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과 세계평화
Buddhism and World Peace
소마스님 지음
김용호 옮김
Soma Thera
Bodhi Leaves No. A 1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저자에 관하여
금세기 중반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법 르네상스 운동의 주역급 가운데 한 사람. 1898년 콜롬보의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에 불법을 접하고 곧 콜롬보 재가신자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35년에 일본을 방문, 한문본 “해탈의 길(Vimuttimagga)”을 영역하는 일에 참여했다가 다음 해 버마에서 도반 케민다 테라(Kheminda Thera)와 더불어 득도했다.
1937년에 스리랑카로 돌아와 1960년 서거하기까지 지칠 줄 모르는 불법 전수자로서 저술, 강연, 포교에 진력했으며 인도 중국 독일 등지에서 불법 포교에 헌신했다.
저서로는 「The Way of Mindfulness : Satipatthana Sutta and Its Commentary」(BPS), 「Kalama Sutta: The Buddha's Charter of Free Inquiry」(Wheel Publication No.8) 「The Removal of Distracting Thoughts」(중부 20경 번역) (Wh No.21) 「The Contribution of Buddhism to World Culture」(Wh No.44) 「Faith in the Buddha's Teaching」(Wh No.262) 등 다수 있음.
비폭력과 세계평화
“석가모니의 매력은 편견 없는 가슴에 비로소 사무치게 와 닿는다.… 불교는 온통 지혜와 사랑 그리고 동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19세기의 프랑스 문학가 아나톨 프랑스 註6 는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면밀히 연구해 본 사람들은 이 말의 참뜻을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듯 절실한 가르침과 훌륭한 인물이 오늘날에 와서 제대로 바르게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이 세상이 왜 이렇듯 평화롭지 못하고 서로 해치려 들려고만 하는지 그 까닭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심지어 불교국에서마저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효율적 실천수행에로 이끌어줄 만큼 반드시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 부처님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있어, 과연 부처님이 모든 신비주의와 모든 사변주의(思辨主義)와 모든 내세 천상복락에의 바람과 모든 기복주의를 뛰어넘어, 우리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탐 진 치 삼독심을 제거하여 행복을 실현하도록 가르치신 스승으로 바르게 인식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만약 탐 진 치를 제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왜 제자들에게 고(苦)의 뿌리를 끊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했겠느냐고, 부처님은 명백히 당신의 가르침의 요지를 천명하고 계시다.
탐 진 치는 분명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화합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 탐 진 치를 뿌리뽑는 부처님의 방법 또한 매우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천 오 백 년 간이나 이 방법을 써 왔으며, 또 그들 생애를 통해 탐 진 치가 정말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 주었다. 이러한 악의 뿌리를 말끔히 끊어 없앤 사람들이 바로 아라한들로서 그분들은 불도의 지혜와 자비를 유감없이 구현한 산 증인들이다.
부처님은 당신이 아직 깨치시기 이전 시절에 사람들이 남을 벌주기 위해 채찍을 손에 드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느꼈던 경험담을 얘기하셨다. 당신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폭력을 쓰는지 알게 되면서 느꼈던 마음의 동요가, 고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 출가하게 된 출가 동기 중 주요한 이유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비폭력의 길을 밟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침내 석가국의 왕위계승권마저 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싸움질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분께서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일체의 투쟁이 종식되는 평화, 즉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밟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폭력으로 해결하려 드는 어리석음엔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폭력은 미워하는 자나 미움받는 자 쌍방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 법에서는 폭력뿐 아니라 성내는 것까지도 용납하지 않는다. 성을 낸다는 것은 폭력의 길을 열어 놓는 짓이 되기 때문이다. 즉 성이 나면 폭행하기 일쑤며 무시로 온갖 해코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불법에선 일체의 성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의로운 분노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의 분노란 단지 증오에 씌워 놓은 가면에 불과하다. 정당화될 수 있는 증오란 있을 수 없다. 그릇된 것을 바르게 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원망이나 노여움 또는 악의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는 이룩할 수 없다.
