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필독) -홍사성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 *홍 사 성 (불교평론 편집위원)
깨달음의 이해, 무엇이 문제인가.
불교의 종교적 연원은 교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롯된다.
불교의 교리는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으며, 참다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불교 교단은 이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실천해야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이를 불법승(佛法僧) 삼보라고 한다.
진리를 깨닫고 불교를 창시한 교주가 불보(佛寶)이고, 그가 가르친 교리가 법보(法寶),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공동체가 승보(僧寶)다.
삼보는 불교의 종교적 구성인 교주(佛)와 교리(法)와 교단(僧)에 배대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깨달음에 의한, 깨달음을 위한, 깨달음의 종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깨달음 문제만큼 많은 오해와 시비가 교차하는 것도 없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몇 가지 오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깨달음은 신비한 것인가?
첫째는 깨달음을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신비한 무엇, 또는 고도한 관념적 철학체계로 이해하는 경향이다.
깨달음의 체험은 갑자기 은산철벽이 무너지듯 눈앞이 환하게 열리고 초월적 어떤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깨달음을 위해 매우 오랫동안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묵언수행이나 동구불출이나 장좌불와 같은 무엇인가 특별한 수행을 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물학적 생사문제나 도덕적 인과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이 경우 죽음을 예언하거나 좌탈입망, 사리를 남기는 것이 깨달음의 한 증표로 여겨지기도 한다.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한마디로 만부당한 오해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삶의 문제에 대한 전면적이고도 깊은 성찰 끝에 얻어낸 완전하고 합리적 결론이다.
그것은 결코 특별한 것도, 몇몇 사람에게만 허용된 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돌아보면 그동안 우리는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토론해본 적이 없다.
돈점(頓漸)논쟁 같은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학자나 스님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서로 말을 아끼며 깊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수많은 오해만 생길 뿐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경지이며,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허심탄회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만이 깨달음에 대한 황당한 오해를 불식하는 지름길이다.
이 글은 그런 토론의 단초를 만들기 위해 비교적 부처님의 육성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아함부 경전에 근거한 교리적 해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깨달음의 문제가 부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진실의 실마리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불교가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때 가장 먼저 구명되어야 할 것은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正覺)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궁극적 경지를 뜻하는 용어가 한가지만이 아니다.
부처님 시대부터 사용한 말은 열반(涅槃) 해탈(解脫) 등이 있다.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면 보다 다양한 용어가 등장한다.
화엄경의 경우 진리의 본성(法性)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마경은 진속불이(眞俗不二)를 깨달아야한다고 강조한다.
금강경은 공(空)을 이해하는 반야지혜를 터득하라고 말한다.
열반경은 불성(佛性),
여래장경은 여래장(如來藏)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선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고,
정토교는 왕생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설명은 하나의 진리를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이해다.
하지만 언표하는 표현의 차이만큼 내용의 차이도 적지 않다.
대승불교의 중요개념인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 제일의공(第一義空), 승의제(勝義諦), 진제(眞諦), 법성(法性), 불성(佛性), 진여(眞如), 여래장(如來藏), 자성(自性)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은 같은 맥락에서 나온 확장된 개념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고도한 관념론으로 변질된 느낌이 없지 않다.
예컨대 정각의 내용인 연기의 개념은 처음에는 실체아의 부정을 위한 이론적 도구였다.
그런데 아비달마철학은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를 내세우며 ‘불변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에 대한 비판이 중관철학의 결론인 무자성(無自性), 공(空), 중도(中道)였다.
이것이 진리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진리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법성(法性)이라는 말로 포괄되었다.
그리고 다시 불성(佛性)이라는 말과 동일시되었고, 불성은 여래장이며, 여래장은 중생이 본래부터 구유한 자성(自性)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후 이 개념은 조금씩 변질되면서 급기야 자성은 진아(眞我), 진아는 실체아(實體我), 실체아는 영혼(靈魂)이라는 유아론(有我論)으로 환원되었다.
이렇게 되면 자성은 연기의 이론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관념론으로 전환되어 실체아의 개념이 된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의 개념이 조금씩 변화된 것은 외도와의 논쟁 등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인해 불교 본래의 깨달음이 상당부분 왜곡되고 변질된 것은 뒷날 이에 대한 이해를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불교가 깨달음을 강조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세속적 가치가 과연 그럴만한 것인지를 되물음으로써 현실적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실천에 목적이 있다.
