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24)] ‘상징적 인간’ 호모 심볼리쿠스(Homo Symbolicus)
<인류를 하나로 묶는 끈, 상징(象徵)>
신화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인간의 상상력이 종교, 신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체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 ‘의미’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존재할 만하게 지탱시켜 주는 무형의 가치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며 그 의미를 찾는 과정이 바로 ‘이야기’다. 고고학자들은 현생인류가 등장하기 전에 유럽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들의 무덤에서 무기, 도구, 화장품, 희생제사에 사용한 동물의 뼈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었다. 동물들은 옆의 동료동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들은 자신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죽음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생전에 지녔던 소장품들도 함께 매장했다. 이처럼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상경험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혹은 세계 다른 곳에 거주하는 다른 동물들의 어려운 상황을 걱정하지도 않으며 다른 동료 동물의 입장에 서서 희로애락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가족, 이웃, 혹은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인간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을 살펴본다. 우리는 겉보기엔 혼돈스러운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와 그 가치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삶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인류의 집단무의식, ‘원형’>
이 위로가 인류에게 문화와 문명을 창조해낼 수 있는 용기를 선사했다. 인간은 그 의미를 찾고 확대하기 위해, 돈을 벌고 명예를 추구한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이 의미를 찾는 인간 공통의 본능을 ‘집단무의식’이라고 불렀다. 신화나 경전에 종종 등장하는 대모신(大母神), 바벨탑, 바다, 생명나무, 사다리와 같은 형상들은 인류의 심성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상징이다. 칼 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개인무의식과는 구별되는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 집단을 지탱시키는 상징을 탐구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모습들은 꿈, 판타지, 그리고 다른 신화적인 주제, 혹은 원시사회의 상징물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다. 융은 이런 상징을 ‘원초적인 형상’ 혹은 ‘원형’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마음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상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집단적으로 피할 수 없는 실제경험에 근거해 형성된 분명한 의식이 있다. 이것이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은 인류의 최초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심리적인 DNA다. 융의 분석에 의하면, 이탈리아 작가 알기에리 단테가 지은 [신곡]은 집단무의식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다.
산드라 보티첼리의 작품 [인페르노]는 단테 [신곡]의 첫 작품인 [인페르노]를 그렸다. 인간의 심성에는 자신도 모르게 인류조상으로부터 유전적으로 전수받은 욕심들이 존재한다. 그 욕심들은 크게 무절제, 폭력, 그리고 사기다. 인간이 온전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직시하고 극복해야 한다. 인간이 아직 문자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인류 최초의 거주지인 궤베클리 테페와 여리고, 그리고 차탈휴윅과 같은 최초 신전이나 거주지에 남긴 형상들을 통해, 인류가 지닌 집단무의식의 원형들을 목격할 수 있다.
<차탈휴윅과 ‘합의형성 권력’>
인간을 인지적인 동물, 즉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시킨 몇 가지 결정적인 혁신이 있다. 이족(二足)보행, 도구의 제작, 불의 발견, 그리고 요리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기술들이다. 기원전 4만 년경 이런 기술들을 지닌 두 종류의 유인원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다. 네안데르탈인들은 탁월한 신체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만8000년 경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만물의 영장이 됐다.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지하 동굴로 내려가 동굴벽화를 그렸다. 자신이 지상에서 사냥할 때 마주친, 동물의 특징만을 간결하게 그렸다. 이 그림들은 일종의 추상화다. 인류는 지하 동굴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의례를 거행했다. 우리는 이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 부른다.
기원전 1만 년경에 인류가 바로 농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사냥과 채집으로 연명하던 중에 2만 년 이상 거행하던 종교의례를 지상에서 거행하게 되는데. 터키 궤베클리 테페가 바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의 순례지다. 이들은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자신이 거주하던 장소를 떠나 이곳에서 공동 종교희생제사 의례를 지냈는데, 이 모임은 자신들이 경험한 지식을 교환하는 정보의 보고가 됐다. 이들은 함께 모여 농업을 재배하는 방법과 동물을 사육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기원전 8000년대 거주지인 이스라엘의 여리고나 터키의 차탈휴윅이 현생인류가 구축한 최초의 마을들이다.
