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정근(精勤)-와뽀 스님

rainbow3 2020. 5. 29. 18:46

정근(精勤)

 

와뽀 스님 지음

재연 스님 옮김

 

EARNESTNESS

by

VAPPO THERA

 

(BODHI LEAVES NO. B.`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정근(精勤)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간곡히 이르노라.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

다.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Vayadhamma sankhara, appamadena sam

padetha ti``)

 

이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며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를 거듭

몸받게 만드는 탐 套치와의 싸움을 멈추지 말아 기어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시는 당부이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악을 극복하고 선근을 키울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

다고 보증해 주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참으로 흐믓함을 느끼

게 됩니다. 우리는 악을 이겨낼 때 기쁨과 행복을 얻게되고 또 마음 속에

선함을 일으키면서 역시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삿되고 해로운 일들을 버리고 그대들 마음

속에 선함을 일으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아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면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힘과 노력을 쏟아 정진하라고 이르지 않았을 것

이며 “나는 정진을 가르치는 스승이다”라는 말씀도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용맹으로 훈련쌓고 결의를 다지며 분발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뒷걸음질일랑

꿈도 꾸지 말고 불퇴전의 열의와 인내심을 지니며 마음을 챙기고 정견을

계발하며 밤낮없이 정근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부처님을 보고 부인(否認)하는 자, 제압자, 경멸하는 자, 그 무엇

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자 등으로 비난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로 그 무엇도 아랑곳 하지 않는 분이 부처님이다. 여래께서는 모든 형

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들에 대해 조금도 연연하지 않으시니까.”

 

“애착 없으신 분이 부처님이다. 그분은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

따위에 대한 애착을 다 부숴버렸으니까.”

 

“부처님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분이다. 그분은 생각, 말, 행동으

로 악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치시니까.”

 

“부처님은 소멸을 가르치시는 분이다. 탐욕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미혹의

소멸을.”

 

“부처님은 경멸하시는 분이다. 생각과 말, 행위로 하는 모든 악행을 경멸

하니까.”

 

“부처님은 거부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탐욕과 악의, 무지 그리고 모든 불

건전한 것들을 거부하니까.”

 

“부처님은 제압자이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모든 악행과 해로운 것들을 제

압하라고, 마음과 입과 몸으로 짓는 모든 악행을 제압하라고 가르치시니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제압하신 분을 우리는 제압자라고 부르는 것

이다.”

 

“부처님은 추방당한 분이다. 윤회로부터 쫓겨나 다시는 태어날 수 없으니

까.” [증지부경. VIII, 11]

 

“정근은 불사(不死`:`열반)로 가는 길

방일(放逸)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

정근하는 자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를 것이며

방일하는 자 이미 죽은 것과 같도다.”

(Appamado amatapadam, pamade maccuno padam

appamatta na miyanti, ye pamatta yatha mata`)

[법구경. 21]

 

“`허다한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증득한 경지, 어찌 나라고 얻지 못할까 보

냐? 건강하고 신심에 충만한 이 몸, 위선자도, 난척하는 사람도 허풍쟁이도

아니다. 내겐 의지력이 있고, 모든 감각대상들은 무상하고 고(苦)에 매인

것이며 종양, 가시, 고통, 짐, 적(敵), 장애, 자성이 없는 것임을 나는 안

다. 어찌 나라고 해탈과 열반을 희구하지 못할까 보냐?`”

 

마하와챠고따 경(Mahavacchagotta` Sutta`)에서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들

만 해탈을 성취한 것은 아니다. 세속에 살면서도 마음 속의 속박과 장애를

이기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재가불자들 또한 세 번째 성위(聖位)인 불래(不

來:anagamin`)의 과(果)를 성취한 이들이 많았느니라. 그들은 두 번 다시

이 사바세계에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질만능의 시대를 맞고 있는 바로 지금, 이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커다란 격려와 용기를 줍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현대문명 속에선 아무리 원할지라도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는, 즉 수

행할 수 있는 시간과 여가를 마련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속에 고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커다란 격려와 용기를 주는 법음인 것입니

다.

 

부처님께서는 거듭거듭 보장해 주십니다. “그대들도 뜻을 세울 수 있고 행

동에 옮길 수 있고 정진으로 그대들의 품성을 바꿀 수 있으며 마침내 해탈

할 수 있느니라.”

