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심리학

역오디푸스 콤플렉스: 어머니의 두 개의 몸

rainbow3 2020. 4. 30. 16:19


역오디푸스 콤플렉스: 어머니의 두 개의 몸

 

김 종 갑

  

어머니의 개념이 변하고 있다. 과거에 어머니의 정체성을 다져 주었던 모성의 개념도 점차 희석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문화산업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는 ‘친구 같은 어머니’나 ‘친구 같은 딸’의 이미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과거에는 어머니와 딸 사이에 세대 차이라는 넘을 수 없이 높은 장벽이 있었다면 언제부턴가 양자의 관계가 수평적인 친구 관계로, 모녀관계라기보다는 자매 관계에 가깝게 묘사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모녀상은 대중매체(‘X세대 엄마,’ ‘언니로 보일 정도로 동안(童顔)인 엄마’)나 백화점 특별 기획 세일(‘로렌 10년 젊어지다’) 등의 손을 타면서 어느새 일반 대중에게도 지극히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신대대의 모녀에게 바람직한 관계로 권장되기도 하는 새로운 모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대중문화의 코드는 이러한 모녀 관계를 지극히 민주적이며 평등하고 인격적인 관계로 제시한다.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과거의 위계적인 수직 관계를 청산하고 수평적이며 이상적인 의사소통의 단계로 접어드는 징표로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변화의 일면밖에 포착하지 못한다. 혹은 대중문화가 스스로를 재현하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이데올로기적 자화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녀관계에서 친구관계로의 변화의 본질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몸 문화, 혹은 현대인이 몸을 경험하고 재현하는 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친구처럼 딸과 이야기하는 엄마의 이미지의 배경에 깔린 진실은 엄마가 딸로 착각될 정도로 젊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는 것, 혹은 자녀를 출산한 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여자로서 자신의 몸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날렵한 몸매와 탄력적인 피부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남녀노소의 구분을 초월해서 딸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머니 세대도 공유하는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로운 모녀 관계는 세대 간 구분과 위계의 해체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 세대에게도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딸 같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들 같은 아버지, 권위적 아버지가 아니라 친구 같은 아버지의 이미지와 단짝을 이루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 세대와 착각될 정도로 젊고 건강한 몸매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군살 없이 날씬한 몸매에 대한 요구는 킴 체민(Kim Chernin)의『강박: 날씬한 몸매의 독재에 대한 고찰』(The Obsession: Reflections on the Tyranny of Slenderness)의 제목을 빌면 가히 ‘독재’적이며 ‘강박’적이 되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부모와 자식 세대를 가르는 권위의 경계가 이완되면서 몸이 새로운 차이의 기호로 등장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오디푸스 콤플렉스(reversed Oedipux complex)라는 개념의 사용을 제안하려고 한다. 프로이트가 규정한 고전적인 의미에서 오디푸스적 상황은 아들과 딸이 동성의 부모를 제거하고 이성의 부모와 결합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자식이 이성 부모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지칭한다.

확대해서 해석하면 2세대는 1세대의 이성과 결합하려는 세대 횡단적인 상향적 욕망인 것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그러한 세대간의 빗장과 위계를 제거하고 상하가 결합하려는 욕망을 금지하는 제도적 잠금장치이다.

그러나 새로운 어머니상과 아버지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욕망은 그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2세대가 1세대를 닮고 싶어하는 하향적 욕망으로 표출이 된다. 오디푸스가 연로한 부모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요카스터(Jocaster)나 페드라(Phaedra)가 젊은 아들이나 아들 세대의 몸을 욕망하는 것이다.


역오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필자가 처음으로 사용하는 독창적인 용어는 아니다. 필자의 어법과는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어네스트 존스(Ernest Jones)나 보부아르(Simone Beauvori)를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은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시도하는 작업은 이 용어를 전경화하면서 현대 사회의 새로운 몸의 문화와 성적 코드를 진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자는 푸코(Michel Foucault)가 구분했던 섹슈얼리티(sexuality)와 결연(alliance)의 차이,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의 앙티오디푸스(anti-oedipus), 또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에서 결정적인 위치에 있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역오디푸스 콤플렉스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섹슈얼리티와 결연, 상상적 몸과 상징적 몸의 차이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 논문은 2007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2007-327-A00718).

 

 

I

 

현대는 “몸의 사회”(somatic society)1)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몸이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몸을 가꾸는 일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정도로 “아름다움도 민주화되었다.”2)

날로 번창하는 패션 산업, 성형 산업, 다이어트와 몸매 관리 산업은 과거에 정신지향적이었던 문화가 이제는 몸의 문화로 바뀌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대인이 일상적으로 몸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방식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몸이 타고난 운명이며 신분이고 자연이었다면 현대에는 몸이 끊임없이 가꾸어야 하는 “가소적(可塑的)인 몸”(flexible body),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표현을 빌면 “몸 프로젝트”로 전경화되었다.3) 세대간의 차이나 성적인 차이도 그러한 프로젝트에 맞물려 있음은 물론이다.


전근대사회에서 몸은 계급이나 신분, 지위, 역할, 나이, 직업 등에 배경에 가려져 있었다. 나이의 경우에도 연대기적 나이보다는 계급, 가문의 위상이 훨씬 중요하게 취급되었다.4) 라캉의 용어를 적용하면 상징적 외투가 상상적 몸을 가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 제도의 시대에는 나이가 어릴 지라도 주인은 심지어 나이든 노예를 “boy”나 “daughter”라고 부르는 관례가 있었다(Paterson, 63).

