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6. 性愛의 哲理

rainbow3 2019. 9. 21. 17:45


6. 性愛의 哲理

 

1) 삶에의 意志의 핵심-性慾

 

남녀관계는 인간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생활의 어떠한 면에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남녀관계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움직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점이며, 이것을 덮어서 감추려는 베일 사이에서 스스로 얼굴에 나타내곤 한다.

 

애욕행위는 전쟁의 원인도 되고 평화의 목적도 된다. 진실의 기반이기도 하고 농담의 대상이기도 하며, 기지(機智)의 끝없는 원천인가 하면 모든 암시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비밀신호를 보내고 말로 표현하기 거북한 프로포즈를 하며, 몰래 곁눈질하는 것 등등이 모두 애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노인들의 하루하루의 행동도 이에 의해 결정된다. 한번 이성과 관계한 자는 시간마다 성애의 문제로 고민하고, 동정(童貞)인 자도 자기의 의지에 거슬려 이것을 거듭 몽상하는 것이다. 연애가 농담의 풍부한 재료가 되는 것은, 실은 그것이 매우 엄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최대 관심사가 남의 눈을 피해서 몰래 이루어지며 되도록 완강하게 무시된다는 것은, 세상이 얼마나 기묘하고 괴상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성애야말로 이 세상의 본래의 세습(世襲) 군주이다. 조상대대로 계승되어 온 왕좌에 자기 권력의 위대함을 의식하고 도사리고 있는 성애야말로 그 높은 위치에서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로 연애를 제어하고 숨기려 하며, 적어도 이것을 제한하여 가능하면 아주 감추어 두려는 책략이나, 혹은 연애 등을 인생에 있어서 전혀 보잘것없는 외도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이려고 애쓰는 모든 수단을 비웃고 있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은 성욕이 삶의 의지의 핵심이며, 모든 욕망의 초점이기 때문이라는 데 기인하고 있다. 내가 앞에서 생식기를 가리켜 의지의 초점이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구체화된 성욕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남녀의 교합에 의해 태어나고, 인간의 욕망 중의 욕망은 이성과 교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욕망만이 인간의 모든 현상을 결합하고 영속시킨다. 삶에의 의지는 분명히 처음에는 개인의 유지에 대한 노력으로서 나타나지만, 이것은 단지 종속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첫단계에 불과하다.

 

종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종족의 생활 자체보다도 더욱 큰 것이다. 이 노력은 오래 지속되며 널리 퍼지고, 가치로 따지자면 개인의 생존에 대한 노력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욕은 사람의 의지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며 삶에의 의지의 가장 분명한 형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개인이 본래 성욕에서 태어나고, 성욕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에게 다른 모든 욕망을 앞지른다는 사실에 완전히 부합되고 있다.

 

나의 기본적인 이론을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해 여기서 생물학적인 설명을 빌어 오려고 한다. 즉, 성욕은 정욕 중에서 가장 격심한 것으로 욕망 중의 욕망, 즉 우리의 모든 욕망의 집결체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성욕, 즉 어떤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한 그 사람 고유의 성욕의 만족은 행복에의 결정이요, 하나의 왕관이며, 이것만 손에 넣게 되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반면에 이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모든 것에 실패한 듯이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욕의 생물학적인 측면으로서 객체화된 의지 속에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조직 속에서도 호르몬이 분비물 중의 분비물이며 모든 액체의 정수(精隨)이고, 유기적인 모든 기능의 최종결과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육체는 의지의 객체화, 즉 표상이라는 형식을 취한 의지 자체임을 재인식하게 된다.

 

2) 사랑의 정열

 

본래 사랑하는 두 남녀의 애정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미 이 두 사람이 낳을 수 있고, 또 낳고 싶어하는 새로운 개인의 삶에의 의지이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교환할 때 이미 새로운 삶이 꿈틀거리고 있으며, 장차 잘 조화되고 결합된 개성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자기들이 만들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장래에도 계속해 살아가기 위해 현실에 하나의 존재로서 결합되고 융합되기를 동경하는 심정을 갖는다. 이 동경은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각각의 개성이 새로운 생명 속에 유전하여 결합되고, 융합되었을 경우에 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 열매를 맺게 된다.

 

이와 반대로 어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결정적인 제거할 수 없는 혐오감이 일어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설사 자식을 낳더라도 나쁜 체질을 지닌, 따라서 내면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 불행한 인간이 태어나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칼데론이, 두려운 여성 세미라미로 하여금 남편을 죽이는 ‘강간의 여인’으로서 등장시킨 데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성을 달리하는 두 사람의 개인을 그처럼 강력하게, 그리고 만사를 제쳐놓고 서로 결합시키는 것은 결국 모든 생물의 종족 속에 나타나는 삶에의 의지이다. 삶에의 의지는 두 사람의 사랑하는 남녀가 낳는 새로운 개인 속에 목적에 부합된 자기 자신의 본질의 객체화를 선취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은 부친으로부터는 의지 또는 성격을, 어머니에게서는 지성을, 그리고 양친으로부터 형태를 물려받게 된다. 그러나 피차의 경우에 어느 쪽이냐 하면, 모습은 부친을 닮고 몸의 크기는 어머니를 닮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동물이 잡종을 만들 때에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주로 태아의 크기는 모체의 자궁의 크기에 따라야 한다는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간을 두고 보더라도 그 사람의 독특한, 즉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개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지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피차에 갖는 아주 특별한 개인적인 정열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개성이나 두 사람의 남녀가 서로 품는 정열도 동일한 것으로, 한쪽이 확실히 나타나는 반면에 다른 쪽은 함축적인 데 불과하다.

