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삶의 意味
1) 인간의 형이상학적 요구에 대하여
인류를 제외하고 어떠한 중생도 자기 자신의 생존에 대하여 놀라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생존을 알고도 남는 것으로 치고 주목도 하지 않는다. 동물의 평온한 눈빛 속에도 천연의 지혜는 나타나 있지만, 그들은 아직 의지와 지력(知力)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고 서로 경탄하는 법이 없다. 즉, 여기서는 현상 전체가 그 근원인 자연의 나무에 굳게 매어 있다. 자연(삶에의 의지가 객체화된 것)의 내적 본성은 의식이 없는 무기물(無機物)과 식물이 되고 동물로 발전된 후에 인류가 되고 이성(理性)이 나타나 비로소 사려를 갖고, 자기 자신의 피조물에 놀라 이게 웬일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경탄이 특히 진지하게 되는 것은 비로소 의식을 갖고 죽음에 직면했을 경우이며, 이때 일체의 생존에 종말이 있고 모든 노력이 공허하다는 것도 다소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사려와 경탄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하나의 형이상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즉, 인간은 「형이상학적 동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식의 시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떤 당연한 존재로 간주하지만, 이윽고 사려와 반성이 지각되면 경탄을 느끼고 이것이 나중에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모체가 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형이상학>의 서두에서 ‘인류는 경탄에서 비로소 철학적 사색을 하기 시작한다’고 말하였다.
진정한 철학적 소질은 우선 습성화된 일상적인 일에도 경탄하는 능력으로, 이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현상의 보편성을 문제삼게 된다.
그런데 실물의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다만 탐구해 낸 희유(稀有)의 현상에만 경탄할 뿐 문제는 어떤 이미 알려진 것에 귀착된다. 한 인간의 지력의 정도가 낮을수록 생존에 대한 놀라움과 의혹은 적으며, 아무 것이나 있는 그대로 자명한 일인 줄 알고 있다. 이것은 지력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 동기의 도구로써 의지에 사용될 뿐 거기에만 충실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은 자연의 한 요소로서 자연과 세계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자연과 자기를 분리시켜 자연에 대해 한시라도 자기만으로 생존하여 세계를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 속에서 생기는 철학적인 경탄은 지력이 높은 단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려나 세계의 형이상학적 해석에 가장 큰 자극을 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죽음에 대한 이지(理知)이며, 다음에 삶의 고뇌와 궁핍을 들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생명에 끝장도 고통도 없다면 아마 아무도 어찌하여 세계가 존재하고, 또 세계는 이 모양이냐고 묻는 자도 없고 모든 일을 다 자명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철학이나 종교의 학설이 주는 흥미는 무엇보다도 사후(死後)에 어떤 생존이 있느냐 하는 가르침에 쏠리는 것도 당연하다. 종교의 가르침이 그 신봉하는 신들의 존재를 주제로 하여 이를 열심히 옹호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그것은 그 근저에서 이것과 불사에 대한 가르침이 밀착되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이 종교에서는 중요한 것이다.
만일 불사가 종교 아닌 다른 방면에서 확인된다면 신에 대한 열의는 곧 식어질 것이며, 또 반대로 불사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신들에 대한 것은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신을 알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곧 신의 존재에 대한 흥미도 소멸되고 나중에는 신이 현세(現世)의 일에 어떤 작용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유물론(唯物論)이나 회의론(懷疑論)이 대체로 숭상되지 않고, 또 오래 계속해서 맥을 못추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신전(神殿)이나 교회, 사당(祠堂)이나 사원(寺阮) 등이 화려하고 웅장하게 세워지는 것은 인간에게 형이상학적인 요구가 있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요구는 매우 강하여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형이하의 물질적 필요에 직결되어 있다.
물론 풍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에 덧붙여 말할 것이다. 이 요구는 매우 겸손한 놈이라 몇 푼의 임금으로 만족한다고. 이 놈은 엉성한 우화나 터무니없는 옛말로 만족하는 수도 있고, 그런 이야기를 어렸을 때 주입시켜 두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자기 생존의 해석이 되고 도덕의 지주(支柱)도 된다.
