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사상

rainbow3 2019. 9. 18. 00:30

금장태,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사상"

 

 

선비와 의리

 

선비(士)는 벼슬하는 사람(仕)을 뜻하며, 주대(周代) 이래의 봉건계급 구조에서는 천자, 제후, 대부, 사, 서인 가운데 한 계급으로, 일정한 학식이 있는 하급관료요,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층은 아니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권력계층의 탐욕과 갈등으로 사회질서가 붕괴되었을 때, 새로운 질서의 재건을 추구하면서 '士'에게 독특한 위치와 기능이 재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공자는 유교 이념을 정립하고 새롭게 밝히는 과정에서 '士'는 유교적 인격과 교양을 담당하는 지식계층으로 재확인하였다. 이때의 '士'는 대부(大夫)로 진출하는 신분계급으로서 '士大夫'의 측면과 분리되어, 군자로서의 유교적 인격의 실천주체라는 '士君子'의 측면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공자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대립시켜 군자에게 인격적 모범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바로 '士'의 올바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다.

 

공자는 '행동에 염치가 있는 것(行己有恥)'을 선비의 조건으로 지적하면서, '선비로서 편안한 것을 그리워한다면 선비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선비의 조건은 도덕성에 중심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 仁을 해치지 않고, 죽음으로써 仁을 이룬다'는 말에서 선비가 지향하는 참된 가치는 지위가 아니라 인격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맹자에게서도 '士'가 유교 이념의 담당자로서 강조되고 있다. 곧 그는 '선비'란 '뜻을 숭상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고 지적하고 그 뜻을 '仁義'라 밝혔다. 또한, 선비는 일정한 생활근거가 없이도 변함없는 마음(恒心)을 가질 수 있는 인격이라 하며, '선비는 곤궁하여도 義를 잃지 않고, 출세하여도 道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언명하고 있다.

 

이처럼 선비는 '道'와 '의리'를 담당하는 인격으로서 굳세고 숭고한 뜻을 지녀야 하며, 이 때문에 곤경과 난관 속에서 '道'를 간직하고 '의리'를 지키는 임무를 맡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선비의 임무는 유교 이념의 실현주체로서 공자와 맹자 이후 그 지위와 역할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 이후의 시대는 선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의리의 주체로서의 선비의 삶

 

선비의 역할과 활동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를 통하여 도학(주자학)이 정통이념으로 정립되면서 '의리'는 선비정신의 중추를 이루었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사림세력이 성장하고 사회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한 시대 사회와 역사의 영욕에 선비의 역할이 관여하지 않은 바가 없으며 이에 따라 그 공로나 과오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선왕조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출범하였지만 고려왕조를 넘어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왕조교체의 사건에 대해, 유학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양분되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 등 혁명을 뒷받침하고 조선왕조의 건설에 참여하여 유교 이념을 정착하는 데 적극적인 유학자가 있는 반면에 정몽주(鄭夢周)나 길재(吉再) 등 혁명세력에 저항하거나 협력하지 않았던 유학자도 있다.

전자는 혁명론을 내세워 고려왕조를 부정하였지만, 후자는 강상론(綱常論)에 서서 혁명을 거부하였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혁명'과 '강상'의 어느 쪽이 정당한지의 판단은 의리의 중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조선왕조는 세종시대 이래로 '강상'에 의리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정몽주와 길재의 충절을 높임으로써 의리론의 방향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의리의 판정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비판기능을 잃고 권력의 옹호세력으로 남게 되었던 반면에, 강상론자는 고려왕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권력에 예속되지 않은 '의리'의 실현을 주장하는 비판세력이라는 점에서 의리의 정당성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해 정인지(鄭麟趾)와 신숙주(申叔舟) 등이 지지한 데 반하여 사육신(死六臣)이나 생육신(生六臣) 등은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권력과 의리의 분열이 확인되고, 조선시대 선비의 의리정신이 구체화되었다.

선비는 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상의 편에 서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다. 다시 말하면 권력의 도구로서 강상을 이용할 것을 거부하고 강상의 이념 아래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집권층인 훈구파(勳舊派)에 대해 강상론을 주장하며 초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사림파가 분별되는 것은 바로 집권관료로서의 유교지식인과 구별되는 유교이념의 수호자로서의 선비계층을 말해준다.

