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논어』주석의 고증적 성향 고찰*
-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중심으로 -
권문봉(權文奉)**
* 본 논문은 2009년도 원광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한 논문임
**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mbkwon@wku.ac.kr)
<요약문>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 1762-1836)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에서도 경세치용파의 종사(宗師)인 성호 이익(星湖李瀷, 1681-1763)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켜 경세치용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다산이 정치·경제·사회 등 현실문제에 눈을 돌려 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게 된 그의 실학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그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 그의 경전 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이다. 따라서 그의 방대한 경학 관계 저술은‘다산학’의 형성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다산 경학의 요체는 또한 강력한 <실천지향성>을 그 전제조건으로 하는 동시에 그 필수불가결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실증·실천> 이라는 개념은 그의 경학세계의 구성에 있어 핵심적인 초석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증·실천>이라는 실학적 개념은 그의 문제의식을 총체적이자 집약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다산은 고증학의 학문방법인 합리적, 실증적 태도에 적극적인 수용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청학에 대한 주석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태도는 육경사서를 저술함에 있어 취하고 있는 인증(引證) 방법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논어고금주』를 주석함에 있어 한대의 훈고학, 송유(宋儒)의 성리학적 제설(諸說), 청유의 고증학적 경전주석 태도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다. 다산은 비록 청대 고증학의 과학정신에 입각한 방법론에 찬동하고 있지만, 그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청유의 경전해석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 견해와 상합될 때는 이를 수용, 자신의 주석을 지지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자기의 주견(主見)과 배치될 때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비판을 가했다.
또한 다산은 경전의 인증방법에서 알 수 있듯이 청대 고증학을 수용함에 있어 경전연구의 주된 방법론으로써 그 당시의 청대 고증학자들 보다 진일보한 고증적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경전해석 성향에 있어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경전의 원의(原義)에 부합된 것은 취하였으나 이에 어긋난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여 변석(辨析) 하고 있음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다산은 고증적 방법을 한층 더 고양(高揚)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다산은 비록 그가 직면하였던 정치적 상황의 구조적인 제약 때문에 자신의 경륜을 직접 현실에 적용시켜 볼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시대적 전환기를 살았던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실천, 즉 <이론적 실천(경학세계의 실천)>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본다.
본 논고를 통하여 필자는 다산이 자신의 경학적 저술의 하나인『논어 고금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실학적·고증적 경학세계를 개진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이『논어집주』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자의 경학과는 어떤 성향을 지니는가를 고증학적 관점에서 몇 가지 측면으로 분석,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하여 다산의 실학적 경전주석의 한 단면(斷面)이 그의 경학 세계에 있어 고증적 해석성향과 일맥상통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실학, 경학세계, 고증학, 실증적, 경전주석, 해석태도
목 차
Ⅰ. 머리말
Ⅱ. 다산 경학(經學)의 고증학 수용태도
Ⅲ.『 논어고금주』의 체재(體裁)
Ⅳ.『 논어』주석상(註釋上)의 고증적 측면
Ⅴ. 다산의『논어』해석 성향
1. 인(仁)의 신규정(新規定)과 효제(孝弟)와의 연관성
2. 군주(君主)의 정심(正心)과 북신(北辰)에의 비유
Ⅵ. 맺음말
I. 머리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중에서도 경세치용파의 종사인 성호 이익 (1681-1763)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켜 경세치용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다산이 정치·경제·사회 등 현실문제에 눈을 돌려 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게 된 그의 실학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그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 그의 경전 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經學思想)이다. 따라서 그의 방대한 경학 관계 저술은‘다산학’의 형성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다산은 경세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경학에 있어서도 독자적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다산의 경전주석은 거의 모든 유교경전을 검토의 대상으로 한 본격적 경전주석으로 경전주석의 전통이 미약한 한국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한 경전에 대한 단순한 부연설명이 아니라 기존주석들에 대한 취사선택 속에서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 의해 경학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성을 지닌다.
다산의 경학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구조로 설명되는 다산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수기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세론이 치인의 영역에서 외적인 실천체계를 이루는데 대해 경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내적인 이론체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다산의 경학에는 다산의 사상적 입장과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고 있으며 그 내용은 탈성리학적인 성격으로 요약된다. 곧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 사상체계인 성리학의 관념론적 사유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경전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의 이러한 사상적 지향은 17세기 이래 대두된 성리학일변도의 사상적 풍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상적 방향을 모색하려는 사상적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며, 동시에 다산이 활동한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격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이에 따른 새로운 사상적 요구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산이 자기 생애의 후반을 실학에 관한 많은 저술과 방대한 경학 관계 저술에 몰두한 것은, 바로 그의 실학과 경학이 서로 표리가 되어 하나의 공통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다산학’을 형성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다산학’의 형성에, 또 그의 실학과 경학의 표리 관계에 대해서도 엄밀히 말한다면 그의 경학이 토대가 되어 있다. 다산이 현실에 눈을 돌려 현실 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그의 대표적 실학 저술이‘일표이서 (一表二書)’라고 하면, 그의 이러한 실학적 저술이 있기까지 사상적으로 그의 독창적인 경학의 세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그의 모든 저작물의 저술 연대에서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 처럼, 그에게는 유교경전을 해석한 경학에 관한 저술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일표이서’의 저술이 나온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쓴『가계(家誡)』에,
"대개 책을 저술하는 법은 경적이 종(宗)이 되고, 그 다음은 경세제민의 학문이어야 하며, 외적을 막을 수 있는 관방(關防)이나 기구 같은 것을 마련하는 것도 또한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1)
1)『丁茶山全書』(文獻編纂委員會刊), 151쪽,「 年譜」,“ 大較著書之法, 經籍爲宗, 其次經世, 澤民之學, 若關防器用之制, 有可以禦外侮者, 亦不可少也.”
라고한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다산학’은 그의 경학과 실학이 전후 표리의 연관 선상에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산의 경학에 관한 저술 가운데『논어고금주』를 중심으로 그의 경전주석 세계(經典註釋世界)의 성향에 대하여 고증적 관점을 중심으로 일 단면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 연구에서는 하나의 시대적 전환기를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다산이 자신의 경학적 저술의 하나인『논어고금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실학적, 실증적 경학세계를 개진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논어집주』에서 나타나고 있는 청유(淸儒)의 고증학과 정·주 (程·朱)의 경학과는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를 분석, 검토하고자 한다.
