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10. 歷史와 文學

rainbow3 2019. 9. 21. 17:49

10. 歷史와 文學

 

1) 歷史家와 詩人

 

고대의 위대한 역사가들은 자료에 구애되지 않고 개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언급할 때, 가령 영웅이나 시인의 연설을 취급할 경우에 서사시적인 것에 가까워진다. 이것은 소재의 취급방법 전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서술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외면적인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아니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면적인 진리만큼은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시가 역사화와 대응되는 반면에, 역사는 초상화와 비교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더라도 초상화는 개인의 이상이어야 한다는 빙켈만(1717~1768, 독일의 예술 비평가-譯註)의 요청을 고대의 역사가들도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개개의 사물을 그 속에 표현되는 인류의 이념을 부각시켜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최근의 역사가들이 묘사하는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단지 쓰레기통이나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곳간이며, 고작해야 군주나 국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류를 모든 현상의 발전을 통하여 완전히 동일한 내면적 본질, 즉 인류의 이념에 입각하여 인식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역사가가 성취한 것보다 위대하고 불멸한 시인의 노작이 더욱 귀중한, 그리고 분명한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

 

그 이유는, 가장 뛰어난 역사가라 할지라도 시인으로서는 제 1인자가 아니며 또한 시인답게 자유로운 필치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에서 보면 시인과 역사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로써도 설명할 수 있다. 수학적인 지식이 전혀 없이 다만 자료에만 의존하여 연구하는 역사가는 우연히 주어진 도형의 관계를 살펴볼 때, 다만 자료를 측정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사람과 흡사하다. 이러한 경험에 의거하여 얻은 결과에는, 본래 주어진 도형에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이 그대로 옮겨지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시인은 주어진 도형의 관계를 선천적으로 구성하며, 순수한 직관 속에서 묘사된 도형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실례에 의해 알기 쉽게 되어 있는 도형이 본래의 이념 속에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수학자를 닮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실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낡아 버리는 일이 없다.

 

그리고 인류의 본질을 인식함에 있어서 전기, 특히 자서전은 적어도 평범하게 다루어진 역사책보다 훨씬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전기나 자서전이 일반 역사책보다 사용한 자료가 분명할 뿐더러 고루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반 역사책에서는 인간보다는 오히려 여러 민족이나 군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설사 개인이 등장하더라도 그러한 개인은 단지 터무니없이 좁은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먼 데서 바라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 않으면, 답답한 예복을 걸치거나 육중하기만 해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갑옷을 입었을 때에나 잠깐 모습을 나타내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개인이 등장하는 대목을 모조리 읽어 보아도 이 사람에게서 인간다운 행동을 찾아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이와 반대로, 충실하게 묘사한 좁은 환경 속에서 영위되는 개인의 생활은 여러 모로 뉘앙스가 풍부한 인간의 행동 방식, 즉 훌륭한 인덕이 있는 사람, 신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가련한 존재이면서도 음험하고 천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문제 삼는 입장에서 보면, 다시 말해 현상적인 것의 내면적인 중요성의 유무를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모든 행동이 관련되어 있는 대상이 상대적으로 보아 사소한 것인가 대단한 것인가, 혹은 농가의 뜰안인가 궁전인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이런 것들 속에 의지가 작용하고 있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과 의지 사이의 관계에서만 동기는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것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름 1인치가 되는 원이건, 지름 40마일이나 되는 원이건 똑같은 기하학적 성질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마을과 나라의 여러 가지 움직임이나 역사는 본질적인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에 대하여 고찰해 보면 인류 전체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歷史의 眞價

 

이성이 개인에게 갖는 의미는 역사가 인류에게 갖는 의미와 마찬가지이다. 즉 이성의 덕택에 인간은 동물처럼 눈에 보이는 좁은 범위의 현재의 광경뿐만 아니라 현재와 결부되고 현재를 낳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긴 과거를 인식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과거를 통하여 비로소 현재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미루어 알 수도 있다.

