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2. 苦惱의 삶에 대하여

rainbow3 2019. 9. 21. 17:42


2. 苦惱의 삶에 대하여

 

1) 생존은 苦惱(고뇌)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대체로 말해 인간의 위대한 특권인 이성을 중요한 실리적인 목적에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소중한, 그리고 높이 평가할 만한 시도이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이성을 모든 생명에 따르는 고뇌와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은 초연한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너는 얼마나 경쾌한 기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욕망도, 그다지 쓸모없는 사물에 대한 두려움도 기대도 너를 괴롭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이렇게 지침을 세우고 인간에게 최고의 위엄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다른 동물과 완전히 대립되어 있다. 스토아학파의 주장은 바로 이런 의미로 해석된다. 나도 스토아학파의 윤리에 대하여는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럼 이성이란 무엇이며 이성에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히 스토아학파에서 주장하는 인생의 목적은 이성을 활용하여 단지 이성적인 윤리에 따르기만 하면 어느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

 

경험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흔히 실천적 철학자라고 부르는 저 온전히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 호칭은 적절하다. 본래의, 즉 이론적인 철학자는 삶을 개념 속에 옮겨 놓은 것과는 달리 그들은 그 개념을 삶 속에 옮겨 놓고 있으니까-는 가장 행복한 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이 완벽하여 이성을 실제로 잘 활용함으로써 삶에 따르는 모든 부담이나 고통이 해소되고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은 단언하기 어렵다. 행복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부족한 점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오히려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산다는 것, 즉 흔히 사용되고 있는 「복된 생활」이라는 말 자체에 완전한 모순이 숨어있다. 내가 지금부터 서술할 내용을 끝까지 읽고 난 사람은 반드시 그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 모순은 순수이성의 윤리학 속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복된 생활(이것이 언제나 그들의 윤리학의 근본사상이다)에의 지침 속에서 자살을 권장하고 있으니 말이다(눈부신 장식물과 가구에 에워싸인 동양의 전제군주들이 독이 든 값진 병을 옆에 놓아 두는 것처럼). 그들이 자살을 권장할 때는 육체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어떠한 철학적인 가르침이나 결론을 배워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그들의 유일한 목적인 행복도 이미 바랄 수 없게 되고 죽음에 의해서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게 되었을 경우다. 그러나 자살을 하려면 일반 약품을 마실 경우와 마찬가지로 태연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스토아학파의 윤리학과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직접 덕(德) 자체를 참된 목적으로 삼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끊기를 원치 않는 가르침과의 대립이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하긴 이 덕을 목적으로 하는 가르침은 어찌하여 자살을 비난해야 하느냐 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고 갖은 이론을 들어 자기주장을 내세우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의견의 대립은 본질적으로는 단지 행복론의 한 특수형태에 지나지 않는 스토아학파와, 덕을 목적으로 하는 가르침 사이에 놓인 본질적인 근본원칙에 관계되는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양자는 때때로 같은 결론을 내려 비슷한 점도 상당히 엿보인다. 그것은 어쨌든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이 근본적인 사고방식에서 개재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내적인 모순은 스토아학파의 현인(賢人)들이 부르짖고 있는 이상(理想)이 결코 생명력은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시적(詩的)인 진실성을 지니지 못하고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는 모델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도 나타나 있다.

 

또한 스토아학파의 현인들 자신이 인간의 본질과는 완전히 대립되어 결코 분명히 표상되지 못한 그들의 현지(現知), 즉 완전한 안정과 만족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비교해 보면 옛 인도의 지혜가 우리에게 전해 준 세계 극복자나 자유의지에 의거한 속죄자 및 깊은 생명력과 위대한 시적 진실과 최고의 의미를 지니고 최고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완전한 덕과 거룩함과 숭고함을 보여준 저 뛰어난 존재인 기독교의 구세주 등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리하여 우리는 인간의 존재 속에 의지의 본질적인 운명을 관찰해 보고자 한다. 아마도 동물의 생활 속에도 아직 미미하고 여러 가지 뉘앙스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의 경우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 있음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에서도 본질적으로 모든 삶이 괴로움에 충만해 있음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단계에 있어서 의지는 개인으로서 나타난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기가 투입된 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것과 대립되는 존재이다.