 

해내겠노라고 마음먹은 사람은 이미 반쯤 목표에 다가선 사람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의지는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 악행과 고

(苦)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덕행에서도 그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해로운 짓을 하려드는 의도를 없애라고 가르치십니다. “의욕

은 의욕으로써 극복되나니”, 성스러운 경지를 성취하겠다는 의욕으로써 그

경지를 이룬 뒤에야 성스러워지겠다는 의욕 자체가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

다.

이디빠다 상유따(Iddhipada-Samyutta`)註2의 한 경에서 우나바(Unnabha`)라

는 브라흐민이 아난다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수행자 고타마께서 가르치신 성스러운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하고자 하는 의욕(Chanda`)註3을 버리기 위해 세존께 귀의하여 성스러운

삶을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욕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있을까요?”

“브라흐마나여, 실로 그런 방법이, 길이 있습니다.”

 

“아난다 스님, 의욕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무엇입니까?”

“어떤 수행자가 신족[神通具足]을 성취하기 위한 네 가지 정진, 즉 의욕삼

매(意慾三昧:Chanda-samadhi`), 정진삼매(精進三昧`:Viriya-samadhi`), 염

삼매(念三昧`:Citta-samadhi`), 그리고 사유삼매(思惟三昧`:Vimamsa-samadh

i`)를 닦는다면 그것이 곧 의욕을 버리는 방법이며 길이 됩니다.”

 

“아난다 스님, 그렇다면 거기에는 끝없는 의욕이 있을 뿐 의욕의 소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의욕으로 의욕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

다.”

“브라흐마나여,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뜻대로 대답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처음 당신은 ‘절에 가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났고, 여기 왔을

때 처음의 그 의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스님.”

“성스럽고, 탐욕에서 벗어나 완성을 이룬 아라한, 해야 할 일을 마쳤으며

짐을 벗어 버리고, 완전한 지혜를 통하여 해탈을 성취하신 성자도 그와 같

습니다. 그분이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여 가지고 있던 의욕(chanda)과 정진(

viriya`), 마음(citta`), 사유(vimamsa)등은 아라한과를 증득하자 모두 사

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브라흐마나여, 여기 의욕에 끝이 있습니까, 없

습니까?”

“아난다 스님, 그러하다면 실로 거기에는 의욕의 끝이 있습니다. 결코 끝

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의도(cetana`)를 통해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행하게 되

는 것이니, 나는 의도가 곧 업[行, Kamma]이라고 말하노라”고 부처님께서

는 밝히셨습니다. 의도, 즉 마음먹는 것이 곧 행위이며, 일단 마음먹은 것

은 그 누구도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정신능력을 높이고 계발하고자 열심히 정진하는 자만이 대다수 사람들

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사랑하면 진실해지고 속된 것을 사랑하면 속물이 되리.”

 

개개인의 신념은 자신의 깊숙한 속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자신

이 사랑하는 바가 곧 자신이 되며, 다시 그러한 자신을 그는 사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그 신념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모든 생각은 그

생각의 대상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알고 행하는 사람은 바른 이해[正見], 바른 생

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

[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름으로써 이 생에, 아니면 다음 생에 또는 미래의 어느 생에 열

반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팔정도에 귀의하고 그 안에서 최상의 치유법을 찾아 전심전력 정진

하십시오.

마음의 평화가 영원한 행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진리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내면의 경험으로 체득하여 아는 일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니’ 실천되지 않는 앎은 참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팔정도를 취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떡맛을 제대로 알려면

먹어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참된 불자(佛子)들은 바깥에 나타나거나 내면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바세계

의 현상을 바로 알고자, 즉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현상들이 인연 화합으로

생겨나 사라지는 것임을 꿰뚫어 보고자 노력하면서, 지혜를 얻기 위해 밤

낮없이 정진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드높고 거룩한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됩

니다.자신을 제어할 수 있게 되어 마음 속에서 흘러가는 건전한 생각들과

건전치 못한 생각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늘 성성하게 깨어 있고, 바른 수단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취하

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삼가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한 삶을 삽니다. 거친 말을 쓰지 않으며 다투는 일을 삼가

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좋지 못한 일들을 잘 다스려 가라앉힙니다. 모욕을

당해도 흔들림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키며, 남을 비판한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도 해치는 일임을 알기에 일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불자는 자신의 생각과 말씨, 행동 모두를 언제나 분명히 알고 있으

며,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항상 알맞은 말만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자는 자신의 안녕과 남들의 안녕, 그리고 온 세상의 복

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비록 온갖 무지와 탐욕, 증오와 미혹에 쌓인 것이 인간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바로 친절, 자비, 연

민,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의 끈이 그것입니다. 그 끈은 우리를 자연계

속에서 살아가는 다 같은 존재로서 한데 묶어줍니다. 최상의 지혜를 얻고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을 성취하는 일이 인간의 구극 목표라는 것, 필요 조

건들을 갖추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그것은 하

나의 허황된 꿈이 아니라 모든 선각자들이 선포한 진리입니다.

