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명상
BUDDHIST MEDITATION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BODHI LEAVES NO. B 15)
불교의 명상 *주1
명상이라는 정신수행은 어떠한 계통의 종교에서나 볼 수 있다. 기독교의 기도는 일종의 사념적 명상법 *주2 이며, 힌두교에서 행하는 `게송'이나 `진언'의 암송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영감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들 명상체계의 대부분은 명상의 목적과 명상의 부수물들을 혼동하고 있다. 즉 때로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특별한 심령현상을 명상의 목적으로 여기는 나머지 반 몽환상태에서 경험하는 환시나 환청을 명상훈련의 최종성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닦는 명상방식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직도 대부분의 인류는 마음이란 것이 어떤 기능을 하며 그 힘이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영매의 상태에 이르는 자기 최면과 직접적 인식에 이르는 정신정화 과정을 일반인들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후자야말로 불교에서 구하는 정신집중의 참된 목적이다.
기독교도는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성자들을 보게 되고, 또 대화도 한다. 힌두교도는 만신전의 신들의 화현을 목도한다. 모두가 그런 식이다. 한 예로 벵갈 지방의 신비가인 라마크리슈나 빠라마항사는 기독교를 그의 명상주제로 취하자, 전에는 그렇듯 선명하게 나타나던 힌두교 신들의 화현 모습 대신에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환영을 보고 환청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명상은 기껏해야 평소 잠재의식 깊숙이 엎드려 있던 관념을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 객관화시킨 데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최면술의 경우, 피술자가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 용이하게 최면가의 암시에 걸린다. 이때 이 최면 상태의 사람을 잘 관찰해보면, 피술자가 시술자에게 복종적일수록 시술자는 능력껏 솜씨를 발휘해 자기가 겪어보고 싶은 경험을 그를 통해 마음대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명상에는 전혀 색다른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하겠다. 즉 영매능력을 더 발전시켜 피술자로 하여금 다른 차원의 존재를, 예를 들어 천상계나 불행한 유령들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을 실제로 보고 듣도록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욕계천상(欲界天上) *주3 이나 아수라 세계 *주4 는 우리 인간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므로 용이하게 접근해 올 수 있으며, 이 사실이 곧 서양 심리주의의 영적 현상을 올바로 설명해주는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불교 명상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명상의 부수물로서 발생하기는 하나 이는 불교 수행의 올바른 목적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애인 것이다. 예수를 본 기독교인이나 성스런 끄리슈나와 얘기를 나눈 힌두교인은 자신의 종교생활의 목적이 이루어졌다하여 대단히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부처의 환영을 보는 경우, 자기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관념이 구상화(具象化)되기에 이르렀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어떤 신이나 인간도 더이상 당신을 볼 수 없다고 스스로 확언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명상 및 선정과 타종교의 명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명상과정에 들어가는 불교인은 이 차이를 잘 알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의식 가운데 선명하게 정립해 놓는다.
재생과 고통의 근본원인은 갈애와 결합하여 상호작용하는 무명이다. 이들 두 가지 원인은 악순환을 이룬다. 한편으론 무지로 인해 관념들이 생기고 다시 관념에서 욕망이 생긴다 원래 이 현상계는 정작 우리가 해석하여 갖다붙인 의미말고는 그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 해석이 무명에 의해 조건지워질 경우 우리는 전도(顚倒) *주5 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 때문에 우리는 무상(無常)한 것을 변함없는 것[常]으로, 괴로운 것[苦]을 즐거움[樂]의 원천으로, 실체가 아닌 것[無我]을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我]로 뒤바꿔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섯 개의 인식통로[六根], 즉 눈·귀·코·혀·몸·의식을 통해 얻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에 대해 그릇된 해석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근래에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밝혀진 물리적 세계의 실상은 종래 우리가 육근을 통해 감각적으로 인식해오던 세계와는 매우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습에 가까워져 가고 있어서 우리는 새삼 불교진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감관이다. 우리가 즐거움의 대상을 소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추구하고 있는 것은, 기실은 신기루를 동경한 나머지 헛그림자를 좇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알고 보면 무상이며, 고이며, 무아이다. 즉 덧없는 것이고, 고통과 결부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추구는 또다시 새로운 무상, 고, 무아의 원인이 될 따름이다. 즉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수밖에 없다. 또 그런 환상을 좇고 있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로 무상하고 고통에 얽매여 있으며, 어떤 일관된 자아원칙도 없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욕구를 좇고 있는 것은 꼭 그림자가 그림자를 좇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불교의 명상목적은 이런 진리의 실상을 단순히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무명과 갈애를 실제로 종식시킴으로써 무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보다 원대한 데에 있다.