Ⅱ. 다산 경학의 고증학 수용태도
청학은 송명이학의 주관적, 관념적, 신비적인 구학풍에 대응하여 객관적, 실증적, 합리적인 신학풍아래‘복고’를 표방하며 전개된 이른바 고증학이라고 통칭되는 청대학술을 말한다.2)이러한 고증학은 일반적으로 고염무로부터 시작된다. 고증학의 특색은 첫째 그 연구방법이 귀납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것이며, 둘째 옛날 학자들의 학설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 주장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며, 셋째 치용(致用)의 정신을 들 수 있다.3)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고증학은 고염무에 의해 창도된 이후 혜동 (惠棟),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완원(阮元)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정통파의 학풍은 스스로 자신의 주지만을 고수하여 고증을 위하여 고증하였고 경학을 위하여 경학을 하였는데, 그 특색은 대략 ① 하나의 뜻을 확립하는 것은 반드시 증거에 의함, ② 옛 것을 숭상하여 증거를 선택, ③ 하나의 증거로써 정설을 삼지 아니하 고 반증주의(反證主義)를 채택, ④ 증거의 은폐나 곡해의 금지, ⑤ 비교 연구에 의한 법칙 탐색, ⑥ 구설 인용시 반드시 명기, ⑦ 의견이 맞지 않으면 서로 쟁변하여 해결, ⑧ 변쟁의 범위에 대한 정확한 설정과 독실하고 온후한 언어사용, ⑨ 전문적이며 좁고 깊은 연구, ⑩ 문체의 박실하고 간결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학풍을 스스로 박학(樸學)이라 칭하였으며, 그 학문의 중심은 경학(經學)이었다.4)
다산이 고증적, 객관적, 과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청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자기의 소장서를 비롯하여 사전(師傳)의 서(書), 경연시(經筵時) 강(講)했던 서책, 규장각 출입시에 열람한 책, 그와 교유한 학자들로부터 얻은 책들을 통해서 가능했다. 특히 그는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의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그들에 의해 전래된 청조문물에 접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입연사행 (入燕使行)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온 각종서적을 통해 청유(淸儒)의 저술을 바로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청학의 추향(趨向)과 그 주요학자의 학문적 경향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5) 그러나 다산이 청대의 어느 학자로부터 어느 정도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저작 중에 인용된 글이 청학과 상관된 곳이 매우 많다는 점, 즉『여유당전서』중에 인용된 청유의 언사와 그들 언사와의 관계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영향관계를 어느 정도 가늠하여 인정할 수 있다
2) 黃元九,『 與猶堂全書』所引淸學關係記事考(Ⅱ),『 亞細亞史硏究』, 一潮閣, 1976, 310쪽.
3) ?維喬著, 고재욱 옮김,『 中國近代哲學史』, 서광사, 1989, 66쪽.
4) 梁啓超著, 李基東·崔一凡共譯,『 淸代學術槪論』, 麗江出版社, 1987, 60-61쪽.
5) 최익한,『 實學派와 丁茶山』, 청년사, 1989, 156-157쪽.
이들 북학파는 북경을 갈 때마다 琉璃廠, 聚英堂, 十二家등 유명한 서점을 방문하여 신간 또는 진본 서적들을 열람, 구독하여 淸朝文化를 국내에 수입하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 실례로 正朝元年(1977), 즉 淸朝건륭 42년에 사절단의 부사 徐浩修와 그의 수행원이며 유득공의 숙부인 柳琴은 국왕의 명령을 받고 입수하기 어려운 초인본『欽定古今圖書集成』1만권—5천 2백책을 重價로 사들여 왔으며, 그 다음해에 초정은 이덕무와 함께 북경에 가서『通志堂經解』1천 7백 5권—5백책을 사가지고 왔다.
다산의『여유당전서』에는 청대학자들이 다수 인용되고 있다.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염무에 관해서는 시문(詩文) 3회, 상서(尙書) 5회, 상례(喪禮) 27 회, 사서(논어고금주) 8회, 법정(法政) 2회 등 모두 45회
(2) 모기령에 관해서는 시문집 4회, 상서 22회, 악서(樂書) 17회, 사서 134회 등 185회
(3) 염약거에 관해서는 상서 153회, 사서 1회, 상례 1회 등 155회
(4) 서건학에 관해서는 시문집 2회, 상례 125회 등 127회
(5) 이광지에 관해서는 오직 역학(易學)에 관해서만 28회 (6) 만사대, 만사동 형제에 관해서는 모두가 상례에 관계된 것으로 만 사대 16회, 만사동 19회
(7) 기타 고미 8회, 요제항(姚際恒) 4회, 황종희, 김성탄(金聖歎) 각 3 회
이외에도 전겸익, 대진, 송감, 안원, 이공, 호위, 주학령, 왕원, 주이준, 고사기, 원매, 우동, 옹방강, 완원, 장연옥, 왕민호 등이 1, 2회씩 언급되고 있다.6)
위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산의 육경사서의 주석중에 고염무, 염약거, 서건학, 이광지, 만사대 등의 글을 인용하거나 그들의 말과 관계된 구절이 많으며, 그 밖에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 20여인의 글이 조금씩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산의 육경사서의 저술에 있어서 인용학자의 수는 방대하지만, 청대의 서적을 인용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산이 청학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 비평정신과 고증태도에만 청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뿐이지 다산의 많은 저술과 같은 내용에 있어서는 청학의 영향이 미흡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소극적인 원용 또는 피상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저술의 전성기를 학계와 소원(疏遠)된 유배지에서 보낸 탓으로 새로 전래되던 청학을 직접 접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다산은 고증학의 학문방법인 합리적, 실증적 태도에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청학에 대한 주석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태도는 육경사서를 저술함에 있어 취하고 있는 引證방법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6) 南明鎭『, 淸初學術與韓儒丁茶山實學思想之硏究』, 臺北: 中國文化大學三民主義硏究所, 1984, 256-257쪽.
7) 黃元九, 앞의 책, 349쪽.
『대학공의(大學公議)』에서는「인증(引證)」, 「고정(考訂)」, 「답난(答難)」으로 고증의 기초로 삼고「안(案)」,「 의(議)」로써 자기 판단을 서술하고 있다.『 맹자요의(孟子要議)』에서는「인증」,「 고이(考異)」의 고증학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방 대한 저서인『논어고금주』에서는「인증」,「 질의」,「 고이」난(欄)을 통해 원의(原義)를 변석하고 있으며,「 보왈(補曰)」,「 박왈(駁曰)」이라 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상서고훈』과『매씨서평』에서는「고정」,「 고이」,「 고증」,「 고변(考辨)」,「 정왈(訂曰)」등의 난을 통하여 고증하고 있다.
『 매씨서평』중에는「수집(蒐輯)」,「 의거(依據)」,「 표취(剽取)」「표절(剽竊)」,「 변란(變亂)」,「 답습(踏襲)」,「 오루(誤漏)」,「 수식(修飾)」, 「수연(蒐衍)」,「 유의(謬義)」,「 수개(蒐改)」,「 수환(蒐換)」,「 할열(割裂)」, 「표습(剽襲)」,「 고복(考覆)」,「 오용(誤用)」,「 수취(蒐取)」,「 방표(旁剽)」, 「수증(蒐增)」,「 원안(冤安)」,「 증오(證誤)」,「 표개(剽改)」,「 고이(考異)」, 「산고(散考)」등의 난에서 선유지설(先儒之說)을 인용하여 진정한 경의 (經義)의 탐구를 위하여 고증을 통하여 변위(辨僞)하고 있다.8)
요컨대 다산이 한위 이래로 모든 선유들의 경전주석서를 고증하여 경전의 고의나 원의를 밝히는 것을 경학연구의 목표로 삼았듯이, 청학수용에 있어서도 선택적이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곧 비록 청 대의 고증학적 방법론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청학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반드시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다산의 고증학 수용태도라고 하겠다.
8) 南明鎭, 앞의 책, 304쪽.
Ⅲ.『 논어고금주』의 체재(體裁)
『논어고금주』는 전 40권으로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저술이다.『 연보』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해인 1813년 겨울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대체로 초고의 완성은 이 시기라고 하겠으나, 현존하는『논어고금주』를 살펴보면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다산 자신과 그 제자 또는 후학들의 수정·보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여유당전서』에는 제2집 경집(經集) 제7권에서 제16권까지가『논어고금주』인데, 전 10 권으로 편집하여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앞서 나온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여유당집』에는『논어고금주』가 전 40권으로 되어 있어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의 권수와 일치한다.
9) 1813년 이후에 수정·보완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의 그 일부:
①『論語古今註』(新朝鮮社本) 7-16ab. <憲文> 下,‘ 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章의 茶山註에‘戊戌년(1778년, 다산 17세) 겨울에 내가 和順의 東林寺에서 글을 읽을 때 이구절의 뜻을 터득하였는데, 지금 37 년이 되었다’는 말이 있으니, 이때는 다산의 나이 54세이다.
