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不滅의 意志에 대하여
1) 生殖과 죽음
육체 자체의 힘으로 육체를 보존하는 것은 같은 의지의 긍정 속에서도 정도가 낮은 것이다. 따라서 육체의 사멸과 함께 육체 속에 현상된 의지도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성욕을 충족시키는 것 자체가 짧은 기간밖에 존속되지 않는 자기의 생존의 긍정 이상의 것이며, 개인의 죽음을 초월한 무한한 시간에 있어서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언제나 진실하고 한결같은 자연은 이 경우에는 매우 천진난만하여 분명히 생식행위의 본질적인 의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생식행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의식이나 강한 성욕은 생식행위 가운데서 결정적인 삶에의 의지의 긍정이 순수하게(다른 개인의 부정과 같은), 부질없는 부가물(付加物)이 없이 표현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리하여 시간과 인과(因果)의 계열 속에서, 즉 자연 속에서 생식행위의 결과로서 새로운 생명이 나타난다.
분명히 현상면(現象面)에서는 태어난 자는 어린이와는 다르지만, 그 자체로 보면 혹은 이념에 따르면 태어난 자는 어버이와 동일한 존재이다. 무릇 생명을 지닌 모든 종족이 각각 개체를 전체에 결부시켜 이러한 형태로 영원히 존속될 수 있는 것은 이 생식행위의 덕택이다.
어버이의 입장에서 보면 생식은 자기의 결정적인 삶의 의지를 긍정하는 표시, 또는 징후에 지나지 않으며, 한편 태어난 자의 입장에서 보며 생식은 그 태어난 자 속에 나타나는 의지의 근거는 아니다. 그것은 의지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근거도 결과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식이라 하더라도 다른 모든 원인과 마찬가지로 이 때, 이 고장에 있어서의 의지의 현상의 일시적인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물자체(Ding an sich)로서는 어버이의 의지로 태어난 자의 의지도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물자체가 아니라 다만 현상만이 개체화의 원리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육체를 통하여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고, 새로운 육체를 낳음으로써 삶의 현상에 이르는 고뇌와 죽음도 새로운 육체에 이양된다.
그리고 여기 발생한 가능성을 완전히 인식하기만 하면 이 경우에 해탈(解脫)하려고 하더라도 전혀 허사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성교를 부끄러워하는 참된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다. 이 견해는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 다음과 같이 신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저마다(분명히 성욕의 충족에 지나지 않았다) 아담의 원죄에 관계가 있으며, 이에 의하여 고뇌와 죽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 점에 관해서는 근거율에 이르는 견해를 초월하여 인간의 이념을 인식하고 있다. 즉, 인간은 무수한 개인으로 분열되어 있어도, 인간의 통일은 모든 것을 결부시키는 생식이라는 유대에 의해 재생된다는 이념이다.
이런 견해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든 개인을 한편으로는 삶의 정점의 대표자인 아담과 동일시하고 따라서 죄[原罪]‧고뇌‧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의 인식에 의거하여 모든 개인이 구세주의 자기희생과 관련이 있으며, 구세주의 공덕에 의해 해탈하여 죄와 죽음, 즉 세계의 사슬에서 구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대표자인 구세주와도 동일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욕의 만족은 개인의 생명을 초월한 삶에의 의지의 긍정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이 견해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다른 예로서 프로셀피나에 대한 희랍신화가 있다. 그녀는 음부의 *석류열매를 먹지 않으면 여기서 몸을 뺄 수 없으며, 음부의 과일을 먹었기 때문에 완전히 여기에 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신화에 대한 괴테의 뛰어난 표현에 의해 이 신화의 진의(眞意)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프로셀피나가 석류열매를 먹자마자 파르체(운명의 3여신-譯註)의 보이지 않는 합창이 들려오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된다.
너는 우리의 것이다.
먹지만 않으면
너는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능금을 먹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3세기 사람으로 신앙‧철학의 수립을 시도했음-譯註)가 같은 형식과 같은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천국 때문에 모든 죄를 단념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이 세상에 매어 있지 않다.>
성욕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나 동물에게 최종목적이며 삶의 최고의 목표라는 사실로 보더라도 성욕이 삶을 결정적으로 가장 강력히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으로서는 자기보존이 첫째의 노력이지만, 일단 이것이 확보되면 이번에는 종족의 번식에 노력하게 된다.