차탈휴윅은 기원전 6200년경에는 8000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됐다. 이 마을 전체는 조그만 집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각 거주지는 기본적으로 직사각형이며, 옆집과는 사방으로 붙어 있다. 거주지를 구분하는 길이나 골목이 없다. 지붕은 넓적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구멍과 나무 사다리가 놓여 있다. 진흙으로 지어진 이 가옥들이 평균 70년간 지속했고, 그 다음 세대가 그 위에 다시 가옥을 지었다. 차탈휴윅 거주자들은 곡류를 재배하고 양을 사육했다. 이들은 특히 멀리 128㎞나 떨어진 카바도키아 산맥에서 발견된 흑요석이라는 화산유리를 수입했다. 흑요석은 다양한 각도로 분리돼 견고하고 날카로운 날을 만든다. 이곳의 거주자들은 흑요석으로 효과적인 사냥무기와 농업 도구를 제조했다.
인류 최초의 거주지인 여리고나 차탈휴윅은 소수의 통치자가 지배하는 ‘강제적 권력’이 아니라 ‘합의형성 권력’을 기반으로 통치됐다. 우리는 흔히 원시인들을 몇몇 소수의 남성 권력자가 통치하는 가부장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는 그렇지 않다. 혹은 몇몇 소수 여성주의자가 주장하는 대로 모계중심 사회도 아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대규모 건축이 건설됐으며, 점점 정교한 신앙상징체계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농경정착사회는 평등사회였다. 여리고와 차탈휴윅의 가옥들은 거의 크기가 동일하며 내부 장식품도 일정하다. 이들에겐 아직 귀족이나 왕족, 혹은 사제가 등장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남성과 여성의 무덤은 규모나 내용이 동일하다. 이들의 유골분석 결과 남녀가 먹는 음식도 차별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고학적 유물분석을 통해 재구성한 인류의 초기 농경사회는 평등사회다. 인류는 사냥채집과 농업재배를 병행하면서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무엇이 이들을 한 곳에 정착해 머물게 만들었을까? 이들을 하나로 묶는 끈은 무엇이었을까?
고고학자 이안 호더는 신석기시대 근동지방의 상징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설명한다. 그는 신석기 시대가 모계중심사회였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근과 강력한 야생동물들을 형상화해서 장식했다. 특히 야생 육식동물들, 사자, 표범, 여우, 곰, 뱀, 전갈, 거미, 그리고 맹금류를 부조물로 새겼다. 그는 신석기 시대의 상징물과 그들의 집단 무의식을 다음 세 분야로 설명한다. 첫째, 남근상징, 둘째, 야생동물상징, 그리고 세 번째 뿔상징이다.
신석기시대 상징은 전통적으로 대모신이다.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져(1854~1941)는 [황금가지](1922)에서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탐구의 공통부분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원시인들의 의례인 풍요의례, 인신공양, 죽어가는 신, 희생양 등 오늘날 종교나 사회의례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징과 관습의 기원과 발전양상을 설명했다. 그는 오래된 종교는 “거룩한 왕을 숭배하고 그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요의례”라고 정의한다. 프레이져는 인간은 마술, 종교신념, 그리고 과학적 사고라는 단계를 거쳐 진화해왔다고 믿었다.