 

새로운 개인의 처음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생명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사람을 낳은 양친이 현재 서로 사랑하기 시작했던 순간 매우 적절한 영어의 표현에 의하면 「서로 그리워함(To fancy each other)」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남녀가 만나서 서로 동경에 넘친 눈짓을 교환했을 때 새로운 존재의 최초의 싹이 트는 것이다. 물론 이 새싹도 다른 모든 싹과 마찬가지로 거의 전부 짓밟혀 버린다.

 

새로운 개인은 이른바 새로운(플라톤적인) 이념이다. 모든 이념은 인과율이 각각의 이념에 분배한 재료를 탐욕에 사로잡혀 매우 과격하게 현상계에 나서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개성의 특별한 이념도 극히 탐욕스럽고 또한 과격하며, 현상 속에서 실현될 것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 탐욕적인 과격성이야말로 언젠가는 양친이 되는 두 사람의 남녀 사이의 정열이다. 정열에도 여러 가지 정도가 있다.

 

그 두 극단을 각각 최저의 애욕이라고 말하든 하늘 위의 사랑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자유지만, 본질적으로 말하면 정열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정열의 정도로 말하면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열의 정도는 그것이 개성적이 될 수록 격렬해진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육체나 개성의 모든 면에서 상대의 독특한 개성에서 비롯된 소망이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면 시킬 수록, 그만큼 두 사람의 정열의 정도도 높아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정열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읽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에게 연정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제일 긴요한 것은 건강하고, 정력적이고, 아름답고 또한 젊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가 인간이 갖고 있는 종족으로서의 특성을 다른 무엇보다도 앞질러 모든 개성의 기초로서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연정 같은 것은 그 정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다음 단계에 오면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특별한 요구가 나타난다. 이러한 요구를 갖고 자기의 연정을 충족시키는 것이 목전에 이르렀을 경우에는 정열은 매우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최고도의 정열은 사랑하는 두 사람 남녀의 개성이 잘 맞을 때에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의지가, 즉 부친의 성격과 모친의 지성이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하여 새로운 개인을 완성한다. 이 새로운 개인을 낳는 데 대하여 모든 종족 속에 나타난 사람의 의지는 그 자연의 강대한 힘에 입각하여, 다시 말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장으로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동경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동경을 갖게 되는 동기도 개개인이 지혜를 아무리 짜 보아도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인 위대한 정열이다.

 

3) 사랑의 生理

 

남녀의 사랑에 어디까지나 토대가 되는 것은 양자 사이에 태어날 생명을 위한 본능이지만, 이것을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이 본능을 해부해 보는 것이 상책이므로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할 수 없다.

 

그 중에서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남성은 본래 애정의 변화가 많고, 여성은 애정의 변화가 없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애정은 그 만족을 누린 순간부터 감퇴하여, 거의 어떤 여자에게서도 이 점령한 여자 이상으로 매력을 느낀다. 즉, 남자는 이와 같이 변화를 원한다.

 

이와는 반대로 여자의 애정은 그 순간부터 점진한다. 이것은 자연이 목적으로 삼는 하나의 결과이다. 자연은 언제나 종족의 유지와 그 증식을 위해 힘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남자는 상대가 되는 여자가 있어 주면 1년에 백 명 이상의 자녀를 쉽사리 얻을 수 있지만, 여자는 많은 남자를 소유하더라도 1년에 한 사람의 자녀밖에는 낳을 수 없다(쌍둥이의 경우는 다르지만).

 

그러므로 남자는 언제나 딴 여자를 요구하고, 여자는 굳게 한 남자를 지킨다. 이것은 자연이 여자로 하여금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본능에 따라 아이를 기르고 보호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충실은 남자에게는 인위적인 일이고 여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여자의 간통은 그 결과에서 객관적으로 보거나, 또는 천성에 어긋난다는 주관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남자의 간통과 비교하여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성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로서는 객관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면을 쓴 본능, 즉 종족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종족의 감정이므로 이것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 애정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심정과 심리상태를 더욱 깊이 탐구하여 상세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 이 심리상태를 분석해 보면 직접적으로는 종족의 형태, 즉 미(美)와 인체의 특성에 관련되어 있으며, 상대적으로는 두 사람의 개성의 어떤 결함에 대하여 그 수정 또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올바른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성에 대한 우리의 선택 또는 의향을 지배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령이다. 대체로 말해서 월경이 시작되는 나이에서 폐경이 될 때까지의 나이를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18세부터 28세 사이를 제일 좋아한다. 이 연령 이외의 경우에는 어떤 여자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며, 나이를 먹어 월경이 그친 여자는 혐오감을 일으킨다. 설사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젊으면 언제나 애교가 있는데, 젊지 않은 미인은 애교가 없다.

 

이 경우에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생식이 가능하다는 데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따라서 누구나 생식 또는 수태(受胎)에 가장 적합한 시기에서 멀어질수록 그만큼 이성에 대한 애교를 잃게 된다.