 

재가불자이거나 출가 수행인이거나 간에 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은 해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고

성스러운 목표인 열반을 틀림없이 증득하게 됩니다.

 

성스러운 팔정도를 점진적으로 닦아가다 보면 그 길은 세속을 벗어나 탈속

의 세계에 이르고 성도(聖道)를 따라온 수행자는 속인의 수준을 넘어 초인

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완성을 이루신 분이 곧 부처

님이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깨달음과 해

탈을 향해 정진 노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세기, 어떤 특정한 시대에만 깨달음이 가능하고 해탈이 얻어지

는 것일까요? 아니, 거기에는 세기나 시대의 제한이 없습니다. 누군가 발심

하여 팔정도를 닦고, 불 廻승 삼보를 일심으로 염(念)하며, 계행(戒行)과

선정력(禪定力)의 자라남을 기뻐한다면 해탈의 성취라는 최상의 목표가 달

성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밝히신 진리는 이렇듯 어떤 특정한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

다. 그것은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다만 지혜로운 이들만이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알고 실현할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탐욕에 끄달리고, 증오에 끓고, 미혹에 눈 멀어, 마음이 덫에 걸린 인간

은 제 자신의 파멸과 타인의 파멸, 그리고 자타 모두의 파멸을 향해 가고

있나니, 끝내 정신적 아픔과 슬픔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탐욕과 증오,

미혹을 없애는 순간 모든 정신적 아픔과 슬픔, 고통이 부숴지나니 그는 이

제 ‘영원[不死]’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곧 성스러운 이, 부처님

의 가르침이요, 열반으로 이끄는, 시간을 초월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이니, 오직 지혜로운 이들만이 체험을 통해 아는 진리입니다.

 

불 廻승 삼보에 대한 열렬한 신심으로 충만한 수행자가 있는 한, 그런 수

행자들이 모여 조화로움 속에 살고 있는 한, 팔정도를 따라 수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며 선행을 증장하고 게으름을 멀리 하는 수행자가 있는 한, 만

인의 진리인 불법(佛法)은 지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만인의 복락을 위해서 정법(正法)이 지속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쓴 마구니들이 세도를 부리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 속에는 의도가 깔려 있는데 그 의도

가 우리의 미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모든 진리를 바로 알고 오직 진리만

을 알고자 하는 사람만이 정법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합니다. 한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견(邪見)은 순식간에 정법을 망쳐버릴 것입니다

.

 

진리는 하나의 크나 큰 장애를 안고 있으니 그것은 항상 진리를 가로막는,

미혹이라는 장애입니다. 정법의 가장 큰 적은 흔히들 생각하듯 의심이 아닙

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슴은 대단한 열정으로 뜨겁지만 머리가 빈 사람,

오직 자기방식만 고집하고 안주하면서 궤변만 늘어놓는 소위 머리좋은 사

람, 자신의 의견은 말하기 겁내며 그저 학교에서 배운대로 전통과 신앙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경건파, 마음이 편협한 광신자들-이들이야말로 진

리의 적입니다.

 

손에 든 진리의 횃불을 꺼트리지 않고 군중 속을 뚫고 나가기란 대단히 어

려운 일입니다.

 

해탈을 향한 길은 이미 분명히 제시되었는데도, 이 시대에 마음의 해탈을

이룩한 사람이 극히 적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팔정도의 길을 밟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이 세상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얼까요? 끊임없이 귀에 들려

오는 소리라고는 ‘놓아라, 놓아 버려라!’고 하는 따분한 노래 아닙니까?

“진리여, 그대는 왜 미리 나타나 살 날이 아직도 먼 우리를 괴롭히며 고민

거리를 안겨줍니까?”라고.

