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종교, 불교
차례
The Relevance of Buddhism In the Modern World 뽄디스쿨 공주 지음 Princess Poon Pismai Diskul Bodhi Leaves No. B 43
불교의 현대성 유사 이래로 종교를 믿고 받들고 실천해 온 것은 인류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 문화가 점점 복잡 정치(精致)해지게 되면 그에 걸맞게 그 사회의 종교사상도 윤리적 철학적 면에서 발전도를 높이게 마련이었다.
오늘날 세계는 과거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문명수준이 높아졌고 사회적 복잡성도 증대되었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그 허다한 대사상들과 대발견들로부터는 이렇다 할 새 종교가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적 개념들이 나타났다 치더라도 그 모두가 인류사회의 기존 신앙과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현대의 종교단체들이 가끔 자랑스레 내세우는 새로운 개혁이란 것들 역시 막상 그 성격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소극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서 기껏해야 낡은 관행을 폐지했다거나 혼란만 안겨주는 독단론(도그마)들을 철회 내지는 새롭게 해석했다는 정도이다.
새 종교는커녕 오히려 사상 유례없는 대중적 무신론, 회의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무관심이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같은 비종교적이거나 반종교적인 태도는 일찍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대 그리스나 인도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의 이런 태도는 주로 특수한 철학자들의 무리나 또는 여타의 배타적인 소수 집단들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생각이 선진국 사회의 거의 각계각층에(교육수준과 무관하게) 침투해 있는 실정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관점이 제도화된 신조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며, 유럽과 미국에서도 전통적인 종교의 모습을 부지불식간에 잠식해 버렸다. 또한 아시아 여러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지식인층이 이와 같은 사조를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종교뿐만이 아니다. 윤리, 철학, 형이상학, 신비주의 같은 것들도 기술, 산업화, 과학, 심리학 등의 맹공격 앞에 힘을 잃고 쇠퇴하고 있는 것 같다. 저 옛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정의라던가 덕, 조물주, 초월적 절대자와 같은 개념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기껏 대접받아야 한갓 가설로서 심판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이런 개념들이 경험적, 실험적 증명이 불가능한 순전한 말놀음이나 교묘한 논법에 불과하다고 단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 지경에 이르자 형이상학은 그 필수적 구성요소들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비주의적 체험도 한때는 조물주의 영적인 교류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심리학적 현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즉 신경계가 변화된 상태에 불과한 것이며 이런 상태는 명상이나 기도를 통하기보다는 화학작용에 의해서 더 용이하게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학의 경우도 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은 형이상학과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그리고 삶을 인도하는 행동규범으로서의 윤리 역시 전통적인 도덕가들의 눈으로 볼 때 이미 조롱거리가 되었거나 무시되고 있다. 또한 훨씬 너그러운 기준에서 바라보더라도 윤리는 새 가치관들이 등장함에 따라 급격한 변모를 겪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의 두드러진 모습이다. 그럼 종교의 상황은 어떤가? 현존하는 주요 종교 중에 가장 새로운 종교라 할 이슬람교는 벌써 천 년을 훨씬 넘었다. 기독교는 곧 2천회의 생일을 맞게 될 것이며 도교 불교 유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등은 모두 그보다 훨씬 이전인 서기전 500년경의 거의 비슷비슷한 시기에 기원하고 있다. 유대교와 힌두교의 경우는 그보다도 더 고대로 올라간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종교는 모두 지나간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사람들이 신화라던가 마술, 정령 운운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절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 때는 사람이 미치면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했고, 환각상태에 빠지면 신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태양은 고정된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고, 사람의 운명은 마법이나 제식에 의해, 혹은 초자연적인 힘을 향해 빌거나 제물을 드림으로써 바뀔 수 있다고 믿던 시대였다.
얼마 전까지도 시골에서는 바나나 잎으로 물건을 싸고, 이엉으로 초가지붕을 엮었다. 그러다가 종이와 플라스틱, 얇은 금속판이 나오자 그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이 환경을 변화시켜 통제하고, 창조의 신비를 벗겨내게 되었으니 종교에서도 그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인류학자나 심리학자들이 오늘날 호주의 원주민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추적하고 있듯이, 언젠가는 경건한 신도집단을 샅샅이 뒤져내 연구하려 드는 국면이 벌어지지 않을 것인가?
