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利己와 加虐의 心理에 대하여
1) 적극적인 고뇌와 소극적인 행복
우리에게 직접 주어져 있는 것은 언제나 단지 결핍, 즉 고통이다. 그 반면에 만족이나 향락은 단지 그것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소멸된 그때까지의 고통이나 결핍을 상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의식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실제로 손아귀에 넣은 재산이나 이득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내 것이라는 자의식도 갖지 않으며, 또한 그 가치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러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이득이나 재산이 언제나 고통을 방해한다는 소극적인 역할을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없어져야만 비로소 우리는 그 진가(眞價)를 통감한다. 왜냐하면 결핍‧부족‧고뇌는 적극적으로 직접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미 극복된 재난‧질병‧곤궁 등을 상기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이런 일들만이 현재 얻은 여러가지 이득을 즐기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려는 욕망의 형식인 이기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이 이기주의의 입장에 설 때, 남의 고통을 바라보거나 그 모습을 아는 것은 위에서 말한 이유에서 우리를 만족시켜 주고 즐겁게 해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제 2권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네가 안전한 기슭에서,
빗발치는 성난 물결 속에 멀리 전개되는
재난과 노고를 바라볼 때,
네 마음은 기쁨에 젖는다.
그것은 남의 재난이
너를 얼빠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그러나 다시 한걸음 나아가 자기가 행복한 상태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얻게 되는 이런 종류의 기쁨은 본래부터 적극적인 악의의 원천인 것도 사실이다.
모든 행복은 단지 소극적일 뿐 적극적인 것이 아니며, 그 때문에 행복을 손에 넣어도 계속해서 만족이나 기쁘믈 얻을 수 없고 고작해야 고통이나 결핍에서 해방될 뿐이다. 그리고 행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계속하여 새로운 고통을 찾아내지 못하면 무기력이나 터무니없는 동경 혹은 권태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세상의 삶의 본질을 충실하게 반영한 거울인 예술, 특히 시(詩) 속에서 그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모든 서사시나 연극은 언제나 오직 행복을 손에 넣으려는 투쟁‧노력‧전쟁을 다루고 있을 뿐 영속되고 완성된 행복 자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문예작품은 주인공들을 수많은 고난과 위험을 통하여 목표에까지 이끌어 간다.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즉시 막을 내려 버린다.
왜냐하면 문예작품으로서는 주인공이 이곳에서야말로 행복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황홀한 목표도 실은 주인공을 기만하는데 불과하고, 이 목표에 도달한 주인공은 결코 전보다 더 나은 처지가 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 보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취하더라도 참으로 영속되는 행복은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이런 것은 예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목가(牧歌)의 목적은 본래 이러한 행복을 묘사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가는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목가를 쓰려고 애쓰던 시인들은 곧 서사시적인 필치를 사용하게 되지만, 일단 완성된 것은 보잘것 없는 고뇌, 작은 기쁨, 그리고 사소한 노고(勞苦)를 빚어서 만든 무의미한 작품에 불과하다. 대체로 이런 결과를 빚어내기 마련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목가가 단지 사물을 기술하는 데 그치는 시, 자연미를 묘사하기만 하는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자연미의 묘사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실상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유일한 인식이다. 본래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은 이에 앞서 괴로움과 결핍이 있게 마련이며, 또한 행복을 얻은 후에도 후회‧고뇌‧허망‧포만 등의 느낌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미에 접할 수 있는 행복은 아주 순수한 것이다. 하긴 이 순수한 행복은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극히 한순간을 충족시킬 뿐이다.
우리는 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 음악에서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음악의 선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한 의지가 일반적으로 표현된 내면적인 역사를-깊은 삶, 동경과 고락, 마음의 간만(干滿) 등을 다시 인식할 수 있다. 선율은 언제나 기음(基音)으로부터의 이탈이며,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미로를 통하여 가장 고뇌에 충만한 불협화음에 이르고, 드디어 의지의 만족, 안도감을 표현하는 기음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기음으로 그냥 있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기음에 오래 머물러 있다는 것은 단지 불쾌한 아무 의미도 없는 단조로움을 느끼게 할 뿐 권태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찰이 분명히 드러내려고 한 것, 즉 지속적인 만족이란 얻을 수 없고 모든 행복은 소극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생활도 의지의 개체화이지만 의지는 목표도 종말도 없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 종말이 없다는 분명한 증거를 우리는 의지의 모든 현상의 온갖 부분에 나타나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일반적인 형식은 종말이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모든 현상 중에서 가장 완성된 인간의 생활과 노력에 이르기까지 간파할 수 있다. 특히 인간생활의 세 가지 정점을 이론적으로 고찰하고, 이것을 현실의 인간생활의 요소로서 관찰하는 것도 가능하다.
