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8. 天才에 대하여

rainbow3 2019. 9. 21. 17:47


8. 天才에 대하여

 

1) 天才란?

 

그러면 대체 어떠한 인식방법이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어, 그 밖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것만이 세계의 진정한 본질적인 것이고,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현상의 본래의 내용이며, 사물의 천태만상의 변화를 쫓지 않고 모든 시대를 통하여 언제나 진리로서 인식된 것을, 요컨대 물자체(Ding an sich), 즉 의지의 직접적인 적절한 객체화인 이데아(理念)를 관찰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방법에 의한 것은 예술, 곧 천재의 노작(勞作)이다. 예술은 순수한 관상(觀想)으로 파악한 영원의 이념을 세계의 모든 현상에 있어서의 본질적, 그리고 영속적인 것으로서 반복한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는 재료에 의해 예술은 조형예술도 되고 시나 음악도 된다. 예술의 유일한 기원도 이념의 인식이며, 예술의 유일한 목표는 이 인식의 전달이다.

 

모든 학문은 여러 가지 형태로 형성된 근거나 결과가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유동하는 모습을 추구하여 설사 한번쯤은 이렇다 할 목표에 도달하더라도 반드시 언제나 더 앞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어, 최종목표에 도달하거나 완전한 목적을 얻을 수는 결코 없다. 그것은 마치 눈이 지평선과 접해 있는 곳에 도달하려고 계속해서 달려가지만, 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예술은 도처에서 목표에 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관상의 대상을 세계의 움직임의 흐름 속에서 취하여 이것만을 단독으로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는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던 이 분리된 개물(個物)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의 무한한 다양성과 필적(匹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와 같이 개물과 함께 있다. 그리하여 시간의 수레는 정지되어 모든 상관관계는 소멸된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 이념만이 예술의 대상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참으로 근거율(根據律)에 구속되지 않는 사물의 관찰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찰방식은 경험과 학문의 방식인 보다 더 열등한 관찰방식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경험에 의존하는 관찰방식을 무한히 수평을 달리는 선과 비교할 수 있다면, 예술의 관찰방식은 그 수평으로 달리는 선 곳곳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수직으로 교차되는 선과 비교할 수 있다.

 

근거율(根據律)에 따르고 있는 것은 이성적 관찰방식으로, 여러 가지 학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실제 생활 속에서만 타당하며 그 나름대로 유용하다. 한편, 근거율의 내용을 떠나서 관찰하는 방식은 예술에서만 통용되며 또한 유용한 것이다.

 

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방식이고, 후자는 대체로 플라톤의 관찰방식과 유사하다. 전자는 시작도 목표도 없이 유출(流出)하여 모든 것을 굴절시키고 이동시키면서 흘러내리는 격류(激流)에 비유할 수 있고, 후자는 이 격류의 진로를 횡단해 나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격류에 의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침착한 태양광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끊임없이 변전(變轉)하여 잠시도 쉬지 않는 폭포 속에서 급격히 유동하는 무수한 물방울과 흡사하며, 후자는 이 소용돌이치는 혼란 위에 조용히 그리고 유연(悠然)하게 걸려 있는 무지개와 같다.

 

앞에서 말한 대상에 완전히 몰입(沒入)된, 순수한 관상(觀想)에 의해서만 이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뛰어난 능력 속에 있다. 그것은 이러한 관상이 자기 자신의 일이나 주위와의 관계 등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재란 객관성(客觀性)을 갖추는 것, 다시 말해서 정신이 객관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주관적인 자기 자신의 일에 구애되는, 즉 의지대로 움직이는 방법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따라서 천재란 순수하게 사물을 보는 태도를 취하고 관찰 속에 몰입되어, 본래는 의지에 봉사하기 위해 있는 인식을 그 봉사에서 떠나게 하는 능력이다. 곧 천재란 의지의 관심, 의욕, 목적 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순수하게 인식하는 주관으로서 분명히 사물을 통찰하는 세계의 눈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 자기의 사사로운 일을 한동안 완전히 저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천재는 한순간만 그렇게 하고 있으면 족한 것이 아니라, 파악한 것을 훌륭한 예술로 변형시켜 ‘동요하는 현상 속에 표류(漂流)하는 것을 지속적인 사고 속에 확립하는’ 충분한 인내력과 냉정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천재의 능력이 어느 특정한 개인 속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개인의 의지에 봉사하기 위해 필요한 인식능력을 훨씬 더 능가하는 인식능력을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넘치는 인식은 의지에 구애되지 않는 주관으로서 세계의 본질을 반영하는 밝은 거울이 된다. 이것은 천재적인 사람에게는, 그 활발함이 불안한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현실이 의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의해서는 좀처럼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의식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격려하여 언제나 새로운, 그리고 관찰하기에 충분한 대상을 추구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본심을 전할 수 있는, 자기를 닮은, 자기와 필적(匹敵)할 만한 상대를 구하려는 거의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한편, 평범한 세속적인 사람들은 당면한 현실생활에 주력하는 것이 고작이며, 게다가 여기에 만족하여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의 생활을 재미있게 해나가기만 하면 되는 자기를 닮은 상대를 곳곳에서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천재에게 있을 수 없다. 천재의 본질적인 구성부문은 공상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천재가 곧 공상이라고까지 말해 왔었다. 전자는 정당하지만, 후자는 잘못이다.

