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마음의 작용과 불선한 마음의 작용
마음의 작용 또는 정신적 요소 - 쩨따시까(Cetasika)
마음의 작용(cetasika)이 마음을 결정한다.
마음의 장에서 선하고 악한 마음의 개념에 대해 이미 설명했다. 하지만 마음의 유일한 기능은 대상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자체는 선하거나 악할 수 없다. 마음은 다양한 마음의 작용(cetasika)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선하거나 악한 마음의 작용에 따라 선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마음과 결부된 마음의 작용으로 인하여 마음은 선해지거나 악해지기도 한다.”는 뜻이다.
예: 비록 물 자체는 색깔이 없지만 빨강색, 노랑색, 푸른색, 검정색 물감을 첨가하면 각각 빨강, 노랑, 푸른색, 검정색의 물이 되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다. 그래서 여러분은 뒤에 나오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선하고 악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금언: 마음은 대상을 알기만 할뿐, 마음만으로는 선과 악을 결정하지 못한다. 마음의 작용(cetasika)때문에 마음은 선하거나 악해진다.
14. 마음에 영향을 주는 불선한 마음의 작용
불선한 마음의 작용(Akusala Cetasikas)
1. 어리석음 = 모하(Moha)
2. 양심 없음 = 아히리까(Ahirika)
3. 수치심 없음 = 아놋따빠(Anottappa)
4. 들뜸 = 웃닷짜(uddhacca)
5. 탐욕 = 로바(Lobha)
6. 사견(邪見) = 딧티(diṭṭhi)
7. 자만 = 마나(māna)
8. 성냄 = 도사(Dosa)
9. 질투 = 잇사(issā)
10. 인색 = 맛차리야(macchariya)
11. 후회 = 꾹꿋짜(Kukkucca)
12. 게으름 = 티나(Thīna)
13. 혼침 = 밋다(middha)
14. 회의적 의심 = 위찌낏차(vicikichā)
(a + kusala = 반대의, 아닌, 없는 + 선한, 유익한, 능숙한 = 불선한, 해로운)
1. 어리석음 - 모하(moha)
두 종류의 어리석음(moha)
알지못함(어리석음)이 모하(moha)인데, 아누싸야 모하(anusaya-moha)와 빠리윳따 모하(pariyuṭṭhāna-moha)의 두 종류가 있다. 아누싸야는 ‘잠재성향’, 또는 ‘잠재하는’이란 뜻이고 빠리윳따는 ‘일어남, 흥기(興起)’를 뜻한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에 잠복해있는 어리석음을 아누싸야 모하(anusaya-moha)라고 하고, 마음과 함께 가끔씩 일어나는 어리석음을 빠리윳따 모하(pariyuṭṭhāna-moha)라고 한다.
잠재성향의 무지- 아누싸야 모하(Anusaya Moha)
독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에는 독이 있듯이, 중생의 마음연속체인 바왕가(bhavaṅga)에도 알아야 할 법(Dhamma)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요소(dhātu)가 있다. 이 요소를 바로 잠재성향의 무지인 아누사야 모하(anusaya-moha)라고 한다. 이 잠재성향의 무지는 범부(puthujjana)의 눈을 가려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성을 철견하지 못하게 하며, 사성제나 12연기를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범부는 자신의 제한된 지혜와 잠재성향의 무지가 같은 것이라고 깨닫지 못한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책을 읽어서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등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표면적인 것이지 철견이 아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되어도 잠재성향의 어리석음은 점점 옅어질 뿐이고,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잠재성향의 어리석음이라는 요소(anusaya-moha-dhātu)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
흥기하는 어리석음 - 빠리윳따 모하(Pariyuṭṭhāna-moha)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때 우리는 좋지 못한 마음, 즉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흥기하는 어리석음이 가진 숨기려는 성질 때문에, 우리는 내생에 겪을 나쁜 과보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현재 불선업을 행하는 것이 나쁘다고 알지 못한다. 심지어 학식 있고 선량한 사람조차도 어리석음이 일어날 때는 그 해악을 보지 못하고 나쁜 행위를 한다. 어리석음이야말로 가장 나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우둔함은 어리석음에서 비롯한다. 어리석음은 모든 악의 근본원인이다.