한편에 생물학적이며 자연적인 몸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사회적이며 상징적인 권위의 몸이 있었던 것이다. 신분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을 생물학적 몸으로서가 아니라 권위의 몸으로서 바라보아야 했다. 신체의 생김새나 몸매와 무관하게 주인은 주인의 의미로, 노예는 노예의 의미로 경험되었다.

칸토르비츠(Ernest Kantorowicz)가『왕의 두 몸』(King’s Two Bodies)에서 주장하였듯이 인간에게는 두 개의 몸이 있었다. 비록 자연적 몸으로서 왕은 병에 걸리고 노쇠하며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신민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왕은 신처럼 죽지 않은 불멸의 “몸 정치”(body politic), 권위의 상징적 몸이다.5) 탈권위화시킴으로써 왕을 젊거나 늙고 추하거나 아름다운 몸으로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었다. 이것은 가장으로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왕과 왕비가 국가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이듯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족의 왕이며 왕비이다. 보모의 몸은 그냥 남녀의 성적인 몸이 아니라 탈신체화된 상징적 권위의 몸으로서 경험되어야 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아들과 딸도 젊은 남녀의 성적인 몸이 아니라 아들과 딸이라는 의미로 경험되어야 했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와 같이 몸이 탈신체화되면서 상징화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식들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애정을 독점하기 위해 경쟁하는 수평적 관계로부터 수직적이면서 위계적인 상하 관계,세대 차이의 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부모와 친구처럼 지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욕망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는 거세 위협과 초자아의 발달로, 프로이트는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면서 아이들은 충동과 본능을 억제하면서 사회의 법과 관습을 존중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상상적 질서로부터 상징적 질서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의 과정에서 부모의 몸의 위상의 변화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몸을 성적인 몸이 아니라 권위의 몸, 금지를 명령하는 상징적 몸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장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금지하는 법, 분류하고 소속을 정해주는 “정치적 종교적 아버지”(쥘리엥 50)이다. 부모는 두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 하나가 성적이며 자연적인 몸이라면 다른 하나는 상징적이며 문화적인 몸으로, 오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는 아이가 전자를 후자로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이 점에서 라캉이『텔레비젼』(Television)에서 “노아의 외투”(19)를 언급한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술에 취해서 벌거벗은 몸으로 잠든 노아의 몸은 그의 자식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했는지의 여부를 묻는 시험대이며, 상상계로부터의 단절 여부를 실험하는 하는 상징적 분리대의 역할을 한다.6)
잘 알고 있듯이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몸이 아니라 가장의 권위로서 상징적으로 보았던 반면에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를 늙은 육체로 바라다보았다. 이때 함의 시선을 통해서 가장의 존재가 철저하게 명목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권위의 외투가 벗겨지는 순간, 이름이기를 중단하고 실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에 아버지는 비루한 몸으로 전락해 버린다.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 상징적 몸이 가시화되는 순간에 죽어야 하는 노쇠한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7)


그렇다면 함과 오디푸스는 몸의 사회로 명명되는 현대사회를 미리 선취하고 그것이 증상적으로 발현되는 지점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가장이 몸이 아니라 권위로 경험되어야 할 전근대의 사회적 질서의 내부에서도 그는 이미 육체로 보여지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주장과는 달리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완전히 극복되거나 소멸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소포클레스(Sophocles)의『오디푸스 왕』(Oedipus the King)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오디푸스가 범했던 결정적인 죄악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라이어스(Laius)를 늙고 성미가 고약한 노인, 비루한 몸의 노인으로 보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라캉이 주장하듯이 그는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아니라 다만 자신을 모욕한 낯선 남자를 살해했을 따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8) 몸으로 보이는 순간 가장은 가장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부장제가 급격히 와해되는 19세기의 후반에 정신분석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몰락하는 시기에 정신분석이 탄생한 것이다.9)

프로이트는 유난히 오디푸스 콤플렉스에 집착하였다.10) 그는 “정신분석의 옹호자들과 반대자들을 구분하는 쉽볼렛(shibboleth),” “신경증의 핵심적 콤플렉스”(Three Essays 226)라고 주장할 정도로 그것을 정신분석의 운명과 동일시하였다. 필자는 프로이트가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유난히 강조했던 이유를 쇠락하는 아버지의 권위를 복원하려는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11)

그는 함의 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의 몸을 외투로 덮어주었던 숨기려 했던 셈과 야벳의 후예이다. 구약의 야훼처럼 보이지 않게 탈육체화하고 상징화함으로써만 아버지는 이상적인 가장으로 승화될 수 있다.

도라를 비롯한 히스테리 분석의 사례에 등장하는 아버지들 가운데는 상징적 가장의 역할과 일치하는 아버지는 한 명도 없었다(Verhaeghe 40).12)

현실의 아버지는 가장이 아니라 노아처럼 술에 취해서 발가벗고 잠을 자는 비루한 남자, 함과 같은 아들이 자기 알몸을 보았다면서 수치스러워 하고 분노하는 옹졸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1) 브라이언 터너(Bryan Turner)가『몸과 마음』(Body and Society)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책에서 아젠다로서 몸의 사회학이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2)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다운 몸 가꾸기는 귀족이나 부유한 계층의 전유물이었지만,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아름다움의 민주화가 시작되었다”(Wolf 62).
3) Emily Martin, Flexible Bodies (New York: Beacon Press, 1995); 앤소니 기든스,『현대성과 자아정체성』, 권기돈 옮김 (새물결, 1997).
4)『막스 베버: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역사사회학』에서 브라이언 터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신체가 종교적 의미와 의식 체계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175). 또 Philip Ariès, Centuries of Childhood (New York: Penguin, 1973)를 참조하기 바람.
5) 메리 더글라스에 따르면 당카족의 추장은 죽기 전에 산 채로 매장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나 동물처럼 추장이 노화해서 죽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추장은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Douglas 83-84).

