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기타

제 1장 궁극적 실재(Paramattha)와 마음

rainbow3 2020. 4. 13. 09:41


제 1장 궁극적 실재(Paramattha)와 마음 (빠라맛따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와 마음)

 

 

네 가지 궁극적 실재(Paramattha) 

 

궁극적 실재로 번역한 빠라맛따(Paramattha)는‘최상의 본성’을 뜻하는 빨리어다 . 여기서 빠라맛따는 ‘최상의 본성’을 뜻하는 빨리어다. 

 

'최상의’라고 번역한 ‘Parama’는 높거나, 고상하거나,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변하지 않는 똑바르고 확고한 것을 뜻한다.[ Parama(최고의, 최상의, 궁극적인) + attha(이치, 뜻, 도리, 본성)] 궁극적 실재란 마음(citta), 마음부수(cetasika), 물질(rūpa), 열반(nibbāna)의 네 가지이다. 

 

궁극적 실재는 네 가지인데, 그것은 마음(찌따,citta), 마음의 작용(쩨따시카,cetasika), 물질(루빠,rūpa), 열반(닙바나,nibbāna)이다. 

 

어떻게 궁극적 실재는 변하지 않는가? 

 

마음의 작용에는 탐욕(로바, lobha), 성냄(도사, dosa)이 있다. 탐욕은 지혜롭고 선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거나 악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거나 개의 마음에 일어나거나 간에 그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어떠한 중생의 마음속에 성냄이 일어나더라도 성냄이나 악의라는 확고부동한 그 본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궁극적 실재 또한 그 본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궁극적 실재는 편견이나 편중됨이 없고 항상 본래 성품대로 드러난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대로 사물의 본성을 진지하게 숙지하고 이해하여 자신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정신상태도 알도록 해야 한다.

  

 금언:

  

1. 한결같은, 확고부동의, 불변하는 진정한 정수를 궁극적 실재, 즉 빠라맛따(paramattha)라고 한다.

  

2. 궁극적 실재에는 마음(citta), 마음의 작용(cetasika), 물질(rūpa), 열반(nibbāna)의 네 가지가 있다.

  

마음(Citta)

  

대상을 아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항상 대상을 알고 있다. 이러한 대상을 아는 성질을 마음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감각기관을 통해서 대상을 인지하는 능력을 뜻한다.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여섯 가지 마음

  

1. 형상의 대상 = rūpārammana

  

2. 소리의 대상 = saddārammana

  

3. 냄새의 대상 = gandhārammana

  

4. 맛의 대상 = rasārammana

  

5. 감촉의 대상 = photthabbārammana

  

6. 마음의 대상 = dhammarammana

  

형상을 볼때는 보는 마음[眼識]이 일어난다. 소리를 들을 때는 듣는 마음[耳識]이 일어난다.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 맡는 마음[鼻識]이 일어난다. 맛을 볼 때는 맛보는 마음[舌識]이 일어난다. 몸의 감촉을 느낄 때는 감촉을 느끼는 마음[身識]이 일어난다. 이러한 다섯 가지 감각대상[五境]과 다른 모든 인지 대상을 인식할 때 아는 마음[意識]이 일어난다. 그래서 관련 대상을 아는 능력을 마음(citta)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의 성질

  

법구경(法句經)에 따르면“마음은 저 멀리까지 갈수 있으며, 혼자서 떠돈다. 마음은 물질적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보통은 동굴 속에 산다.” 는 게송을 예로 들어 마음의 성질을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마음은 저 멀리까지 갈수 있다.

  

마음은 사람이 걷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이동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대상을 마치 그곳에 갔다 온 것처럼 인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만달레이에 있으면서 양곤에 있는 어떤 물건이나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면 실제로 양곤까지 간 것은 아니고 만달레이에 그냥 있지만 양곤에 대해 인지한다. 이렇게 마음은 멀리 떨어져서도 대상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은 저 멀리까지 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은 혼자 떠돌아다닌다. 

 

마음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그 순간에도 백만의 백만 배보다도 더 많은, 셀 수 없이 많은 의식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너무나 빨라서 두세 개의 대상을 두세 개의 마음이 동시에 지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두세 개의 의식이 동시에 생겨나는 일은 결코 없다. 의식은 하나씩 순차적으로 생겨나며, 한 의식이 한 대상을 먼저 지각하고 나서 다른 의식이 다른 대상을 지각하게 된다.

 

향수를 뿌린 침대에 앉아있는 동안 뭘 먹거나 가수와 무용수를 볼 때 우리는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의 다섯 가지 감각대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은 이 다섯 대상을 모두 동시에 알아차리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다른 대상들을 차례대로 인지한다. 그래서 한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마음단위는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하나씩 일어난다. 그래서 “마음은 혼자서 떠돈다.”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떠돈다.”라는 말은 실제로 마음이“헤매고 다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에서 저 멀리 떨어진 한 대상을 인지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나의 마음단위만으로는 한 감각대상을 완벽히 인지하는데 역부족이다. 많은 수의 마음단위들이 계속해서 연달아 일어날 필요가 있다. 10억 개나 되는 마음단위가 손가락 한번 튕기는 순간에도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보자마자 형상을 인지하고 듣자마자 소리를 알고 냄새를 맡자마자 향기를 느끼고 닿자마자 감촉을 느낀다. 