 

둘째로 염두에 두게 되는 것은 건강이다. 급성질환은 다만 일시적인 장해에 그칠 뿐이지만 만성병은 두렵게 생각된다. 그것이 자식들에게 옮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려되는 것은 골격(骨格)인데, 이것은 종족의 형체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연령과 질병 다음으로 가장 혐오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자세로, 얼굴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를 보상하기에 부족하며, 오히려 얼굴이 매우 흉하여도 발육이 좋은 편이 더 나은 것이다. 그리고 골격의 균형이 잡히지 않은 자는 언제나 눈에 띄기 쉬운 것이다. 체격이 왜소하거나 다리가 짧거나 절게 되면 곧 눈에 띈다. 이와 반대로 훌륭하게 발육된 체격은 다른 결점을 보충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사람을 황홀케 한다. 그리고 이빨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영양보급에 필요하며 특히 유전되기 쉽기 때문이다.

 

넷째로 고려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살이 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조형성이 뛰어나야 하는데, 이것은 태아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할 수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메마른 사람은 남달리 싫어한다.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 남성에게 상당한 호감을 일으키는 것은 태아에게 충분한 영양을 줄 수 있으며, 종족의 번식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비대한 여자는 혐오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이러한 체질이 자궁의 위축을 표시하며, 불임증의 기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두뇌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능이 헤아린다.

 

끝으로 얼굴이 아름다울 것으로, 여기에도 골격이 무엇보다도 관련이 되어 있다. 즉, 주로 코의 아름다움이 문제가 되는데, 짧고 오똑 선 코는 얼굴 전체를 망쳐 놓는다. 코가 위로 향하건 아래로 향하건 간에 약간 동그스름한 모양이 무수한 처녀들의 일생의 행복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이것은 당연한 일로 종족의 형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대뼈가 작고 입이 작은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동물의 입과는 달라서 인간의 용모의 독특한 특질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고려하는 것은 눈과 이마의 아름다움으로 이것은 마음의 특질에, 특히 지력의 특질, 다시 말해서 모성으로서 유전되는 부분에 관련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자가 그 의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점은 이처럼 정밀하게 측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장년(壯年)은 남성미가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으며, 특히 여자가 그 중에서 택하는 것은 30세에서부터 35세의 연령층이다. 그 이유는 취미에서가 아니라 본능에 의해 이 연령층은 생식력이 그 절정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자는 미(美), 특히 남성의 용모의 아름다움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 즉, 그 미는 자기만이 자녀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로 여자의 마음을 이끄는 것은 남자의 강건함과 이에 따르는 용기이다. 이에 의하여 강한 자식을 낳고, 동시에 그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용기있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체질상의 결함이 있고 체격이 비뚤어진 데가 있더라도, 여자 쪽에서 그 점에 결함이 없거나 또는 그 반대 방면에 뛰어나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나는 자녀에 대해서는 출산할 때 이를 시정할 수 있다. 다만 남성만이 소유하고 있는 특질로 모친으로서는 자식에게 전할 수 없는 특질은 예외이다. 예컨대 사나이다운 골격이나 떡 벌어진 어깨, 가느다란 허리, 곧은 다리, 힘찬 근육, 용기, 수염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여자는 추남을 좋아하는 경우는 있어도 사나이답지 못한 사나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결점은 여자로서 보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녀의 애정의 근거로서 고려하는 다음의 문제는 정신상의 특질에 관해서이다. 이 점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여자가 어디까지나 남자의 심정, 즉 성격의 특질에 이끌리는 일이며 그것은 부친으로부터 유전된다. 특히 소중한 것은 굳은 의지와 결단력과 용기 그리고 정직하고 선량한 마음씨로 여자의 마음을 끌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지력(知力)의 우수성은 여자에게는 직접 또는 본능적인 힘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부친으로부터 유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정신력이 뛰어난 천재가 이상기질(異常氣質)로서 여자에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거친 추남이 여자에게는 오히려 호감을 사고 정신력이 뛰어나고 얌전한 남자보다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신(지능)상으로 보면 거리가 먼 자들끼리 진실한 애정을 바탕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있다. 즉, 남자는 사납고 강한 대신에 지력이 열등하고, 여자는 감수성이 섬세하고 생각이 치밀하며, 교양이 있고 취미가 풍부한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남자는 천재요, 학자인데 여자는 바보[愚物]인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지적인 면은 전혀 도외시하고 본능만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결혼의 목적은 고상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낳기 위해서이며, 부부란 마음의 결합일 뿐 두뇌의 결합은 아니다. 여자가 남자의 정신에 반했다는 것은 허영에 가득찬 어리석은 말이거나, 아니면 변태적인 인간의 변덕이다. 이와 반대로 남자는 지능에 있어서는 여자의 성격이나 특질을 높이 평가하여 애정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 소크라테스가 그 크산티페(남편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내)를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세익스피어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독일 화가‧조각가-譯註)나 바이런 등의 경우가 다 그 실례이다. 그러나 지력의 특질은 모친에게서 유전되는 것이고, 형태의 미는 직접적으로 작용하므로, 이것이 지력 이상으로 세력을 차지하는 경우가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가 진정한 연애를 발생케 하는 근원으로서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인력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이해력이 풍부하고 소양이 있는 여자가 남자의 정신에 큰 비중을 두고, 또한 남자가 이성으로 깊이 생각하여 그 신부의 성격을 배려하는 것은 여기서 말한 내용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러한 일들은 결혼에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하더라도 지금 내가 말하는 정열적인 사랑으로 이끌 수는 없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이지만, 다음으로 개인적인 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지향하는 것은 불완전하게 나타나 있는 종족의 형체를 교정하여, 선택자 자신에게 이미 있는 변태적인 결함을 고쳐 순수한 형태로 나타내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상대편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는 점은 자기에게 결여된 면이다. 이 경우에 강한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체로 완전한 미(美)가 아니다. 여기서 정열적인 사랑이 발생하는 데 필요한 여건을 화학적으로 말하면, 산(酸)과 알칼리를 중화(中和)하면 염류(鹽類)가 발생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인간이 중화될 필요가 있다. 그 필요한 요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로 양성(兩性)은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고도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누구나 자기의 기울어진 점을 보충하고 중화시키기 위해 이성 중에서 저 사람보다 이 사람 쪽이 더 좋다는 현상이 나타나며, 새로 태어날 개체에 인류의 올바른 타입을 계승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기의 개성과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자를 필요로 하며, 모든 일을 이 새로운 개체의 성정(性情)을 목표로 행하게 된다.