6) 여기에서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일회적으로 완결되고 재발되지 않는 사건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The Dissolution of the Oedipus Complex”에서 프로이트는 “Untergang”과 “Zertrümmerung”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후자는 콤플렉스가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되고 괴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전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전히 억압된 채 남아서 잔존하는 콤플렉스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또 “The Waning of the Oedipus Complex”에서 Hans Loewald는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일회적으로 종료되는 사건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극복되어야 하는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7) 감춰지고 신비화되며 이상화되지 않으면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다. 보이고 가까워지는 순간에 왕의 신비는 풀려버리고 만다. “친밀성은 경멸을 초래한다.” 이러한 이유로 군대의 장교들은 절대로 사병들과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Goffman 67).

8) Zupančič의 Ethics of the Real의 “What is Father?”를 참조하기 바람(192-197). 또 아버지에 대한 라캉의 관점에 대해서는 Russell Grigg’s “Beyond Oedipus Complex”와 Berhaeghe’s “Enjoyment and Impossibility”를 참조하기 바람. 참고로 전기에 라캉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상징계 진입에 필요한 구조적 요소로서 강조하였지만, 세미나 16권 이후로, 라캉은 이 개념을 사용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Grigg, 51).
9) “Les complexes familiaux dans la formation de l’individu” in Essai d'analyse d'une fonction en p;sychologie (Paris: Havarin, 1984)에서 그와 같이 주장하였다. 쥘리앵의『노아의 외투』를 참조할 것.
10) 이에 대한 흥미진진한 전기적 설명으로 Anspach를 참고할 수 있다(xliv-liv).
11) Russell Grigg, “Beyond Oedipus Complex,” 50-68, 특히 61-67을 참조하기 바람.
12) 라캉에 의하면 아버지는 이미 거세된 존재이다(Grigg 59).

 

 

그렇다면 우리는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자식이 거치는 경험의 일방적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겪어야 하는 수모의 과정으로서도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자식이 부모를 바라보는 오디푸스적 시선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자식을 바라보는 역오디푸스적 시선, 권위의 외투로 자신을 가리지 못한 채 아들의 시선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노아의 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탈권위화되고 탈상징화된 부모의 모습은 자식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고전적인 해석에 따르면 자식들은 힘 센 권위적 아버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라한 아버지를 이상화하는 작업에 임하게 된다.13)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오디푸스처럼 자식은 아버지의 권위를 약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도 있다.14)

『여성의 성』(The Female Sexuality)에서 프로이트는 어머니와 딸의 세력 관계의 역전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바가 있다. 어머니에게 수동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딸은 반대로 어머니에 대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도 가지고 있다(236). 더구나 과거에 부모에 수동적으로 의존했던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 연로한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어네스트 존스의 「세대 역전의 판타지」(“The Phantasy of the Reversal of Generations”)의 표현을 빌면 “나이가 들고 몸집이 커지면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상대적 위치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자식이 부모가 되고 부모는 자식이 되는 것이다”(407).

레온 쉴레프(Leon Shakolsky Sheleff)에 따르면 이러한 역오디푸스적 상황에서 연로한 부모 세대는 젊은 세대와 자기도 모르게 경쟁 관계에 접어들며 극심한 질투, 심지어 살해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가령, 라이너스는 길에서 마주친 청년 오디푸스를 거칠게 밀어냈을 뿐아니라 막대기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15) 그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젊은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시몬느 보부아르는『노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성공적으로 살해함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거나 아버지를 밀어낼 수가 있다. 반면 아버지는 아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발견하고는 역오디푸스적 감정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이제 아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것이다”(526).

이러한 역오디푸스적 도식에 따르면 과거에 자식이 거쳐야 했던 오디푸스적 상황은 역전된 형태로 부모의 세대의 어깨에 부과된다. 과거에 자식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부모가 과거에 향유했던 권위를 자식에게 양도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화의 과정을 밟을 수가 있다. 스핑크스가 오디푸스를 시험했던 수수께끼의 핵심도 그와 같은 변화와 역전의 역설에 있다. 네 발로 걸었던 유아가 두 발로 걷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상향적 과정은 동시에 두 발로 걸었던 성인이 세 발로 걸어야하는 노년으로 쇠퇴하는 하향적 과정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맞물려 있다.

부모 세대는 자식의 세대의 눈에 자신이 세 발로 걷는 늙은이로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라이너스는 아들에게 살해되어야 했다.

 

13) 특히 신경증환자들이 그러하다(Berhaeghe’s “Enjoyment and Impossibility” 40-42)
14) Sheleff는 1960년대의 학생데모를 기성세대 탈권위하고 초자아를 폐위하는 움직임으로 이해하였다(4). Erich Fromm이 주장하였듯이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부모와 자식의 가족 로맨스가 아니라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Sheleff 4; Johnson and Price-Williams 16).
15) Oedipus the King 46. 이것을 Sheleff는 Laius complex라고 명명하였다.

