․담․려․의에 갖추어진 능력이고,

측․수․사․시와 은․오․양․비는 그 실천 결과를 의미한다.

이처럼 측은, 수오, 사양, 시비 역시 천리․인욕의 지․담․려․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30]

지․담․려․의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를 실현하는 능동적 주체다.

 

29]같은 책, 권1, 8쪽 志貌장: 是故對衆之貌 皆欲敬而守己之貌 恒不欲狂也. 欲敬者肅也 不欲狂者恭也 然則無肅恭之兩隅者 非道心人心之貌也. 對衆之言 皆欲忠而守己之言 恒不欲僭也. 欲忠者乂也 不欲僭者從也 然則無乂從之兩隅者 非道心人心之言也. 對衆之視 皆欲誠而守己之視 恒不欲豫也. 欲誠者晢也 不欲豫者明也 然則無晢明之兩隅者 非道心人心之視也. 對衆之聽 皆欲信而守己之聽 恒不欲急也. 欲信者謀也 不欲急者聰也 然則無謀聰之兩隅者 非道心人心之聽也.

30] 같은 책, 권1, 7쪽 志貌장: 天心之志 恒欲濟而人心之志 皆不欲奪也. 欲濟者惻也 不欲奪者隱也 然則無惻隱兩端者 非天理人欲之志也. 天心之膽 恒欲整而人心之膽 皆不欲欺也. 欲整者羞也 不欲欺者惡也 然則無羞惡兩端者 非天理人欲之膽也. 天心之慮 恒欲和而人心之慮 皆不欲妬也. 欲和者辭也 不欲妬者讓也 然則無辭讓兩端者 非天理人欲之慮也. 天心之意 恒欲周而人心之慮 皆不欲竊也. 欲周者是也 不欲竊者非也 然則無是非兩端者 非天理人欲之意也.

 

 

이상과 같이 사단을 복합구조와 대응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유래를 찾기 힘든 독창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상의학 이론이 그러하듯이 사단의 구조적 이해 역시 주역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 동무는 심신사물 사단론 전개의 근거를 「繫辭 上」 “易有太極 是生兩儀” 절에 두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太極은 心이고, 兩儀는 心身이며, 四象은 心身事物이다.

八卦는 事의 終始, 物의 본말, 심의 완급, 신의 선후이다.

乾은 事의 시작이고, 兌는 事의 끝이며, 坤은 物의 근본이고 艮은 물의 말단이며,

離는 마음이 급히 꾀함이고 震은 마음이 천천히 꾀함이며, 坎은 몸의 先着이고 巽은 몸의 後着이다."31]

31]같은 책, 권2, 56쪽 巽箴장:

太極 心也 兩儀 心身也 四象 事心身物也

八卦 事有事之終始 物有物之本末 心有心之緩急 身有身之先後

乾事之始也 兌事之終也. 坤物之本也 艮物之末也

離心之急圖也 震心之緩圖也 坎身之先着也 巽身之後着也.

 

 

다시 정리하면 심신사물의 구조는 태극의 心에서 분화한 것이고32], 심신과 사물의 대응 구조는 ?대학?의 本末 終始설을 원용하여 팔괘에 배속한 것이다. 태극의 심이 심신사물로 분화되고, 심신과 사물이 다시 대응하는 관계로 해석한 것은 태극이 64괘로 분화되고 음양이 待對관계를 이루는 易의 원리를 수용한 것이다. 다만 역의 원리를 수용하되 태극 대신 심을, 그리고 지금까지 소외된 四象을 그 중심에 둔 것은 사단에 대한 그의 인식이 종래의 방식과 다르게 바뀌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에서 우리는 사단의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는 동무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주요 관점은 사단을 확충시켜 심신사물의 복합사단으로 구조화한 것이다. 동무는 심신사물에 각기 사단이 있음을 전제하고, 심신과 사물은 서로 대응하는 관계를 이루되 심신 곧 인간이 이를 주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사단 이해의 이러한 구도는 종래의 천리설이나 성기호설 같은 관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단의 구조적 이해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32]같은 책, 권2, 56-57쪽 巽箴장: 太極之心 中央之心也 心身之心 兩儀之心也 事物心身之心 四象之心也.

