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큰 합리주의- 프란시스 스토리

rainbow3 2020. 5. 29. 07:31

 

 

큰 합리주의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심 영 석` 옮김

 

A LARGER RATIONALISM

 

Francis Story

 

(BODHI LEAVES NO.B`29)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72 CEYLON

 

 

큰 합리주의

 

“왜 사람들은 개종을 하는 것일까? 인도인들이 왜 기독교도가 되고 또 유

럽인들이 하필이면 이슬람교나 불교로 개종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그

까닭이 늘 궁금했었다”라고 헥터 호튼(Hector Hawton)은 휴머니스트라는

잡지에서 쓰고 있다.

 

그런가하면 불자가 되는 유럽인들은 다른 유럽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는

사실에 호튼씨처럼 의문을 갖게될 것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유일신을

믿기는 매한가지인데 그 사이에서 무슨 개종이 필요할까. 어떤 종교가 신의

계시를 내세운다고 해서 회의를 품는다면 다른 유신(有神) 종교에 대해서

도 똑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테니까.

 

종교에의 귀의 문제가 단순히 초자연에 대한 믿음보다는 경험적 지식이 우

월하다는 식으로 해결된다면 그 선택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여기 특이한 입장의 종교가 하

나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바로 그 경우인데, 불교는 초자연적 계시의 종교가 아닌 것은 분명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험적 지식에 머무르는 종교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

론 불교는, 시발점을 철저한 경험적인 지식에 두고있지만 그 경험세계를 훨

씬 초월해 있다.

 

그러면서도 불교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증명할 수

있는 사실과 상충되는 법이 없고 일견 상충되는 듯 보이는 다른 모든 지식

과 사유체계조차도 마찰없이 수용하고 활성화시키며 오히려 보완해 준다.

 

사람들이 개종을 할 때에 이성적인 판단에서가 아니라 정서적인 이유로 그

렇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유신교(有神敎

)의 계시가 다른 종교에 비해 이성적으로 더 잘 납득되어서가 아니라 오히

려 그 종교의 신조나 집회 분위기에 감정적으로 더 끌리고 또 심지어는 어

린 시절에 강요되었던 교리에 저항하려는 단순한 충동 때문에 그렇게 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남들은 종교를 가지지

않고도 잘 사는데 굳이 종교를 택하는 것이 단순히 기분에 맞거나 이국적인

분위기에 끌려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 사람들도 있다.

 

다만 합리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미묘한 입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종교를

갖는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라고 일률적으로 단정하려 든다.

모든 종교를 거부하는 합리주의자의 마음 속에는, 자기 동포와 조상들의 신앙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으로 여기고 자기네 종교도 구식일진대 남의 것은

말할나위가 있겠느냐는 식의 감정이 뿌리깊게 숨어 있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일종의 충성이지 정확히 말해서 합리적인 태도는

아닌 것이다.

 

신을 믿는 종교나 휴머니즘의 어정쩡한 윤리체계보다 불교 쪽이 더 많은 것

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고 결론지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수수께

끼 같고 온통 앞뒤가 안 맞는 이 인생살이를 좀더 포괄적인 안목으로 관찰

하고자 애써 왔고 또한 유신론이나 휴머니즘이 주는 해답보다 더 수긍할 만

한 것을 추구해 온 나머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경우가 많다.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놓고 초자연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

드는 종교가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아예 그런

설명조차 해주지 않는 체계가 더 낫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주에 관해서 또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위상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든

간에 우리들의 사고구조 안에는 이미 목적론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작용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즉 목적과 가치의 문제들이 인생의 구비마

다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시치미를 떼

고 있는 합리주의자들은 기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며 이는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교의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종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은 합리주의가 과학적인 근거 위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나없이 좋아하는 이 ‘과학적 견해’라는 인기 있는 용어를 좀 더

명확히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언제라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는

사항들에만 얽매어 있는 견해를 과학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을 과학적

이라고 친다면 걸출한 과학자들이야말로 참으로 과학적인 견해를 갖지 못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과학에 있어서의 발전이란 예외없이 기존 지식의 영

역을 훨씬 뛰어넘는 비범한 상상력에 의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틀을 깨지 못하는 마음은 빛을 향하여 뻗지 못하는 식물과 마찬가지로 이미

죽은 존재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정립함에 있어 먼저

일종의 영감으로 깨닫고 그 다음에 과학적으로 그것을 입증했다고 해서

어떻게 그를 과학적인 견해를 갖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과학적 사유는 물질 세계의 현상을 추적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

계화시키는 데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 사유가 보다 심오한

성찰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걸음이 굼뜰 수밖에 없어졌다. 과학은 세상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예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과

학의 관심 영역은 이처럼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으며, 불

행하게도 이런 추세는 전문화된 지식이 축적되어 갈수록 날로 더 심화되어

가고 있다.