 

그러나 반성하는 일이 없는 인식이 직관에만, 즉 현재에만 한정되어 있는 동물은 비록 잘 훈련시키더라도 영문도 모르고 단순하고 어리석게 구속된 채 정처없이 인간 사이를 방황하며 헤매일 뿐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모르고 현재 생존중인 각 세대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밖에 알지 못하는 민족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에 대해서도 모를뿐더러 현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과거에 결부시킬 수 없으며 과거에서 현재의 모습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한 민족은 역사를 통하여 비로소 자기 자신을 충분히 의식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역사를 인류의 이성적인 자기 의식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을 개인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이성에 의해 구속된 사려(思慮)가 풍부한 일관(一貫)된 의식에 해당된다. 이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은 눈에 보이기만 하는 좁은 범위의 현재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빠져 있는 부분은 모두가 인간의 자기 의식 속에서 회상하려고 하여도 도저히 불가능한 부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전해 주는 기록을 상실한 먼 옛날의 기념물, 예를 들면 유카탄 반도의 피라미드, 사원 그리고 궁전을 눈앞에 목격하고 사람들은 다만 멍하니 바보처럼 서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동물이 자기 주인의 행적을 보았을 때나, 혹은 이전에 암호(暗號)를 써 두었지만 그것을 푸는 방법을 잊어버린 자가 다시 그 암호에 접했을 때의 모습과 흡사하다. 또는 몽유병자가 잠결에 자기가 행한 일을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인류의 이성 혹은 배려 깊은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역사는 전인류에게 직접 공통된 자기 의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역사 덕분에 비로소 현실적으로 하나의 전체 즉 인류라는 전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참된 가치이다. 역사가 일반적으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주로 역사가 인류의 일신상의 일이기 때문이다.

 

3) 悲劇(1)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으로 보나, 그것을 창조(創造)하는 어려움으로 보더라도 비극은 문학의 정점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관찰에 대하여 최고의 시적인 업적, 즉 비극의 목적이 인생의 놀라운 측면의 표현이라는 것, 비극 속에 전 인류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나 신음소리, 악(惡)의 승리와 이것을 조소하는 우연의 횡포, 올바른 자‧죄없는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함정에 빠지는 광경 등이 전개되어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며 한편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야말로 세계가 그리고 생존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지의 나 자신과의 투쟁이며 객체화(客體化)의 최고의 단계로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표면화되어 놀라운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의지의 내적 투쟁은 인간이 괴로움을 겪을 때 나타난다. 이것은 먼저 우연과 미망(迷妄)을 통하여 모습을 보여준다. 이 양자는 세계의 지배자이며, 마치 일부러 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운명으로서 인격화되어 있다. 또한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의지의 여러 가지 노력이 서로 교차되어 있는 개인을 통하여,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악의와 우행을 통하여 등장한다.

 

모든 인간 속에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동일한 의지이지만, 의지의 여러 가지 현상은 어느 것이나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스스로를 할퀴고 있다. 의지는 어떤 사람 속에서는 격렬하고 또 다른 사람 속에서는 서서히 나타난다. 의지가 강하게, 혹은 약하게 등장함에 따라서 각각 의식의 작용이나 인식의 빛을 받고 냉정해지는 태도도 달라지지만, 의지가 발휘되는 방법이 매우 은근한 사람에게는 그 인식은 이미 괴로움 자체에 의해 정화되고 고양되어서 마야의 베일 따위에 매혹되는 일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람은 현상의 형식인 개체화의 원리를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원리에 입각해 있는 이기주의는 소멸해 버린다.

 

또한 이것에 의해 전에는 매우 강력했던 여러 가지 동기도 그 힘을 잃고 그 대신에, 세계의 본질의 완전한 인식이 의지의 진정제(鎭靜制)로서의 효력을 발휘하면서 단순히 인생의 과제일 뿐 아니라 삶에의 의지의 과제인 체념(諦念)을 갖게 한다. 그 때문에 비극의 결말에서는 오랜 싸움과 괴로움을 거쳐 온 가장 고귀한 사람이 지금까지 열심히 추구해 온 목적과 삶의 모든 즐거움을 영원히 체념하든가, 혹은 자기 자신이 기꺼이 이러한 것들을 포기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칼데론의 극 속에서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던 왕자도 그러하였으며, 《파우스트》 속의 그레첸도 그러하였다. 또한 《햄릿》에서의 호레쇼는 흔연(欣然)히 죽어가는 햄릿의 뒤를 따르려고 하였지만, 햄릿은 자기의 운명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분명히 밝히고 호레쇼에게 이 세상에 남아서 아직 얼마 동안 혐오스러운 이 세상의 공기와 괴로움을 함께 들이마시면서 자기가 죽은 후의 자기에 대한 추억을 정화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오를레앙의 소녀도 메시나의 새색시(모두 실러 극의 여주인공-譯註)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모든 괴로움을 겪고서 정화되면서 죽어갔다. 즉, 살려는 의지가 그들 속에서 소멸된 후에 죽음에 임한 것이다.