“부처님께선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고, 거친 말을 쓰신 적도 없었다”고 라다끄리슈난 註7 은 말한다. 성낸다는 것은 불자로선 부끄러운 일이다. 성냄, 거치른 말씨, 비방, 악담은 모두 폭력에의 시발점이다.
폭력에서 탈피하는 벙법으로써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법이 갖는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철저한 합리성이다. 즉 폭력의 턱 앞에서 탈출하되, 단지 폭력의 증세를 완화하는 쪽으로가 아니라 폭력의 근원 그 자체를 제거시키는 쪽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께서는 폭력, 증오, 가해, 손상이 모두 자기 내부, 즉 자아에 대한 사랑에서 유출된다는 것을 발견하셨다. “가을에 싹트는 (철 아닌) 연을 따 내듯 註8 자아에 대한 사랑을 꺾어 버려라.
세존께서 가르친 평화, 즉 열반에의 길을 나아가라.” 자기본위[自愛]는 일체의 싸움, 불화, 분쟁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다. 그에 반해 올바른 견해[正見]로써 자기를 조복(調伏)받는 부처님 방식은 가장 높은 안녕과 평화 그리고 인류 행복을 실현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 지상에 평화를 건설하는 문제를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자세로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선 그 어디서도 폭력을 완전히 근절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 불법에선 해탈에의 길을 가르칠 때 먼저 남에게 위해를 주는 일부터 피하라고 이른다. “남들이 설사 위해를 가하더라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해를 주어선 안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타일러야 한다”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신다.
“내 분명히 말하노니, 적의에 찬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적대감을 품지 않으며, 남을 때리려 막대기를 집어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온화함을 흐트리지 않으며,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브라흐만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한 평정, 인내 그리고 관용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의 고요하고도 차분한 분위기 속엔 인간 내면에서 폭력을 없애버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사람들의 내면에 폭력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지상에 평화가 확고하게 수립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바로 이 내면의 평정을 위하여 고귀한 도(팔정도)를 가르치신 것이며, 이 고귀한 도야말로 인류가 화합을 이루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이 고귀한 도를 따라 나아가면 서람들은 자연히 몸과 마음과 말을 통한 행동[身 口 意 三業]을 탐욕과 증오와 미망의 악[貪 瞋 痴 三毒心]에서 벗어나게 만들고자 힘쓰게 된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탐욕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가누는, 집착하는 사람은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 한다. 그는 남들도 똑같은 짓을 하도록 조장한다.… 미움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가누는, 악의에 치받친 사람은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한다. 그는 남들도 똑같은 짓을 하도록 조장한다.… 미망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가누는, 얼빠진 사람은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한다. 그는 남들도 똑같은 짓을 하도록 조장한다. 그러나 저 고귀한 도를 따라 나아가는 사람은 살생을 그만둔다.
그는 살생을 삼가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 점잖고 친절하고 동정적이며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렇듯 살생을, 도적질을, 간음을, 거짓말을, 술마시기를 삼가함으로써 그는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에게 용기와 평화와 친절을 베풀게 된다”고 부처님은 역설하신다.
“다시 고귀한 도를 그렇듯 추구해 나가는 사람은 한쪽 방향에 있는 모든 존재를 우애어린 생각으로, 동정어린 생각으로, 기쁨을 나누는 생각으로, 평온한 생각으로 숙고하면서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제2의 방향, 제3의 방향, 제4의 방향의 모든 존재를, 다시 위와 아래 그리고 모든 간방(間方)을, 그렇듯 그는 모든 곳을 일일이 온 마음을 기울여서, 전 세계를 빠짐없이 우애와 동정, 기쁨 그리고 평온에 찬 넉넉하고 성숙한, 걸림 없고 평화로운, 친절한 생각으로 깊이 숙고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부처님의 고귀한 제자들은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성자들이 목표로 삼는 바 고귀한 도의 종착점, 곧 이 세상에 대한 일체의 집착이 끝나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불가변(不可變)의 평화경, 즉 갈애의 소진을 통해 정신적 고뇌가 멸한 경지 註9 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이와 같이 마음을 향상시키는 길은,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따라 무상(無常)이라는 보편적 법칙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예지를 갖춘 사람만이 걸을 수 있다.
