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심리학

시선을 중심으로 본 주체와 욕망의 메커니즘

rainbow3 2020. 4. 28. 03:55


시선을 중심으로 본 주체와 욕망의 메커니즘

-쟈크 라캉의 시각이론을 중심으로


김현진(조선대)

 

 

I. 들어가는 글

 

본 논문에서는 ‘보기’, 즉 시각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주체, 그리고 욕망의 구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각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다른 어느 감각보다도 우월하다는 것, 그리고 성서에서도 이미 “안목의 정욕”1)을 경계하고 있듯이 ‘보기’의 행위가 인간 욕망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한편,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시각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그것이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 혹은 사물이든 간에)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본다는 것은 인간 주체의 형성, 혹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주체 내지 상호주체성의 문제로 연결이 된다.


내가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인식하는가 하는 인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철학적 사유에서 ‘본다’는 것은 바로 ‘생각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안다’는 뜻으로 이어져 왔다.

 따라서 시각은 모든 인식론적 탐구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특별히 근대라는 시대에서 두드러졌고 그렇게 시각의 지배를 받았던 근대는 철저히 시각중심적 시대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2)

그런데 데카르트의 경우를 두고 흔히 말하듯, 근대의 주체에 관한 사유에서 그 한계가 지적되는 것은 시각 문제에 대한 이해에서 당시 보여주었던 제한된 사고와도 얽혀있다고 볼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는 시각적 대상에서 단지 보이는 것만을 인식 대상의 전부라고 파악하는 데에서 온 인식의 한계와 함께 또한 주체 이해에서의 결정적인 오류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제한된 인식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주체의 이해를 여기서 오류라고 단정하는 것은 굳이 주체의 해체를 논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사유에 힘입지 않아도, 눈앞에 보이는 어떠한 대상만을 인식 가능한 모든 것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대상에 대한 눈 먼 사유를 낳고 세계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악하지 못하고 보이는 부분을 전체로서 여기는 그러한 인식의 절대화는, 이성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 근대적 주체의 철저한 의식 중심주의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것은 환상에 사로잡힌 독선적인 주체를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시각적 폭력 내지 인식의 폭력을 야기하기도 한다. 특별히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규범, 권력에 의한 사회적 통합의 장치는 ‘보기’의 범주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폭력이 극대화된 결과라 할 수 있겠다.3)


이와 같은 인식 속에서 본 논문은 시각 영역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조에 주목하며 또한 그것이 인간의 주체와 욕망의 형성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각에 관한 근대의 사유에서 놓쳤던 점, 즉 보이지 않는 것의 출현과 주체의 관계, 그리고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욕망의 메커니즘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보기의 문제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와 레비나스 Immanuel Levinas,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 Ponty 등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또한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마련한 자크 라캉 Jacques Lacan에게서는 핵심적인 연구 주제의 하나가 되어 왔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들의 사유는 어쨌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출현,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주체의 형성 과정, 즉 현상학에서 말하는 이른 바 ‘심층현상 Tiefenphänomen’4)이라 할 수 있는 지각의 범주를 들춰내고 있다는 데서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라캉은 ‘보기’의 범주를 ‘눈 Auge’과 ‘시선 Blick’이라는 융합 불가능한 개념들로 설명하며 그 틈새에서 인간 주체의 분열과 욕망의 구조를 포착하고자 했다. 그는 ‘시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에 속하는 어떠한 것을, 즉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주체 내지 무의식, 또한 욕망의 구조를 밝히고자 했다. 모순적 개념인 눈과 시선에 내재된 아포리아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개인의 정신세계뿐 아니라 인간 상호관계 속에 내재한 권력과 욕망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설득력 있는 하나의 사유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은 일단 자크 라캉의 시각 개념을 수용하는 가운데 주체와 욕망의 심리학적 구조를 고찰하는 것을 논의의 범위로 삼았다. 이로써 문학과 매체 분야 등 인문학 영역의 작품 이해와 구체적인 분석5)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 본 논문은 2005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KRF 2005 075 A00090).
1) 신약성서, ‘요한일서’ 2장 16절 참조.
2) 근대가 시각중심적이었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일단 근대란 르네상스 및 과학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망원경과 현미경 등의 시각적인 것에 대해 특권을 부여했다는 의미에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대의 특징이 어떠한 시각적 주체의 주관적 눈에 비친 표상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의미에서이기도 하다. 마틴 제이, 모더니티의 시각 체제들, 실린 곳: 헬 포스터(엮음)(최연희 옮김), 시각과 시각성,경성대학교 출판부 2004, 21 62쪽 중 21쪽; 데이비드 마이클 레빈 엮음(정성철, 백문임 옮
김), 모더니티와 시각의 헤게모니, 시각과 언어, 2004, 15쪽 참조.
3) 또 한편으로는 미디어 이미지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에서도 그러한 시각적 폭력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부인할수 없다. 비디오, 사진, 텔레비전, 영화 등의 매체로 인해 오늘날은 시선에 의한 감시의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감시카메라, 도청장치 등 감각을 조장하는 기술적 장치들이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감각적 영역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또한 백화점 진열장이나 사진, 영상, 또한 (여성의) 나체까지 상품화된 구경거리로 만드는 대중문화 속에서 시선은 욕망의 직접적인 동인이 된다. 이미지에 의한 주체의 상실을 야기하는 그러한 현대의 상황 역시 또한 보기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 극대화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4) ‘타자의 시선’(사르트르), ‘타자의 얼굴’(레비나스), ‘보이지 않는 것’(메를로 퐁티), ‘보려는 충동’(프로이트), ‘시선’(라캉) 등을 이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Vgl. Rudolf Bernet, Zur Phänomenologie des Blicks bei Lacan und Merleau Ponty, in: Zeitschrift für Psychoanalyse. Freud・Lacan, 15. Jg. Heft 49 (2000/III), Basel, S. 121 144. 사르트르와 라캉이 말하는 ‘시선’의 개념에 관해서는 이하에서 논의할 것임.
5) 예컨대 독일문학권에서 보면, 토마스 베른하르트 Thomas Bernhard의 소설 『벌목, 흥분Holzfällen. Eine Erregung』(1984)을 통해서는 서술자의 시선에서 나타나는 욕망과 불안한 주체를, 엘프리데 엘리네크 Elfriede Jelinek의 『피아노치는 여자 Die Klavierspielerin』(1987)에서는 여성의 자가성애적 시선을 통한 남성적 주체의 전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유디트 헤르만 Judith Hermann의 단편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1998)에서는 시선의 주체와 객체의 전도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상호 권력 관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매체예술 분야에서 보자면, 비디오 예술작품인 비토 아콘치 Vito Acconci의 『중심 Centers』(1971)에서는 카메라와 모니터, 기계의 눈과 주체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예로서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포토 로망인 『시선의 권리 Recht auf Einsicht』에서는 사진이란 매체에서 볼 수 있는 시선의 권리와 권력의 역학관계를 살펴볼 수 있겠다.