단지 자연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는 이 이상의 것은 절대로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참된 본질은 삶에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자연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힘껏 인간을 번식시킨다. 그리하여 번식이 이루어지며, 자연은 개인에 대해서는 일단 그 목적을 이룬 셈이 된다. 자연은 개인이 사멸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에의 의지인 자연으로서는 다만 종족을 유지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개개인은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성욕 속에 자연의 내면적인 본질인 삶의 의지가 가장 강력히 나타나기 때문에 고대의 시인이나 철학자, 즉 헤시오도스나 파르메니데스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에로스는 최초의 창조자이며 만물의 근원이 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의 4 참조). 페레키데스는 ‘제우스는 세계를 지으려고 했을 때 에로스로 변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플라톤 著 《티마이오스》 참조). 이 대상에 대한 상세한 해명은 1857년 출간된 G.F. 세만의 《조물주로서의 애욕에 대하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작용과 조직이 가상(假象)의 세계인 인도인의 마야도 역시 ‘사랑’에 의해 설명되어 있다.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육체의 어느 부분보다도 특히 생식기는 인식이 아니라 단지 의지에 속해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의지는 인식에서 거의 독립되어 있다. 식물에는 단순한 자극만으로 재생에 봉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는 인식과는 무관한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의지가 맹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인간의 생식기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생식은 다만 새로운 개인에게 옮겨지는 재생이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 단지 다음의 생식력을 위한 배출물에 불과한 것처럼, 생식도 마찬가지로 다음의 생식력을 위한 재생이다.
그러므로 생식기는 의지의 초점(焦點)이며, 따라서 세계의 다른 측면인 표상으로서의 세계, 즉 인식의 대표인 두뇌와는 완전히 대립된 관계에 있다. 생식기에 통용되는 원칙은 생명을 유지하고 무한한 삶을 위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생식기는 희랍인에게 파르스로서, 인도의 링검(lingam)으로 숭배하였으며 양자는 모두가 의지의 긍정의 심벌이었다. 이와 반대로 인식은 의욕의 소멸, 자유에 의한 해탈, 이 세상의 극복 및 부정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 삶에의 의지가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즉 삶에의 의지가 죽음을 결코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은 삶 속에 이미 어느 정도의 관련을 갖고 있으며 삶에 속해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음과 직결되는 생식은 죽음과 완전히 평형을 이루고 있으며, 삶에의 의지에 대해서는 개인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기를 통하여 삶을 확보하고 보증해 주는 것이다.
이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인도인은 죽음의 신 시바에게 링검을 속성(屬性)으로서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입장에 서서 마음이 건전한 자는 두려움 없이 죽음에 직면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 책 후반에 상세히 기록하려고 하므로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고한 각오도 없이 이 입장에 서서 마지못해 삶을 긍정하고 있다. 이 삶을 긍정하는 본보기로서,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 언제나 고뇌에 시달리고 끝없는 생식과 죽음을 거듭하는 무수한 개인을 품고 있는 세계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난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지는 자기 돈을 지불하여 큰 비극과 희극을 상연하고, 자기 자신이 연극의 관객으로 앉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가, 그 현상인 의지가 그러한 것이며, 또 그러한 것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뇌가 정당화되는 까닭은 의지가 현상에 대해서 자기를 긍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의지 자체의 긍정도 의지가 고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정당화되어 형평을 얻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원한 정의에 대하여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된다.
*괴테의 詩에는 석류가 아니라 사과로 되어 있다.
2) 種族을 위한 희생
해달은 쫓기면 새끼를 물 속에 집어던진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에 오를 때에도 새끼를 몸으로 뒤덮고 있으므로 새끼만은 구할지 모르나 자기 자신은 사냥꾼의 화살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미고래를 불러들이기 위해 새끼고래를 잡는 경우도 있다. 새끼고래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은 어미고래는 몇 번씩 작살을 맞아도 새끼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스코아 즈비, 《포경일기(捕鯨日記)》 참조).
뉴질랜드 근처에 있는 삼왕도(三王島)에는 바다의 코끼리라고 부르는 거대한 바다표범이 살고 있다. 그들은 섬의 주위를 규칙적으로 떼지어 헤엄치며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사는데,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헤엄칠 때에는 독특한 일종의 전술을 쓰는 것이었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일 때에는 섬에 올라오는데, 그 기간은 7~8주일이나 되었다. 그리고 모든 수컷들은 암컷 주위를 에워싸고 암컷이 시장기를 참지 못해 바다로 들어가는 것조차 막으려고 한다.