<신석기 거주지의 남근상징>
그는 J.M.W 터너(1775~1851)가 그린 ‘황금가지’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황금가지는 어떤 나무 하나가 밤낮으로 자라나는 거룩한 숲으로 그 주변을 변화시킨다. 사제들과 왕들은 꿈과 같은 이곳에서 풍요의 여신인 다이아나에게 제사를 드렸다. 프레이져의 주장은 후대 신석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차탈휴윅을 처음으로 발굴한 제임스 말라르트는 이곳에서 발견된 여성상을 풍요의 여신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고고학자들은 작은 여성상은 여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현생에서 다음 세상으로 인도하는 노파나 영매라고 해석했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형상은 ‘남근’이다. 상징은 그 물건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그 물건이 상징하는 숨겨진 의미를 전달한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드 소쉬르(1857~1913)는 [일반언어학]에서 언어가 지닌 기호성을 탐구했다. 그에 따르면, 기호로 정의한 인간 언어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단어가 지니는 음성학적인 가치인 기표(記標)와 그 단어가 지닌 개념인 기의(記意)가 그것이다. 소쉬르의 기호이론을 신석기 시대 남근이라는 기표에 적용하면, 고대인들이 추구한 기의를 추적할 수 있다.
차탈휴윅에서는 1만2466점이나 되는 황소 뿔들이 발견됐다. 이 뿔들은 벽에 부착돼있거나 종교의례를 지낸 상에서 발견됐다. 황소 뿔들은 다른 야생 동물들의 그려진 벽화들과 함께 ‘남성성’과 ‘힘’을 상징한다. 차탈휴윅의 고고학지층 V와 III에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벽화가 남겨져 있다. 이 벽화들에서는 신석기 사람들이 야생동물들, 특히 황소, 사슴, 곰들을 잡기 위한 정교한 사냥전략을 볼 수 있다. 많은 동물들이 발기된 성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그림에서 야생사슴의 꼬리를 잡고 사냥하는 사냥꾼의 모습은 턱수염을 기른 남성상이다. 궤베클리 테페에서는 여성 상징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여신상이라고 여겨질 만한 작은 동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T모양의 기둥에 새겨진 야생동물들도 수컷이다.
차탈휴윅과 궤베클리 테페의 남근 상징은 장난감 크기의 남근 모형으로도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은 메쯔라 텔레일랏(Mezraa Teleilat)에서 94개의 남근 모형을 발견했다. 사암으로 제작된 이 남근 형상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다른 형상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아디야만-킬리식(Adiyaman-Kilisik)에서 1965년에 발견된 남근 형상은 궤베클리의 T모양과 메쯔라 텔레일랏의 남근모형을 융합한 모습이다. T 모양의 몸에 달린 팔들이 남근모양을 한 몸의 머리로 이어져 있다. 정면을 보면 두 발과 손이 성기를 향해 모아져 있다. 이 조그만 몸은 남근이기도 하다. 그 손들은 앞에 난 구멍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신석기인들이 실제로 사용한 자위 도구일 수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이 형상을 남성과 여성의 모든 상징을 가지는 암수동체의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디야만-킬리식 남근 모습을 통해 역으로 궤베클리 테페에 있는 거대한 T모양 석비를 남근상징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 모양은 후대 고대 이집트 신 ‘민(Min)’으로 후에 다시 나타난다. ‘민’ 신은 이집트가 아직 왕조를 시작하기 전, 즉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등장했다. 왼손으로는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받치고, 오른손을 하늘로 추켜올린다. 그는 풍요와 재생의 신으로 ‘신들과 인간을 창조한 신’이다. ‘민’ 신은 이집트가 국가로 탄생하기 전에, 등장한 신으로, 이집트 문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상징으로 남근성을 이용했다. 이 남근성은 야생동물들에 대한 묘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차탈휴윅, 궤베클리 테페와 그 외 인류의 초기 정착지에는 왜 그 많은 야생동물들을 새겨놓았는가? 이들은 남근 모양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야생동물 상징과 의례(儀禮)>
이 당시 벽화에 등장한 동물들은 거의 사육된 동물들이 아니라 야생동물들이다. 궤베클리 테페와 같은 장소에서는 사육된 동물이 아니라 야생 동물을 도축하고 희생제사를 드렸다. 인류는 점점 야생동물들을 사육하고 식물들을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이 벽화나 부조물 혹은 조각으로 표현한 동물들은 야생이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들에게 위험하고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경쟁자들인 것이다.
