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증가 시스템에서 진화한 뇌 때문?
김대식의 ‘Big Questions’ <6> 시간은 왜 흐르는가
존재하는 것들의 변화엔 특정 방향이 있다. 왜 현실에선 미래주의 화가 자코모 발라의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1912년위 그림)’같이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없을까? [http://artsnapper.com/giacomo-balla]
고대 그리스도교 최대 신학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는 그 누구보다 시간의 위력을 절실히 경험한 인물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로마는 이미 400년 가까이 지중해의 모든 문명을 통치했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로마의 평화는 당연히 영원할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56세였던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로마마저 영원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왜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해야만 하는가?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면 알 것 같다가도, 설명하려는 순간 모르는 게 시간”이라고.
시간이 궁금하면 우리는 당연히 시계를 찾는다. 그렇다면 시간은 단순히 시계가 보여주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슬람 수학자 알-비루니(Abu al-Rayhan Muhammad ibn Ahmad al-Biruni)는 기원후 1000년께 평균 태양일의 8만6400분의 1을 처음으로 1초라고 정의했는데, 그의 정의는 1960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은 근본적으로 불규칙해 정확한 평균 태양일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20세기 후반부턴 더 규칙적인 원자 단위의 현상을 기본으로 삼기 시작하게 된다.
1초란 무엇인가? 국제단위계의 합의에 따르면 1초란 절대 0도 온도에서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에 있는 두 개의 초미세 에너지 준위들의 주파수 차이인 9,192,631,770㎐의 역수를 말한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 신호등의 빨간불 같은 인류의 합의일 뿐인 것이다.
시간은 당연히 시계가 없던 백만 년 전에도 존재했을 거고, 인류가 사라진 수억 년 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 같다. 그렇다면 시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선 시간의 핵심은 흐름이며, 우주의 역사는 시간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진다는 가설을 해볼 수 있다. 아이작 뉴턴은 그래서 시간을 공간과 더불어 자연의 절대 현상이라 생각했다. 시간이란 절대적이며 외부의 그 어떤 존재와도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른다는 것이다.
1 아우구스티누스
2 알-비루니
3 뉴턴
4 칸트
5 라이프니츠
6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젊은 시절 뉴턴은 수학과 과학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 반면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이력은 통섭 그 자체였다. 수학과 철학뿐 아니라 정치학, 법학, 역사학, 언어학에 대한 저술을 남긴 그는 유와 무, 그러니까 1 과 0만으로도 계산이 가능한 이진법(binary system)을 만들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뉴턴과 미적분의 독립적 발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 바 있었는데, 뉴턴이 주장한 절대 시간 역시 무언가 찜찜해 보였다.
‘흐름’이 시간의 특성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흐른다는 것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라고 주장한 바 있다. 모든 게 지속적으로 변하기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강이 흐르려면 당연히 물이 있어야 한다.
그럼 시간이 흐르기 위해서도 무엇인가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흐름이란 변화고, 변할 수 있는 건 존재하는 것들뿐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뉴턴이 주장한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절대 현상이 아니라 존재가 생성되는 순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아니, 생성하는 존재들의 상대적 관계 그 자체가 바로 시간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평생 여자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 없이 조용한 삶을 살았던 뉴턴에게 어쩌면 존재는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박스 안에 갇혀있는 수동적인 것들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외교관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며 전 유럽을 돌아다녔던 라이프니츠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오늘의 명예와 부는 내일 사라졌고, 과거의 행복은 현재의 불행을 더 아프게 만들곤 했다. 변함 그 자체가 라이프니츠의 삶이었기에, 그에겐 추상적인 절대 시간이 무의미했었을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변화의 순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든 변화의 시작은 지금 이 순간부터다. 지금 이 순간 내 휴대전화에 보이는 시간은 저녁 10시13분45초, 아니 46초, 아니 47초다…. ‘지금’이란 잡힐 듯 말 듯 우리를 피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사라져버리는 모래알 같은 존재다. 현재는 잡히지 않고,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파르메디스는 그래서 기원전 5세기에 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변화란 불가능하다며 ‘hotos estin’, 고로 모든 존재는 하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변화와 시간은 무엇인가?
대승불교(Mahayana)가 산스크리트어 칼라(kala)라 부르는 시간과 변화가 참이 아닌 단순한 가설이라고 가르치듯, 파르메디스 역시 변화는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외부 세상의 변화는 착각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변화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순서와 변화의 규칙을 따르게 된다. ‘변화’라는 생각이 ‘않는다’라는 생각보다 먼저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래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생각의 프레임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며,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모든 생각의 ‘선험적(a priori)’ 기본원리라고 주장한다.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진 알 수 없지만, 순서를 정해 주는 시간적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시간은 동시를 막기 위한 최고의 도구인 것이다.
동시란 무엇인가?
19세기 말 반유대주의적인 독일에 등돌린 아인슈타인은 이탈리아로 이주한 부모님들과 함께 살게 된다. 따뜻한 지중해 햇살을 느끼며 시골길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겼던 그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뉴턴은 시간이 절대적이고 우주 모든 곳에서 동일하다고 말했다.
운동이란 정해진 시간 안에 이동하는 공간이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를 빠르게 올라가는 나는 남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럼 내가 만약 빛이고 빛으로서 아름다운 이탈리아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탄다면, 나의 속도는 빛의 속도 + 자전거의 속도가 되겠구나… 아, 재미있는 상상이다….
하지만 19세기 수많은 실험의 결과는 항상 같았다.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시간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라면 어떨까? 거기에 물리적 법칙은 모든 관성계에서 같아야 한다는 직관적 가설을 추가하자 아인슈타인의 수식들은 혁명적인 결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물체들은 천천히 가면 길이가 길어지고 무거워 진다.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다른 운동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바뀔 수 있다.’