② 1859년 이후에 中國北京藕谿館에서 간행한『恩誦堂續集』권1 <箕子墓>라는 詩의 註에 인용되어 있는 元代의 學者何異孫의 말을『논어고금주』에서‘李尙迪의『恩誦堂集』에 이 말이 있다’고 하면서 재 인용하였으니『( 논어고금주』4-19b쪽. <子罕>中,‘ 子欲居九夷’章의 다산 註참조), 이때는 이미 다산 몰후 20여 년이 지났다.
③『논어고금주』의 여기저기에‘紘父云’이 있는데, 紘父는 다산의 제자 李剛會의 字이고 公牧은 尹?의 字이니, 제자들의 주석이『논어고금 주』에 실려 있는 것도 뒤에 보완된 것인 듯하다. (이지형, 2010,『 역주 논어고금주』, 도서 출판 사암, 2010, 10쪽 참조.)
『논어고금주』는 다산의 경학 관계 저술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저술이다.
그는『논어』에 관한 고금의 주석을 모아 수록하여 선유들의 해석을 검토·비판하고 이에 자신의 창의적인 경전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그 체제부터 살펴보면, 권두에〈원의총괄(原義總括)〉이라 하여『논어』 총 482장(주자의 분장임) 가운데 175장을 뽑아서 열거하고 이에 대해 논변한다고 되어 있다. 『사암연보(俟菴年譜)』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어』에 대해서는 이의(異議)가 워낙 많아〈원의총괄〉을 두었다. 「학이」 편에서부터「요왈」편까지 원의를 총괄한 것이 175則이 되는데, 이것은 다만 그 대강만 들었을 뿐이다.10)
10) 앞의 책, 『丁茶山全書』, 180쪽, “其於論語, 異義益㎹, 有原義總括, 自學而篇, 至堯曰篇, 原義總括, 一百七十五則, 特擧?耳.”
다산은 당초부터 실로『논어』전편에 대해 기본적으로 새로운 주석을 의도하였고, 특히 175장에 대해서는 그의 실학과 관련해서 경학의 창의 적인 실학적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다.
다산은『논어』20편을 종래 주자가 482장으로 분장한 것을 488장으로 분장하고, 〈향당(鄕黨)〉편도 구설(舊說)에는 1장을 나누어 17절로 했던 것을 34절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논어고금주』에 수록한 고주(古註)와 금주(今註)는 많은 고금의 주석을 수집·열람하고 취사선택하여, 그 가운데 고주로서 대표가 될 만한 것으로 3세기 중엽에 한·위의 대표적인 논어학자 공안국·포함·마륭(馬融)·정현·왕숙·진군·주생렬 등의 고주를 모아 위(魏)의 하안(何晏) (190-249)이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여 주석한『논어집해(論語集解)』와 양(梁) 황간(皇侃) (488-545)의 『논어의소(論語義疏)』와 송(宋) 형병(邢昺) (932-1010)의『논어정의』에 나오는 주석을 고주의 대표로 수록했다. 그리고 금주로서는 주자의『논 어집주』에 나오는 주석과 그 가운데도 주자의 주석을 주로 수록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학자가『논어』에 관해 언급한 글을 광범하게 수집·논평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명대의 사상가 이탁오 (李卓吾) (1527-1602)의『분서(焚書)』와『사서평(四書評)』에 나오는 글을 7곳에 인용하여 논평하였고, 청대 고증학의 개조인 고염무 (1613- 1682)의『일지록』등에 나오는 글을 7곳, 모기령 (1623-1716)의 경집에 나오는 주석을 62곳에 수록·논평하였다.
특히 다산의 진취적이고 폭넓은 학문 수용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미쳐서, 『논어고금주』에는 일본의 고학파 이등유정(伊藤維楨) (1627-1705), 호(號) 인재(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를 2곳, 적생쌍송(荻生雙松) (1666-1728), 호(號) 조래(?徠)의『논어징(論語徵)』을 43곳, 태재순(太宰純) (1680-1747), 호 (號) 춘대(春臺)의『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을 무려 112곳에 수록하여 논평하고 있다.
다산은 이와 같이 많은 주석 자료를 수집하여 수록한 후에, 이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려 ‘보왈(補曰)’‘박왈(駁曰)’‘용안(鏞案)’‘질의(質疑)’등의 형식을 설정하여 논평과 반박 및 자기의 견해 제시 등을 통해 그가 지향하고자 한 새로운 경전 세계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고주의 세계도 아니며, 금주의 세계도 아니다. 그는 고주와 금주를 동시에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유(漢儒)는 경(經)을 주석하면서 옛것을 상고함을 法으로 삼았으나 명변 (明辨)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참위사설(讖緯邪說)까지도 함께 수록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학이불사(學而不思)’의 폐단이요. 후유(後儒)는 경을 해석하면서 궁리하는 것을 주로 삼고 고거(考據)함에는 소원 (疏遠)하였다. 그래서 제도 명물(名物)에는 어긋남이 있었으니, 이는‘사이불학(思而不學)’의 폐단이다.11)
11)『 與猶堂全書』, 景仁文化社, 1981, 제2집『論語古今註』권1, 30b쪽, (이하‘『與猶堂全書』 는『全書』’로 표기함),“ 漢儒注經, 以考古爲法, 而明辨不足, 故讖緯邪說, 未免俱收, 此學而不思之弊也, 後儒說經, 以窮理爲主, 而考據或疏, 故制度名物, 有時違舛, 此思而不學之咎也.”
이는 다산이 한유의 신비주의적 경향과 송유의 관념주의적 경향을 지양하고 그 새로운 경전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의 새로운 경전 세계는‘수사학(공맹지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며, 현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실학적(實學的)인 세계의 지향이다. 다산 경학의 일련의 경향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여건에 비판의 합리성을 수반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므로, 경전 주석의 곳곳에서, 특히 성리학적 주석에 대해‘수사(洙泗)의 구(舊)가 아니다’12)라든지‘수사의 논 (論)과는 어긋난다’13) 라든지‘고경(古經)에는 결코 이런 말이 없다’14)라 면서 공맹을 비롯한 옛 성현의 권위를 빌려 중세적 관념론을 부정함으로써 실증·실용이라는 새로운 입장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경전 세계를 재 창조한 것이라 하겠다.
12) 위의 책, 2,『 中庸自箴』권1, 46쪽,“ 非洙泗之舊.”
13) 같은 책, 2,『 中庸講義』권1, 61쪽,“ 其與洙泗之論, 或相牴牾.”
Ⅳ. 『 논어』주석상(註釋上)의 고증적 측면
『논어고금주』는『논어』의 고금에 걸친 주소(注疏)를 질의(質疑), 인증(引證), 고이(考異) 등의 고증적 방법을 통해 이해함과 동시에 다산의 자기 창의적 탁견(卓見)을 제시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다산은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논어고금주』를 주석함에 있어 한대의 훈고학, 송유(宋儒)의 성리학적 제설(諸說), 청유의 고증학적 경전주석 태도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학문태도는 김매순 (金邁淳)에게 보낸 편지에서‘고주(古注)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며, 후유(後儒)의 새로운 논리라고 하여 다 그른 것은 아니니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공정하게 관찰하여 시비의 진실을 가려야만 한다.’15) 고 말한데서도 나타난다. 다산은 비록 청대 고증학의 과학정신에 입각한 방법론에 찬동하고 있지만, 그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청유의 경전해석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 견해와 상합될 때 는 이를 수용, 자신의 주석을 지지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자기의 주견(主見)과 배치될 때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비판을 전개했다.