 

이 거대한 것은 끝이 없다. 인간은 단지 상대적인 존재라 그 존재가 언제부터 있으며 또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분명히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나 존속되는 시간은 무한한 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의 본질은 오직 과거에 침잠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점점 끌려가고 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과거의 생활은 그 의지가 그 사람 속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에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미 완전히 결말이 난 것, 죽어 버린 것이며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과거의 생활이 괴로웠다거나, 혹은 즐거웠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그 사람의 손아귀를 거쳐서 과거로 과거로 옮아간다. 장래는 매우 불확실할 뿐더러 짧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 인간의 존재는 이미 형식상으로만 보더라도 현재의 죽은 과거의 탈락, 끊임없는 사멸인 것이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더라도 우리의 발길이 쓰러지려는 것을 단지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데 불과한 것처럼, 우리의 육체의 생활이 끊임없이 언제나 죽음을 방지하고 있는 것, 즉 연기(延期)된 사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작용도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권태를 제거하는 것에 불과하다. 숨을 쉬는 것도 항상 침범해 들어오는 죽음을 방지하는 일이다. 우리는 일초일초, 한숨한숨을 쉴 때마다 죽음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 긴 시간을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음식을 먹거나 자거나 몸을 따뜻이 하거나 하면서 죽음과 싸우고 있다. 그런데 결국 승리는 죽음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탄생과 동시에 죽음의 소유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동안 죽음은 먹이를 삼키기 전에 그것을 희롱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자기의 생명에 큰 관심을 갖고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오래 연장시키려고 하지만, 이것은 파괴될 줄 알면서 풍선을 될 수 있는 대로 더 크게 확대시키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인식 능력이 없는 자연물도 그 내면적인 본질은 한결같이 목표가 없는, 그리고 쉴 사이 없는 부단한 노력이다. 이것은 동물이나 인간을 관찰해 보면 더욱 잘 나타나 있다. 그 모든 본질은 충족시킬 수 없는 갈증과 같은 욕망과 노력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욕망의 근원은 동물이나 인간이 본질적으로 본래 지닌 바 부족‧결핍 그리고 고통이다.

 

이와 반대로 너무 손쉽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욕망이 감퇴하여 욕망의 대상이 없어지면 이번에는 무서운 공허와 권태에 빠지게 마련이다. 즉, 자기의 본질과 생존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된다.

 

이러한 삶은 마치 시계추처럼 삶의 본질적인 구성 부문인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모든 고뇌를 지옥으로 추방한 뒤에는 천국에 권태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의지의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끊임없는 충동은 의지의 객체화의 더욱 높은 단계에서도 다음과 같이 그 최초의 가장 일반적인 기반을 얻게 된다. 즉, 이 단계에서는 의지는 영양을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살아 있는 육체로서 나타난다. 이 철칙에 위력을 주는 육체는 객관화된 삶의 의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지의 가장 완성된 객체화인 인간은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결핍의 정도가 심하다.

 

인간은 욕구가 구체화된 존재이며 몇천을 헤아리는 욕망덩어리이다. 이런 욕망을 걸머진 인간은 지상에 살면서 자기의 욕망과 고통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확실성이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봉착하는 어려운 일들을 걸머지고 그럭저럭 자기를 꾸려 나가기 위해 걱정에 싸여 있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생활 내용이다.

 

이에 직접 결부되어 있는 제 2의 욕구로서는 종족의 번식이 있다. 동시에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심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위험에 사방으로 에워싸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세심한 주의를 하여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두루 살피면서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수많은 우연과 수많은 적이 인간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황폐한 땅에서 살기도 하고 문화의 꽃을 피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에게 안전하고 마음 든든한 고장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끔찍한 위험을 당하면서까지 인간은 얼마나 그 짧은 순간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인간생활은 자기의 생존이 결국은 상실될 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이것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런 괴로운 싸움을 계속하면서 생활해 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삶에의 애착도 아니고, 인간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앞으로 벗어날 길 없고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니다. 삶 자체가 인간으로서 최대의 주의와 배려를 기울여 피해 나갈 수밖에 없는 암초와 소용돌이가 도처에 널려 있는 존재의 바다이다.

 

인간은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고 슬기를 다하여 이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피할 길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난파에 직접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아니 난파, 즉 죽음을 향해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다. 죽음이야말로 고난에 가득 찬 항해의 최종목표이며, 인간으로서는 피해 온 모든 암초보다 더욱 악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삶의 고뇌가 너무 손쉽게 쌓여가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생활의 목적인데도 오히려 죽음까지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가 하면, 고뇌가 조금이라도 중단되는 기회를 얻자마자 곧 권태를 감당할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이 힘쓰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생존의 추구이다. 일단 생존이 확보되면 그들은 자기의 생존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움직이는 제 2의 것은 생존에의 쾌락에서 탈출하자, 여기에 무감각하게 되자, 시간을 죽이자, 즉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로 말미암아 일 년 내내 고통에 시달리고 진저리를 치던 인간들이 그때까지 짊어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에서 일단 해방되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이 되어 전에는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즉 되도록 그것을 보유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온 자기의 생애의 일부를 소비하기만 하면 이득을 본 것 같은 심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권태는 뭐니뭐니해도 크게 문제삼을 필요가 없는 해악(害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권태를 방임해 두면 나중에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 인간의 얼굴에 절망의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권태를 느끼기 때문에 본래는 서로 사랑하는 일이 극히 적은 인간과 같은 존재도 반려(伴侶)의 필요를 느끼고 이로 말미암아 사교가 시작된다. 다른 모든 해악에 대항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는 권태를 물리치기 위한 공공(公共)시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권태라는 해악은 이와는 전혀 대조적인 해악인 기아(飢餓)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최대의 무법상태에까지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민중은 빵과 서커스를 필요로 한다.