첫째로 강한 의욕, 격심한 정열이 있다. 이것은 역사상의 큰 인물 속에 나타나며 서사시나 연극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무대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대상의 크기는 그 속에서 의지가 움직이는 정도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며, 외부적인 여러 가지 관계에 의해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제 2의 정점은, 인식을 의지에의 봉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인식과 이념을 파악하는, 즉 천재의 생활이다. 끝으로 제 3의 정점은 의지의 최대의 혼수상태, 의지에 얽매인 인식, 터무니없는 동경, 그리고 삶을 고갈시키는 권태이다.
개인생활이 이 세 가지 정점의 어느 하나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고, 거의 모두가 이 세 정점이 매우 가볍게, 그리고 흔들리는 자세로 접근할 뿐이다. 개인생활은 사소한 대상을 적당히 원하거나 항상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권태에서 벗어나고 있는 데 불과하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생활의 움직임은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실제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의미도 내용도 없는 것이며, 또한 내부적인 감각으로 보더라도 어리석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활은 죽을 때까지 네 세대를 통하여 매우 시시한 일만 생각하거나, 천박한 동경에 사로잡혀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활은 마치 태엽이 감겨 있으나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똑딱거리는 시계와 같은 것이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간의 삶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겨진다. 그것도 지금까지 무한히 연주를 되풀이해 온 곡목(曲目)을 한 번 더 새로 되풀이하기 위해 설사 다소 변주(變奏)가 있더라도 오직 주제도 박자도 천편일률적으로 되풀이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개인, 모든 인간의 얼굴, 그리고 그 생애는 무한한 자연정신의 삶을 고집하려는 의지의 일장의 꿈에 불과하다. 의지가 심심풀이로 그 무한한 화면(畵面)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위에 휘갈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의지는 인간의 삶을 무한한 시간에서 보면 극히 보잘것없는 한동안 만을 종속시키지만, 이 삶도 새로운 삶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곧 사라진다. 그러나 이 점에 바로 삶의 중대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의지가 마음내키는 대로 휘두른 그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림들이 모두가 삶에의 의지에 의해 여러 가지 심한 고뇌를 강요당하며, 나중에는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죽음-드디어 모습을 나타낸 죽음에 의해 보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체를 보았을 때 무작정 엄숙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개인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보았을 경우에 더구나 그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만을 살펴보더라도 본질적으로 언제나 하나의 비극이다. 그러나 개인생활을 개별적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면 이것은 바로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상생활의 움직임이나 고민, 언제나 직면하게 마련인 악착같은 남의 비웃음, 주일마다 고개를 치켜드는 욕망과 공포, 그때그때 단순한 동기로 움직이고 있는 우연에 의해 발생되는 시간마다의 재앙,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희극의 한 장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반면에 욕망이 언제나 달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노력해도 보람이 없고, 희망이 운명에 의해 무자비하게 짓밟히며, 생애를 통하여 오류가 뒤따르고, 게다가 고뇌가 해마다 더 깊어지며,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마치 운명이 우리의 불행을 끊임없이 비웃는 듯 우리의 생활은 비극의 모든 고약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우리로서는 결코 비극의 등장인물과 같은 위엄성을 지니지 못하고 일상생활의 세세한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품위가 없는 희극배우와 같은 성격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재앙이 뿌리깊게 인간의 생활을 점령하고 언제나 불안과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단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정신의 충족을 누릴 수 없고 생존의 무상함과 공허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걱정이 없어지면 곧 나타나는 권태감이 추방되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걱정이나 비애가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부과하는 여러 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은 이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도 않고 형태와 형식은 다르지만 여러가지 미신이나 상상에서 비롯되는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인간은 현실생활이 일단 안정되어도 이것을 조금도 즐길 수 없으며, 무작정 이러한 미신과 상상의 세계에 온갖 수단을 다하여 몰두함으로써 헛되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다. 이러한 경향은 본래 풍토가 온화하고 땅이 기름진 민족 사이에 특히 성행한다. 예컨대 인도인, 다음에 희랍인, 로마인 그리고 이탈리아인이나 스페인인 사이에 이러한 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모습을 닮은 악마나 신들, 성인을 만들어 이러한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재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며 사원(寺阮)을 지어 기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기원이 성취되면 순례를 하거나 공손히 예배를 드리고, 신상(神像)을 눈부시게 장식하기도 한다. 신들이나 영(靈)에의 봉사는 도처에서 현실생활에 파고들 뿐만 아니라 그 생활을 더욱 모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즉,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신들이나 영의 존재의 반작용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존재와의 교섭은 생활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언제나 희망을 갖게 하며, 환상의 매력으로 하여 현실세계의 사물보다 더 큰 관심과 흥미를 자아내는 경우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존재야말로 한편으로는 원조(援助)와 구원을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과 심심풀이를 요구하는 인간의 이중의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재난을 만나 위험을 당하였을 경우에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활용하는 대신에 기도나 재물을 바치면서 허비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설령 원조와 구원을 바라던 첫째의 욕구가 때때로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더라도 인간은 상상에서 오는 영계(靈界)와 공상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인간의 제 2의 욕구인 심심풀이를 더욱 일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무작정 경멸할 수 없는 모든 미신이 주는 이득이기도 하다.
