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表象과 意志에 대하여
1) 表象으로서의 세계
모든 것을 인식하고,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 것이 주관이다. 그러므로 주관이야말로 세계의 지주(支柱)이며, 현상(現象)하는 모든 것, 객관의 모든 것에 언제나 전제가 되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단지 주관에 있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관으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인식할 경우에 그런 것이며, 그 사람이 인식의 대상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 사람의 육체 자체는 이미 객관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육체를 표상이라고 부르게 된다. 육체는 분명히 직접적인 객관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객관 중의 하나이며 객관을 지배하는 법칙에 종속된다.
육체는 모든 직관(直觀)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이에 의해 다양성이 생기는 모든 인식형식(認識形式)에,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식할 뿐 결코 인식되지 않는 주관은 이 인식형식 아래에 있지 않다. 주관에 대해서는 오히려 다양성도 다양성에서 오는 대립도, 그리고 통일도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우리는 결단코 주관을 인식하지 못한다. 주관이란 인식되는 것을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또한 표상으로서의 세계, 우리가 지금 여기 서서 관찰하고 있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가분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객관이고 그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며, 이것을 통하여 다양성이 생기게 된다. 또 하나는 주관이며, 이것은 시간이나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관은 전혀 부활되지 않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관 속에 오직 하나라도 존재하는 몇백만의 주관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객관과 함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형성하기는 하지만 그 유일한 주관이 소멸되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양자(兩者), 주관과 객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사유(思惟) 속에서도 불가분이다. 왜냐하면 양자 중에서 각각 타방(他方)에 의해 타방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一方)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接境)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완전히 인식되며, 칸트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아 프리오리(선천적)로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것을 발견한 것은 칸트의 중요한 업적으로 매우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근거율」이야말로 우리에게 선험적(先驗的)으로 의식된 객관의 형식을 공통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가 순수하게 선험적으로 알게 되는 모든 것은 근거율의 내용이며 여기서 비롯되는 것, 즉 우리의 모든 경험에 앞서 확인되는 인식은 근거율 속에 표현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근거율에 대한 나의 논문 속에서 나는 그것이 무엇이건 모든 객관은 근거율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객관은 다른 여러 객관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으며, 한편으로는 제약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약하는 것임을 상세히 논하였다. 그리고 모든 객관적 존재는 그것이 객관, 즉 표상인 한, 그 객관 상호간의 필연적인 관계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형식 속에 존재하는 이상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좀더 상세히 논하고자 한다.
나는 앞에서 말한 논문에서 근거율이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그 필연적인 관계는 객관이 각각의 가능성에 의해 분류된 종류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해 올바른 분류가 보증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그 논문에서 주장한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지고, 또 독자들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해나가려고 한다. 그 논문에서 내가 상세히 논하지 않았다면 이 책에 이를 논술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 책의 소개도 겸하고 있는 그 논문을 통해서 그 형태가 아무리 천태만상(千態萬象)으로 보이더라도, 근거율의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근거율의 깊은 본질에 대하여 통찰하기 위해서는 그 형태의 가장 단순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인식하였다.
시간 속에서 순간이 나타나는 것은 순간이 이에 선행하는 순간, 이를테면 자기의 부친을 멸망시킬 때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은 자기 자신이 바로 멸망되는 데서 비롯된다(그 내용이 낳는 결과를 도외시하면).