인류는 차탈휴윅과 같은 안전한 거주지와는 달리, 그 거주지 이외의 지역을 위험한 야생지역으로 여겼다. 고대 신화에서는 인간들이 사는 장소를 ‘질서’라고 말하고,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장소를 ‘혼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질서’와 ‘혼돈’ 사이에는 그 누구도 입장할 수 없는 타부(taboo)의 공간이 존재한다. 영웅만이 이 타부의 공간으로 들어가 혼돈의 신들을 살해하고 돌아와 통치자가 된다. 타부는 너무 거룩하거나 너무 저주를 받아 보통사람이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나 공간이다.
차탈휴윅의 벽화에는 주로 야생동물들만 등장한다. 특히 많은 개인 거주지 안에 황소 두개골, 야생 염소, 그리고 야생 숫양의 두개골 장식이 벽에 장식돼 있다. 신석기시대의 가장 흔한 집안장식이다. 여우와 족제비의 치아, 야생 수태지의 엄니, 곰의 발톱, 독수리의 부리가 벽 돌출물로 꾸며졌다. 무덤에는 표범의 발톱과 맹금류의 발톱도 부장으로 매장됐다. 이들은 모두 사나운 육식 동물이다. 차탈휴윅 사람들의 주식은 사육된 염소와 양이지만, 벽장식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본격적으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야생동물들을 경쟁하고 그들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사나운 남성 이미지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경쟁자인 야생동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인간들은 의례에서 상징적으로 동물에 폭력을 행사해 초월의 순간을 경험한다. 인간들은 야생동물의 ‘혼돈’의 세계와의 대결을 마을 안에서 다른 인간들과 의례로 거행함으로써 인간들 간의 협동을 다지고, 생존을 위한 폭력을 자제하는 절제의 기술을 배운다. 폭력을 동반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는 인간 공동체 안에 존속하는 폭력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방법이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신화들은 폭력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영웅 이야기다. 인류 최초의 신화인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도 그렇다. 길가메시는 신화 초반부에는 우룩 시민들에게 폭력을 일삼고, 반인반수인 엔키두와 함께 삼나무 숲을 지키는 훔바바를 살해하고 하늘의 황소 구갈라나를 살해한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상복을 입고 죽은 사람처럼 지하세계로 내려가 우주적인 홍수에서 생존한 우트나피쉬 팀을 만난다. 길가메쉬는 지하세계 하강이라는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고, 다시 자신이 치리하는 인류 최초의 도시 우룩으로 돌아간다.
서양 최초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동일한 주제의 반복이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명성’을 얻기 위해 트로이전쟁에 참전한다. 그에게는 전쟁 승리가 가져다주는 명성이 인간의 최고 가치다. 그러나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쏜 화살이 아킬레우스의 발 뒤에 관통해 전사하고 만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간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온갖 괴물이 등장해 방해한다. 오디세우스는 이 괴물들을 달래고 속이고 때로는 살해하면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신화 속에서는 동물들이 자연의 주인이다. 인간들은 동물들의 거주지로 침입해 터전을 마련하길 시도한다. 인간들은 이 동물들의 복수를 막아내지 않으면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싸워 살해할 동물을 찾아야 한다. 인간들은 이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를 통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황소는 ‘희생제물’이다. 황소를 죽이는 행위를 통해 사회가 다시 태어난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각과 경험을 상상한다. 우리는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 즉 상상력을 지녔다.
<신화는 ‘영원의 철학’>
우리가 상상한 그것은, 지금 당장엔 실물이 없다. 상상력은 종교, 신화,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체다. 오늘날 신화적인 상상력은 비이성적이거나 자기만족적이라 현대문명을 저해하는 비과학적인 퇴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상상력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기술을 구체화하는 유일한 도구다. 그들의 상상력이 인류를 달로 여행하게 만들었다. 신화와 종교는 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심오하게 사는 다양한 길을 제시한다.