예컨대 《코란》(마호멧교의 경전)을 보더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책이 한 세계적 종교의 토대가 되며, 1200년 동안 수백 수천만 인간의 형이상학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의 근본이 되고,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경시하게 하고 오늘에 와서도 그들을 싸움터로 몰아내며 엄청난 침략에 흥분을 일으키게 한다. 나는 물론 《코란》을 번역으로 읽으므로 그 진미를 잃어버린 대목도 많을 터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가치 있는 사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형이상적 요구와 형이상적 능력에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구 표면의 더욱 먼 고대에는 이렇지는 않았던가보다. 태고의 사람들은 인류의 발생이나 자연의 원류(原流)에 한결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직관능력(直觀能力)이 오늘보다 훨씬 강하고, 정신상태가 우리보다 더욱 올바른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자연의 본성을 순수하게 직접 터득하는 힘이 강하며, 이로 말미암아 형이상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더욱 고상한 방법을 취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라문(婆羅門)의 조상, 성자(聖者)들에게는 거의 인간 이상의 사상이 머리에 떠올랐던 모양이며, 그것이 나중에 《베다》의 <우파니샤드>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의 형이상적 요구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여 되도록 많은 수확을 올리려는 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어, 어느 나라에나 그 전매권(專賣權)을 차지하고 대지주가 되는 사제(司祭)가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직업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인류의 판단력이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잠도 미처 깨지 않았을 때, 이를테면 인류의 유년기에 일찍 그들의 형이상의 학설을 인류에게 주어 그것으로 자기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서 주입된 교양은 설사 무의미한 것이라도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게 마련이다. 만일 인간의 판단력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면 사제들의 특권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인류의 형이상학적 요구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의 제 2계급은 철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며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이들은 희랍에서는 궤변가(詭辯家:소피스트)라고 부르고 근세에는 철학교수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형이상학》2-2) 아리스티포스를 가차없이 이러한 궤변가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에서 처음으로 철학을 가르치고 수업료를 받았으므로, 소크라테스가 그가 보내온 선물을 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근세에도 철학으로 생활하는 자는, 극히 드문 예외는 있지만 대개 철학을 위해 살아가는 자와는 전혀 다르며, 그들은 대다수가 철학을 위해 살아가는 자에게 반대하며 불구대천(不具戴天)의 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철학에서 두드러진 일을 한 자는 그들에게 눈 위의 혹이 되어 이들의 견해나 주장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 같은 진정한 철학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그 시대와 환경에 따라 탄압‧은폐‧묵살‧무시‧제거 그리고 배척‧비난‧공박‧모용‧왜곡 또는 고발이나 박해 등을 상투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위대한 두뇌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였으며 존중되거나 응분의 보답을 받지 못하고 일생을 고생스럽게 보내게 되어, 사후에야 세상 사람들은 그와 그를 모함한 자들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그 동안에 그 작자들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그가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을 따르게 하여, 그가 철학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은 철학을 수단으로 해서 처자들과 잘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 사태는 전도되어 그 사이비 철학자들의 2세들은, 이번에는 그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자기네의 정도에 맞춰서 재탕하여 그것으로 생활해 나간다. 칸트가 철학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안토니누스(로마의 황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저서로 《사색록》이 있음-譯註), 율리아누스(고대 로마 황제, 고전철학과 밀의교(密議敎)에 기울어 기독교를 박해함-譯註) 이래 처음으로 철학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 덕택에 《순수이성비판》은 햇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의 철학은 대체로 언제나 화장도구에 불과하며, 그 실제의 목적은 사고력의 최하위(最下位)에 있는 학생들의 정신을 강좌를 장악하고 있는 문교당국의 견해에 알맞도록 인도하는 데 있었다. 정치가의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물론 정당하겠지만, 이로 말미암아 강단철학(講壇哲學)은 「다른 신경으로 움직이는 나뭇조각」이 되어버리고 진실한 철학이 아니라 국가의 어용철학(御用哲學)으로 존재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감독 또는 지도는 단지 강단철학에만 미치고 진정한 철학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세계에서 바람직한 일이 있다면 바로 이것으로, 거칠고 우매한 대중도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철학을 금은보다 더 소중히 여겨 한 가닥 빛이나마 이 생존의 암흑 위에 비쳐, 비참하고 공허한 것밖에는 분명치 않은 이 알고도 모를 인생에 어떤 숨통을 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의 해석에 강제와 압박이 따르기 때문에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 이런 강한 형이상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 이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형이상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한도내에서 경험 이상으로 자연, 즉 사물의 당면한 현상을 초월하여 이들 현상의 근원이 되는 것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려는 인식으로, 좀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자연 속에 그 토대가 숨어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의 이해력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으며 게다가 그 수련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개인차가 심하다. 이로 말미암아 한 국민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난 직후에도 사람들은 하나의 형이상학으로는 부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문명인들 사이에는 이에 전혀 다른 부류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신뢰하고, 하나는 자기 이외의 것에 신뢰를 둔다.