오로지 역사만이 대답해 줄 것이다. 종교는 반드시 사라지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일례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의 하나인 일본에서는 지난 이삼십 년 동안에 급진적인 교의를 가르치는 잘 조직된 신흥종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 수백만의 개종자들을 신도로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들 종파들도 보편성이 결여되어 일본문화의, 그 중에도 특수한 일부의 정서적 요구에 영합할 뿐이어서 일본을 벗어나서는 아직껏 별다른 영향력을 못 미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결국 종교란 인간의 죄의식과 면죄심리를 이용해서, 또 인간의 노력이 한계에 달했을 때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인간의 좌절감과 불안감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공공연히 메꾸고 들어앉는, 또 사상주입에 의해 그 자리를 더욱 굳혀 가는 한낱 심리적 전이(轉移) 현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일까? 카알 마르크스의 말처럼 ‘인민의 아편’이고 정신의학의 용어대로 ‘공인된 문화 신경증’에 불과한 것일까?
따라서 모든 종교는 이상과 같은 질의와 도전에 각자가 스스로 대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려면 기존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해질 필요가 있으며, 재해석이라는 가면 속에서 자기 합리화를 꾀하지 않을 만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는 불자로서, 불교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은 그러한 나의 노력을 담은 것이다.
소위 불교적 입장이 무엇이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자면, 먼저 어떤 형태의 불교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부터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서기전 5세기에 시작한 종교운동은 그 후 2,500년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내내 새로운 지역과 문화로 펼쳐나가게 됨에 따라 그 지역의 신앙이나 관행과 섞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발전 형태와 경로를 밟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매우 상이한 불교 종파들을 보게 되는데 때로는 이들이 서로 너무 달라서 불교가 아닌 타 종교에서 유래한 것 같은 느낌마저 받게 된다. 비근한 예로, 상좌부 불교의 스님은 사상과 정신면에서 일본의 정토진종 註1 의 승려들보다는 차라리 서양의 심리학자 쪽이 자신과 더 가깝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또 우리가 그 이름과 모습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의 정토종 승려를 본다면 그들이 동남아 불교와 서로 다른 여러 면에 있어선 차라리 미국의 개신교 목사들과 공통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논의를,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불교 형태에 한정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상좌부 혹은 소승불교로서, 오늘날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스리랑카 등에 퍼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 특수한 형태에 한정하고 싶다. 왜냐 하면 상좌부 불교에 덧붙여진 여러 지방적 전통이나 의식, 그리고 후기 학파들의 사상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가장 초기에 알려졌던 불교사상의 형태, 즉 숫타(Suttas ; 경)와 위나야(Vinaya ; 율)로 알려진 팔리어 경전 註2 에 기록된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정시켜 논의하고자 한다.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초기경전인 이 경전들에 관심을 한정시키게 되면, 독자들은 이천 년도 넘는 옛날에 쓰여진 경전 속에서 현대적 사상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아마도 현대인의 마음에(과학적이건, 아니건) 가장 와 닿는 점은 불교가 자유롭고 합리적인 탐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맹목적 신심으로 믿지 말라. 경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믿지 말라. 전통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지 말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또 “내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내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대신 너희가 스스로 보고, 검토하고, 체험했을 때, 그 땐 그것을 받아들여라.” 기존 이해와 편견에서 자유로와진 마음만이 진정 이처럼 볼 수 있고,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나를 반대하거나 또는 우리 승단을 반대한다고 해서 성내거나 낙담하지 말라. 그들이 우리를 칭찬한다 해서 우쭐하지 말라. 그 대신 그들이 한 말을 검토해서 취할 점을 깊이 숙고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부처님께서는 논리와 토론, 그리고 논거를 충분히 활용하셨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애당초 언어에 의해 초래된 철학적 난제들을 거뜬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논리가 원래 추상론보다는 경험적 자료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논리보다는 경험을 앞세웠으며, 따라서 논리를 사용하실 때는 모든 사람이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에 반드시 근거를 두셨다. 그분께서는 궁극적 실재를 설명하려 애쓰시는 대신 갈애와 고통에 대해 평이하게 말씀하셨다. 본질적 기원(起源)이나 사후의 존재에 대해 설법하시기를 거부하신 적이 많으며,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일상적 경험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까닭은 부처님은 우리가 행위를 하고 그래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 註3 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안 믿는 것이 죄’라는 식의 관념은 가르치지 않으셨다. 사람은 신심이 부족한 탓으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거역하여 행동하는 자기 자신의 무지 때문에 스스로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결코 신성이나 진리에 대한 독점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진리는 바로 여기에 있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부처님의 권위는 단지 당신께서 그 진리를 발견하셨고, 또 그 발견에 이르는 길을 남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할 따름이다.
