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11. 音樂의 形而上學

rainbow3 2019. 9. 21. 17:49

11. 音樂의 形而上學

 

1) 音樂의 根源

 

나는 다채로운 형식을 갖는 음악의 인상에 모든 정신력을 집중하여, 그 후 다시 검토하고 나서 현재 집필하고 있는 이 책 속에 나타나 있는 그러한 정신상태로 돌아갔을 때, 나에게 분명히 충부한 만족을 주며 나의 연구에도 의의가 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나의 입장에 서서 나의 세계관에 동조해 온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는 바가 많았으리라고 생각하는 음악의 본질 및 각각 유사한 점에서,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음악과 그 본보기도 되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것이구나 하는 열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열쇠는 명확하게 이런 것이라고 입증해 보일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열쇠가 음악의 상태를 본래 절대로 표상이 될 수 없는 표상의 상태로서 파악하고 또한 확정하는 동시에, 음악을 직접적으로는 결코 표상할 수 없는 어떤 본보기의 모사(模寫)로 간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주로 예술의 관찰에 바치고 있는 이 대목의 매듭을 짓기 위해, 뛰어난 예술인 음악에 대하여 어쨌든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나의 설명이 과연 독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부정(否定)될지는, 음악 자체 또는 내가 이 책에서 전개한 사상의 전부나 그 일단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효과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하는 음악의 의미에 대한 나의 설명에 확신을 갖고 찬의를 표시하려면 독자로서도 가끔 재검토하여 음악의 의미를 경청(傾聽)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내가 지금까지 전개해 온 사상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지의 정당한 객체화는 (플라톤적인) 이념이다. 이 이념의 인식을 개개의 사물(예술작품도 이러한 개개의 사물이다)을 표현함으로써 얻게 하려는 것이 모든 다른 예술의 목적이다(이녀의 인식은 인식하는 주관 속에서 여기에 부합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음악 이외의 모든 예술은 다만 간접적으로 의지를 개체화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경우에 이념을 통하여 개체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는 이념의 다채로운 현상(現象)이며, 개체화의 원리(이러한 개인에게 가능한 인식의 형식)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음악은 현상하는 세계에도 전혀 제약되지 않고, 이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설사 세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예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음악은 곧 모든 의지의 직접적인 개체화이며 모사(模寫)이다. 이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 다양화된 현상이 개개의 사물을 형성하는 이념 자체가 의지의 직접적인 개체화이며 모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다른 예술처럼 결코 이념의 모사가 아니라, 그 객관성이 이념이기도 한 이 의지 자체의 모사이다. 그러므로 음악의 효과는 다른 예술의 효과보다 훨씬 강하며 침투성이 크다. 왜냐하면 여러 예술이 단순히 그림자에 대하여 작용하는 것과는 달리, 음악은 본질에 대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의지가 이념 속에도 객체화되고 음악 속에도-전혀 다른 방법이기는 하지만-객체화된다.

 

그러므로 직접 유사한 면은 없지만 음악과 이념-그 다채롭고 불완전한 현상이 현실에 나타나는 세계인-사이에 평행적인 비유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비유가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대상이 막연하기 때문에 해명하기 어려운 이 문제의 이해를 돕게 될 것이다.

 

나는 화음 속에서 가장 낮은 음, 즉 기초가 되는 저음 속에 의지의 객체화의 최저 단계인 무기적(無機的)인 자연, 한데 뭉쳐진 유성을 다시 발견한다. 쉽사리 소리나고 재빨리 사라져 버리는 모든 고음은 기초가 되는 저음의 부진동(副振動)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음(基音)이 소리나면, 여기에 맞춰서 그보다 높은 음도 동시에 언제나 작게 들리게 마련이다. 이리하여 저음의 음부(音符)에는 부진동에 의해 현실에 자연히 그 저음과 동시에 울리기 시작하는 높은 음(그 화음)만이 잘 대응할 수 있는 것이 화음의 법칙이다. 이것은 자연의 모든 물체나 조직이 덩어리져 유성 속으로부터 단계적으로 발전함으로써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같은 관계가 기초 저음과 그보다 높은 음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저음에도 한도가 있으며 그 한도에 미치지 못하는 저음은 귀로 들을 수 없다. 이것은 어떠한 물질도 형식과 성질(性質)이 없으면 지각할 수 없다는 것, 즉 물질은 바로 그 안에 이념이 등장한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다시 일반적으로 말하면, 어떠한 물질도 전혀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은 음인 이상, 어떤 일정한 높이를 지녀야 한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에도 어느 정도의 의지가 발휘되어야 한다.