그렇구나… 라이프니츠의 추측이 맞았구나. 시간은 절대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은 것이로구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1차원의 시간과 3차원의 공간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은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4차원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엄격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러 공간에 우리는 동시엔 있을 수 없지만 같은 공간을 여러 번 방문할 수는 있다. 공간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에 앞뒤, 좌우, 아래위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다르다.
1차원의 시간은 일방통행 길이다. 과거는 금지된 구역이고, 미래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뉴턴의 역학에서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엔 선호하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동일한 물리학 법칙을 따르듯, 시간 역시 양방향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은 존재하는 것들의 상대적 변화이지만 그 변화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성이 존재한다.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어 죽는다. 아인슈타인은 자전거에서 넘어질 수 있지만, 자전거가 스스로 다시 일어서진 않는다. 계란은 깨질 순 있지만, 자발적으로 다시 붙진 않는다.
마틴 아미스(Martin Amis)의 1991년 소설 <시간의 화살> 에선 거꾸로 가는 시간을 그려본다.
주인공은 음식을 토해 내고, 반 소화된 역겨운 음식은 다시 접시에 맛있게 차려진다. 음식은 거꾸로 요리되고 버려진 봉지에 다시 포장되어 마트에 진열된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선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답은 ‘엔트로피’ 때문이라는 게 현대 과학과 철학의 추측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시스템에선 엔트로피, 그러니까 무질서도(度)가 꾸준히 증가해야 한다.
수많은 조각의 퍼즐을 생각해 보자. 퍼즐 조각들이 완벽하게 맞는 질서적인 배열은 단 한 가지다. 그러나 무질서적인 배열들은 천문학적으로 많다. 아인슈타인의 자전거는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통해 넘어질 수 있지만, 자전거가 자발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0에 가까울 정도로 무의미한 확률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란 존재들 간의 상대적 관계다. 하지만 무질서적인 관계가 질서적인 관계로 변하기보다 질서가 무질서로 변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뇌는 엔트로피가 대부분 증가하는 지구라는 작은 통계물리학적 시스템에서 진화해 왔고, 그러기에 우리에겐 엔트로피 증가가 선험적(a priori) 시간 흐름의 방향,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과학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 /김정균
강물이 역행 못하듯 과거에 너무 집착해 현재의 역사 흐름 막아서는 안돼
시간여행에 대한 가정은 시제를 위반한 공상과학 영화나 동화 속의 흥미 있는 이야기로 꾸며져 가끔씩 우리 곁에 다가오지만 자연이 시간과 함께할 때는 항상 미래로 향하는 한 방향만을 허용할 뿐 그것에 대한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흐르던 강물이 다시 역행하여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기름이 연소되면 열과 빛 그리고 물과 탄산가스를 내며 타버리지만 이 모든 것을 합하여도 다시 기름이 되지 못하는 현상과 같다.
이것이 열역학 제2의 법칙 혹은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자연의 섭리이며 진리이다.
이 법칙의 키워드는 시간이며 그 흐름은 항상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혼돈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성을 시간의 함수로 다시 표현해 보면 물잔 속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잉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속으로 번져나가듯 변화는 질서 있는 세상에서 무질서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미세분화 구조에서 세분화로 진행된다. 그리하여 엔트로피는 복잡계로 향하는 방향성을 잃지 않고 증가한다는 것이 이에 대한 해답이다.
우리의 삶을 엔트로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탄생은 그 에너지의 증가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유년기를 지나고 청년기를 지나면서 점점 복잡계로 접어들게 되고 지나온 시간만큼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된다. 그 증가는 장년을 지나 노년이 되어 임종의 자리에 오게 되면 무한대에 이르게 되고 그 무한대의 에너지는 다시 제로에 수렴된다. 무한대와 제로의 상태가 같아진다는 이 에너지법칙은 역설적이지만 죽음과 탄생의 순간은 같은 에너지 상태가 된다는 것과 같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이 에너지는 또 진화의 고리로 연결된 복잡계로 열려져 있다. 다만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지나온 것에 대한 추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아니겠는가.
엔트로피를 우리의 인생살이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물론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 에너지 법칙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으로 인구에 회자되면서 사회의 많은 분야에 접목되기도 한다.
카오스(chaos), 즉 혼돈이 증가하는 이 에너지 계(system)는 항상 우리에게는 긍정적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 에너지는 벽을 만나도 흐름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법칙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 중의 하나는 오늘의 조건을 제 아무리 정확히 알고 있어도 미래는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하며 현재와 미래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사이의 관계는 혼돈과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상관함수의 풀이로 이어져왔다.
이 복잡하고 난해한 자연현상을 단순화시키고 그 설명을 한 줄의 방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노력해왔다. 이것은 또 과학이 작은 미립자의 움직임에서부터 대기의 변화와 같은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거대현상에 이르기까지 적용해 왔던 방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상은 어떤 보편적 질서에 의해 움직이며 연속적으로 진화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로 향하는 이 흐름은 엔트로피의 고리로 연결되어가는 사회 안에 자리 잡은 보이지 않는 질서이며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자발적 현상이다. 또한 그 흐름은 벽을 만나도 흐른다. 벽은 보편적 질서를 막을 수 있는 걸림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라는 구절이 있다. 과거 역사에 획을 그어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사건들 그리고 그 일을 참여했던 분들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지나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시제 속의 지나온 시간에 대한 증가하는 엔트로피의 현상이었음을 알아야한다. 그 응어리들이 다시 역사라는 자연계 속으로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 흐름은 미래로 향하고 있는 진화의 한 방법이며 또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다.
현실은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주고 과거를 미래와 연결시키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에 집착하여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현상임을 안다면 현재는 복잡계로 향하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함께 흐르는 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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