 


세대를 거치면서 오디푸스적 상황이 역오디푸스적 상황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논의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앞서 논의했던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도 양자의 차이가 규명되면서 더욱 커다란 구체성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역오디푸스는 다름 아니라 전근대와 근대가 단절되는 지점을 명명하는 지점이면서 근대가 증상적으로 발현되는 지점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오디푸스적 콤플렉스에서 모든 잘못과 실수의 궁극적 소재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에게로 귀속된다. 부모는 언제나 법이며 진리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그릇될 수도, 잘못을 범할 수도 없다. 가부장제 사회를 대변했던 노아는 자신의 미덕이나 악덕, 미와 추, 건강과 질병, 젊음과 늙음의 여부와 무관하게 언제나 가장으로서 존중되어야 했다.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잠을 잤던 어리석은 행위도 그의 권위에 흠집을 내지는 못한다. 그는 몸이 아니라 명령이며 법, 상징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와 선을 구현하기 때문에 가장이 아니라 가장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진리와 선의 구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식인 함이 아비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역오디푸스적 상황에서는 그러한 부자의 관계는 180도로 전복이 된다. 필자는 노아와 라이너스라는 두 가장 가운데서 누가 더욱 부도덕한 인물이었는지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아전인수격으로 함을 저주하고 폐적했던 데 반해서 라이너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로 자식에게 살해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구약 노아의 신화에서 가부장적 상징적 질서는 철옹성처럼 견고하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충격도 심각한 위협을 가하지 못한다. 가장답지 못한 노아의 행동으로 흔들릴 수 있었던 가부장제는 자식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더욱 더 견고하게 복원이 된다.

그러나『오디푸스 왕』에서 상징적 질서는 이미 와해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라이너스는 원칙적으로 오류가 없는 가장이 아니라 오만하고 성급한 결점 투성이 늙은이로, 그는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상상적 몸이며, 기호라기보다는 지시대상이고, 무조건적 법이 아니라 호오(好惡)의 대상이다. 상하 위계의 계단이 아니라 위계가 없이 평탄한 길에서 자식을 대면한 그는 가장의 권위로 자식을 복종시키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저주하거나 파문하고 파적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공과 체력으로 경쟁하고 싸워서 자식을 굴복시켜야만 한다.
그가 만일 노아라면 그는 권위의 외투를 상실한 볼품 없는 노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가치와 세계관도 상상적 질서에 의존하게 된다. 자식이 젊고 건강하며 아름다운 몸이라면 부모는 늙고 병들고 비루한 몸이며, 자식이 진선미라면 부모는 거짓이며 악이고 추함이 된다.16)

 

16) 이것은 20세기에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방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The New Family Romance”에서 Jon Schiller는 20세기의 가족 로맨스에서 자식이 원칙적으로 결함이 없고 통제가 불가능한 반면, 부모는 자신이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하였다. 또 이러한 가족 로맨스의 변천사에 대해서 Barbara Ehrenreich, For Her Own Good, 특히 7장 Motherhood as Pathology(211-65)를 참조하기 바람.

 

 

만일 프로이트의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가장의 권위를 복원하려는 시도라면 그것은 실패한 시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이 개념을 도입했던 것은 1910년이었다(Laplanche and Pontalis 283).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막스 베버(Max Weber)는 1915년에 쓴 「종교적 현세거부의 단계와 방향에 대한 이론」 (“Religious Rejections of the World and Their Directions”)에서 현대 사회를 탈권위적이며 심미적인 사회로 규정하였다. “윤리적 판단에 대한 책임의 거부는 실제로 윤리적 가치판단을 심미적 판단으로 전환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부도덕하다, 사악하다’ 대신에 ‘무미건조하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 . 윤리적 보편주의자의 자세와 달리, 윤리판단을 심미적 판단으로 전환하는 자세는 [우리] 시대의 공통된 특징이다”(Max Weber 6:『탈주술화 과정과 근대』252).17)
베버에 따르면 과거에는 인간은 보편적 도덕적 규범—라캉이라면 아버지의 법이라 명명했을 것이다—에 구속되었으며, 그러한 규범에 따라서 인간의 관계와 만남, 소통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당시에 호오(好惡)의 심미적 판단이 부재하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 일상을 지배하였을 심미적 판단은 그러나 상위 범주로서 도덕적 규범에 종속되어야 했다. 아버지는 몸이 아니라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접어들고 상징적 질서가 약화되면서 후경에 지나지 않았던 심미적 판단은 이제 전경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하였다.18) 이 점에서 베버가 현대 사회의 본질적 특징으로 강조했던 탈주술화와 세속화의 경향도 그러한 탈권위화, 탈상징화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노아의 외투가 벗겨지면서 그동안 은폐되었던 몸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그의 가부장적 권위의 탈주술화, 신성한 몸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테일러(Charles Taylor)는『세속 시대』(A Secular Age)에서, 그리고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현대성과 자아정체성』(Modernity and Self-Identity)에서 각자 철학적・사회학적 관점에서 탈주술화를 종교적·우주적·사회적 맥락으로부터의 탈맥락화로서 설명하였다.

사회정치적 질서에 의해 정체성이 형성되었던 인간이 이제는 그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베버가 주장하였듯이 이러한 개인은 심미적인 성향이 지배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 점에서 18세기 후반에 학문으로서 미학이 출현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상징적 질서가 와해되고 위계와 권위, 전통의 후광이 사라지면서 개인은 이제 호오의 상상적 질서에서 참조점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쉴러(Friedrich Schiller)는 아름다움이 감성과 지성, 형식과 내용의 균열을 통일하는 궁극적 삶의 진리라고 주장하였으며, 칸트(Immanuel Kant)는 미적 경험이 주관적 감정의 변덕과 창백한 오성의 엄격성을 화해시켜준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칸트에 따르면 미학은 상상적 질서와 무관하며, 좋고 싫어하는 취향은 미적 범주가 아니라 매력(agreeable)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19) 그럼에도 그가 미적 판단력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은 탈권위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근대사회의 성격과 같은 궤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근대에 발생한 이성과 감성의 분리가 미적 경험에 의해서 통일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하는 것은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가부장적 전근대사회의 모토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Freud,Moses 118)였다면 탈권위적 현대의 모토는 “아름답기 때문에 믿는다”(Credendum est quod pulchre est)이다.20)

권위적 인간이 미적이며 나르시시즘적 인간으로, 문자가 몸으로, 금지의 명령이 쾌락의 추구로 바뀐 것이다.


