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인색(Macchariya)
불선한 마음의 작용인 인색을 마짜리야(macchariya)라고 한다. 요즈음에 일부 사람들은 남에게 뭘 주거나 보시하기를 꺼려한다. 이러한 것이 인색이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인색은 남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길 바라는 것을 뜻한다. 인색한 사람은 남을 질투하고 남이 재산을 얻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구두쇠 짓은 단순히 돈과 재산에 대한 집착이며 그래서 그냥 탐욕(lobha)일뿐이다. 인색은 남이 승진, 돈, 명예, 미모 등을 얻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질시(嫉視)를 뜻한다. 삼장에는 다음 다섯 가지의 인색을 들고 있다.
1. 거처의 인색(avāsā-macchariya) 집, 거처, 절, 학교, 침대 등과 관련된 인색이다. 일부 비구는 자신이 소유하게 된 절에 다른 비구가 와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쁜 비구가 자신이 머무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인색이 아니다. 남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바로 인색이다. 거처에 대한 인색을 가진 비구는 죽어서 자신의 거처에 아귀로 태어나거나 지옥에 떨어진다.
2. 가족의 인색(kula-macchariya): 신자와 친척 등에 대한 인색이다. 어떤 비구는 자신을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신자가 자기 외에 다른 비구를 후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쁜 비구가 자신의 친구와 친척과 사귀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인색 이라하지 않는데 나쁜 비구는 그들의 믿음과 도덕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인색은 자신의 친척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속이 뒤집히고 내장의 출혈과 설사를 일으킨다. 또는 그러한 사람은 내생에 무일푼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3. 탐욕의 인색 (labha-macchariya): 물질적 이익에 뿌리를 둔 인색이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잘 사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악의가 바로 탐욕의 인색이다. 하지만 나쁜 비구가 부적당한 곳에 사용할 필수품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과 선한 비구가 필수품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의 인색이 아니다. 탐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분뇨지옥(gūtha-niraya)에 떨어져 똥을 먹어야만 할 것이다.
4. 계급의 인색(vaṇṇa-macchariya): 미모와 명성에 뿌리를 둔 인색이다. 이러한 인색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자신보다 더 아름다워지거나 더 유명해지는 꼴을 못본다.그러한 사람은 윤회를 하면서 내생에 추하게 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다.
5. 법의 인색(dhamma-macchariya): 배움, 학문, 교육, 지식에 뿌리를 둔 인색이다. 남에게 지식이나 정보를 나눠주지 않는 사람은 법의 인색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학문에서 남이 자신을 능가할까봐 두려워하고 질문에 답변해주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기꺼이 남을 가리키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을 잘못 이용할 못된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법의 인색에 해당되지 않는데 이는 그러한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멍청이나 머저리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열회지옥(Kukkula-niraya)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것이다.
고려해야할 문제
다섯 가지 인색과 관련하여 누가 이러한 나쁜 태도에 가장 많이 노출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십중팔구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보시에 의존하는 비구와 비구니가 이러한 나쁜 성향을 답습하기 쉽다. 재가자의 경우에도 남이 자신보다 더 좋은 집이나 땅을 얻는 것을 배 아파할 때, 자신이 더욱 부유해지고 아름다워지고자 권력, 지위, 지식, 지혜 등에서 남을 능가하고자 할 때 인색이 생긴다. 그러한 인색을 마짜리야(macchariya)라고 한다. 하지만 인색과 관련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지 그 상대방이 아니다. 그러한 사람은 추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죽어서 아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인색을 철두철미하게 없애서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11. 후회(kukkucca)
악행을 저지르면 일반적으로 후회(kukkucca)가 수반된다. 후회는 악행의 결과로 생기는데 이는 저지른 악행과 바른 법을 망각한데 대한 자책이다. 그래서 두 가지 종류의 후회가 있다.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의 후회
네 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이 읊은 네 가지 음절로 된 두(Du)-사(Sa)-나(Na)-사(Sa)라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그들은 매우 부유한 젊은이들이었지만 아무런 공덕행도 짓지 않았을 뿐더러 오직 불선업만 지었다. 예를 들면 도덕적 계율을 파하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죽어서 로하꿈비 지옥(Lohakumbhī-niraya)에 떨어져 육만 년 동안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과거 생에 나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공덕의 길을 닦지 않고 성적인 비행에 몰두했네.”
그는 자신의 악행을 크게 후회하였다. 하지만 오직“두(Du)"라는 단어만 입 밖에 내고는 다시 무시무시한 솥 밑바닥으로 가라않았다. 그는 선행을 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또 다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고통스런 과보는 끝이 없내. 나는 인간으로 있을 때 악업을 지었다.”하지만 그도 완전한 문장을 말하지는 못하고 오직 “나(Na)"라고 하는 말만 입 밖에 내었다. 그는 자신의 지은 불선업을 후회하였다.