그래도 암컷이 바다에 들어가려고 하면 수컷들은 물면서 방해한다. 이리하여 암컷은 모두가 7~8주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깡마르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새끼들이 헤엄을 잘 칠 때까지 바다에도 들어가지 않고 반복해서 밀거나 깨무는 실습교육에 의해 필요한 전술을 새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도 모든 의지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버이의 애정이 동물을 영리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들오리‧꾀꼬리, 그 밖의 많은 조류는 사냥꾼이 둥지에 가까이 다가오면 그 발머리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고, 마치 날개에 상처를 입은 것처럼 퍼덕이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데, 이것도 사냥꾼의 주의를 끌면서 새끼들을 위험에서 멀리 떠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종달새는 둥지를 향해 뛰어오는 개의 주의를 몸으로 분산시키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암사슴은 사냥꾼에게 새끼가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붙은 집 속으로 뛰어든다. 델프트 시(市)에서는 큰 화재가 났을 때 황새가 아직 날 수 없는 새끼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다가 둥지 속에서 타죽었다(H. 유니우스 著 《네덜란드 소식》). 딱새의 일종은 무서운 용기를 내어 둥지를 지키면서 솔개를 상대로 싸우는 경우도 있다. 개미를 두 토막으로 잘랐더니, 전반부만 여전히 번데기를 안전한 곳에 옮기는 광경을 본 사람도 있다. 암캐는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자 다 죽어가면서도 태아가 있는 곳까지 기어갔는데, 끝내 태아를 뺏어 버리자 그때서야 비로소 크게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브아다하 著 《경험의 學으로서의 생리학》).
3) 意志의 不滅
가을이 되자 곤충들의 자그마한 세계를 관찰하고, 어떤 종류의 곤충이 동면을 하기 알맞은 장소를 마련하는 광경이나, 다른 종류의 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완전히 변모한 벌레로서 눈뜰 수 있도록 누에고치를 만들고 있는 모양, 그리고 대다수의 곤충들이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정을 누리도록 염원하면서 알에서 새로운 유충이 여러 마리 태어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알에 알맞는 침상을 준비하는 광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광경이야말로 대체로 잠과 죽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잠이든 죽음이든 생존을 그처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위대한 자연의 불사(不死)를 가르쳐 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벌레들은 조심스럽게 굴이나 둥지를 마련하여 알을 그 속에 넣고 돌아오는 봄에 새로 태어날 애벌레를 위해 식량을 준비하고 자기 자신은 편안히 죽어간다. 이와 같은 곤충의 조심성은 인간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튿날 아침에 입을 의복이나 먹을 식량을 준비해 놓고 나서 천천히 잠자리에 드는, 세심한 주의를 하는 것과 똑같다. 마치 잠자리에 드는 인간이 이튿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죽는 곤충이 이듬해 봄에 태어나는 유충과 동일하지 않다면 곤충으로서는 구태여 이처럼 정성이 깃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을 한 후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종족 인류에게로 돌아와서 시선을 먼 미래로 돌리면, 몇백만이라는 인류가 제각기 다른 몸가짐을 하고 기묘한 풍속이나 습관을 몸에 익히며 살아갈 장래의 세계를 역력히 보는 것처럼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동안에 ‘이 모든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들은 현재 어디 있는가?’, ‘현재는 숨기고 있지만 와야 할 세대를, 그리고 세계를 잉태하고 있는 무(無)의 풍요한 자궁은 어디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하였다고 치자.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진지한 해답을 웃으면서 할 수는 없을까?
와야 할 세대의 사람이 지금 있는 곳은 그곳만의 본래의 장소이며, 장래에는 본래의 장소가 되는 현재와 이 현재가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질문을 한 너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너는 나뭇잎이 가을이면 시들어서 땅 위에 떨어지려고 할 때 자기의 멸망을 탄식하고, 새해 봄에 나무를 에워싸는 새 잎사귀를 연상함으로써 자기를 위로하려고는 들지 않고 ‘새로운 잎사귀는 내가 아니다. 새로운 잎사귀는 전혀 다른 잎사귀다!’ 하고 탄식을 하는 것과 꼭 같다. 얼마나 어리석은 나뭇잎인가! 너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다른 잎사귀는 어디서 오는가? 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그 무의심연은 어디에 있는가? 너 자신의 본질, 생존에 대한 갈망으로 충만해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를 인식하라. 그리고 나뭇잎의 발생이나 시드는 것과는 관계없이, 잎사귀의 모든 세대를 통하여 언제나 동일한 수목이 내적인 추진력을 인식하라. 그리고 이러한 말도 기억하라.
나뭇잎과 똑같이
인간의 세대도 바뀌게 마련이다.
지금 나의 주위를 날고 있는 파리가 저녁에 잠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날아다니는 것과, 저녁 때 죽어서 이듬해 봄에 그 파리알에서 태어난 다른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똑같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건을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로 간주하는 인식은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타당할 수 없는 상대적인 인식, 물자체(物自體)가 아닌 현상(現象)에 대한 인식이다. 파리는 내일 또 여기에 있다. 파리에게 겨울과 밤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겠는가? 부아다하의 《 생리학(生理學)》 제 1권에 이런 것이 씌어 있다.
오전 10시까지는 약제(藥劑) 속에 적충류(滴蟲類)가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오가 가까워오자 액체 속에는 적충류가 잔뜩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녁 때에는 모두 죽어버리고 이튿날 아침에 새로운 것이 발생하고 있었다. 니치 씨는 이 광경을 6일간이나 관찰하였다.
