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수행을 위해 한달에 4일은 남겨 놓는 것
전통적으로 불교도들에게 음력으로 정한 어떤 날들은 재가 신도들이 절에 가서 수행하고 배우며 시간을 보내는 ‘절에 가는 날’ 또는 계를 지키는 날로 되어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불교의 전통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한 달 중, 재가 신도를 위해서는 26일을 주었다. 그리고 4일은 절에 가서 수행하는 날로 정한 것이다. 재가자들에게 세속의 생활이 더 많은 날들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르마 속에서 훈련 할 기회를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참 중요한 일이다. 붓다는 “낮과 밤은 실로 가차 없이 지나간다 ;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인가 ?”라고 말한다. 붓다는 우리가 잊어버리고 경망하게 살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단순히 날들이 간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우리의 생명이 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끝날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다. “낮과 밤은 실로 가차 없이 지나간다 ;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인가 ?”
붓다는 우리에게 재삼, 재사 지금 이 현재에 명상할 것을 권고한다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왜 왔는가 ? 누가 우리를 여기 오게 했으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 당신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달을 여기서 보낼지 아는가 ? 우리가 여기를 떠날 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낮과 밤들이 흘러가는 것을 반조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계속 반추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고 그리고는 갑자기 늙는다. 이러한 변화는 매일 일어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잘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행동들에 대해 아주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들은 한 달에 네 번은 절에 가서 모든 세속 일을 밀어놓고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스물여섯 날은 재가자들의 날들이다. 세속 일을 하고 생계를 위해 벌이를 한다 ; 사업을 잘 돌본다. 그리고 그 4일은 일을 멈추고 절이나 명상선원에 가는 날로 정한다. 거기서 우리는 가르침을 듣고 무엇인가 세상과는 다른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는 우리가 듣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이것은 우리, 저것은 우리 것.” 모든 것이 “우리” 그리고 “우리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가 “우리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말을 결코 들어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에 가서 법문을 들으면 스님은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 저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여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 당신은 놀랄 것이다.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일까 ? 이 모든 것은 분명히 나의 것인데. 나는 이것들을 얻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그럼 저 가르침은 거짓말인가 ? 왜 스님은 그렇게 이야기 하는 걸까 ?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저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 당신은 처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당신은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모를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마음속에 “이것은 나 ; 이것들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절에 갈 때마다 당신은 이런 말들을 계속해서 듣게 된다 : “이것은 우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혼란이 가중된다. 세속과 다르마는 싸우기 시작한다. 세속은 그들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우리다. 이것들은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얼마 후, 이러한 말들을 규칙적으로 듣고 당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당신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는 통찰을 가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당신의 생각하는 양상도 변한다. 그때야 비로소 스님들이 말했던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저 어쩌다 한 번 절에 와서 그런 소리를 듣고 집에 가서는 전혀 다른 소리를 듣게 된다면 부조화로 인한 혼란이 생길 것이다. 사실상 진리를 보고 당신의 마음이 확고해 질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당신은 이 길을 뚫고 가야 한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그 혼란 속에서도.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고 명상하면서 당신은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보게 될 것이다.
다르마를 듣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에 빠져들고 당신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조사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면서 당신의 늙어 감을 자각하게 되고 이제 이런 것들이 가슴에 스며들게 된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가까이 오고 비로소 그 가르침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게 된다 : 소위 말하는 “우리의 것”은 그저 통속적 유통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위 말하는 ‘나’라는 것은 단순히 소통을 위한 개념이라는 것을.