 

필라델피아의 엄격한 법률이 징계의 방법으로 죄수를 고립시켜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극도의 권태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이 형벌은 너무나 지독하기 때문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죄수도 있었다.

 

결핍이 민중에게 끊임없는 무서운 채찍인 것처럼, 권태는 상류계급에 가해지는 형벌이다. 시민생활에서도 곤궁이 6일간의 위크데이로 표시되는 것처럼, 권태는 일요일에 의해 표시된다.

 

모든 인간생활은 오직 욕망과 그 충족 사이를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 본성으로 보아 욕망은 고통이며, 욕망을 충족시키면 곧 싫증이 난다. 목표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되면 이미 자극이 없어져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욕망이나 욕구가 다시 고개를 치켜든다.

 

이 경우에 만일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쓸쓸한 공허감, 권태가 등장하며 이것을 물리치는 것은 곤궁과 싸우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욕망은 그 만족 사이의 시간이 아주 짧지도 않고, 혹은 반대로 너무 길지도 않은 상태에서 계속될 경우에는 괴로움이 적어진다. 그리고 욕망과 그 만족감의 양(量)이 적절하면 가장 행복한 생애가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보통 삶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장 순수한 기쁨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을 생존에서 초월케 하여 욕망 없이도 삶을 관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것에 욕구가 제거된 인식, 미(美)의 향수(享受), 예술작품의 참된 감상 등이 있다. 이러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별한 소질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이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혜택을 입은 사람들도 꿈결같이 매우 짧은 한동안만 즐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뛰어난 정신적 소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받은 소수의 무리들은 둔감한 사람들보다 고통에 대해 훨씬 민감하다. 그리고 이들 소수의 무리들은 본질적으로도 색다른 자들 축에 끼어 있기 때문에 고적한 감을 금치 못한다. 그렇게 되면 소수자(小數者)의 기쁨도 상쇄되어 버린다.

 

그러나 인류의 대다수는 순수한 정신적인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순수한 인식 속에 있는 기쁨을 맛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거의 욕망에 의해 좌우된다. 어떤 무엇이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흥미있는 것으로 보이더라도(이것은 흥미있다는 말 자체가 이미 표시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의지가 어느 모로나 그들을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의지와 매우 먼 연관성밖에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의지와 결합할 가능성이 있는 데 불과하더라도 무방하다. 어쨌든 의지가 전혀 얼굴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의 생존이 인식 속에서보다 훨씬 의지 속에 가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행동과 이에 대한 반동(反動)만이 그들의 유일한 요소이다. 그들의 이러한 특성이 소박하게 나타나는 모습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다반사(茶飯事)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그들은 관광지를 여행하면 함부로 자기 이름을 써놓고 오는데, 이것은 명승고적이 그들에게 작용해 주지 않으므로 그들 쪽에서 명승고적과 관련을 맺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이한 낯선 동물이 있으면 이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행동과 반동을 실감키 위해 이 동물을 자극하거나, 놀려 주거나, 골려 주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가장 특징적인 욕망은 카드 놀이의 발견과, 그것을 오늘까지 즐기고 있다는 데 잘 나타나 있다. 카드 놀이야말로 인간의 빈약한 측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행운이 아무리 도와주더라도, 또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어떤 사람도 삶의 본질적인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크게 외치고 나서 창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제우스, 크로노스의 아들은 바로 나다.

그러나 나는 무한히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괴로움을 추방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해 보아도 괴로움의 형태를 바꾸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본래의 괴로움은 오직 곤궁,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걱정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설사 이와 같은 형태의 고통을 추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즉시 몇천이나 되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괴로움은 나이와 환경에 따라 성욕‧미칠 듯한 애욕‧질투‧시기‧증오‧불안‧야심‧탐욕‧질병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그 밖에 어떤 형태를 취해 나타날 수 없는 경우에도 나중에는 잿빛 쓸쓸한 혐오스러운 베일을 쓰고 나타난다. 이 권태의 퇴치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설사 이 권태의 퇴치에 성공하더라도 고통이 전과 같은 형태로 등장하여 윤무(輪舞)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는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생활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고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우리의 마음을 어처구니없게 하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마음의 위로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현존하는 나의 불행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스토아적인 무관심한 태도 이외의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러한 재난에 대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심정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재난이 우연히 일어나므로 무언가 조금만 달리했던들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원인의 계속으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연적이고 일반적인 재난, 예컨대 노쇠나 죽음, 그 밖의 일상생활의 불편과 같은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슬퍼하지 않는다.