이 지나가는 광경을
한낱 꿈으로, 녹아버리는 이슬로
번개의 섬광으로
사막에 나타난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로
그림자로, 또는 개울물에 뜬 거품 같은 것으로 볼 줄 알라.
이 세상이 그렇듯 속절없는 것인 줄 깨달을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동정심이 생겨난다. 그가 평소에 품고 있던 권력과 소유에 대한 갈망은, 힘과 강제와 강압수단을 써서라도 기필코 얻고야 말겠다던 욕심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고 더 이상 증오나 잔인성, 탐욕은 일어날 수 없게 된다. 이들 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경지를 고귀한 도는 지향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평화롭게 건설하려면 사람들은 (팔정도에 따라) 세상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러면 인류의 마음 속에서 폭력적 성향이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 평화와 화합을 수립하는 길이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려면, 국민들이 그들 마음 속에서 악의 근원, 즉 탐 진 치 삼독심의 뿌리를 근절하기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대한 황제 아쇼카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올바른 노력을 통해 평화와 화합을 수립하는 것을 극구 찬양한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칙명 속에 “비천한 자거나 권세 있는 자거나 막론하고 누구나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아쇼카 황제에게 감명을 준 것은 부처님이 선언하신 바 비폭력의 길을 힘써 실천하라는 말씀에 담긴 올바른 방법에 의해 노력하는 정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칼을 쓰는 길, 전쟁과 물리적 정복의 길을 버리고 정의로움에 의한 승리, 자비의 고상한 법에 의한 승리에 마음을 쏟게 되었던 것이다.
아쇼카 황제가 부처님의 법을 얼마나 깊이 존숭(尊崇)했는가 하는 것은 화합과 조화의 가르침에 대해 그가 표한 감사의 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부처님의 정신을 받들어 아쇼카 황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화합이야말로 찬양할 만하다(Samavayo eva saadhu).” 올바른 견해를 갖는 한 어떤 종류이든 투쟁은 일체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부처님은 파악하셨고 아쇼카 황제 역시 그것을 인식했다. 증오, 강압, 폭력, 투쟁, 적의는 오직 그릇된 견해가 성할 때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릇된 견해가 성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조건, 즉 성급함과 무절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복수하려 드는 마음, 즉 원한과 악의에 찬 마음은 참을성 없고 자제력이 결여된 결과로 오는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진 악을 견뎌내지 못할 때, 그 마음 속에 자기를 해친 사람을 도로 해치거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세존(世尊)께선 “이 교법에선 참고 견디는 것을 최고의 고행 註10 으로 친다.” “모든 것을 자제하는 비구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르치신다. 올바른 견해의 광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즉 현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싸움으로 파괴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싸움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의 싸움은 끝이 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법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싸움)에서 파멸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든 이런 점을 알게 되면,
그 땐 싸움은 끝난다.”
이와 같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선 부처님의 다음 말씀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증오는 미움으로써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워하지 않으면 증오는 끝난다.
이는 옛부터 변함 없는 법이다.”
불만을 품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적잖이들 그러고 있지만, 평화를 만드는 데는 도움이 안 되고 복수, 보복, 반목과 적대감만 조장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그가 나를 욕하고 때리고 참패시키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악의를 품게 된다.
그들 간의 원한은 끝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욕하고 때리고 참패시키고
내것을 빼앗았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악의를 품지 않는다.
그들 간의 원한은 끝나게 된다.