불교의 가르침과 그 실천의 핵심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교가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과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신앙과 행위와의 괴리를 자주 지적하지만 그러나 어차피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가 삶의 제반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물이 인류를 사랑하는 인격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또 지배된다고 확고히 믿는 사람은, 항상 그렇진 못하더라도 위기에 빠졌을 때만은 그 신을 찾아 애태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그러한 인격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적 시원(始源)의 문제는 현재의 삶의 문제들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보셨다. 불교 우주관의 주된 요점은 인과적 변천의 원리이다. 일체의 정신적, 물질적 및 사회적인 사상(事像)은 나고, 자라고, 쇠하고, 죽는 끝없는 반복과정을 겪게 된다. 유한한 것은 모두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영원하지 않으며, 불변의 것도 아니다. 사람이건 산이건 의식이건 별자리이건 생기는 것은 멸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이같은 유동과 변천의 끊임없는 흐름을 규율하는 것은 무엇인가? 해답은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이다. 현재의 조건은 미래의 조건에 대해 원인이 되며, 그 결과는 다시 그 뒤에 일어날 조건의 원인이 되며, 그 결과는 다시 그 뒤에 일어날 조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 무한대의 우주도 수많은 겁(劫)의 세월이 흐른 다음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미 여러 다른 우주는 존재해 왔고, 또 끝없는 미래에 계속해서 다른 우주들이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는 시작이나 끝이 있을 리가 없다. 단지 무한한 과거로 뻗고 무한한 미래로 계속되는 우주의 진화와 해체 속에서 영원히 작용하는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든 개념들은 빠알리 경전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며, 달리 변경시키거나 색다른 해석을 하지 않아도 현대과학의 견해와 일치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을 지녔기에 불교 심리학은 고대의 여러 사상 유파에 비교하면 극도로 혁명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오늘날 최신의 심리학과 비교해 보아도 단연코 현대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심리학에서는 마음과 몸을 이원적으로 양분해서 보지 않고, 상호작용하고 상호의존하며 둘이 결합해서 한 인간을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마음은 몸 없이는 생기(生起)할 수 없으며, 몸은 마음 없이 생기할 수 없다. 소위 정신이라고 하는 인격적 측면은 결코 독립적인 단일 실체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기억이나 감각, 생각, 욕구, 지각 등의 집합체이다.
그런데 이들 기억, 감각, 생각, 욕구, 지각 등은 날이면 날마다 살아있는 한, 매 순간을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며,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하여 새로운 속성 내지 성분을 취하고 한편 낡은 속성 내지 성분을 버리거나 변경해 나간다. 이를 불교에서는 ‘아나따(anatta), 즉 무아(無我)’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영혼이나 불변의 정신이 아니고, 역동적으로 항상 변화하고 있는 심신 상관적 전개과정 그 자체이다.
불교에서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은 이상과 같다.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어떻게 종교와 관련을 맺어 생활 속에 실천되어져야 할 것인가?