15)『 全書』1-20, 30b쪽,「 答金德裕」,“ 古注未必盡是, 後儒新論未必盡非, 唯當虛審公觀, 以察是非之眞.”
이러한 관점에서 다산은 한유와 청유가 고거(考據)에는 뛰어나지만 명변(明辨)의 부족함, 즉 성명론(性命論)에 소홀함을 다음과 같이 비판 하고 있다.
“한유들은 경전을 말하면서 모두가 문자상으로 뜻풀이를 하였으므로 그들은 인심(人心), 도심(道心), 소체(小體), 대체(大體)의 구분에 있어서 어떠한 것이 인성이며 무엇이 천도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중략)… 근세의 유학자들은 송원제유(宋元諸儒)들의 이기론과 내선외유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경문(經文)을 이야기하고 경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한진(漢晉)의 구설을 따르고자 하여 대체로 송유들이 밝힌 의리는 곡직을 묻지 않고 똑같이 반대하는데 힘썼던 것이다.”16)
16)『 全書』2,「 論語古今註」6, 1-2a쪽,“ 漢儒說經皆就文字上曰詰曰訓, 其於人心道心之分, 小體大體之別, 如何而爲人性, 如何而爲天道, 皆漠然. …(중략)… 近世學者, 欲矯宋元諸儒評氣說理, 內禪外儒之弊, 其所以談經解經者, 欲一遵漢晉之說, 凡義理之出於宋儒者, 無問曲直, 欲一反之爲務.”
이 글에서 다산은 오직 유교 경전의 훈고를 충실히 전수한데 지나지 않고 철학적 사상이 결여된 한유를 비판하고 있으며, 송유는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한진의 훈고학만을 추종하여 고증을 위한 고증의 단점을 갖고 있는 청유에 대해서도 비판적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다산이『논어』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시도함에 있어 청대 고증학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논어고금주』상의 인용학자를 통해서 유사점과 상이점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논어고금주』에는 모기령과 고염무의 학설이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17) 이 두 학자를 중심으로 다산과의『논어』해석상의 동이점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7) 黃元九는『논어고금주』에 특히 다수 인용된 청대학자의 횟수를 毛奇齡62회 (鄭?은 79 회로 산출), 顧炎武7회로 산출하고 있다. 黃元九, 앞의 책, 13쪽.
먼저 다산은 고염무의 학설을 인용함에 있어 대부분 동의를 표하고 있으며, 다만 일부분에 있어서만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다산은『논어』「팔일(八佾)」편(篇)의‘소악(韶樂)은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좋으나, 무악(武樂)은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18) 라는 구절을 주석함에 있어서, 고염무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며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18)『 논어「』八佾」篇,“ 子謂韶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계찰(季札)이 문왕의 음악을 논하면서‘미재(美哉)’라 말하여 오히려 유감의 뜻을 표시하였으나 공자가 말하는 무(武)·미진선(未盡善)의 뜻을 알 수 있다. 천하에 미흡하였다는 점을 가지고 문왕에게도 유감의 뜻을 표시 하였으니 천하를 태평으로 이루지 못한 채 죽은 점이 무왕에게 있어서 미진선인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대무(大武)의 풍악이 비록 주공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나 세간의 풍속을 변화시키는 태평성대까지는 이르지 못 하였던 것이다. 이는 성인이 타고난 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인력으로서 미칠 바가 아닌 것이다."19)
19) 顧炎武『, 日知錄』권七,「 武未盡」條,“ 季札論文王之樂, 以爲美哉, 猶有憾, 則知夫子謂武未盡善之意, 猶未洽於天下, 此文之有猶感也, 天下未安而崩, 此武之未盡也. …(중략)… 故大武之樂, 雖作於周公, 而微至於, 世變風移之日聖人之時也, 非人力之所能爲矣.”
다산은 공안국(孔安國)이‘순(舜)은 성덕(聖德)을 갖추고 왕위를 물려 받았기 때문에 진선(盡善)이나, 무왕은 정벌하여 천하를 얻었기 때문에 진선이 아니다’20) 고 하여 선악의 대칭적 의미를 사용한 윤리적 선악론으로 파악한데 대해‘선(善)자는 선세(善世)·선속(善俗)의 선(善)자’21) 로 이해하였다. 즉 소(韶)와 무(武)를 순(舜)과 무(武)의 선·불선의 의미로 대비시켜 파악하지 않고 그 성용(聲容)을 평가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염무와 같이 다산은 진선(盡善), 미진선(未盡善)은 적공의 다소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논어』「팔일」편에‘왕손가(王孫賈)가 물었다. 아랫목 신 (神)에게 잘 보이기 보다는 차라리 부엌 신(神)에게 잘 보이라고 하니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 이 없다.22)’라는 말에 대해, 다산은 먼저 모기령이‘오사(五祀)는 모두 사당에서 제향을 올리지만 또한 각기 다른 장소에서 거행한다’라는 말을 인용하여‘조(竈)에 제사 지낼 때면 신주의 진설은 사당문 밖 동면에 둔다’23) 고 한데 대해‘조(竈)란 원래 오사신(五祀神)이 아니니 이 말은 끝내 분명치 못한 것이다’라고 하여 모기령의 학설은 정주(鄭注)에서 인용한 위서잡설(緯書雜說)이라고 반박한다.24)
20)『 全書』2,「 論語古今註」2, 10쪽,“ 孔曰舜聖德受禪, 故盡善, 武王以征伐取天下, 故未盡善.”
21) 위의 책, 10쪽,“ 善讀之如善世善俗之善.”
22)『 논어』「八佾」篇,“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得於天, 無所禱也.”
23)『 全書』2,「 論語古今註」1, 52a쪽,“ 五祀皆祭于廟而又各不同, ……祭竈設主在廟門外之東.”
24) 위의 책, 52a쪽,“ 駁日非也, 蕭山極尊竈神, 爲不當祭之於室奧, 橫說竪說累千百言然不知, 竈本非五祀之神, 則終於貿貿矣, 其引五祀之禮, 皆鄭注所引緯書雜說, 多學入加是乎.”
이어서 고염무가‘오(奧)란 무슨 신인가? 이를테면 조제(竈祭)를 지낼 경우 시동을 오(奧)에 맞이하여 제사지내는 것이니 이것이 곧 조신(竈神)이다’25) 고 한데 대해, 다산은 시경의‘우이전지 종실유하(于以奠之宗室牖下)’란 사당의 오(奧)를 말한 것이지 침실의 오(奧)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사당의 오(奧)라고 하면 또한 조신(竈神)에게 제사지낼 수 없는 것26) 이라고 하여 고염무의 학설을‘나뭇가지 위에 곁곁이 잎새가 돋아난 것처럼 군더더기 말로써 중첩되어 있으니 쓸 수 없다’27)고 하였다. 즉 다산은 도신론(禱神論)의 입장에서 모기령과 고염무를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다.
25) 앞의 책, 52a쪽,“ 顧炎武曰, 奧何神也, 如祀竈則迎尸, 而祭於奧, 此卽竈之神矣.”
26) 앞의 책, 52b쪽,“ 詩云于以尊之宗室牖下者, 正是廟中之奧, 豈寢之奧乎.”
27) 앞의 책, 52b쪽,“ 駁日非也, …… 亭林之說, 枝上生葉, 不可用也.”