아콘치와 데리다의 작품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Lydia Hartl, Yasmin Hoffmann u. a. (Hg.),Die Ästhetik des Voyeur, Heidelberg 2003, S. 7 9; 32 36. 이러한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위한 하나의 이론적 토대로서 본고에서는 눈과 시선의 문제에서 출발한 주체와 욕망의 심리학적 구조 연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II. 눈과 시선, 주체의 분열

 

1. 거울이미지와 '눈'

 

인간이 자신이나 타인, 혹은 사물과의 관계에서 갖는 첫 접촉은 시각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시각적 경험은 우리의 주체의 형성(내지는 해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각과 주체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메를로 퐁티나 사르트르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도 접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적 이론을 통해 시각과 주체, 욕망의 세밀한 구조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초기 주체 이론에서 핵심이 되는 ‘거울단계 Spiegelstadium’라는 개념에서부터 이미, 인간의 주체를 형성하는 첫 번째 동인이 거울을 ‘바라보는’ 데서 생겨남을 말해준다.

주체 내지 무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 라캉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독자적으로 구분하여 ‘거울단계’ 이론을 제시했다.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본고의 논의를 위해 다시금 간단히 설명을 시도하자면 다음과 같다.

 

라캉에 의하면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거울을 바라보는 아이는 이미 자신의 육체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 상을 만들어낸다. 신체적 능력은 극히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인지가 신체의 운동 능력보다 훨씬 앞서있는 이 시기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 앞에서 신체적 통일성을 예감하며 그 통일된 상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환호한다. 아이의 육체가 그에게 아직 부여할 수 없는 통일성과 지속성, 전능함을 확신시켜주는 이른바 거울이미지 Spiegelbild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는 정신분석적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이상적 자아Ideal Ich’에 사로잡힌다.6) ‘이상적 자아’란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자신의 신체를 그야말로 이상적인 완전한 모습으로 인식하는 허구적 자아로서 “타자와의 동일시의 변증법 속에서 객관화되기 이전의, 또한 언어가 보편적으로 그에게 주체의 기능을 재현해주기 이전”7)의 ‘나’에 해당하는 형태이다.

예컨대 어머니는 아이에게 거울이미지의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이미지의 세계에서는 아이의 신체와 어머니 신체 사이의 확실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8)

아이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의 ‘나’란 실제의 나 자신이 아닌 어떠한 다른 주체가 된다.9) 거울에 비친 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그것과 동일시하는 이 ‘상상적’, 혹은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특징은 타자의 존재, 다시 말해 타자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대상을 그저 보기만 할 뿐, 대상 또한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가 인식하는 것은 마치 거울을 보며 그가 상상하는 자신의 총체적인 상과도 같이 그의 상상적 자아에 의해 만들어진 극히 주관적인 세계이다 시선의 교차를 알지 못하는 . 그러한 일방적인 바라봄의 상태가 라캉이 말하는 ‘눈 Auge’이다. 눈의 이러한 상상적 세계는 “주체가 그렇게 돌이켜보며 상과 마주하는 순간 오직 하나의 이미지, 즉 주체가 거울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예감된 이미지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10)에 자신에 대한 앎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오인 Verkennen’의 구조에서 출발한다.11)

그렇게 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피드백 되어 허구적인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아는 애초부터 소외된 채로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라캉은 그러한 오인을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 Ich sehe mich mich sehen”는 착각으로 설명한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말에 내재된 형태로 나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주체의 특권은 내가 지각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내가 재현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주는 바로 이 이분법적 반영관계로부터 나오는 듯하다. 그러므로 세계는 또한 어떠한 추정된 이상화로써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내게 나의 재현만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12)"