 

급기야 우리는 과학지식 분야를 마치 지도상의 국경선처럼 명확하게 선을

그어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지도는 임의로 그어놓은 구획선을 있는 그대로

만 보여주면 그만일 뿐, 그 분할 이유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 그것은 완전

히 다른 영역의 일로서 역사학자의 소관일 테니까. 마찬가지로 과학자들도

자기의 전공 분야만 파고들면 그만이지 그것이 어떤 모양새로 어떤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거창한 문제의식 같은 것은 거들떠 볼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를 진실로 여기고 있으며 그 이론의 전반적

인 흐름에 어느 정도까지는 친숙해져 있다. 그렇지만 이 복잡다단한 진화과

정이 도대체 왜 시작되어야 했으며, 또 일단 시작되었다면 그토록 장구한

세월에 걸쳐 끈질긴 시행착오를 거쳐, 초보적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시작하

여 마침내 불완전하나마 고도로 복잡한 오늘날의 인간구조로까지 변형시켜

온 추진력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고 이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

는 것을 과학은 별로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창조주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그런 창조주의 존재가 우주의

구성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 뿐더러 실질적으로 있을 수도 없다고 보게

되자,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목적이라든가 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원리와

같은 일체의 가치 문제는 아예 제쳐놓아도 무방하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일반인들은 과학이 그런 문제들을 도외시해 버리자 그 점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거나 또는 이미 해결된 것으로 믿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과학이라는 하나의 신화가 탄생하게 된 것은 과학자의 과실이

라기보다는 과학을 전지전능한 것과 혼동한 일반인들의 책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전문 지식인들 중에도 우주의 모든 현상들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는지를 아직까지 과학이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러한 것

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지식의 지평이 넓어짐에 따라 그

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과학은 얼마 전까지만 해

도 초자연적이라고 여겨지던 것을 점점 더 수용하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형

이상학적인 면을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세밀하면서도 포괄적인 관찰없이

는 과학이 점차 형이상학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고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야기할

때 생명체가 처음에 무생물 상태에서 화학원소들의 우연한 결합으로 태어

났으리라는 가설은 설득력 있고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생명

체가 최초에 무생물로부터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지고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연적인 전개 과정에

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적절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생명의 발생과 진화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지구 이외의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발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왜 그것이

단세포 원형질 단계에서 끝나지 않았을까? 또 그 단계에서 머물지 않았다면

어째서 기본 형태들을 단순 반복하지 않고 실제로는 유기적이고 감각적인

기관을 꾸준히 늘여가면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계속 발전하였는지,

그것이 의문으로 남게 된다.

 

흔히 이런 의문에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본

질적으로 목적론적인 차원의 대답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진화가 그런 식으로 전개되도록 지능적인 방향 제시를 해준

그 무엇이 있었을 터인데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특정한 필요성을 식별해낼 수 있고 또 자연도태라든가 기타 생물학적인 원

리에 따라 작용하여 필요한 기관을 만들어내게 한 그 어떤 것이 있었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생명체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유기적인

자체통합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세부적인 내용들

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연도태라는 순전히 부정적 이론만으로는 해석

될 수 없는 적극적인 유기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소극적 과정이 벌어지기 이전에 먼저 적극적이고 능동적 과정이 벌어지

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태를 주도하는 어떤 전지전능한 힘이 존재

한다고 보지는 않지만(만일 그런 힘이 있었다면 시행착오와 같은 서투른 진

행과정이나 무모한 소모는 생략될 수 있었을 터이므로), 그렇다고 해서 과

연 이러한 문제 자체를 적절치 않다고 팽개쳐 둘 수 있는 것인가?