이와 같이 궁극적 완성에 이바지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명상이라면 ― 그 효과는 바로 명상자의 인격됨됨이와 인생전반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 분명히 명상 체계 자체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그것을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명상을 통해 빛을 보았다거나, 환영을 지니게 되었다거나, 또는 황홀경을 맛보았다 해서 명상의 목적이 성취된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들쯤은 불교 명상의 목적을 참되게 이해하고 있는 불교인에겐 너무나 평범한 것이어서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경험들에는 실제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위험은 정신병리학을 연구해본 학도라면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그런 것이다.
참된 불교 명상의 목적과 그 방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념의 수행법에 관한 경, 즉 <대념처경(大念處經)> *주6 속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육체와 마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의 움직임과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를 주의깊게 살피는 능력을 키워야만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이 육체와 정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자아'라고 그릇되이 여기지 않게 되고,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히 그것들을 바라보게 된다. 즉 육체의 움직임을 사대(四大 : 地·水·火·風)의 결합이 물리적 인과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게 되며, 또한 정신적 움직임도 외부자극에 반응하여 생하고 멸하는 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의 상태로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을 마치 자신과 하등 관계도 없는 별개의 현상의 질서인 것처럼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아란 관념[有身見] *주7 이 없다면 이기적인 태도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과연 어디서부터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만약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취하는 버릇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채 여전하다면 그 사람의 명상수행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나무의 가치는 과일로 평가되듯이 사람은 그 행위로 평가된다. 달리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이 점은 특히 불교 심리학에서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행위 그 자체로 보기 때문이다. 가장 진실한 의미로 말한다면 이들 행위 때문에, 아니 이들 행위가 나타내는 업인(業因)과 과보의 연속 때문에 우리는 한 생애의 모든 단계를 통해, 또 심지어 금생과 내생을 이어서까지 어떤 동일체가 지속하는 것처럼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주의깊게 살핌으로써 우리는 자아란 미망을 깨뜨릴 수 있게 되며 나아가서는 외부적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까지도 끊을 수 있다. 그리하여 궁극에 가서는 갈애하는 `자아'도 갈애되는 대상도 없게끔 된다.
이와 같은 공부는 길고도 힘드는 것이며, 세속에서 또 세속적인 근심에서부터 물러났을 때만 해낼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잠깐만 현실로부터 비켜서서 이 공부를 닦아도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사에 있어서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상당한 정도로 갖출 수 있게 된다. 일단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일이야말로 명료한 사유를 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봄으로서 우리는 개인적 편견이나 그 밖의 어떤 다른 편견도 가지지 않고 당면한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여, 용기있고 신중하게 이에 대처할 수 있게끔 된다. 그러나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작 중요한 선물은 오히려 정신집중이란 귀중한 선물일 것이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의 점에 계속 고정시킬 수 있는 능력[心一境性, ekaggataa]인데 이 능력이야말로 공부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훌륭한 비결이다.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은 마치 바람처럼 이리저리 끊임없이 헤맨다. 꼭 길들이지 않은 말과도 같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이 우주에 그보다 더 강력한 도구는 달리 없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자야말로 삼계(三界) *주8 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정복하면 첫째, 공포가 사라진다. 공포는 마음과 몸[名色] *주9 을 `자아'와 결부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몸이나 마음에 가해지는 손상을 바로 자기자신에 가해지는 손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미망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오온(五蘊 ;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주10 의 작용이 바로 다름 아닌 인과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그와 같은 미망은 사라지고 그 사람은 다시는 죽음이나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는 성공도 실패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덕을 해치는 행위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어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떨어져 볼 수 있는[遠離] 힘을 키우면 그만큼 공덕을 해칠 가능성도 줄어든다.