 

아이가 거울 속의 상을 완전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바로 자신의 실체로 착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보이는 것 외에는 눈먼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게로 향한 타자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거울 속의 허구적 이미지가 바로 그 자신이며 또한 세계의 전부이다. 마치 땅속에 머리를 박고 꼬리를 치켜든 타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다른 타조를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이,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뿐이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러한 자신을 또한 그가 바라본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거울 속 이미지와의 동일시, 혹은 어머니와의 동일시 속에서, 즉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가져다 주는 충만한 만족감과 상상에 의해서 허구적으로 형성되는 그의 주체는, 프로이트의 개념에 따라 볼 때 아직 오이디푸스의 과정을 겪지 않아 ‘아버지의 법’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어머니와의 이자 관계 속에서 꿈꾸고 있는 어린아이의 정신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오인에서 출발한 상상적 주체의 형성과정은 보이지 않는 것, 이성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결코 인식하지 못한 근대적 주체의 철저한 의식 중심주의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이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파악하는 데서 오는 의식의 일종의 자기충족성13)을 가져오는 ‘눈’은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주체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메두사의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사악한 시선’14)이 되어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거울 이미지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이러한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의식을 “마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특성을 부여받은 절대존재가 있다는 플라톤적 시각에서 발견될 수 있는 환상”15)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면, 데카르트적 ‘사유하는 주체’가 지니는 의식의 충만함 역시 일종의 오인에서 출발한 철학적 전통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현상은 보이지 않는 것, 의식에서 배제된 것, 이른바 ‘심층현상’이라 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 사실상 인간 주체의 형성에 본질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간과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시각적인 심층현상을 사르트르나 라캉의 용어를 빌어 ‘시선 Blick’으로 칭할 수 있겠다. 이하에서 그러한 시선이 주체 형성에 미치는 작용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6) 무의식, 전의식, 의식 내지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삼중 구조로 인간 정신을 설명한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캉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구분했다. 특히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를 주체 형성에 원천 이되는 모형으로 삼고 이 시기 인간의 정신 생활에 대해 ‘상상계’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상상적’ 주체와 ‘사회적’ 주체라는 두 상반된 주체 개념을 제시하는데, 전자는 전통적 인식론의 사고속에서 유일한 정신세계로 여겨졌던 의식적 주체를 말하며, 후자는 이드, 즉 의식적 주체의 틈새에서 담화를 이끌어 가는 무의식을 일컫는다. 이에 대한 라캉의 글은 Das Spiegelstadium als Bildner der Ichfunktion(1948), Jacques Lacan, Schriften I, hrsg. von Norbert Haas, Olten, Freiburg 1973, S. 61 70. (Jacques Lacan, Ecrits, Paris 1966, übersetzt von R. Gasché, N. Haas, K. Laermann, P. Stehlin)을 참조.

또한 필자의 졸고, 토마스 만 소설의 정신분석적 연구, 독일문학 제79집 42권 3호, 2001, 171 193쪽 중 176 182쪽 참조.
7) Jacques Lacan, Schriften I, S. 64.
8) 시각 구조에 대한 초기(1930년대) 이론에서 라캉은, 눈앞에 있는 거울을 매개로 해 자신의 육체를 총체적인 것으로 창출해내는 아이와 거울이미지와의 '상상적 동일시‘를 말했는데, 1950년대 말 그의 거울단계 이론은 수정된다. 여기에서는 아이의 시선과 거울이미지 사이에 ’제3자‘가 놓이는데, 즉 ‘제3의 시선’(어머니의 시선)이 있다는 것이다. ‘제3의 시선’은 아이의 거울이미지와의 이자적인 관계를 ‘인준’하는 증인의 역할을 함으로써 주체의 구성을 조율한다. 그런데 상상적 동일시를 이루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를 이상화시키려는 어머니의 욕망은 아이의 욕망과 겹쳐진다.

따라서 아이, 거울이미지, 어머니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다.

그래서 이러한 ‘제3의 시선’은 아이의 상상적 동일시를 더욱 확고히 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Vgl. Peter Widmer, Subversion des Begehrens. Jacques Lacan oder Die zweite Revolution der Psychoanalyse, Frankfurt a. M. 1990, S. 31 37; 맹정현, 라깡과 푸코, 보드리야르. 현대적 시선의 모험, 실린 곳: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464 504쪽 중 475 481쪽 참조.
9) 이러한 타자로서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적 환상에 사로잡힌 이 세계에서 ‘나’란 타자, 즉 비아 Nicht Ich일 뿐이다. 그것은 ‘재귀적 reflexiv’, 혹은 ‘나르시시즘적’ 주체 moi로 칭해진다. 이 moi가 독립된 존재로 착각하는 거울 속의 상은 실제로는 ‘상상적’인 존재, 즉 자기 자신의 ‘타자’일 뿐이다. 같은 곳 참조.

10) Jacques Lacan, Schriften II, S. 183.
11) 라캉은 유아기의 자아형성 과정을 이처럼 거울 이미지에의 고착으로 설명했다. 주체 형성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거울단계의 설정은 완벽한 이성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의식 체계를 고집하는 데카르트의 이성 절대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12) Jacques Lacan, Die vier Grundbegriffe der Psychoanalyse, übersetzt v. Norbert Haas, Weinheim/Berlin 1996 (Das Seminar XI, 1964), S. 87. 또한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의식의 환상은 안과 밖이 바뀐 시선의 구조를 뒤집어놓는 것에 기초한다.”