 

생명체는 그 최초의 형태들만으로도 주변 환경 속에서 살아 남는 데에는 적

합했던 것이 분명하고 그 중에 많은 것들이 아직까지도 살아 남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단순히 살아 남고 번식할 수 있는 생명체

를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그 형태가 완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소의 이동마저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 식물이 움

직이지 않고도 주변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면서 훌륭히 존재하고 있는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활동은 입과

소화 및 배설기관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단세포 동물이 그 이상의 기관

들을 발달시켜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그 원시적 형태에 연이어 눈, 지느러미, 다리, 날개 또는 그밖의 꾸밈새를

위한 갖가지 따위가 나타났어야 할 필요성은 없지 않았겠는가.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한 투쟁의 산물로 간주하고 싶어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현상들이 바로 그 투쟁의 원인이 된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관점

중에 어느 것을 취하건 간에 하나하나의 필요성을 미리 감지하고 그 필요성이

충족될 때 까지 갖가지 실험을 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 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다윈같은 뛰어난 천재도 이 문제에 부심한 나머지 체내의 모든 세포가 그

대표를 생식세포에 보내어 의회에서 하듯이 다음 세대에 가장 알맞는 방향

을 토론하게 한다는 이론을 어거지로 짜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소심한

추종자들과는 달리 가치차원의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여 마

지 않았다. “모든 관찰은 그것이 소용이 닿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가

치관을 뒷받침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못 보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고 다윈은 그의 자서전에 쓰고 있다.

그래서 그도 필요성에 부딪치게 되자 서슴치 않고 세포를 사고하고 의지(意

志)를 가지고 욕구를 지닌 실체로 보려고 했다.

 

무엇이 동기를 유발시키는 충동을 감지하는 주체인지 규명하지 못하면서 그

동기의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석연치 않지만 이 경우 아직 달리 대안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를 바꾸어서 생물에게 있어서의 세대

를, 어떤 욕구와 그것의 성취를 이어주는 고리의 개념으로 보는, 즉 세대

간의 접속원리같은 것을 상정해 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 진화론은 이러한 가설을 용납하려 들지 않겠지만 이러한 가설을

비논리적인 사변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고 해서 그 필요성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진화론이 남겨 놓은 그 미진한 부분이 메꾸어지는 것

도 아니다. 무언가 의지와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안 이상에는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 알아보려 드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할 것

이다.

 

또 그 의지란 것이 목표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 머뭇거림이 많고 그 작용 역

시 엉뚱하며 도덕성과도 전혀 무관하다면 우리가 이 의지를 두고 꼭 전지전

능하고 자비로운 창조주의 활동이라 믿어야 될 이유는 없어지며, 따라서 그

활동력이 나오는 원천을 다른 데에서 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물체가 매우 복잡하고 세련된 구조 쪽으로 진화해 가는 것이 오로지 살아

남기 위해서만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될 만한 원인을 다른 데에

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도의 감각기관을 갖추는 것이 살

아 남는 능력 자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지만 ‘즐기는’ 능력 면

에는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나무가 사람보다 더 오래 살지만 즐거움의 추

구라는 측면에서 사람의 삶이 나은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생명체에게 있어 목숨 부지만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해

진다. 즉 쾌락의 충족이라는 또 다른 동기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조금 거들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 뒤에 존

재하고 있는 생존의 목적이라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생존은 이 쾌락 충족이

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필수요건일 뿐이다.

 

요컨데 생물학적 진화는 쾌락의 원칙에 따른다. 진화의 목적은 보고[眼] 듣

고[耳] 냄새 맡고[鼻] 맛 보고[舌] 피부로 닿고[身] 그리고 생각하는[意]

즐거움이라는 고도화된 감각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유기체로 발달해 가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욕망을

불교에서는 생명을 지속시키는 추진력이라고 단정한다. 이러한 욕망이야말

로 어떤 발달 단계에 있든지 지상에서건 다른 행성에서건 모든 생명체 뒤에

숨어 있는 원인적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갈망 또는 갈애를 의미하는 짤막한 단어, 딴하(Ta聰 가 불교에서는

창조주의 자리를 점한다. 이러한 갈애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어서 창

조의 과정도 영원히 돌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조물주와같은 어떤 최초의

원인같은 것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시작이

있었고 언젠가는 끝이 오겠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성주괴공(成

住壞空)하는 연속적인 우주 과정중의 하나일 뿐이며 이 과정에는 맨 처음이

라는 것이 없다[無始無終].