부처님의 종교적 사유와 출발도 여기에 있었다.
생로병사에서 오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목적이었다.
그 증거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명해주는 몇 가지 경전을 찾아보면 쉽게 확인된다.
남전 소부 『우다나(自說經)』(1.1)는 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경전이다.
여기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과연 무엇이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부처님은 정각(正覺)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우루벨라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한번 결가부좌한 그대로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앉아 계셨다. 7일이 지난 후 초저녁 경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기(緣起)의 법을 생각했다.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면 이것이 생긴다. 즉 무명(無明)에 의해서 행(行)이 있다. 행에 의해 식(識)이 있다. 식에 의해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에 의해 육입(六入)이 있다. 육입에 의해 촉(觸)이 있다. 촉에 의해 수(受)가 있다. 수에 의해 애(愛)가 있다. 애에의해 취(取)가 있다. 취에 의해 유(有)가 있다. 유에 의해 생(生)이 있다. 생에 의해서 노(老). 사(死). 수(愁). 비(悲). 고(苦). 우(憂). 뇌(惱)가 있다.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해서 생기는(滅)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일의 연유를 알고 그때의 감흥을 게(偈)로 읊었다.
진지한 열성을 다해 사유했던 수행자에게
만법의 이치가 확실해 졌을 때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
모든 법은 그 원인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설경』(1.2)은 이어서 부처님이 12연기가 소멸해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다음과 같은 감흥게를 읊었다고 쓰고 있다.
진지한 열성을 다해 사유했던 수행자에게
만법의 이치가 확실해 졌을 때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
모든 법은 그 원인이 사라짐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기록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정각한 내용'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정각을 얻은 지 '7일째 되는 저녁'에 정리한 생각이다.
부처님이 스스로 말한 정각(깨달음)의 내용은 한마디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연기란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존재는 관계적 조건 아래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도 고정불변하는 독립적 존재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그럴만한 조건’ 있어야 생겨날 수 있다.
홀연히 또는 우연히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컴퓨터는 모니터와 본체와 키보드로 구성된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한 가지 만이라도 없으면 컴퓨터로서 기능할 수 없다.
사람은 물질적 요소인 색(色=地水火風)과 정신적 요소인 명(名=受想行識)의 오온(五蘊=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소멸하면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 관계로만 존재한다. 이를 '상자상의(相資相依)의 관계'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명구로 정리됐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불교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불교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연기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법칙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다만 이 법칙을 깨달은 분이다.
연기론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상대주의적 존재론'이다.
당연히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조건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절대적 존재란 다른 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며, 다른 조건에 제약받지 않는 존재다.
불교는 그런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불교는 무아론(無我論)과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 선다.
연기적 원리의 지배를 받는 모든 존재는 항상 세 가지 특성(三特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의 원리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건이 결합된 것이므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둘째는 변하는 것들은 모두 괴롭다(苦)는 것이다.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변화해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될 뿐이다.
셋째는 모든 존재는 실체적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인연과 조건에 의해 생겨난 존재들은 그것이 해체되면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가 실재한다는 허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뜻에서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 성문(聲聞)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윤회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 전형이 저 유명한 녹야원에서 첫 설법 이후 제자들의 고백과 부처님의 인가(印可)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모든 존재(五蘊=色,受,想,行,識)를 싫어하게 된다(厭離). 모든 존재를 싫어하면 탐착하지 않게 되고(離貪), 탐착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解脫)을 얻게 된다. 해탈을 얻게 되면 '이제 미혹한 삶은 끝났다. 더 이상 미혹의 삶(輪廻)을 되풀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은 삼법인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삼법인을 바르게 알면 오온(五蘊)을 염리(厭離)하게 되고, 오온은 염리하면 탐욕에서 떠나며(離貪) 탐욕에서 떠나면 해탈(解脫)을 이루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것이 오분법신(五分法身)의 완성인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이렇게 해탈지견을 얻는 것을 완전한 깨달음, 열반이라고 한다.