 

우리를 괴롭히며 괴로움을 부채질하는 것은, 실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삶에 본질적이고 또 불가피한 것이며, 고통이 나타나는 형태나 형식은 우연에 좌우되고, 우리의 고통은 현재의 시점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며, 이 고통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현재 이 고통이 있기 때문에 고개를 치켜들지 못하고 있는 다른 고통이 곧 등장하게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운명은 우리에게 거의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뿐더러 이 반성이 참으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확신이 서게 되면, 고도의 스토아적 무관심이 마음속에 움터 자기의 행운과 불운에 벌벌 떨면서 걱정하는 마음도 한결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성이 직접 느끼게 마련인 괴로움을 초연히 억제한다는 것은 좀처럼, 혹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또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의 고통은 다른 고통에 의해 억제되고, 현재의 고통이 사라지면 새로운 고통이 등장한다는 지금까지의 관찰을 그대로 추진하면 역설 같지만, 결코 혼란을 일으킨다고는 할 수 없는 자유와 같은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즉, 모든 개개의 인간이 지닌 바 본질적인 고뇌의 양(量)은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언제나 일정하며, 설사 고통의 형태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일지라도 그 고뇌의 정량(定量)은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이런 의미에서도 외부에서가 아나리 그 사람이 갖는 고뇌의 정량, 그 사람의 소질에 의해 규정된다. 각자가 갖는 이 소질은 시간의 차이나 육체의 건강상태에 따라 다소의 변동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불변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질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플라톤이 《국가》의 제 1장에서 「가벼운 감각과 무거운 감각의 정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가설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다. 우리가 너무나 큰 고뇌를 짊어지고 있으면 그보다 작은 모든 고뇌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며, 반대로 큰 고뇌가 없으면 사소한 고뇌도 우리를 몹시 괴롭혀 불쾌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은 이런 것도 가르치고 있다. 즉,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큰 불행이 실제로 일어났을 경우에도 최초의 고통을 극복하기만 하면 우리의 기질은 대체로 거의 변화가 없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전부터 동경하고 있던 행운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이전과 비교하여 오래도록 즐거움에 잠기지는 못한다. 커다란 슬픔이나 전연 뜻밖의 기쁨이 찾아왔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만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강렬한 감각에 사로잡힐 뿐이고, 이러한 감각은 본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곧 소멸해 버린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감각은 현재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러한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 예상되는 미래의 일로 환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나 기쁨은 미래의 일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분명히 한 때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느껴질 경우가 있지만 결코 오래 계속되는 감각은 아니다.

 

앞에서 서술한 가설, 즉 괴로움이나 기쁨을 막론하고 또는 그것이 인식의 경우이든 감각의 경우이든 간에 그 대부분이 주관적으로 선험적인 제약을 받는다는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다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가해 보기로 한다.

 

우선 인간의 명랑성이나 비애와 같은 것은 분명히 외부적인 상황인 부자라든가 특권계급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부유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명랑한 표정을 한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전혀 같지 않다. 우리는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떤 성격의 소유자라도 자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커다란 불행이나, 이 정도라면 자살할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조그마한 불운을 분명히 밝힐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명랑성이나 비애의 정도도 언제나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위에서의 고찰로 미루어 보아 이 정도는 외부적인 상황의 변화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내부적인 처지와 육체적인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환희라는 기분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외부의 요인에 의해 비롯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고통이 일정한 외부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며, 이로 말미암아 현저히 우울해지고 비애에 잠기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끝나기만 하면 크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다. 우리의 고통과 행복의 정량(定量)은 앞에서 말한 가설에 따르면 대체로 모든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규정된다. 비애가 생기는 그 외부적인 동기는 고통과 행복의 정량에 대한 관계에서 보면 육체에 대한 발포약(發泡藥)과 같은 것이다. 이 약은 신체의 곳곳에 분산되는 고약한 액체를 한곳에 집중시킨다.

 

우리의 내부에 만일 그 일정한 고통의 외부적인 원인이 없었던들 몇백으로 분해되어 우리가 현재로서 간과하고 있는 사물의 몇백이나 되는 조그마한 불쾌감이 기분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현재 이 시점에서는 고통을 느끼는 우리의 능력이 그 커다란 재해에 의해 말살되어 있으며, 만일 이것이 없었던들 고개를 치켜들었을 터인 여러 가지 분산된 고통이 한곳에 집중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관찰도 이 사실을 밑받침하고 있다.

