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⑦] 불을 발견한 인류, 호모 에렉투스
프로메테우스의 선물로 어둠 밝혀 시간을 정복하다
우연히 발견한 불을 통제하면서 공동체 형성… 생체 시간을 조절해 사고와 도구제작 능력 높여
#1. 유진 뒤브아의 ‘잃어버린 연결고리’ 찾기
인류의 위대한 여정을 밝혀주는 혁신적인 학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궁극적이고 유일무이한 질문을 만들어낸 후,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그 ‘거친 들판’에서 홀로 전전긍긍하다 ‘우연히’ 그 해답을 찾는다.
네덜란드인 유진 뒤브와(Eugéne Dubois, 1858~1940)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운 좋게 찾은 사람이다. 그는 인생을 쓸쓸하게 마감했지만 남다른 호기심으로 새로운 인종을 발견했다. 그는 네안데르탈인 화석 발견(1829년)과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판(1858년)으로 유럽에서 인류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화론에 관심을 가졌고, 진화를 공부하고자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어느 날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의 강연에 참석해 ‘잃어버린 연결고리’에 관해 듣고 충격을 받는다. 헤켈은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현생인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결고리’가 그 중간에 있으며, 그 고리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류와는 다른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내세웠다. 당시 주류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게 독자적으로 발생한 인종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조론적 다원발생론(creationist polygenism)을 주장하였고, 찰스 다윈은 인간은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는 단일발생론(evolutionary monogenism)을 주장한다. 헤켈은 이들과는 다른 진화론적 다원발생론(evolutionary polygenism)을 주장한다. 그는 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의 언어연구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슐라이허는 인류가 사용하는 수많은 언어 그룹은 인류가 등장하기 이전의 가상인류인 우르멘쉔(Urmenschen; 독일어로 ‘원(原)인류’라는 뜻)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기술하였다. 헤켈은 언어들의 다중기원 설을 기반으로 인류의 다양한 인종의 독자발생론을 주창하여 불행하게도 나중에 등장한 백인 우월주의와 독일 나치의 아리아 백호주의에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뒤브와의 첫 번째 연구논문은 인간의 발성기관인 후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포유류 동물의 후두는 물고기의 아가미 연골조직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뒤브와의 지도교수는 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자신의 주장이라고 가로챈다. 뒤브와는 학문세계에 염증을 느꼈다. 그 후 진화의 결정적인 증거는 후두가 아니라 실제로 발굴된 화석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영국 동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의 책 <말라이 제도>에 매료된다. 이 책은 월레스가 1854년에서 1862년까지 8년 동안 말라 이 제도 남부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인도네시아 섬들을 과학적으로 탐사하면서 남긴 글이다. 이 지역은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뒤브와는 특히 이 책에서 수마트라섬에 관한 기록들에 심취했다.
뒤브와의 집념 끝에 모습 드러낸 ‘잃어버린 연결고리’
그는 수마트라섬에서 발견된 수많은 동굴에서 인간의 화석으로 보이는 유물들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그는 이 화석들을 분석하고자 고고학 탐사에 필요한 경제적인 지원을 신청했지만 당시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그는 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곳에 의무관으로 지원하여 가족을 이끌고 미지의 세계로 용감하게 이주한다. 뒤브와 가족은 수마트라섬에서 화석 수집에 집중하지만 곧 말라리아에 걸려, 자바섬으로 재배치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자바에서 차와 커피 같은 기호품을 재배해 유럽으로 보내는 일로 부를 축적했다. 뒤브와도 원주민들의 노동력으로 화석 발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수 년 동안 1만2000개 이상의 동물 화석을 수집했지만 인간화석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5년 동안 이 화석들을 외롭게 분석하면서 그들 중 몇 개 화석을 ‘잃어버린 연결고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 화석들을 피테칸쓰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 즉 ‘직립 원숭이-인간’이라 명명하였고 나중에 간단히 ‘자바인’이라고 불렀다. 자바인 화석은 원숭이보다 크지만 인간보다는 작은 두개골, 치아 한 개, 그리고 이족보행을 했다는 증거를 담고 있는 왼쪽다리의 대퇴골이다. 이 대퇴골은 심하게 다친 흔적이 있다. 뒤브와는 자바인의 화석을 발견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거의 목숨을 내놓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열대지역 열사병으로 자식을 잃고 뒤브와 자신도 말리리아, 호랑이의 공격, 그리고 동굴 우물에 갇히는 등 수없이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했다.