 

이것이 볼테르의 《마호멧》에서는 죽음에 직면한 파르미라가 마호멧을 향해 호소한 마지막 말, ‘이 세상은 폭군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말 속에 문자 그대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이른바 시적 정의의 요구[因果應報]는 비극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이 시적인 정의가 어떻게 평범하고 저속한가는 사무엘 존슨 박사가 몰염치하게 세익스피어의 모든 극에 대하여 논평한 비평 속에 나타나있다. 존슨 박사는, 세익스피어의 극은 어느 것이나 이 시적인 정의(正義)가 전혀 등한시되어 있다고 탄식하고 있다.

 

존슨 박사는 ‘시적인 정의는 분명히 등한시 되어 있다. 도대체 오필리아‧데스데모나‧코델리아 등(모두 세익스피어의 극의 여주인공들-譯註)은 무슨 죄를 범하였단 말인가?’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다만 낙천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 합리성이, 혹은 본래의 유태적인 세계관이 시적 정의라는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이것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세계관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비극의 참뜻은 주인공이 같은 것은 주인공 특유의 죄가 아니고 원죄와 생존 자체의 죄라는 것이다. 칼데론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인간의 최대의 죄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비극을 얼마나 소박하게 다루고 있는가를 한층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여기서 구태여 주석을 붙여 보기로 한다.

 

커다란 불행을 표현하는 것은 비극의 본분이다. 시인들에 의해 여기 이르는 여러 가지 방법이 표현되고 있지만, 그러한 방법은 세 종류의 개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불행은 성격이 음험한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는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 실례로는 《리처드 2세》, 《오델로》의 이야기,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군도(群盜)》의 트란츠 모아, 에우리피데스의 《페드라》, 《안티고네》의 크레온 왕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불행은 맹목적인 운명, 다시 말해서 우연이나 오류(誤謬)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종류의 불행의 보기로는 소포클레이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트라키아의 《여인들》과 같이 대체로 고대 비극의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근대 영국의 예로서는, 《로미오와 줄리엣》, 볼테르의 《탄크레드》, 실러의 《메시나의 새색시》가 있다.

 

끝으로 불행은 단순한 인간관계 즉, 어떤 인간이 얼굴을 나타내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큰 오류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우연, 그리고 이것도 인간이냐고 생각될 정도로 악랄한 성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도덕적인 면에서 보면 극히 평범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때때로 실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주위의 형편에 따라서, 그들은 서로 번연히 알면서도 또한 충분히 그런 불행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면서도 최대의 저항을 준비하는 궁지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과연 어느 쪽이 나쁜지 잘라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치 않다.

 

불행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이 제 3의 방법이 처음 두 가지 방법보다 훨씬 우세한 듯이 생각된다. 그것은 제 3의 방법이 닥쳐오는 최대의 재앙을 예외적인 것,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나 극악무도한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나 성격으로부터 어쩌면 당연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스스로 그리고 쉽사리 일어나며, 바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 신변에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불행이 일어나는 제 1, 제 2의 방법을 추구해보면 큰 운명이나 극악무도한 악의가 매우 무서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역시 두려운 여러 가지 힘은 저 멀리 바라보일 따름이므로 우리로서는 체념(諦念)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도 이러한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제 3의 방법이 보여주는 바, 행복이나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가지 힘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모든 힘에 이르는 길은 언제 어느 때 열릴지 모른다. 또 엄청난 고뇌가 본질적으로 우리 운명이 될 수도 있는 인간관계나, 아니면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길을 달리게 되는 행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고뇌를 당한다고 해서 우리가 부당하다, 불공평하다 하고 불평을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이미 지옥 속에 떨어져 있다는 데 대해 몸서리치면서도 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불행을 나타내는 제 3의 방법으로 비극을 상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는가를 나타내는 원인의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등장인물이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만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참으로 훌륭한 비극 속에서는 이러한 애로가 극복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본보기로서 괴테의 《클라비고》를 들 수 있다. 어떤 면에서 《클라비고》는 여러 가지 점에서 괴테의 다른 연극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기도 하다. 《햄릿》도 단지 햄릿과 레어티즈와 오필리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역시 이런 비극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그리고 《발렌슈타인》도 이런 비극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파우스트》는 단지 파우스트와 그레첸 및 그녀의 오빠 사이의 갈등에 치중해 보면, 완전히 이런 종류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도 그렇다. 이 극에서는 맥스와 테크라와의 사이에 비슷한 다른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극적인 결말이 결여되어 있다.