불교사상에 따르면 삶의 중심적인 문제는, 궁극적인 신비를 푼다는 의미의 철학적인 것도 아니고, 숭배와 은총 그리고 구원이라는 의미의 종교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낙(樂)과 고(苦)이다. 살아가노라면, 정말 행복하고 만족한 순간도 있고, 슬픔과 좌절, 초조와 실망의 순간들도 있다. 그것이 천상의 기쁨이든, 과업을 원만히 이룩한 만족감이든, 이타적인 사랑의 즐거움이든 아니면 좋은 음식이 주는 감미로운 맛이든 간에, 삶이 가치 있어 보이고 우리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유쾌한 체험이나 그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들이다. 반면에 지옥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인격모독, 신체의 병 또는 이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 등등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부정적인 가치의 측면들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물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전부 인과관계를 통해 발생한다는 점, 즐거운 심리상태나 불쾌한 심리상태도 그 예외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점에서 과학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삶의 해결 방안은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마음상태를 야기시키는 요인들을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전한 것을 최대한 실현시키며 불건전한 것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길 밖에 없다. 이를 위해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에 대한 검토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성제의 첫번째 진리는 괴로움, 좌절, 불편 그밖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원치 않는 경험들이 정작 삶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단순한 가르침이다. 두 번째 진리는 그와 같은 불편의 주된 원인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진리는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며, 네 번째 진리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불교의 실천을 위해 토대가 되는 것은 사성제의 마지막 진리, 즉 팔정도로 알려진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정신적으로 성장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는 계율[戒], 수행[定], 그리고 통찰[慧]이 포함되어 있다.
충동과 감정, 욕망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지으며, 따라서 우리의 상대적 행 불행마저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목적은 계율과 자기 이해와 지성을 통하여 새롭고 보다 나은 인간 됨됨이를 낳게 하려는 것이며, 또한 차츰 성숙해지도록 하여 특수한 심리적 목표를 어느 정도까지, 아니면 완벽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이 있다. 소극적인 목표는 탐욕과 증오 자기중심주의 기만 근심 냉담 등을 근절시키는 것이다. 적극적인 목표는 사랑 동정 평온 지혜 통찰을 계발하여 발전시키는 것이다. 탐욕 증오 등등의 불건전한 정신상태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부터가 바로 동요되고 있고 불편한 상태이다. 반대로 사랑과 동정은 행복의 전제 조건일 뿐 아니라 그 본성에 있어 이미 충분한 의미를 지닌, 정말 겪어볼 가치가 있는 경험인 것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다양한 속성과 성질들의 혼합현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을 계발하거나 정화시키는 기술적 방법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고 다차원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올바른 견해로 마음을 닦는다든지, 말씨, 버릇, 직업 등을 잘 이끌어 조화로운 생활을 이룩한다든지, 계행과 정진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선정수행을 계발해서 보통 때는 확실히 살펴볼 수 없었던 미세한 생각과 느낌을 확실히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드는 등등이 팔정도를 따라 공부해 나가는 기술이요 수행법이다. 이것이 바로 원래 부처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셨던 불교의 수행이고, 불교적인 삶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가 흔히 말하는 의미의 종교를 과연 지향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왜냐 하면 불교는 어떤 형태의 숭배나 의식(儀式), 기도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에의 호소따위는 두둔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의 논리적 귀결이 바로 불교의 윤리적 가치관이 된다. 따라서 당연히 이 윤리체계는 전통에 기반하지도 계시에 기반하지도 않는다. 모든 행위에는 먼저 생각과 동기가 선행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우리는 선과 악이 모두 마음에서 비롯됨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만큼 불교윤리의 목적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두어지게 되며, 구체적으로는 탐욕과 증오심과 자기중심주의를 조복하고 사랑과 지혜 그리고 동정심을 계발하기를 권한다. 이런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이미 그 마음은 자연히 우러난 공덕을 갖추고 있게 된다. 이전처럼 행동규칙을 이랬다 저랬다 바꿀 필요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고 또 마지 못해서가 아니면 일부러 계획적으로 선을 행하던 때보다 더 순수한 선을 행하게 된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 이와 같은 윤리체계가 갖는 커다란 장점은 문화적 민족적 관습의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도 전혀 그것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윤리 체계는 전통이나 역사, 또는 특별한 금기(禁忌) 따위에는 전혀 구애되지 않고 얼마든지 다양한 문화적 환경에 적용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매우 색다른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윤리적 행위의 기준에 관한 한 거의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우리는 본다. 사랑, 친절, 자선, 아량 같은 것은, 인류사회의 위대한 종교라면 그 어느 것이나(설혹 교의 내용은 제각기 계시나 신비주의, 형이상학 또는 심리적 통찰에 따로이 입각하겠지만) 이와는 하등 관계 없이 한결같이 환영하는 덕목들이 아닌가. 