13) “의식이 자기 스스로에게 재귀할 수 있는 곳에서 [ ] (일어나는) 요술이란 시선의 기능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ebd., S. 81.
14) Vgl.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124f.
15)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81.

 

 

2. 타자의식과 '시선'

 

그러나 인간은 “세계의 무대 속에서 바라보이는 존재”16)이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결코 바라볼 수 없으며 그래서 또한 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동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계 속에는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며 나의 존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에 대한 의식은 정신분석적인 차원에서는 예컨대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이후의 정서와 관련이 있겠다. 그것은 또한 라캉의 개념을 따르자면 인간이 언어 세계, 이른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획득하는 ‘사회적’, 혹은 ‘상징적’ 자아17)가 경험하는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란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들어가게 되는 단계이다.

언어란 한 개인이 그것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법칙이기 때문에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법의 세계, 질서의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사회적 법칙으로서의 언어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주체는 외부의 질서, 즉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다.

상징적 주체가 ‘타자의 장소’ 인 언어의 사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타자에 의해 ‘바라보이는’ 주체로서 자신을 의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울을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는 타자의 ‘시선 을 인식하면서 ’ ‘아버지의 법’이 있는 상징 질서에 편입된다.18) 자아 형성에서 이미 자아의 실체가 아닌 타자, 즉 허구적 이미지에 기반을 두었던 인간의 주체는 언어 습득 과정에 이르러서 또 한 차례의 결정적인 소외의 경험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16) Ebd.
17) 라캉의 초기 연구가 상상계적 자아의 구조에 집중되었다면, 언어 세계의 ‘상징적’ 질서에 관한 이론은 그의 후기 연구의 핵심이 된다. 언어를 통해 형성되는 상징적 주체는 라캉의 경우 바로 무의식에 해당한다.

 무의식은 즉, 기존의 언어질서에 종속 될수 밖에 없는 개인이 언어를 사용할 때 생기는 ‘틈’으로 인해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때 의사소통을 일탈하는 그 무엇으로서 생겨나기 때문에 사회적법칙, 즉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은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타자의 주체’인 무의식을‘ 사회적’ 주체 내지는 ‘진정한’ 주체 je로 여겼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진정한’ 주체가 자리잡고 있는 고유한 장소는 이드, 즉 무의식이다. 주체는 자신을 언어 속에 구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분열된다. 따라서 발화를 통해 형성되는 그러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Vgl. Jacques Lacan, Das Seminar II, S. 311; Ders., Schriften II, S. 124. ‘사회적’ 주체인 je는 더 이상 거울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착각하는 ‘재귀적’ 존재가 아니고 자신의 고유한 중심, 즉 자신의 존재를 결여하고 있는 탈중심적 exzentrisch 주체로서 전적으로 무의식적이다. Vgl. Manfred Frank, Was ist Neostrukturalismus? Frankfurt a. M. 1984, S. 381.

  

그렇다면 ‘시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대상을 바라보듯이 대상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아는 것, 즉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며 그의 시선이 나의 존재 자체를 구성할 수도 있음을 아는 인식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시선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

주체는 시선 속에서, 혹은 그것을 통과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바라본다. 보이는 것이 아닌, ‘타자의 영역에서 주체가 상상하는 어떤 것’을 라캉은 ‘시선 Blick’으로 칭한다.19)

예컨대 아이는 거울 단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이제 제3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그 시선을 통해 아이가 보는 것은 어떠한 법이나 도덕적 규율 등 그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종속되어야 할 어떠한 보이지 않는 힘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시선은 아이가 이른바 사회적 주체로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신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감상하는 관람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신의 얼굴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것, 즉 어떠한 절대적인 권력 혹은 도덕적 이상을 본다.20)

 이처럼 주체는 스스로 동일시하는 허구적 이미지가 아닌 타자로서의 아버지나 신의 시선을 인지한다. 그러한 시선을 통해 그가 인지하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이 주체를 해체시키거나 아니면 새로이 구성하고 조율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시선’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에게 피드백 되지 않기 때문에, 상상적 주체의 경우처럼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즉, 시선은 결코 주체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21) 그런데 주체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시선을 통해 그 너머의 어떤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 인해 소멸되거나 혹은 다시금 구성된다.

라캉에 의하면, 시선은 주체와 마주친다해도 그것은 주체를 만나는 순간 주체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선은 주체를 이중으로 소멸시킨다고 할 수 있겠는데, 첫째, 타자의 영역으로서 그것이 주체와 마주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것 너머에서 주체가 상상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간의 틈 때문이다.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그 어떤 것과의 그러한 틈으로 인해 주체는 결핍을 겪는다.

라캉은 “시선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주체는 그것에 적응하려 하지만, 주체는 끊임없이 변하는 일시적인 대상이 되어버리고 그 존재가 소멸하게 된다”22)고 말한다.