 

우리를 몹시 괴롭혀 오던 큰 걱정이 다행스러운 결말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서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그대신 다른 걱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걱정의 소인(素因)은 전부터 있었지만 우리의 의식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통을 느끼는 우리의 능력이 이런 것에까지 관여할 여지가 없어 이 걱정의 소인은 느껴지지 않는 어두운 영상이 되어 지평선의 한 끝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고뇌를 위한 공석(空席)이 생겼기 때문에 이 걱정은 곧 관록(貫祿)이 충분한 고통의 소재로 등장하여 현재의 지배적인 관심사로서 왕좌에 오르게 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새로운 걱정도 그 내용으로 보아 방금 퇴치한 종전의 중대한 관심사와 비교하면 대단한 것이 못될 터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걱정은 금새 큰 고통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어느새 종전의 중대한 관심사와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 되어 현재 이 시점의 최대 관심사로서 완전히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엄청난 기쁨과 심한 고통은 언제나 같은 인간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는 서로 상대방을 제약하고 또 함께 정신활동이 활발한 경우에 나타난다는 조건하에 놓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양자는 결코 현재의 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예상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고통은 삶의 본질적인 것이며, 그 정도는 주관의 성격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언제나 외부적인 상황이 갑자기 변하더라도 개개인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이 허다한 환희와 고통은 항상 오류와 미망(迷妄)에 의거해 있다. 그러므로 이렇듯 과도한 격정의 분출은 깊은 통찰에 의해 피할 수 있다. 과도의 환희는 모두가 실제로는 차례가 오지 않는 무엇을 삶에서 찾아보려는 미망에 의거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소망이나 관심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중에야 이런 헛된 꿈에서 반드시 깨어나게 마련이지만, 이 미망이 소멸되면 미망이 생겼을 때 기쁨이 컸던 만큼 이번에는 심한 고통이 대신하게 된다.

 

이것은 하산하려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산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런 폐단은 피해야 한다. 뜻하지 않은 큰 고통은 바로 그 산에서의 전락이며, 그 미망의 소멸이요, 미상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사물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모든 관련성을 고려하여 분명히 통찰하고, 자기가 끔찍이도 바라던 색채의 옷을 열심히 사물에 입히기를 피하였던들 지나친 환희나 고통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이러한 미망의 결과에서 해방시키고 그대신 동요되지 않는 안정감을 주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호라티우스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송가(頌歌)를 불렀을 때 이런 통찰에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너는 괴로움 속에 놓여 있더라도

너의 영혼은 침착할지어다.

그런데 너에게 행운이 찾아오면

환희에 도취되는 수치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러나 흔히 우리는 고통이 삶의 본질적인 것인 한 그것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갈되는 일이 없는 원천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는, 쓴 양약(良藥)에라도 비유할 인식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서 잠시도 떠나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 언제나 외부적인 원인을, 이를테면 구실이라도 발견한 듯이 찾고 있다.

 

이것은 자유를 누려 구속되는 일이 없는 자가 주인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에 욕망으로서 쫓아다니며 당초에는 끔찍한 것으로 약속되었던 만족을 막상 얻었다고 하여도 하나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그 대부분은 수치스러운 망상이었음을 금새 알게 되어도 자기가 *다나오스의 물통으로 물을 긷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여전히 새로운 욕망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다나오스 왕의 딸들이 남편을 살해한 죄로 구멍이 뚫어진 물통으로 언제나 물을 긷게 했다는 희랍신화-譯註

  

큰욕구를 아직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도처에 엄청난 것이 도사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또다른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삶에의 갈망은 여전히 남아 우리의 갈증에는 끝이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리하여 우리는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결코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추구해 온 것을 손에 넣게 된 셈이다. 우리가 순간마다 우리의 고뇌의 원천으로서 자기 자신의 본질 대신에 고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고뇌는 본질적인 것이며 참된 만족은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으로부터 다시 멀리 떠남으로써 자기 운명과는 등지게 되지만, 그대신 자기 자신과는 화해를 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 언제나 유일한 큰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다른 모든 조그마한 괴로움이나 기쁨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일 년 내내 하나의 환영에서 다른 환영을 뒤쫓는 태도보다 훨씬 위엄을 갖추고 있다.

 

2) 허망한 생물의 생활

 

앞에서 서술한 사고방식에 의해 우리는 우선 한꺼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물의 계열을 음미하고, 동물의 형태의 다양함과 동물의 성장과정이나 생활방식에 따라서 언제나 다른 상태로 변모하여 나타나는 모습을 관찰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동시에 모든 동물이 제각기 특이한 방법으로 교묘하게 집을 마련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조사해 보기로 하자. 이와 함께 어떤 동물이나 그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에너지와 기교와 지혜를 다하여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해 보자.