주요 종교들은 신의 창조를 가르치든 원인과 결과를 가르치든, 모두 친절을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불교는 이같은 방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즉 불교는 어떻게 이러한 윤리적 이상을 살아있는 현실로서 성취할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사랑을 가르치는 데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신적 수행에 의하여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을 이루는 그 방법마저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랑과 동정, 즉 자비란 것도 이 우주의 모든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인과관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를, 개인이 자기 자신의 정신적 향상과 정서적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원용할 수 있는 심리적 원칙과 실천의 체계로 보아 왔다. 따라서 현대 세계에서 불교가 갖는 최상의 가치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는 상관없이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을 가르쳐 준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대국적인 면에서의 인간관계 및 사회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전혀 개인 차원의 사회관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불교에서 개인을 중시하여 개인적 계발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할 수 없다는 원리에서 나온 입장이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든 그 자신이 탐욕과 미망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는 그 수렁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낼 수가 없다”고 하셨다. 남에게 청정의 길을 가르쳐 주려면 먼저 자기부터 청정해야 할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딴에는 공명정대한 정의를 위해 헌신한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던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예가 허다한 것을 볼 때, 불교의 이와 같은 전제가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려면 먼저 사람들부터가 보다 나아져야만 한다. 인간의 모든 갈등, 투쟁은 그것이 소소한 범죄행위든 큰 전쟁이든 모두가 공포, 질투, 자기중심주의, 증오 그리고 탐욕에서 근본적으로 기인한다. 교육이나 입법, 중재행위가 유용한 대응책은 되겠지만 이같은 기본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심리적 동기의 핵심을 꿰뚫어 그 사람의 근원적 야심과 반응 방식을 변화시키기에는 미흡할 것이다. 불교는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사실상 그러한 일들이야말로 불교의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인성(人性)은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인성들의 총체가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을 결정하지만, 반대로 사회도 인성의 계발에 영향을 미쳐 이를 형태지운다. 부처님은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셨다. 부처님은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식의 사회적 개혁을 두둔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당시의 사회적 불의를 정면으로 다루시었다. 카스트 문제의 처리가 그 좋은 일례이다.
부처님께선 카스트제도를 시정하기 위해 사회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불자가 되면 누구나 계급상의 신분을 버렸으며 따라서 더 이상 카스트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부처님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와 같은 사회적 불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을 뿐 아니라 나아가 바라문 성직자나 지배적 카스트 註4 들이 신분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종교적, 철학적 합리화 논리를 통박하셨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노예제도에 반대하셨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셨다.
부처님께서는 각양각색의 정치체제가 나름대로 문화를 꽃피워 왔으며 또한 제행무상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떤 사회나 문화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정부형태를 지목해서 옹호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왕정에 관해 언급하실 때는 왕에게 모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나라의 번영을 위해, 또 정부각료나 백성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도 왕은 공정, 박애, 동정심 그리고 덕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부처님 당시에는 민주적인 나라들도 더러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화합한 가운데 모여서 집회를 가질 수 있고,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는 한 계속 번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여러 세기에 걸쳐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자비의 가르침에 따라 병원을 짓기도 하고 나그네를 위한 휴게소를 세우기도 했다. 인도의 위대한 아쇼카 황제 註5 는 서기전 3세기에 불교로 개종한 다음 모든 전쟁과 정복을 중지하고 늪을 메우고 우물을 파며, 그 밖에도 허다한 공공복지 사업을 실천했다. 다른 불교를 믿는 통치자들도 이러한 모범을 따라 왔다.
부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에게는 곧장 설법하기를 미루시고, 그가 음식을 먹은 연후에야 비로소 설법을 하셨다, 또 병에 관해서도 “나를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병든 자를 잘 돌봐주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또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아가 모든 중생의 이익과 복지와 행복을 위해 법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회윤리는 가르침의 한 면에 불과하다. 주된 관심은 어디까지나 탐 진 치 삼독심과 고를 줄여 나가는 데(그래서 마침내는 제거해 버리는 데) 있다. 이들 주된 목표를 추구해 나가면 자연히 또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윤리성을 지향하게 되며 이런 윤리성은 정치 이념이나 신학 이념 또는 교리적 이념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참된 윤리가 된다.