3. 깨달음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결코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마디로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내용이며,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그동안 깨달음이 무슨 신비한 세계의 체험, 또는 특별한 비밀의 터득인 것처럼 생각해온 사람들에게는 의외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밝혀낸 경전상의 근거로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한가지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먼저 읽어두어야 할 경전이 있다.
부처님이 성도한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내가 얻은 이 법은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 법은 번뇌가 사라지고 미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이치를 분별하여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깨달음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미묘한 법을 사람들을 위해 설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 법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나는 헛수고만 하게 된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리라. 수고로이 설법하지 않으리라.”
이 문장은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설법을 주저하는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주의해서 살펴볼 점은 왜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法)가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다'고 했을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신비화하는 사람들의 해석은 불교의 진리가 보통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6년간 치열한 고행수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든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3아승지겁을 닦은 끝에 성불했다는 발상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던 것 같다.
너무나 분명하고 쉬운 것인데도 무명(無明=三毒)에 가려진 사람들이 쉽게 납득하지 않을 것에 대한 우려였다.
불교에서 진리란 스승의 주먹(師拳)속에 감추어진 비밀한 무엇이거나, 몇몇 사람만이 독점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진리란 특별한 무엇이고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부처님의 첫 설법 상대였던 녹야원의 다섯 수행자들도 그랬다.
그때의 분위기를 한 경전은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마가다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어느 날 당신이 깨달은 ‘지극히 미묘해서 보통사람은 알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운 법’을 누구에게 설법할까를 생각했다.
부처님은 과거에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떠올리고 바라나시에 있는 그들을 찾아 갔다. 그들은 부처님이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
‘저기에 타락한 수행자 고타마가 온다. 우리는 그에게 아는 척도 하지 말고, 일어나 자리를 권하지도 말고 말도 건네지 말자.’
그렇지만 그들은 약속과는 달리 부처님이 가까이 오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그들은 부처님에게 ‘그대는 어디에 있다가 왔는가’ 하고 물었다.
“그대들은 나를 ‘그대’라고 부르지 말라. 나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여래(如來)니라.”
“그대는 고행을 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하물며 고행을 버리고서 어찌 깨달음을 얻은 여래하고 하는가?”
“그대들은 내 얼굴이 이렇게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내가 거짓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이미 불사(不死)의 법을 얻었다. 그대들은 나의 설법을 들으라.”
이 경전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다섯 수행자가 부처님을 '타락한 수행자'라고 지목하면서 ‘그대는 고행을 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하물며 고행을 버리고서 어찌 깨달음을 얻은 여래하고 하는가?’라고 힐문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저들이 깨달음이란 고행과 같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 신비한 무엇을 체험하거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들만이 아니다. 사실은 부처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보리수 아래로 옮겨가 불고불락을 중도수행을 하기 전까지 부처님은 극단적인 고행을 했다. 부처님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나는 정각을 이루기전 대외산(大畏山)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덤 사이로 가서 죽은 사람의 옷을 주워 몸을 가렸다. 나는 하루에 깨 한 알과 쌀 한 알로 식사를 대신했다. 몸은 쇠약해져 뼈는 서로 맞붙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겨 가죽과 살이 절로 떨어졌다. 눈은 깊은 우물 속에 별이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곧 등뼈가 잡혔고, 등뼈를 만지면 뱃가죽이 손에 닿았다. 그래도 나는 고행을 멈추지 않았다. 가시나 널판자 위 쇠못위에 눕기도 하고, 두 다리를 위로 올리고 머리를 땅에 두기도 했다. 수염과 머리를 길러 깎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행은 끝내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은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되지 못한다.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출가하기 전 나무 밑에 앉아 음욕과 욕심이 없이 선정에 들었을 때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던 것을 기억해내고 그 길이 옳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기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므로 약간의 음식을 먹기로 했다. 그러자 같이 수행하던 다섯 사람은 나를 가리켜 ‘참법을 잃고 삿된 길로 들어선 타락한 수행자’라며 떠나갔다....”
이 경전을 읽으며 얼핏 떠오르는 것은 수행을 많이 했다는 고승들의 행장을 소개할 때 자주 쓰는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20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 30년간 오후불식(午後不食)...’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불교의 수행이란 이런 난행고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보다 더 혹독한 수행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우리라고 그런 수행을 한다고 해서 과연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자기 내면을 관찰하는 명상을 통해서였다.