“주체에게서 빠져나가고 동시에 그것을 만나는 어떤 것”23)인 시선은 일종의 기표와도 같이 주체를 탈주체화시키며 부재하게 만든다.24) 라캉은 이처럼 ‘눈’과 ‘시선’이라는 시각적 개념을 주체를 읽어내기 위한 하나의 지표로 삼는다.25)

 

시선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주체의 허무성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른바 ‘열쇠 구멍’을 통해 잘 말해주고 있다.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의 3부, ‘대타존재’에 관한 논의에서 시선을 타자들의 존재 차원에 등장시키면서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26) 그에 의하면, 나를 바라보는 타인이 인식될 때 이제껏 내가 중심이 되어 형성된 세계에 속해 있던 사물들이 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인, 인간이라고 하는 한 극점을 향해 나로부터 멀어지는데, 즉 나로부터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빠져나간다 ‘ ’. 이렇게 세계의 중심으로서 나의 위치를 상실하게 만드는 타자의 출현은 ‘시선’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 중심의 세계 한복판에 이렇게 ‘구멍’이 뚫리고, 이 구멍을 통해 나의 세계를 구성하던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흘러나가는 듯이 보인다.27)

이렇게 타자의 출현으로 인해 균열을 겪는 나의 세계는 해체되고 와해된다. 사르트르는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바라보이고 난 뒤에 일어나는 ‘내출혈’, 즉 나의 세계의 흘러나감은 끝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상대를 객체로서 사로잡고 자신이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갈등과 투쟁, 즉 ‘시선의 투쟁’으로 귀착되고 만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그렇게 나에게 타자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전을 가능케 해주는 개념이다.28)

타자의 시선에 의해 주체에게서 ‘계속 빠져나가며 흐르는 구멍’은 바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자리바꿈되는 ‘상징적’ 주체의 분열이라 할 수 있겠다. 시선에서 인간 상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힘을 본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바라보인다는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며 또한 시선은 “바라보는 자가 보지 못하는 것”29)이다. 그것은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타자의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결코 보지 못한다’는 라캉의 명제로 귀결된다.30)

라캉은 사르트르의 ‘열쇠구멍’이 묘사하는 시선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열쇠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모습. 복도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시선은 엿보고 있는 그를 놀라게 하고 당황시키며 수치심을 느끼게한다. 시선은 바로 나를 놀라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타자들의 현전 자체이다. 이 말은, 시선을 주체와 주체의 관계 속에서, 즉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타자의 존재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31)"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다 들킨 사람의 ‘놀라움’과 ‘수치심’은 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상상한 ‘어떤 것’에서 온다. 그것은 타자의 공간 속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주체의 자기 상실감, “당신은 결코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32)는 데서 오는 주체의 분열을 말해준다.

 

18) 상징계가 언어 내지 ‘아버지의 법’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이른바 ‘거세 공포’를 겪은 오이디푸스 이후의 정신세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19)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90.
20) Vgl. Claudia Blümle, Anne von der Heiden (Hg.), Blickzähmung und Augentäuschung. Zu Jacques Lacans Bildtheorie, Zürich/Berlin 2005, S. 25 30.
21) 그렇게 볼 때 ‘시선’은, 주체를 만들어내지만 그 순간 사라져 버려 주체를 또 다른 기표로 자리바꿈하게 만드는 기표와도 같다.

22) Ebd., S. 89.
23) “바라보기의 궤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형상들에 따라 배열되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 항상 어느 정도까지는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미끄러지고 움직이며 단계별로 전이된다. 이것이 바로 시선이다.”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79. 라캉은 또한 이러한 시선이 눈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 즉 “시선의 선재 Präexistenz”를 말하고 있다.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78.
24) 언어 등의 기표가 기의에 대해 지니는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한 라캉의 입장에서, 유일한 재현의 수단인 기표는 주체 형성의 근원이 되는데, 하나의 기표는 또 하나의 다른 기표가 아니면 아무 것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주체는 그 다른 기표로 환원된다. 즉, 기표는 주체는 만들어내지만 그 순간 그 기표는 ‘무 Nichts’가 되어버리고 주체는 또다른 기표로 자리바꿈되는 가운데 사라진다. 라캉이 말한 사회적 주체의 본질은 따라서 ‘무’로 규정될 수있다. Vgl. Manfred Frank, a. a. O., S. 387.
25) ‘눈’과 ‘시선’의 융합 불가능한 모순적 관계에 관해서는 특히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73 84 (Die Spaltung von Auge und Blick) 참조.
26) 사르트르, 존재와 무(손우성 역) 제1부, 삼성세계사상 1996, 428 493쪽(제 3부의 시선 단원) 참조.

27) 사르트르는 이 현상을 타자의 출현으로 인한 나의 세계의 ‘내출혈’로 규정한다.
28) “시선의 나타남은 나에 의해서 존재의 하나의 탈자적 관계의 출현으로서 파악되며, 이 탈자적 관계 한편의 항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있고,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있지 않는 대자로서의 나이며, 이 탈자적 존재관계의 다른 항은 역시 나인데, 그러나 이것은 내 범위 밖의 나이며 내 행동 밖의 나이며 내 인식 밖의 나이다. [ ]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나는 세계의 한복판에 응고된 것으로서, 위험에 처한 것으로서, 치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살아간다.” 위의 책 193쪽.
29) Jean Paul Sartre, Der Blick. Ein Kapitel aus Das Sein und das Nichts, Mainz 1994, S. 53.
30) “우리를 규정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우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시선”은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나르시시즘적 환상이 아닌, “당신은 결코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J. Lacan, Seminar XI, S. 97.

