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五戒)와 현대사회
RADICAL THERAPY
Buddhist Precepts and
The Modern World
Lily de Silva
릴리 드 실바 지음
최 부동지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91
(Bodhi Leaves No. B 123)
오계(五戒)와 현대사회
오계는 불교의 근본이 되는 도덕률이다.
실제로 재가불자들은 삼귀의와 더불어 이 오계를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 왔고, 또한 법답게 삶을 꾸려 나가려면 반드시 이 오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여긴다.
오계는 다섯 가지 ‘안 하기’ 훈련인데, 첫째는 생명을 해치지 않기, 둘째는 훔치지 않기, 셋째는 성적(性的) 불륜행위 않기, 넷째는 그릇된 말 하지 않기, 다섯째는 심신을 취하게 하는 물질을 멀리 하기이다.
오계는 인간이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행동을 다스려 청정하게 하도록 시설된 장치다. 생명을 해치지 않고 훔치지 않고 성적 불륜을 행하지 않는 것은 몸으로 하는 행위[身業]를 다스리는 일이다. 그릇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말로 하는 행위[口業]를 다스리는 일로서, 거짓말[忘語, musā vādā] 뿐만 아니라 헐뜯는 말[兩舌, pisuṇā vācā], 험한 말[惡口, pharus vācā], 쓸데없는 말[綺語, samphappal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네 번째 계율에 포함된다. 몸과 말을 함께 바로잡는 훈련은 마음의 청정을 닦는 데 효험이 있다. 물론 마음[意]이 완전히 청정해지려면 명상이라는 정신계발(bhāvanā) 또한 필요하다.
심신을 취하게 하는 물질을 멀리 하라는 다섯 번째 계율은 나쁜 습관 때문에 정신기능[意根: 육근의 하나로서 법을 분별하는 기능]이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다. 무언가에 빠지거나 취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통제력을 잃게 되고, 또한 그 때문에 다른 네 가지 계율마저 어기기 쉽다.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오계를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의 핵심으로, 해탈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밟고 가야 할 하나의 디딤돌로 이해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오계가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인은 치명적인 중병을 앓고 있다. 이 병의 뿌리는 도덕을 무시하는 데 있다. 불교 윤리의 중추를 이루는 다섯 가지 훈련 규칙은 바로 이러한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살려낼 치료약이며 그 문제를 뿌리째 뽑아나가는 치유책이다.
이제 오계를 하나씩 검토하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 생명을 해치지 않기[不殺生]
세계는 민족, 인종, 종교, 이념 등에 의해 야기되는 갖가지 갈등으로 들볶이고 있다. 수많은 나라에서 테러가 판치고 있으며 전쟁의 위협은 끊임없고,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전쟁 없는 날이 하루도 없다. 핵무기 사용은 전 세계적 걱정거리인데도 불구하고 군수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무기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전쟁 때문에 무기를 생산하는 것일까? 이 두 가지는 악순환을 이루고 있는 듯하며 군수산업의 번창에 따라 그 소비시장을 마련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분쟁을 계획하고 육성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현재 지구상에는 지구를 몇 번이나 날려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가 쌓여 있다. 그도 부족하여 건물은 고스란히 둔 채 사람만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생화학 무기도 개발되었다. 이런 잔인성은 피해자를 파멸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가해자의 인간성 역시 교묘히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인간을 위해 밀어붙이고 있는 현대의 기술발달이 그렇지 못했던 옛날에 비해 과연 생명의 가치가 존중되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리송하다는 점이다.