 

화음 속에서의 기초 저음은 무기적인 자연의 세계 속에서의 조잡한 물질의 덩어리에 해당하며, 모든 것이 여기에 의지하고 또한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발전한다. 그리고 모든 화음을 일으키는 합주성부(合奏聲部) 속에 나는 의지가 그 속에서 객체화되는 여러 이념의 모든 단계의 경과를 찾아볼 수 있다.

 

베이스에 접근되어 있는 음은 여전히 무기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물질이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단계에서는 최저의 단계에 해당된다. 그 이상의 고음은 각각 식물계 혹은 동물계를 나타내고 있다.

 

음계에 있어서의 일정한 음정은 의지가 객체화되는 일정한 단계, 즉 자연 속에서의 일정한 종에 평행되어 있다. 음정이나 조율(調律)이 뒤틀리거나 혹은 정확성을 잃는 것은, 객체가 그것이 속하는 종의 전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과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절대로 일정한 음정을 부여하는 일이 없는 불손한 불협화음(不協和音)은 두 가지 종류의 다른 동물 사이에, 혹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정체불명의 괴물과 비교할 수 있다.

 

모든 합주성부(合奏聲部)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것은, 결정체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이성적 세계에서는 그 삶을 의의있는 전체를 형성하는 매우 규칙적인 의식을 갖고 연속된 정신적인 발전의 경과를 경험하거나, 교양에 의해 자기를 완성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이 세계의 존재는 모두가 각각 자기 나름으로 언제나 법칙에 매인 상태를 감수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끝으로 높은 음을 내면서 전체를 지도하고 제약되지 않고 뜻대로 나아가더라도, 하나의 사상을 의미심장하게 중단하지 않고 결합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움직이고 있는 전체를 표현하는 주성부(主性部), 즉 선율 속에서 의지의 객체화의 최고단계인 사려가 풍부한 인간의 삶과 노력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이 풍부하며 인간만이 현실 생활에서 무수한 가능성에 직면하여도 언제나 앞뒤를 돌아보며 깊이 생각하고 전체에 결합된 인생 코스를 걸어가는 것처럼, 오로지 선율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의미심장한 창의성과 풍부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선율은 깊이 사려(思慮)한 의지, 즉 표현이 현실에 있어서 여러 가지 행위로 나타난 의지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으며 그 이상의 것도 보여주고 있다. 선율은 의지의 숨은 역사를 이야기하고 의지의 감동이나 노력 등 모든 움직임을, 즉 이성을 넓고 소극적인 개념인 감동으로서 파악하고, 추상적(抽象的)인 말로는 이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가 이성의 말인 것과는 달리, 음악은 감정과 정열의 말이라고 언제나 이야기해 왔다. 이미 플라톤도 이를 가리켜 ‘영혼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은 선율의 움직임이다’고 말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어찌하여 음에 불과한 리듬과 선율이 인간의 성격과 유사한 것일까?’하고 반문하였다.

 

인간의 본질은, 그 의지에 쫓겨 일단 만족을 얻으면 새로운 의지에 의해 쫓기게 되어 또다시 끊임없이 전진을 계속하는 데 있다. 그리고 욕망에서 만족에로, 다시 만족에서 새로운 욕망에로의 이행은 만족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에는 고통이 오고, 새로운 욕망이 생기지 않을 경우에는 공허한 동경이, 즉 초조와 권태가 생기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에 대응하여 선율(旋律)의 본질은, 몇천 가지 방법에 의해 기음(基音)으로부터 이탈하여 화성적(和聲的)인 음정뿐만 아니라 모든 음에, 심지어 불협화의 음계에까지 이행하면서도 언제나 나중에는 기음(基音)으로 복귀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단계에서 선율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 의지의 충동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언제나 화성적 음정에서 기음과 결합함으로써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선율의 발견과 선율 속에 인간의 욕망과 감각의 심오한 비밀을 표현한 것은 천재가 성취한 일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다른 어느 면보다 명백하며, 그야말로 영감(靈感)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예술에는 어디나 그렇듯이 개념 같은 것은 쓸모가 없다. 작곡가는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을 밝히고, 가장 깊은 지혜를 말한다.

