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9. 藝術에 대하여

rainbow3 2019. 9. 21. 17:48

9. 藝術에 대하여

 

1) 人間美

 

인간의 아름다움도 의지의 가장 완전한 객체화가 인식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에서 표시된 객관적 표현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식 속에 온전히 표현되어 있는 인간의 이념일반이다.

 

어떻게 보면 미의 객관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극단적인 측면도 따르는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보다,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한순간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주고 우리 자신을, 아니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는 것은 없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가장 명백하고 또 순수하게 의지를 인식하는 입장에 서게 될 뿐만 아니라, 가장 손쉽고 신속하게 순수한 인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순수한 인식의 상태에 미적인 기쁨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인격도 그리고 언제나 고통이 따르는 우리의 욕구도 소멸된다. 그리하여 괴테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은 절대로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계가 조화되어 있음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면 자연은 어떻게 하여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었는가? 의지가 인간이라는 최고의 단계에서 개인 속에 개체화 되는 데 있어서 유리한 주위의 상황과 그 힘의 덕택에, 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의지의 여러 가지 현상을 빚어낸 모든 장해와 저항을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일까.

 

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이란, 자연의 모든 힘을 가리킨다. 의지는 이 힘에서 모든 것에 속해야 하는 소재를 우선 획득하거나 탈취해야 한다. 그리고 높은 단계에 도달한 의지의 현상은 언제나 그 형식 속에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나무는 단지 싹이 트는 섬유가 무수히 반복된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결합은 높은 단계에 도달함에 따라서 점점 거대하게 된다. 그리고 인체는 여러 부분을 최고도로 집합시킨 조직체이며, 그 각 부분은 분명히 전체에 속해 있지만 각각 고유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인체의 각 부분이 모두가 각각 적합한 방식으로 전체에 종속되면서, 또한 부분끼리도 서로 적응하는 관계에 있으면서 전체의 표현을 위해 조화를 지니면서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어느 부분도 과대하게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비소(卑小)하게 되는 일도 없다. 이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미(美)를, 즉 완전히 이루어진 성격을 조성하는 보기 드문 여러 조건이다.

 

자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예술도 그럴까?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술가가 경험 이전에 미를 선취(先取)하지 못하였던들 무엇에 의해 훌륭한 작품, 모방해야 할 작품을 인식하고 이것을 실패한 작품과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옛날의 독일 화가들이 자연의 모방에 의해 어떤 아름다움에 도달하였는지 알고 있다. 그들의 적나라한 형상을 관찰해 보라. 순수하게 후천적으로, 단지 경험에 의해서만 이를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의 인식은, 물론 선천적으로 의식된 근거율(根據律)의 여러 형태와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인식일반의 가능성을 밑받침하여 현상의 일반적인 형태를 정하며, 그 대상은 현상의 일반형식이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수학이나 순수 자연과학이 발생된다.

 

이와 반대로 미의 표현을 가능케 하는 다른 선천적인 인식 방법은, 현상의 형식 대신에 내용을, 현상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현상이 무엇인가를 문제 삼는다. 우리는 누구나 실물을 보면 인간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만, 참된 예술가는 미를 아주 분명히 파악하기 때문에 자기가 미처 보지 않은 것 같은 인간미를 표현하여 현실의 자연 이상의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비로소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 의지의 적절한 객체화가 발견되고 평가되어,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이에 의해서만 우리도 실제로 자연(이것은 우리의 독특한 본질을 형성하는 의지 자체이다)이 표현하려고 한 것을 선취할 수 있다. 참된 예술가는 이러한 선취가 어느 정도의 깊은 사려(思慮)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개개의 사슬 속에서 그 이념을 간파할 때 자연이 대충 말한 것을 이해하고, 자연이 더듬거리면서 말한 것을 순수하게 표현한다. 또한 예술가도 자연이 몇천 번이나 시도해서 실패한 형식미를 딱딱한 대리석 위에 표현하여 이것을 자연에 대립시키고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말한 것이다!”

“그렇다. 사실 말한 그대로이다.”

 

이런 대답이 이번에는 예술행위에 종사하는 식자(識者)에게서 들려온다.