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승리자도 패배자도 또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까지도 다 죽어 버리고 말 게 틀림없다. 승리를 누릴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근자에 군비제한 협상이 뻔질나게 거론되고 있는 모양을 보면 핵무기 보유국들이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을 조금씩 깨닫기는 한 모양이다. 이러한 마당에 우리 개개인이 남의 생명을 과연 얼마나 귀중히 여기고 있는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이 위태로운 상황을 볼 때 우리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가치 있는지 새삼 깨달으면서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의기양양한 현대세계에서 과학자 집단만이라도 ‘생명을 해치지 말고 존중하라’는 이 단순한 도덕률을 지켰더라면 과학을 건설적으로 이용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적 성과를 전례 없다고 뽐내고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전 인류를 파멸의 지경으로까지 몰아오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생명에 대한 자비심을 느낄 줄 모르는 데서 오는 나쁜 결과는 비단 군사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농업 분야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살충제와 제초제, 화학비료를 마구 쓴 나머지 오염된 토지로 인한 폐해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흙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화학적 균형과 세균끼리의 균형은 깨어진 지 오래고, 그 결과 토양의 양분은 말라버리고 소출량도 부쩍 줄어들었다. 강과 바다 역시 화학폐기물로 인해 오염됐으며, 어떤 지역의 강은 이미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강이 되어 버렸다. 이 모든 상황이 역으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간이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새로운 장을 열지 못한다면 이러한 위험한 추세에 뒤따르는 일은 재앙뿐이라는 사실이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도덕성 회복은 생존과 직결된 절대명제라 할 수 있다.
제3세계의 어느 국가에서는 이상한 형태의 영아원이 은밀히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버림받은 영유아들의 장기(臟器)가 공공연히 장기은행에 이식용으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부끄럽고 끔찍한 일인가. 어찌하여 이처럼 무감각하고 냉혹하게 남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지, 혐오감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을 값으로 환산하는 기준이 돈과 신분과 권력 밖에 없는 듯하다. 문명인이라 자처하는 현대인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발상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사실은 현대인이 어느 정도까지 비인간화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도덕적 훈련은 현대인에게 결핍된 갖가지 인간애의 고유 가치와 존귀함을 일깨워주는 데 없어서 안 될 절박한 과제이다.
•훔치지 않기[不偸盜]
전대미문의 갖가지 위법과 남용이 자행되고 있고 오늘날의 대중매체는 소매치기와 뇌물수수, 밀수, 떼강도, 공갈, 납치사건 같은 불미스러운 뉴스로 넘쳐난다. 삐뚤어진 가치관으로 얼룩진 현대사회는 때로는 무모한 범죄를 마치 용기 있는 행동인 양 감상적으로 미화시키기까지 한다. 이와 같이 드러난 범죄도 문제지만, 현대 사회가 범하고 있는 더 큰 폐해는 은연 중에 자행되고 있는 남용행위이다.
현재 인류는 존망의 위기에 개의치 않고, 다시는 재생할 수 없는 천연자원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있다. 급속도로 생산되는 신상품들은 신속히 팔아치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수명이 짧고 질 낮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상품 광고에 세뇌되어 소비가 미덕인줄로만 아는 현대인들은 앞으로 태어날 세대의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으로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이야말로 우리의 미래 세대가 누려야 할 권리를 강탈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를 들어 어느 가정에서 열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음식을 넷이서 몽땅 먹어치워 버렸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그들의 행동을 이기적이고 몰염치하다고 질타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미래 세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마구 소모하면서, 이를 발전과 진보라 믿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구 한쪽에서는 수백만 명이 영양실조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다른 한 쪽에서는 식품가격 인상을 목적으로 수천 톤의 잉여식품을 정기적으로 폐기처분하고 있다. 식품을 보호하고 처리할 수 있는 기술도 마련되어 있고 수송시설 또한 충분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절박한 사정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는 상황임에도, 상용 가능한 생산재를 거침없이 내버리는 등, 인간애와 이타심이 메마른 현실을 볼 때 우리는 섬뜩함을 금할 수 없다.
이 시대의 숱한 불행은 인간의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결과이다.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해 산간지역의 흙은 쓸려내려 가고, 그로 인한 대규모 산사태가 무시로 일어나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가 하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열대우림지대가 훼손되면서 지구 전체의 기상조건마저 바뀌어 버린다.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와 그에 따라 극지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게 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앞으로 백 년 이내에 육대주의 방대한 해안 주거지역이 바닷물에 잠겨버릴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그것이다.