또한『논어』「태백」편의‘삼이천하양(三以天下讓)’을 해석함에 있어 고염무는 교협(膠協)의 말을 인용하여‘계력(季歷)·문(文)·무왕(武王) 삼인(三人)이 왕도를 이루니 이는 세 차례 천하를 사양하였다.’28)라고 한 데 대하여 다산은 이를 반박하고‘삼양(三讓)이란 태백이 세 차례나 계력(季歷)에게 나라를 사양한 것’29)이지 계력·문·무왕 삼대에 걸쳐 나라를 사양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모기령은 청대학자들 중에서『논어고금주』에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논어』에 관한 저술로써『논어계고편(論語稽考篇)』이 있다. 다산은 모기령을 ‘반성리학자로서 말의 기운이 포만(暴慢)하여 경오(驚惡) 스럽다’30)고 평가하고 있다. 다산은 사서(四書)의 일부의 학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기령의 학설을 반박한다. 또『매씨서평』에서 ‘한당이래로 독실하게 고경(古經)을 좋아한 이는 주자(朱子)만한 자가 없다. 어찌 하여 의문이 없는 것에서 의문을 일으켜서 하자가 없는 보배를 훼손시키려하는가?’31)라고 하여 모기령의 주자 학설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태도에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하고 있다.
28)『 全書』2,「 論語古今註」3, 43a쪽,“ 膠協曰季歷文武三人, 而王道成, 是三以天下讓.”
29)『 全書』2,「 論語古今註」, 426쪽,“ 三讓三以國讓於季歷也.”
30)『 全書』3,「 梅氏書平」1, 33쪽,“ … 一反宋儒之學, 辭氣暴慢, 可驚可惡.”
31) 위의 책, 1쪽, “… 夫自漢唐以來, 篤好古經, 未有如朱子者, 豈起疑於無疑, 欲毁無瑕之至寶哉.”
다산의 모기령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다음의 시(詩)에서도 잘 나타난 다.
천하에 망할 남자
모기령이로다.
당돌하게 저대로의 기치 세우고
활을 당겨 고정(考亭)32)을 겨누고 있다가
샅샅이 뒤져서 흠하나 찾아내면
기뻐서 날뛰기 원숭이 같네
마음을 바로 갖고 말을 삼가면
저도 어찌 경서를 말못할 것인가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 본들 나뭇잎 하나라도 떨어질손가?33)
32) 중국 福建省에 있는 지명으로 朱熹가 살던 곳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考亨은 주희를 가리킨다.
33)『 全書』1, 詩文集권2, 25a쪽,
“ 天下妄男子, 我見毛奇齡, 突兀起壁壘, 關弓對考亭, 窮搜摘一疵, 踊躍如猴耄挺, 平心遜其詞, 獨不能談經,
蚍蜉撼大樹, 一葉何曾零.”
다산은 이 시에서 모기령이 이설(異說)을 내세우고 문헌을 개찬하는 경학적 연구태도를 통박(痛駁)하고 있다.이와 같은 다산의 모기령에 대한 태도를 염두에 두고『논어』주석상의 견해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먼저 다산이 모기령의 견해에 비판적 견해를 내세운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논어』「학이」편의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하나니 남을 위해서 일을 계획함에 진심을 다하지 못하였던가?, 붕우와 교제함에 성실하지 못하였던가?, 전수(傳受)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가?, 이다’34)라는 구절의 해석에서 상이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모기령은‘전(傳)이란 전업(傳業)을 말한다. 수(受)는 수업(受業)을 말한다. …… 그러므로 대체로 하나의 전자(傳字)만을 쓴 것은 모두 수자(授字)인 것이다.’35)라고 하여 스승에게 수업하는데는 전자(傳字)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다산은 ‘전불습(傳不習)이란 배우고 익히지 않음이니 전(傳)이라는 한 글자는 윗사람에게 학문을 계승하고 아랫사람에게 전수하는데 모두 통용할 수 있는 글자’36)라고 하여 반박하였다.
34)『 全書』2,「 論語古今註」1, 11b쪽,“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35) 같은 책, 12a쪽,“ 傳曰傳業, …… 受曰受業, 凡單下一傳字, 總是授字.”
36)『 全書』2,「 論語古今註」1, 12a쪽,“ 駁曰非也, 傳不習者, 學而不習也, 傳一字承上接下, 可以通用.”
또한「팔일」편 제1장의‘공자가 계씨에 대해서 말하였다. 천자의 팔일무(八佾舞)를 뜰에서 춤추게 하니 이 짓을 차마 한다면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37)에 대한 해석에 있어, 다산은 공자가 노대부의 삼가(三家)인 맹손, 숙손, 계손(季孫) 등 삼손(三孫) 중 유독 셋째인 계손만을 지칭하여 그의 팔일무를 탓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변석(辨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주나 송주에는 별로 언급이 없고 모기령이 ‘삼한(三桓)이란 노환공(魯桓公)의 아들 계우(季友)가 적자(適子)로서 종경(宗卿)이 되었으므로 그 또한 낳아 주신 분에게 제사를 올릴 때 환공(桓公)의 사당을 세우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삼환의 소자출(所自出)의 사당이다. 삼환은 모두 환공의 자식이므로 삼가지당(三家之堂)이라 하고 계씨는 대종이므로 또한 그에게만 계씨라고 일컬은 것이다’38)라고 하여 적자 위종설(嫡子爲宗說)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공자(公子)가 세 사람이 있다면 그 하나는 적자일 것이며 또 다른 두 사람은 서자일 것이다. 삼환은 그 적자를 세워 대종(大宗)을 삼는다는 소산(蕭山) 모기령의 말은 옳지만 만일 세 사람 모두 서자라면 누구를 대종으로 삼을 것인가? 그가 또한 장자를 세운다고 답한다면 서자(庶子)라도 대종이 있게 되는 것이다’39)고 하여 대종에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계씨적자위종설(季氏嫡子爲宗說)은 성립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37)『 논어』「八佾」篇,“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38)『 全書』2,「 論語古今註」1, 39a쪽,“ 三桓, 爲魯桓公子季友以適子而爲宗卿, 亦得祭所自出而立桓公一廟, …… 此正三桓所自出之廟, 以三桓竝桓出, 故稱三家之堂, 以季氏大宗, 故又獨稱季氏.”
39) 같은 책, 39a-39b쪽,“ 公子有三人, 其一嫡二庶, 如三桓者立其嫡爲大宗如蕭山之說可也, 若三人皆庶, 則孰爲大宗, 其將曰立長乎, 則庶固有大宗者矣.”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산이 모기령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학적(學的)인 타당성이 있는 경우는 자설 (自說)의 근거로 채택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논어』「옹야(雍也)」편 (篇) ‘ 子曰回也其心三月不違仁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의 ‘일월지(日月至)’ 세 글자를 해석함에 있어 모기령이 주자의 주석을 반박하여 ‘일월지(日月至) 세 글자는 의당 1일에 이르고 1월에 이른다는 것으로서 〈一日至〉〈一月至〉(하루에 한차례 이르고 한 달에 이른다)의 뜻이며, 주자주의〈日一至〉〈月一至〉(하루에 한차례 이르고 한 달에 한차례 이른다) 의 의미는 아니다. 「一」자를 거꾸로 잘못 보면 그 차이점은 매우 크다’40) 고 한데 대해, 다산은 소산(蕭山) 〔모기령〕의 말이 옳다고 하여 적극적인 수용의사를 표명하며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보여준다.
이처럼 다산은 그 인증방법(引證方法)에서 알 수 있듯이 청대 고증학을 수용함에 있어 경전연구의 주된 방법론으로써 그 당시의 청대 고증학자들보다 훨씬 철저하게 고증적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경전주석 성향에 있어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경전의 원의(原義)에 부합된 것은 취하였지만 이에 어긋난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여 변석(辨析)하고 있음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40)『 全書』2,「 論語古今註」3, 4쪽,“ 蕭山曰日月至三字, 當是一日至一月至, 不當日日一至月一至也, 一字顚倒, 相去萬里其言是也.”
