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알아차림(Sati)
회상, 기억, 주의깊음은 빨리어로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정의하는 용어이다. 다양한 형태의 알아차림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이전에 행했던 공덕행을 회상해낸다 든지, 주의 깊게 들어서 법문을 기억해 낸다든지, 명상을 하는 동안 명상 주제를 잃지 않으려고 깊이 몰입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바로 알아차림의 특성이다.
우리는 때때로 내일이나 미래에 공덕행을 지으려고 한다. 또한 계를 잘 지켜서 어떠한 계율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한다. 또한 탐욕, 성냄, 자만, 무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잡는다. 또한 스승의 조언을 회상한다. 그러한 선한 문제에 관한 알아차림만을 사띠(sati)라고 하고 그러한 진정한 알아차림을 불방일(appamāda)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비구가 재가신자에게 계를 줄때에는 적절한 알아차림으로 계를 열심히 지키도록 언제나 주의를 시킨다. 비구가 재가신자에게 계를 주고 나면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Appamādena sampādetha. - 방일하지 말고 노력하라.”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Satiñ ca khvāham bhikkhave sabbatthikaṁ vadāmi.- 비구들이여 나는 참으로 알아차림이 모든 행동에서 으뜸임을 선언하노라.” 비록 믿음이 너무 과한 사례는 있을 수 있지만 알아차림은 아무리 과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처님도 반열반에 들기 직전 이렇게 말씀하셨다.“Appamādena sampādetha.- 방일하지 말고 노력하라.”
단순한 기억은 알아차림(Sati)이 아니다.
우리가 친척을 기억할 때나 연인이 상대방을 그리워할 때나 친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나 어떤 소중한 순간을 회상하는 것 등은 모두 갈애(taṇhā)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은 데 대해 복수를 할 때나, 극악한 음모를 마음에 품고 있을 때,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 중에 닥칠지 모르는 잠재 위험을 주의하는 것은 성냄(dosa)을 토대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모든 마음의 작용은 애착이나 성냄을 수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알아차림(sati)라고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은 인식(saññā)이나 일으킨 생각(vitakka)의 예이다. 이들을 알아차림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식과 일으킨 생각의 특성은 다음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3.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
악행을 짓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양심(hiri)이다. 악행을 짓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 수치심(ottappa)이다.양심은 자신의 명예와 품위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서 잘 드러난다. 수치심은 부모, 스승, 친구, 친척을 공경하는 사람에게서 잘 드러난다.
더 명확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좋은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불선한 행위를 하거나, 고기잡이나 사냥꾼으로 생계를 유지해선 안된다.’라고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생계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집안이나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
교육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나는 배운 사람이므로 악행을 하는 불선한 행위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나는 살생, 도둑질 등을 삼가야만 한다.
나이 든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나는 나이 들었으므로 성숙하고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악행을 한다면 창피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예는 명예와 품위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는 선한 마음의 작용인 양심이 우세함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내가 악행을 한다면 나의 부모, 친구, 친척, 스승은 나로 인하여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악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악행을 피할 것이다.’이것이 바로 수치심의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남에 대한 동정어린 배려로써, 친한 사람의 명예와 품위를 지킴으로써 우리는 양심과 수치심이라는 선한 마음의 작용을 얻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자신의 가족, 스승 등에 대한 동정어린 배려가 없다면 양심과 수치심이 결여된 것이며, 살아가면서 많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양심과 수치심은 아들이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오빠나 남동생이 자기 여동생이나 누나와 근친상간을 범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부도덕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세계를 지키는 법(lokapāla-dhamma)’으로 간주된다. 이 두 가지는 순수하고 선한 이상이기 때문에‘선법(sukka-dhamma)’이라고도 한다. 이 두 가지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계행을 닦고 몸가짐을 절제하도록 하여 동물과 구별되도록 한다.
양심과 수치심이 없다면 인류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며 동물과 같은 상태로 떨어질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양심과 수치심이 결여되어 예의에 어긋나게 옷을 입고, 밥을 먹고, 행동을 한다. 만일 이렇게 도덕이 계속 하락한다면 세계는 철저하게 파멸하고 인류는 동물과 같이 되버릴 것이다.
그릇된 양심과 수치심
비록 양심과 수치심이 선한 마음의 작용(kusala-cetasika)이긴 하지만 그릇된 양심과 수치심도 있다. 악행을 하기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악행(duccarita)을 삼가는 것은 진정한 양심과 수치심으로 인한 것이다. 재일(uposatha)을 지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탑과 절을 방문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법문을 듣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대중들에게 강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 하는 것, (실업자가 되고 굶어죽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는 않고)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 하는것,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하는 것 등은 그릇된 양심과 수치심이다. 사실상 이러한 것은 우쭐거림과 헛된 자만이며 아비담마에서는 갈애(taṇhā)의 한 형태로 뭉뚱그려 이해한다.
양심을 내버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
불전은 양심을 내 버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1) 장사와 상업을 할 때 (2) 유능한 스승 밑에서 배울 때 (3) 음식을 먹을 때 (4) 성관계를 할 때.
이러한 네 가지 경우는 이득이 되는 무언가를 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가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양심과 수치심의 또 다른 예는 법정과 재판을 두려워하거나, 여행 중에 화장실을 가기를 꺼린다거나, 개를 두려워하거나, 도깨비를 두려워하거나, 낮선 장소를 두려워하거나, 이성을 두려워하거나, 어른이나 부모를 두려워하거나, 어른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것은 진정한 양심과 수치심이 아니라 사실은 용기나 자신감의 결여이고 정신적 고통(domānassa)에 의해서 촉발된 불선한 마음상태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중도
상기 설명은 진정한 양심과 수치심만이 계발돼야 함을 여실히 증명한다. 불선하지 않은 일을 행할 때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무모하고 과감해지라는 말은 아니다. 무모함은 어른에 대한 불경, 성냄, 증오, 자만으로 치닫게 된다. 도덕적 용기와 두려움 없음이 요구될때에는 무모하고 불경스러워야 한다.
아무런 이익이 없는 대담함, 불경과 만용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직 선행을 할 때에만 대담하고 두려움이 없어야만 한다. 지나친 양심과 수치는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중도가 있는 것이다. 두려움을 품어야할 상황에서는 두려움이 없어선 안 된다. 즉 악행은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Abhāyitabbe bhāyanti, bhāyitabbe na bhāyare. 대부분의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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