2) 이기주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이 양자에 의해, 그리고 양자 속에서만 개체화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다양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의지에서 비롯된 인간의 본질적인 형식이다. 이리하여 세계의 도처에서 의지는 개개인의 다양성 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물자체(物自體)로서의 의지는 아니다. 다만 의지의 현상에 해당된다. 의지는 그 현상 속에 전체로서 분할되지 않고 존재하며, 자기 주의에 자기 자신의 본질이 무수히 되풀이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는 참으로 현실의 것인 자기 자신의 본질을 다만 직접 자기 내부에서만 발견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만물은 자기를 위해 있으며,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그리고 적어도 지배하기를 원하며 자기에게 대적하는 것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또한 인식하는 존재에 있어서도 개인이 인식하려는 주관의 소유자이며, 이 인식하는 주관이 세계의 소유자이다. 즉, 개인에게는 자기 밖에 있는 모든 자연이 다른 개인들도 포함하여, 다만 그 개인의 표상 속에 존재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자연을 단지 그의 표상으로서, 즉 간접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그 사람 자신의 본질과 생애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의식한다. 그것은 개인에게 그 사람의 의식과 함께 세계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의식의 소멸과 함께 세계가 있건 없건 아무래도 무방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의식하는 개인은 진실한 삶에의 의지나, 혹은 세계 자체가 된다. 그리고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조건은 마크로코스모스(大宇宙)와 마찬가지로 평가해야 할 미크로코스모스(小宇宙)이다.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연 자신이 개인에게 이 인식을 분명히 직접 부여한다. 이에 관한 인식은 모든 반성과 함께 전혀 무연(無緣)하다.
이렇게 얻은 두 개의 필연적인 규정으로 하여 무한한 세계에서도 매우 보잘것 없는, 거의 무(無)와 다름없는 작은 개인이 자기를 세계의 중심점으로 삼고 있을 뿐더러, 자기의 존재와 행복을 다른 모든 것에 앞질러 걱정하고, 또한 큰 바다 속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연장시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세계를 멸망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자연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의 만물에 있어서 본질적인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이 이기주의에 의해 의지는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인 투쟁에서 사나운 모습을 취하게 된다. 이기주의가 어떻게 존재하고 존속되느냐 하면, 그것은 대우주와 소우주가 대립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지의 객체화(客體化)가 「개체화(個體化)의 원리」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의지가 무수한 개인 속에 같은 방법으로 그리고 「의지와 표상」의 두 측면으로부터 뚜렷하고 완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에게 자기 자신은 완전한 의지, 완전한 표상으로 직접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타인은 다만 그 사람의 표상으로서 주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사람으로서는 자기의 존재나 생존이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가 죽으면 세계는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자기와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가 없는 한 이웃의 죽음을 접해도 거의 무관심하다. 최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의식 속에서는 인식하는 힘이나 고통이나 기쁨과 마찬가지로 이기주의도 최고도에 도달하여, 이기주의에서 일어나는 개인끼리의 투쟁은 사나운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일의 대소를 불문하고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때로는 폭군‧악한의 생활이나 전쟁과 같은 사나운 장면에서, 희극의 테마에서 라 로슈코프가 추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여 표현한 것처럼, 특히 교만이나 허영심으로서 등장하는 우스운 장면에서 이 이기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기주의가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한 집단의 사람들이 모든 법률이나 질서에서 해방된 직후의 일이다. 이 경우에는 홉스가 그의 저서 《시민에 대하여》의 제 1장에서 교묘하게 묘사한 것처럼 만물에 대한 인간의 투쟁상이 분명히 밝혀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단순히 자기가 가지고 싶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의 사소한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 전체나 재산까지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도 종종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이기주의의 최고의 형태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이기주의의 출현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면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고 피해를 입히려고 하는 철두철미한 악의가 극도에 이르게 한다.