 

지금 말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서로 중화되려면 남성이 여성 쪽에 잘 적응할 필요가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피차에 치우친 점을 교정해 나갈 수 있다. 그리하여 가장 남자다운 남자는 가장 여자다운 여자를 요구하며, 반대로 가장 여자다운 여자는 역시 가장 남자다운 남자를 요구하여 각자 자기의 처지와 분수에 알맞게 한다.

 

이 경우에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서로 필요한 교섭이 이루어졌느냐에 대해서는 오직 본능적으로 느끼게 마련이며, 이것이 다른 상대적인 배려와 함께 애정의 강약의 근본이 된다. 즉, 사랑하는 자끼리 서로 마음이 맞으려면 주로 여기서 말한 것, 즉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와 그 자녀의 온전함을 위한 상호의 배합이 사태의 중심이 되어 있으며, 실은 마음이 맞는다기보다는 이 편이 더 소중한 것이다. 마음이 맞아도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커다란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 적지않다.

 

그 밖에 누구나 자기의 약점이나 결점 그리고 정상에서 벗어난 변태를 상대방을 통하여 소멸시키고 보충하려고 하며, 이러한 결함이 자신에게 전해져서 변태가 되지 않도록 여러모로 고려하게 된다. 근육이 약한 남자는 그만큼 강한 여자를 요구하고, 여자 쪽에서도 역시 자기 약점에 따라 남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여자는 천성이 연약하므로 힘이 센 남자를 좋아한다. 그 밖에 또 고려하는 중요한 점은 키[身長]이다. 키가 작은 남자는 특히 키가 큰 여자를 좋아하고, 반대로 키가 작은 여자는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 이 경우에 특히 키가 작은 남자로서, 부친은 키가 컸는데 모친이 작은 편으로 체격이 왜소한 자는 키가 큰 여자에 대한 정열이 강하다.

 

반대로 부친이나 조부도 체격이 작았을 경우에는 키가 큰 여자를 요구하는 경향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 키 큰 여자가 키 큰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지나치게 키다리 자손이 태어나는 것을 방지하려는 자연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큰 여자가 사교상 으시대고 싶다는 생각에서 키 큰 남자를 택하면, 대체로 그 자손이 어리석은 행실의 변상을 해야 한다.

 

다음에 소중한 것은 빛깔이다. 금발을 가진 자는 검은 머리나 혹은 갈색 머리를 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를 한 사람은 금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금발이나 푸른 눈은 이를테면 일종의 사치 또는 변태이기 때문이다. 이에 곁들여서 내 의견을 말하면 흰 피부는 인간의 천성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은 우리 조상인 인도인처럼 본래는 검은 색깔 아니면 갈색 피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인종은 본래 자연의 품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피부의 색깔이 그만큼 바랜 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고장이 아닌 북방지역에서 침입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이식된 식물처럼 겨울에는 온실 속에 들어가야 했으며, 이것이 수천 년 계속되는 동안에 피부색깔이 점점 희게 되었을 것이다. 백인이 북쪽 지방에만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짚시는 본래 인도인종이었지만, 이주한 후로 약 400년쯤 지나 인도인의 피부색깔이 유럽인처럼 되어 갔다. 그리하여 자연은 남녀의 애정에 의해 검은 머리와 갈색 눈으로 된 원형으로 복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인의 갈색피부가 보기 흉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흰 피부가 우리에게는 제 2의 천성이 되어 있다.

 

끝으로 누구나 그 신체의 어느 부분에 대하여 자기의 결점이나 변태를 교정하려고 하며 그것이 중요한 부분일수록 그 욕구는 강한 법이다. 코가 낮은 사람이 매부리코를 몹시 부러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밖의 부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여위고 길다란 신체나 사지(四肢)를 갖고 있는 사람은 통통하고 키가 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질에 있어서도 누구나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다만 자기의 기질을 명확하게 의식할 경우에만 그렇다. 즉, 어떤 점에서 특히 완벽한 사람은 그 점에서 불완전한 사람을 요구, 또 좋아한다고 볼 수 없지만 다른 점보다 한결 관대하게 본다.