 

 

4. 사단의 실현 방법

 

동무는 「事物」 장에서 사단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피력한다. 첫째, 인의예지의 사단은 私心으로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다. 聖人이 매사에 인의예지를 말한 것은 인륜도덕의 근간이 되기 때문인데, 후인들은 私心으로 판단하여 공적으로는 이로우나 사적으로는 불리하다고 여긴다33]. 즉 사단은 有․不利를 판단하는 私心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둘째, 사단의 실현 능력은 인간에게 보편성으로 주어진다. 이목이 잘못되어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듯이, 사단의 심을 갖추고도 인의예지를 행하지 못하면 憂患, 恐懼, 忿懥, 好樂에 치우치게 된다. 따라서 맹자는 인간에게 사단이 있는 것은 四體가 있는 것과 같은데, 사단이 있으면서 스스로 不能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라고 한다34]. 즉 사단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보편성이기 때문에 不能한 사람은 없으며, 그 실현 또한 당위적이라는 설명이다.

 

33] 같은 책, 권1, 2쪽 事物장: 古之聖人言必稱仁義禮智者 誠以一身重寶 不可失也. 後人私心揣之 以仁義禮智 有似利於公 不利於私然者 而叛之 嗚呼 聖人豈敢汝後生乎.

34] 같은 곳: 無目則無視 無耳則無聽 耳目廢而聾瞽 則豈美形人乎哉. 不智則無助而憂患 不仁則不立而恐懼 無禮則格戾而忿懥 無義則偸惰而好樂 是可堪乎 可哀也已. 孟子曰 人之有四端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不其丁寧之乎.

 

 

동무는 이상의 견해를 바탕으로 사단의 발현을 설명한다. 사단의 발현에서 중요한 것은 심과 신이 사물과 대응하는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무는 사단을 심․신․사․물의 사단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대학의 8조목인 修齊․誠正․格致․治平을 물․신․심․사의 일로 나누어 배치한다35]. 이것은 유가 천인합일의 이상을 천리나 상제의 의지를 따르는 추상적 방식이 아니라 格致․誠正․修齊․治平하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삶속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동무는 사단의 발현을 사․신․심․물에 주어진 선천적 능력의 발휘로 설명한다. 사․신․심․물에는 각기 止․行․覺․決과 居․群․聚․散하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고36], 이 능력은 각기 勤․能․慧․誠과 仁․義․禮․智를 통해서 발휘되어야 하는 조건이 따른다37]. 따라서 이 선천적 능력도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요청된다. 이 능력은 단지 선 지향성일 뿐이며, 선은 실천의 결과로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선천적 능력을 지․행․각․결과 거․군․취․산으로 나눈 것은 자신과 타인을 향한 능력을 구분한 것이다.

근․능․혜․성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요, 인․의․예․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덕목이다.

 

동무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선천적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원인을 욕구에서 찾는다. 지금까지 유학에서 욕구는 대체로 名利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동시에 욕구는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동무는 욕구를 종래와 다르게 이해한다. 욕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욕구를 분석하여 구조화한다. 동무는 욕구를 嗇心․詐心․侈心․懶心과 私心․慾心․放心․逸心으로 나눈다38]. 전자의 욕구는 決․止․覺․行을 偏․倚․過․不及하게하고, 후자의 욕구는 學․辨․問․思를 昧․闇․窒․罔하게 하는 것이 그 차이이다39]. 욕구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선천적 행위 능력과 사고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원인을 분류하여 구조화한 것이다.

따라서 욕구 역시 네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35]이제마, ?격치고? 권1, 1쪽. 事物장: 萬事大也 一心小也 一身近也 萬物遠也. 治平大也 格致小也 誠正近也 修齊遠也.

36]같은 책, 권1, 1쪽 事物장: 一物止也 一身行也 一心覺也 一事決也.… 萬物居也 萬身群也 萬心聚也 萬事散也.

37]같은 곳: 勤以止也 能以行也 慧以覺也 誠以決也. … 仁以居也 義以群也 禮以聚也 智以散也.

38]같은 곳: 嗇心偏也 詐心倚也 侈心過也 懶心不及也. … 私心昧也 慾心闇也 放心窒也 逸心罔也.