악업의 고통스런 과보는 “두(Du), 사(Sa), 나(Na). 사(Sa)"라고 말한 네 명의 젊은이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내생에 가서야 비로소 무르익는 것은 아니다. 현생에서도 악업을 지은 자는 자신의 악업에 대한 생각으로 쇠해간다.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정도에 이르기 까지 몸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후회할 짓을 하지 말라
지나간 악행을 자책한다고 걱정을 뛰어넘지 못한다. 회한이나 자책을 한다고 해서 고통스러운 과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자책은 오직 또 다른 불선한 마음의 작용인 후회(kukkucca)가 생기도록 할뿐이다. 후회하지 않는 올바른 방법은 악행을 또 다시 범하지 않고 불선행을 삼가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세우는 것이다. 만약 악행이 그다지 심하지 않다면 마하박가 상윳따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절제의 힘으로 악업의 과보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넉넉할 때 열심히 노력하라
모든 이들은 능력과 재주에 따라 학문, 재산, 공덕을 성취해야 한다. 그러한 성취, 기회, 시기는 젊었을 때만 가능하다. 좋은 기회와 시간을 낭비하면 파멸하고 말 것이다.“쇠뿔도 단김에 빼라.”라는 속담이 있다. 시골사람은 이를 이렇게 말할 것이다.“비가 내릴 때 씨를 뿌려라.”만약 우기가 지나가면 여러분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가 없기 때문에 수확을 할 수 없게 된다.
설령 여러분이 공덕행을 짓지 않았다고 너무 늦게 깨닫더라도 이를 탄식해서는 안된다. 고치기에는 절대 늦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히 망각하는 것보다는 늦은 알아차림(sati)이 더 낳다.
부처님 당시에 살던 한 사형집행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 사형집행인은 늙어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퇴직할 때까지 그렇게 왕을 위해 사형을 집행 했다. 사리뿌따 존자가 죽음을 눈앞에 둔 그를 우연히 만나서 성스러운 법을 설해주었다. 하지만 늙은이는 법에 자신이 지은 불선업과 자신이 듣고 있는 성스러운 법과 너무나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마음을 법문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내막을 알게 된 사리뿌따 존자가 이렇게 물었다.“사형선고를 받은 범죄인을 처형한 것은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인가, 아니면 왕의 명령 때문인가?”그러자 늙은이는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왕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제가 죽이고 싶어서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그러자 사리뿌따 존자가“그렇다면 무슨 죄가 됩니까?”라고 묻고는 법문을 계속했다. 법문을 듣는 동안 작은 수다원(cūḷa-sotāpanna)을 얻고는 죽어서 천인계(deva-loka)에 태어났다.
(불법에 따르면, 비록 사형집행인이 왕의 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왕과 사형집행인 모두에게 사형집행의 죄가 있다. 하지만 사리뿌따 존자는 늙은이를 안심시켜 법문을 들을 때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좋은 방편으로 질문을 던져 늙은이가 죄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주: 늙은 사형집행인은 많은 목숨을 해쳤다고 스스로 인정했지만 사리뿌따 존자가 도움이 되는 질문을 하여 후회(kukkucca)를 없애주었다. 후회가 없어지자 늙은이는 진정한 법에 온 마음을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천인계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잘 새겨서 우리는 왜 그때 악업을 저질렀고 왜 선업을 짓지 않았나 하고 후회하지 않아야 하고 새로운 불선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이 사실을 자각한 때부터 선업만을 짓고자 노력해야 한다.
12,13. 해태(Thīna)와 혼침(Middha)
해태(thīna)란 몸과 마음이 나태함을 뜻하고 혼침(middha)이란 몸과 마음이 둔하거나 혼매함을 뜻한다. 이 두 가지 마음의 작용은 함께 일어난다. 이 두 마음의 작용으로 열정과 활력이 없어지며, 잠에 들기 직전의 사람이나 법문을 들으며 조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나태함을 생기게 한다.
하지만 졸린다고 전부 해태와 혼침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과로하여 몸이 피곤하면 졸릴 수도 있다. 내리쬐는 햇볕을 쬐면 초목이 시들고 말라비틀어지듯이 아라한도 졸릴 수 있다.
마음(citta)과 마음의 작용(cetasika)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보이는 나태, 무기력, 무감각만을 해태와 혼침이라 설명한다는 점을 유의하도록 한다. 요즘에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해태와 혼침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14. 회의적 의심(Vicikicchā)
회의적 의심이란 불 법 승 삼보에 대해 품는 의심이나 회의적 태도이다. 이는 믿음과 믿지 않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회의적 의심의 예는 다음과 같다.
1. 일체를 아는 부처님이란 분이 존재할까?
2. 팔정도를 닦으면 열반을 얻을 수 있을까?
3. (설령 계행을 갖춘 비구를 보더라도) 저 자는 계행을 갖춘 비구일까?
4. 선한 계율을 지켜서 무슨 이익 됨이 있을까?
5. 전생이 있을까? 또는 영원한 신이 지금 생의 우리를 창조했을까?
6. 내생이 있을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7. 도덕적이고 비도덕적 행위는 내생의 오온(五蘊)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업에 대한 의심)
8. 선행의 과보를 누릴 수 있는 것일까?(업의 과보에 대한 의심)
9. 무명(avijjā)으로 인해 의도적 행위나 심리현상인 상카라(saṅkhāra)가 일어나는 게 사실일까?(연기법에 대한 의심)
그러므로 부처님 등에 대한 의심만을 회의적 의심이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동양사상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아차림, 양심과 수치심 (0) | 2020.04.13 |
---|---|
회의적 의심이 아닌 일반적인 의문 (0) | 2020.04.13 |
제 2장 - 절망/질투/멧돼지와 에메랄드 동굴/자찬과 남을 비하함/과시/시기적절한 공표/비난 (0) | 2020.04.13 |
제 2장 - 라바/아라바/야사/아야사/닌다//파삼사 (0) | 2020.04.13 |
제 2장 - 빠리데와, 육체적 고통(Dukkha)과 정신적 고통(Domānassa) (0) | 2020.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