Ⅴ. 다산의『논어』해석 성향(性向)
여기에서는 전술한 다산의『논어』주석상의 고증적 측면을 바탕으로 『논어』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주제를 천착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다산의 실학적이며 고증적인 성향을 구체적으로 재조명하기로 한다.
1. 인(仁)의 신규정(新規定)과 효제(孝弟)와의 연관성
『논어고금주』「학이편」제 2장에는 인의예지는 실천행위〔행사(行事)〕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이치가 아님을 변론하였다. 「( 辨仁義禮智名, 成於行事, 非在心之理」) 다산은 인을 해석함에 있어 송대성 리학적 주석을 비판하고 자신의 창의적인 방법에 따라 현실적이고 활성적인 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은 공자사상의 중심개념이며, 그 해석도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왔다. 송대리학 계열에서는 인을 내면의 본질을 이루는 개념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심체(心體)로써의 인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실제적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을 설명하고 있다. 즉 양자 사이(부자 간, 형제간 등)의 최선의 도리를 인이라고 한다. 인은 본질적인 실체로 파악할 때는 기능적, 활성적, 실재적 측면이 경시되어 사물(死物)로 되어버릴 기능성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다산의 인은 살아있는 현실적 존재로써, 인간과 인간의 상관적 인간관계 속에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이다.
다산은 <질의(質疑)>에서『맹자』의「인의예지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인의예지를 화실 (花實)로 비유하고 그 근본은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하여 유사한 말을 하고 있지만 사단(四端)과 사덕(四德)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마음에 내재한 것은 사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이며 사덕(인, 의, 예, 지)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덕은 부단한 수양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며 아무런 자기분발도 없이 저절로 자기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다산은
"인의예지는 비유하건대 꽃과 그 열매 같은 것이니 오직 그 근본은 마음에 있다. 측은수오지심이 안에서 발하여 인의가 밖에서 이루어지고, 사양시비지심이 안에서 발하여 예지가 밖에서 이루어진다.41)
오늘날의 유학자는 인의예지의 4가지의 것이 뱃속에 오장과 같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사단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효제도 또한 수덕(修德)의 명(名)으로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또한 효제 두 가지 것이 뱃속에 폐나 간이 있는 것과 같겠는가? 정자가「인성 가운데 어찌 일찍이 효제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뜻도 효제는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인성 가운데 효제할 수 있는 이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소산(蕭山) 〔청모기령(淸毛奇齡)〕이 그 학설에 반대하고자 굳이 효제를 내면적 존재로 삼았으나 그 학설도 또한 치우쳐 있다."42)
41) 같은 책, 2-157쪽『. 論語古今註』권1,“ 仁義禮智, 譬則花實, 惟其根本在心也, 惻隱羞惡之心, 發於內, 而仁義成於外, 辭讓是非之心, 發於內, 而禮智成於外.”
42)『 論語古今註』권1, 9-10쪽,“ 今之儒者, 認之爲仁義禮智四顆, 在人腹中, 如五臟, 然而, 四端皆從此出, 此則誤矣. 然孝弟亦修德之名, 其成在外, 又豈有孝弟二顆, 在人腹中, 如肝肺然哉? 程子云: 人性中, 曷嘗有孝弟來! 其意亦謂孝弟成於外而已, 非謂人性之中, 無可孝可弟之理也. 蕭山, 欲一反其說, 堅以孝弟, 作裏面物, 其說亦偏矣.”
라고 하여, 인의예지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다산의 『맹자요의』에는 이것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인의예지의 이름은 행사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한 뒤에 인이라 하고 남을 사랑하기 전에는 인의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신을 선하게 한 뒤에 의라고 하고 자신을 선하게 하기 전에는 의의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빈객과 주인이 예의를 베푼 뒤에 예의 이름이 성립되고 사물이 분변된 뒤에 지의 이름이 성립되니, 어찌 인의예지의 네 알맹이가 복숭아와 살구의 씨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겠는가?"43)
43) 같은 책, 2-105쪽.『 孟子要義』권1,“ 仁義禮智之名, 成於行事之後, 故愛人而後, 謂之仁, 愛人之先, 仁之名未立也, 善我而後, 謂之義, 善我之先, 義之名未立也, 賓主拜揖而後, 禮之名立焉, 事物辨明而後, 智之名立焉, 豈有仁義禮智四顆, 磊磊落落, 如桃仁杏仁, 伏於人心之中者乎.”
요컨대, 인의예지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요 후천적인 것으로, 이것은 행동의 실천이 있은 뒤에 그 소과(所果)로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산사상의 과학적 합리성을 엿볼 수 있다.
다산의 논지에 따르면 효제도 인이며 인도 효제이다. 그러나 인은 총칭(총괄개념. 총명. 전칭(全稱). 통칭)이며 효제는 전칭(專稱)(포괄개념. 부분개념. 종속개념. 편칭(偏稱). 편명(偏名))이다. 정자는「위인(爲仁)」을「행인(行仁)」으로 해석하고 효제가 행인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좋지만 인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유자(有子)가 의도하는 취지와는 다르다고 하여「인」 과「위인」을 크게 분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산은 정자의 지나친 분석적 해석에 대해 견해를 달리한다.44)
44) 같은 책, 10쪽,“ 程子爲行仁, 自孝弟始, 未嘗不通. 但程子曰: 孝弟, 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此與有子語不合. 仁與爲仁, 不必猛下分別也.”
인과 위인(또는 행인)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45)
1.「 관자(管子)「」계편(戒篇)」에 효제는 인의 비조라고 하고 방현령도 인이란 효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인의 비조라고 한다.
2.『 예기』의「제의(祭義)」에「효는 모든 가르침의 근본이며 인이란 이것을 어질게 하는 것이며 예란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며 의란 이것을 마땅히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3.『 효경』에「효는 덕의 근본이며 가르침이 생겨나는 까닭이 되니 가 르침이 행하여지게 되면 백성이 어찌 인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4.『 여씨춘추』에는「효제는 삼황오제의 본무이다」라고 한다.
5.『 후한서「』두독전(杜篤傳)」에는「결과는 밖으로 나타나더라도 근본은 마음에 있다. 말단이 번성하지만 근본은 뿌리에 있다. 어진 사람이 효를 가지고 있음은 몸이 심복을 가지고 있으며 지엽이 뿌리를 가지고 있음과 같다. 그러므로 대저 효는 하늘의 떳떳함이며 땅의 의로움이며 사람의 행함이다. 효제란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된다」라고 하였다.
5.“ 後漢杜篤傳曰: 功雖現外, 本之者心也. 末雖煩蔚, 致之者根也. 夫仁人之有孝, 猶四體之有心腹, 枝葉之有根本也. 故曰: 夫孝天之經也, 地之義也, 人之行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此乃仁孝先後論也. 此時, 已有仁先之說)
이는 인과 효의 선후관계를 말한 것인데 이때에 이미 인이 먼저라는 학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인에 관한 다산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다음 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인은 양자(兩者) 사이의 최선의 도리이다.
둘째, 내단외덕설(內端外德說)이다. 사덕은 화실과 같으며, 사단이 내심에서 발하여 사덕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맹자의 종지이다. 하물며 송유처럼 사덕이 폐간처럼 마음의 본질로 들어 있다 가 나온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 인성 가운데 효제의 가능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사덕도 수양에 의해서 이룰 수 있다.
넷째, 인은 총칭이며 사덕은 전칭이다.