 

오직 이렇게 해서만이 천재적인 희랍인은 인간 모습의 원형(原形)을 발견하고, 이것을 조각가들의 기준으로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취에 의해서만, 우리는 누구나 자연이 개개의 사물에 대하여 성공을 거둔 미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취는 이상이다. 그리고 이것이 적어도 절반은 선천적으로 인식된 것으로, 자연에 의해 후천적으로 주어진 것을 보강(補强)하기 위해 작용함으로써 예술을 실제로 완성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선취는 바로 이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선천적으로 미를 선취하는 한편 감상가(鑑賞家)가 후천적으로 이것을 승인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예술가나 감상가가 객체화된 의지인 자연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엠페도클레스가 말했듯이 같은 것은 다만 같은 것에 의해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자연은 자기 자신만을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해명된다. 마찬가지로 정신도 정신에 의해서만 분별된다.*

 

* 마지막 이 문장은 에르베시우스의 ‘정신을 느끼는 것은 정신밖에는 없다’는 말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으로, 초판에서는 이것을 지적해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로, 사람을 우매하게 만드는 헤겔의 엉터리 철학의 영향을 받아 시대는 바야흐로 말세의 증상을 보이고 사고방식이 매우 조잡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 문장까지 ‘정신과 자연’의 대립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오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도 할 수 없이 이런 엉터리 철학의 위조에 대하여 분명히 몸을 수호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2) 崇高性

 

멀리 바라보이는 지평선이 쓸쓸하기 짝이 없는 고장에 가보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나무와 푸성귀들은 바람도 일지 않는 대기 속에 성장해 가매, 동물도 사람도 없고 물도 흐르지 않는 것같은 깊은 고요에 싸여 있다. 이러한 고장은 마치 모든 욕망과 이에 따르는 궁핍에서 몸을 해방시켜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쓸쓸한 고요에 묻힌 이 고장에 숭고한 정취(情趣)를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장은 끊임없이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의지에 대하여, 바람직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불문하고 아무 대상도 주지 않고 다만 순수하게 관조하는 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고장에서 명상에 잠길 수 없는 사람은 의지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데서 비롯되는 공허나 권태의 괴로움 때문에 남부끄러운 자격지심을 느끼면서도 여기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고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자신의 지적인 가치의 척도를 부여해 준다.

 

이 지적 가치의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대체로 우리가 얼마나 고독을 감당할 수 있는가 혹은 고독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좋은 척도가 된다. 이런 고장은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숭고성의 좋은 보기를 제공해 준다. 이 고장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조용히 매우 조심스럽게 순수한 인식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반면에, 이와는 전혀 대조적인 기분, 즉 전에는 언제나 욕망에서 욕망으로 쫓아가는 의지에 따라 가련한 존재였던 것을 상기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북아메리카 내륙의 끝없는 대평원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숭고한 감정과 흡사한 것이다.

 

이번에는 이러한 고장에서 다시 식물까지도 없애고, 오직 벌거벗은 바위만 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유기체의 완전한 결여로 말미암아 의지도 곧 불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황량한 모습은 무서운 생각을 갖게 하고, 우리의 기분은 아주 처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인식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지만 동시에 의지의 이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게다가 우리가 순수한 인식의상태에 굳게 서 있는 동안에 숭고한 감각을 분명히 느끼게 될 것이다.

 

더욱 높은 숭고함은 다음과 같은 고장에 이르러야만 체득할 수 있다. 자연은 사나운 회오리처럼 활동하고 있다. 주위는 대부분 암흑에 덮이고 하늘에는 사나운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다. 너무나 굴곡이 심하기 때문에 조망(眺望)을 방해하고 있는 몹시 경사진 바위는 매우 거대하며, 그 외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고 물거품을 일으키며 흐르는 강도 있다. 매우 황량한 풍경이다. 골짜기를 스치는 바람은 소리 높이 윙윙거리고 있다.

 

우리는 손발이 묶여 있으며 우리가 대적하는 자연과 싸워야 한다. 또한 이 싸움에 의지가 꺾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고뇌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고 사물을 미학적으로 감상하려는 입장에 설 수 있는 한, 설사 이 풍토 속에서 자연의 투쟁이나 의지가 꺾인 모습을 분명히 목격하였다고 하더라도 인식의 순수한 주체는 모든 것을 분명히 통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식의 주체는 현재 의지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여러 대상에 접하였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에 끌려가지 않고 침착하게 현혹됨이 없이 이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대조 속에야말로 숭고한 감정의 기반이 있다.