길재의 문하에서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을 거쳐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선비집단이 확립되었다. '사림'은 의리를 이념적 핵심으로 지키면서 권력 집단에 비판적이고 순수한 이상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세속적인 훈구세력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자 권력의 탄압을 받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갑자사화를 비롯하여 16세기 전반기 기묘사화∙을사사화의 4대 사화가 일어나면서 권력의 탄압 아래 선비들이 무수한 희생을 치렀다. 사화를 통해 선비들이 희생되었지만 의리의 정당성은 선비들에 여전히 있었고, 선비의 의리정신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심화되었다. 선비의 희생은 의리를 지키려는 순도(殉道)요 순교(殉敎)의 증거가 되었고, 이를 통하여 선비정신의 역사적 가치와 의리사상의 사회적 정당성이 확인을 받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선비집단인 사림(士林)이 정치권력을 담당하면서 이른바 '사림정치'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필연적으로 의리에 비추어 권력집단을 비판하는 입장과 권력을 통해 유교 이념을 실현하려는 입장의 분열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곧 '당쟁(黨爭)'이다. 당쟁은 권력을 사이에 두고 선비들 사이의 의리논쟁에서 발생한 것이다. 17세기 말의 숙종 때를 극성기로 하는 당쟁의 시기는 권력투쟁에서 의리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선비의 상쟁으로 그 의리의 균형 있는 객관적 기준이 무너지면서 선비정신의 건전한 생명력도 상실되고 말았다.

실학파가 등장하면서 선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심각한 반성이 일어났고, 의리의 허구성과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선비가 생산 활동을 외면하고 무위도식하는 좀벌레라 자책하기도 하였다. 한말에는 서양과 일본의 침략 앞에서 그 침략의 불의를 비판하면서 의리를 주장하고 항거하는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던 선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민족정신을 발휘한 마지막 선비정신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끊임없는 자기 개혁 없이 전통의 강상만을 고집할 때 선비란 마치 고루하여 융통성 없는 시대착오적 의식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남겨주게 되었다.

 

선비는 유교 이념의 수호자로서 의리를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利害)와 의리(義理)가 충돌할 때에는 이해를 버리고 의리를 지키는 태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선비는 빈한(貧寒)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성리학에서 천리를 지키고 인욕을 억제하는 것이 수양의 기본방법으로 제시되었을 때, 선비는 모든 물질적 욕망을 억제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사람파를 정립시켰던 조광조는 국가의 병폐가 이욕의 근원에 있다고 진단하고, 의리에 배반되는 이욕의 근원을 막음으로써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혔다. 여기서 의리는 숭고하지만, 현실의 실리를 등지면서 사회적 빈곤과 낙후를 초래하는 모순을 잉태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퇴계는 "선비란 다른 사람의 세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는 것이며, 저쪽이 부(富)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인(仁)을 가지고 있으며, 저쪽이 벼슬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의(義)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라 지적하며, 부귀를 넘어서서 의리를 지닌 당당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그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공으로서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에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는 것은 선비가 고귀하고 공경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退溪集』권12)"라 언급하였다.