 

그리고 남자가 추녀와 사랑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피차에 잘 조화되어 여자의 변태가 마침 자기의 그것과 반대되어 이를 교정하기에 족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사랑은 매우 열렬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남녀간에 신체의 각 부분을 세밀히 관망할 경우는 으례 매우 진지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바라볼 경우에 비판안(批判眼)이 세밀하고, 또 선택이 자기본위이다. 또한 신랑이 신부를 관찰할 때에는 매우 용의주도하여 어느 모로 보든 틀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신중을 기하며, 또한 소중한 부분에 과부족이 있는 것을 오히려 좋게 생각하는 등등 모두가 그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새로 태어날 생명이 한평생 같은 육신을 이어받게 되기 때문이다. 등이 굽은 여자는 곱사등의 자식을 낳기 쉬우며 그 밖의 일들도 이와 비슷하다.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누구나 다만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해 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의 체격을 토대로 하여 이에 따라 종족의 형태를 되도록 순결하게 보존하려는 숨은 임무 때문에 종족의 이해에 순응하도록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개체 자신은 이것을 모르며 자기보다 높은 것, 즉 종족의 대리를 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남녀가 처음 만나서 서로 쳐다볼 경우도 의식적으로나마 매우 진지하며, 그들이 피차에 서로 파고드는 눈초리나 상대방의 얼굴이나 신체의 각 부분을 세밀히 주시하는 조심성에는 전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 탐색이나 음미는 종족의 영(靈)이 이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개체와 두 사람의 재능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서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고 사모하는 정도가 결정된다. 이것이 어느 정도에 도달한 후일지라도 전에는 미처 모르던 일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갑자기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종족의 영은 생식력이 있는 자 안에서 미래의 종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연애가 끊임없이 활동하고 생각하며 애를 태우면서 이룩하는 대사업은 다름 아닌 미래의 종족에의 성정(性情)에 있다. 이 중대한 일은 앞으로 대대 손손 종족에 관한 것으로, 이에 비하면 개인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연애가 언제든지 서슴지 않고 개체를 희생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애와 개체와의 관계는 불멸한 자와 멸망하는 자의 경우처럼 그 이해관계는 무한과 유한으로 갈라진다. 그리하여 오직 개인의 고락 이상의 큰 사건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말미암아 연애는 전쟁의 소동 속에서도 서슴없이 당당히 행세하고, 실생활의 격무 사이에서도, 또는 유행병이 한창일 경우에도 이루어지며 승방(僧房)의 적막 속에도 곧잘 침입한다.

 

지금까지 관찰해 온 바와 같이 사랑의 열도는 그 개체의 상호부조가 잘 이루어질수록 증대되며, 두 사람의 체질이나 성정이 종족의 형태를 되도록 훌륭하게 보존하는 데 적합하게 되려면, 한쪽은 매우 특수하여 충분히 상대방을 보충할 수 있어야 하며 이에 적합한 자를 원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정열에 불타 유일한 상대방에게 쏠리며, 종족의 특별한 대리인으로서 더욱 고상하고 늠름한 자세를 갖게 된다.

 

반대로 남녀의 성욕이 양적으로만 종족을 유지하는 데 힘쓰고 질적으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비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적인 상대가 결정되고 사랑이 극도로 뜨거워지면 이 세상의 모든 재보(財寶)는 물론 생명도 돌아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랑은 다른 것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소망이 되어 열렬히 불타며,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랑이 성취될 가망이 없으면 미치거나 또는 자살까지도 어렵지 않게 감행하게 된다.

 

이와 같이 넘치는 정열의 근원에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배려가 있지만, 그 밖에도 우리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일면이 있다. 즉, 여기서는 체격뿐만 아니라 남자의 의지와 여자의 지력이 서로 특별히 배합되어, 그 결과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개체는 어떤 일정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다.

 

이 개체의 생존은 다름 아닌 종족의 영이 두 사람의 사랑 속에 목표로 삼은 것으로, 그 근원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말로 적절히 표현하면 이 경우에 살려는 의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개체 속에 스스로 나타나려는 것이며, 이 개체는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 사이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의지 자체의 형이상학적인 요지는, 우선 미래의 양친이 될 자의 심정 이외에는 사라들 속에서 발동할 영역이 없으며 그들은 이 강압에 눌려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들을 위해 원하는 것인 줄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이 경우에 완전히 형이상(形而上)으로, 눈앞에 나타난 사물 이상으로 그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하여 실제로 개체화될 소망을 찾은 것이며, 그 개체가 세상에 태어나려는 강압은 모든 사람들의 근본 원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강압이 미래의 양친이 될 사람들 상호간의 정열이 되고, 이 정열은 안하무인격으로 거의 무비(無比)의 망상이 되므로, 사랑에 빠진 사나이는 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재보를 버리고라도 그 여자와 가까이하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교접을 하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 목적이 이 점에만 있다는 것은 이 정열은 고상한 듯하지만 다른 모든 정열과 마찬가지로 성취와 함께 소멸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당사자들도 놀란다.

 

애정의 갈등은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 어느 시대의 시인이든 끊임없이 이것을 묘사하여도 그 소재는 무진장이며, 아무리 묘사해도 흡족치 않은 것이다. 이 갈등은 일정한 여자를 얻으면 무한히 행복하리라는 현상이 수반되며, 한편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에는 큰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사랑의 갈등과 고통의 실질(實質)이 되는 것이 스쳐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개인의 수요(需要)에서 나올 리가 없다. 이것들은 모두가 종족의 영(靈)의 몸부림으로, 그 목적을 위해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으며, 성취하느냐 잃어버리느냐의 갈림길에서 깊이 탄식하는 것이다.