첫째의 형이상학설은 그 근거를 시인하게 되려면 사려나 소양 이외에 시간과 판단을 필요로 하므로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되고 높은 문명 속에서만 발생하며, 또 존재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간의 대다수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신뢰하며, 근거를 시인하지 않고 성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민간의 시나 지혜(즉, 속담)가 그것이며, 민간 형이상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학설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행세하며 극히 야만적인 종족들 이외의 어느 인민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종교는 일반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소중한 혜택이다. 그러나 종교가 진리의 인식에서 인류의 진보에 대항하려고 하면 되도록 관대하게 그것을 옆으로 밀어 놓을 수밖에 없다.
여러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를 흔히 일신교(一神敎)‧다신교(多神敎)‧만유신교(萬有神敎) 또는 무신교(無神敎) 등으로 구별하지만 나는 여기에는 찬성하지 않으며, 다만 염세적이냐, 낙천적이냐에 따르면 된다. 즉, 종교는 이 세계의 생존은 그 자체로 근거이유(根據理由)가 있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이를 찬양할 것인가 아니면 다만 그것을 우리의 죄과의 결과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에 따라서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세계의 본래의 질서는 영원불멸하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고통이나 죽음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유태교보다 우월하여 희랍이나 로마의 이교(異敎)를 제압한 힘은 실로 그 염세주의에 있었으며, 유태교나 이교가 낙천적인 데 반하여 기독교는 우리의 처지가 매우 비참하며 죄에 덮여 있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 진리는 누구나 깊이, 그리고 비통한 마음으로 느끼고 있으며, 그 힘으로 인심을 감화하고 또한 해탈의 요구가 그 밑받침이 되어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론의 다른 일면,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는 철학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철학은 인간의 세계와 자기 자신의 생존에 대한 경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것은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의 지력(知力)에 호소해 오매 인간은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우선 첫째로 유의해야 할 것은, 만일 세계가 스피노자의 주장대로 절대의 실체, 즉 필연의 본성을 갖는 것이라면 이러한 경탄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견해에 의하면 세계는 커다란 필연에서 존재하며, 그 밖에 인간의 눈앞에 나타난 어떠한 이해도 모두 이 대필연(大必然)의 한 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의 실체는 어느 의미에서나 유일하여 언제 어디서나 하나로 우리 자신은 그 부분‧양식‧속성이라면, 그 본체의 존재나 속성이나 우리의 생존이 우리에게 기이하게 보여 의문이 생기기는 커녕 그 반대로 자명하여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대로 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으니, 그 존재를 곧 사고의 제목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지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운동을 하고 있어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계의 존재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사려가 없는 동물은 세계와 생존을 자명한 일로 보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의문시하여 가장 야만스럽고 유치한 자조차도 어떤 빛을 받으면 이를 열심히 생각하여 사려가 깊어지고 사고의 대상이 많아진다. 또한 소양으로 이를 쌓아 둘수록 점점 분명히, 그리고 확실히 보유하여 그것들이 결국 철학적 사색에 능한 자의 두뇌에 들어가면 플라톤의 이른바 「놀라움, 커다란 철학적인 정열」의 경탄에 이르러, 이로 말미암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고상한 인류가 도저히 면할 길 없는 의문을 일으켜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게 되며, 드디어 이 경탄이 의문 전체를 포괄하게 된다. 형이상학의 세계가 이와 같이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불안한 것은, 즉 이 세계는 존재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식에서이다.