당신이 집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고려해 보라. 어떤 것도 부서지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던가 ? 그런 것들이 변하지 않던가 ? 이런 것들이 당신을 도와 줄 실례들이다. 만일 그것들이 당신의 것이라면 왜 그것들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 복종하지 않는가 ? 좋다. 이런 외부의 물건들은 그렇다고 치자 - 당신 자신이라고 하는 몸은 어떤가 ? 왜 병이 나는가 ? 만일 당신이 진짜 당신 몸의 주인이라면 왜 몸을 병나게 하는가 ? 몸이란 것은 단지 땅, 물, 불,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몸에 태어나 사는 이래로 우리는 이것들이 정말 우리 것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것들과 엎치락뒤치락한다. 이 무상한 몸뚱이를 가지고. 그러나 우리가 이길 확률은 없다. 우리는 늘 패배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부서져 나간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 앞에서 그것들과 협상을 벌일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나의 애들이 먼저 잘 자라게 하자. 돈을 우선 좀 벌자.” 당신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시간이 가면 그냥 그렇게 일어날 뿐이다. “그렇다면 오, 나의 가족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 누가 나의 아내와 아이들을 돌본단 말인가 ? 우리 부모님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 다 소용없는 일이다. 죽음의 사자는 이런 것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심에서 우러나 다르마에 접근하고 다르마에 들어설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주르르 미끄러지며 지나가는 코브라 같은 독사를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그것을 보지를 못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경계하지 않고 어쩌다가 밟고는 독에 물려버린다.
우리는 코브라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에 독이 있음을 안다. 코브라가 오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것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면 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뱀이 독을 가졌을지라도 우리는 영향 받지 않는다. 그것을 살짝 떠나고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독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마치 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통당하지 않아도 좋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해가 될 것들을 알아차리고는 그것에서 떨어지도록 한다. 몸과 마음은 그들 자체로서 독뱀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언제 한번이라도 알아차린 적이 있었는가 ? 당신의 몸이 건강하고 강할 때는 당신은 의기양양하다 : “오 ! 정말 좋아, 행운이 가득하잖아 ?” 그러나 어떤 때는 병이나 통증으로 끙끙거리며 고통을 당한다. “오, 이게 도대체 무슨 업이란 말이냐 ?” 이것이 독뱀이다.
마음도 그와 똑 같다. 일들이 잘 진행되면 당신은 기뻐하며 ‘인생이 뭐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야.’ 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지면 당신은 밤잠도 못자 가며 눈물을 훔친다. 독이란 이런 것이다. 뱀이 우리를 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있다.
붓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기 위해 다르마를 공부하기를 원한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예불을 올리며 염불을 한다. “몸은 무상하다. 감각은 무상하다. 인지는 무상하다. 생각은 무상하다. 식은 무상하다.” 그리고는 “몸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다른 무더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한다. 몸과 마음을 통틀어 봐야 거기 아무것도 없고 오직 무상만이 있다. 거기에 우리 또는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아무 것도 없다. 머물다가 가버린다. 나타나고 그리고는 사라진다. 이것이 그것들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나의 것이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모든 재산을 전부 던져 버리라는 말로 해석한다. 표피적 해석으로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며 이것으로 논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깊이 명상해야 할 어떤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이 말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끝내고 당신의 재산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애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세속적 소통을 위한 진리라는 것이 있고 또 궁극적 진리의 수준이 있다 - 가설의 수준과 자유의 수준. 