 

무한한 생명이 있는 것은 오직 종족뿐이며, 따라서 이 소망도 무한하고 그 만족도 무한하며, 또한 그 고통도 무한한 것이다. 이 경우에 이것들은 생멸(生滅)하는 개인의 가슴 속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이 울타리를 깨뜨릴 듯이 보이며, 무한한 행복이나 무한한 고뇌를 예상하고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당당히 여러 가지 색정을 노래한 시에 소재를 제공하고, 흔히 모든 지상의 일을 초월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상대방의 장점이 어떤 정신적인 것이고 또 객관적으로 실재(實在)하며, 그것이 이와 같은 중대한 일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가치는 사랑하는 자도 잘 모르며, 그것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종족뿐이다. 그리고 강한 정열은 첫인상에서 생기는 것이 보통이며, 세익스피어도 ‘사랑을 한 자로서 첫눈에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하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유명한 마테오 아레만의 소설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사랑을 하게 될 때 깊이 생각하여 상대를 택할 시간은 전혀 필요치 않다. 상대를 보고 거기 어떤 배합과 조화가 서로 이루어지면 족한 것으로, 요컨대 흔히 피차의 동감(同感)이라는 것만 있으면 족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면의 힘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2편 3-5)

 

이와 마찬가지로 애인이 죽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거나 하면 열렬히 사랑하던 자에게 그 괴로움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도 강하다. 그것은 고통이 개인으로서의 자기에게 관계될 뿐더러, 자기의 영원한 본성인 종족의 생명에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족의 특별한 의지와 그 위임(委任)에 의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투는 큰 고통을 주며 애인이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모든 희생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어떠한 용사도 한탄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다만 사랑의 한탄만은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종족의 탄성이다.

 

4) 사랑과 미움

 

인간은 사랑을 하고 있을 때는 때때로 희극 또는 비극적인 모범을 보여준다. 그것은 비극적이든지 희극적이든지 가릴 것 없이 사랑의 포로가 된 사람이 종족의 정신에 점유되어 지배를 받게 되면 어느새 본래의 자기 자신이 아니며, 그 사람의 행동도 본래의 개성과 엇갈리기 때문이다. 애정이 최고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의 사상은 매우 시적이며, 한편 숭고한 색조를 띠게 된다. 그뿐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현세를 벗어난 것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며, 그 때문에 본래의 목적, 실은 극히 육체적인 목적을 잘못 보고 놓쳐버리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사랑에 몸을 불태우는 사람이 단순한 개인적인 일로 말미암아 훨씬 중대한 사명을 맡는 종족의 정신에 충만되기 때문이다. 그 사명이란 이 사람만이 갖추고 있는 특성을 살리는 것, 즉 이 사람이 사나이일 경우에는 이 사람을 아버지로 하고 그의 애인을 어머니로 하는 데서만 비로소 가능하고 장래의 무하히 계속되는 자손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삶에의 의지의 객체화가 분명히 자손을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있어도 이와 같은 사랑에서는 자손을 낳을 수가 없다.

 

일상의 경험을 훨씬 초월한 중대사와 관계가 있다는 감정을 갖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모든 지상적인 것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보다도 높이 날아 올라가서, 본래는 육체적인 욕망에 지나치게 신성한 색채를 띠기 위해 평소에는 거의 산문적인 사람의 생활 속에서 매우 시적(詩的)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 애정 이야기는 희극적인 색조를 띠게 된다. 종족 속에 객체화(客體化)된 의지가 맡는 생명은, 사랑하는 사나이의 의식 속에서는 상대방의 여성과 결합이 되면 반드시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생긴다. 애정이 최고도에 달하면 이러한 망상은 극히 도리에 어긋나는 형태를 취한다. 상대방의 여성과 사랑을 맺지 못하면 사랑하는 사나이에게는 삶 자체가 모든 매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쁨이 없고, 덧없는 따분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로 말미암아 살고 싶은 의욕을 잃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여 자기의 목숨을 끊는 자도 나온다. 이러한 사람의 의지는 종족의 의지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가기도 하지만, 혹은 종족의 의지가 너무도 강력하게 개인의 의지를 압도한다.

 

이러한 사람은 종족의 의지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 속에 숨어 있는 것을 경멸한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너무도 연약한 존재가 되어 결정된 상대방에게 집중된 종족의 의지의 무한한 동경을 감당할 수 없다. 이 경우에 만일 자연이 삶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또한 절망상태의 의식을 베일로 뒤덮어 숨겨 주는 일이 없다면 자살로써 탈출을 구한다. 때로는 사랑하는 남녀가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 지금까지 말해 온 내용의 진실성이 입증되지 않은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충족되지 않는 사랑의 정열만이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정열에 충족되어도 행복보다 불행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정을 충족시키는 것은 흔히 사랑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이익과 충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설사 사랑이 성립되더라도 그 사람의 주위의 환경과 부합되지 않아 그 생활설계를 파괴함으로써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이익은 크게 손상되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외적인 환경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개성과 충돌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성적인 관계를 제외하면 혐오스럽고 경멸해 마땅한 이성-아니 본래 혐오할 수밖에 없는 이성에 매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종족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보다 강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은 본시 혐오해야 마땅한 상대의 여러 가지 특징에 눈을 감고, 모든 점을 간과하며, 모든 것을 오해하고, 자기의 정열의 대상에 언제나 매이게 된다.