그리고 철학적 사색을 일으키는 이 놀라움은 세계의 해악과 재앙을 목격하기 때문이며, 이것들이 정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또 이런 일보다 기쁨이 더 우세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무(無)에서 유(有)가 생길 리가 만무하므로 이것들도 그 싹이 그 근원, 즉 세계의 핵심 자체 속에 깃들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형이하의 세계가 광대하고 질서가 있으며 완벽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세계를 낳은 힘이 해악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세계의 모든 현상을 탐구하는 것은 형이하학의 일이다. 그러나 형이하학 자체의 발판 위에 설 수는 없으며, 아무리 뽐내어도 그 토대로서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필요로 한다. 세계의 모든 사물, 눈앞에 나타난 자연상태를 순수한 물리적인 원인에서 해명한다면 거기서는 언제나 두 가지 불완전한 면을 모면할 수 없다. 즉, 하나는 모든 변화를 결부시키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며 모든 것을 이와 같이 설명하지만, 그 사슬의 시초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으며 끝까지 파고들어도 한 발짝 앞으로 도망쳐 버리곤 한다. 또 하나는 어떠한 해명에도 그 결과를 낳는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은 도저히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 즉 사물의 본원의 성질과 사물 속에 나타나는 자연의 힘에 의거해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가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은 경험상으로도 분명한 일이며, 물리적인 설명은 모든 것을 각각 그 원인으로써 하지만 이 원인의 사슬이 앞으로 앞으로 연장되어 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분명히 알고 있으며, 따라서 제 1원인이라는 것은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 이 원인이 작용하는 것은 각각 자연의 법칙에 기인하지만, 끝내 자연의 힘으로 귀착되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세계는 현상으로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은 최고에서 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에 의거하여 있으므로, 이러한 설명은 완전히 상대적이며 이를테면 서로 「양보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형이하(形而下)로는 무엇이든지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일체의 현상을 관통하여, 예컨대 생식과 같은 최고의 현상에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기계적인 최하의 현상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며, 이로써 미루어 보면 사물의 형이하학적 질서의 근저에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질서가 있으며, 이것이 곧 칸트가 물자체의 질서라고 말한 것으로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객관과 객관적인 존재는 인식하는 주관에 철두철미 제약된 것, 즉 현상으로 물자체가 아니다. 또 객관은 주관의 덕택에 주관 속에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유물론자들의 수법처럼 아무 검토도 하지 않고 객관을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서 모든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한 수법의 표본은 오늘 유행하는 물질론에 나타나 있으며, 약장수의 철학이 되어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물질은 얼마든지 실재요, 물자체이며 작용하는 힘이 이 물자체의 유일한 능력으로 모든 다른 성질은 이 힘의 현상이 되는데 이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자연주의, 즉 순수한 물리적인 견해는 도저히 결말을 볼 수 없고 끝내 풀리지 않는 계산과 비슷하다. 처음도 끝도 없는 인과의 계속, 탐구해 낼 수 없는 근본 원동력, 무한 공간, 시작이 없는 시간, 끝없이 분할할 수 있는 물질, 그리고 이들 모든 것을 제약하여 인식하는 뇌수(腦髓), 일체가 바로 이 뇌수 속에서만 꿈결같이 존재하며 이것 없이는 일체가 소멸된다. 이것들이 서로 모여서 미궁(迷宮)을 이루어 우리는 그 속에서 끝없이 방황한다.
근세에 와서 자연과학은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점에서는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도 눈 아래 내려다보며 인류가 오늘날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정점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이 아무리 크게 진보하여도 형이상학의 진보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마치 평면이 아무리 연장되어도 그 부피가 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물리학이 아무리 고도로 발전하여도 현상의 지식을 완벽하게 할 뿐, 형이상학은 현상을 초월하며 현상에 나타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경험이 아무리 완전히 이루어져도 형이상학은 전혀 개선시킬 수 없다.
인간이 모든 항성(恒星)의 별들을 돌아다닐 수 있어도 그것은 형이상학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진보는 점점 형이상학의 요구를 증진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지식이 시정되고 풍부해지고 깊어지면,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의 낡은 주장은 그만큼 배제되어 마침내 매장되지만, 한편 형이상학의 문제는 그만큼 명백해지고 정당하게 드러나 형이상학 방면을 떠나 순결해지며 개개의 사물에 대한 본성은 더욱 정밀해지므로 전반에 걸쳐 전체의 설명은 더욱 필요하며, 전체의 인식이 올바르고 근본적으로 완벽해감에 따라 그만큼 수수께끼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국부적인 자연연구가로서 물리의 일부에만 열중하는 사람은 쉽사리 알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문가는 오딧세이의 집에서 얌전한 시녀의 무릎 위에 평안히 잠들어 페넬로페의 일은 잊어버린다.