과거도 미래도 마치 물결처럼 허망한 것이며, 현재는 양자(兩者)를 떼어놓은 연장(延長)도 지속(持續)도 없는 경계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근거율의 다른 모든 형태의 허망함을 재인식하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그리고 공간과 마찬가지로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 원인과 동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 그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타자(他者)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고(思考)의 본질의 기원은 매우 오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것을 알고 사물이 영원한 흐름과 같다고 한탄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물은 언제나 생성하는 것이며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히 존재하고 지속되는 유일한 실체의 한낱 우유성(偶有性)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칸트는 이처럼 인식된 것을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에 대한 단순한 현상(現象)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도인의 옛 지혜는 ‘죽어야 하는 자의 눈을 가리는 것은 거짓 베일, 즉 마야이며 마야는 죽어야 하는 자에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마야는 꿈과 같은 것이며, 여행자가 멀리서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래 위를 비추는 햇살 같은 것이다. 혹은 뱀으로 착각해서 내동댕이친 끄나풀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비유는 《베다》나 《프라나》의 도처에 서술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생각되고 이야기된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관찰한 바와 같다. 즉,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근거율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2) 意志로서의 세계
우리는 이미 사물의 본질은 외부로부터 파악할 수 없으며 아무리 애써도 영상(映像)과 이름만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성(城)의 주위를 돌아보아도 입구가 어디인지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정면만을 스케치하는 인간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리고 나 이전의 철학자들이 걸어온 길은 모두가 이런 길이었다. 단지 나의 표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 혹은 인식하는 주관의 한갓 표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의 파생물(派生物)을 어느 정도 탐구하여 거기 어떤 의미를 부여한들 탐구자가 순수하게 인식하는 주관에 머물러 있는 한(육체가 없는 날개만 가진 천사의 머리인 한) 이 세계의 본래의 모습에 실제로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탐구자 자신도 세계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는 개인으로서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모든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제약하는 자로서의 그의 인식은 그나마 그의 육체를 통하여 존재하지만, 이 육체의 작용이야말로 오성(悟性)에게 그 세계를 알리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 육체도 이러한 관점에서는 순수하게 인식하는 주관이고 보면, 다른 것과 같은 표상의 하나에 불과하며 객관 속의 객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의 운동과 행동도 다른 모든 직관할 수 있는 객관의 변화와 꼭 같으며, 그 의미는 전연 다른 방식으로 해명되지 않는 한 기이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채 남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다른 객관의 변화를 원인‧자극‧동기 등에 환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행동도 자연법칙에 의해 출현한 동기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동기의 영광을 그 사람의 눈앞에 나타난 다른 사물의 작용과 그 원인과의 결합 이상으로 상세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 육체의 출현과 그 행동에 대하여 자기로서는 알 수 없는 내적인 본질을 힘‧성질 또는 성격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본질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의 입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으로 나타나는 인식의 주관에는 수수께끼의 말이 주어져 있다. 이 말은 의지라고 한다. 이 말, 그리고 이것만이 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현상의 열쇠를 부여하며, 그 의지를 분명히 하고 그 사람의 본질‧행위‧운동의 내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자기와 육체의 합일(合一)에 의해 개인으로서 나타나는 인식의 주관에 이 육체는 두 개의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여러 가지 직관에 있어서의 표상으로서, 많은 객관 속의 한 객관으로 객관에 관한 법칙에 종속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 그러나 육체는 동시에 전혀 다른 형태로 주어져있다. 즉, 누구에게나 직접 알려져 있는 것, 다시 말해 의지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어져 있다. 모든 인간에게 참된 의지의 행동은 곧 반드시 일어나는 육체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의지의 행동과 육체의 행동은 객관적으로 인식된 인과율에 의해 얽매인 두 개의 다른 상태가 아니다. 이 양자는 원인과 작용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동일한 것이지만, 단지 두 개의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다른 하나는 오성(悟性)을 위한 직관 속에서 나타난다. 육체의 행동은 객관화된, 즉 직관 속에 등장한 의지의 행동이다.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것은 육체의 모든 운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비단 동기에서 비롯된 운동뿐만 아니라 단지 자극에서 비롯된 기계적인 운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는 객관화된, 즉 표상이 된 의지라는 것이 판명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 책 속에 더욱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므로 한결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나는 전술한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근거율」에 관한 논문에서는 일부러 일면(一面)에서만 사물을 보는 입장(표상의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육체를 「직접의 객관」이라고 불렀으나, 다른 면을 고려한 본장에서는 육체를 「의지의 객관화」라고 규정하기로 한다. 그로 인하여 어느 의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의지는 육체의 선험적인 인식이며 육체는 의지의 후천적(아 포스테리오)인 인식이다.