모든 삶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괴로움의 원천은 아레스(불화의 신)로서, 현실에는 결정적인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싸움이고, 삶에의 의지가 그 속에 깊숙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며, 개체화의 원리에 의해 사람의 눈에 뜨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순의 표현이다. 이 광경을 직접 분명하게 눈앞에 보기 위한 잔인한 방법은 동물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의 원천이 고갈되는 일은 없다.
3) 惡人의 괴로움
심한 괴로움은 터무니없는 욕망, 큰 의욕과는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큰 악인은 그 얼굴 표정에서부터 마음속의 고민이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가령 그들이 모든 외면적인 행복을 획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인 환희에 젖어있다든가, 또는 일부러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한 언제나 불행한 표정을 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내심(內心)의 고뇌에서 생기는 것은 단순한 이기주의에 입각한 희열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데도 남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심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악의이며, 때에 따라서는 잔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악의를 품는 자에게는 남의 괴로움은 자기가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인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하여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겠다. 인간은 의지의 현상이며 분명한 인식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인식이 부여해 주는 의지의 만족에 대한 가능성이 머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실제로 느끼는 정도의 의지의 충족에 대하여는 언제나 불만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선망(羨望)이 생기게 된다. 모든 결핍감은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무한히 증진하게 마련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도 역시 같은 결핍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의 결핍에 대한 감각도 완화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재난은 우리를 그다지 비참하게 느끼게 하지 않는다. 기후의 조건이나 나라 전체에 걸친 재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의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을 생각하면 고통이 완화되고, 타인의 고통을 보면 자기 자신의 고통도 가벼워진다.
가령 여기에 결심한 의지의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이기주의의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탐욕을 부려 모든 것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만족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설사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욕망이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룰 수는 없다. 즉, 악착같은 의지의 충동을 완전히 진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는 욕망의 만족이란 단지 욕망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며, 설사 욕망의 하나를 만족시켰다고 하더라도 곧 다른 욕망으로 말미암아 시달림을 받게 되며, 한편 욕망의 씨앗이 모두 동강이 났다고 하더라도 의지의 충동 자체는 인식된 동기가 없어도 그대로 남아 구할 길 없는 고통으로서 나타나는 사나운 공허감에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본래 평범한 의욕을 갖고 있는 자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울적한 느낌을 갖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의지의 현상이 터무니없이 악의에까지 발전한 사람들에게도 필연적으로 과도한 내면적인 고뇌, 영원한 불안,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보고 자기의 고통을 진정시키려고 한다. 즉, 그로서는 타인의 고통 자체가 목적이 되어 그 모습을 보고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리하여 역사가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아프리카의 추장이나 로베스피에르 등에서 자주 보여준, 피에 주린 문자 그대로의 잔인성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4) 괴로움을 주는 자와 괴로움을 당하는 자
괴로움을 주는 자와 괴로움을 당하는 자는 동일하다. 괴로움을 주는 자가 자기는 남에게 주는 고통과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한편 고통을 당하는 자가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양자가 모두 잘못이다. 양자가 다 눈을 올바로 뜨고 보면 남에게 고통을 준 자는 자기가 이 넓은 세사에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자기로서는 그 잘못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크게 시달림을 당하는 자가 어찌하여 이토록 많이 발생하였는가 하고 섣불리 걱정할 것이다.
한편, 괴로움을 당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또는 현재 있는 악이 의지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이 의지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장본인의 본질이라 그 사람 속에도 나타나 있고, 그는 이러한 의지가 가져온 현상을 통하여 이러한 의지를 긍정함으로써 모든 고통을 자기가 당하며, 또한 그가 이 의지인 이상 모든 고통을 참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의거하여 예감에 넘치던 시인 칼데론(1600~1681, 스페인의 세계적인 극작가-譯註)은 <인생의 꿈>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영원한 규범에 의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한 어찌 탄생이 죄가 아닐 수 있겠는가? 칼데론은 또한 원죄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 시구로 표현한 것이다.
5) 꼭두각시
만일 객관적인 판단이 통용된다면, 노령(老齡)‧결핍‧질병 등에 의해 시달림을 받은 나머지 짓밟혀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일찌감치 갈 데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이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마음속으로 기구하고 있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 대신 삶에의 충동‧욕망‧살려고 하는 의도로서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다.