불건전한 행동은 불건전한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청정해지고 무질서한 상태가 개선되면 악업은 더이상 축적되지 않는다. 그는 그릇된 행동을 두려워하게 되고 관대함[無貪], 자비로움[無瞋], 지혜로움[無癡]에 바탕을 둔 행위에서 점점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출입식념(出入息念)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신집중 개발법은 출입식념, 즉 들숨과 날숨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공부방법이다. 이 수행법에서는 요가에서처럼 호흡에 대해 까다로운 요구를 늘어놓지 않고 오직 평상시의 호흡 그대로를 전제로 한다. 호흡은 단지 주의력을 한 지점에 고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뿐이며 보통은 코끝에다 의식을 집중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주의력이 어떤 이유로도 이리저리 방황해선 안되며, 심지어 호흡을 좇아서 움직여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일단 선택한 곳에 주의력을 단단히 고정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호흡을 확실히 지켜보기 위한 방편으로 호흡횟수를 헤아리는 방법을 써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인 방편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음이 고정된 채로 지속될 수 있게 되면, 헤아리는 노력은 중지하고 그냥 들숨과 날숨을 염하며, 다만 때때로 주의력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헤아려 보는 것이 좋다.
심리적 동요가 정지된 상태[止, samatha]에 가까이 갈수록 호흡은 점점 더 가늘어져서 마침내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단계에 가면 반드시 어떤 심령적 현상이 나타나는데 처음 겪을 땐 대개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또 실제로 우리 몸을 통해 고(苦)를, 즉 신체의 물리적 요소[色蘊]가 생멸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단계가 온다. 이때는 혼란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럴 때 기억해 둘 것은 이와 같은 교란 상태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몸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것인데, 이제 마음이 안정되니까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명상계발을 위한 도구
명상수행 *주11 에선 관심을 기울여 쏟는 집중처로써 흙이나 색깔과 같은 특별한 외부적 보조도구를 쓸 수도 있다. 촛불이나 벽에 난 구멍, 또는 금속으로 된 대상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이용법에 대해선 빠알리 경전과 <청정도론> *주12 에 설명되어 있다.
특히 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어떤 명상대상을 지정해주실 때는 반드시 그 제자들의 특성에 맞추어 이를 주셨으며, 그때 각자에게 알맞는 기술을 골라주신 부처님의 오류없는 지혜는 사람의 전생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었음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 사념적 명상을 시킬 때도 마찬가지로, 그 주제를 고를 때 제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제자가 성격적으로 지니고 있는 큰 결함을 시정하는데 도움될만한 것으로 골라주셨다.
그래서 가령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에게는 신체의 부정(不淨)을 명상[不淨觀]하거나 `묘지에서의 명상법[白骨觀]'을 취하도록 권유하셨다. 그 목적은 이들 명상을 통해 애착심을 염오심으로 중화시키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애착과 염오 모두가 사라지는 구경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교묘한 방편'에 불과하다. 구경에 도달한 아라한에게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다. 대목건련 존자가 어느 나병환자로부터 한 덩어리의 밥을 받았을 때 보여주었던 것처럼, 아라한은 매사를 대함에 있어 완벽한 평온심으로 대한다.
염주의 사용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염주를 사용하는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다른 종교에서처럼 판에 박은 듯이 정형구(定型句)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기 위해서만 염주를 사용할 뿐이라면 아무리 경건하게 수많은 글귀를 거듭 되뇌어본들, 불교에서는 별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다만 주의력을 지속시키고 마음을 맑히는 방법으로 염주를 사용하는 경우엔 대단히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염주사용법의 하나가,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불·법·승의 공덕을 빠알리어 정형으로 되풀이해 외우는 길이다. 염주의 첫 알을 돌리면서 "이띠 삐 소 바가와!-"로 시작하여 다음 알을 돌리면서 두번째 자질에까지 계속하여 "이띠 삐 소 바가와 아라하-"하는 식으로, 계속하여 마지막 알에 가선 정형구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방식으로 해나간다. *별주* 이런 노력은 온 마음을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성공적으로 이행해 낼 수 없다. 이렇게 노력해나가다보면 불·법·승의 거룩한 공덕을 되새기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높은 경지로 고양된다. 다시 말하면 이 말들이 지니고 있는 뜻이 생멸하는 심찰나(心刹那) *주13 에 하나하나 새겨지기 때문이다.