 

마음은 물질적 형태가 없다. 

 

마음은 형상이나 모양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하얗다거나 검다거나 납작하다거나 홀쭉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마음 그저 대상을 인지하는 능력일 뿐이다. 

 

동굴 속에 머문다. 

 

보는 마음[眼識]은 눈에서 일어난다. 듣는 마음[耳識]은 귀에서 일어난다. 냄새 맡는 마음[鼻識]은 코에서 일어난다. 맛보는 마음[舌識]은 혀에서 일어난다. 감촉을 느끼는 마음[身識]은 몸에서 일어난다. 비록 몇 가지 마음이 이렇게 눈, 귀, 코 등에서 일어나지만 대부분의 마음은 심장 내의 움푹 파인 곳(hadaya-vatthu) 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동굴 속에 산다.”라고 하는 것이다. 

 

요컨대, 마음은 형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감각대상을 인지할 수 있으며 감각대상을 인식하는 성질을 지닌다. 인식과정 중에는 마음이 머무르는 곳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는 일이 없지만 저 멀리 있는 대상들을 인지할 수 있다. 두세 개의 마음단위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으며, 각 마음단위들은 연달아서 차례차례 일어날 따름이다. 

 

금언: 마음은 감각대상을 인지한다. 마음은 저 멀리 가며 혼자 떠돌아다닌다. 물질적 형태가 없으며 심장의 움푹 파인 곳(hadaya-vatthu) 에 머문다. 

 

선한 생각과 불선한 생각은 어떻게 뒤섞이는가? 

 

마음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선하고 불선한 마음의 단위들은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도 한데 뒤섞인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배를 하면 선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누가 여러분에게 쇼핑을 가자는 말을 들으면 탐욕이 일어나고 누가 와서 성질을 돋우는 말을 하면 화가 난다. 

 

여러분이 장사를 하는 동안에는 탐욕에 휩싸이게 된다. 보시하는 것을 우연히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믿음(saddhā) - 보시의 유익한 과보에 대한 믿음 - 이라는 선한 생각이다. 여러분이 누군가나 어떤 것에 화를 낼 때 스승의 조언이나 충고를 떠올리게 되면 선한 알아차림이 다시 일어난다. 장사하는 동안에는 탐욕에 휩싸이지만, 문득 보시하려는 생각이 나면 그때는 믿음(보시의 유익한 과보에 대한 믿음)이라는 선한 마음이 된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서 화가 날 때 스승의 조언이나 충고를 떠올리면 선한 알아차림이 다시 일어난다. 

  

남편과 아내가 애욕을 품은 채 잡담을 하는 동안에는 어떤 오해로 화가 날수 있다. 하지만 부부 가운데 한명이 사과를 하고 화해를 청하면 마음은 풀어져서 다시 애욕을 품는다. 

 

마음은 아주 빨리 변하기 때문에 선하고 불선한 마음의 단위가 일어날 때마다 주의 깊게 분간해서 선한 마음의 단위들을 계발하려고 애써야 한다. 

 

물질적 재산이 다르듯이 마음도 다르다. 

 

사람의 생김새나 외모가 각기 다르듯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다르다. 무겁고 형편없게 생긴 몸은 힘과 활력이 넘치는 몸과 아주 다른 것처럼, 둔감하고 굼뜬 마음은 명랑하고 재기 넘치는 마음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른 사람들보다 미모와 매력에서 월등히 아름답고 잘 생긴 사람들이 있다. 추함에 있어서도 아귀나 아수라만큼이나 흉측한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부류의 선하고 예리한 마음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뛰어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등급의 마음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부류의 선하거나 악한 마음상태를 생각해보면 다양한 등급의 사악함과 아둔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모와 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영예를 얻은 몸매에도 다양한 품위 등급이 있는 것처럼 가장 추한 아귀와 아수라에도 다양한 등급의 흉찍함이 있다. 이와 유사하게 선한 마음의 범주에도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아주 예리한 지성을 지닌 가장 성스러운 인물까지 다양한 등급이 있으며, 불선한 범주에 드는 마음의 등급도 사악하고 못되고 혐오스러운 부류에서부터 극도로 아둔한 가장 극악무도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마음을 길들일 수 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떤 사람이 도시인의 유행과 삶의 방식을 따라 배우고, 몸과 마음으로 스스로를 길들이면 자신의 물질(신체적 외모)도 바뀌며 일이년 안에 주변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세련되고 멋지게 변한다. 만약 서서히 변하는 물질의 형상이 개선될 수 있다면 더 빨리 변하고 향상되기 쉬운 마음을 길들인다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만약 우리가 마음을 매일 관찰하고 날뛰는 마음을 길들인다면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이삼년 뒤에는 자기 마음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자부심을 충분히 계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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