 

아니 그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연구를 거듭하면 빈약하고 조그마한 개미가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나 벌들이 놀라울 정도로 예술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차분히 바라보기로 하고, 조그마한 갑충(甲蟲) 한 마리가 자기 몸의 40갑절이나 될 듯한 둥지에 알을 까놓고 장래의 유충(幼蟲)에게 먹이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이것을 이틀 동안에 땅 속에 묻는 모습을 관찰해 보기로 하자. 또한 이 경우에 대체로 대부분의 벌레들의 생활은 그들의 알에서 까게 마련인 장래의 유충에게 먹이와 둥지를 제공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며, 알에서 까진 유충은 먹이를 다 먹어 버리고 고치의 생활에 들어가지만 여기서 그 놈은 어미벌레와 마찬가지 일을 처음부터 되풀이한다는 것을 유의해 두자.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새들의 생활도 그 대부분은 먼 거리를 애써 날아와서는 둥지를 만들거나 새끼에게 먹이를 주워다 주기에 분주하며, 새끼들도 이듬해부터는 어미새와 같은 일을 하며 끝내는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갈 미래를 위해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이러한 관찰을 마친 다음에는 마땅히 이런 정성과 노력의 대가는 무엇인가, 동물이 이를 달성하려고 꾸준히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짤막한 의문의 형식을 취해 보기로 하자.

 

대체 여기서 무엇이 생기는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준비를 요구하고 있는 이들 동물의 생존에 의해 무엇이 얻어지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는 식욕과 성욕의 충족과 모든 동물들의 개체에게 그 무한한 고통과 노력의 사이사이에서도 간혹 허용되는 순간적인 보잘것없는 즐거움밖에는 들 수가 없다.

 

펜으로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기 짝이 없는 기교를 다하여 준비하며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였는데도, 실제로 손에 넣은 노획물은 얼마나 빈약한 것일까! 이 양자(兩者)를 견주어 보면 삶이란 거기에 소모한 비용이 수입을 훨씬 초과하는 사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특히 단순한 생활을 하는 동물의 경우에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예컨대 지칠 줄 모르는 동물인 두더지의 경우를 살펴보라. 몸에 비해 엄청나게 커다란 삽의 역할을 하는 앞발로 열심히 구멍을 파는 것만이 두더지의 전 생애의 활동이다. 두더지의 주위는 언제나 밤이 둘러싸고 있다. 미니어처(Miniature)와 같은 눈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빛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두더지만이 참된 「밤의 동물」이다. 밤에도 시력이 있는 고양이‧박쥐‧올빼미들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두더지가 이렇게 해서 즐거움을 등지고 애써 살아간 결과, 얻는 것은 무엇일까? 먹고 교미하는 것뿐이다. 즉, 새로운 개체 속에서 똑같이 쓸쓸한 일생의 길을 계속해 나가는 수단을 얻을 뿐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예에서 보더라도 살아가는 노력, 괴로움과 삶의 수확이나 이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력이 있는 동물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의식이 부여된다. 분명히 이들 동물의 경우에 그 의식은 오직 주관적인 것이며, 동기가 작용할 때만으로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들 동물에게는 생존의 객관적인 가치가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맹목적인 두더지의 생활은 아무리 끊임없이 일하여도 새끼를 만들고 시장기를 느낀다는 두 가지 교호작용(交互作用)에만 한정되어 있다. 목적과 이를 위한 수단 사이의 불균형이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이런 견지에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지방에서 그들 자신에게만 맡겨진 동물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도 배우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동물 세계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인간이 전혀 손을 쓰지 않기 때문에 자연 자체가 이들 동물에게 부가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훔볼트(1769~1859, 자연탐구가-譯註)가 그의 저서 《자연의 견해》에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언제나 도처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인류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손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동물들의 생활에 의해 모든 존재의 노력이 얼마나 한심하고 허망한 것인가를 더욱 쉽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본성에는 무엇을 노획물로 삼느냐에 따라서 그 조직이 다종다양하게 되며, 매우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다 할 최종목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다. 동물들은 아무래도 결핍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다만 순간적인 즐거움과 극히 사소한 일시적인 기쁨밖에는 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고생을 하며 언제나 투쟁 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저마다 먹이를 쫓고, 한편 먹이가 되어 쫓기고 있다. 동물의 생활은 곤경‧결핍‧곤궁‧불안‧비명‧포효의 연속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광경이 끊임없이, 지구의 표피가 다시 붕괴할 때까지 계속되어 나간다.

 

융큰푼이 서술한 바에 의하면, 그가 일찍이 자바에 갔을 때 눈에 보이는 전 벌판이 뼈다귀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이곳에 전장(戰場)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뼈다귀는 길이 5피트, 폭 3피트, 그리고 높이도 엄청난 거북이의 뼈다귀였다.

 

알을 까기 위해 바다에서 기어오른 거북이가 이 벌판에 어슬렁거리자 들개의 습격을 받았다. 개는 자기 동료들과 힘을 합쳐서 거북이를 뒤집어 엎고 비교적 부드러운 배의 껍질을 벗기고 산 채로 거북이를 먹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 들개의 무리를 호랑이가 덮치는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비참한 광경이 1년 내내 몇 천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이를 위해 거북이는 세상에 태어난 것과 다름이 없다.