그 명상이란 앞에서 읽은 『자설경』의 설명대로 연기의 원리를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으로 살펴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연기적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이 사실을 모르고 탐진치 삼독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다.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가 그것이다.
팔정도란 널리 알려진 대로 바른 소견(正見), 바른 사색(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명상(正定)을 말한다.
이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앞에 나오는 정견(正見)과 정사(正思), 뒤에 나오는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이다.
정견과 정사유는 모든 존재가 어떤 원리의 지배를 받는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즉 연기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깨달음만으로는 마음의 평화 즉 열반을 얻지 못한다. 번뇌를 소멸시키는 수행 즉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정념이다. 부처님은 여러 곳에서 이 사념처 수행의 중요성과 그 방법에 대해 가르쳤다. 다음의 경전도 그 중의 하나다.
"수행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주며 괴로움과 번뇌를 멸하게 하는 방법이 있으니 사념처(四念處)가 그것이다. 사념처란 무엇인가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만유(法)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그 생각에 머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7년 동안 사념처를 바르게 닦으면 현세에 구경지를 얻거나 최소한 아나함과를 얻을 것이다. 7년은 그만두고 7개월 동안만, 7개월은 그만두고 7일 동안, 7일은 그만두고 아침저녁 동안만 사념처에 바르게 머물게 되면 그에 합당한 경지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사념처란 신수심법(身受心法) 즉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한 관찰하여 통찰지(洞察智)를 얻어가는 수행법을 말한다.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신념처(身念處)는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은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다워도 반드시 무너지는 것이며 깨끗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수념처(受念處)는 음욕이나 재물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즐거운 것은 그것이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심념처(心念處)는 우리의 마음이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법념처(法念處)는 모든 만유는 실체가 없고 나에게 속한 모든 것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즉 신수념법(身受念法)에 대해 깨끗하지 않고(不淨) 괴로운 것이며(苦痛) 영원하지 않고(無常) 실체가 없다(無我)고 관찰하는 것이 바른 생각이다. 이렇게 관찰하고 명상하면 집착에서 벗어나 참다운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행이 완성되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해주는 것이 <구사론(俱舍論)>에 나오는 삼도(三道)의 길이다.
삼도란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여기서 견도란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정견, 정사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수도란 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정념, 정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무학도는 수행을 통해 도달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열반의 성취를 말한다.
아라한의 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상의 자료를 종합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또 그 경지는 결코 보통사람이 도달하지 못할 세계도 아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만 하면 된다.
마치 기차가 철길을 따라 부지런히 가다보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 같다.
시간적으로도 3아승지겁을 닦아야 성불한다는 말도 없다.
현생에서 당장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조금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면 된다.
언젠가 부처님이 파세나디(波斯匿)왕의 질문을 받고 불교의 특징에 대한 설명에서도 이 점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래의 바른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現見)이며,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不待時節)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來見)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親近涅槃)이며,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각기 알 수 있는 것(應自覺知)입니다.
따라서 여래의 가르침은 또한 중생의 좋은 짝이며 벗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가르침은 중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에 빠져 있으면, 그 모든 번뇌를 떠나, 시절을 기다리지 않고, 현재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게 하며, 바로 보고 통달하게 하며,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교리나 수행체계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당부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깨달음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해서 수행을 게을리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 또는 이해이므로 바른 견해를 갖게 되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유치원에서부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안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더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래야만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깨달음의 경지는 누구나 도달할 수 없는 것인가
다음으로 검토할 문제는 누구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면 과연 역사적으로 부처님과 동등한 수준의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은 불교수행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만약 이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다면 '이 길로 가면 누구든 해탈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부처님의 설법은 거짓말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사적으로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간 사람은 당연히 있다.
그것도 수없이 많다.
부처님 당시 아라한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다 그들이다.
그들이 얻은 깨달음의 경지는 부처님이 도달한 경지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
부처님도 진리를 깨달은 존재가 자기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제자들도 당신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
율장을 보면 부처님은 처음 콘단냐를 비롯한 다섯 비구를 교화한 후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이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다.”