 

불교적 우주관에 따르면 어떤 세계가 끝나게 될 때 물질은 무기상태가 되고

그 기간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혼돈상태에서 차츰 새로운 세

계나, 섬우주(island universes)가 형성되고 거기에 생명이 또 다시 나타나

게 된다. 그럴 때에 생명은 현존 우주의 직전 단계에 살았던 존재들의 재생

이며, 그 업력이 자연계의 화학적 작용과 더불어 유기체를 만들어내기 시작

한다. 이 변화 과정은 「장부경(Digha Nikaya)」의 「악간냐경(Agga a Sut

ta)」註1`등에 직접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진화에 관한 불교적 설명을 납득하는 데에는 지구상에 나타난 최

초의 생명 조직의 지질학적 단서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

하다. 최초의 생명체들은 원형질의 상태로만 존재했기에 당연히 화석과 같

은 자취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출현 이전에 그들과는

다른, 더 희박한 실체를 가진 어떤 존재들이 있었을지도 모르며 「악간냐경

」의 서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정확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갈애는 정신적 충격력註2이며, 불교에서는 정신적 에너지를 여러 가지 측면

에서 전기나 전자파(電磁波)와 유사하다고 본다. 사고(思考) 충격력이 그런

전기나 전자파와 유사하다는 것은 뇌파사진(腦波寫眞)에 사고작용이 파장

형태로 나타난 것에서도 드러난다. 또 정신작용의 하나인 텔레파시의 존재

는 꽤나 이성적인 사람들까지도 만족할 만큼 증명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것

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논

의는 하지 않겠다.

 

초심리학註3에서 다루는 심령현상의 문제점들은 물론이고 우주운행의 주요

원리도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방법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현대

과학은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전류는 적당한 조건하에서 열이나, 빛이나,

소리나, 힘같은 것으로 변환되지만 아직까지 그 본질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

고 있다. 중력은 은하계의 별들을 있을 자리에 있게 해주고, 달은 지구 위

에 조수를 일으키고 있지만 우주공간에 떠 있는 달과 지구상의 바닷물 사이

에 어떤 물리적 관계가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는 중력이

질량을 가진 물체 자체의 속성인지 아니면 휘어진 공간의 특수작용인지 조

차도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하다. 과학이 모든 현상들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

는 사실은 지적하면서도 그 관계를 과학적인 개념으로 다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유념하자. 심지어 인과법칙 자체를 아예 무시하려는 과학철

학자들도 없지 않다. 힘[力]의 본질은 그 실체를 밝힐 수 없어서 아직도 불

가사의로 남겨둔 채 과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힘의 작용만을 조사하고 측

정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왔다. 물리학 분야가 이 정도라면 유전

학이나 생물학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불교에서는 한 개체가 다음 개체로 생을 이어 갈 때에 정신적 에너지가 신

체 진화과정에 결정적 작용을 하는 바, 그 진화 과정의 방향과 목적을 결정

짓는 것은 갈애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을 들으면 유물론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겠지만 그러면서도 막상 불교의 이론이 기존의 과학적 사실

의 무엇과 맞지 않는지를 지적해내지는 못한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생각

이나 의도같은 것도 이 우주 내에서 가시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데에 저명한 과학자들의 의견을 빌리기까지 한다.

 

 

이 인간 세상에서는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는 마음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가

없는데 이것은 마치 전류가 열이나 빛 또는 에너지로 변환하기 위해 전선이

나 전구 등 비중을 갖는 매개체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사람들은 마음이 물질의 소산이라는 근거없는 추측들을

해왔다. 근거없는 추측이라고 하는 이유는 같은 현상을 놓고 물질이 마음

의 소산라고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양 극단을

버리고 물질과 정신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다시 말하면

진화 방식에 따라 태어난 생명체들은 과거로부터 유전(流轉)되어 온 존재

의지, 즉 갈애에 뿌리를 둔 유(有, bhava)註4의 흐름의 결과이며 그 유(有)

는 중생의 다양한 존재 단계에서 받는 구체적인 몸의 형태를 통해서만 인식

될 수 있다. 이렇듯 마음이랄까 또는 정신적 에너지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질에 의지하여 작용하기도 하고 물질 자체에 작용하기도 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아주 강렬하게 시사하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사건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이 우주는 역동

적인 변화가 뒤얽혀 있는 곳으로서 그 속에서는 완성의 상태에는 이르지 못

하고 실제로는 영원히 ‘존재로 익어감(becoming)’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

장이다. 이 주장이야말로 부처님이 처음 가르침을 펴실 때부터 우리에게 보

여 주고, 일깨워주신 진리가 아니겠는가.