31) Ebd., S. 90f.
32) Ebd., S. 97.

 

 

3. 이미지/스크린

 

그렇다면 이처럼 시선에 의해 분열된 주체는 어떻게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가? 라캉이 제시한 ‘이미지/스크린’의 개념이 그 하나의 길을 제시해줄지도 모른다.

 

 

타자의 공간으로서의 시선과 주체의 관계에 관해서는 위의 이중삼각형으로 설명되는데, 그것은 라캉의 이미지론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33)

여기서 먼저 좌측 삼각형을 보면, 우측의 한 평면적 점에 ‘재현의 주체’가 있고 그것이 바라보는 대상이 좌측의 수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만일 대상의 시선을 알지 못하는 ‘눈’이라면 그 하나의 삼각형으로 충분히 표시되며 그것은 어떤 완벽한 모습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을 착각하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하나의 삼각형이 역으로 겹쳐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좌측 대상의 한 점이 주체를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그 시선에 의해 주체 역시 이제 하나의 점이 아니라 수직의 선이 된다. ‘평면적 영역 속에서 우리의 위치에 재현의 주체를 설정’하는 첫째 삼각형과, 주체 자신이 또한 시선의 대상이 되는 두 번째 삼각형이 겹쳐진다.

전자는 관찰하는 주체의 눈과 그 대상 간의 직선적 결합에 의한 것인데, 이 모델은 외부에 놓인 시선에 의해 전복된다. 대상은 주체를 바라본다. 이로써 타자의 시선이 강하게 전면에 드러난다. 이 둘을 결합시킴으로써 스크린이 생기고 이미지가 생겨난다.

바로 이 스크린은 주체가 어떻게 시선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의해 조종되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보면,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이미 그 대상에 의해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 대상에 의해 사로잡힌다. 따라서 주체는 확고한 위치에 자리 잡은 ‘고정된 점 모양의 존재’가 아니라 대상의 다층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흔들리고 부유하는 선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이 서로 발하는 빛이 교차되는 지점에 하나의 ‘스크린’이 형성되고 거기에 주체가 접할 수 있는 그림(이미지)이 그려진다. ‘불투명한’ 스크린은 대상의 빛(시선)이 주는 눈부심을 조절해서 주체가 완전히 현혹되어 무기력하게 되는 것을 막아준다.

다시 말해 주체가 상상계적인 상태에 전적으로 빠지지 않으며 또한 대상에 의해서도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준다.

타자는 이 스크린 너머로 주체를 자극하며, 주체는 하나의 ‘배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34)

 “스크린, 즉 구성된 형태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나로부터 독립된 것, 본질적인 것이 인식될 수 있다. 이 스크린이 없다면 그림이, 빛이 너무 강해서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35)

따라서 주체가 대상을 통해 되돌아오는 자신의 허무성에 빠지지 않도록 이미지를 구성하는 스크린은 ‘눈’과 ‘시선’ 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36) 다시 말해 그러한 스크린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인해 야기된 현혹 혹은 눈부심을 조절시켜줌으로써 지각의 영역에서 세계와 우리를 중재한다.

 

이처럼 눈 시선 그리고 어떠한 , , 중재적인 스크린/이미지의 개념으로써 라캉은 시각적 작용이 인간 주체의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언급했다시피 이렇게 볼 때, 어떠한 상상적 눈에 사로잡히지 않고 타자의 시선에 종속된 인간주체는 시선 너머의 그 무엇과 스크린 사이의 틈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결핍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 결핍으로 인해 욕망이 생겨나고 그러한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게 하는 동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프로이트도 강조한 바 있다. 이하에서는 시선을 통해 본 그러한 욕망의 구조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33) 라캉의 삼각형 도표에 관해서는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97/113 참조.

34) Vgl. Claudia Blümle, Anne von der Heiden (Hg.), a. a. O., S. 24.
35) Jaques Lacan, Das Seminar XI, S. 115.
36) 라캉의 이러한 사고는 회화작품 이해의 기반이 되는데, 그는 그림과 그 관람자와 관련해 눈과 빛의 자연적인 관계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시선과 주체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나는 단순히, 원근법의 출발점이 되는 저 기하학적 지점에 고정시킬 수 있을 점 모양의 존재가 아니다. 내 눈의 깊은 곳에서 그림이 채색된다. 그림은 분명 나의 눈 속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림 속에 있다. 빛이 나를 바라보고 그 빛에 의해 내 눈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채색된다. 채색되는 것은 [ ] 표면의 아른거림이다. 이것은 평면적인 관계에서 우리를 벗어나는 것, 즉 나에 의해 결코 통제될 수 없는 매우 다양하고 애매모호한 영역의 깊이를 나타낸다. 바로 이것이 나를 사로잡고, 매 순간 나를 유혹하고 내가 ‘그림’이라 불렀던 풍경을 풍경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ebd., S. 102.