또 제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날 때마다 ‘61명의 아라한' '101명의 아라한' '201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했다.
부처님 당신을 포함한 성자가 6명, 61명, 101명, 201명이 됐다는 뜻이다.
아라한은 무학(無學), 응공(應供) 등으로 번역되는데 무학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 응공은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부처님의 별칭인 여래십호의 하나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신도 아라한이고, 제자들도 아라한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 결정적인 증언은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나오는 말씀이다.
“나는 이미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이미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여 세상으로 나가 모든 사람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설법하라.
두 사람이 한길로 가지 말고 처음도 좋고 끝도 좋은 말로 가르쳐라.”
이것은 명백하게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동등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비유하자면 '피타고라스 공식'을 발견한 사람은 수학자 피타고라스이지만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은 여럿이며, 또 여럿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논증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이 더 남는다.
왜 제자는 아라한으로 부르고, 스승은 부처님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깨달은 성자라면 마땅히 부처님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호칭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처음부터 완전한 인격을 갖추기는 어렵다.
때문에 수행의 정도와 그 성취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지진다.
수다원(須多洹=預流), 사다함(斯多含=一來), 아나함(阿那含=不還), 아라한(阿羅漢=無學)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아라한이 부처님과 차등적인 것은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디까지나 제자와 스승의 관계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부처님과 제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인 것처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절대적 존경심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대략 이렇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붓다(buddha)'라고 한다.
붓다는 역사적 의미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먼저 깨닫고 사람들이 스승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바른 길을 일러주신 길 안내자(大導師)’ ‘병을 치료해주는 훌륭한 의사(大醫王’)와 같은 분으로 비유하는 것은 부처님의 역할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처님의 종교적 인격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여래십호(如來十號)’다.
여래십호란 ①여래(如來:진리의 체험자) ②응공(應供:아란한) ③정변지(正遍智:정등각자) ④명행족(明行足:지와 행을 겸비한자) ⑤선서(善逝:행복을 얻은 사람. 불교도를 인도에서는 간혹 Sauhata라고 불렀다.) ⑥세간해(世間解:세간의 모든 일을 잘 아는 자) ⑦무상사(無上士:최상의 인간) ⑧조어장부(調御丈夫: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조복 제어하는 사람) ⑨천인사(天人師:신들과 인간의 교사, 인간과 하늘의 큰 스승) ⑩불·세존(佛·世尊:깨달은 사람·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을 말한다.
여래10호는 따로따로 떼어서도 부르지만 다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최초의 3가지 칭호인 '여래·응공·정변지' 또는 '여래·응공·정등각'으로 하고 있다.
이 명칭에 신격화, 절대화의 의미가 부가된 것은 부처님이 입멸한 뒤부터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죽음에 이른 ‘인간’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존재라면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했다.
이것이 ‘여래’나 ‘불타’라는 말에 신성성이 부여된 이유였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설화도 생겨났다.
전생 수행담을 정리한 <본생경>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승불교의 출현 이후 특히 심해졌다.
많은 대승경전들은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와서 성불한 것은 삼아승지겁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량없는 보살도를 닦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처님에 대한 신격화는 불신관(佛身觀) 또는 불타관(佛陀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부처님은 오랜 세월 수행한 끝에 성불했다는 생각(아미타경), 또는 오래전에 이미 성불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이었으나 중생구제를 위해 방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법화경) 등이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은 하나의 세계에는 한분의 부처님이 계시며 무수한 세계에는 무수한 부처님이 계신다는 시방삼세불(十方三世佛)의 관념도 생겨났다.
동방 유리광세계는 아촉불, 서방 극락세계는 아미타불, 미래 용화세계는 미륵불, 현재 사바세계는 석가모니불이 출현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타방불, 삼세불의 관념은 한마디로 부처님은 아무나 될 수 없으며, 오랜 기간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신앙화된 부처님과는 달리 생전의 부처님은 수행자의 '좋은 친구(善知識)'를 자처했다.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니라 순수한 승단의 일원이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스승이면서 또한 수행자였음을 말해준다.
승가 안에서 부처님이 차지하는 이러한 특성은 그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이다.