 

천재가 본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영원의 이념 세계와 그 모든 현상의 지속적‧본질적인 혀이며, 그러면서도 이념의 인식은 결코 추상적이 아니라 반드시 명백해야 하기 때문에, 만일 공상의 힘이 천재의 시계(視界)를 그 개인적인 경험의 현실을 초월하고 확대시켜서, 천재가 실제로 지각한 사소한 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구성하여 거의 모든 가능한 삶의 모습을 눈앞에 전개시키는 입장에 천재를 두지 않으면, 천재의 인식은 자기 자신의 주위에 현존하는 대상의 이념에 한정되어 현재 있는 대상에만 천재를 향하게 한 여러 가지 상황의 연쇄(連鎖)에 매어 두는 결과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대상은 거의가 그 속에 표현되는 이념의 매우 불완전한 실례(實例)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천재로서는 사물 속에 자연이 현실에 형성시킨 것뿐만 아니라, 자연이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형식의 투쟁 때문에 현실화되지 못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공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조각(彫刻)에 대하여 언급할 때 한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공상은 천재의 눈앞에서 실제로 전개되고 있는 대상에 대한 그의 시계(視界)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대시켜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더라도, 비상하게 강한 공상의 힘은 천재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기 보다는 천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의 경우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독창성이 결여된 인간이 여러 가지 공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 이치는 의외로 간단하다. 현실의 대상은 다음과 같은 전혀 반대되는 관계에 있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이념 자체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근거율(根據律)에 입각하여 다른 대상이나 자기 자신과 관련시켜 관찰하는 통속적인 방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환영(幻影)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방법에 의해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의 경우에는, 환영도 이념을 인식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이것을 전하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둘째의 경우에는, 환영은 자기의 이기심이나 자기 멋대로의 기분에 따르는 공중누각(空中樓閣)을 세우기 위해 소비되며 일시적으로 마음을 기만하거나 즐겁게 하는 수단이 된다.

 

셋째의 경우에는 여러 모로 에워싼 환영 속에서 인식되는 것은 오직 관련뿐이다. 이러한 환영에 사로잡혀 좋아하는 자는 몽상가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혼자 좋아하고 있는 영상을 함부로 현실 속에 뒤섞어, 결국 현실에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람이 자기 공상이 빚어내는 영상을 기록하였다면, 이것은 아마도 갖가지 통속소설로 변해 저자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나 대중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독자들은 주인공의 위치에서 몽상하고 이 소설의 묘사는 매우 잘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2) 天才와 狂氣

 

천재와 광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뒤섞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여러 번 지적한 일이 있다. 그 뿐만 아니다. 시적인 감동은 일종의 광기라고 불리워 왔다.

 

호라티우스는 이것을 「사랑스러운 광기」라고 부르고(頌歌 3의 4), 비란트(1733~1813, 괴테와 같은 시대의 독일의 시인. 서사시 《오베론》이 유명하다-譯註)는 「부드러운 광기」라고 불렀다. 세네카의 주장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도 ‘광기를 아울러 지니지 않은 천재는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플라톤은 어두운 동굴의 신화 속에서(《국가》 제 7장) 이 사실을 ‘동굴 밖에서 실제의 햇빛과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본 자는 눈이 암흑에 익숙해지는 법이 없기 때문에 동굴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플라톤은 《파이드로스》 속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어떤 종류의 광기가 없이는 참된 시인이 될 수 없으며, 변전(變轉)하는 사물 속에 영원한 이데아를 인식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고 서술하였다. 키케로도 ‘데모크리토스는 광기가 없는 시인은 위대해질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 플라톤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서술했으며, 끝으로 포프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위대한 정신은 광기와 흡사하다.

양자의 사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다.

 

이 점에서 배울 바가 특히 많은 것은, 괴테의 희곡 《트르콰트 타소》이다. 괴테는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의 본래의 모습, 괴로워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천재가 자연스럽게 광기로 옮아가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였다.