다섯째, 인과 위인은 구분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고증적 전거(典據)는『관자』,『 예기』,『 효경』,『 여씨춘추』,『 후한서』등에 나타난다.
인이란 다산에게 있어서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최선의 도리이며 수양에 의해서 이룩될 수 있는 것이며 결코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은 더욱 아니라고 말한다. 인과 위인도 엄밀히 구분할 것이 없으며 인은 총명이고 효제는 전명(專名)이라고 보고 있다.46)
요컨대 다산은 당시의 학문 분위기를 감안하여 정·주(程·朱)의 학설을 조심스럽게 비판하였으나 이것은 근본적인 사고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다산의 견해는 정·주의 인의예지의 내재설을 부정하고 그 명칭은 행사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 인은 이를 총칭하는‘총명’이며 효제도 행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총명인 인에 대해 효제는 그것을 세분해 놓은‘분목(分目)’에 해당하나, 인은 가장 먼저 효제로부터 시작되므로 효제를 인의 근본이라고 하는 입장이다. 『논어』의 이 구절의 해석을 통해 볼 때 다산은 성리학적인 정·주의 관념적 사고의 세계를 탈피하여 실학자로서 새로운 경험적 사고의 세계로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6) 정병련,『 茶山四書學硏究』, 경인출판사, 1944, 104-106쪽 참조.
2. 군주(君主)의 정심(正心)과 북신(北辰)에의 비유
다산은「위정편」제1장에서도 독자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데 중점적인 내용인「중성공지(衆星共之)」는 곧 뭇별들이 하늘의 중심과 함께 도는 것이며,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님을 변론한 견해이다.( 「辨衆星共之, 是衆星, 與天樞共轉, 非無爲之謂」) 주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북신은 북극이니 천추(天樞)이다. 거기소(居其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공(共)은 향한다는 뜻이니, 중성(衆星)이 사면으로 둘러싸서 북신을 향한다는 것을 말한다. 정사를 덕으로써 하면 무위(無爲)인데도 천하 사람들이 귀향(歸向)하니, 그 형상이 이와 같다."47)
47)『 論語集註』,「 爲政」, 爲政章.,“ 北辰, 北極, 天之樞也. 居其所, 不動也. 共, 向也, 言衆星四面旋繞而歸向之也, 爲政以德, 則無爲而天下歸之, 其象如此.”
주자는 군주를‘북신(북극성)’에 비유하여 부동(不動)의 위치에 두고 군주가 덕으로써 정사를 하면 모든 별들이 북신을 둘러싸고 향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하는 일 없어도〔무위(無爲)〕만민이 귀향한다는 내용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북신’을 군주로 비유하면서 군주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으며,‘ 공(共)’의 해석도 주자와는 많은 거리가 있다. 그는‘북신거기소(北辰居其所)’를‘ 군주의 정심지상(正心之象)’으로 보고, ‘중성공지(衆星共之)’를‘ 군주의 일심이 바르게 되어 모든 관리와 백성이 군주를 따라 함께 운화(運化)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8) 여기에‘함께 운화한다’는 말은 중성(衆星)으로 말하면 북신과 함께 ‘동운(同運)’·‘공전(共轉)’하는 것이며, 사람으로 말하면 군주의 교화를 따라 군주와 함께 백성이 천선(遷善)하는 것을 비유한다.49)
48)『 全書』, 1-336쪽,「 自撰墓誌銘」.“ 北辰居其所, 以直南極, 人主正心之象也, 一心正而百官萬民與共運化, 所謂而衆星共之也.”
49) 위의 책, 2-162쪽,『 論語古今註』권1,“ 衆星隨轉, 與北辰同運, 故曰, 共之, 政者, 上之所以正民正己而後物正, 隨敎化而同轉, 故以北辰喩之.”
다산의 이 주석이 주자의 주석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의「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수록해 놓은 것이다.‘ 위정이덕(爲政以德)’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는 재래의 해석에 대해, 다산은『맹자』에 나오는 “한번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된다〔一正君而國定矣- 이루상〕”는 말과『대학』의“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다〔일인정국(一人正國)〕”라는 말과『논어』의“정자(政者)는 정(正)이니 그대가 바른 것으로써 인도하면 누가 바르지 않으리오〔政者正也 子帥以正孰敢不正- 안연〕”등의 말을 참작하여 그 내용을 분명하게 풀이하였으며, ‘공(共)’자(字)도 원의(原義)에 맞게 한 것이 돋보인다. 그는 특히 이 장의 주석에서 주자의‘무위’라는 말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위’는 성리학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다산은‘무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청정무위는 한유의 황노학이며 진대의 청허설이니, 이는 천하를 혼란시키고 만물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단사술 중에서도 더욱 그 해독이 심한 것이다. 한나라 문제는 이러한 도를 썼다가 칠국의 난을 초래하였고, 진(晋)나라 혜제는 이러한 사술을 숭상하여 오호의 화란을 불러 들였다.
일찍이 우리 유가의 대성이 또한‘무위’로써 법을 삼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저 무위는 정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분명히‘위정’이라고 하였는데, 유자들이‘무위’라고 한다면 옳은가? 옳지 않은가? (중략)
후세 유자들은 이 글을 잘못 읽고 마침내 ‘요순의 정사는 무위에 요점이 있었다’고 말하여, 이에 가의(賈誼)의 무위를 희사(喜事)라 하고 급암(汲黯)의 무위를 지도(知道)라 하고 위상(魏相)과 병길(丙吉)의 무위한 것을 훌륭한 신하로 삼았다.
이리하여 용렬하고 못난 무리들이 일은 하지 않고 벼슬자리만 차지하여 국록(國祿)을 훔치고 있으면서 체모를 유지하는데 급급하여 자기 단점만을 꾸며 나가고 있음으로써 모든 정사와 제도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어 다시는 부흥할 수 없게 되었던 것도 모두 이 무위의 독(毒)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닌가? "50)
50) 같은 책, 2-162쪽,『 論語古今註』권1,
“ 淸淨無爲, 則韓愈黃老之學, 晋代淸虛之談, 亂天下壞萬物, 異端邪術之尤甚者也, 文帝用此道, 釀成七國之亂, 惠帝崇此術, 召致五胡之禍,
曾謂吾家大聖, 亦以無爲爲法乎, 夫無爲則無政, 夫子明云爲政, 儒者乃云無爲, 可乎不可乎, (中略),
後之儒者, 誤讀此文, 遂謂堯舜之治, 主於無爲, 於是, 以賈誼爲喜事, 以汲黯爲知道, 以魏相丙吉爲大臣,
而庸陋蔑劣之徒, 尸位竊祿, 務持大體, 以文其短, 使萬機百度腐爛墮, 莫之振起, 皆此毒中之也,
嗚呼, 豈不悲哉.”
