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불교에 석가모니가 없다니!

rainbow3 2020. 5. 9. 23:31



불교에 석가모니가 없다니! /〈불교평론>편집위원 홍사성

불교는 누구에게 귀의하는 종교인가. 석가모니불인가 아미타불인가. 관세음보살인가 지장보살인가. 달마대사인가 성철선사인가. 아니면 이 모든 대상을 포함한 어떤 것인가.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는 종교생활의 기본인 귀의의 대상 즉 교주를 선명히 내세우지 않는 것 같아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 불교가 석가모니불을 교주로 하는 종교라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 불교는 분명히 석가모니불을 교주로 하는 종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불자들의 주된 신앙의 대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기보다는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달마대사다. 심지어는 산신이나 칠성, 용왕인 경우도 있다.

불교의 교주론이 이렇게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교리적 진실을 具象化하고 그것을 실체적 사실로 믿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확대해석해서 시간적으로는 삼세불, 공간적으로는 타방불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사실화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多佛論的 불타관은 대승불교의 흥기와 맞물리면서 신앙화되었다. 불교가 석가모니불 외에 경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불보살을 신앙하는 전통을 확립한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얼마든지 많은 불보살이 존재할 수 있더라도 그러한 사상과 믿음을 어떻게 불교적 신앙체계 안으로 수용할 것인가는 좀더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칫하면 불자들의 종교생활을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상적 진실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혼동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무엇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신앙체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2600년전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해 성립된 종교다. 따라서 불교는 어떤 경우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상체계를 중심으로 해야 그 존립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적 실존이었던 석가모니불보다 비역사적 多佛多菩薩에 대한 신앙을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탁해 실재적 존재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반불자들의 신앙형태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혼란상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창한 사상체계를 중심으로 신앙과 교리체계를 확립하는 '근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이 직접 생각하고 말씀하고 행동한 그것에서 불자들의 종교적 실천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또 한가지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어떤 변화와 발전을 겪었으며 그것이 불교의 근본가르침에 비추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판별하는 '역사주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천태대사의 오시교판을 역사적 사실로 용인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귀의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종교는 교리체계도 신앙체계도 없는 저급종교로 전락하기 쉽다. 만약 우리나라의 불교가 샤머니즘과 비슷한 종교로 오해되고 있는 일면이 있다면 교주론을 제대로 확립하고 있지 않은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나머지는 아무리 잘 맞추려해도 기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부터 해야 한국불교는 여러 가지 신앙상의 화두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적 교판을 넘어서자

한국불교의 과제나 문제점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도나 형식의 측면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곤 한다. 종단운영이나 교육제도 포교시스템 등에 문제가 있어서 서구종교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외형적인 것에만 분석의 렌즈를 갖다댄 결과다. 관점을 조금만 내용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옮겨서 살펴보면 더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가 있다. 교리사상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또는 해석상의 불명료성에 따른 신행상의 혼란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대승경전은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을 내세우며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실재하는 존재로 믿고 이를 전제로 신행할 것을 강조한다. 근래에 붐을 이루는 지장신앙이나 약사신앙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대의 불교학은 관세음보살이 힌두교의 시바신이 불교적으로 전화한 것이며, 타방불은 인도종교의 범신론과 유관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또한 대승불교 이후 생성된 타력적 신행체계는 방편적 가설이라는 해석이 상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정보가 공개된 상황에서 관세음보살이나 서방정토의 실재를 믿으라고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해온 한국의 불교도들은 이 질문 앞에 머리가 복잡하다못해 터질 지경이다. 이는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문제들이다.

한국불교가 이렇게 사상적으로 혼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이미 폐기처분된 이론인 중국적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교상판석이란 중국의 종파불교가 입교개종의 근거로 모든 경전에 우열심천의 가치를 부여한 교학적 작업의 성과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중국불교는 전역(傳譯)시대를 거치면서 대소승 경전이 동시에 번역되었다. 그 중에는 불교의 원초적 목소리를 담은 경전이 있는가 하면,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비난하면서 발달된 교리와 새로운 사상을 주창하는 대승경전이 포함돼 있었다. 모든 경전을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믿었던 당시로서는 어째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러자 중국불교는 종파적 입장에 따라 경전의 우열심천을 분류하는 교판을 세우기 시작했다. 징관의 화엄교판과 지의의 천태교판이 그것이다. 이중 후세까지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은 지의의 오시교판이다.