이것은 식물을 육성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삶에의 욕망은 인간의 세계라는 인형의 연극무대 위에 수평으로 펼쳐져 있고, 또한 때로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로 인형을 늘어뜨리고 있는 그물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언뜻 보면 발밑에 있는 무대(객관적인 삶의 가치)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물이 약해지면 인형의 자세는 무너지고, 이 그물이 끊어지면 밑의 무대가 인형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므로 인형은 무대 위에 떨어지고 만다.
즉, 삶에의 욕망이 쇠퇴하는 것은 신경질, 격심한 울화, 우울로 나타나 삶에의 욕망은 소멸되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자살하고 싶은 기분은 전혀 보잘것없는 계기가 있을 때, 아니 계기가 없이 단지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경우에도 일어난다. 이 경우에 인간은 자기를 사멸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투쟁하게 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남을 멸망케 한다는 목적을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한편, 삶에 집착하거나 삶을 위해 우왕좌왕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자유로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본래는 누구나 쉬고 싶어하지만 재난과 권태에 얻어맞는 데서 일어난다. 이 채찍이야말로 팽이의 운동을 지탱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느 개인을 보더라도 강요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게으름뱅이인 인간은 누구나 고요를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전진하고 있는 힘이 멈춰서기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며, 마치 태양에서 떨어져 들어갈 수 없는 별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6) 乞人의 꿈
성난 파도가 울부짖는 끝없는 바다에서 작은 배에 탄 사공이 자기의 보잘것없는 배를 신뢰하는 것처럼, 고뇌로 충만한 세상에서 인간은 「개체화의 원리」, 혹은 개인이 현상으로서의 사물을 인식하는 형식에 온전히 몸을 맡겨 이것을 신뢰하여 안심하고 살아가고 있다.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갖고 곳곳에 고뇌로 가득 찬 끝없는 세계는 인간과는 무관한 것, 아니 하나의 우화(寓話)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 있어서 거의 보잘것없는 그 인간의 존재나 극히 짧은 현재, 그야말로 순간적인 기쁨만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보다 우수한 인식에 눈을 뜨지 못하는 한 인간은 이러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실제로 눈을 뜨지 않아도 인간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의식은,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지닌 저 고뇌에 충만한 끝없는 세계는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더구나 그 세계에 직면하면 개체화의 원리는 인간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예감하게 한다. 이 예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아니, 아마도 현명한 동물에게도) 공통된 예로서 제거할 수 없는 공포심이 생기게 된다. 이 공포심은 인간이 어떤 우연에 의해 개체화의 원리를 신뢰할 수 없게 되고, 한편 근거울이 그 어떤 형태 속에서 예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갑자기 인간에게 밀어닥치게 마련이다. 그것은 아무런 원인도 없이 사물이 변화할 때,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을 때, 무엇인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현재 나타났을 때, 또한 먼 후일에 일어날 일이 목전에 닥쳐왔을 경우 등이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몹시 놀라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인간 개인개인을 다른 세계에서 분리하여 지탱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하는 형식이 갑자기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인과 그 밖의 세계와의 분리는 바로 현실 속에서만의 일로서, 물자체(物自體)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 점에 바로 영원한 정의가 의존하고 있다.
개인과 그 밖의 세계와의 분리만이 인류를 재앙에서 보호하고 즐거움을 부여해 준다. 인간은 단순한 현상이며, 각자가 타인과 다른 것, 어느 누구도 남이 짊어지고 있는 괴로움과는 관계없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현상의 형식에, 즉 개체화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사물의 참된 본질에서 본다면 누구라도 삶에 대한 집요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즉 전력을 기울여 삶을 긍정하고 있는 한 세계의 모든 괴로움은 사실은 나 자신의 괴로움이며, 단지 가능성이 있는 괴로움이라 할지라도 모두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인 괴로움이라고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체화의 원리를 간파한 인식에 있어서는 일시적인 행복한 생활 등은 우연의 덕택이다. 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로어하고 있는 가운데서 머리를 써서 우연히 박탈한 것이다. 개인의 일시적인 행복 등은 다음과 같은 걸인의 꿈과 같은 것이다. 이 걸인은 꿈속에서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잠을 깨었을 때 극히 터무니없는 미망이 그를 생애의 고뇌로부터 떠나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인문철학 > 쇼펜하우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性愛의 哲理 (0) | 2019.09.21 |
---|---|
5. 不滅의 意志에 대하여 (0) | 2019.09.21 |
3. 삶의 意味 (0) | 2019.09.21 |
2. 苦惱의 삶에 대하여 (0) | 2019.09.21 |
1. 表象과 意志에 대하여 (0) | 2019.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