아비담마 *주14 적 심리학 용어로 말하면, 이 공부의 가치는 생기고[成] ·머물고[住]· 사라지는[壞] 각 국면에 걸쳐 심찰나가 선한 성질을 띠는데 있다. 이들 선량한 심찰나들의 각각 그 하나하나는 상카라, 즉 성향의 요소[五蘊]의 개선에 기여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심찰나는 그 후속 심찰나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영역으로 향하게 이끎으로써 인격을 그 수준에 정착시키는데 기여한다.
적정[止]의 수행 적정한 마음을 닦는 지[止]수행을 하면 세 가지 이익이 따라온다. 금생에 행복을 가져오고, 좋은 내세를 기약하며, 마음의 때[垢]를 맑게 해준다. 이 세번째 요소는 통찰[觀, vipassanaa]을 성취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적정에 들면, 마음은 휘저음이나 출렁거림이 완전히 멈춘, 고요하고 맑은 호수처럼 되어, 그 표면에 사물의 본성을 여실히 거울 비추듯 비출 수 있게 된다. 즉, 갈애의 출렁임 때문에 평상식(平常識)으로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정을 이룬 마음, 그것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롭고 충만된 모습이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호(相好)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바 있어 부처님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도 이 상호를 대하면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부처님의 상호는 그 자체가 바로 명상의 적절한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대다수의 불교인들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고요 적정한 부처님의 상호는 세속적 희망이나 공포로 어지러울대로 어지럽던 마음을 가라앉혀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상호자체가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열반의 소식이다.
관법수행 관법수행은 존재의 세 특상(特相) *주15 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직접적 통찰로써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 세 특상은 과학이나 철학의 진실과 마찬가지로 지성적 사유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유방식을 통한 깨달음으로는 그 자체가 지니는 한계성 때문에 이기심과 갈애라는 양대 장애를 없애기에는 불충분하다. 존재의 궁극적 실상은 이런 장애들을 완전히 극복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인식 즉 직접적 `직관'의 차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때 이들 세 특상은 심리적 사실로서 실제적 체험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본인이 직접 체험을 통해 확인하기 전까지는 감관적 인식계[육근과 육경] *주16 나 그에 따른 감관적 반응이 지성적 확신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한다. 결국 서로 다른 두 수준의 의식이 병행하여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통 이 무대에서는 무명이 지배적으로 우세하여, 의지적 활동이란 형태로 줄곧 작용하면서 생의 진로를 주도해나간다.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아가는데 실패한 철학자야말로 이론과 실제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가장 비근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직접적 인식을 얻게 되면, 지금까지는 최고의 지성단계일지라도 기껏 이론에만 머물고 있던 것이 이제는 마치 우리가 뜨겁거나 찬 것을 또는 배고프거나 목마른 줄 `알 듯' 그렇게 실제적인 지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직접적 인식에 도달한 마음은 진리 위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어 미망 대신 반야[慧] *주17 가 자리잡도록 한다.
기독교의 기도와 같은 종류의 사념적 명상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어 언제든지 누구라도 행할 수 있다. 거기에는 특별한 준비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좀더 차원 높은 훈련인 지(止)와 관(觀)을 행하는데는 기본 도덕률인 계율의 엄격한 준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수행을 위해서는 세속의 불결함을 떠나, 공부를 이룬 스승 밑에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한거상태(閑居狀態)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흔히들 이런 점에 대해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함부로 기술적인 연마에 뛰어들었다가 영적 손상을 입고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을 한갓 시험대상으로 삼는 경솔한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만일 믿을만한 스승의 지도 아래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일 때에는 공부를 오직 사념적 명상에 국한시키는 편이 최선책이다. 이 공부로선 깨침이라는 구극단계에까진 도덕적 면에서 많은 진전을 성취할 수 있으며 보다 본격적인 다음 단계를 위해 착실한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애관법의 실천
자애관법(mettaa-bhaavanaa)은 사념명상법 중 가장 보편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행법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닦을 수가 있다. 보편적이고 차별이 없는 자애의 염은 마치 라디오 전파처럼 온 사방으로 뻗쳐나감으로써 마음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힘을 드높이 승화시킨다. 자비관법을 꾸준히 지속해나가면 마침내 악의라곤 잠시도 품을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진정한 평화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려면 모든 이들의 마음이 평화로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다만 반시간 정도라도 자애관법 훈련에 바칠 수 있도록 된다면 어떤 국제 협정보다 효과적으로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해 참된 진전을 이룩해낼 것이다.