오시교판은 모든 경전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시간적으로 재배치한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 정각을 성취한 뒤 삼매에 들어 <화엄경>을 설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단계를 낮추어 <아함경>을 설한 뒤 차례로 <방등경>과 <반야경> 그리고 최후에는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교판은 수많은 경전을 독자적 사상체계로 분류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업이지만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구다. 대승경전이 대승적 자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찬술(撰述)'된 것임에도 이에 근거한 타력적 신행체계를 내세우는 것 역시 부처님의 생각과는 일정한 간극이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혼란이 생기고 있는 것은 이점을 외면한 채 과거의 교리해석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일반사찰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찬하는 교육기관이나 학자들조차 아직까지 중국적 교판에 의한 교리해석과 이를 근거한 신행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유하면 지동설이 사실로 밝혀졌는데도 계속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강변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한국불교는 이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량한 불자들만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게될 뿐이다. 가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올바른 교판을 확립하는 일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다. 현재와 같은 사상적 신행적 혼란을 그대로 방치하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사태가 생길지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정법만이 포교다

포교란 무엇인가. 왜 포교를 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진리(法)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교화해 반야(般若)의 눈을 뜨게 하고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불교라는 교단이 존재하는 이유도 부처님이 가르친 정법의 수호와 전지, 그리고 확대를 위해서다. 승려가 있고 절이 있고 포교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포교란 바꿔 말하면 정법의 선양이고 확산이며 실현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불교신도를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포교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설법을 한다면서 외도의 가르침을 불법인 양 태연히 가장해서 말한다든가 불공을 한다면서 이교도처럼 개인적 구복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라 할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가장한 사교(邪敎)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불교 포교현실은 어떠한가. 법당에서는 정법이 가르쳐지고 있는가. 불자들은 그 가르침을 사무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그렇지 못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온갖 사언마설(邪言魔說)이 불교를 가장해서 흑사병처럼 창궐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간판만 바꿔 걸면 서양의 어떤 종교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그런 내용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법사의 입에서 무차별로 '설법'되고 있다. 그 명백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절에서 입춘부적을 파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신도들이 그런 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계율로 금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들의 생각이었다. 만약 어느 절에서 입춘부적을 나누어주었다면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른바 포교를 잘한다는 절에서조차 '방편'이란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한다. 심지어는 스님들이 신도들의 궁합과 작명, 택일에서부터 사업운세, 관상, 사주까지 보아주는 예도 흔하다.

만사형통의 기도는 이제 불자들의 신행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돼버렸다. 대학입시철이 되면 절마다 합격을 비는 백일기도가 벌어진다. 현수막까지 내 걸린 이 기도는 도시주변의 웬만한 절 치고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제는 절 집안의 중요한 풍속으로 자리한 치병(治病) 득남(得男) 승진(昇進)기도도 연중무휴로 진행된다. 이런 절에서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정각자, 인류를 바른 길로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 아니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한손에 거머쥔 전지전능한 절대신으로 둔갑한다. 그러다 보니 절마다 가장 중요한 법사(法事)는 불공이요 기도다.

불공이나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정법에 귀의하고 공양하는 의미의 불공, 번뇌를 조복받기 위한 진언수행으로서의 기도라면 마땅히 권장돼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기도=영험'의 등식이 서양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구원'의 등식과 같은 구조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법(邪法)이다. 이런 사법을 빠져 있으면서 기도만 하면 만복을 소낙비처럼 받는다고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포교(布敎)가 아니라 파교(破敎)다.

정법을 펴는데 매진해도 부족한 형편에 이런 일을 해놓고도 사람만 많이 모이며 포교를 잘한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처녀의 임신같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어처구니없는 변명이란 이런 것이다.
"근기 낮은 중생을 인도하려면 방편이 필요하다. 종교에 신비한 측면이 없다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변명 뒤에 숨어있는 보다 솔직한 이유는 좀 다르다. 하나는 그런 기도나 불공이 사찰의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불교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이런 점을 염려해 입멸(入滅)에 즈음해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法歸依 法燈明)'라고 유훈을 남긴바 있다. 그런데도 정법의 사도(如來使)이어야 할 사람이 사법(邪法)의 찬미자가 되고 외도의 가르침을 방편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자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진리뿐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그것을 다음 네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진리에 의지할 것이며 사람에 의지하지 말 것(依法不依人) 가르침의 뜻에 따를 것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나 문자에 의지하지 말 것(依義不依語) 참지혜에 의지할 것이며 세속적인 지식에 의지하지 말 것(依智不依識) 완전한 가르침에 의지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에 의지하지 말 것(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이것은 불교의 생명이 바로 정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정법을 바르게 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교해서 옳은 말씀, 진리의 가르침은 배우고 실천하기를 외면한다. 하지만 포교란 오히려 그런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미혹한 중생이 없다면 부처님이 굳이 45년 동안 장광설을 했을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몇 명에게 '정법'을 전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포교는 아무리 양적인 확대가 이루어졌더라도 질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우리 불교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법당의 단청에 빛이 바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의 당간(幢竿)이 높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할 때만이 한국불교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