 

실제로 천재와 광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매우 천재적인 사람들, 예컨대 루소, 바이런, 알피에리(1749~1803, 이탈리아 극작가-譯註) 등의 전기나 그 밖의 사람들의 생활에서 취한 일화에 의해 확인되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정신병원을 부지런히 찾아가보면 분명히 큰 재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천재적인 소질이 그 광기 속에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결국 광기의 편이 완전히 지배력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연한 일로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광인(狂人)의 수는 비교적 적고, 천재는 일반 수준에서 평가해 볼 때 매우 드문, 따라서 자연 속에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서 극단의 예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유럽 전문화권의 고대‧근대를 통하여 태어난 참으로 위대한 천재란 모든 시대에 인류에게 불멸의 가치를 지닌 업적을 남긴 사람들만이 해당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수를 헤아려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는 2억 5천만의 사람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수가 얼마나 적은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그다지 위대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정신적으로 뛰어난 몇몇 사람들이 가벼운 광기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지성이 일반 척도 이상으로 뛰어나거나 혹은 비상하다는 것은 이미 광기의 경향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凡人과 天才 천재란 또한 과도한 지성을 지닌 자로서, 그 지성은 존재의 일반적인 것에 적용될 경우에는 이용가치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보통 사람의 지성이 개개인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의 지성은 인류 전체에 봉사할 책임이 있다. ‘보통 사람은 3분의 2가 의지, 3분의 1이 지성으로 되어 있지만, 천재는 3분의 2가 지성, 3분의 1이 의지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화학의 예를 들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중성염의 염기와 산은, 그 양자의 어느 쪽과도 산소기가 서로 반대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염기, 혹은 알칼리는 그 중에서 산소에 대립되는 기가 우세함으로써 산은 그 속에서 산소가 우세함으로써 각각 구별된다.

 

의지와 지성에 있어서 천재와 범인도 이와 마찬가지 관계에 있다. 이로 말미암아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양자의 모든 본질‧행동‧동작 속에 이미 나타나 있지만 진정한 차이는 양자의 업적 속에 분명히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차이를 다시 화학작용과 비교한다면 화학 원소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은 상호간의 강력한 친화력‧견인력(牽引力)의 근본이 되는 반면에 인류에 있어서는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다.

 

천재의 넘치는 인식능력이 불러일으키는 것 중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가장 근본적이고 또한 기본적인, 즉 직관적(直觀的)인 인식이며 이 인식의 현상 속에 반복되도록 되어 있다. 이리하여 화가와 극작가가 탄생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천재적인 통찰(洞察)과 예술적인 창조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따라서 이런 면에서 천재와 그 활동이 표현되는 형식은 아주 단순하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모든 예술-시나 철학을 포함한-에 있어서의 진정한 작품의 소재가 되는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론 그 과정은 그림이나 조각의 경우처럼 단순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표시되는 것이다.

 

4) 慧星

 

이 모든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천부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자기 재능을 발휘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에 몰두하여 즐기고 있을 때에는 분명히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재의 소질이 천재에게 행복한 생애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와 반대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천재의 전기 속에 기록된 여러 가지 경험도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천재의 행동이 거의 모든 경우에 시대와 모순되며 이에 항쟁하게 마련이므로 천재는 외부와의 관계가 원만치 않다. 그 일반적인 재능은 언제나 시대에 잘 부합된다. 그것은 재능이란 본래 시대정신에 자극을 받고 시대정신의 요구에서 생긴 것이므로, 이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그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같은 시대 사람들의 진보적인 개혁운동에 투신하거나, 개개의 학문의 체계적인 발전에 봉사해 나가는 중에 보상이나 찬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노작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게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주어야 하지만 이 사람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이와 반대로 천재는 시대라는 유성궤도에 뛰어든 혜성 같은 것이다. 유성궤도의 규칙적인, 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질서에서 보면 혜성의 변덕스러운 진로는 매우 기이하게 보인다. 따라서 천재는 시대의 전부터 확립된 규칙적인 궤도에 투신할 수 없으며, 그의 능력을(마치 죽음을 앞둔 황제가 창을 적에게 던지는 것처럼) 시대가 뒤쫓아가서 겨우 붙잡을 수 있는 아득히 먼 코스에 던지는 것이다.

 


'인문철학 > 쇼펜하우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歷史와 文學  (0) 2019.09.21
9. 藝術에 대하여  (0) 2019.09.21
7. 道德의 根源  (0) 2019.09.21
6. 性愛의 哲理  (0) 2019.09.21
5. 不滅의 意志에 대하여  (0) 2019.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