이들의 의례는 인류 문화의 근간이 되는 신화에 대한 중요한 점들을 시사한다. 그들은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신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무덤은 동물의 뼈들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들은 실제 매장을 제사의식을 통해 진행했다. 신화는 의례와 불가분의 관계다. 신화는 의례에서 사용되던 노래들이다. 우리는 신화를 의례-드라마를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의례는 신화를 부활시키는 도구다. 의례를 통해 신화를 몸으로 체득한 인간들은 빙하기에 목숨을 내건 들소와 같은 큰 동물을 사냥하면서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위험한 상황에 빠질 때, 신화를 기억한다. 가장 강력한 신화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며, 일상적인 삶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끔찍한 내용이다. 예들 들어, 천재지변, 반신반인과 같은 괴물과의 대결, 부모살해와 형제살해, 그리고 근친상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신화를 통해 우리가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진입해 이전에 감히 경험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한계인 타부를 감행한다. 신화는 알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신화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로 거대한 침묵의 내면을 훔쳐보는 작업이다.
모든 신화는 실재하는 현실과 함께 별도로 존재하며, 현실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준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현실보다 더 확실한 세계로 ‘신들의 세계’ 혹은 ‘반인반신인 영웅들의 세계’라고 불린다. 우리는 이런 신화를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 명명했다. 영원의 철학은 세상의 모든 종교전통들을 하나의 형이상학적 근원을 공유하는 각 문화권 아래 자생한 자주적인 표현으로 정의한다.
이 용어를 만들어낸 학자는 15세기 이탈리아 고전 히브리어 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Agostino Steuco, 1497~1548)다. 그는 당시 이 세상을 하나로 묶는 원칙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이데아를 움직이는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마르실리오 피치노(1433~1499)와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지오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의 영향을 받았다. 스테오코는 모든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유일하면서도 동일한 지식이 있다고도 주장한다. 하나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셋이다. 그리고 다시 셋은 하나인 신비한 원칙이다.
<상징을 통해 하나가 된 인간>
영국의 소설가이면서 비평가인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은 힌두교 사상 신-베단타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의 영향을 받아 [영원의 철학]이라는 책을 썼다. ‘영원의 철학’은 18세기 근대과학이 도래하기 전까지 서양사회의 신화, 의례, 그리고 사회기관들의 근간이 된 사상이다. 이 철학에 의하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보다 더 강력하고 원초적인 원형이 천상에 존재한다. 모든 지상의 현실은 하늘에 존재하는 원형의 불완전한 복사일 뿐이다. 인간은 하늘에 존재하는 신적인 삶에 참여하에 죽을 수밖에 없고 연약한 인간이 신적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신화는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천상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와 성격을 제시한다. 신화는 신들이나 영웅들의 행위를 노래한다. 그 노래는 한가한 호기심이나 재미있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이 아니다. 이 노래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적인 존재들의 행위를 ‘흉내 내고’ 시공간에 제약된 자신으로부터 탈출해 엑스타시를 경험하라는 격려다. 인간은 신화를 통해 그들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을 상상한다. 자신이 신으로 완벽하게 상상한 또 다른 자신이 지상에서 아웅다웅하며 사소한 것에 목숨 바쳐 사는 자신을 애절하고 사랑스럽게 관찰한다.
인간은 궤베클리 테페, 여리고, 차탈휴윅과 같은 장소에서 상징을 통해 하나가 됐다. 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남근 상징은 야생을 정복해야 했던 자신들의 처지를 표현한 상징이다. 이들은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을 의례를 통해 희생 제물로 바쳐 동물들에 대한 공격성을 다짐했지만, 그 의례에 참여하는 동료인간들과 함께 절제의 기술을 연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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