이 지구상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길은 무력과 강압으로써가 아니라 자비심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라나게 만드는 길을 통해서일 뿐이며, 이는 모든 악의 모체인 증오, 탐욕 그리고 미망을 소멸시키는 길을 연구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아쇼카 황제가 인도 안팎으로 불법을 널리 펴는 사업을 수행한 것도 불법이 악을 파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법보시(法布施) 註11 야 말로 어떤 보시보다도 공덕이 수승하다.” 아쇼카 황제는 이 말씀을 명심하여 법보시를 적극 권장했을 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이 말과 행동 양면으로 정법 실천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세상에 조화와 선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법을 찬탄하고 (1.Dharma-samstava), 법의 이익을 균등히 나누고 (2.Dharma-samvibhaga), 법에 의한 유대감을 조성하는 것 (3.Dharma-sambandha)이 중요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정기적으로 법을 설하고 친목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조직을 만들었다.
우애를 확산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정어린 행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황제는 법을 장려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병든 사람과 동물에게 약물치료를 해주고, 약초와 식용뿌리, 과일나무와 그늘 짓는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는 등의 조치를 취해 사람이나 동물들이 이전보다 한결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황제는 불교의 가르침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헛일임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의 일상 생활 속에 정법을 구현하고 또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도우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았다. 그가 그처럼 한 것은 투쟁, 약탈, 전쟁, 인류 파멸을 없애는 길은 인성을 순화하여 평정한 마음을 이루는 길 밖에 없으며, 계행실천에 힘써 고귀한 성품을 닦아 나가면 마침내 지혜가 생겨 비폭력적 안목을 갖추어 평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쇼카 황제는 깔링가 정복전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나머지 전쟁과 영토점령에 대하여 일대 심경변화를 느꼈다. 그러던 중 칼에 의한 정복 대신 의로운 법을 통한 정복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애와 동정의 의식이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려면, 그가 세상에 홍포하기로 마음먹은 불법의 새 가치 체계를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노력 목표로써 제시하여 명심시켜 나가야 한다고 황제는 생각했다.
그래서 친절, 비폭력, 바른 정진 등등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혹은 자연석에, 혹은 석주에 새겨 널리 백성들에게 주지시켰으며, 뿐만 아니라 평화의 길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의 효율적인 설법행각을 통해 부처님의 메세지는 인도 전국과 국경 밖의 수많은 나라들에까지 메아리치게 되었다. 이래서 아쇼카의 칙서가 가는 곳에선 어디서나 전쟁의 북소리 대신 정법의 소리가 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꼭 언급해 둘 일은 정법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교의는 그 처음도 중간도 끝도 전적으로 비폭력적 비강압적 가르침이시며, 그래서 시종 길상(吉祥)한 교의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러한 교의, 즉 올더스 헉슬리 말대로 ‘인도의 평화주의의 완벽한 표현’인 이 가르침이, 심지어는 일반인들조차 무기를 만들거나 거래하는 일, 독약의 제조, 술이나 마약의 제조, 동물의 도살까지도 하지 말도록 권하는 이런 가르침이 어떤 경우라 해서 살인행위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불교가 비록 그 발전 경로는 다양하지만 일단 어디든지 불교가 이르게 되면 고통받는 인류의 피와 땀이 대지를 얼룩지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도 고문대에 오르거나 화형을 당한 적이 없고 총칼에 죽음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상의 주요 종교 가운데서 박해나 검열, 이단심문을 가하는 일 없이 발전을 성취한 유일한 종교가 불교라고 한다(올더스 헉슬리의 말).