 

이 말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몽유병자가 깨어 있을 때에는 아무런 개념도 갖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조차 수수께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작곡가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작곡가들은 다른 예술가들 이상으로 인간과 예술가로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떠나 있다. 그리고 음악이라는 이 놀라운 예술을 설명함에 있어서 개념 따위는 전혀 의지할 것이 못되는 한정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비유를 계속해 나가고자 한다.

 

욕망에서 욕망으로, 다시 만족에서 새로운 욕망에로 재빨리 옮아가는 것이 행복이요 건강인 것처럼, 크게 곁길로 벗어나지 않는 신속한 선율은 즐거운 것이다.

 

이와 반대로, 느리고 무거운 불협화음(不協和音)에 빠졌다가 꽤 오랜 사이를 두고 겨우 다시 기음(基音)으로 복귀되는 선율은 좀처럼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슬픈 느낌을 준다.

 

새로운 의지의 고양(高揚)이 잘 나타나지 않는 타기(惰氣)를 표현하려면, 그것은 도저히 참고 듣고 있을 수 없는 정체(停滯)된 기음(基音)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매우 단조롭고 무의미한 선율이 이와 유사하다.

 

짧고 알기 쉬운 무도음악의 악장이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평범한 행복에 대해서만 표현하고 있다면, 이와 반대로 대악장의 장중한 알레그로는 먼 길을 거쳐 긴 음정을 통과하면서도 저 멀리 목표를 향해 더욱 힘차게 노력하여 드디어 이에 도달함을 표현하고 있다.

 

아다지오는 조그마한 행복을 전혀 돌보지 않고 고귀한 노력을 계속하는 자의 고뇌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단조와 장조의 효과는 얼마나 엄청난가? 음조가 크게 변화하는 대신 겨우 반음의 변화 정도에 의해 즉시 필연적으로 불안하고 괴로운 감정이 빚어지고, 장조가 다시 이러한 감정에서 즉시 해바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단조의 아다지오는 최고의 고뇌를 표현하여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은 탄성(嘆聲)이 된다. 단조의 무도음악은, 가능하다면 그들도 보지 않는 편이 좋았을 사소한 행복을 손에 넣는 데 실패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고심참담(苦心慘澹)한 끝에 보잘것없는 목적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선율을 낳는 가능성이 무한정인 것은, 자연 속에서의 개체의 특질, 표정 그리고 생활방식의 차이가 무한정한 것과 같다. 음조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가는 경우 선행된 멜로디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에는, 이에 의하여 개인의 생명이 종말을 고하는 죽음과 같다. 그런데 이 개인 속에 나타나있는 의지는 사후(死後)에도 그 사람의 생존시와 마찬가지로 다른 개인 속에 나타난다. 다만 이 타인의 의식은 처음 사람의 의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예고한 비유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음악은 이러한 비유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음악의 현상이 아니라, 다만 내면적인 본질, 즉 모든 현상의 본체인 의지 자체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 音樂의 特質

 

음악이라는 뛰어난 예술 본래의 의미에서 보면 음악의 업적과 표상으로서의 세계, 즉 자연과의 사이에는 분명히 유사한 점이 없지만 양자는 서로 평행선을 걷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더욱 확실히 밑받침하는 몇몇 규정을 첨가해 보자.

 