오디푸스적 상황이 역오디푸스적 상황으로 전환되면서 생활 세계의 심미화가 뒤따르게 된다. 칸토르비츠가 언급했던 두 개의 몸으로서 상징적 몸과 상상적 몸이 후자로 단일화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권위적인 몸이 아니라 심미적인 몸이다. 과거에 사회적 질서와 위계의 토대가 되었던 연대기적 나이나 계급의 차이보다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가 더욱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오디푸스 상황에서는 노아의 외투를 상실한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경쟁적으로 모방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h)는 이러한 성향에 나르시시즘적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르시시즘적 사회에서 부모 세대는 노년으로 접어들기도 훨씬 이전에 노령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기 시작하며 젊은이들을 흉내하기 시작한다(256). 혹시나 구세대로 취급되지 않기 위해서 젊은 몸매와 이미지를 유지해야하는 것이다. 중년의 위기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248).

 

17)『탈주술화 과정과 근대』을 영어판과 대조해서 문맥에 맞게 약간 수정을 가했음.
18) 이에 대해서는 테일러의『세속시대』에서 유미주의와 블룸즈베리 윤리학에 관한 설명(403-405), 그리고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에서 “개인적 애착과 심미적 쾌락에 입각”한 정의주의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기 바람(37). 유미주의적 윤리관에서는 미가 곧 진이며 선이다.

 

 

II

 

가부장적 상징계의 파탄과 역오디푸스적 상황은 필자가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여성의 몸이라는 주제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상징적 몸의 소멸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커다란 파장과 변화를 몰고 왔다.

먼저 가장의 권위는 여성의 몸을 가정의 경제와 역할, 모성, 생식의 기능으로 축소하고 제한하는 장치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 제도에서 아버지가 탈신체화된 권위의 자리이며 기능이었듯이 어머니도 탈신체화된 모성의 자리이며 기능이어야 했다.

가장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몸도—오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자식들에게 성적인 몸이 아니라 상징적 모성으로 경험된다. 모성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탈신체화된 어머니의 이미지는 전통적 가족 제도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 이념이었다. 일찍이 어머니의 딸이었으며 여자였던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여자임을 포기하고 아내와 어머니라는 상징적 역할과 동일시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면서 몸은 아름답게 갈고 다듬거나 쾌락을 향유하는 몸이 아니라 가정과 육아를 위해서 마모되어야 하는 기능적인 몸으로 바뀐다.21)

왕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두 개의 몸이 있었다. 하나가 가부장적 제도에 의해 의미화된 상징적 몸(어머니)이라면 다른하나는 아직 의미화되지 않은 성적인 몸, 혹은 상상적 몸(여자의 몸)이다. 섹슈얼리티도 전자에 종속되고 자손 생산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상징적 질서가 점차 약화되면서 여성이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가족이나 번식, 생산 등의 역할에 가려져 있었던 몸이 그러한 맥락에서 벗어나면서 새롭게 전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섹슈얼리티도 가족이나 출산이라는 구속에서 풀려나 보다 자유롭게 부유하는 “순수 관계”(기든스,『현대 사회의성』205-236)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역오디푸스적 상황과 관련해서 이러한 변화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푸코가『성의 역사』(History of Sexuality)에서 구분하였던 섹슈얼리티와 결연(alliance)의 차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푸코에 의하면 섹슈얼리티의 배치와 결연의 배치, 몸의 배치와 제도의 배치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자가『성의 역사』의 2권의 제목『쾌락의 사용』(The Use of Pleasure)처럼 몸을 통한 쾌감의 사용과 관계된다면 후자는 “결혼의 체계, 친족 관계의 확정과 발전, 이름과 재산의 상속”(106)과 관계를 가진다.

전자가 몸의 자유로운 결합과 접속이라면 후자는 혼인과 상속을 비롯해서 그것의 결과와 효과를 법적・제도적으로 확정짓는 장치이다. 푸코는 전근대사회에서는 다양하게 배치될 수 있었던 양자의 관계가 18세기 이후로 접어들면서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자유롭게 표출될 수도 있었던 성적인 욕망이 근대사회에서는 적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의 관계, 그것도 자손의 출산이라는 목적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고 종속되어야 한다는 규범이 부르주아적 성도덕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덕의 새로운 윤곽은 동성애가 허용되었던 고대 희랍 시대의 섹슈얼리티 배치와 비교되면 분명해진다. 당시에 결혼한 남자들은 화류계의 여자들은 물론이고 동성의 남자와의 자유롭게 성적 결합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을 금하는 도덕적 규범이나 법적 제재가 없었다.