그의 학문적 집착은 그를 불행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가족이 승선했던 배가 자바에서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동안 강풍을 만나 모두들 구명정으로 옮겨 타야 했다. 그는 아내에게 세 자녀를 맡기고 자신은 자바인 화석들이 담긴 여행 가방을 가슴에 동여맸다. 그의 아내는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이런 철없고 매정한 뒤브와와 이혼한다. 그가 유럽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발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학자들도 거의 없었다. 대부분 학자는 이 화석들이 원숭이나 서로 다른 여러 유인원의 화석이라고 폄하했다. 그의 제자 구스타브 슈발레가 그가 발견한 두개골에 대한 연구를 통해 뒤브와보다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점점 이 화석들을 공개하길 꺼려하면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의 개인사로 보면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아 인류기원에 대한 화석연구의 시조가 되었다.
자바인은 후에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으로서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분류됐다. 호모 에렉투스는 우리가 보기에 생김새가 특별하다. 눈 위 뼈가 돌출되었고 매우 납작한 코에 앞 이마가 뒤로 밀려 있다. 특히 턱이 압도적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뇌 크기는 775㏄에서 1200㏄로 오늘날 현생인류 뇌 크기에 근접한다. 그는 완벽한 이족보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석기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인류의 조상으로선 처음으로 사냥하고, 불을 만들고, 정교한 도구를 제작하고 무엇보다도 가족 중 허약한 자를 돌보는 자비를 베풀었다.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들 중 음식을 씹을 수 있는 치아가 없는 유물이 발견됐는데, 이 화석의 주인공은 누군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았음을 방증한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의 조상은 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결국 현생인류의 조상인 자바인이 되었다.
뒤브와가 자바섬 솔로 강변의 트리닐에서 발견한 화석 중 예술의 첫 흔적이 담긴 화석들도 있다. 조개들 위에 기하학적 형태로 일정하게 새긴 흔적이 발견됐다. 이 지그재그 형태는 사선으로 비추는 빛 아래에서만 볼 수 있다. 이 규격화된 모양들은 동물들이 낸 표시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마모된 흔적도 아니다. 이 새김 표식은 54만 년 전부터 43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인류가 남긴 최초의 예술 흔적이다.
#2. 156만년 전의 소년, 투르카나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프리카 투르카나에서 시작했다. 1984년 8월, 아프리카 투르카나 호수 동편으로 5㎞ 떨어진 나리오코토메 강의 남쪽 강둑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리차드 리키와 미브 리키의 오랜 조수였던 카모야 키메우는 조그만 두개골 조각을 발견한다. 그 후 리키 부부와 인류학자 알란 워커가 4년 동안 이 지역을 샅샅이 발굴하여 두개골 전부와 대부분의 유골을 발견했다. 이들은 이 유골의 치아를 조사해 9세 정도 된, 156만 년 전 소년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은 이 소년을 ‘투르카나 소년’이라고 불렀다. 이 유골은 거의 완벽한 상태여서 인간기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였다. 아홉 살 난 투르카나 소년은 키가 162㎝로, 그가 성년이 되었다면 185㎝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생각하더라도 장신이다. 그는 다리에 비해 팔이 짧아 분명 인간 임에 틀림없었다. 투르카나 소년은 나무타기에 적합한 신체적인 특징이 남아 있는 호모 하빌리스와 달리, 완전한 이족보행 골 구조를 지녔다. 그는 좁은 골반으로 효율적으로 걷고 달렸으며, 숨을 원활하게 쉴 수 있도록 가슴과 폐 부분이 현생인류처럼 열려 있었다.