 

대체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그들은 이러한 고통을 당해아만 하는 것일까? 또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잔인한 광경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이와 같이 하여 비로소 삶에의 의지가 객체화되기 때문이다.

 

삶에의 의지가 객체화되는 모습은 도처에서 분명히 파악하고 관찰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 본질과 세계 자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념을 만들기 위해 트럼프로 집을 세우려고 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삶에의 의지가 객체화된 굉장한 드라마를 파악하고 그 특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에 신(神)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이 20년 동안에 이에 대하여 열심히 논평하여 기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우리 조국 독일 안에서는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는 견해로 간주하고 있다. 「다른 존재에 있어서의 이념(理念)」 같은 것을 끄집어내어 세계를 해명하려는 것보다는 훨씬 엄밀한 관찰과 세밀한 탐구를 필요로 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세기(世紀)에 등장된 여러 가지 체계가 모두 그 아류나 분파에 지나지 않는 범신론(汎神論) 혹은 스피노자주의(主義)에 따르면 현재의 만물은 모두 무한히 악전고투하면서 영원히 같은 상태를 지속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완전히 유일한 신이며 이보다 더 선(善)한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해탈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따라서 해탈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세상에 온갖 희비극이 되풀이되느냐 하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관객이 없고, 배우들도 단지 약간의 소극적인 즐거움에 잠기는 일이 간혹 있을 뿐 무한한 고통을 견디어 나가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류에 대한 관찰을 첨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인류의 경우에는 분명히 사정이 더욱 복잡하며 특이한 위엄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생각에는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즉, 인류의 경우에도 삶은 즐기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뼈가 빠지도록 일해야 한다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분의 고저(高低), 신체의 대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은 심신(心身)을 다해 전력을 기울이면서도 재난을 당하며, 끊임없이 일하고 언제나 분주히 투쟁에 나서서 무리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각각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몇 백만의 사람들은 공동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각 개인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몇 천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어 쓰러져가고 있다. 대체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애써 머리를 짜낸 끝에 수립한 정책에 따라 그들은 서로 싸움터로 끌려가기 마련이다. 오직 한 사람의 착상을 실행하거나, 그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려야 한다.

 

한편, 평화시에는 상공업의 활동이 성행하여 놀라운 발전을 하고, 해양의 항행(航行)이 촉진되고, 세계의 한 끝으로부터 맛좋은 음식을 운반해 오며,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서로 통신을 교환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사색에 잠기고 어떤 사람은 행동에 나선다. 모든 사람들이 눈부신 활동을 하는 모습은 붓과 입으로 일일이 담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모든 활동의 최종목표는 대체 무엇일까? 허망하기 짝이 없는 고뇌에 시달리는 개인이 이로 말미암아 한동안 삶을 유지하고, 가장 행복한 경우라 하더라도 밀어닥치는 재난을 견디어 나갈 정도이며 비교적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러나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곧 권태에 사로잡혀 다시금 종족과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힘을 기울이는 노력과 손에 넣는 보상 사이에는 분명한 불균형을 찾아볼 수 있으며, 삶의 의지는 모든 생물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향해 온갖 힘을 쏟고 있는 모습, 즉 객관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일로서, 주관적으로 보면 미망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세밀히 관찰해보면 삶에의 의지는 오히려 맹목적인 충동, 즉 전혀 근거가 없고 동기도 찾아볼 수 없는 충동임을 알 수 있다.

 

뱀의 커다랗게 벌린 입 속으로 먹혀 들어가고 있는 다람쥐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1859년 5월 25일자 <쥬나르 드 마그네티슴>에 게재되었다.

 

자바 섬의 여러 지방을 샅샅이 여행한 어떤 사람은 뱀이 놀라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 호초산맥(胡椒山脈)이라고 부르고 있는 한 산봉우리인 쥰진드 산에 오르기 위해 깊은 숲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머리가 하얗고, 설치류의 상냥하고 교묘한 움직임과 매력이 풍부한 다람쥐가 카자티레라는 나뭇가지 위에 뛰어오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뭇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곳에 지푸라기와 이끼로 만들어진 공 모양의 둥지와 나무뿌리 근처에 뚫린 구멍을 다람쥐는 바라보고 있었다. 다람쥐는 조금 움직이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이 다람쥐는 나무 위의 둥지에 새끼들을 키우면서, 나무 밑의 구멍 속에 먹을 것을 모아둔 모양이었다. 이윽고 다람쥐는 공포에 떨며 쩔쩔매고 있었다.