선비가 천자나 왕공과도 인간적인 평등을 지닐 수 있다는 의식은 봉건계급질서를 넘어서는 인격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학파의 박지원(朴趾源)도 선비의 본래적 성격을 재천명하는 입장에서 "사(士)가 작위를 가지면 사를 버리고 대부(大夫), 경(卿)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위도 사에 부착되는 것이라 하고, 천자도 작(爵)이 천자이지 그 몸은 사라 하여 천자를 '原士'라 한다.(『燕巖集』권10)"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선비에 대한 인식은 선비를 군왕이나 국가권력에 봉사하는 기능적 지식계층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나 모든 세속적 가치를 넘어서 의리의 이념적 가치를 수호하는 주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현실적 선비집단에서 선비의 양상이 다양할 수 있다. 홍대용(洪大容)은 선비를 과거로 출세하는 재사(才士), 글재주로 이름을 얻는 문사(文士), 경전에 밝고 행동을 점잖게 꾸미는 경사(經士)로 분류하고는 자신이 말하는 선비란 "인의에 깊이 젖고 예법을 따르며, 천하의 부로도 그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곤함의 근심으로도 그 즐거움을 대신하지 못하며, 천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벗 삼지 못하며, 현달하면 은택이 사해에 미치고, 물러나면 도를 천년토록 밝히는 진사(眞士)이다.(『湛軒集』권3)"라 하였다. 이러한 선비의 이상적 모습을 율곡도 진유(眞儒)라 하여 '나아가면 한 때에 도를 행함에 백성들에게 화락한 즐거움이 있게 하고 물러나면 만세에 가르침을 드리워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라 지적하였던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 지도이념이 밝고 사회기강이 확고하면 그 사회는 굳건하게 유지되는 것이지만, 가치관이 혼란되고 사회기강이 붕괴되면 그 사회는 불안정하여 붕괴하게 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한 시대사회에서 그 사회의 이념을 제시하고 기강을 수립하는 지도계층의 인물들이 건전한 정신을 가졌는가, 기득권에 안주하여 탐욕 속에 부패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회의 흥망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는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그 의리정신이 권력의 타락을 견제할 수 있고 권력을 이끌어갈 수 있을 때 국가의 안정이 가능하였다. 또한 선비가 이기적 명분을 내걸고 대립하며 갈등하고, 권위와 타성에 젖어들어 정신적 쇠퇴를 드러내면서 사회적 혼란이 깊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퇴계도 선비가 어떤 정신적 기풍을 갖느냐에 따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게 나타남을 역사를 통해 분석하여 제시하였다. 곧 "동한(東漢)의 선비는 절의를 숭상하여 세도를 부지하였고, 송(宋)의 선비는 도덕을 숭상하여 인심을 맑게 하였으나, 서한(西漢) 말의 선비는 아첨을 숭상하여 천하를 은폐시켰다.(『퇴계집』권41)"고 지적한다. 이것은 선비의 사회적 기능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선비의 기풍[士風∙士習]'이 건전한지 아닌지에 따라 사회를 안정시킬 수도 있으며 혼란시킬 수도 있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선비정신의 발현

 

선비가 의리를 소중히 지키고자 하지만 위난(危難)에 처하여 의리의 실천을 회피한다면 의리는 그저 관념 속에나 남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의리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만으로는 의리의 실현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의리는 신념과 용기를 동반함으로써 비로소 강인한 결정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된다.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다(捨生取義)'는 말에서처럼 인간이 위기를 만났을 때 모든 이해득실이나 고통의 감수는 물론 생명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때에 의리는 용기와 결합되어 의용(義勇)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조헌(趙憲)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7백 명의 의사승병(義士僧兵)들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의병을 모집하여 선서하면서 "오직 '義'라는 한 글자를 끝까지 마음에 두라."고 강조하였고, 금산전투에서 의병들에게 마지막 훈시를 하 때에도 "오늘은 다만 한번 죽임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삶과 나아가고 물러섬을 '義'라는 한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義'는 국가존망의 위난에 처했을 때 생명을 버리면서 투쟁하는 용기의 원천이요,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순신의 위대한 전공을 칭송할 때에도 그가 단지 지모나 용맹이 뛰어난 무장이 아니라 의리에 바탕을 둔 확고한 사생관에서 발휘되었던 위용을 구현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상계(狀棨)에서 "원컨대 한번 죽기를 기약하여 적진을 곧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치욕을 만분의 일이라도 씻고자 합니다. 그 성공과 실패나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신이 미리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忠武公全書』권2)"라 언급하고 있다. 전장을 지휘하는 사령관도 결과로서의 성패보다 동기로서의 불의에 대한 의분과 생사를 넘어선 의용을 강조하고 있는 사실도 의리정신이 시대사상의 기준이요, 근거로서 확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리가 판단하는 입장에 따라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의 논란 가운데 척화파는 만주족의 오랑캐에게 항복할 수 없다는 '의리'를 내세우고, 주화파는 무력침략 앞에서 국가의 존속을 확보하려는 '실리'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학사나 김상헌은 척화의리를 굽히지 않았고, 홍익한은 심양에서 청태종의 신문을 받으면서 "내가 지키는 것은 '大義'일 따름이니 성패와 존망은 논할 것이 없다."고 대의를 내세워 자결하였다.