 

불교의 재생이론은 흔히들 많이 오해하고 있듯이 한 영혼의 전이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영속하는 실재가 있다는 것을 전

적으로 부정한다. 죽은 다음에도 개체가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존속하

거나 불사(不死)한다는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개체라고 하는 것

은 소위 심신이라는 오온의 집합체로서 그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또한 과거

에 마음이 빚어낸 업인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연기(緣起)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며 결코 영

구불변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개체가 누리고 있는 생은 그 어떠한 것도 과거

생과 내생 사이의 일시적인 이음일 뿐이며 우리가 소위 생이라고 하는 것

은 인과(因果)의 연속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노인은 어린시절의 그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고, 과거의 어린이는 영원히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과거의 그 어린이가 있었기에 그 결과 지금의 노인

이 있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하나의 선을 이루는 이 인과의 흐름 속에 어린

이와 노인이라는 두 점을 설정하면 그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이음고리가 있

고 따라서 그 가운데 어떤 특정한 지점을 골라가지고 “이 부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것이 그의 본질이고 진정한 자아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음 뒤에 살아 남아 재생하게 될, 자아의

총체라고 할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영혼이 불변하는 정수(精粹)를 가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고전위(思考電位)註5 의 전송이 있으며 이로

인해서 존재 의지가 나타나 새로운 존재(인과연쇄상의 다음 단계)를 만들

어내어 과거에 발전시킨 성향들을 다시 가동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쓰고 있는 윤회(Palingenesis)라는 개념도 바로 이 새로운 개

체 속에 스스로를 재현하려는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윤회라는 용어를

헥켈(Haechel) 식으로 생물학적 뜻으로만 쓰지 않는다면 불교의 재생개념

을 표현하는데 대단히 유효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현대 과학이 유전학 분야에서 알아야 할 것은 다 밝혀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과학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물론 어떤 종(種)의 복제

를 단지 기계적인 과정만으로 한정했을 때 그 부분에 관한 과학적 설명은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현상을 해명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의 근본 단위를 구성하는 유전인자의

전달체가 DNA註6라는 화학물질이라고 규명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에 관련된 모든 필요한 정보가

이 DNA 속에 어떤 형식으로든 담겨져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이론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무엇을 알려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앞으로 태어날 존재의 청사진이 어떻게 그 유전자에 입력되

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알맞을 듯 싶지만 입력된 설계 내에서 일어나게 될

다양한 변화들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변이(變移)

는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이 작은 변이 때문에 진화

도 가능한 것이다. 조만간에 인간들이 DNA도 합성해낼 수 있다고 하기는

지만.

이러한 이론은 개인 특유의 사고방식, 성격상의 특징,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정 동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복잡한 본능적 행태 등, 모든 것을 어

떻게 그 화학물질 속에 요술처럼 고스란히 불어넣을 수 있는지는 설명할 엄

두조차 못 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라디오를 처음 보는 미개인이 음악소리

를 듣고 라디오 속에 연주가가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

다. 지금 그렇게 단순한 미개인이 어디 있으랴만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

런 식의 주장을 하는 과학적 이론가들을 만나고 있지 않은가. 플로베르(Fla

ubert)가 살았던 19세기나 지금이나 그의 말처럼 유전이론이 제대로 이해되

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DNA의 실제 기능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대

로일 테지만 그래봐야 DNA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떤 힘을 전달하는

물리적 도체(導體)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그 알려지지 않은 요소

란 곧 업(業)이고 DNA는 재생의 과정에 수반하는 한낱 보조 물질일 뿐이다.

