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니체의 동물원에서 ① 낙타

rainbow3 2019. 9. 14. 11:55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니체의 동물원에서 ① 낙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사진)는 다양한 동물 은유를 써서 삶과 세계의 본질을 통찰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면, 무수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낙타, 사자, 독수리, 당나귀, 타조, 원숭이, 뱀…. 우리는 ‘니체의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보면서 새롭게 인간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왜 동물들인가? 동물은 핵과 미토콘드리아의 수준에서 사람과 한 계열이다. 그것은 사람과 가까이에 있고 언제나 최소주의 속에서 삶을 일구는 가여운 생명체로 연민을 자아내고 온전히 해명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빈곤이다. 우리는 동물들이 지적인 영혼을 가진 사람보다 열등한 개체라고 믿는다.

동물은 자기인식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이성적 성찰이 아예 불가능한 지대에 존재하고, 오로지 본능과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의 동체(動體)라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사람은 ‘뇌의 용적·직립보행·언어와 성찰’(도미니크 르스텔, ‘동물성’ 20쪽)이라는 점에서 동물과는 다른 위상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인다. 동물은 무리 속에서 거주하고 사람은 사회 속에서 거주한다. 동물은 본능과 충동에 의해 제 존재를 지탱하는 반면에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서 정치경제적으로, 혹은 시적인 것 안에서 제 존재를 지탱한다. 사람과 동물은 상호 간에 환원불가능한 영역에 속하고, 따라서 두 계열의 경계에는 넘어갈 수 없는 높은 문턱이 있다. 그러나 동물들은 꿈과 무의식, 신화와 민담들에서 사람과의 내적 상동성으로, 혹은 관계들의 등가성이라는 맥락에서 새 의미를 부여받으며, 인간 내면을 비춰주는 빛으로 새롭게 발견되는 그 무엇이다.

니체는 다양한 동물 상징과 동물 은유를 통해, 역설적으로 사람이 내면에 깃든 동물성을 적시하고 그것에 형이상학적 빛을 쐬고 있다. 인간을 가로지르는 니체의 형이상학에서 사람과 동물의 닮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다름과 차이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가 말한 “한 유사성들의 계열화를 차이들의 구조화로, 항들의 동일화를 관계들의 동등성으로, 상상력의 변신(metamorphoses)을 개념 내부에서의 은유(metaphores)로, 자연-문화의 거대한 연속성을 자연과 문화 간에 유사성 없는 대응 관계를 배분하는 깊은 단층으로, 나아가 기원적 모델의 모방을 모델 없는 최초의 미메시스 그 자체로 대신”(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450쪽)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닭이나 돼지가 아니고, 사람이 퇴행한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닭이나 돼지는 사람이 아니고, 동물들이 진화한다고 해서 결코 사람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은 그 정치적·사회적·해부학적 힘의 양과 질의 견지에서 전혀 다른 위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의미 생성의 블록에서 서로 섞이고 스미는 존재들이다. 사람과 동물의 동일화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동물 사이에 있는 “차이들을 정돈해서 관계들의 일치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나름대로 변별적 관계나 종차의 대립에 따라 분배되며, 마찬가지로 인간은 해당 집단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449쪽) 그러니까 니체는 동물 상징과 동물 은유에서 사람을 동물로 환원시키는 게 아니라 두 계열의 차이에 기반해서 사람을 동물-되기의 맥락 속에 재배치하며 존재 생성의 철학을 가동한다. 동물-되기의 맥락 안에서 사람은 징후적 다양체로 생성되고 발견되어질 수가 있다.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묵묵히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선량함은 인간중심적인 것에서 본 판단일 따름이다. 낙타의 관점에서 낙타는 어리석은 고통을 한없이 감내하는 짐꾼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일보

 

 

우리는 니체의 동물원에서 가장 먼저 낙타를 구경할 수 있다.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묵묵히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선량함은 인간중심적인 것에서 본 판단일 따름이다. 낙타의 관점에서 낙타는 어리석은 고통을 한없이 감내하는 짐꾼에 지나지 않는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참고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너희 영웅들이여, 내가 그것을 등에 짐으로써 나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그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저 더없이 무거운 것, 그것은 무엇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묻는다. (중략)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세 단계의 변화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짐깨나 지는 정신”, 철학자는 그것이 낙타라고 말한다. 낙타는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르는 정신이다. 어떤 불의한 명령 앞에서도 그들은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굴종한다.