 

아무 분별도 못하는 무명중생의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따분함을 느끼는

바로 그 때 그 자신의 마음을 깊이 탐구해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세상 사는 알량한 꾀에 치어 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명확하고 분

명히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할 높은 정신력을 계발하고픈 의욕을 몽땅 뭉게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고귀한 제자는 이 세상을 보되, 실수들로 빚어진 하나의

미로로, 공포의 사막으로, 파렴치한 행위들이 고여 있는 늪, 야수들의 서식

처, 불운의 땅, 슬픔의 원천, 고뇌의 바다, 거짓 기쁨, 끝없는 고통, 욕심

과 증오와 미혹이 한없이 난무하는 곳, 가실길 없는 갈증, 잔치 자리에 나

간 해골, 금방 눈물을 몰고 올 웃음, 역겨운 냄새, 독이 섞인 꿀물, 발을

못 붙이게 뜨거운 바닥(활활 타는 불구덩이), 신기루, 악의 소굴, 끊임없는

불화, 잔혹한 전쟁터, 죽음의 숨결, 생존경쟁의 지옥, 끝없는 장례 행렬,

화려한 착각, 오만한 비참, 애도해야 할 행운, 껍질에 사탕발림한 쓰디쓴

약으로 가득 찬 약국으로 간주합니다.

 

<역자주`:`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염세 혹은 비관주의라고 오해하지 마

십시오. 앞에 이야기한 것들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상

기 하십시오. 즉, 달갑지 않은 상황이나 병을 치유하는 실제 행동에 들어가

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일은 사태의 정확한 파악과 진단입니다. 붕대로 감

아 살짝 가려두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 환자는 자기

스스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너무 매정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환자에게 가해질 정신적인 충격을 고려하여 사실을 덮어두는 일도 있습니다

.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설령 그것이 엄청난 충격일지

라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마음의 병으로, 부처님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인 사성제는 결국 고뇌에 찬 세계와 고의 원인, 고가 소멸

된 경지와 그러한 목표를 향한 팔정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케 하려는 것

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고귀한 부처님의 제자는 이 세상을 부추길 마음이 없고 모면

하려는 마음뿐입니다. 세상 안의 그 무엇도 애착가질 만한 가치가 없음을

그는 압니다. 그는 모든 신체적 현상[色]과 감각[受], 인식[想], 정신적 형

성력[行], 의식[識]을 무상(無常)한 것이며, 고(苦)요,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라고 압니다. 존재를 구성하는 이들 다섯 가지 요소, 곧 오온(五蘊)을

이렇게 통찰하는 불자(佛子)는 머지않아 심해탈(心解脫)을 얻어 지고의 행

복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건대 우리가 삶을 통해 추구해야 할 유일, 최상의 가치인 정신적 평

온,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가이없는 도덕적 용기를 낳게 하는 성스러운 팔정

도의 실천을 어떻게 자기학대식 고행이라거나 염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

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팔정도야말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넘치고, 세속적인 환상으로부터 진실의 세계로, 끊임없는 생존경

쟁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한 평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을 제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일 뿐입니다. 웃고

있는 세상의 가면 뒤에는 단지 기쁨과 환희만이 아닌, 다른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가면을 한번 벗겨보십시오. 거기엔 온갖 잔혹한 일들, 유아

살해, 합법을 가장한 갖가지 형태의 살인 행위, 노예제도와 속박, 절도나

강도, 노인과 의지할 곳 없는 이들 또는 재소자들에 대한 억압과 고문, 생

명 경시, 피를 물처럼 흘리게 만드는 적들의 공격과 대량 학살, 잔학 행위

에 재미붙이기, 갖가지 형태의 파렴치한 행위나 성적 타락 행위, 한계를 모

르는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을 그토록 환영하고 애지중

지하는 대중들과는 달리, 조용히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과 중생의

삶을 이처럼 직시합니다.

 

“자네, 그 어머니같다는 대자연 이야기로 날 곤혹스럽게 만들지는 말게나.

 

자연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논문을 제출한 제자에게 네겔리 교수는 말했습

니다.

 

“만약 자연의 본성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듯 그렇게 자애로운 것이었다

면 고양이가 그토록 잔인하게 쥐를 다루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때까치가

그토록 지독하고 무섭게 벌레를 찍도록 만들지 않았을 걸세. 자네가 예찬하

는 대자연 말고 도대체 누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본능을 동물들에게 불어넣

었겠나?”

“분명히 자연은 인류에게 놀라운 도구들과 설비를 부여했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쓸모가 있지만 그 어머니같은 자연은 어느 날 우리를 파괴

하고 말 것일세.”

 

“자연에게서 온정을 구하려 하지 말게나! 온정은 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

는 것. 우리는 자연으로 하여금 그가 가진 도구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네.”

 

사람들은 으례 삶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실질(實質)로 착각하고 달콤한 꿈과 환상으로 엮어진 도피처에 안주하여

제 스스로를 속이며 달래 보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물의 진상

을 직시하게 되면 몸서리를 치면서 “아이구, 선생님, 제발 그런 일들은 깊

이 따지지 맙시다”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거나 핑계를 대거나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감쪽같

이 자신을 속이는데, 자아나 영혼에 대한 탐구를 빙자하여 자신을 속이는

철학자들보다도 한수 더 뜨고 있습니다.