부처님이 설하신 자비와 지혜의 메세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비폭력의 가르침과 공(空)의 가르침, 즉 자아나 영혼 또는 영원불변의 실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라고 중관파(Maadhyamika)철학 註12 의 위대한 대변자인 아랴데와 註13 는 말했다. 불교문화는 이런 원칙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부처님시대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백만의 불자들이 이와 같은 기본 신조를 철저히 고수해 왔기 때문에 불교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엔, 과거 어떤 시대보다도 전세계 인류의 행복과 안녕이 비폭력 등 불교 원칙을 인류의 당면문제 해결에 적용하느냐 않느냐의 여부에 달리게 되었다. 폭력으로 온통 들끓고 있는 이 세상에서 비폭력의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은 바로 엄청난 곤경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올바른 견해가 없이는, 다시 말해 일체의 이기주의와 폭력의 관념을 포기하고 언제 어디서나 인내와 자비가 요청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어떤 실질적인 평화도 그리고 안전도 보장될 수 없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빠알리경전의 어디를 찾아봐도, 불자의 덕목 중 첫째번 계율(불살생계)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특수 상황을 용인하고 있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톱의 비유경’ 註14 에서 여래께선 “악당들이 어떤 사람의 사지를 자른다고 치자. 그 때 그 사람이 노여운 마음을 품는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처럼 원한을 품는 것마저도 나쁘다고 가르치는 데에서 어떤 종류이건 폭력이 용납될 여지는 있을 수 없다. 일부 타 종교들에서 고취하고 있는 정의로운 전쟁이 부처님의 법에선 결코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불교가 비폭력 문제에선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리스 윈텔니츠 같은 사람도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과연 이름 그대로 부처는 칼하고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가 볼 때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정당한 이유란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그는… 아무리 억울한 꼴을 당한 끝에 내세운 것일지라도 소위 ‘정당한 이유’란 언제나 자기 쪽에서 붙인 이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음을 부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해
6)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 (1844-1924).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비평가. 당시 프랑스의 이상적 문필가로 우러러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고 1921년엔 장편 「실베스트르 보나르의 죄」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글은 풍자와 세련미로 넘쳤으며, 인간사회에 대해 냉소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드레퓨스 사건에 개입하여 그를 적극 옹호한 이후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 사회주의적 경향을 보임.
주요 작품: 「타이스」 「붉은 백합」 「펭귄섬」 「신들은 목마르다」 등.
7)라다끄리슈난(Sarvepalli Radhakrishnan) : (1888~1975) 옥스포드 대학의 철학과 윤리학 교수를 거쳐 주 소련대사 및 인도 대통령 역임. 그의 철학은 상카라의 가르침을 재해석한 베단따 철학에 근거한 현대의 힌두이즘. 종교적 가르침은 지식에 근거한 신학이론보다 철학의 다양한 관심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주장.
주요 저술은: 「인도철학」 「동양종교와 서양사상」
8)연의 싹은 봄에 핌. 가을에 트는 싹은 꽃을 피울 수 없으므로 좋은 연을 위해서는 필요없는 싹은 가차없이 잘라 없애야 한다는 뜻.
11)법보시(Dhammadana) :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에게 전해 주어 정신적 향상에 기여함으로써 보시공덕을 쌓는 것. 보시는 크게 나누어 법보시와 재물보시로 구분하며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고 함.
12)중관학파(Maadhyamika) : 중도를 관하는 학파란 뜻. 용수(龍樹; Naagaarjuna)의 「중론(中論)」을 근거로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선양한 학파에 현대 학자들이 붙인 이름.
「중론」은 일체의 존재가 연기성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유무의 극단에 사로잡힌 생각이 없어지고 진공중도(眞空中道)의 정관(正觀)이 생긴다고 설한다. 아랴데와(提婆; Aaryadeva), 라훌라바드라(羅喉羅跋陀羅; Raahulabhadra) 청목(靑目; Nilanetra)을 거쳐 불호(佛護; Buddhapaalita)의 쁘라상기까(Praasangika)파와 청변(淸辨; Bhaavaviveka) 계의 스와딴뜨리까(Svaatantrika)파로 나누어짐. 세친(世親)의 유식학파(唯識學派)와 나란히 대승불교 철학의 양대 지주(支柱)를 이루며, 특히 중국불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음.
13)아랴데와(聖提婆; Aaryadeva) : 스리랑카 사람으로 용수의 제자. 외도와 소승의 교의를 논척하고 공론을 극력 선양한 대논객. 주요 저서: 「백론(白論)」 「장중론(掌中論)」 등.
14)톱의 비유경 : 중부경 21. 참을성과 인내에 관한 경으로 재미있고 기억해 둘 가치가 있는 비유와 얘기로 가득 차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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