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기타

탐욕과 탐욕없음

rainbow3 2020. 4. 13. 14:51


5. 탐욕없음(아로바, Alobha)

 

탐욕없음(alobha)이란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뭔가를 원하는 탐욕(lobha)의 대가 되는 것이다. 탐욕(lobha)과 탐욕없음(alobha)은 물과 불과의 관계와도 같다. 탐욕(lobha)이 뭔가를 원하는 것이라면 탐욕없음(alobha)은 그 본성이 탐욕스럽지 않음, 관대함, 베풀기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탐욕스러운 사람과 만족하는 사람의 대비되는 행동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비구

 

탐욕스러운 비구는 항상 탁발 음식과 시주물을 찾아다닌다. 그러므로 그는 시주물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호소력 있는 법문을 한다. 시주물을 얻으면 그것에 너무 집착하여 다시 남에게 베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만을 하고 자신이 얻은 것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그는 잠재적인 시주자에게 친절하고 잘 대해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품격만 떨어뜨린다는 것을 모른다.

 

탐욕스런 사람

 

탐욕스런 사람도 탐욕스런 비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마음이 탐욕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갈고리로 재산을 긁어모으려 한다. 그는 얻은 것이 무엇이든 만족을 하지 못한다. 탐욕스럽기 때문에 더욱 더 많은 재산을 얻고자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도 내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졌고 저것도 가졌다. 이것이 내 재산이다.”그는 죽으면 아귀계에 태어날 것이다. 그의 탐욕은 그를 사악처로 밀어 뜨릴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탐욕의 해악이다.

 

탐욕 없는 비구

 

탐욕 없는 비구는 물질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주물을 얻게 되면 자만에 빠지지 않고 시주물과 보시는 시주자와 독지가의 선의에서 온 것이라고 바르게 안다. 부처님의 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재가자도 시주물과 보시에 집착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선한 사람은 절대로 탐욕스러워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는 관대해야 하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탐욕 없는 비구는 물질적 재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탐욕 없는 사람

 

재가자 중에도 탐욕 없는 사람은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만으로 생계를 꾸린다. 그는 바른 생계를 실천하고 감각적 쾌락을 가능한 멀리 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베풀어 준다. 보시를 올리는데 절대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한 선의를 빨리어로 아낌없이 널리 베푼다는 뜻의 무따짜기(mutta-cāgī)라고 한다. 그러한 선한 사람은 왕위, 재산, 권력도 다 팽개치고 숲속의 초막에서 만족하며 사는 선인(仙人)이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등을 맞대고 반대방향으로 질주하는 두 사람과도 같이 탐욕스럽고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바라밀을 지닌 보살이나 선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분석해봐야 한다.“나는 탐욕스러운가? 탐욕스럽지 않은가?”만약 그들이 탐욕스럽다면 이번 생에 마음을 바르게 고쳐야 한다. 만약 자신이 탐욕스럽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이제 훌륭한 선근(善根)을 갖추었으므로 더욱 더 많은 선행을 계속 지어나가야 한다.

 

6. 성냄없음(Adosa)

 

성냄없음은 사납지 않음이나 야만스럽지 않음이다. 이는 뱀이 도마뱀붙이의 대가 되는 것처럼 성냄(dosa)과 직접적으로 대가 된다. 성내지 않음을 가진 사람은 성냄을 가진 사람이 잔인한 것만큼이나 유순하다. 그들은 마음이 평화롭기 때문에 성내며 말을 거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비단 마음만 평화로울 뿐만이 아니라 얼굴표정도 은빛의 달처럼 상냥하고 아름답다. 반면에 성냄을 가진 사람의 얼굴표정은 험악하다. 게다가 상냥한 말씨로 인하여 멋있어 보이기 때문에 만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냄없음의 자성은 유익함이 많다. 사실상 성내지 않음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는 자애(mettā)와 동의어이다. [곧 자애의 성질을 다룰 예정이다.]

 

보살의 탐욕없음과 성냄없음

 

한때 보살은 바라나시의 브라마닷따왕의 아들이었다. 정비가 죽자 왕은 젊고 아름다운 왕비 한명을 정비로 삼았다. 마하파두마 왕자는 왕이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에 수도를 책임지는 임무를 맏았다. 부왕이 돌아와 왕국에 도착할 무렵 왕자는 왕의 귀환을 알리려고 젊은 정비와 함께 회중을 소집하고 있었다. 그 무렵 혼자 남겨진 왕비는 애욕을 일으켜 왕자를 세 번이나 유혹하였다. 하지만 보살은 왕비의 유혹을 물리치고 왕비를 민망하게 만들어 격노케 했다. 복수심에 불탄 왕비는 마하파두마 왕자가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모함하였다. 왕은 왕비의 모함을 그대로 믿고 말았다.

 

사실 왕비는 파두마 왕자를 파멸시키기 위해 속임수(pariyāyā)와 술수(māyā)를 부린 것이다.

 

생각이 모자란 왕은 즉시 왕자에게 사형을 내렸다. 하지만 왕자는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으므로 왕은 대중이 왕자를 데려갈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왕이 직접 사형집행인들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왕자를 낭떠러지로 밀었다. 하지만 왕자가 지닌 자애(mettā)의 힘으로 산신령의 구원을 받게 되었다.

 

자따까에 대한 논평 

 

자따까의 첫 부분에서 젊은 정비가 파두마 왕비를 만나자 애욕(taṇhā)에 휩싸였다. 하지만 왕자는 탐욕과 애욕의 반대가 되는 탐욕없음을 닦았다. 나중에 젊은 정비는 자신의 사악함을 감추려고 왕자에게 해가 되는 말을 꾸며댔다. 이것이 바로 거짓말(musāvāda)과 결합하여 부려진 술수(māyā)이다. 그리고 왕은 왕비를 성폭행하려했다는 모함을 들을때부터 자신의 아들을 사형에 처할때까지 분을 가리앉히질 못했다. 파두마 왕자의 성품은 탐욕없음, 원한없음, 인욕, 자애의 성질을 잘 드러낸다.이 자따까에 나오는 왕자는 보살이고, 젊은 정비는 친챠마나위까(Ciñcamāṇavikā)이고, 왕은 데와닷따(Devadatta)였다.

 

업과 과보

 

산꼭대기에서 떨어진 왕자는 용왕이 용궁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일년을 보냈다. 그리고는 인간세계에 돌아와 선인이 되었다. 몇년후에 사냥꾼이 왕자를 알아보고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부왕은 왕자에게 와서 왕궁으로 돌아와 줄것을 요청하였지만 파두마 왕자는 거절하고 계속 선인으로 남았다. 자초지종을을 알게 된 왕은 왕비를 산꼭대기에서 떨어뜨렸다. 왕비는 이렇게 자신의 악행에 대해 혹독한 죄값을 치르며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