5. 깨달은 성인과 못 깨달은 범부는 어떻게 다른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을 생사의 그물과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전도선언에 나오는 ‘나는 이미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이미 세상과 인천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좋은 예다.
‘인천(人天)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일체의 속박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貪瞋癡)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의 경전이 그것을 설명해준다.
"사리풋타여,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당신의 스승은 자주 열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열반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친구여, 열반이란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분노가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네.(貪慾永盡 瞋恚永盡 愚癡永盡 是名涅槃)"
"그러면 우리가 그 열반을 얻고자 하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네. 어떤 사람이든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닦으면 되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석연치 못한 데가 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이 탐진치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추운 곳에 가면 춥다.
병들어 늙고 죽는 일은 물론이고 식욕과 성욕, 수면욕 등의 생물학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을 얻지 못한 사람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에 대해 부처님은 한 경전에서 참으로 명쾌한 설명을 하고 있다.
"어리석고 무식한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지혜롭고 많이 아는 거룩한 성자도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그와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과 지혜로운 성자와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어리석은 중생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들은 곧 근심하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고 원망하고 울부짖느니라. 이는 그 느낌에 집착하고 얽매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지혜롭고 거룩한 성자는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더라도 근심과 슬픔과 원망과 울부짖음과 같은 증세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때는 몸의 느낌만 생길 뿐, 생각의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이는 그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았으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으리라.”
요약하면 깨달은 사람도 결코 생물학적 또는 물리적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응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난다.
이때 어리석은 사람은 ‘좋다(樂)’거나 ‘싫다(苦)’거나 ‘그저 그렇다(不苦不樂)’는 반응을 나타낸다.
이것 때문에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비해 깨달은 사람은 그런 분별에 빠져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같은 성자도 굶으면 배가 고프고 맞으면 아프다.
그러나 성자는 이로 인해 분노나 원망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집착이 끊어져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평화로운 마음상태가 곧 열반이다.
분노와 원망이 없으면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시는 그 결과인 윤회를 하지 않고 해탈을 얻게 된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열반의 문제와 결부해 생각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열반은 탐욕과 분노와 우치가 영원히 소멸된 참다운 마음이 평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해서 진정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했다면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매사에 탐진치에 의해 행동하는 것은 아직 깨달음도 열반도 얻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는 큰 주목의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문제는 깨달은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서도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이야기는 백장야호(百丈野狐)의 설화다.
백장청규로 유명한 백장선사가 설법을 할 때면 늘 어떤 노인이 와서 설법을 들었다.
그는 과거 백장산에 살던 고승이었는데 어떤 학인이 찾아와 ‘수행을 잘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지느냐?’고 묻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잘못돼 5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장선사는 노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하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의 여우의 몸을 벗고 해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설화적 구조로 되어있지만 수행자의 행동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암시를 준다.
진정으로 수행을 잘한 사람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알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음주식육(飮酒食肉)이나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무방반야(無妨般若)라는 식의 분수에 넘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6.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는 길
지금까지 우리는 깨달음의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경설(經說)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확인하게 된 결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다.
첫째는 깨달음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특별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평범하다시피 한 상식인 관계성의 원리(緣起)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원리를 파악하고 우주와 세계와 인생을 설명했다.
즉 모든 것은 인연관계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 인연이 사라지면 변하고 만다.
모든 존재는 무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실체적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바로 알아채야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깨달음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수많은 아라한은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깨달은 내용은 부처님이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부처님은 먼저 깨달은 분이라는 점에서 스승, 그 가르침을 받아 나중에 깨달은 분은 제자가 된 것뿐이다.
셋째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특별히 놀라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제대로 닦으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이미 부처님이 깨달아놓았다.
우리는 그분이 깨달은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부처님이 제시한 길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하게 새로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넷째는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흔히 깨달은 사람은 생물학적 또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오해다.
부처님에 의하면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똑같은 사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갈라 진다고 한다.
즉 외부적 환경에 접촉할 때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면 범부, 거기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성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불교가 생각하는 깨달음과 수행관을 보면 안타깝게도 과녁을 잘못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지금까지 우리는 깨달음의 문제를 너무 신비한 무엇, 고답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고 토론을 기피해왔다.
이것이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 원인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다양하고 진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평생을 수행하고도 헛공부를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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