투르카나 소년은 동시대 라에톨리에 남겨진 화석발자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두 발로 걸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직립원인’ 즉 호모 에렉투스다. 요즘 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라는 용어대신에 호모 에르가스터(Homo Ergaster) 즉 ‘일하는 인간’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부 학자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후에 유럽으로 이주한 인종을 호모 에르가스터라고 부르고, 인도네시아의 자바나 중국 북경에서 발견된 인종을 호모 에렉투스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호모 에렉투스를 호모 에르가스터를 포함하는 큰 속명으로 사용할 것이다. 투르카나 소년이 속한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건너간 첫 번째 호모이다. 인간이 지닌 오랜 속성인 여행본능이 이때부터 우리의 유전자 속에 들어와 중요한 밈(meme)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3. 쿠비 포라의 여인
가장 오래된 호모 에렉투스는 투르카나 동쪽, 쿠비 포라(Koobi Fora)에서 발견된 178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두개골이다. 호모 에렉투스는 60만 년 전까지 거의 100만 년 이상 생존한,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호모다. 호모 에렉투스는 남녀의 구분과 가족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등장시켰다. 호모 에렉투스는 효과적인 사냥을 위해 점점 자신의 몸에서 털을 없애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사슴이나 돼지 사냥하는 모습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인류는 네 발로 도망치는 동물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동물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오랫동안 달린다. 대부분 사냥감은 추운 겨울에 견디기 위해 몸에 털을 유지하지만, 이들을 사냥으로 섭생해야 하는 인류는 단거리 대신 장거리 달리기를 습관적으로 실천한다. 다른 동물들이 달리면서 내는 땀과 열을 털 때문에 분출하지 못해 헐떡거리거나 쉬는 동안, 인간은 다가가 독침이 달린 화살을 쏘거나 창을 던져 살해한다. 인류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몸에서 털을 없애, 장거리 달리기를 생존에 가장 중요한 무기로 삼았다. 더욱이 이족 보행을 하면서 호모 에렉투스의 여인들은 임신과 출산이 더욱더 힘들어졌다.
호모 에렉투스들은 불을 발견하여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으면서 뇌 크기가 1200㏄로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이족보행으로 더 좁아진 산도로 태아를 통과시키기 위해, 아이를 미성숙한 상태로 출산한다. 인류의 신생아는 세상에 1년 정도 더 빨리 나오는 셈이다. 다른 동물들은 어미 뱃속에서 나와 금방 걷지만, 인간은 1년이 지나야 비로소 걷는다. 호모 에렉투스의 여인들은 임신하는 10개월 동안 스스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일대일 관계를 맺는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쿠비 포라에서 발견된 이 여성의 유골의 상태는 거의 가루처럼 부서질 정도로 약했다. 이 무명 여성은 죽기 오래전부터 치명적인 병에 걸려있었고 누군가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면 맹수가 물어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그녀를 오랫동안 돌봤을 것이다.
#4. 불을 다스리는 인간, 자신과 공간을 정복하다
불은 인간 진화에 있어서 특별하다. 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변화무쌍하고 접근하기가 불가능하다. 에너지의 원천인 불을 인위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인간이 이제 생물학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선포다. 초기 인류는 다른 유인원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적인 행위를 시작한다.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의도와 디자인대로 세상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불의 정복과 인위적인 사용이다. 인류는 자기가 사는 곳에 불을 가져옴으로써 혹한 자연환경, 특히 캄캄한 밤에 표범이나 사자의 무차별한 공격을 막아내고, 자신이 거하는 장소를 빛과 따스함의 장소로 만들었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거주지는 빛과 어둠, 창조와 혼돈, 생명과 죽음을 구분 짓는 거룩한 터부가 되었다. 빛이 닿은 곳은 마치 중세 성인들의 후광처럼, 야만과 살육이 침범할 수 없는 안전이 보장된 공간이 되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한 구별된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그 전에는 도저히 입장할 수 없는 들판이나 산을 탐사하고 정복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였고 매일 저녁 괴물처럼 다가오는 밤을 무력화시켰다. 인류는 불을 습관적으로 다루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지능력의 요람인 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인간은 이제 주변 환경을 관찰하고 배우며, 동료 인간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호모 에렉투스가 178만 년 전에 등장하면서 불을 조직적으로 사용했는지 그 증거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75만 년 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랑스 강 협곡에서 발견된 동굴과 뼈들은 호모 에렉투스들이 인위적으로 불을 다뤘다는 결정적인 단서다. 지상으로부터 깊숙이 내려간 동굴에서 석탄과 재, 불에 의해 그을려 금이 간 돌들, 그리고 화로가 1m 내에서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곳에서 취합한 침전물들, 늑대와 큰고양이과 동물들과 사라진 동물들의 뼈들에 남아있는 그을린 흔적에서 그 연대를 75만 년 전으로 측정했다. 탄자니아의 울두바이 협곡에서 100만 년 전에 출현한 인류가 북쪽으로 이주해온 증거였다. 학자들은 이들이 주식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왜 다른 곳으로 여정을 떠났는지 그 실마리는 찾지 못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미지의 세계로 위험한 모험을 시작했다. 인간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혹은 취미로 여행하는 습관은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25명에서 50명 정도가 한 절기 혹은 1년 동안 다른 곳에 머물거나 혹은 며칠 동안 돌아다니다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인류의 이동을 가속화한 결정적인 이유는 빙하기의 도래다. 지중해의 물들이 대부분 얼어붙고 아프리카와 유럽이 지브롤터와 튀니지아-시실리,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와 연결되어 도보로 이주가 가능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동아프리카에서 남부 프랑스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이주했다. 이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 문명의 이기가 바로 ‘불’이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습관적인 불 사용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실 기후가 온난한 지역에서 불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프스산맥 빙하지대 근처에 있는 뒤랑스 협곡과 같은 지역에선 생존을 위해 불이 꼭 필요했다. 창조성의 근원은 환경의 절박성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간절함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올림푸스 산으로부터 불을 훔친 신화는 초기 인류의 불의 채취과정을 밝혀주는 이야기다. 번개가 불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석탄이나 자연 세일기름이 자연적으로 불을 만들기도 한다. 사냥을 주로 하던 인류는 이런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이 있는 지역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했다. 이 불이 사라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올림픽 성화나 조로아스터교 제단의 불처럼 불이 지속적으로 타오를 수 있도록, 마치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혹은 어떤 절대적인 신을 모시듯이 불을 관리했다. 호모 에렉투스 가운데 한 명이 불을 관리하며, 때로는 새로운 정착지로 불을 옮겼다.