이러한 재난은 극도로 치받친 현대인의 탐욕이 빚어낸 어쩔 수 없는 과보라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탐욕을 억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우리는 오계의 두 번째 항목, 곧 ‘훔치지 말라’는 계율을 준수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방안으로는 허례허식을 없애는 자세와 함께 탐욕을 채우려들기보다는 필요한 것만 충족시키는 간소한 생활에 자족하는 실천이 요구된다.
• 성적 불륜을 행하지 않기[不淫行]
산업사회 이전까지는 당연하게 지켜지던 성도덕이 무시되면서, 현대인은 절제를 모르는 쾌락추구의 삶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난 수십 년은 소위 ‘성의 혁명시대’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피임법의 발견으로 사람들은 성행위에 따르는 부담을 덜게 되었고, 쾌락탐닉은 사회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추세로 용인되어 갖가지 성행위가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다. 동성연애와 혼전(婚前), 혼외(婚外)정사가 만연하고, 근친상간이나 강간 같은 추악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가정에서조차 어린이를 성적으로 폭행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여 영국에서는 추행당한 어린이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전화서비스(Childline)까지 생겨났다. 보고에 따르면 이곳으로 걸려오는 상담전화만도 하루에 천여 통이 넘는다고 한다.
자유방임주의가 몰고 온 해악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이혼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결혼한 남녀가 함께 안정되고 지속적이며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손가정 증가로 인해 크게 상처받는 어린이들은 이후 약물중독자이나 비행 청소년이 되고 만다. 청소년 비행은 이제 심각한 사회 문제다.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약물중독이나 범법으로 비행에 물든 청소년의 재활을 위한 공공보호기관이 속속 설립되고 있다. 심지어는 가정불화로 매 맞아 숨지는 아이들도 있어, 이러한 극단적 가정폭력을 예방하고 제재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세계가 부심하고 있다. 한편 문란한 성행위로 인해 쉽사리 행해지고 있는 임신중절 또한 도덕적, 사회적으로, 또 법적으로나 의학적으로 광범위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폭발적으로 확산된 성병은 전염병 수준의 감염률을 나타낸다. 전 세계는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에이즈라는 가공할만한 질병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다. 에이즈 퇴치에 전 세계 의학자들이 분투,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효과적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 경부암(頸部癌)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문란한 성관계라는 의학적 사실은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현대인은 사회가 산업화․도시화되는 과정에서 갖가지 사회․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되었고, 가정문제와 건강문제라는 또 다른 무거운 짐을 짊어진 처지이다. 인간관계는 겉돌거나 깨어지기 일쑤며 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린 채, 소외와 좌절 속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렇듯 소외된 개인은 위로받을 친구도 없을 뿐더러, 이미 종교와 담을 쌓아버려 고작 정신의학에서나 도움을 기대해 볼 따름이다.
원시사회에서 벗어난 인간이 문명세계로 진화해 온 과정에는 가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이러한 노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정은 갓 태어난 생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안락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 가장 핵심적 사회단위이다. 감각적 쾌락을 찾기에 급급한 현대인은 이처럼 중요한 가정의 존엄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분별한 쾌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이것은 꿀을 탐한 나머지 꿀단지 속에 빠져 죽는 개미의 꼴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엄청난 비극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재가신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오계 중 하나가 ‘음행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 그릇된 말 하지 않기[不妄言]
자신의 이득과 쾌락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풍조가 모든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회에서는 정직성이라는 고결한 규범이 널리 자리 잡기 어렵다. 국가를 대표하는 고위층조차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빈번히 저지른다. 국가 간에 있어서도 친선과 우의를 표방하며 맺은 외교관계를 묵살하며 상대방 국가가 정보기관을 통해 자국의 내정을 엿본다고 비방한다. 이와 같이 국제사회에서조차 표면적으로는 허울 좋은 친선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서로 다른 속셈으로 이중거래를 하고 있으며, 그 결과 국가 간의 상호불신과 의심이 증폭된다.