 

여행자는 이 순진한 동물에게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막상 어떤 위험이 닥쳐왔는지 추축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무 곁으로 다가가서 주의깊게 주위를 살펴 보았다. 나무뿌리에 있는 구멍 속에 한 마리의 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뱀은 가엾은 다람쥐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행자는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가엾은 다람쥐를 살려주고 뱀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구욕이 다람쥐를 동정하는 마음보다 앞서 있는 그는 이 연극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비극적인 종말을 거두었다. 뱀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또아리를 틀고 있던 뱀은 머리를 높이 치켜들어 한 번 흔들고 나서 다시 부동자세를 취하고 다람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람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다니다가 점점 나무 밑으로 내려와 결국 나무뿌리까지 왔다. 그러니까 다람쥐는 이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다람쥐는 마치 현기증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또는 뱀에게 말려들어 가기라도 하는 듯이 뱀에게 다가가자 뱀은 갑자기 이것을 잡아먹으려고 커다란 입을 벌렸다. 다람쥐를 삼킨 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른 속도로 나뭇가지를 향해 달려갔다. 뱀이 이렇게 움직인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천천히 수확물을 소화하고 나아가서는 한잠 푹 잘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예로 보아도 어떠한 정신이 자연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자연을 약동하게 만드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3) 도달할 길 없는 목표

 

실제로 모든 목표도 한계도 없다는 것은, 무한한 노력 자체인 의지의 본질에 속해 있다. 이것도 내가 전에 구심성(求心性)의 문제를 제기했을 때 언급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의지의 객체화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낮은 단계인 중력 속에 나타나 있다. 중력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최종목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하는 물질이 하나의 형태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그 형태의 내부에서는 의지에 의해 중심점을 향해 노력하는 중력이 여전히 경직성 혹은 탄성(彈性)의 형태를 취하는 불가입성(不可入性)과 언제나 투쟁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노력은 언제나 방해받고, 결코 만족하거나 충족감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의지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대입하여 말할 수 있다. 현재 도달한 목표는 새로운 목표에 이르기 위한 새로운 코스의 출발점이며, 결국 같은 일이 무한히 되풀이 된다.

 

식물계의 현상에 있어서는 싹이 터서 줄기와 잎사귀로 성장하고 다시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하지만 이러한 것도 실은 새로운 싹, 새로운 개체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새로운 싹은 다시 전과 같은 코스를 거치게 되며, 마찬가지로 무한한 시간 속을 지나간다.

 

한편, 동물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생식은 동물의 생활의 정점이다. 이 목적이 달성되면 첫 개체의 생명은 조만간 쇠퇴하고 그 동안에 자연의 새로운 생명은 종족의 보존을 확보한다. 그리고 같은 현상이 되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끊임없는 충동과 교체의 현상으로서 모든 유기체의 물질이 언제나 갱신되어 간다.

 

생물학자들은 오늘에 와서는 이 현상을 운동에 의해 소비된 재료의 보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끊임없이 영양분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유기체의 기능의 손실을 완전히 같은 분량으로 보충하지 않으니 말이다.

 

영원한 생성, 무한의 유출이 의지의 객체화의 본성이다. 같은 일이 드디어 인간의 노력이나 욕망 속에도 나타난다. 인간은 욕망의 충족을 언제나 그들의 의욕의 최종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욕망이 이루어지자마자 이번에는 같은 종류의 목표 같은 것은 돌아보지 않고, 모처럼 손에 넣은 목표도 시들해져서 곧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이것을 사라진 환상으로 돌려 버린다.

 

아직 어떤 욕구나 격려가 되는 것을 갖고 있는 자는 행복하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욕망을 느끼고 만족을 추구한다. 그 욕망이 일단 형성되면 그것을 곧 손에 넣게 되면 다행이지만 좀처럼 얻을 수 없으면 괴로움에 사로잡혀 새로운 욕망의 충족을 위해 애쓰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생명력을 모조리 고갈시킬 무서운 권태에 빠지거나 일정한 목표도 없이 함부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죽을 지경인 무료함을 자아내는 슬럼프에 빠지는 일이 없다.

 

이 모든 일들로 미루어 보더라도 인식이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의지는 현재 자기가 이 장소에서 무엇을 원하는 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모든 행동은 목적을 갖고 있지만, 총체적인 욕구는 이렇다 할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개개의 자연현상이 이 장소,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것은 충분한 원인에 의해 제약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 속에 나타나는 힘이 일반적으로 원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물자체 근거가 없는 의지의 현상단계(現象段階)이기 때문이다.






'인문철학 > 쇼펜하우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不滅의 意志에 대하여  (0) 2019.09.21
4. 利己와 加虐의 心理에 대하여  (0) 2019.09.21
3. 삶의 意味  (0) 2019.09.21
1. 表象과 意志에 대하여  (0) 2019.09.21
0. 나의 반생  (0) 2019.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