39] 같은 곳: 偏心偏決也 倚心倚止也 過心過覺也 不及心不及行也. … 昧心昧學也 闇心闇辨也 窒心窒問也 罔心罔思也.

 

 

다른 하나는 욕구를 不善의 원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嗇․詐․侈․懶와 私․慾․放․逸하는 욕구는 다 같이 不善의 원인이 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동무는 욕구가 반드시 불선은 아니며 욕구의 타당성에서 불선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物에 대한 私心은 불선이 아니며 事에 대한 私心이 불선이다.

事에 대한 慾心은 불선이 아니며 物에 대한 慾心이 불선이다.

身이 放心하는 것은 불선이 아니며 心이 放心하는 것이 불선이다.

心이 逸心하는 것은 불선이 아니며 身이 逸心하는 것이 불선이다."40]

40] 같은 곳: 是知

物私非不善也 事私斯不善也

事欲非不善也 物欲斯不善也

身放非不善也 心放斯不善也

心逸非不善也 身逸斯不善也.

 

 

욕구 자체가 아니라 욕구가 무엇을 지향하느냐를 기준으로 선․불선을 구분한 것이다. 事에 慾心을 갖고 物에 私心을 갖는 것은 개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事에 私心을 갖거나 物에 慾心을 갖는 것은 공적인 事․物을 해치게 되므로 불선이 된다. 그리고 몸이 방심하거나 마음이 逸心하는 것은 사적인 욕구이므로 불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放心하거나 몸이 逸心하는 것은 타인에게 해가 될 수 있으므로 불선이 된다. 불선의 원인은 공․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 있으며, 욕구 그 자체는 선도 불선도 아니다. 따라서 불선은 욕구 자체가 아니라 공․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욕구의 선․불선에 대한 판단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善行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욕구를 인심의 발현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인심을 절제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도심의 발현은 純善하지만 인심의 발현은 욕구로 인해 악행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를 절제함으로써 선을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욕구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근거한 것이다. 동무의 욕구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이다. 욕구자체는 선도 불선도 아니지만 또 욕구가 원인이 되어 선․불선이 되기 때문이다.

 

 

"嗇(詐․侈․懶)心과 같은 불선만 私(慾․放․逸)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誠․勤․能․慧의 善함도 역시 私(慾․放․逸)心에서 나온다."41]

41]같은 책, 2쪽:

不獨嗇之不善出於私也 雖誠之善亦出於私也

不獨詐之不善出於慾也 雖勤之善亦出於慾也

不獨侈之不善出於放也 雖能之善亦出於放也

不獨懶之不善出於逸也 雖慧之善亦出於逸也.

 

 

私心에서 嗇心과 같은 불선만 아니라 誠․勤․能․慧의 善行도 나온다는 것은 종래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욕구란 선․불선 어느 한쪽으로 고정되어 작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근거한다. 욕구 자체가 선․불선으로 고정되어 작용하지 않는다면 욕구를 불선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善 역시 욕구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도심의 발현은 순선하다는 시각도 수정되어야 한다. 선․불선은 오직 욕구 작용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욕구를 이해하는 이러한 시각은 도덕성의 실현 방법에서도 계속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상제로부터 부여받은 性 곧 理로 인해 眞情을 지니게 되는데 이 情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구(欲)이다. 이 욕구가 인간이 지닌 眞情과 합치하지 않을 때 이것을 욕심(慾)이라고 한다. 욕심은 혼자만을 위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이로움이 혼자에게 돌아가지만, 함께 이로움을 추구하면 義로 화합하게 된다. 군자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愼獨하여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되돌아보는데 있다42]. 즉 도덕성의 실현은 욕구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추구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42]같은 책, 권3, 71-72쪽: 有皇上帝降衷于下民 若有恒性 性者理也 有藐下民 聽命于上帝 箇有眞情 情者欲也 理之未盡於性者 謂之才 … 欲之不合於情者 謂之慾 … 慾者所獨也 所獨者獨倖其理也 同成其利者義之和也 … 然則 君子之所以大過人者 顧不在於愼其獨而人之所不見乎.