만약 지금 이 새로운 부처님의 법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신조의 사람이든지 범세계적 자애관법 수련운동에 참여하도록 청해서 그들 각자의 종교가 표방하는 최고의 교의에 따라 생활하도록 다짐하게끔 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존하신 부처님께 경의를 드리면서, 동시에 자기네 특정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경의를 표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대종교들이 적어도 이 수준에서만은 생각들이 일치되기 때문이다. 각 종교간에 공통분모가 찾아질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보편적 자애의 가르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가르침만이 영원하고도 일체를 포용하는 진리의 힘으로 모든 인류를 교리적 차이를 초월해서 한데 규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숫따니빠따[經集]>의 자애경 *주18 에는 명상을 통해 계발해야 할 사랑의 마음가짐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 경은 명상을 시작하기 전과 끝낼 때 반드시 암송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데, 실제 이 방식은 지금도 불교국들에선 변함없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이 경의 글귀는 자애의 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정신상태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써, 그리고 명상수행의 주제로써 두루 쓸모가 있다.
불교에서는 관법을 수행해 나갈 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애를 갖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엔 심원한 심리학적 진실이 담겨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신을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은 남에 대해서도 진정한 자애를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가까운 대상은 없다. 따라서 만약 자신에 대한 태도가 건전하지 못하다면 사랑이 솟아나올 샘이 그 근원에서부터 독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을 경탄의 대상으로 이상화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결점과 결함을 충분히 알고 있되, 이를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고쳐나가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마음속 깊이 신뢰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애관법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에게서 적대감이 사라지기를!
이와 같은 생각이 발전되면 다음 단계에서는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똑같은 강도로 자기가 자연스럽게 정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데는 두 가지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첫째 그 대상인물을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으로 해야하고, 또 이성(異性)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19 둘째는 자애의 감정이 자칫해서 바로 이웃한 적(敵)인 색정으로 변질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감각적 기호면에서 성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경우엔 그들의 필요에 맞추어 이 규칙을 적절히 변경할 필요가 있다.
자애의 생각이, 친한 벗에 대하여 충분히 무르익었으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이번에는 별로 뚜렷하게 좋다 싫다 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애의 마음을 펼쳐나간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적대감을 가진 사람을 향해서 자애의 생각을 돌려야 한다.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이 단계에서다. 명상자는 이들 어려움을 미리 예상하고 그 어려움과 맞닥뜨려 씨름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를 위해 청정도론 을 위시한 몇몇 문헌에 여러 가지 방안이 서술되어 있다.
그 첫째 방안은 적대인물을 무아, 즉 실체가 없다는 면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는 적대인물을 비인격적인 구성요소로, 즉 몸뚱이[色], 감각[受], 인식[想], 의지적 행위[行], 의식능력[識]으로 분석하라고 권유한다.