모든 화성(和聲)의 네 개의 음역, 즉 베이스‧테너‧알토‧소프라노는 존재의 계열에 있어서의 단계, 즉 광물계‧식물계‧동물계 그리고 인간에 대응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음악의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에 비추어 보더라도 놀라울 만큼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베이스 이외의 세 가지 음역 사이에도 서로 높고 낮은 차이는 있지만 베이스는 이 세 음역보다 훨씬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이스가 높은 세 가지 음역에 접근하려고 한다해도 겨우 한 옥타브 정도이며 대개는 그 이하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세 화음(和音)은 그 위치를 기음에서 세 번째의 옥타브에 두는 셈이 된다. 이에 대응하여 베이스와 멀리 떨어져 저 쪽에 머물러 있는 넓은 화음은 베이스가 아주 가까이 있는 화음보다 훨씬 강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규칙은 기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음의 조직의 기원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런 법칙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기본적인 상태가 음악적인 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유기적인 자연은 생명이 없는 무기적인 광물계의 물질과 유사하며, 광물계의 물질과 유기적인 자연 사이에는 결정적인 경계가 있어 모든 자연 속에서도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율을 연주하는 높은 음역(音域)은 동시에 화음 속의 가장 완전한 부분이며, 그 속에서는 가장 낮은 기초 저음이라도 결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체내에서 물질이 의지의 객체화(客體化)의 최저 단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처럼 이념 혹은 의지의 객체화의 단계가 아니다. 직접 의지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음악은 의지, 즉 음악을 청취하는 자의 감정‧정열‧정서에 직접 작용하여 이것들을 급속히 높이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음악은 시의 단순한 보조수단이 아니라, 분명히 독립된 예술일 뿐더러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예술이기 때문에 목적하는 바를 자기의 수단에 의해 이룰 수 있다. 또한 음악이 가사(歌詞)나 오페라의 세리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므로 음악에 있어서는, 인간의 노랫소리도 본원적(本源的)으로는 기악(器樂)에서 오는 음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노랫소리에는 악기에 따라 좌우되는 여러 가지 기악음과 마찬가지로 본래의 장점도 있고, 반대로 단점도 있다.

 

음악의 경우에 인간의 노랫소리라는 악기가 말을 하는 도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념을 전한다는 것은, 다만 우연한 일이다. 분명히 음악은 시와 결합되기 때문에 인간의 노랫소리를 보조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노랫소리를 주역으로 해서는 안 되며, 천박한 시구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음악에서 보면, 말은 이질적인 첨가물이며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으로, 금후에도 그 위치에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음의 효과는 말의 효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며 오류에 빠지는 일이 없고 또한 신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은 음악과 결합되었을 경우에는 완전히 예속된 지위를 감수하고 음악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완성된 시, 가곡이나 오페라의 텍스트에 음악이 첨가될 경우에는 반대의 관계가 생기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음악은 말로 표현된 감정 속에 가장 깊고 신비적인 해석을 내리고 감정이 지닌 참된 본질을 표현하며, 오페라 무대에 있어서도 단지 그 기본 뼈대나 육체를 부여하는 데 불과한 사건이나 줄거리의 가장 내면적인 영혼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즉석에서 그 강력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음악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음악과 오페라의 텍스트나 세리프와의 관계는 보편과 개체, 혹은 원칙과 실례와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음악을 텍스트에 맞춰서 작곡하기보다 텍스트를 음악에 맞춰서 작성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에 의하면, 가사나 오페라의 텍스트가 작곡가의 근저에 있는 의지의 정서를 인도하여 그 사람 자신 속에 표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그의 음악적인 구상을 자극하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에 시가 첨가되면 즐겁고 부드러운 말로 된 노래가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우리의 직접 그리고 간접의 인식방식이 동시에 결합하여 자극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가장 직접적인 인식방식은 음악이 의지 자체를 자극하는 것이며, 가장 간접적인 인식방식은 언어로 표시된 개념에 의한 것이다.

 

언어의 경우 감각의 경역에 이성이 전혀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음악도 분명히 자체의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의지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감각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첨가함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감각의 대상, 이러한 감각을 불러일으킨 동기를 이해하게 된다. 악보가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오페라 음악은 그 자체가 완전히 독립되고 분리된 이를테면 추상적인 존재이다. 이 음악은 오페라의 스토리나 등장인물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그 자신의 불변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설사 오페라의 텍스트가 없어도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은 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이상 거기에는 이미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음악이 드라마의 스토리‧등장인물‧세리프와 결부되어 극중의 모든 사물의 내면적인 의미와 그 내면적인 의미에 입각한 깊은 필연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서도 그저 입을 벌리고 현혹되어 있을 때에는 별문제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러한 내면적인 의미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바가 있기 때문에 오페라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 속에서의 음악은 역시 스토리나 세리프와는 이질적(異質的)인 것이며, 보다 높은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페라의 모든 움직임의 소재에는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그 결과 음악은 정열의 폭풍이나 감각의 격정(激情)을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표현하고, 대본(臺本)의 소재(素材)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를 다루고 있건 혹은 시민의 가족적인 싸움을 다루고 있건 마찬가지의 호화로운 음을 내게 된다.