 

이와 같이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사랑하는 자는 눈이 멀지만, 일단 종족의 의지가 충족되기만 하면 미망은 사라지고 거기 남는 것은 혐오스러운 생애의 반려일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매우 이성적인 훌륭한 남자가 용(龍)이나 악마와 같은 무지무지한 여인과 결혼한 것을 목격하면서도 어찌하여 그들이 이러한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도 앞에서 말한 근거로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아모르(사랑의 神)를 맹목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나이는 설사 그에게 괴로운 생애밖에는 약속해 주지 않는 약혼자의 거의 감당키 어려운 성격과 성질상의 결함을 충분히 알고, 이 때문에 시달림을 받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굽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듣지 않는다, 또 묻지 않는다.

그대에게 죄가 있는지의 여부를.

나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사 그대가 어떠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상대를 요구하고 있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자기를 위하는 상대가 아니라 장차 태어날 제 3자를 위한 상대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상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위대한 품격을 지니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정열적인 사랑에도 숭고한 기풍을 주어 능히 시로서 노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재가 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애욕은 결국에 가서 그 대상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품는 것도 양립(兩立)된다. 이로 말미암아 플라톤은 성애를 양에 대한 늑대의 사랑과 비유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결코 상대방이 들어 주지 않을 때에 일어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또한 미워한다(세익스피어, 《신베린》 제 3막).

 

이렇게 해서 불타오른 애인에 대한 증오심은 때로는 애인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하는 데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건의 몇몇 실례는 해마다 일어나고 있으며 신문지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괴테의 다음과 같은 시는 이런 점에서 바른 말을 하고 있다.

 

짓밟힌 모든 사랑과

지옥의 원소(元素)로 하여

내가 저주할 만한

분노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노라.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가 냉담하며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을 잔인하다고 한들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하는 자는 벌레의 본능과도 비슷한 충동의 영향을 받아 이성의 모든 설득에 귀를 기울여야만 자기 목적을 꾸준히 추구하여 다른 모든 일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사랑의 충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충족되지 않은 사랑의 충동을 한평생, 마치 발목에 매인 사슬을 질질 끌고 다니듯이 쓸쓸한 삼림 속에서 한숨 짓지 않을 수 없었던 페트라르카(1304~1374, 이탈리아의 시인-譯註) 한 사람뿐이 아니라 수두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의 페트라르카에게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소질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괴테의 아름다운 시가 어울린다.

 

사람들이 고뇌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신은 나에게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들려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종족의 수호신은 도처에서 개인을 수호하는 신과의 사이에 싸움을 걸어 개인에게 대적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언제나 개인의 행복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행복이 종족의 수호신의 기분에 의해 희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실례를 세익스피어는 《헨리 6세》 제 3부 제 3막에서 보여주고 있다.

 

대체 이러한 일이 생기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뿌리를 박고 있는 종족은 우리들 개인의 존재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들 개인의 권리보다 더욱 소중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종족에 관계되는 문제는 개인에게 관계되는 문제보다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옛날 사람들에게는 종족의 수호신이 *큐피드(에로스)의 형태를 빌어서 표현되었다. 큐피드는 어린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敵意)를 품고 잔인무도하기 때문에 언제나 저주를 받은 신이며, 기분에 의해 움직이는 전제적(專制的)인 악마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신(神)들이나 인간의 군주(君主)이기도 하다.

 

그대, 신들과 인간의 폭군인 에로스여!

 

흉악한 화살, 맹목과 날개가 그 속성이다. 이 경우에 날개는 변덕을 표시하고 있다. 변덕이란 일반적으로 욕망이 충족된 연후에 비로소 생기는 환멸과 함께 등장하게 마련이다.

 

정열은 단지 종족에게만 가치가 있는 것이, 마치 개인에게도 가치가 있는 듯이 생각되는 미망에 의거해 있다. 그러므로 종족의 목적이 일단 달성되면 이 미망은 소멸된다. 그때까지 개인을 사로잡고 있던 종족의 정신은 이렇게 되면 다시 개인을 해방시켜 준다. 그러나 종족의 정신에서 해방된 개인은 다시 본래의 상태, 즉 여러 가지 제약을 받은 가난한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즐거움을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고귀하게 또 용감하게 노력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성(性)의 만족이 그런 것처럼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개인은 그 후로는 기대에 어긋나 이전보다 행복하게 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는 종족의 의지에 속아넘어갔다는 것을 통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운을 타고난 테세우스는 아리아도네에게서 도망치게 된다.** 본래 페트라르카의 정열이 만족을 느끼게 되었던들, 그때부터 그의 노래는 마치 알을 낳은 새처럼 노래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 에로스(Er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을 말한다. 로마 신화의 아모르(큐피드).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시동(侍童)이라고도 한다. 날개 달린 나체의 어린아이로 표현되고 있으며, 언제나 화살을 갖고 다니면서 신들에게나 사람에게 화살을 쏘는데 황금 화살을 맞으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게 되며, 납의 화살을 맞으면 사랑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에로스가 사랑의 신이 된 것은 오랜 후일의 일로서 그는 프시케를 사랑하였다. 고대의 우주를 창조할 당시 혼란한 세상을 다스린 신으로 플라톤은 《향연》에서 지혜‧미‧선을 사랑하여 이를 추구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에로스는 사랑, 즉 성애(性愛)의 뜻으로 쓰인다.