장래의 일에 대한 결의는 인간이 언젠가는 원하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하여 이성(理性)이 단지 생각해 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본래의 의지의 행동은 아니다. 다만 실천에 옮기는 데서만 그때까지는 아직 변할 가능성도 있던 의향에 불과하며, 이성 속에서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던 결의를 굳게 하는 것이다.
욕구와 행위는 반성 속에서만 별개의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양자가 동일하다. 의지의 모든 올바른 직접적인 행동은 바로, 그리고 직접으로 현상하는 육체의 행동이다. 한편, 이에 대응하여 육체에 대한 모든 작용은 바로 직접의지(直接意志)에 대한 것이다. 이 작용이 의지에 반발하면 고통이라고 부르며, 의지에 적응하면 쾌락‧쾌감이라고 부른다. 이 양자 사이의 뉘앙스는 미묘하다. 그러나 고통과 쾌락을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고통이나 쾌감은 결코 표상이 아니라 의지의 현상인 육체에 있어서의 직접적 작용이다. 즉, 육체에서 받는 인상을 순간적으로 원하기도 하고 또 원치 않기도 하는 것이다.
3) Ding an sich(物自體)
인간은 자기의 행위나 또는 행위의 토대가 되는 신체를 표상(表象:눈에 비친 모습)으로 보고, 이 표상으로 나타나는 자기의 본성이 의지라는 것을 직접 느낀다. 자기의 의지는 의식에 나타나는 가장 친밀한 것이며,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표상의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분명히 나누지 않고 직접 나타난다. 그리하여 의지 자체는 의식에 나타나지 않고 각 개체에 하나하나의 행동으로서만 알려진다.
어쨌든 자기의 의지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은 구체적인 인식이지만, 그것을 명백하게 추상적으로 보면 자기의 본성은 의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확신을 받아들이는 자는, 동시에 자연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은 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직접의 인식을 얻게 되는 경우 이외에, 다만 표상으로서, 객체로서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모든 현상에도 이와 같은 확신을 적용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이 의지가 그 본성임을 볼 수 있는 것은 동물이나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이외에 식물을 양육하는 힘도, 결정을 가져오는 힘도, 자기(磁氣)가 북극을 향하는 힘도, 물질의 친화관계(親和關係)로 이합(離合)되고 끌었다 튕겼다 하는 힘도, 또한 지구를 태양으로 끌어 모든 물질을 지배하고 있는 중력도... 이 모든 것은 각각 그 나타난 모습은 다르지만 그 내면적인 본성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어 그것이 명백하게 나타날 때에는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되는 것은 현상의 범위내에서의 일이 아니라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에 이르게 된다. 현상은 곧 표상일 뿐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종류의 것도 표상은 모두 객관, 즉 현상이다.
그러나 물자체는 의지뿐으로 의지로서는 철두철미 표상이 아니라 이와 완전히 질이 다르며, 표상‧객관‧현상‧보이는 것‧객관성 등은 모두가 의지에서 비롯된다. 의지는 세계 전체 또는 그 개개의 부분의 가장 내면적인 것으로,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천연의 힘에도 나타나고 인간이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는 행위에도 나타난다. 이것들은 의지가 나타나는 정도가 다를 뿐 결코 그 본성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 물자체는(칸트가 이 말을 사용했으므로 그대로 쓰기로 한다) 도저히 객관화할 수 없는 것으로, 만일 객관이 된다면 그 자체가 아니고 단지 현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 물자체를 어떻게 해서든지 객관적으로 나타난 듯이 생각하려면 어떤 객관적인 이름과 개념을 빌어 그것이 현상으로서 객관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해가 가도록 그 현상 속에서 그것을 완전하고 명백하게 나타내어 가장 발전을 이루고 또 인식에도 가장 직접적인 것이라야 하는 이러한 현상이 인간에게는 다름 아닌 의지이다.