오늘날 자연의 외피(外皮)에 대한 연구가 정밀의 극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며, 장(腸)에 붙어 사는 기생충의 장이나, 벌레에 붙어사는 벌레도 머리털까지 세밀히 연구하고 있지만, 누가 가령 나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 자연의 핵심 운운하여도 그들은 여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것은 자기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 하여 여전히 그 외피에 달라붙어 있다.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현미경적이고 정밀한 자연연구가는 자연의 두더지로 자부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레토르트나 시험관이 모든 지혜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 정반대의 스콜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방면에서 전도된 인간이다. 스콜라 학자들은 추상개념(抽象槪念) 속에 빠져 그 속을 헤매며 그 밖의 일은 전혀 모르며 탐구하지도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두더지는 자기의 경험에 빠져 자기의 눈으로 본 것밖에는 용납하지 않고, 그것만으로 사물의 최후의 근거를 탐구해 내었다고 생각하여 현상과 그 속에 나타나 있는 물자체 사이에 깊은 홈,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줄은 전혀 생각조차 못하며, 또 이 구별은 현상의 주관적 요소를 인식하고 정확하게 그 경계를 구분하지 않으면 분명히 알 수 없고, 또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자기 의식에서 찾아내야 한다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다. 만일 이 의식이 없으면 직접 감각에 나타나는 것 이상으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의문에 도달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자연의 인식을 되도록 완전하게 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문제를 정당하게 제기하는 데 있다는 것, 그러므로 누구나 미리 자연과학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명백히 관련된 지식이 없이는 형이상학의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연구자는 눈을 안으로 돌려야 한다. 그 이유는 지식이나 논리상의 현상은 물리현상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근본적인 비밀은 인간이 각자 자기 안에 지닌 것으로, 이것이 또한 자기에게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를 찾아내어 일체의 사물의 본성을 일거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내부에만 있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진정한 영역도 이른바 정신철학 속에 개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태어난 자의 행렬(行列)을 보여주고
고요한 숲 속에도, 대기 속에도, 그리고 물 속에도
나의 형제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
그리하여 나를 평화의 동굴로 인도하여
나 자신을 나에게 보여주며
이리하여 깊이 감춰진 수수께끼는 내 가슴속에 스스로 나타난다.
2) 聯想에 대하여
표상이나 사상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은 물체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엄격히 인과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서이다. 물체가 원인없이 운동할 수 없는 것처럼, 사상은 기회가 없이는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기회는 외부에서 오는 것, 즉 감각의 인상이나 또는 내부에서 오는 것, 즉 연합하여 하나의 사상이 다른 사상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생긴다. 그리고 이 연합은 양자 사이에 인과의 관계가 있거나 또는 유사한 데 의거하거나, 양자가 공간에 나란히 위치하거나 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상의 연합에 이 세 가지 밧줄이 있는데 그 어느 쪽이 우세하냐에 따라서 두뇌의 지력(知力)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 즉, 제 1류는 사고력이 강하여 사물의 근원을 파악하는 두뇌이며, 제 2류는 기지가 있고 재기가 풍부하며 시에 능하고, 제 3류는 빈약한 두뇌의 경우에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사상에서 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 사상을 불러일으키는 지속(遲速)도 두뇌의 특질을 나타내어 그것이 빠른 것은 정신이 활발한 징조이다.
그러나 한편, 아무리 의지는 강하게 원하여도 충분한 기회가 갖춰져 있지 못하면 사상은 발생하지 않으며, 상기하려고 하여도 좀처럼 되지 않는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려면 연상으로 관련이 되는 어떤 실마리를 찾아내어야 한다. 기억술은 이런 이치에 따라 보존해 두어야 할 개념이나 사상이나 말에 어떤 찾아내기 쉬운 연관성을 맺어두는 것이다. 그런데 딱한 것은 이 관련을 찾아내려면 다시 다른 연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점이다.
상기(想起)에 있어서 연관성의 역할은 매우 커서 만약 50가지 이야기를 모은 책을 읽고 나서 그대로 팽개쳐 두면 나중에는 하나도 상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관련이 생기거나, 또는 그 이야기 하나와 관련이 있는 생각이 나면 곧 그것을 상기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50가지 이야기를 모두 상기하는 수도 있다. 그 밖의 독서에 대해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이다.