자손의 출산과 가업의 계승을 위해서 아내와 결혼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적인 쾌락이 반드시 아내와의 관계로 제한되지는 않았다. 결연의 배치가 남자인 남편과 여자인 아내(및 가문)의 제도적인 선분으로 이루어져야 했다면 쾌락의 배치는 복잡하고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관행에 따르면 남자에게 적합한 결혼연령은 30에서 37세, 여자의 결혼 연령은 16-18세로, 바람직한 남녀의 결합은 여자가 남자보다 17살 이상 연하이어야 했다(Use 121). 결연의 배치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범에 묶이지 않은 섹슈얼리티의 배치는 남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 사이에 무수한 많은 결합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연상의 남자와 연하의 여자, 연하의 남자와 연상의 여자, 동년배의 남자와 여자, 연상의 남자와 연하의 남자, 동년배의 남자 등으로 몸의 결속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부르주아 사회로 접어들면서 성적으로 문란한 귀족과 차별을 꾀해야 했던 부르주아들은 이처럼 다양한 성적 결속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부르주아는 섹슈얼리티를 부부 결연의 배치 속으로, 즉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만 제한하였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패밀리 로맨스는 섹슈얼리티가 가족의 핵심으로 유입이 되면서, “가족이 가장 왕성한 섹슈얼리티의 장소”(109)로 자리를 잡으면서 생겨난 결과라고 한다.

 패밀리 로맨스는 한편으로 섹슈얼리티를 자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오디푸스콤플렉스는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 된다. 섹슈얼리티가 가족의 안으로 배치되면서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성적 결합의 경우의 수를 제한하기 위한 방어 장치가 오디푸스 콤플렉스인 것이다(109, 111, 130).


그러나 푸코는『성의 역사』에서 제시한 섹슈얼리티 및 결연 배치의 지형과 오디푸스 콤플렉스의 관계가 갖는 의미와 성격을 끝까지 추적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양자의 관계를 역사적 지평에 올려놓고 그 관계의 변화와 위상의 차이를 간단히 소묘했을 따름이었다.

양자의 관계를 주제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반오이푸스적 윤리적 지평을 개척한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앙띠 오디푸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에 따르면 몸은 푸코의 섹슈얼리티의 배치처럼 원칙적으로 무수한 결합과 접속이 가능하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몸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배타적 결합(either A or B)이 아니라 이것이든 저것이든(either A or B or C . . .)의 총괄적 결합이라는 지향성을 가진다.

남자의 남성적 부분은 여자의 여성적 부분과 소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자의 남성적 부분이나 다른 남자의 여성적 부분, 아니면 다른 남자의 남성적 부분 등과 소통할 수 있다(69). 이러한 총괄적 결합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배타적이고 부정적 결합으로 전환시키는 사회적 억압의 장치가 바로 오디푸스적 삼각형이다.

오디푸스적 삼각형은 라캉의 “아버지의 No”처럼 자유롭고 자발적인 결합의 네트워크에 금지의 명령을 부과함으로써 욕망을 하나의 길로 흐르도록 제한한다.22) 이때 욕망의 주체는 부모와 자식, 남자나 여자,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 등의 어느 한 편으로 영토화되고 위계화되면서 가능한 결합의 수는 가부장적 질서로 급격히 수축되기 시작한다.

가령 아들은 어머니의 몸을 욕망하면 안 되며, 어머니의 몸은 그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여자의 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오디푸스적 금기는 동시에 부정적이면서 긍정적(71)으로, 어머니나 어머니의 세대와의 접속은 금지하지만 누이를 제외한 누이의 세대의 여자와의 접속은 긍정적으로 허용한다.

욕망의 주체로서 어머니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남편과의 접속은 허용되지만 아들이나 아들의 세대와의 접속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족의 관계가 사회로 확대되면 오디푸스적 삼각형은 세대를 가로지르거나 동성의 몸과 몸의 결합을 금지하는 규범으로 발전한다. 사회화된 주체는 욕망을 희생하고 결핍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결핍이나 부정이 아니라 생산이며 긍정이고, 그것은 성이나 나이, 계급 등의 구획에 제한되지 않는 탈영토화이며, 접속하는 신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적 상징계가 와해되고 있다면 오디푸스적 삼각형에 묶여있던 욕망이 탈영토화되고 몸과 몸의 다양한 접속이 이미 현실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과 모성의 이름으로 탈신체화되었던 몸이 탈상징화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도 이제 재신체화되고 있지 않을까? 앙티오디푸스적 테제를 우리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오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대항 담론의 층위에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많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가부장제의 쇠퇴가 이미 현실의 한 징후라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푸스는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 간섭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진단으로서 보다 정확한 의미를 갖는다. 차이와 경계의 소멸은 오디푸스적 삼각형이 약화되는 가시적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23) 정신분석에서도 오디푸스적 삼각관계가 아니라 전오디푸스적 유아와 모녀의 이자관계가 부각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Loewald 753). 또 「어른 아이와 아이같은 어른」(“The adult child and the childlike adult”)이나 『공간의 부재』(No Sense of Place)에서 메이로위츠(J. Meyrowitz)는 현대 서구사회의 특징으로서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소멸하는 경향을 손꼽았다.

어른은 아이다워지고 아이는 어른다워지면서 의복이나 행동 방식, 어투, 생각 등도 점차 하나로 통일되고, 나이와 성, 선생과 제자 등의 구별이 소멸하면서 “타부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기”(92)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녀의 성역할(gender)의 차이는 물론이고 성적 차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따르면 남녀의 성차도 사회적 수행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성적 결합의 주체는 자신을 남성 혹은 여성, 혹은 어른이나 아이 등으로 배타적 동일시를 하지 않으면서 성이나 나이 등의 구별을 초월한 자유로운 결속의 관계로 접어들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다나 헤러웨이(Donna Harraway)의 탈휴머니즘적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면 인간과 기계의 경계도 점차 이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즉 다른 것과 접속하여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욕망하는 기계는 은유나 재현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속하게 된다.