그러나 의지도 다만 가장 현저한 특색에 따라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흔히 사용하는 의미의 의지보다는 훨씬 넓은 개념이다.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차별된 현상 속에 평등을 인정하고 유사한 것 속에 그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철학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자연 속에 움직이고 있는 힘과 의지가 같다는 것을 몰랐으며, 그 때문에 동일한 유(類) 속에서의 이종(異種)에 불과한 잡다한 현상을 동일류(同一類)로 인정하지 않고 별종(別種)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유(類) 전체의 개념을 나타내는 말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이 유(類)를 나타내려고 그 중에서 우리에게 제일 가깝고 모든 간접적인 인식에 선행하는 직접적인 인식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을 취하여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이 의지라는 개념을 확대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의지라면 오늘까지 특수한 의지로서 인식에 의거하여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의지, 또는 이성에 의해 이끌리고 추상적인 동기에 따라 나타나는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내가 말하는 의지의 성질에 대하여 오해할 것이다.
결국 동기에 의해 나타나는 의지는 의지의 명백한 발동이기도 하지만 의지 자체는 그보다 훨씬 깊은 데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의지현상(意志現象)의 제일 깊숙이 있는 본성을 판별하고, 다른 불투명한 현상에도 이 본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이 개념을 확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상 자체의 본성을 의지라고 부르더라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이것도 오해이다. 만일 이 물자체가 어떤 추론의 결과로 생기거나 간접적 또는 추상적 인식에서 생긴 것이라면 무엇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며, 그 명칭은 다만 어떤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의 표지(標識)로서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면서 그것으로 사물의 가장 내면적인 본성을 어떤 주문(呪文)처럼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은 미지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는 추론으로 미루어 본 어떤 무엇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오로지 직접 인식에 들어온 것, 다른 무엇을 어떠한 경우에 아는 것보다도 확실히 알고 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힘이라는 개념 아래 의지라는 개념을 종속시켰으나, 그것을 반대로 해서 어떤 자연의 힘도 의지로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의지라는 개념 중에서 유일한 것, 즉 그 근거를 현상에 두지않고 각자의 의식의 한 끝에서, 즉 가장 직접적인 의식에서 생기는 것으로 누구나 자기의 개체로서의 본성을 직접 의식하며,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나 그 밖에 모든 형식 없이 자기 자신을 거기에 인식하고 발견한다. 즉, 의지에서는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객관이 하나가 되어 있다.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그 현상과는 달라서 현상의 존재방식 밖에 있다. 현상의 존재방식은 의지가 객관성에 나타나는 경우의 방식으로 의지 자체는 이에 관계하지 않는다. 즉, 일반적으로 「근거의 원리」라는 말로 표현하고 그 속에 시간과 공간을 포함시키며, 이러한 존재방식에 의해 다수라는 현상이 생기지만 이것들은 의지 자체를 지배하지 않는다.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표상이다. 표상이란 무엇인가? 동물의 뇌수에 일어나는 매우 복잡한 생리적 작용으로 생기는 하나의 현상의 의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식하는 주관일 뿐만 아니라, 한편 스스로가 인식되는 본성을 지니고 스스로가 물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고유한 내적 본성은 사물의 외면에서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길이 열려 있어, 이를테면 외부로부터의 공격으로는 점령할 수 없는 요새에 내부의 호응을 얻어 지하도를 통해 비밀 연락을 받고 침입해 들어가는 것처럼 물자체는 그대로 직접으로만 의식에 오를 수 있으며,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의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한 것은 자가당착을 초래할 뿐이다. 객관적인 것은 모두가 표상에 그치는 것이며, 따라서 현상으로서 뇌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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