 

부처님이 창조신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한 적이 없고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

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말이다. 부처님은 창조주 또는

절대자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하였으며, 그의 사상 체계에는 절대자가 발

붙일 여지가 없다. 부처님이 영원한 세계와 같은 절대론적인 세계관에 대해

서는 논의 하기를 거부하신 것은 불가지론자들처럼 지혜가 부족해서는 아니

었다. 오히려 그것은, 범부(凡夫)의 마음[識]이 순전히 지적(知的) 기능만

가지고는 상대적 개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전혀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

이며 또한 시공의 세계를 벗어난 경험 영역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

다. 우리는 오직 비교와 대비의 방식으로만 말하고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개

념의 전달이란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또 명명할 수 있는 사물들에만 국한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 진리에 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도 우리는 우주생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최초 또는 조물주라는 제 1원인을

굳이 들먹이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고 습성이 상대적 관념

에 깊이 젖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의 육체적 움직임이 공간의 개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의 사고도 관계와 연속의 개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무시무종(

無始無終)의 시간에 시작이 있다는 생각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는 형이상학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다. 아인슈타인 수학의 휘어진 공간

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시작과 무관하다는 이 진리는 형식 논리나 의미론으

로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도 물체와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상관관계로부터 나온 것임을 상기하면 필연적으로

가당착임을 알 수 있다.

 

사물과 그 사물의 운동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어떤 시간도 결코 있을 수 없

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흐르고 있는 시간상의 어떤 특정 시점에 이르러 이

우주가 마치 아무 것도 없던 데에서 홀연히 생겨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

는다.

 

 

이렇듯, 윤회라는 생명의 흐름에는 시간상의 시발점이 없지만 그 개체가 스

스로 그 흐름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있다. 인간은 이 지겨운 윤회라는 개체

적 존재의 흐름에 끝을 낼 수 있고 불교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신 계발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이 갈애라는 헐떡거리는 충동을 완전히 멸진(滅盡

)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심리전환을 이루면 고도의 인식 및 통찰

기능의 발전이 따라오고 그 결과로 조건지워진 존재를 넘어서 저 실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

 

부처가 지녔던 지혜가 바로 이런 것이었으며 그가 가르친 교리에서 이러한

지혜의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사실 부처의 그 교리는 다른 종

교들의 교리와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에 과연 이런 교리를 ‘종교’라는 범

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사실을 충분히 관찰하고 분석해서 원인과 그 상관관계를

파고드는 특유의 접근 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른바 이 세

상에 종교라는 것들을 펼쳐 놓은 허다한 독단적 신비주의자들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과학자들이 채택하는 방법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의 탐구 영역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마음의 세계였다. 어쩌면 우리

과학의 미래도 그쪽 방향에 있을는지 모른다. 외부 세계를 아는 것은 단순

히 지식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지혜인 것이다.

 

휴머니스트나 합리주의자들의 관점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금생 이후에 계속해서 닥치게 될 경험에 대해서는 시사해 주는 것이

전혀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들에 의하면 선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그

생애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사람이건 모두 똑같이 하나의 귀결점, 저 어

두운 망각의 세계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엄청난 허망, 또 얼빠진 무의미, 그

것이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인류의 진보를 위해

서 헌신해 온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보람을 누릴 여지가 없어지고 심지어

그들이 이바지해 온 진보가 허망이 아니라 실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채

죽어가야만 하지 않겠는가.

 

물론 금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할아버지들 세대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보

를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화가 일직선으로 완성을 향해 달음질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만 한다. 과학은 한손으로는 달가운 선물을 내미는 척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 선물을 곧 바로 파괴시키는 짓을 되풀이하면서 이

제는 자신이 쫓아내었던 그 신들의 자리를 재빨리 차지해가고 있다. 과학이

선천성 정신장애나 불구와 같은 질병들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근거는 어

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럴 수 없다면 결코 모두에게 행복을 보장한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과학이 이룩한 물질적 기여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

는 엄연한 사실이나 결국 생의 주된 목표로 삼고 있는 그 ‘행복’을 가져

다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많은 욕망만 안겨 주었다. 결코 채워지는 법

이 없는 이 욕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헐떡거려야 하는 것

일까.

 

이런 점은 접어두더라도 인생을 보는 합리주의자들의 관점이 윤리 도덕에

대해 하등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 욕망의 가짓수는 늘어나는데 보다 순수한 도덕성을 기대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한낱 바보같은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만

약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생물학적 진화의 목

표를 이 점에만 국한시킨다면 그 견해를 마땅히 수용해야겠지만-그것이 사

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가장 많은 즐거움을 경험하는 유기체가 가장 성공적

인 존재라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그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물학의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법칙은 다른 약한 생명체를 희생시켜야만 생존

과 쾌락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도덕률이든지 간에 이러

한 식의 생존 체계에 적용시켜 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

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부자연’스럽다는 표현을 보면서 한 편으로 ‘자연’스럽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연이란 원래 도덕성

과 상관이 없는 것인만큼 생존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자기보다 약한 생명체

를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휴머니스트들이 진지하게, 남을 위해서 일할 때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

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사고의 바탕이 되는 합리주의를 부정하

는 셈이 된다.