우리는 탈상징화되면서 여성의 몸은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과 접속의 네트워크에 놓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연의 배치에서 독립하고 가족 로만스의 울타리에서 풀려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어떠한 새로운 위상과 해방적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일까?

가부장적 기표로 환원되지 않은 여성의 몸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어머니, 딸, 아버지, 연인, 여자, 남자, 아이가 되기도 하고, 또 다양하게 변화하는 관계의 네트워크에 따라서 의미가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는듯이 보인다. 고대 희랍시대의 남자들이 그러했듯이 나이가 많거나 적은 동성, 나이가 많거나 적은 이성, 날씬하거나 뚱뚱한 사람,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 등과의 전방위적인 무수한 접속이 가능한 듯이 보인다.

이때 그녀의 몸은 접속되는 지점에 따라서 모성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하고 연인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추함이기도 하고 프로테우스처럼 무수한 변신의 흐름에 내맡길 수 있는 듯이 보인다. 현실에서 이러한 이미지에 비교적 근접한 모델을 찾는다면 아마도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가『사모아의 젊은이들』(Coming of Agein Samoa; a Psychological Study of Primitive Youth for Western Civilisation)에서 묘사한 사모아의 사회가 될 것이다. 미드는 사춘기에 생물학적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모아의 청소년들이 유럽 사회처럼 이에 상응하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가부장제가 존재하지 않는 사모아섬에는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비롯해서 그러한 심리적 스트레스도 부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그 이유는 탈영토화된 사회적 관계와 접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집이나 재산, 가족 로맨스적 관계의 울타리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살던 부모나 친척, 남편이 싫어지면 언제라도 나무 베게와 잠자리용 돗자리를 하나를 가지고 다른 거처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253-54). 환대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숙식을 요구하는 주민을 거부할 수가 없다(111). 결연도 영원히 고정되는 구속이라기보다는 자유롭게 묶고 자유롭게 풀릴 수 있는 매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4)

 

21) 이를 테면 아내는 욕망의 주체라기보다 법적인 존재이며 남편은 아내의 그러한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사람이다(Foucault, II: 163-64). 반면에 화류계 여성은 성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고대 희랍 시대에는 아내의 외모 꾸미기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내의 아름다움은 지혜로운 살림에 있어야 했다(162).

22) 가족 로맨스를 사회와 역사의 지평으로 확대했던 들뢰즈는 아버지의 이름을 “모든 역사의 이름”(56)으로 대체하였다.

23) 지라르는 오디푸스 콤플렉스의 약화는 모든 차이와 위계, 경계의 해체를 불러온다고 주장하였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경쟁적이거나 평등한 관계로 바뀐다는 것이다. René Girard, Oedipus Unbound (Stanford: Stanford UP, 2004)를 참조하기 바람.

24) 이것은 아프리카 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아체베(Chinua Achebe)의『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를 참조하기 바람.

 

 

III

 

그러나 원칙적으로 가능한 듯이 보이는 탈오디푸스적 상황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부장적 법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재신체화된 여성의 몸은 대중매체나 문화산업, 매스 미디어에게 종속되기 시작하였다.

몸의 재신체화는 푸코적인 의미에서 “존재의 미학”이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의 배치로 귀결되는 대신에 서론에서 언급하였던 아름답고 젊은 몸의 이미지의 지배 아래 놓이기 시작하였다.
앞서 필자는 푸코를 빌어서 계급적 차이를 강조했던 구체제가 몰락하면서 섹슈얼리티에 근거한 새로운 차이가 사회적 공간에 기입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다. 과거에 신분이나 가문에 의해 결정되었던 개인의 정체성이 19세기 이후로는 섹슈얼리티에 의해서 규정되기 시작하였다.

권위와 계급의 차이가 성적 차이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차이는 젊거나 늙은 몸, 아름답거나 추한 몸, 날렵하거나 뚱뚱한 몸의 차이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성적인 차이보다는 미적인 차이가 더욱 커다란 중요성은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역오디푸스적 상황을 구성한다.


역오디푸스적 상황에서 오디푸스적 삼각형이 전복된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욕망의 대상을 부모의 몸이 아니라 부모의 권위와 상징 자본으로 조율하게 된다. 아이들은 상향적으로 부모를 모방하면서 부모처럼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오디푸스적 상황에서는 욕망하고 지향하는 대상은 탈신체화된 권위가 아니라 몸이다. 권위를 상실한 부모들은 하향적으로 자녀들의 몸을 모방하고 그들처럼 아름답고 젊은 몸매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때 상향적 운동과 하향적 운동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세대 간의 간격과 차이도 급격히 축소된다. 나이나 권위에 의한 세대 간의 차이가 점차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대적 차이라기보다는 이상적 몸 이미지에의 근접성여부이다. 이상적 몸 이미지에 가깝다면 세대를 가로지르거나 세대와 무관한 성적 몸들의 자유로운 접속과 결합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오디푸스적 삼각형에 묶여있던 성적 결합의 금지도 점차 이완되기 시작한다.

부모의 세대나 자식의 세대라는 연대기적 범주가 아니라 젊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심미적 범주가 결속의 더욱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젊음’도 나이가 아니라 심미적인 범주에 속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아름답기 때문에 젊은것이지 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연대기적 나이보다 미학적 나이가 우선권을 갖는 것이다.