이 글에서 다산은 주자가 경전에 나오는 ‘무위’라는 말을 한결같이 노장에서 사용하는 ‘무위’와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 논어』「위령공」편에 공자가 “무위”로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다. 무엇을 하였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 (南面)하고 있었을 뿐이다. (無爲而治者其舜也與夫何爲哉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한 말에 대하여, 주자는‘무위이치(無爲而治)’를“성인(聖人)의 덕이 융성함에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어 아무것도 하는 것이 있기를 기다리지 않는다(聖人德盛而民化不待其有所作爲也)”로 해석하여, 『논어』「위정」편의 ‘북신거기소(北辰居其所)’의 해석에서의 ‘무위’ 와 그 뜻이 동일한데, 다산은 이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해석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파하여 노장학적인 ‘무위’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말한 ‘무위’란 훌륭한 인재를 얻음으로써 편안하게 되었음을 공자가 찬양한 말이다. (중략)
순임금이 섭정할 당시 일에 분발하였던 사실이 모두 전적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관원을 임명한 이후부터의 일이『서경』 에 언급됨이 없는 것은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제도가 정비되어 법에 따라 시행해나갔으므로 새삼스럽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무위’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3년마다 한번씩 고적(考績)하고 세 번 고적하고는 한 차례의 출척(黜陟)을 시행하였으며, 5년 마다 한 차례의 순수(巡守)가 있고 여러 제후들의 4차례의 조회가 있음에 정사를 묻고 그 말을 따져 보며, 그들의 아뢰는 말에 따라 그 공적을 시험 하는 등 해마다 법에 따라 시행한 것이니, 이는 이미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군신과 백공들이 각자 맡은 직책에 분주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순임금만 혼자서‘무위’로 가만히 있었겠는가? 고적과 순수를 반드시 몸소하고 형옥(刑獄)을 직접 들으며 교훈을 솔선수범해 나간 것이니, 이러한 순임금에게 어찌 ‘무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중략)
공자가‘무위’라고 말한 것은 훌륭한 인재를 얻은 그 보람으로 편안할 수 있었던 점을 강조하여 순임금을 찬양하는 의지가 넘쳐흐르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성인의 말씀이 격앙(激昻)된 곳이니, 이 말로써 그 본뜻을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치도(治道)를 논하면서 모두가 군주를 팔짱끼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일을 도모하고 실행하는 바가 없는 상태로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온갖 법도가 무너져 정리되지 못하고 만기(萬機)의 정사가 난잡해져 다스려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10년이 못되어 천하는 부폐하게 된 것이다. 화난(禍難)이 계속되고 피폐해진 정사가 다시 쇄신되지 않고 있는데도 끝내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두 ‘무위’의 학설이 이것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이다."51)
51) 같은 책, 2-312쪽.
『 論語古今註』권8,“ 此云無爲者, 極言得人而逸, 贊歎揄揚也, (中略),
舜攝政之年, 奮發事功, 具載典冊, 其自命官以後, 書無所言者, 治成制定, 按法而行之, 故不復記載, 豈遂無爲而然哉,
三載一考, 三考一黜, 五載一巡, 群后四朝, 詢事考言, 敷奏試功, 年年歲歲, 按法而行, 不旣紛紛然多事乎,
群臣百工莫不奔走率職, 舜顧獨無爲乎, 考績必親, 巡守必親, 刑獄必聞, 敎訓必先, 舜何得無爲乎,
(中略),
孔子言無爲者, 甚言得人之效, 可以寧謐贊歎揄揚意氣洋溢, 此聖人辭旨激昻處, 正不必以辭害意也,
今人論治道者, 率皆導人主端拱玄默, 無所猷爲, 百度頹墮而莫之整理, 萬機叢脞而莫之搜撥, 不十年而天下腐矣, 禍難相承, 凋不振, 而率莫之開悟, 皆無爲之說有以誤之也.”
Ⅵ. 맺음말
다산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대한 예민하고도 생생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주자의 성리학적 경학관을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재구성하는 힘든 작업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그는 개혁지향적인 실학적 경세학(經世學)을 전개하였다고 여겨진다. 즉 다산 실학의 두 축은 육경과 사서의 주석을 통한 그의 철학과『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등 저술을 통한 경세론이라고 하겠으며, 이는 실학적 경전주석 사상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 경학의 요체는 또한 강력한 <실천지향성>을 그 전제조건으로 하는 동시에 그 필수불가결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실증·실천>이라는 개념은 그의 경학세계의 구성에 있어 핵심적인 초석들 가운데 하나 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증·실천>이라는 실학적 개념은 그의 문제의식을 총체적이자 집약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다산은 고증학의 학문방법인 합리적, 실증적 태도에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청학에 대한 주석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 태도는 육경사서를 저술함에 있어 취하고 있는 인증(引證) 방법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논어고금주』는 다산의 경학 관계 저술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저술이다. 그는『논어』에 관한 고금의 주석을 모아 수록하여 선유들의 해석을 검토·비판하고 여기에 자신의 창의적인 경전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 체제를 살펴보면, 권두에〈원의총괄(原義總括)〉이라 하여『논어』총 482장(주자의 분장임) 가운데 175장을 뽑아서 열거하고 이에 대해 논변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다산은『논어고금주』를 비롯한 방 대한 경학적 저술을 통하여 비로소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적이고 완결된 독자적 경학관을 확고하게 정립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논어고금주』를 주석함에 있어 한대의 훈고학, 송유(宋儒)의 성리학적 제설(諸說), 청유의 고증학적 경전주석 태도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다. 또한 다산은 비록 청대 고증학의 과학정신에 입각한 방법론에 찬동하고 있지만, 그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청유의 경전해석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 견해와 상합될 때는 이를 수용, 자신의 주석을 지지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자기의 주견(主見)과 배치될 때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비판을 가했다.
다산은 한위이래로 모든 선유들의 경전주석서를 고증하여 경전의 고의(古義)나 원의(原義)를 밝히는 것을 경학연구의 목표로 삼았듯이, 청학수용에 있어서도 선택적이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곧 비록 청대의 고증학적 방법론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청학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반드시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다산의 고증학 수용태도라고 하겠다.
다산은 경전의 인증방법에서 알 수 있듯이 청대 고증학을 수용함에 있어 경전연구의 주된 방법론으로써 그 당시의 청대 고증학자들보다 진일보한 고증적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경전해석 성향에 있어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경전의 원의(原義)에 부합된 것은 취하였으나 이에 어긋난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여 변석(辨析)하고 있음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다산은 고증적 방법을 한층 더 고양(高揚)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논어』주석에 있어서 당시의 학문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정· 주(程·朱)의 학설을 조심스럽게 비판하였으나 이것은 근본적인 사고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다산의 견해는 정·주의 인의예지의 내재설을 부정하고 그 명칭은 행사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 인(仁)은 이를 총칭 하는‘총명’이며 효제도 행사 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총명인 인에 대해 효제는 그것을 세분해 놓은‘분목(分目)’에 해당하나, 인은 가장 먼저 효제로부터 시작되므로 효제를 인의 근본이라고 하는 입장이다. 『논어』의 이 구절의 주석을 통해 볼 때 다산은 성리학적인 정·주의 관념적 사고의 세계를 탈피하여 실학자로서 새로운 경험적 사고의 세계로 지향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다산은 비록 그가 직면하였던 정치적 상황의 구조적인 제약 때문에 자신의 경륜을 직접 현실에 적용시켜 볼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시대적 전환기를 살았던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실천, 즉 <이론적 실천(경학세계의 실천)>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고 본다. 또한 다산의 경전주석은 사학적 세계관으로 자신의 철학적 안목을 유교경전 해석에 창조적으로 활용하 여 실학사상을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림으로써 동아시아 경학의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아울러 그는 경전 해석에 있어 청나라 고증학의 실증적 방법을 중시했지만 사회현실을 외면한 맹목적 고증에 머물지 않고 실용의 목적을 추구하여 서학적 세계관까지 포함하는 독자적인 경학세계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본 논고를 통하여 필자는 다산이 자신의 경학적 저술의 하나인『논어 고금주』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실학적·고증적 경학세계를 개진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이『논어집주』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자의 경학과는 어떤 성향을 지니는가를 고증학적 관점에서 몇 가지 측면으로 분석,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하여 다산의 실학적 경전주석의 한 단면(斷面)이 그의 경학 세계에 있어 고증적 해석성향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다 정치한 천착은 후일의 과제로 남겨 둔다.
<참고 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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