왜냐 하면 불교의 윤리는 다음과 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마음 속에 맺힌 탐욕과 증오, 이기심을 줄여 나가기를 익히다 보면, 그리고 인간적 동기 면에서 친절과 동정이 두드러지게 되다 보면, 사람들은 바로 자기가 처한 상황이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이 세상을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 분발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배고픈 타인에게 음식을 주는 것일 수도 있고, 세계의 기아 추방을 위한 수백만 달러의 모금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만 중생이 평화로운 가운데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1)정토진종: 일본 불교종파의 이름. 오늘날에는 정식 명칭을 진종(眞宗)이라 함. 친란(親鸞;) 1172~1262)을 개조로 한 정토교 계통의 일파. 그들은 팔만사천 법문이 다 거짓문(假門)이고 정토 일종(一宗)만이 참된 문(眞門)이라 함.
2)빠알리경전: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권에서 전해 내려오는 상좌부 계통의 불교경전. 인도 고대어의 하나인 빠알리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빠알리경이라 부르고 대승불교권에선 소승경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일본 등지에선 남전경이라 부름.
빠알리경은 경 율 논 삼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장(Sutta Pi.taka)은 5부 니까야, 즉 장부(Digha Nikaaya) 중부(Majjhima Nikaaya) 상응부(Samyutta Nikaaya) 증지부(Anguttara Nikaaya) 소부(Khuddaka Nikaaya)으로 이루어짐. 소부는 다시 15경으로 이루어지니 ①소송경(小誦經; Khuddakapaatha) ②법구경(法句經; Dhammapada) ③감흥어 또는 자설경(感興語 自說經; Udaana) ④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 ⑤경집(經集; Suttanipaata) ⑥천궁사경(天宮事經; Vimaanavatthu) ⑦아귀사(餓鬼事; Petavatthu) ⑧장로게(長老偈; Theragaathaa) ⑨장로니게(長老尼偈; Theriigaathaa) ⑩본생경(本生經; Jaataka) ⑪의석(義釋; Niddesa) ⑫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amagga) ⑬비유경(譬喩經; Apadaana) ⑭불종성경(佛種姓經; Buddhavamsa) ⑮소행장(所行藏; Cariyaapi.taka)임.
3)'지금 여기’ : 광의로는 먼 하늘나라의 신이나 과거의 전통 또는 미래의 생에서 삶의 가치의 기준을 구하지 않고 현재 이곳에서의 자신의 행위와 그 인과적 의미에서 오로지 전 진리성을 찾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을 집약하며, 또 협의로는 실수행면에 있어서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기대 등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재 이 순간에 전념하고자 하는 정념 공부의 특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경에서 자주 쓰임. 영어로는 ‘here and now’임. 4)지배적 카스트 : 바라문계급과 무사계급을 가리킴. 부처님 당시엔 무사계급의 지위가 상승되어 정치적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었음.
5)아쇼카(Asoka) 황제 : 서기전 3세기경[서기전 268년(일설 269년) 즉위 233년 (일설 232년) 몰함]의 마우리야 왕조의 왕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운 대영주(大英主). 불교에 귀의, 불법을 통치이념으로 선정을 베풀고, 인도 주변국들에게도 널리 사신을 보내 불교를 전파시킴. 특히 그의 아들 마힌다 스님의 스리랑카 전교는 불교사상 매우 의의가 크다. |
'동양사상 >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한 마음가짐- 사무량심 -냐나뽀니까 (0) | 2020.06.15 |
---|---|
불교의 명상-프란시스 스토리 (0) | 2020.06.14 |
비폭력과 세계평화-소마스님 (0) | 2020.06.13 |
불교이해의 정(正)과 사(邪)-마음 길들이는 방법 : 네오나르도 A. 불렌 (0) | 2020.06.12 |
현대 불교에 대한 진짜 위협-나타샤 잭슨 (0) | 2020.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