어떤 나라는 우방국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게릴라 요원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집권자들은 겉으로는 우호적인 얼굴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비열하고 위선적인 속셈으로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하려 혈안이 되어 날뛰는 게 현실이다.
최근 신문보도에 따르면 어떤 나라의 유독성 화학폐기물을 실은 선박이 다른 나라로 몰래 출항했다고 한다. 그 ‘화물’은 끝내 어떤 정부의 통제도 없이 나이지리아 해안에서 돈에 매수당한 농부들에 의해 하선됐다고 한다.
국가 지도자들에 얽힌 추문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국민의 압력으로 고위관직에서 물러난 경우도 있고, 드러난 비리로 선거에서 참패한 경우도 있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와 같이 부정에 휩쓸리는 판이니 사회 전반의 도덕적 규범이 제대로 유지되기란 지극히 어렵다.
불교는 통치자들에게 공․사간의 생활 속에서도 고결한 도덕성을 견지함으로써 국민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고매한 사람만이 국민의 존경과 충성을 받을 수 있는 법이다. 통치자가 정의롭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될 때 사회적 가치체계는 무너지고 사회는 점차적으로 무정부 상태와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게 된다(sabbaṁ raṭṭhaṁ dukkhaṁ seti rājā ce hoti adhammiko 『증지부』 2권(4법수) 76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상호신뢰의 마음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부정직성은 사회의 기반 자체를 약화시키고 상호불신은 전체적인 사회구조를 와해시켜 버린다. 사회의 화합과 조화는 무력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며, 사회생활에 탄력과 활력을 불어넣는 힘은 다름 아닌 도덕이다.
•취하지 않기 [不飮酒]
양조업은 세계에서 가장 수지맞는 산업으로 시장에는 갖가지 상표의 술이 흘러 넘친다.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서도 주류 판매수익이 국가수입을 증대시켰고, 값비싼 외제 술 소비가 상류사회의 호사로 여겨지고 있다. 가치관이 왜곡된 오늘날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지경이다. 철저한 도덕관과 꿋꿋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권하는 술을 사양하기 어렵다. 공처가라거나 흥을 깨는 사람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알코올중독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으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코올중독과 약물남용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절박한 사회문제다. 술과 약물에 중독되면 심신이 황폐해진다. 습관적으로 폭음을 일삼는 사람만이 질병에 걸리는 게 아니다. 영국에서 발간되는 한 의학 잡지에 의하면 매일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전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직장암에 걸릴 확률이 열두 배나 된다고 한다. 임신부의 경우 사교적으로 마시는 약간의 술조차 태아에게 해를 줄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술을 마신 산모가 낳은 아기는 지나치게 체구가 왜소하거나 이상소두증(異常小頭症), 또는 불안정한 안구를 갖게 될 위험이 있다. 이른바 태아성 알코올증후군과 관계되는 현상으로, 극단적인 경우에는 기형아나 저능아로 태어날 위험마저 있다. 소량의 음주도 성인의 뇌세포에 치유될 수 없는 손상을 초래할 수 있으며, 많은 양일 경우 신체의 주요 기관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물론 약물남용은 이보다 더 치명적이다.