 

땅 위나 물 속, 공중, 그 어디에서나 모든 생명체들은 삶을 위한 끝없는 투

쟁으로, 영원한 생존경쟁에 얽매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 “서로

먹고 먹히는 일은 사바세계의 원래 모습” (annamannakhadika ettha vattat

i``)이라고 하셨겠습니까.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貪, 瞋, 痴]으로 인해 인간은 남을 희생시켜 제 살

길을 찾으려 속임수와 책략과 잔꾀로 이웃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마치 카인

이 그랬듯이 동기간을 약탈하고 종으로 삼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존경쟁은 더욱 살벌해지며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

는 소리들, 죽음의 공포 앞에 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끔찍스러운 단말마

의 절규가 하늘을 향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소름끼치는 범죄와 전쟁 장면들, 대량 파괴와 참화와 참혹한 불행의 현장들

을 목격하며 우리는 몸서리를 칩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인간의 가슴

속에서 채찍질하듯 괴롭히는 죄책감과 후회와 비난의 염(念)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죄 지은 마음이 이렇듯 괴로울 줄이야. 누구 불쌍히 여겨줄 이 없소?”

빌어 보지만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습니다. 죄책과 후회와 비난들은 죄

의식을 타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최후의 심판 광경이 죽음의 공포

로 겁에 질린 머릿속을 스쳐 지나 갑니다.

사람들이 올리는 기도가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하늘로 퍼져 나가건만 아

무런 대답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 가슴에 천국이 들어 앉지 않는 한

천국에 닿을 기도는 없어라.

사랑과 자비로 채워진 가슴

기도는 오직 거기서만 익을 뿐.

끝없이 생겨나는 슬픔들은

오직 그런 가슴 속에서만

가라앉으리.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 마음

부처님의 성스러운 법 가운데

흔들림없이 자리하리라.”

 

꾸준히 팔정도를 따르고 정진과 인욕으로 마음을 길들이면 어떤 악인이라도

점차 마음의 자유를 얻어 최고의 완성을 이룰 수 있으며 마침내는 위없는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이 생에서도 최상의 행복을 준다는 말은 맞

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고원한 소망들을 모두 성취케 하며 우리

들의 마음 속에서 정의의 태양이 빛나도록 만듭니다. 불법(佛法)은 비록 우

리의 삶이 무상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나마 가져볼 수 있는 올바른 기대를

충족시켜 주며 거센 바람에도 흔들림없는 깊은 평온을 가져다 줍니다. 똑

같은 잘못과 그로 인한 죄책감에 거듭 빠져들게 하지 않으며 서서히 모든

탐욕과 성냄, 미혹을 닦아내게 합니다. 불법은 또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자유, 열반을 성취케 함으로써 모든 악과 고뇌로부터 영원히

헤어나게 해줍니다.

 

선행이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자기 희생이 제 아무리 거창하고 훌륭

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그 또한 무상한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는 고통으로부

터 우리를 영원히 지켜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밝히신 사성제의

수행 공덕은 변하거나 부서지는 일 없이 영원할 것입니다.

 

사성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잘 이해된 시대를 사는 이들은 가장 복된 세대

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가 우리에게 마련해 주는 이 귀중한 기회를 놓

쳐서는 안될 것이며, 발심하여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이해와 실천이

하나가 되는 보다 높은 경지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며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

다. 해탈을 위해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사(不死)의 경지를 이루었어라.

열심히 정진하는 이에게

오늘 또한 이 경지 이루어질 수 있으나

노력 없이는 그 누구도 거기 이르지 못하리.”

[장로니계경. 513]

 

 

주 해

 

註1) appamada [a+pamada] 게으름, 조심성 없음을 뜻하는 pamada 에 a (不

,無)를 붙인 단어로 한역은 不放逸로 되었었다. 여기서는 긍정적이고 적극

적인 의미를 취하여 정근(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씀)으로 썼다.

註2) SN V.271 (Iddhipada-samyutta 15, Unnabha-brahmana-satta)

註3) 의욕(意欲`, Chanda)`:`원문에서는 Will로 되어 있었으나 이 단어의

두 가지 용례, 즉 ①`욕망,충동,욕구 ②`의도, 의지, 결의를 포함할 우리말

단어와 뒤에 나오는 Chanda-samadhi(漢譯은 欲情)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意

慾이라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