4) 눈짓
생성과 멸망이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본질은 이와 같은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란 전혀 없으며, 따라서 불멸하게 마련이다. 생존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현실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종말이 없다는 사상만큼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의하면, 어떠한 시점을 취하여도 자그마한 모기에서 비롯하여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의 종족은 어느 하나 결원(缺員)이 없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들 동물은 이미 몇천 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다시 태어나고 있지만 종전과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자기들 이전에 생존한 자기의 동지들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종족이다. 그리고 종족은 멸망하는 일이 없다. 자기들도 종족과 동일하다는 의식이 있기만 하다면 개체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삶에의 의지는 무한한 현재 속에 현상된다. 그것은 이 무한의 현재야말로 종족의 삶의 형식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코 노화하지 않고 언제나 싱싱한 채로 존속되기 때문이다. 무한한 현재에 있어서의 죽음은 개인의 수면과 같고 눈에 있어서는 윙크와 같은 것이다.
인도의 제신(諸神)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경우에도 윙크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제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밤이 찾아오는 것과 동시에 세계는 시계(視界)에서 사라져버리지만, 결코 눈깜짝할 사이에도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동물은 죽음에 의해 언뜻보아 소멸하여 버린 것 같지만 그 참된 본질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존속된다. 여기서 무한한 속도에 의해 진동하는 죽음과 탄생의 교체를 생각해 본다면, 마치 폭포 위에 서는 무지개처럼 사물의 본질의 지속적인 이념인 의지의 객체화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간 위에서의 불사(不死)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부패가 수없이 누적되어 왔어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물질의 원자(原子), 더구나 물질의 내적인 본질은 조금도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순간이나 씩씩하게 ‘죽음이나 부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외칠 수 있다.
‘나는 이미 이런 것을 원치 않는다’하고 이 불사(不死)의 유희에 대하여 언젠가는 마음 속으로 호소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여기서 말할 단계가 못된다.
5) 현재에 대하여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과거나 죽은 후의 미래를 탐구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의지가 현상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의 현재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는 의지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의지도 현재에서 떠나지 않는다.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족하고,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자는 확고한 신념에 의거하여 삶을 무한으로 보고 죽음의 공포를 미망이라고 해서 배격한다. ‘죽음은 현재를 소멸시킨다. 현재가 포함되지 않는 시간도 있다’는 당치않은 공포는 넌센스라고 해서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미망은 시간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지만, 한편 공간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기가 우연히 차지하게 된 지구상의 지점을 지구의 상부에 있고, 그 이외의 장소를 모두 하부에 있다고 공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현재를 자기 개성에 관련시켜, 이와 함께 모든 현재는 소멸되며 또한 과거나 미래도 현재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상의 도처에 상부가 있는 것처럼 모든 삶의 형식도 현재이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에게서 현재를 앗아간다고 해서 그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행히 지금 우연히 그 상부에 있으니까 망정이지 언젠가는 둥근 지구에서 굴러떨어지지나 않을까 해서 걱정하는 것보다 현명하다고 볼 수 없다.
의지의 객체화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현실이다. 이것은 연장이 없는 점으로서 무한한 시간을 둘로 절단하여 서늘한 저녁이 없는, 언제나 계속되는 대낮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굳건히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마치 밤에 가라앉았다고는 하지만 실은 휴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열을 뿜고 있는 태양의 참된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죽음을 자기의 멸망이라고 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태양이 지는 저녁 때에 ‘슬픈일이다. 나는 영원의 밤으로 가라앉아야 한다’고 한탄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와 반대의 말도 할 수 있다. 삶을 진심으로 원하고 삶을 긍정하면서도 그 무거운 짐에 억눌려 힘들어하는 자는 그 괴로움을 혐오하고, 특히 자기에게 닥치는 가혹한 운명을 헤쳐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할 수 없으며, 자살에 의해 구제될 수도 없다. 다만 거짓 빛 속에 떠도는 어둠, 차디찬 음부(陰府)가 마치 안전한 항구처럼 유인해 올 뿐이다.
대지는 아침에서 밤으로 회전하고, 개인은 죽어간다. 그러나 태양은 쉴 새 없이 영원히 주유로 불타고 있다. 삶에의 의지로 보면 삶은 확실한 것이다. 설사 시간 속에 발생했다가 소멸하는 이념의 현상인 개인이 허망한 꿈으로 비유되더라도 삶의 형식은 종말이 없는 현재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더라도 자살은 무의미한 어리석은 행위로 생각된다. 우리의 관찰을 다시 계속해 나간다면, 자살은 더욱 불리한 빛 속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제 1권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은 완전한, 파괴되지 않는 성격의 것이며, 영원에서 영원을 향해 지속되네. 우리의 정신은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불완전한 눈에는 마치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결코 가라앉지 않고 끊임없이 빛나는 태양과 비슷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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