 

   내용

   오디푸스 콤플렉스

   역오디푸스 콤플렉스

 이데올로기적 매개

 가부장제도

 가부장제도의 쇠퇴

 지향성

 상향적(윗 세대를 향해)

 하향적(아래 세대를 향해)

 몸의 위상

 탈신체화:상징적 몸

 신체화: 상상적 몸

 목표

 권력, 문화자본

 젊고 아름다운 몸, 육체자본

 세대차이

 거리

 인접

 

역오디푸스적 상황은 여성, 특히 어머니 세대의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해방—물론 이상적 몸 이미지에 구속되기는 하지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오디푸스적 상황에서 어머니가 아이의 욕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면 클라인의 어머니-자식의 이자관계처럼 역오디푸스적 상황에서 어머니는 욕망의 주체가 된다.

욕망하는 몸으로서 어머니는 타자의 몸을 욕망하며 그러한 몸을 모방하며 닮으려고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처럼 모성이 아니라 여자로, 혹은 관음증적 여자로서 남자의 몸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다양한 접속을 욕망하고 허용할 수도 있다.25)

달리 말해서 전근대사회의 가장들처럼 이제 어머니도 오디푸스적 삼각형에 묶이지 않은 외설적 주체가 된다. 가부장제의 아버지, 노아는 공식적으로는 탈신체화된 권위로 군림하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언제나 외설적으로 자신을 향유하는 주체였다. 예컨대 고대 희랍 남자들의 섹슈얼리티는 결연의 배치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을 허용하는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가부장적 질서에 놓인 아내들과 자식들은 그러한 외설적 가장의 몸을 보면서도 보지 않는 척을 해야 했다. 보이는 몸을 보는 순간에 함처럼 저주나 파문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무제한적으로 섹슈얼리티를 향유하는 아버지의 외설적인 모습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왕정복고 시대의 풍속극이나 몰리에르(Molière)의 희곡들을 비롯해서 발자크(Honorè de Balzac)와 에밀 졸라(Emile Zola)의 소설들은 그와 같이 공공연한 비밀의 사례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외설적 아버지가 전경화되어 있다. 아버지들은 딸 세대의 젊고 아름다운 몸에 끊임없이 탐닉하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이들 희곡과 소설, 귀족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버지의 몸은 신분이나 돈의 매개를 통해서 젊고 아름다운 몸과 접속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탈신체화되어야 할 권위의 몸은 언제나 성적인 외설적인 몸이었던 것이다.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하는 노아는 술에 취해서 벌거벗은 몸으로 잠을 자고 있지 않았던가. 이때 역오디푸스 콤플렉스는 오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서 은폐되었던 가장의 외설적 몸을 보여주는 진실이 된다. 그리고 보면서도 보지 않는 듯한 연출의 무대가 접혀지는 순간에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그의 수모가 시작이 된다.

그의 외설적 자리는 이제 아내의 자리와 교차대구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된다. 모성으로 억압되었던 어머니가 이제 외설적 욕망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X세대 엄마,” “언니로 보일 정도로 동안인 엄마,” “친구 같은 엄마,” “줌마렐라”와 같은 새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는 그러한 욕망이 드러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현대의 대중 매체에 빈번히 등장하는 새로운 어머니의 상의 진실은 어머니와 딸 사이의 상징계적 의사소통의 관계에 있지 않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친구 관계라기보다는 연적 관계라고 말해야 옳다.『경축! 우리 사랑』에서 딸의 남자를 탐하는 어머니나『바람난 가족』에서 한 세대 연하의 남자와 관계하는 유부녀의 로맨스는 단순히 오락용 코메디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만 바꾼다면 몰리에르의 희곡과 마찬가지인 섹슈얼리티의 배치를 부여주기 때문이다. 모성(가족, 출산)의 외투를 벗은 외설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비난 영화나 광고와 같은 대중문화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1990년대 이후로 여성소설도 모성의 어머니에서 외설적인 어머니를 향해 유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갇힌 어머니는 딸에 대해서도 부드럽고 자상하지만 엄격하고 권위적인 거리를 유지하였다면, 90년대 이후로 친구 같은 어머니 상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외설적 어머니의 모습도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전혜성의 「마요네즈」에서 어머니의 유일한 관심은 아름답고 젊은 외모를 유지하는 데 있다. 모성으로 탈신체화되었던 어머니가 여자로 재신체화되는 것이다. 더구나 젊고 아름답게 되고 싶은 욕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노년의 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탈권위화된 사회에서는 나이든 사람도 자신을 여전히 젊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벗으면 젊은 본 얼굴이 나타나는 가면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다양한 노화방지의 프로그램이나 화장법을 비롯해서 은퇴 후의 나이를 “창의적인 나이”나 “제 2의 청춘”으로 칭하는 새로운 명명법이 그러한 성향을 대변하고 있다.

 “노령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회,” 노령이라는 나이를 아예 사전에서 지워버리려는 사회26)(라쉬 61)는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몸을 경쟁적으로 모방하는 역오디푸스적 특징을 지닌다.

라쉬의『나르시시즘의 문화』에는 다음과 같은 노부인의 소묘가 소개되어 있다.

 

“50세를 훨씬 넘긴 어느 보스톤의 부인은

. . . 우아한 로마식 팔라를 입고 미니 스커트와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또 60대의 한 남자는 엉덩이에 꼭 끼는 바지와 홀치기 염색을 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256).

 

25) Susan Bordo, The Male Body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99)를 참조하기 바람.

26) 이에 대해서는 바뱅의『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의 1장, 「포스트데스 Post-Death」를 참고하기 바람(13-42).

 

 

인용 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