그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노예이고 천민들이다.

 

그들에겐 애초부터 주인이 되려는 의지가 없었다. 주인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전부 거는 모험을 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그런 모험을 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일견 그들은 착해 보인다. 그들은 항상 “악한 것, 부조리한 것, 추한 것”을 혐오하고 그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낙타형 인간과 반대되는 유형이 디오니소스형 인간이라고 말한다.

“삶의 충만함을 만끽하는 가장 풍요로운 자인 디오니소스적 신과 인간은 두렵고 의심스러운 외양뿐 아니라 두려운 행위, 그리고 파괴, 해체, 부정의 모든 호사도 자신에게 허용한다. 생산하고 결실을 맺는 충만한 힘, 어떤 사막도 풍성한 옥토로 만들 수 있는 충만한 힘의 결과로 그에게는 악한 것, 부조리한 것, 추한 것도 모두 허용한다.”(‘즐거운 학문’ 370절)

디오니소스형 인간은 삶의 충만한 힘을 만끽할 뿐 아니라 파괴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울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악한 것, 부조리한 것, 추한 것”조차 하나의 수단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이 사막을 풍성한 옥토로 만드는 데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도덕에 피동적으로 순응하는 자들이 아니라 제 삶을 위한 새로운 도덕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낙타형 인간들은 겨우 존재하는 자들이다. 겨우라고? 그렇다. 겨우 존재하는 영역에 속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당당하기조차 하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결코 울부짖지 않는다. 왜냐하면 견디며 살 만하니까. 그들은 웃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웃을 만큼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은 최소주의로만 주어진 것, 이를테면 하나의 무거운 의무, 거역할 수 없는 강령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면제받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삶도 면제받을 수가 없다.

그들은 그저 존재함에 만족한다. 이 말은 존재의 보존과 지속성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그런 상태를 이진경은 “명사적 형태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이진경은 이렇게 쓴다. “명사적 형태의 존재란 ‘존재한다’라는 동사적 측면이 망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존재란 명사적 형태 속에서조차 하나의 동사적 사건이다. 따라서 동사적 형태로 표현되는 생성만이 존재한다고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란 생성의 한 측면이고,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123쪽)

 

생성이 없는 존재란 죽은 존재에 다를 바 없다. 낙타형 인간 속에서 가족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으로 출근하는 범속한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 있지만, 자기 삶을 바꿀 엄두는 도무지 내지 못하며 “창조적인 번개의 웃음”을 잃어버린 채 사는, 본질에서 죽은 자들이다. 그것은 창조가 없는 삶이다. “창조.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경쾌하게 만드는 것이다.”(‘지복의 섬에서’) 우리는 겨우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낙타들은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달려간다. 짐이란 비자발적 노동에의 예속을 초래한다. 물론 노동 없이 세계는 유지될 수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 노동했기에 집에서 안락하게 거주할 수 있고, 누군가 노동했기에 밥을 먹을 수 있고, 누군가 노동했기에 옷을 입어 제 몸을 따뜻하게 감쌀 수 있다.

 

이렇듯 노동은 누군가의 삶을 돕는다. 노동은 가치 창조의 원천이기는 하다. 하지만 명령으로 주어지는 노동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존엄으로 이끌지 않는다. 한없는 수고와 피로, 자기모멸만이 그 노동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힘들고 무력하고 침울하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중력의 영”이라는 난쟁이다. 중력의 영은 그들의 귓속에, 그들의 뇌 속에 무거운 납덩이를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중력의 영은 삶과 대지를 무겁게 만든다.

중력의 영에 지배를 당하는 한 그들은 춤출 수 없고 공중으로 도약할 수도 없다. 그들의 삶과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낙타여, 새해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으로 달려가기 전에, 왜 나는 낙타일 수밖에 없는지를, 왜 나는 삶의 충만한 기쁨과 웃음을 잃고 춤을 잃어버렸는지를 돌아보자.


'인문철학 >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이라는 주사위놀이 - 니체  (0) 2019.09.14
니체의 동물원에서 ② 사자  (0) 2019.09.14
시대를 앞서간 초인 프리드리히 니체  (0) 2019.09.14
철학에 대하여  (0) 2019.09.14
인식의 구조와 그 한계(II)  (0) 2019.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