 

 

이 언급은 도덕성은 물론이요 욕구까지 천부의 능력으로 인식함을 의미한다. 이 능력의 발휘가 도덕성을 실현하는 방법이지만, 그것은 공적 이익과 합치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도덕성의 실현은 먼저 욕구인지 아니면 욕심인지를 분별하고 또 그것이 공적 이익과 합치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인간의 자율적 판단과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여기에는 천리나 상제의 명령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때문에 그는 군자의 개념을 愼獨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되돌아볼 줄 아는 인간의 자율 능력에서 찾는다. 군자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선천적 능력이 아니라 도덕성을 발휘하는 자율 능력에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성은 보편성으로 주어지지만 그 실현 여부는 인간의 자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된 동무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욕구는 심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성향일 뿐이다. 욕구가 심의 한 현상이라면 욕구를 곧바로 불선과 연결시킬 수 없다. 불선은 욕구 자체가 아니라 공․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공․사를 분별하여 욕구를 절제하는 것은 인간의 자율 능력이다.

 

주자는 과도한 욕구를 善 실현의 장애로 이해하기 때문에 인심의 발현인 욕구를 억제의 대상으로(存天理遏人欲) 분류한다. 따라서 주자의 경우 인간의 자율성은 제한적이다. 이와는 달리 다산은 욕구를 오히려 긍정하고 욕구는 자율(自主之權)적 노력에 의해 절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자율성은 언제나 상제천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하는 조건이 따른다. 욕구를 긍정하고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종교적 태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자율이라고 하기 어렵다. 동무가 도덕성의 실현 방법은 자율성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는 다산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동무의 자율성은 인간의 논리적 판단과 실천의지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달리 말하면 도덕성의 실현 주체는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동무가 도덕성이 천부적인 것임을 말하면서도 천리나 상제천의 의지를 배제하고 자율을 강조한 것은 사단심의 발현은 인간이 주체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결 론

 

동무의 사단론은 성명론과 함께 사상의학의 핵심 이론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주자의 사단 해석이나 그 밖의 해석에 대한 언급이 없이 독자적인 해석을 가한다. 이것은 종래의 관점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그의 독자적 해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心․身․事․物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심신은 사물과 서로 대응하는데, 심신은 대응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심신에 주어진 혜각과 능행의 능력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발휘된다. 몸이 심과 함께 사물과의 관계를 주도한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해의 시도이다.

 

둘째, 심신사물에는 각기 사단심이 주어지며, 따라서 복합적 사단구조를 이룬다.

복합구조에 있어서도 심과 신은 사와 물에 응하고 행하는 주체로서 대응하고, 사와 물은 심과 신에 모이고 따르는 대상으로서 응하는 관계에 있다. 이 복합사단은 易의 원리를 수용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소외된 四象을 그 중심에 둔 것은 사단을 이해하는 독창적인 방식이다.

 

셋째, 동무는 심신사물에 주어진 선천적 능력을 자신과 타인을 향한 능력으로 구분한다.

勤․能․慧․誠과 仁․義․禮․智는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덕목이다. 도덕 능력을 자신과 타인을 향한 것으로 구분한 것 또한 인간의 능력을 이해하는 새로운 해석이다.

 

넷째, 욕구는 심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성향이므로 욕구가 곧 불선은 아니다.

따라서 불선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公․私를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불선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인간의 논리적․합리적 사고에 기초한 것이다.

 

다섯째, 인간에게는 公․私를 분별하여 욕구를 절제하는 자율 능력이 있다.

욕구의 절제 능력을 천리 내지는 상제천의 의지보다는 인간의 분별력과 실천의지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자율 설명과는 변별된다.

 

 

이상의 독자적 해석은 사단 이해의 관점을 천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 이해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그 실현은 심신이 사물과 관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무는 도덕 행위를 인간이 주도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善行의 기준을 천리나 상제의 명령으로부터 욕구의 공․사 분별이라는 인간의 객관적 사고로 전환하게 해 준다. 동무는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사상의학의 기초 이론을 형성하는 사단론을 전개한 것이다. 어떻든 지금까지 천 중심의 관념적 해석의 틀을 벗어나 인간 중심의 해석을 시도한 것은 유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사단 이해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단을 사상의학의 핵심 이론으로 정초한 것은 의학과의 접목을 통해 인간을 보다 과학적 실증적 방법으로 이해하려는 독창적인 시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 고 문 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