 

** 희랍신화에서 테세우스는 크레타에서 자기를 도와준 처녀 아리아도네를 버리고 도망해 버린다.

 

5) 연애결혼과 중매결혼

 

연애결혼은 개인의 이익에서가 아니라 종족의 이익에 의거하여 결합된다. 분명히 연애결혼을 한 당사자들은 자기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본래의 목적은 그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이지만 그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개인을 낳는 데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친밀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 될수록 조화하여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정열적인 연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본능적인 미망에 의해 결합된 부부는, 다른 점에서 보면 각각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인 경우가 때때로 있다. 즉, 그 미망이 소멸되자마자 곧 두 사람이 이질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연애결혼은 일반적으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연애결혼이 현재의 부부의 희생으로 장래의 세대를 위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애결혼을 한 자는 고뇌를 벗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스페인의 옛말도 있다.

 

편의상 주로 양친이 선택해서 결합된 결혼은 이와는 반대의 관계에 있다. 어떤 형식을 취하건 이러한 결혼은 결합되는 두 사람의 남녀의 행복을 위주로 하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자손들에게는 불리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와 같은 결론에 의해 결합된 두 사람이 원만히 가정생활을 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이다.

 

결혼의 조건으로서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금전에만 구애되는 남자는 종족 속에서보다 오히려 개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남자의 태도는 진리에 위배되며, 따라서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게 마련이다.

 

한편 부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유한 중년 남자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여러 가지 편의나 이득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고 나서 오직 자기의 본능적인 애정에 따라 남편을 택한 처녀는, 그녀 자신의 행복을 종족의 행복을 위해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뭐니뭐니해도 그녀는 보다 중요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의 뜻에 따라(종족에 의거하여)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양친은 개인의 이기주의에 의거하여 충고한 것이 된다. 모든 점으로 보아 혼인을 맺게 되면 개인의 이익이나, 혹은 종족의 이익 중에서 어느 한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결혼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 편의와 이익에 대한 계산과 정열적인 애정이 함께 손을 마주잡고 골인하는 경우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행운이라고 하겠다. 대다수의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또는 지능적으로도 바람직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은 이유의 일부는, 본래 결혼 자체가 순수한 선택이나 애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무적인 배려나 우연의 상황 속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편의와 이익이라는 관점과 병행하여 애정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결혼은 이를테면 종족의 수호신과 화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행복한 결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의 목적이 현재 살고 있는 당사자가 아닌 장래의 세대라는 것이 결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평한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위안이 되기 위해 첨가하는 말이지만, 때로는 정열적인 성애에도 전혀 기원을 달리하는 감정, 즉 참된 사고방식에 일치되는 우정이 부부 사이에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정은 성애를 만족시키려는 본래의 감정이 소멸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우정이 생기는 것은 거의가 다음과 같은 처지에서이다. 즉, 각자가 지닌 바 육체적, 도덕적, 그리고 지적인 특질을 서로 보충하고 커버해 나가는 부부는 다음 세대의 자손을 낳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을 개인적으로 보았을 경우에도 각각 다른 성격이나 정신적인 특성을 서로 보충하고 커버해 나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생활감정이 무리없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6) 사랑의 배반

 

그럼 어찌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한 귀의(歸依)의 심정으로 가득 차, 자기가 택한 사람에게 매혹되어 애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을 지불해도 무방하다는 태도를 취하게 될까?

 

그것은 애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사랑하는 사람의 불사(不死)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은 모두가 언젠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특정한 애인에 대한 사랑하는 남자의 활발한, 아니 미친 듯한 욕구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파괴되지 않으며, 또한 이 핵심이 종족 속에서 유지됨을 직접 보증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의 핵심이 종족 속에 지속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이것은 대단한 것이 못 된다고 단정한다면 잘못이다.

 

어찌하여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될까? 그것은 종족의 지속을 단지 우리를 닮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와 동일하지 않은 자가 장차 존재한다는 것 이상으로 생각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족이라고 하더라도, 다만 밖으로 향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종족의 외관(外觀), 즉 우리가 몸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습만을 염두에 둘 뿐 종족의 내면적인 본질을 간파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내면적인 본질이야말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중심이 되는 터전을 이루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자체보다도 더욱 직접적인 것이며, 개체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는 물자체(Ding an sich)이다. 개인은 저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종족의 내면적인 본질은 모든 개인을 통하여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 내면적인 본질이야말로 삶과 그 지속을 절실히 갈망하고 있는 삶에의 의지이다.

 

이것은 죽어도 전혀 장애를 받지 않으며 여전히 남아서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생활이 현재의 상태보다 결코 좋은 상태로 향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항상 고뇌와 죽음이 따르는 삶밖에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 괴로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지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개인의 의지는 종족의 근원에서 해방되어 종족 속에 생존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찾아볼 수 없고 사실의 밑받침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이것을 삶에의 의지가 되느냐, 혹은 삶에의 의지가 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자유를 가진 자로서 규정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삶에의 의지가 되지 않는 것을 불교 용어로는 열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무엇이라고 해명할 수 없는 모든 인간 의식의 정점이다.

 

이와 같은 관찰의 입장에 서서 현세의 영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모든 인간은 삶의 고통과 고뇌에 사로잡혀 있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무한한 욕구를 만족시켜 여러 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고뇌에 충만한 개인적인 생존을 잠시동안 보유하는 것 이상의 기대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동경에 충만한 눈짓을 주고받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사람은 그처럼 몰래 두려운 심정으로, 마치 훔쳐보는 듯한 눈초리를 교환하는 것일까? 그것은 애인끼리 몰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영원히 반복시키려는 배반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고통과 고뇌의 되풀이는 곧 끝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들과 같은 애인들이 일찌기 이것을 거부한 것처럼, 지금도 고통과 노고의 반복을 종결하는 것을 가로막으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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