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여우’인가, ‘고슴도치’인가
철학에 대하여 - 김재홍 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기원전 7세기 전반에 살았던 초기 그리스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한 시구에 이런 말이 전해진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안다.”
‘여우와 고슴도치’ 대조는 재주가 출중하고 꾀가 넘쳐 온갖 일에 참견하는 사람에 비해 한 가지 일에 깊은 통찰력을 갖고 집중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에 사용된다.
여우는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냥꾼을 속이지만 끝내는 붙잡히고 만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만으로 사냥개의 이빨을 피할 수 있다. 몸을 둘둘 말고 가시바늘을 세우면 아무도 고슴도치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영리함과 현명함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여우도 영리하며 많은 잔꾀를 가지고 있다. 표범이 여우의 가죽을 깔보며, 제 가죽을 추켜세워 다양한 문양과 화려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여우가 대답하길, ‘표범의 아리따운 장식은 겉가죽에 달라붙어 있지만 자신의 그것은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겉만 화려한 사람보다 영리한 두뇌를 갖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영리하고 재주 많은 사람’을 포이킬로프론(poikilophron) 혹은 포이킬로메티스(poikilometis)라 부른다. 즉 ‘다양한 색깔을 가진 재주 내지는 재능’을 말한다.
여우에 관한 우화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여우가 고양이에게 말하길, ‘자신은 사람들이 꾀주머니라 부를 정도로 많은 꾀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다. 고양이는 위험에 대처하는 단 하나의 재주만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냥개들이 들이닥쳤다. 고양이는 즉시 높은 나무로 뛰어올라갔다. 그 사이에 여우는 사냥개들에 포위되어 잡히고 말았다.
어떤 일을 성취할 때 늘 많은 꾀가 필요하지만은 않다. 한 가지 효과 있는 방책만 있으면 족하다.
가난한 사람은 백가지 꾀로 여인을 유혹할지 모르지만, 돈 많은 사람은 하나로 족하다. 돈 많은 사람은 여인에게 “여기서 원하는 것 아무거나 집어 들어”하면 그만인 것이다. - 『에라스므스 격언집』 中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 실제로 고슴도치와 여우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어릴 적 아이솝(이솝) 우화에서 읽은 짧은 지식에 의하면 단순하고 우직하고 못 생긴 고슴도치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우에게 항상 승리한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를 지냈던 철학자요, 전기 작가로 활동했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 경(卿)은 그의 글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에서 인간을 고슴도치와 여우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여우는 ‘많은 것을 두루 알고 있는’ 사람의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으로 도스토옙스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만을 깊이 아는’ 사람의 유형으로 톨스토이, 플라톤, 단테가 이 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사야 벌린 경(卿)이 주로 논의주제로 삼은 대상은 대문호였던 톨스토이였다.
요즘 같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책으로 ‘방어형의 고슴도치’와 ‘공격형의 여우’ 중 어느 편이 더 현명하고 더 적절하겠는가? 가장 손쉬운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살이 방식은 고슴도치 방식과 여우 방식이 혼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는 것일 게다.
결국 이 말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몸에 돋친 가시로 웅크리고 있는 방어적인 고슴도치 형과 공격적이고 꾀 많은 지략가 스타일의 여우 형을 적절하게 혼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큰 이념이나 비전만을 내세울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에겐 어떤 정치가의 유형이 필요할까?
올바른 정치가는 고슴도치와 여우를 겸비한 덕목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 가지 정책 방향이 정해지면 원칙을 지키면서 그 일을 일관적으로 추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 정치적 비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작은 문제에 관련해서는 나름대로 여우적 방식으로 적절하게 정책방향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무엇보다 진정 훌륭한 정치가에게 필요한 덕목(德目)은 여우와 같은 잔 꾀(꽁수)로 술수를 부리기보다는 국가의 원대한 비전을 내놓고 일관성 있게 정책을 밀고 가는 ‘원칙과 소신’일 것이다.
풀이나 꽃처럼 사는 데에도 뜻이 있다
철학에 대하여 - 김재홍 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자살은 종교와 대부분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비도덕적이라고 비난받아왔다. 자살은 신의 의지에 도전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해로운 것이고,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돼 왔다.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스터톤(chesterton;1874~1935)은 “자살은 하나의 죄일 뿐만 아니라 ‘원죄’”라고 말한다. 자살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하나의 인간을 죽인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죽인다”고까지 단언한다. 결국 자살은 이 세상을 깡그리 없애버리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은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야수보다도 더 낮은 단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인격체’라기보다는 사물로서 간주함으로써 인간성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도덕적 행위의 주체인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거함으로써 도덕성을 뿌리채 뽑아내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우리 각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의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으므로 자살은 인간의 창조자인 ‘신의 목적’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자살에 대한 옹호
이런 전통과 달리 헬레니즘기의 스토아 철학과 계몽주의자들은 자살에는 전혀 비도덕적인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자살은 때때로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기에 지혜롭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전적으로 이성적이고 영웅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스토아적 지자(智者;sophos)는 적절한 상황에서 자살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적합한 행위(kathekon)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가혹한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스토아적 지자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은 자들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적합한 것이다.
세네카는 “모든 인생의 고통에 저항해서 나는 항상 죽음의 피난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살은 인간 자유의 궁극적 정당화이고, 인간에게 유일한 참된 ‘자유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살의 보편적 권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자유로의 통로’을 막는다는 것이다.
후기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집안에 연기가 너무 많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난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마르쿠스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 수 없다면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퀴니코스(견유) 학파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현대의 법률적인 판단에는 자살에 대한 법조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살에 대한 세인의 판단을 고려해 볼 때, 오늘날에는 계몽주의적 입장이 더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인 것 같다.