 

 

III. 시선과 욕망

 

1. 시각적 욕망

 

알고자 하는 욕구, 즉 지식애의 문제에서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한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보려는 욕구 Schaulust’는 앎에의 충동과 직결되며 그러한 지식애적 충동은 궁극적으로 성적 욕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37) 그는 보는 행위 속에서 일단 남성 우월감과 거세콤플렉스의 동기를 찾아내는데, 즉 불안정한 상징으로 나타난 남근과 여자의 성기를 보는 것은 남자 아이에게 거세공포를 유발한다.

그것은 바로 눈에 대한 위협이 되고38) 그로 인해 앎과 소유에의 욕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가부장적 가족의 성립이 지배적인 능력으로서 부상한 시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그것을 인간 문명의 기원으로 연결시킨다.39) 보기와 지식애적 충동, 욕망의 관계를 접목시켜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입장은 시각 지식애 성적 욕구를 기본적으로 연관시켜 온 서구의 철학 및 문학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플라톤에서 출발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적인 주체 형성의 전통에 편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육체)은 부분적으로, 물신적으로 밖에 파악되지 않는다. 지식애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시각적 탐구는 상상적이고 파악 불가능한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결코 실재 대상을 파악하지 못한다. 거세콤플렉스의 법칙에 의해 욕망이 생겨난다면 그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남근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욕망의 대상은 본질적으로 상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성 정체성의 형성과 나르시시즘, 페티시즘, 동성애 등의 이른바 성도착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보기’라는 시각적 기원을 말한 프로이트의 논의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양성 간의 해부학적 차이의 시각적 경험에 대한 해석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단순화의 경향을 부인하기 힘들다.

또한 성욕의 문제를 프로이트가 시각 영역과 연관시켜 설명할 때의 그 ‘보기’가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주체의 입장에 한정되어 있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라캉 역시 인간에게 욕망은 얼굴을 마주보는 상황에서도 생겨난다고 했는데, 특히 시각의 차원에서 충동은 눈과 시선의 분열이 일어나는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40) 그런데 시각의 문제와 관련해 그가 말하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주체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주체의 분열은 충만함의 이상에 사로잡혀 있던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상징 세계 속으로 굴절되면서 체험하는 결핍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주체는 스크린 너머의 도달 불가능한 어떤 것을 갈망하는데, 라캉에 의하면 그것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허구적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주체는 불만족 상태에 있게 되며 그 결핍을 메워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게 된다. 그렇게 결핍은 시선 속의 상징적, 혹은 상호주관적인 질서가 초래하는 본질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세계 속에서 주체는 또 다시 소외되고 욕망이 남게 된다.

 ‘기표의 연쇄고리’ 속에서 주체가 끝없이 자리바꿈되듯이 그러한 욕망 역시 끊임없이 이동하며 되풀이된다. 시선과 주체의 분열을 통해 생겨나는 욕망에 대해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선은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상징하며, 신비스러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 즉 거세공포를 형성하는 결여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눈과 시선. 시각의 영역에 충동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눈과 시선의 분열이다.41)"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그러한 욕망은 주체를 유지시켜주는 동인이 된다.42)
주체가 스크린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러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그 욕망의 근원을 ‘대상 a (Objekt a)’로서 표기하는데,  ‘대상 a’는 “언어의 바깥에 있는 것. 언어의 상실된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다시 발견되어야 하는 어떤 것”43)으로서 주체의 구성적인 결핍을 말해주며 바로 그 때문에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으로서 욕망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시선은 ‘보려는 충동’의 붙잡을 수 없는 대상, 즉 바로 이 ‘대상 a’가 된다.44) 이처럼 시각의 영역에는 시선에 대한 욕망, 즉 ‘항상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을 볼 때 왜 타자의 시선이 인식의 영역을 해체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는데, 즉 라캉에 의하면 주체는 사유하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바로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45)

 

37) Vgl. Sigmund Freud, Gesammelte Werke, Bd. V, S. 66.
38) 프로이트에게는 거세와 실명이 유사한 의미를 띤다. 메두사의 머리를 보는 사람은 모두 돌로 화했다는 메두사의 신화에서 그러한 시나리오의 신화적 표현을 찾을 수 있다.

39) 프로이트가 말한 시선과 욕망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Sigmund Freud, a. a. O., Bd. V, S.
27 146(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Bd. V); Bd. X, S. 209 232(Trieb und Triebschicksal) 참조.
40) Vgl.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79.

41)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79.
42) “놀라움을 느끼며 자신을 바라보는 주체가 객관적인 세계와 연관된 소멸하는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기능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주체일 경우에만 시선이 출현한다.” ebd., S. 91.
43) J. Lacan, Das Seminar XI, S. 119.
44) “시선이 거세현상 속에 표현된 이러한 중심적인 결여를 상징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본질 상변하기 쉬운 기능을 지닌 ‘대상 a’인 한, 주체는 가상을 넘어선 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전혀모르는 상태로 남게 된다.”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83. 이 ‘대상a’는 시선 이외에도 젖가슴, 배설물, 목소리 등이다. 그것은 결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근원으로서 기능한다. Vgl., Gabriele Schabacher, ‘Das Auge voll Gefäßigkeit’. Zum Verhältnis von Photographie und Voyeurismus, in: Ästhetik des Voyeur, S. 36.
45) Vgl.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95f.