 

음악은 결코 소재에 동화되지 않는다. 설사 음악이 가장 우스꽝스럽고 탈선 투성이인 코믹 오페라를 연주할 경우에도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순수성 및 숭고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음악을 크게 융화시키려고 해도 그 고상한 위치에서 음악을 끌어내릴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음악은 인간생활 속에서 그 서투른 연극이나 끊임없는 재앙을 초월하여 인간 생존의 엄격한 그리고 깊은 의미를 노래한다.

 

여기서 일반 기악(器樂)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베토벤의 교향곡은 매우 혼란스러운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근저(根底)에는 참으로 완벽한 질서가 깃들어 있으며, 가장 심한 싸움이 다음 순간에는 가장 아름다운 조화로 변모해 간다. 이것은 사물의 부조화의 조화로 무수한 형체가 끝없이 뒤얽혀 있는 속을 헤치며, 다시금 끊임없는 파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충실하고도 완전한 모사(模寫)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교향악에 인간의 모든 정열과 정감(情感)이 나타나 있다. 무수한 뉘앙스로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두려움, 희망 등을 속삭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만 추상적이며 여러 가지 특수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특수한 정열이나 정감의 단순한 형식으로, 유령의 세계에 물질적인 밑받침이 없는 것처럼 소재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물론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을 때 이것을 구상화하여 공상 속에서 피와 살을 첨가하고 삶과 자연의 여러 가지 광경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대체로 말해서 교향곡 자체의 이해나 감상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멋대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교향곡을 직접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태도이다.

 

지금까지 나는 음악을 주로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즉 음악의 업적을 내면적인 의미에 대하여 고찰해 왔으나 이제는 음악이 우리의 정신에 작용하여 내면적인 의미를 발휘하는 수단을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관찰해 보고, 음악의 형이상학적인 면을 이미 상세히 탐구해 왔으므로 이를 음악의 형이하학적인 면과 결부시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새로운 착상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다음과 같은 이론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음의 모든 화음은 두 개의 음이 동시에 울리면 진동의 일치에 의해 각각 제 2, 제 3, 제 4의 진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개의 음의 진동이 합리적인 한, 이러한 음은 때때로 반복되는 일치에 의해 우리의 지성 속에서 통합된다. 그리하여 음은 모두가 융합되며 따라서 협화음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음과 음의 관계가 불합리할 경우에는 진동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삑삑 소리를 내며 우리의 이지 속에서 저항하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음악은 합리적 및 비합리적인 관계를 개념의 도움을 빌어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공통된 감각적 인식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어쨌든 형이상학적 음악의 의미가 이와 같이 형이하학적인 것과 결부된 것은 우리의 이해에 저항하는 것, 비합리적인 것, 즉 불협화음이 우리의 의지에 저항하기도 하고 반대로 협화음 또는 합리적인 것이 우리의 이해에 적합하여 의지의 만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적인 것 및 비합리적인 것은 진동의 관계에서 무수한 차이‧뉘앙스‧순서‧변화 등이 허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진동을 통하여 음악은 그 속에서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나타나는 소재를 미묘한 뉘앙스나 변화까지도 충실히 묘사하고 재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선율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의지의 움직임이 모든 예술업적의 독점적 무대인 표상의 영역 속에서 전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의지 자체는 얼굴을 내놓지 않고 우리가 순수하게 인식하는 자의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 자체의 동요, 즉 현실의 고통이나 기쁨이 아니라 다만 그 대용품인 지성에 적합한 것이 의지가 만족하는 모습으로서, 또한 지성에 다소라도 저항하는 것이 고통의 모습으로서 환기되는 것이 허용된다.

 

그 때문에 음악은 우리의 현실에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설사 비통한 화음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며,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선율이라도 음악의 언어 속에서 우리 의지의 가장 은밀한 역사와 그 의지의 움직임과 노력을 여러 가지 지체, 장해 그리고 고뇌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공포에 충만한 현실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커다란 자극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음과 그 수와의 관계 같은 것은 문제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 긴장하여 떨고 있는 활시위와 마찬가지 입장이 된다.

 

음이 지닌 바 본래의 음악성이 진동하는 속도의 균형 위에 놓여 있고 각각 음의 상대적 강도 위에 있지 않는 이상, 음악을 감상하는 청각은 화음으로서는 언제나 가장 강한 음이 아니라 가장 높은 음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있을 경우에는 소프라노가 뛰어나게 되며, 이에 의해 선율을 연주하는 자연의 권리를 갖게 된다.