자살도 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고유한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구약성서』의 ‘모든 육은 들의 풀과 같도다’라는 말과 전도서의 기자의 말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그 어떤 사람의 영혼이든지 값지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치고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어떤 이유로 해서 조금씩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상처의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본질적으로 ‘상처의 아픔’이야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상처 입은 영혼을 몸에 걸치고 살아나간다는 점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한결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신심 깊은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열심으로 기도하고, 주를 섬기려 해도 자신을 방해하는 어쩔 수 없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안질이었든, 간질이었든, 아니면 기도할 때마다 눈앞에 얼씬거렸던 벌거벗은 여인이 되었든 간에, 대저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가 이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주께 세 번 간구했을 때, 주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했다고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영혼은 늘 어떤 종류의 ‘가시’를 지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가진 자나 없는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다 같다고 여겨진다.
주검의 사회적 의미와 아름다운 삶
나는 어떤 주검에 대해서도 그 죽음의 ‘의미’를 깎아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자살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게끔 만든다. 어쩌면 이 사회가 자살을 권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살의 미학’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다. 자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고, 실제로 내 자신도 늘 어디서든 그 ‘죽음의 유혹’에 마주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현명한 사람은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했다. 공자도 죽음에 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죽음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거나, 정의로운 자이거나 불의한 자이거나 불문하고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게 찾아온다. 죽음보다 더 공평한 정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가, 아니면 추한 이름을 남기는가가 다를 뿐이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앞서, 우리의 삶 자체를 뒤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철학적으로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철학에 대하여 - 김재홍 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어리석은 자들은 왜 사랑에 빠지는가(why do fools fall in love)’.
이 노래는 1956년 2월에 가성의 음조(falsetto)로 frankie lymon이 부른 팝송의 제목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부딪치는 문젯거리다. 더러는 이 때문에 무수한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잠 못 이룬 밤이 무릇 그 얼마이던가? 젊은 시절, 우리네 가슴은 사랑에 지쳐서 그토록 갈등하면서 얼마나 참 사랑을 갈구했던가? 그 시련과 상심이야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으리요. 이런 면에서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스토아 학파의 현자들은 일상의 관습과 도덕적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현자들’만의 구별되는 삶의 태도와 사랑의 방식, 그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철학적으로 사랑’하는 스토아 철학적 모델을 하나 찾아보기로 하자. 스토아 학파를 개소했던 제논의 스승인 견유학파 철학자 크라테스와 히파르키아의 결혼에 관련된 것이다.
히파르키아는 크라테스의 논변과 그의 삶의 방식에 매료돼 그만 ‘사랑’에 빠져들었고, 그래서 다른 그 어떤 청혼자들에도 관심이 없었고, 또한 재산이나 귀족 출신, 외모에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크라테스만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내가 크라테스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크라테스는 그녀의 부모들로부터 자신의 딸이 그러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는 초청을 받게 됐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방도를 다했으나 그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마침내 하는 수 없어, 그는 그녀 앞에 우뚝 서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당신의 신랑이 있소. 이것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이요. 이제 당신이 결단을 내리시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삶을 견뎌낼 수 없다면 당신은 나의 반려자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 소녀는 그를 선택했다. 같은 옷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돌아다녔으며, 공공연하게 성행위(性行爲)를 했다. 그들은 저녁 파티에도 함께 참석했다.
크라테스와 히파르키아의 사랑의 모델을 소개한 것은 그들 간의 일화를 통해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어떤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여인을 보고 음심(淫心)을 품음 것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린 하루에도 수없이 간음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생각되지만 조금은 부끄럽다.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충고를 보내는 내면의 소리도 들리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상적 욕망에 이끌리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까? 용서받을 수 없다면 도리 없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지 않는 길이란 이러한 육체적 욕구 내지는 정념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리라. 그런 길을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파테이아(정념으로부터 벗어남, apatheia)에서 찾았다. 그들은 우리가 이 세상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은 이 세상적인 것에 관해서 ‘무관심’을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리석은 인간인 우리가 이 세상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냥 자연이 준 대로,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욕망’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욕망도 ‘나’를 구성하는 한, 나의 ‘한’부분이니 그 자체까지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동성애(paiderastia)를 나누며, 철학적으로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게 이에 관련된 내용은 간접적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전해지며, 또 확인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푸는 한낱 성적 유희 대상에 불과했었다는 말인가?
개 같은 생활을 했다 해서‘견유학파(퀴니코스 학파, cynic)’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자긍심이 대단했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욕을 포함해서 먹는 것, 자는 것과 같은 삶의 기본적인 욕구들로 인해 육체적으로 고통 받지 않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간음의 위험성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 자위행위라는 수단을 선택했다.
전통적 결혼제도와 격정적 에로스(eros)에 대해서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디오게네스는 어느 날 육체적 욕망이 넘쳐 매춘부를 구했다. 그녀가 농간을 부려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위행위를 통해 자신의 성적 욕망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그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여자와의 성관계(sexual intercourse)에서 오는 그 쾌락이 ‘그 목적 자체’가 아니라는 것과 실제로 그 대상은 다른 수단으로 대체될 수 있고, 반드시 불가피하게 한 여인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얘기가 우리에게는 좀 쇼킹하게 다가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크뤼시포스라는 스토아 철학자는 공공연하게 자위행위를 해대는 디오게네스를 찬양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나는 내 배 위에다가 그 갈망을 쉽게 문질러 댈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plutarch st. rep. 1044b)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해하는 에로스는 무미건조하고, 고독한 에로스이다. 에로스라는 행위 자체도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이 전하는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보여주는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인간 지혜의 하나의 모델이다. 결국 ‘에로스는 격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자족적인 에로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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