우리의 몸뚱이는 순전히 물질적 세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몸의 털, 피부, 손톱, 이빨 등등 이런 것들을 놓고 적대하고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 감각, 인식, 의지적 행위, 의식능력 등은 모두가 일시적 현상으로 상호의존하여 조건지워지고, 그리고 고(苦)에 묶여 있다. 결국 이것들은 무상·고·무아로서 이내 사라질 것들이고 고통으로 가득차 있으며, 자기라고 내세울만한 실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몸뚱이 그 자체에 개별적 인격성이 있을 수 없듯이 정신적 요소에도 마찬가지로 개별적 인격성은 없다. 그런 그들에게 적대감을 품을 여지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방법도 있다. 가령 적대적인 사람을 연민으로 대하는 것과 같은, 정서적으로 중화시키는 마음상태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명상자는 이렇게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나와 다름이 없다. 나는 그와 다름이 없다. 우리는 둘 다 고통과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둘 다 무명과 갈애로 인해 어김없는 생명의 수레바퀴(윤회)에 매여 있다. 우리는 둘 다 같이 인과법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선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고통을 치뤄야 한다. 그럴진대 무엇 때문에 남을 원망하고 적으로 삼을 것인가? 차라리 내 마음을 맑게 하고, 그리고 그도 그렇게 되도록 바라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 둘 다 같이 고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런 생각을 간절하게 계속하고 있으면 마침내는 적대감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자애의 생각을 이들 네 가지 부류의 대상들에게 ― 자기 자신, 친우, 중립적으로 대하는 사람, 적 ― 똑같은 질과 심도로 행할 수 있게 될 때 그 명상은 성공적인 것이 된다. 대상을 보편성으로 확대하여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으로서 명상자는 자애의 대상을 다음 다섯 제목에 따라 차례로 생각한다. 느낄 줄 아는 모든 존재들[有情物],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生命體], 존재 세계에 태어난 모든 존재들[存在體], 인격을 지닌 모든 것들[人格體], 개별체의 형식을 취한 모든 것들[個體], 그리하여 이들 각 집단에 대해 따로따로 다음과 같이 일정한 생각을 되풀이한다.
이 같은 명상에서는 어떤 대상이든 국소(局所)적 위치를 문제삼지 않고 일체를 보편적으로 포용한다. 그래서 `대상을 보편화하여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은 대상을 분류, 한정해 나가면서 자애로 충만시키는 방법인데 여기에는 대상을 일곱 부류로 분류하여 한정시킨다. 일곱 부류란 즉 모든 남성, 모든 여성, 모든 고귀한 분(성스러운 네 가지 결실[四果]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성취한 사람), 모든 범부, 모든 신, 모든 인간, 모든 악도의 중생들이다.
이들 각각의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위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명상한다.
시방에 있는 일체 존재를 사랑으로 충만시키는 방법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행한다. 자신의 마음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명상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정신을 모은다.
마지막으로 앞서의 `보편화하여 충만시키는 법'과 한정화시켜 충만시키는 법`에서 말한 열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제각기 시방의 각 방위에 따라 또다시 적절한 정형구에 맞추어 생각한다.
이상의 스물두 가지 자애관법 수행방식 중 어느 것이든 이를 실천하면 본삼매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즉 선(禪)이라는 정신적 몰입상태로 이끄는 정신 집중상태[定]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자애를 통해 마음의 해탈을 얻는 방법[慈一心解脫]'이라고 부른다. 이는 또 네 가지 범주처(梵住處)의 첫번째 것이기도 한데, 이 네 가지 거룩한 상태에 대해 자애경은 `여기에 가장 높은 삶이 선포되었다'고 설하고 있다.
자애·동정·동희·평온[慈悲喜捨]의 네 마음상태는 세간식(世間識) *주20 에선 가장 높은 수준을 점한다. 이들 마음상태에 도달하여 그곳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에겐 생의 고가 뚫고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신처럼 그는 운명의 시련과 세속상황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보호받는 가운데, 흔들림 없는 고요 속에 움직이고 행동하게 된다. 이 네 가지 마음가짐 가운데 제일 먼저 닦아야 할 마음가짐이 바로 자애다. 왜냐하면 무한한 사랑을 통해서 마음은 처음으로 해탈의 맛을 보기 때문이다.
부록 : 자애관법(慈愛觀法) 자 애 경 선행에 익숙해진 사람이 유능하고 곧고 의연하며
감관을 고요히 하여 빈틈없고, 잘 절제하며
(또한 그는 생각한다) 안전하고 행복한 가운데 그 누구도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기를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그리고 서 있거나 걷거나 앉아있는 동안
그래서 그가 그릇된 견해에 말려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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