 

여기서 선율의 기원을 근본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탐구는 선율을 그 구성 부분으로 분해함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을 일단 추상적인, 그리고 명백한 의식으로 높이면 어떤 새로운 맛을 풍기는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선율은 리듬과 화음의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리듬은 음의 지속을, 화음은 음의 고저에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전자를 양적인 것, 후자를 질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전자의 기초는 음의 상대적인 지속이고 후자의 그것은 진동의 상대적인 속도이다.

 

리듬의 요소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혼자서도 일종의 선율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을 치기만 해도 선율이 생긴다. 그러나 완전한 선율은 리듬과 화음의 양자를 모두 필요로 한다. 즉, 이것은 양자의 투쟁과 화해가 교체되는 데서 생기게 된다. 여기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 전에 화음의 요소에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으므로 리듬의 요소에 대해서 좀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리듬은 시간‧공간에 있어서의 시메트리(Symmetry:조화‧균제‧좌우상칭, 미학상의 미술 요소의 하나로서 상하좌우의 균형이 잘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며, 서양의 조형미술에서 특히 중요시된다-譯註)에 해당되는 것이다.

 

내가 제시한 예술의 계열에서는 건축과 음악이 각각 양단에 위치한다. 그리고 양자는 각각 내적인 본질이나 힘, 각각의 영역의 범위 그리고 각각 지닌 바 의미로 인해 완전히 이질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건축은 시간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공간 속에만 존재하지만, 음악은 공간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시간 속에만 존재함으로써 각각의 현상형식까지 대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더라도 양자의 유일한 유사점은, 결합되어 질서를 세우고 있는 것이 건축에서는 시메트리이고, 음악에서는 리듬이라는 것뿐이다. 이것으로도 ‘두 극단은 접촉한다’는 말이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한 건축물의 최종적인 구성부분이 같은 돌인 것처럼, 음악작품의 최종적인 구성부분은 모두가 같은 박자이다. 다른 점은 음악이 주로 시간 속에 있다면, 건축의 경우는 주로 공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가 유사하다고 보는 관점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에 ‘건축은 동결된 음악이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때때로 되풀이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괴테 때문이었다. 그는 《에커만과의 대화》 제 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쓴 메모 중에, 건축은 동결된 음악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네. 사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네. 건축에서 느끼는 감각은 음악에 가깝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괴테의 발언을 열심히 수집하여 그것을 나중에 내용도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 떠들어대는 자들이 적지 않다. 괴테가 무엇이라고 말했던 간에 내가 건축과 음악이 유사하다고 말하는 유일한 근거는 리듬과 시메트리에만, 즉 외적 형식에만 있으며 본래 하늘과 땅만한 거리가 있는 양자의 내적 본질이 유사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제약된 약한 예술을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효과가 큰 예술과 본질적인 점에서 동일시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음악은 일반적으로 다소나마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즉 욕망을 일으키는 화음과 사람을 침착하게 하고 만족감을 주는 화음이 끊임없이 교체(交替)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에서 욕망이나 공포에 의해 일어나는 불안이 이에 반비례하여 얻게 되는 만족과 언제나 교체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화음의 전진은 협화음(協和音)과 불협화음의 예술적인 교체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 단순한 협화음의 연속은 모든 욕망의 만족에서 오는 권태감처럼 진력이 나고 귀찮고 허망한 것이다. 따라서 불협화음은 사람에게 불안감을 갖게 하여 고통스럽게 하지만 역시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적당한 마련을 하여 다시 협화음으로 해소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든 음악 속에는 본래 두 가지 기본이 되는 화음, 즉 불협화음의 일곱 화음 및 조화된 세 화음이 있으며 따라서 발생되는 모든 화음은 모두가 양자에 속한다. 이것은 의지가 아무리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불만과 만족의 두 형태밖에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인간의 기분에 두 가지 일반적인 기본이 되는 명랑함과 우울함이 있는 것처럼, 음악에도 두 가지 일반적인 음의 종류, 즉 장조와 단조가 있다.

 

이것은 함께 인간의 일반적인 기분에 대응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음악은 장조와 단조의 어느 한편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이 음악의 형이상학에 동의한다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이상적인 세계에 대하여 속삭여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음악이, 실은 의지의 본질을 표현하거나, 의지에 대하여 목표를 내세우거나, 의지의 만족과 충족을 나타냄으로써 다만 삶에의 의지에 아부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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