불교는 일찍부터 술이나 약물의 해독을 확실하게 인식하였던 까닭에 기본 계율 중에 ‘취하지 말라’는 항목을 포함시켰다. 부처님은 여러 법문에서 술 따위의 위험성을 낱낱이 열거하셨는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시갈로와다경」(Sigālovāda Sutta,『장부』3권 182쪽)에 나온다. 술의 미혹에 빠지면 심신의 파탄과 함게 경제적 파탄도 뒤따른다는 내용이다. 마하다나셋띠(Mahādhanaseṭṭhi,『법구경』129게)의 일화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엄청난 가산을 술로 탕진하고 늙은 뒤 거지가 되는 사람의 이야기로, 빠알리어 경전에 나오는 술로 망하는 부자 이야기 가운데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술과 약물은 불화, 다툼, 가정 내 폭행을 야기하기도 한다. 가정파탄은 흔히 술이나 약물중독 때문이며 이에 따른 사회문제가 줄줄이 생겨난다. 경전에는 습관적 음주나 약물복용이 자제력을 잃게 하고 지혜를 흐리게 하여, 건강을 해치거나 나쁜 평판을 얻게 한다고 쓰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양심은 술에 잘 녹는다.”고 한 어느 작가의 말 속에 절묘하게 요약되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범죄 사건이나 치명적 교통사고는 근본적으로 술이나 약물남용에서 발생한다. 알코올이 사회에 미치는 끔찍스러운 영향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대중 매체의 자극적 광고는 사람들의 풍족한 삶에는 술이 필수적인 것인 양 떠들어, 대중으로 하여금 이를 선망하게 만든다. 사람에게 술이나 약물이 얼마나 해로운지, 또한 사회생활에서 부딪치게 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의지와 성품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납득하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술이나 약물 따위의 덫에 걸려드는 사람은 나약한 성품의 소유자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자중자애(自重自愛)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몸과 마음은 우리의 전반적 활동에 쓰이는 도구이므로 이를 건강하고 능률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일은 우리의 책임일뿐더러 자신을 위해서도 이롭다. 불교에서는 자비관1)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자비로운 태도를 계발할 수 있는지부터 가르친다. 매일 명상을 시작할 때마다 조용하고 주의 깊게 “내가 행복하게 살아지이다!” 하고 몇 번씩 반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심을 마음에 새긴다. 자애심이 마음속 깊이 새겨지면 명상자는 점차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해가 되는 습관을 멀리하게 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린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초하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생활태도를 바꾸는 데 전력투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도덕적 차원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숱한 자연의 비밀을 파헤치고 우주에 내재하는 물리적 힘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인간 자신, 자기와 이웃 및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사회적, 심리적 힘을 지배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 핵시대(核時代)의 인간은 기술적 경이를 성취한 지적 거인(知的 巨人)일지는 몰라도 정서적인 면에서는 석기시대를 가까스로 면한 난장이에 불과하다. 어느 작가는 현대인을 한쪽 다리는 제트기에, 다른 쪽 다리는 소달구지에 묶여 있는 존재로 비유한다. 이처럼 인간의 발전은 극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바로 이 심리적 난조(亂調) 상태야말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의 커다란 원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인격 전반에 걸친 총체적 발달이며 이를 위해서는 도덕의 가치를 되찾아 키우는 일이 최대 급선무이다.
교통을 원활하게 소통시키기 위해 교통법규가 있다. 이 법규는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듯 보이겠지만 사실은 누구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도덕적 규범도 교통법규와 같다. 그것은 어떤 제약을 가하기는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한 개인에게도 최대의 보상을 주고, 동시에 그 행동이 이웃의 만족 실현에도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다. 도덕적 규범은 사람들이 겪는 상이한 여러 가지 경험을 조절하여 개인적 갈등이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희석시켜 준다.
충돌이나 테러행위, 전쟁 등은 인간의 내적 부조화가 밖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난폭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사회가 난폭해지는 것이다. 부도덕한 마음에는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는 영원한 진리다. 우리가 갈망하는 바가 행복일진대, 건전한 생각을 품어야 하고 건전한 생각으로 행동해야 함은 자명하다. 그러면 행복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림자처럼 따라올 것이다. 마음[意]을 건전한 생각과 건강한 태도[善法] 쪽으로 길들이기 위해, 우리는 몸으로, 또 입으로 짓는 모든 행위를 마땅히 통어해야 하며, 오계가 바로 이 일을 맡는다. 오계는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파괴적 성향을 억제하고 동물적 야성을 인간답게 순화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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