국가의 존망이 중요한가 대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의 문제는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영원히 남을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 여기서 조선사회의 유교이념을 신봉하던 선비의 의리론에 따르면 국가의 존망에 대한 집착보다 대의를 지키는 것이 근원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의를 버리고 존속하는 것은 진정한 생존이 아니고, 또한 생존의 보장도 못 되는 것이라 본다. 불의 속에 생존하는 것은 결국 역사 속에 조만간 멸망할 뿐이고 대의를 지킨다면 한때 죽음을 당한 것 같아도 영원한 생존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리의 정당성이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이요, 생존의 요구가 의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조선 후기는 '春秋大義'에 다른 역사적 복수의식 속에서 이끌어졌다고 할 수 있다. 효종은 북벌론을 통해 중국대륙을 장악한 만주족의 청나라를 징벌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항로 문하의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인물들(金平黙∙柳重敎∙崔益鉉 등)은 한말 서양의 침략과 일제의 침략을 당하던 시기에 척화론을 주장하고 의병운동을 일으켜 춘추대의를 강경하게 제시하였다.

'한 나라도 망할 수 있지만, 대의는 일월처럼 천지와 더불어 영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대의를 통해 국가를 지키려고 싸웠던 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리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선비정신의 재음미

 

조선시대 선비의 의리정신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신체적 욕망에 예속되는 태도를 거의 결벽증이라고 할 만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義)를 이(利)와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利를 버려서 義를 찾으려는 태도는 利만 탐하는 인간이나 세속적 풍조에 대한 경계로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義와 利가 본질적으로 모순된 것은 아니다. 공자가 '利를 보거든 義를 생각하라(見利思義)'라고 말한 것도 利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지 利를 버려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주자학 전통의 선비정신이 너무 금욕주의에 기울어져 利를 경시하자, 이에 대해 실학파에서 욕망이나 재화의 현실적 중요성을 재평가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선비는 모든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올바른 판단으로서 천하의 공론이 바로 '士論'이라 한다. 물론 의미의 해석이 달라짐에 다라 선비의 공론이라는 것도 분열되어 공론의 역할을 못하고 끝없는 논쟁 속에 당파적 분열을 거듭했던 것이 현실이었지만, 선비는 한 사회의 통합된 올바른 판단을 제시할 책임을 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사림들의 대간(臺諫)을 비롯하여 언관(言官)을 맡아 언로를 열기 위해 활동하였던 것이나, 상소(上疏)를 통해 사회의 정론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조되어 왔다.

 

선비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격이므로 그 지성도 올바른 지식을 지니는 동시에 도덕적 행동의 모범으로서 대중을 이끌어가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곧 선비는 지성인이요 학자로서의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이념을 밝히고 이에 따라 대중을 감화시키며 이끌어가는 성직자의 기능도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전통에서 선비의 역할이 중추적이고 선비정신이 숭고하다 하더라도, 선비의 역할에는 양지와 음지의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선비가 관료계급으로서 혹은 전통의 봉건적 신분 질서 속에서 지배자의 지위를 향유하는데 젖어 있다면, 이들은 신분상 선비계급이지 선비정신의 파괴자가 되고 말 것이다. 사실상 신분의식에 따라 생업을 위한 노동을 천시하여 빈곤을 자초하면서 예절을 따지고 가문을 내세워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위선이요, 신분을 빌어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비의 기풍[士風]'이 편벽되고 병들면, 지식인으로서 선비가 도리어 사회를 혼란시키고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선비정신이 균형 있는 지성과 도덕적 건강함을 갖추고 사회의 이상을 제시하여 대중을 이끌어갈 수 있을 때 국가의 생명력[元氣]으로서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의 정신과 선비의 행위가 건강한지 정당한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자신의 허물에 대한 성찰이 없이 독선적 정당성에 빠져들면 선비는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되고 사회의 장애요인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