불은 인류에게 따뜻함 이상을 선물해주었다.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의 간격을 넓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자리매김 시켰다. 호모 에렉투스 이전의 유인원들은 사실 동물 왕국의 일원일 뿐이었다. 그들은 건기에 물을 마시기 위해 다른 동물들처럼 순서를 기다렸다. 코끼리 떼가 지나가면 멀리서 관찰하고, 코뿔소나 물소가 나타나면 길을 비켜줘야 했다. 특히 사자, 표범, 늑대나 곰과 같은 맹수들이 다니는 길을 감지하고 그 길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유인원들의 주식은 식물이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이었다. 그들은 맨 처음 새나 토끼와 같이 작은 사냥감이나 큰 동물의 새끼들을 잡아먹었다. 이들은 주로 사자와 표범이 자신들이 잡은 사냥감을 실컷 먹는 것을 멀리 떨어져 관찰했다.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나면, 그 때 유인원들은 독수리, 하이에나와 경쟁하며 사체에 남은 고기를 처리했다. 초기 인류는 맹수들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불은 모든 것을 바꿨다. 맹수들은 호모 에렉투스들이 피워놓은 캠프파이어에 접근하질 못했다. 그들은 튀는 불꽃에 도망치는 맹수들을 보고, 불을 나무에 붙여 이들에게 휘두르기도 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이제 먹이 사슬의 바닥을 떠나 정상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가지고 다른 맹수들을 물리쳤으며, 이들은 처음으로 맹수들이 살던 동굴을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차지 했다.
#5. 요리의 발견과 인내
호모 에렉투스들은 사냥한 동물들을 불에 구워먹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고기를 불에 구워먹었다는 증거는 이들이 남긴 치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침팬지와 고릴라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질긴 식물이나 동물을 단단하게 문다. 다른 동물과의 싸움에선 공격성의 상징으로 견치를 드러낸다. 인류의 조상들은 도구를 발견함으로써 동식물을 자신의 치아가 아니라 석기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어금니도 동식물을 잘게 씹기 위해 커다랗고 날카롭게 남아있다가 점점 줄어들었다. 호모 에렉투스의 송곳니와 어금니는 작다. 그들이 부드럽고 요리된 음식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리된 음식은 호모 에렉투스의 얼굴 모습을 서서히 바꿨다. 어금니와 그것을 받치고 있는 턱관절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그것을 둘러싼 근육이 줄고, 그것과 균형을 잡고 있던 눈 위 뼈가 웅기한 부분과 두툼한 돌출부분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머리뼈의 굵기가 전체적으로 얇아지고 결국에는 두개골이 더 큰 용량의 뇌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번개로 인해 발생한 산불로 자연 요리된 동물이나 자신이 잡은 먹이를 실수로 불에 떨어뜨린 호모 에렉투스는 불에 구운 사냥감 맛을 보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식습관을 익혔다.