 

그러나 분노에 가득 차 미칠 듯한 자연의 여러 가지 요소의 싸움이 더욱 대규모로 확대되는 것을 볼 때, 앞에서 말한 황량한 고장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흐르는 물결이 너무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서 자기 못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때, 그리고 폭풍이 닥쳐와 성난 파도가 이는 거친 바닷가에 설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은 더욱 강렬해진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는 어떠한 광경이 전개될까? 집채 같은 큰 파도가 일면서 험한 바닷가의 낭떠러지에 부딪히면 물결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폭풍은 윙윙거리고, 바다는 울부짖어도 검은 구름 속에서 번뜩이는 번개와 우뢰 소리는 이를 압도하며 빛나고 거칠게 포효한다.

 

이러한 모습을 태연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이중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우선, 자연의 그 광폭한 힘이 조금이라도 밀어닥치면 곧 쓰러져 강력한 자연을 상대하여 대항하기는 커녕 우연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의지의 빈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며, 인간이 자연의 힘 앞에서는 얼마나 무에 가까운 빈약한 존재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 사람은 자기가 객관의 조건이며 이 모든 세계의 주인인, 영원히 평온한 인식의 주체임을 느끼게 된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미친 듯이 날뛰는 자연의 싸움도 단지 그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욕망과 온갖 결핍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독립하여 이념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이 숭고한 것에서 느끼는 인상이다. 이것을 감득하는 방법은,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며 인간에게 멸망의 위협을 주는 힘을 바라보는 것이다.

 

3) 藝術의 감상

 

모든 욕망은 결핍이나 부족 그리고 고뇌에서 생긴다. 욕망은 충족되면 곧 사라진다. 그렇지만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다른 욕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요는 오랜 기간에 걸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한편, 충족은 짧은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며 그나마 보잘것없는 것이다. 충분한 만족 자체는 극히 일시적인 것이다. 욕망은 충족되면 곧 새로운 욕망에 장소를 넘긴다.

 

그런데 낡은 욕망은 이미 알아차린 오산이며, 새로운 욕망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오산이다. 확실히 욕망의 대상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결코 지속적인, 그리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만족은 얻을 수 없다. 이런 것은 거지에게 던져주는 먹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거지에게 오늘의 생명은 보장해 주지만 내일까지 그 고통을 연장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이 우리의 의지에 의해 충족되어 있으며 우리가 언제나 기대를 걸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욕망의 충동에 몸을 맡기는 욕망의 주체인 한, 우리는 절대로 지속적인 행복이나 안정은 누릴 수 없다.

 

우리가 돌진하건, 도망치건, 불행을 두려워하건, 쾌락을 추구하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어떠한 형태를 취하더라도 언제나 욕구하는 의지에의 배려가 의식을 충족시키고 끊임없이 의식을 앞으로 움직여 나간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욕망의 주체는 끊임없이 회전하는 이크시온의 수레에 결부되어, 다나오스의 처녀들처럼 키로 물을 길어 탄탈로스처럼 영원히 갈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외적인 기회나 내적인 기분의 변화로, 우리가 갑자기 욕망의 무한한 흐름에서 이탈하여 인식이 의지를 노예처럼 섬기는 것을 중지하고, 우리의 관심이 이미 욕망의 동기에 향하는 일이 없으며, 사물을 의지와 무관하게 자유자재로 파악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물을 동기로서가 아니라 단지 표상으로서 파악하고 이해득실이나 어떤 타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또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사물을 순수하게 관찰한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추구하는데도 언제나 번번히 사라져 버리던 마음의 평화를 비로소 누리게 되어 이것이야말로 행복이라는 기분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저 에피쿠로스가 최고의 선, 신들의 경지라고 찬양한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순간에는 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의지의 충동에서 해방되어, 의지가 부과한 이른바 수용소의 강제노동을 쉬는 안식일을 축복하고 이크시온의 수레는 정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내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이념의 인식에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바로 순수한 명상, 직관 속에 몰입(沒入)하여 대상자체가 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모조리 망각하고 근거율(根據律)에 따라 다만 사물의 관계만을 이해하는 인식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불가불 이루어지는 것은, 눈앞에 본 개개의 사물을 이들 사물이 속하는 종의 이념으로까지 높이고, 또한 인식하는 개개인을 이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인식의 순수한 주관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일만 갖추어져 있으면 이미 시간의 흐름이나 모든 다른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시달림을 받는 일이 없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태양이 가라앉는 모습을 감옥 안에서 바라보건 혹은 궁전 안에서 바라보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식이 의지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면적인 심정에 젖어 있으면 어떠한 환경에 있어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네덜란드의 뛰어난 화가들은 그려서 보여준다. 그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직관을 전혀 보잘것없는 대상에까지 미치게 하여, 그들이 얼마나 객관성과 정신적인 평안을 지니고 있는가를 조용한 생활을 묘사함으로써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감각을 갖춘 감상자라면 그들의 작품을 무감동하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감상자는 보잘것없는 사물을 이와 같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세밀히 관찰하고나서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이미지를 신중하게 재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침착하고 조용하며 의지로부터 자유를 얻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의 심리상태를 상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화가으 ㅣ경지에 관심을 갖기를 요구하는 한편, 감상자의 감동은 그의 불안정한 커다란 욕망에 의해 흐려진 마음의 바탕과 화가들의 경지를 비교함으로써 점점 더 고양되어 가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화가들과 같은 정신을 가진 풍경화가들, 특히 로이스달은 극히 보잘것없는 자연의 사물을 그려서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과 같은 효과를 즐겨 표현하였다.