어리석음에 가리운 선인(仙人)
보살은 어느 때 하리따(Haritaca)라는 바라문이었는데 팔만 크로네의 막대한 재산을 버리고 출가하여 선인(仙人)이 되어 선정(jhāna)과 신통지(abhiññā)를 얻었다. 그때 히말라야 산에 큰 비가 내렸기 때문에 선인은 바라나시에 와서 왕실정원에 머물렀다.바라나시왕은 보살의 오랜 친구였는데, 바라밀을 구족하였으며 나중에 아난다 존자가 될 인물이었다. 그래서 왕은 선인을 보자 공경심이 크게 일어 선인에게 왕실정원에 머물도록 요청하고 네 가지 필수품을 보시하였다. 왕은 직접 선인에게 왕궁에서 아침식사를 올렸다.
어느 때 국경지방에 반란이 일어나자 왕은 친히 진압하러 가야만했다. 왕은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왕비에게 잊지 말고 선인을 잘 모실 것을 신신당부했다. 왕비는 왕의 분부대로 선인을 잘 모셨다. 어느 이른 아침 왕비는 향기나는 물로 목욕을 하고 정갈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채 선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인은 신통력(abhiññā)으로 허공으로 날아와서 왕궁의 창가에 내렸다. 선인의 가사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은 왕비는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그만 옷이 흘러내렸다. 선인이 왕비의 벗은 몸을 보자 마음연속체인 바왕가(bhavaṅga)에 도사리고 있던 잠재성향의 어리석음(anusaya-moha)은 흥기하는 어리석음(pariyuṭṭhāna-moha)으로 뒤바뀌고,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 선인은 왕비의 손을 끌어잡고 야차(夜叉, yakkha)처럼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리석음(moha)에서 비롯되는 몽매함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보살에게 어리석음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설령 왕이 눈감아 주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불선업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살은 그 당시 어리석음이라는 어둠에 가렸기 때문에 현생의 행위에 대한 나쁜 과보와 계속되는 윤회 속에서 받게 될 내생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왕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만 것이다. 평생 수행을 해서 얻은 선정(jhāna)과 신통지(abhiññā)도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몰아낼 수 없었으며, 어리석음에 가리워져 선정과 신통의 힘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선인은 바라밀이 이미 성숙했기 때문에 쓰라린 교훈을 얻었으며 왕의 은혜를 저버린 행동을 크게 뉘우쳤다. 선인은 다시 수행을 하여 선정과 신통지를 얻고는“내가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악을 범했다.”라는 생각을 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돌아갔다.
알지 못하는 것이 항상 모하(Moha)인것 만은 아니다.
모하(moha)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전에 배우지 않았던 과목을 알지 못하는 것이나, 가보지 않은 장소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접해보지 못한 것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모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진정한 모하가 아니므로 불선한 마음의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과거에 알지 못해서 인식(saññā)이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도 그렇게 알지 못할때가 있다.
심지어 지혜에 있어 부처님 다음가는 사리뿟따 존자도 한 젊은 비구에게 부적절한 명상법을 가르쳤다. 사리뿟따 존자는 그 비구가 한창 욕정이 끓어오를 나이라고 판단하고는 제자의 성향에 맞지 않는 썩는 시체와 같은 더러움을 관하는 명상주제(asubha-kammaṭṭhāna)를 주었다. 제자는 네 달간이나 열심히 수행하였지만 삼매의 징후인 가장 희미한 표상(nimitta)조차도 얻지 못했다.
그뒤 제자는 부처님께 보내졌고, 부처님은 제자의 성향에 맞게 활짝 핀 연꽃을 만들어서 주자 제자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연꽃을 시들게 하자 비구는 종교적 절박감(saṁvega)을 느꼈다. 부처님은 그때 법문을 펴셨고 무상·고·무아의 특성을 깨닫고는 아라한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 지혜의 무한함과 이미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사리뿟따조차도 알지 못하던 것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사리뿟따 존자도 자신의 지혜를 뛰어 넘어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것이나 부처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고 지혜나 배움에 불완전한 면이 있을 뿐이다. 백주대낮에 멀리 떨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가 멀리 떨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시력이 나쁘기 때문이다.
거칠고 미세한 어리석음
불선하고 해로운 것과 선하고 유익한 것을 구별하지 못함은 다소 거친 어리석음이다. 정신과 물질의 무상·고·무아의 성질, 사성제, 12연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비교적 미세한 모하때문이다. 어리석음과 함께하는 마음을“우매한 마음, 우둔한 마음”이라고 하고, 어리석음에 휘둘리는 사람은“바보, 머저리, 멍텅구리, 천치, 야만인, 백치, 무용지물.”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 이 세상은 완전한 어둠속에 있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꿰뚫어 알 수 있다. 마치 소수의 새만이 그물을 벗어날 수 있듯이, 죽어서 천상계에 재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법구경.v.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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