 

4) 悲劇(2)

 

우리가 비극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미의 감정이 아니라, 숭고한 감정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최고도의 숭고함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에서 숭고한 광경을 바라볼 때 순수하게 보는 자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의지의 관심을 떠나는 것처럼, 비극적인 장면에 접하는 삶에의 의지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즉, 비극에서도 삶의 두려운 측면만이 전개된다. 인류의 참상, 우연과 미망(迷妄)의 지배, 의로운 자의 파멸, 악인의 승리 등등 우리의 의지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 눈앞에 전개된다.

 

이러한 상태를 바라보면 우리는 삶에의 의지에서 떨어져, 어느새 또다시 삶에의 의지를 원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일로 인하여, 물론 우리로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고 단지 소극적으로 인식할 뿐이지만, 삶을 원치 않는 삶에의 의지와도 다른 무엇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곱 화음(和音)이 기초 화음을, 붉은 색이 푸른 색을 구하고 다시 이것을 돋보이게 하는 것처럼, 모든 비극은 현상과는 전혀 다른 생존, 전혀 다른 세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서 비롯된 다른 생존,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간접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다. 비극적 곤경에 빠지는 순간에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삶이란 거기서 눈뜨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장(一場)의 깊은 꿈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때에만 다이내믹한 숭고성이 가져오는 효과와 마찬가지로 비극의 효과는 우리를 의지와 그 관심 이상의 경지로 끌어올리며, 또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의지와는 완전히 적대(敵對)하는 것에 기쁨을 맛보게 한다. 그것은 설령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등장하더라도 모든 비극적인 것에 독특하게 고양된 활기가 넘쳐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이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이러한 것에 구애될 가치가 없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 비극적 정신이 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체념으로 인도해 나가게 된다.

 

5) 詩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미술에 대하여 관찰해 온 것을 시에 적용해 보면 시도 분명히 이념, 즉 의지의 객관화의 단계를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시인이 명백히 생생하게 직관에 의해 체득한 이념(이데아)을 독자에게도 확실하게 전하려는 것이 시이다.

 

이념은 본래 직관적이지만 시로 전달하는 것은 개념이다. 그러나 시가 뜻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이러한 개념을 통해 인생의 이념을 직관케 하는 데 있으며, 독자는 자기의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이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상상이 이 목적에 부합하도록 움직이게 하려면, 시에는 직접적인 소재인 추상개념을 잘 구사하여 어느 하나도 추상 일반으로 정지되어 있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직관적으로 개념을 대표하는 것이 상상에 떠오르기 쉬우며, 시인은 그 의도에 따라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여러 가지 변화를 줄 수 있다. 마치 화학자가 투명한 액체를 혼합하여 거기서 고체로 된 침전물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시인은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그 배합에 의해 구체적인 개성을 지닌 직관적 표상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념은 다만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모든 예술의 목적은 이념을 인식하는 데 있다. 시인의 기량(技倆)은 화학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용도에 응하고 목적에 따라 그 침전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시에 많이 사용하는 형용은 이 목적을 위해서이며, 이를 사용하여 점차로 개념의 평균성을 한정하여 직관성을 띠게 된다. 호머는 주요한 낱말에는 거의 언제나 다른 말을 첨가하여 그 개념을 압축하고 범위를 축소하여 직관에 접근시키고 있다.

 

가령,

 

태양은 화려한 바다 한복판에 침몰하였다.

넓은 땅 위에 검은 밤을 입히면서

 

또는,

 

산들바람이 하늘에서 불어와,

천인화(天人花)는 조용하고, 월계나무는 높이 솟아 있다.

 

와 같은 극히 적은 개념으로 남(南)유럽의 즐거운 모습을 남김없이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시인이 인류의 이념을 묘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표현하는 사람과 표현한 작품이 같은 경우이다. 즉, 서정시는 진정한 의미의 노래이며, 이 경우에 시인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직관하여 표현함으로써 성질상 자연히 주관성을 필요로 한다. 다음은 표현한 사람과 표현한 대상이 다른 경우로서, 서정시 이외의 시에서는 표현하는 사람은 표현하는 작품의 배후에 숨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담시(譚詩:Ramanze)에서는 그 전체의 톤이나 내용으로 보아 어느 정도 표현하는 사람의 상태를 이야기하므로 서정시 보다도 객관성이 많지만, 아직도 다소 주관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원시(田園詩:Idyll)가 되면 더욱 적어지고, 소설에서는 더 줄었다가 진정한 서사시에서는 거의 없어지며, 마지막으로 희곡에서는 가장 적고 가장 개관성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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