 

* 테살리아 왕 이크시온은 제우스의 벌을 받아 영원히 멈추는 일이 없는 수레에 태워졌다. 다나오스의 딸과 탄탈로스의 이야기가 끊임없는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희랍신화이다.

 

4) 藝術과 현실

 

네덜란드파의 훌륭한 화가들에 대하여 단지 그들의 기교의 능력만을 평가하는 데 그치고, 한편 그들이 묘사한 대상이 거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하였다고 해서 그들을 경시(輕視)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이다. 대체로 네덜란드파의 화가들과는 달리 세계사적인 사건이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묘사한 화가들만이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에 우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어떤 행위의 내면적인 중요성은 외면적인 중요성과 전혀 다르며 그리고 양자는 때때로 완전히 분리된 채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외면적인 중요성이란 그 행위가 현실세계 속에서,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하여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느냐 하는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근거율에 따르고 있다. 한편, 내면적인 중요성이란 그 행위에 의해 해명된 인간의 이념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여 나타나는 것일까? 자기 행위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분명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표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목적하는 바에 따라 형성된 환경 속에서 자기들의 특성을 발휘한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인간의 이념 속에서 좀처럼 나타나는 일이 없는 측면이 비로소 분명하게 된다. 예술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내면적인 중요성이다. 외면적이 ㄴ중요성은 역사 속에서 통용될 따름이다. 양자는 서로 완전히 독립되어 존재하며 간혹 함께 나타나는 일도 있지만 각자 전혀 개별적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역사상 이 이상 더 의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행위도 내면적인 중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극히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것에 불과할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와 반대로 일상생활의 한 장면이라도 그 속에서 개개의 인간이 지닌 개성이나 인간의 행동 및 욕구가 구석구석 그 깊은 움직임까지 분명히 밝은 빛 속에 나타나 있을 경우에는 매우 중요한 내면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

 

5) 藝術의 위안

 

모든 미와 예술이 주는 위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삶의 괴로움을 망각시켜 주는 예술가의 열정은 일반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천재의 특권이다.

 

천재는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만큼 이질적인 사람들 속에서 더욱 큰 괴로움을 느끼고 고독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의 특권은 이러한 괴로움을 보상하여 준다. 지금까지 상세히 해명해 온 바와 같이 삶 자체는 의지이며, 생존은 끊임없는 고뇌인 동시에 어떤 때는 비참하기 짝이 없고, 또 어떤 때는 공포에 가득 차 있는 반면에 같은 삶이라는 표상으로서만 파악하였을 경우,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감상할 경우나 혹은 예술을 재현하였을 경우에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연극을 전개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순수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어떤 예술 속에 재현하는 것은 예술가의 사명이다. 예술가를 매혹하는 것은 의지의 객체화라는 연극을 보는 것이다. 예술가는 이 연극의 옆에 멈춰서서 언제까지나 이를 넋없이 바라보고 표현을 통하여 이것을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연극을 상연시키는 비용까지도 감당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즉, 예술가 자신이 객체화하여 언제나 고뇌 속에 머물러 있는 의지 자체가 될 것이다.

 

예술가는 세계의 본질을 순수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깊이 인식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그 목적의 곁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예술가는 나중에 서술하는 바와 같은 체념에 도달한 성자의 경지인 의지의 진정(鎭靜)에는 이르지 못한다. 예술가는 결단코 해탈하는 일이 없으며 다만 한순간만 삶에서 해방될 뿐이다. 그것도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때때로 위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 위안을 느껴 점차 힘을 얻게 된 예술가가 때로는 유희로 일하는 데 싫증이 나서 삶의 엄격한 장면을 붙잡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잘 말해주는 것이 라파엘로의 성 세칠리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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