 

 

2. 드러냄과 감추기

 

눈과 시선으로 본 이러한 욕망의 심리학적 구조를 생각할 때, 왜 우리의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베일에 가려진 것, 보일 듯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욕망을 더욱 자극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대상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일종의 스크린으로 여긴다면, 그 베일 너머로 주체가 상상하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인한 결핍이 바로 주체의 욕망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욕망의 문제를 롤랑 바르트는 ‘스트립쇼’의 예를 들어 논하고 있다.

바르트는 스트립쇼를, 눈과 시선이 교차되는 순간Augen Blick의 긴장을 드러냄과 감추기의 미학 속에서 보여주는 상징적인 극으로 보고 있는데, 거기에서 시각적 욕망인 관음증의 구조를 읽는다.

그에 의하면, (여성의) 나체를 갈망하는 (남성) 관객의 시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즉 “커튼 뒤의 그림자”46)로서 무희의 몸을 감지한다. 스트립쇼는 그러한 경계에서 벌어지는 “드러냄과 감추기의 양가적인 유희”47)라고 할 수 있다.

옷과 장신구 등으로 가려져 있는 무희의 몸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종의 기표와도 같다. 즉, 숨겨져 있는 것은 바로 ‘무 Nichts’48)일 뿐이지만 관객은 완전한 그 무엇인가를 보고자 한다.

베일을 통과해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을 상상하는, 그렇기 때문에 바로 결핍에 사로잡힌 관객의 시선은 무희의 몸이 드러나는 시점이 지연되기를 원한다.

무희의 지연된 행위, 물신화된 장신구, 제식적인 춤동작 등은 그러한 충만함의 환상과 결핍에 의한 욕망이 교차하는 순간으로 집결된다. 그렇게 드러낼 듯 하면서 감추는 가운데 드러냄을 지연하는 데서 스트립쇼에서의 긴장이 고조된다. 관객의 욕망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은 바로 그러한 지연의 순간, 즉 드러냄과 감추기가 교차되는 순간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것이 남성의 두려움 극복의 과정이라고 말한다.49)

남성 관객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충만함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며 그의 그러한 관음증적 시선은 거세 위협을 부인하고 은폐한다.50)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드러냄과 감추기의 유희 속에서 결핍을 은폐하고 부인하게 만드는 스트립쇼에서 관객은 숨겨진 것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베일‘을 찾는다.51)

그 베일을 통해 주체는 그 자신의 허무성을 은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유희 속에서 포착되는 ’순간‘은 바로 라캉이 말한 ’눈과 시선의 분열‘이 일어나는 곳이며 욕망은 그 틈새에서 생겨난다.

 

46) Ebd., S. 191.
47) Roland Barthes, Mythen des Alltags, Frankfurt a. M. 1964, S. 68.
48) 그것을 혹은 텅 빈 기표로서의 ‘팔루스 Phallus’라고도 할 수 있겠다.
49) Vgl. Roland Barthes, a. a. O., S. 70f.

50) Claudia Öhlschläger, Unsägliche Lust des Schauens. Die Konstruktion der Geschlechter im voyeuristischen Text, Freiburg I. B. 1996, S. 148.
51) 관음증자는 모든 것을 보기를 욕망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림자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불가능한 대상의 충족을 약속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커튼 뒤에서 그림자로 만족한다.

반대로 관음증자에게 수치심으로 인한 홍조를 가져오는 것은 라캉에 의하면, 관음증자 자신을 관찰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한 놀라움 때문이 아니라, 그는 얼마간은 그 자신인 어떤 것에 의해, 필연적으로 분열된 자기 자신의 한 부분에 의해 사로잡힌다. “대상은 여기서 시선이다 바로 주체인, 주체를 만나는 시선이다.” Jacques Lacan, Das Seminar XI, S. 32.

 

 

V. 맺는 말

 

인간을 데카르트식의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주체’로 보는 라캉의 이러한 사유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허무주의적 사고가 깊게 깔려 있다. 그는 인간 주체를 완전히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것으로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로 인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어떠한 틈 때문에, 즉 보이지 않는 시선이 야기하는 끝없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타자의 시선과 나 사이에 설치될 수 있는 ‘불투명한’ 스크린을 인식함으로써 ‘사회적’ 주체로서 인간이 결핍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 스크린 너머의 미지의 것에 대한 갈망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하는 동인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인간의 주체와 욕망의 심리학적 구조에 대해 자크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은 ‘시선과 주체, 욕망,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의 첫 단계로서, 먼저 시선과 주체, 욕망의 심리학적 구조를 고찰한 것이다.

특히 자크 라캉이 그의 주체와 시각에 관한 이론을 통해 설명한 눈/시선의 개념과 그 분열에 관한 사유는 인간 주체의 형성 내지는 해체의 문제, 또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심리적 동인과 그 미묘한 구조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눈과 시선에 관한 이러한 논의 속에서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권력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시각의 헤게모니를 말할 수 있는 근대는 ‘눈’의 평면적 시각이 야기한 맹목적이고 상상적인 주체의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또한 오늘날을 지배하는 미디어의 막강한 힘에서 볼 수 있는 시각과 권력의 관계 또한 바로 시선의 문제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근래에 와서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젠더 문제에서 바로 양성 간의 질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서 시각적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눈/시선의 개념에서 출발한 주체와 욕망의 구조에 관한 이러한 논의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 타자와의 관계,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겠다.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