요리된 음식은 심리적, 육체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요리를 함으로써 사냥한 동물을 그 자리에서 잡아 먹거나 혹은 다른 맹수가 남긴 사체를 청소하는 행위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억제하는 자제력이 생겼다. 이들은 사냥한 동물을 그 자리에서 잡아먹기보다 가족들이 사는 동굴로 돌아와 화로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는 교양이 생겼다. 인간이 불을 길들이면서, 점점 자신을 길들이기 시작했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행위는 오래된 습관을 과감히 폐기시켰다. 모든 동물들은 지속적인 현상, 특히 태양의 규칙적이며 예상 가능한 움직임에 맞춰 자신들의 행동을 조절한다. 그들은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움츠러든다. 동물들에겐 생물학적 시계가 있어 태양과 함께 자신들의 활동을 결정한다. 몸 속에 스위치가 있어 낮에는 활동하기 위해 생물학적 스위치를 켜고, 밤이면 그 스위치를 내려 활동을 멈춘다.
인간은 불을 길들이면서 이 엄격하고 자동적인 생물학적 시간을 파괴하고 훨씬 유동적인 시간을 창조한다. 인간은 이제 자연적인 시간에 개입하여 자신만을 위해 특별한 시간을 만든다. 인간은 활동을 시작하고 멈추는, 깨어남과 잠이라는 12시간 순환구조를 조절한다. 동굴 안에서 거주하던 호모 에렉투스는 몇몇 사람을 지정해 보초를 세워 밤새 모든 구성원의 생존을 보장하였다. 보초가 잠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불 때문이다. 그들은 불을 사용함으로써 생물학적인 시간을 통제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밤에도 깬 상태로 지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들의 생존력은 높아졌고 자식을 더 많이 낳을 수 있었으며, 결국 선사시대의 주도적인 집단이 되었다. 진화는 자연선택에 의해 스스로 자제력이 있고 미래적인 이런 집단을 선호하였고 나머지는 도태시켰다.
인간은 불을 자신의 거실로 들여오면서 태양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인위적인 ‘낮’을 창조하였다. 이들은 동굴 안 화로에 둘러앉아 자신들이 낮에 경험한 이야기를 다른 식구들에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증거는 없지만,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모습인 언어가 이 무렵부터 인간의 특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들은 할 말이 많았다. 낮에 사냥하면서 일어난 일들, 다음날의 사냥 계획… 그리고 무시무시한 괴물에 관한 신화와 전설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6. 아슐리아 도구와 대칭
호모 에렉투스의 전형적인 특징은 불 길들이기와 함께 정교한 석기 제작이다. 그들이 만든 석기는 사전 숙고와 숙련기술을 필요로 했다. 학자들은 최근까지 인류가 언제부터 석기를 만들었는지 그 정확한 연대를 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11년 8월 케냐에 위치한 투르카나 호수 근처에서 석기가 발견되었다. 이 석기는 176만 년 전 유물로 밝혀졌다. 근처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도 발견됐다. 호모 에렉투스들이 만든 이 석기를 ‘아슐리안(Acheulean) 기술’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독특한 도구를 생산했다. 다양한 격지석기와 찍개류, 그리고 이들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주먹도끼다. 이 주먹도끼의 이름은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생따슐(Saint-Acheul) 지역에서 1859년 발견되어 붙여졌다. 아슐리아 석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의도성과 균형성이다. 이전 호모 하빌리스의 조잡한 격지와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대로 정교하면서도 신중하게 제작되었다. 미리 결정된 각도에 따라 돌망치로 타격하여 제작하고 다듬었다. 아슐리아 석기는 거의 100만 년 동안 지속된 인류의 최장수 기획상품이다.
대칭은 대부분 시각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오늘날 살아남은 생물과 무생물들의 생존전략은 대칭성이다. 왜 대칭성이 생존에서 중요한가? 호모 에렉투스는 대칭성을 아슐리아 도구제작과 그 밖의 창조적인 행위의 핵심으로 여겼다. 아슐리아 도구는 대칭성을 기반으로 만든 첫 번째 석기다. 50만 년 전에 등장한 후기 아슐리아 도구는 초기 도구에 정교함이 더해졌다. 전형적인 아슐리아 손도끼는 맨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점점 넓어졌다가 다시 동그랗게 마무리된 형태로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지방에서 발견되었다. 이 대칭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슐리아 석기는 가공할 만한 무기였고 오늘날 정육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기톱이나 스위스 군용 칼과 같았다. 자신들이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겨 살점을 떼어내고 중요부위를 발라내 불에 구워 먹었다. 영국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엔 크기가 30㎝, 무게가 2.8㎏짜리 손도끼가 있다. 이 도끼를 실제로 사용하였다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인 것 같다. 그 여인이 이 커다란 손도끼를 보았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은 자신이 미래에 낳을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렸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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