기억술의 도움을 빌지 않고 직접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연상에 의해서이며, 또 대체로 언어의 힘은 다 직접 연상에 의거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하나의 말에 결부시키는 것으로 그 개념이 생각나면 말이 떠오르고, 말이 떠오르면 개념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새로 다른 말을 배울 때에도 같은 경로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말을 배웠을 뿐 활용하지 않으면, 예컨대 희랍어의 경우처럼 읽기만 하고 대화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 연결이 일방적이며, 말로 개념을 생각해 내지만 개념으로 말을 생각해 내는 일이 없는 것이다.
기억의 실마리를 찾더라도 눈을 뜨고 나서 잊어버린 꿈을 상기하려고 할 경우는 독특한 것으로, 몇 분 전에는 분명히 나타나 꽤 활발히 움직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있을 듯한 데서 어떤 남은 인상을 찾아 거기서부터 연상해서 그 꿈을 다시 의식에 오르게 한다.
잠은 추억의 끄나풀을 단절하며, 날마다 그것을 다시 결합시켜야 하며, 이러한 결합은 개개의 경우에 완전치 못하다. 가령 밤새 머리를 맴돌던 선율도 이튿날 아침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우리의 머릿속에 생기는 사상의 경로는 단순치 않으며 여러 가지 일이 개입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의 의식은 물과 같은 것으로 분명히 의식에 오르는 사상은 그 표면에 불과하며, 그 물 전체는 불투명하고 느낌이나 직관한 것과 경험한 것이 의지의 독특한 기분과 뒤섞여 있으며 이 의지는 우리의 본성의 핵심이다. 이 의식 전체는 지력(知力) 활동의 정도에 따라 많든 적든 유동하고 있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공상의 형상이거나 또는 사상이나 의지 결정을 분명히 의식하여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상이나 결심의 경로가 표면화되어 명백하게 생각한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설명하려고 하여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밖으로부터 얻은 재료를 저작(咀嚼)하여 그것을 사상으로 다듬는 것은 깊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상례이고, 이것은 대체로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며, 자양분을 혈액이나 신체의 성분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사상은 흔히 해명할 수 없으며 숨은 내부에서 생기는 것이다.
기발한 착상이나 결심이 깊은 내부에서 솟아나 예기치 않은 일이라 자기도 놀라는 일이 있다. 편지로 예상하지 않은 소식을 전해 듣고 사상이나 동기가 혼란을 일으킬 경우에 일단 이 일을 덮어 두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 연후에, 이튿날이나 3~4일 지나 이에 대해 취할 바 태도가 분명히 머리에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의식은 우리 정신의 표면에 불과하며 그 내부는 지구의 내부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고,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껍질뿐이다.
연상의 법칙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그 활동을 일으키는 것은 결국 내부에 숨어 있는 의지이다. 의지는 지력(知力)을 구사하여 그 정도에 따라 사상을 연결시켜 유사한 것이나 동시적인 것을 환기시킨다.
표상에 나타나는 실마리가 되는 외부로부터(감각적)의 계기와 내부로부터(연상)의 계기가 서로 독립되어 끊임없이 의식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상의 연결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상에 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지력(知力)의 제거할 수 없는 점이다.
3) 달
만월(滿月)을 보면 어찌하여 유쾌하고 안정된, 그리고 고양(高揚)된 기분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달이 직관의 대상이며 의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별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별의 아름다움을 즐길 뿐이다.
그리고 달은 숭고하다. 우리를 숭고한 기분으로 만든다. 그것은 달이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지상의 영위(營爲)와는 전혀 무관한 움직임, 모든 것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달을 바라보면 언제나 고뇌를 짊어진 의지는 의식에서 소멸된다. 그리고 의식은 순수한 인식을 하는 자에게로 돌아간다.
아마도 달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과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그때에도 개개인을 멀리하는 특수성이 소멸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감각은 달은 빛날 뿐 따뜻이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달을 동정(童貞)이라고 부르며, 여신(女神) 다이아나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감각에 혜택이 많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달을 점차로 마음의 벗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큰 은혜를 주는 것은 오히려 직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태양은 우리의 마음의 벗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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