세속적 수준에서 김씨, 이씨, 박씨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편리를 위해 이러한 가설을 사용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 기능을 쓰고 교류하기 위해서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궁극의 어떤 것으로 애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비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물들을 표피적으로 보면 사물들이 눈에 보이는 그것을 진실처럼 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핵심을 들어가 철저히 조사를 한다면 그들이 가설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이 다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은 독이 된다. 마치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코브라처럼. 우리는 그것을 집어 들거나 그 위를 걷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그것의 갈망과 번뇌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우리는 고통당한다. 그들은 우리를 수많은 혼란과 분쟁으로 인도할 것이다. 몸이 그것 자체의 변화라는 자연스런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비탄에 빠져서 울고불고한다. 이러한 것들이 몸과 마음의 독뱀이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지독한 고통은 단순히 그들 자신의 마음이 공급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왜냐하면 사물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난폭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두운 장소에 혼자 남겨지게 되면 그들은 귀신이나 어떤 것들을 생각하며 공포에 질려 가지고는 펄쩍 뛰며 헐레벌떡 도망간다. 그들을 달려가게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이다. 무지한 마음은 그들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확산시킨다.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어떤 미세한 것도 확신할 수 없다 - 그러나 훈련할 수는 있다. 만일 누군가가 너무 자기 멋대로라면 또 좀 다를 것이다. 스스로 생각의 폭을 확장시키며 공포를 더욱 촉발시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6 일의 재가자의 날들과 수행하러 가는 4 일의 절에 가는 날들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절이나 선원에 가지 못할 경우는 이 의미를 잘 새기고 집에서 수행해야만 한다. 이러한 재계일의 원칙을 잊지 않고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들을 할 수 있는 많은 시간들을 가졌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날들은 생계를 위한 일을 멈추고 당신의 가슴을 훈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가르침과 수행을 얻은 후에 다시 당신의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세상일을 하는 동안 마음이 다치고 혼란이 오면 다시 또 수행하러 간다. 다시 또 생업으로 돌아간다. 당신은 세속에서 이런 식으로 당신의 길을 배워 나간다. 올바른 길을 배우며 생업도 어떤 특별한 고통 없이 지탱해 나갈 수가 있다. 그러다가 무상이라는 것에 도달하면서 당신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 그리고 고정되지 않은 현상들에 애착한다는 것이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게 된다.
정신적 수행을 위해 한달의 4일은 남겨 놓은 것. 이것이 지혜로운 이들에 의해 전승되어 온 것이다. 이제 정신적 훈련을 위한 가르침을 듣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명상해야 할 시간이다. 만일, 한 달 내내 세상일에 매여 산다면 분명히 그것은 더 많은 고통을 불러다 줄 것이다. 26일이면 충분하지 않는가 ?
-아잔차 스님의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진다> 중에서-
스리랑카 포야데이 행사 참고
테라바다 국가인 스리랑카에서는 매월 보름, 출가자의 포살의식에 따라 재가 신도가
절에 모여, 마음을 고요히 하며 지내는 포야데이 전통이 있습니다.
1. 포야데이(Poya day)에 하는 일
첫째, 포야데이 행사에 참석합니다.
둘째, 붓다, 담마, 스님들께 귀의하는 예불과 공양(Puja)를 올립니다.
셋째, 여덟가지의 계율을 지키며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합니다.
넷째, 법문을 듣거나 경을 읽으며, 스스로 수행하도록 합니다.
2. 재가자가 지킬 계율
5계 : 살생, 도둑질, 성행위, 거짓말, 음주의 금지
8계 : 5계에 더하여 오후 불식, 춤/ 노래/ 음악/ 구경/ 화장/ 향수 금지,
높고 편안한 의자나 침구의 사용 금지
※ 포야데이에는 8계를 지켜야 하지만, 절이나 명상센터가 아닌 집이나 직장에서
(인터넷으로)참석하는 재가자는 여건상 5계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용어 설명]
테라바다 : 상좌불교, 남방불교
포살 의식 : 持戒를 실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집회
持戒(지계) : 계를 지키는 일
보름(滿月) : 매월 음력 15일
<오계와 팔계(八戒)>
1.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2.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3. 어떠한 성행위도 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4.거짓말을 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5.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마시지 않는 계를 지겠습니 다.
6. 정오 이후부터 음식을 먹지 않는 계를 지겠습니다.
7. (춤추고 노래하며) 오락을 즐기거나, (향수, 화장품, 장신구등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8. 호화로운 침상을 사용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경전에는 8일 14일 15일로 되어있고 남방불교는 8일.14일 .15일.23일을 재계를 지키는 날로하고 15일은 절에서 재가신도를 위한 포살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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