 

그런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유

형의 사람들은, 도덕과는 무관한 세계에 그 종교가 부여했던 윤리적 가치를

종교가 외면 당하게 된 후에까지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면 자연의 생존원리와는 반대로 자기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이 기묘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다른 설명이 여기에 있다. 불교가 제공하는 설명이다. 이 무자비한

세상에 자비를, 정의가 없는 세상에 정의를, 이기심 위주의 생존체계에 이

타심을 도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선하다고 하는, 보다 큰, 대(大) 합리주

의가 그것이다. 사실 이 대합리주의는 선근을 갖춘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어서 어떤 철학을 표방하고 있던 간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

잠재의식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고급스러운 본능을 합리의 세계

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자신에게 걸머지운 그 한계선 밖으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 종교와 과학 양쪽의 독단을 버리는 것이 필요

하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불교적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아

메바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삶의 갖가지 현상들은 갈애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따라서 영원히 불만족스럽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모색하고 추구해야

할 다른 성취목표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도덕률은 인과라는 보편 법칙

에 내재하고 있는 핵심이라는 진리이다.

 

자기 중심적인 가치에 역점을 두고 있는 끝없는 생존경쟁 대신에 불교는 보

다 높은 차원에 이르러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완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욕망의 소멸이며 생존욕구의 궁극적 종식이다.

 

이러한 것이 삶의 목표가 될 때 도덕성은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위

축시키는 방해물일 수가 없고 다만 논리적 필연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휴머니스트가 인류를 위해 봉사할 때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도 일

체를 포용하는 자비심으로 확대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자아라는 것은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단지 소극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생명 예찬자에게는 그렇게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이 누리는

행복을 두고 낙관, 비관을 떠나 사실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현실적 태도로

견해를 재정립해 보면 소극적이니 적극적이니 하는 대립 개념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대립개념들은 전혀 새로운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모든 생명과정이 불교가 가르치고

경험이 확인시켜 주는 대로 무상 絪무아일진대 그 과정의 정지, 즉 열반이

야말로 유일한 실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재는 비실재의 언어로 서술될 수 없다.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부처님 그분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라, 그래서 너 스스로 보라.”`

 

불교는 우리에게 신심으로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부처님이야말로 맹신

을 비난한 역사상 유일한 종교 지도자였다. 과학에 대한 숭앙도 결국 또 다

른 형태의 종교에 다름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와 닿

는 이유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불교는 보다 넓은 합리주의로 나아가라고 우리에게 문을 활짝 열어 주고 있

다.

 

주해

 

1) 악간냐경(起世因本經 Agga a Sutta):장부경 27품. 부처님이 Pubb a

에서 오세따와 브하드라와쟈에게 해주신 설법. 이 세상의 출현과 인간

회의 발생 廢┑ 불교적 입장에서 설명하시며, 인도의 브라만 계급이 브라

흐마[梵天]의 정통 후계라는 주장은 검토 适ㅅ퓸杵蔘맨構殷정의(正義)는

혈통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포하신 경.

 

2) 충격력(衝擊力, impulse):인간을 윤회의 수레바퀴에 얽어매는 탐 套치

삼독심의 하나인 갈애(貪, craving.ta聰 를 물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한 말.

물리학 용어로 영어의 impulse는 충격,충격량,순간력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

 

3) 초심리학(超心理學):투시,영감,텔레파시등과 같은 심령현상을 실험적 방

법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

 

4)유(有, becoming, bhava):업이 존재로 익어가는 과정. 이들 존재들이 윤

회하며 욕계,색계, 무색계를 이룬다.

12연기법상에서 10번째의 고리.

 

5) 사고 전위(思考電位, thought potential):죽음의 찰라에 존재하는 사식(

死識). 보리수 잎 白<인과와 도덕적 책임> 43 쪽 9행 이하 참조.

 

6) DNA:핵산, 세포 안에 있는 유전적 성질을 결정하는 물질. 세포 속의 염

색체에 있는 유전자로서 단백질 합성 명령을 내린다. 이 DNA는 이중4선의

결정구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