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禁慾에 대하여
1) 세계의 눈
의식에서 의지가 소멸됨으로써 개인의 개성은 물론 이에 따르는 괴로움도 재앙도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남아 있는 인식의 순수한 주관을 영원의 「세계의 눈」이라고 기술하였다. 세계의 눈은 분명히 그 밝기에 여러 가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생명체의 발생이나 소멸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이리하여 세계의 눈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언제나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이념의 세계를 지향해가고 있다. 즉, 의지의 타당한 객체화이다.
이와는 반대로, 의지에서 비롯한 개성에 의해 인식이 흐려진 개체의 주관은 단지 개개의 사물을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며, 개개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 제시한 의미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중의 존재방식을 부여할 수 있다. 의지로서, 다시 말해 개체로서는 누구나 단순한 「1인」, 「이 한 사람」이며 일하거나 고민하기에 분주하다.
그런데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표상하는 자로서는-이 사람도 순수한 인식의 주관이 되어-이 사람의 의식 속에만 객관적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후자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이 사람은 자기가 보는 한도 내의 모든 사물 자체이며, 이 사람 안에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사물은 이 사람의 표상 속에 존재하는 한 이 사람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때 의지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사물이 의지인 경우에는 사물은 이 사람 속에는 없다. 누구나 그 사람이 모든 사물과 동일한 상태일 때는 축복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개라는 한 사람의 인간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불행하다.
인간이나 인생사나 삶의 상태가 흥미있고 사랑스럽고 부러워할 만한 것으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펜의 힘이건 말의 힘이건, 이것을 오직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기술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 속에 몰입해 버리면 대상 자체가 된다(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되면 악마도 도사리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삶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것도
형상 속에서는 기꺼이 즐길 수 있나니
나도 젊었을 때에는 나 자신이나 나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것을 기술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적이 있다. 아마 나도 스스로 즐기기 위해 이런 것을 쓰려고 했던 것 같다.
2) 삶에의 意志의 긍정과 부정
의지가 자기를 긍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의지의 객관화, 즉 세계와 삶 속에서 의지의 본질이 표상으로 완전히 그리고 분명히 주어졌을 경우에, 그러한 인식은 의지의 욕망을 결코 거부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인식된 삶 자체는 의지가 요구한 것이며, 종래에는 인식이 따르지 않는 맹목적인 충동이었으나 이제는 인식에 의해 의식되어 사고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의 일, 즉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의지의 본질이 인식됨으로써 욕망이 끝날 때에 등장한다. 이 경우에는 인식된 개개의 현상이 이미 욕망의 동기가 되지 않으며, 이념을 파악함으로써 생긴 의지를 반영하는 세계의 본질의 인식이 의지의 진정제가 되어 의지는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 일반적인 표현을 써도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전혀 미지의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이 개념은, 이어서 곧 소개하는 여러 현상에 의해 분명히 드러나리라고 생각되지만, 여기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한편으로는 의지의 긍정을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의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여러 가지 행위의 양상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의지의 긍정이건 부정이건, 양자는 각각 분명히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행동에 의해서만 표현되는 것이며, 또한 이성에서 오는 추상적인 인식으로서의 여러 가지 교의(敎義)에는 구애되지 않는다.
이 양자를 묘사하여 이성에 의해 분명히 인식시키는 것만이 나의 목적이며, 그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우세하다고 지시하거나, 그 어느 쪽을 취하라고 권하려는 것도 아니다. 의지 자체는 본래 완전히 자유이며,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자기를 규제(規制)하고 어떠한 법칙도 지니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또 무의미한 일이다.
3) 禁慾의 讚歌
자기 자신의 눈앞에서 개체화의 원리인 마야(Maya:고대 인도에서 환영과 허위에 충만한 물질계를 가리킴-譯註)의 베일이 높이 걷히고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은 자기와 타인의 이기적인 구별을 없애고 타인의 괴로움에도 자기의 괴로움과 같은 정도의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최고도로 타인에게 협력하려고 할 뿐더러, 많은 타인이 구제된다면 자기 일신을 희생시킬 용의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 비롯되는 것은 모든 존재 속에서 자기의 가장 내면적인 그리고 참된 자아를 인식한 사람은 뭇 생명체의 무한한 괴로움을 자기 자신의 괴로움으로 간주하고, 전세계의 고통을 자기 한 몸에 안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고뇌가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눈에 보이는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 않은 타인의 고뇌의 전부, 그가 간접적으로 알게 된, 아니 그가 다만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타인의 고뇌의 전부가 그의 마음에 자기의 고뇌와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여전히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행‧불행의 전환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그는 개체화의 원리를 통찰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와 관련이 있고 또 가깝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전체를 인식하고 그 본질을 파악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유전(流轉)하여 무의미한 노력을 계속하며, 내분으로 지새고 언제나 고뇌에 시달리고 있음을 간과한다. 그는 어디를 바라보나 고뇌에 가득 찬 인류, 고통에 사로잡힌 동물, 몰락해 가는 세계를 발견하게 될 뿐이다. 이기주의자가 오직 자기 자신의 일만을 피부로 가까이 느끼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이제 이 모든 일들이 매우 가까이 접근해 있는 당면문제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인식한 사람이 어찌 끊임없는 의지의 발동이 빚어내는 이 삶을 긍정하고, 언제까지나 이 삶에 자기 자신을 얽매어 점점 그 사슬에 묶일 수 있겠는가? 아직도 개체화의 원리에 구애되어 이기(利己)에 사로잡힌 사람은 개개의 사물과 자기의 관계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이런 것이 언제나 새삼스럽게 자기 욕망의 동기가 된다. 이와 반대로, 앞에서 말한 전체와 사물 자체의 본질의 인식은 모든 욕망을 진정시키는 길로 인도한다. 이제야 의지는 삶에서 이탈된다. 그는 그 속에 의지의 긍정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 삶의 즐거움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유의지에 의거한 체념(諦念), 체관(諦觀), 참된 안정과 완전한 무의지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직도 마야(Maya)의 베일에 묻혀 있던 다른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 자신의 괴로움이나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인식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하여 욕망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결정적으로 단념함으로써 욕망의 가시를 꺾고 모든 괴로움이 흘러드는 문을 닫은 후에 자신을 순화시키고 정화시키고자 원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노력해 본들, 다시 현상의 미망에 사로잡혀 온갖 동기가 의지를 거듭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해방될 수가 없다.
설사 우리가 고뇌의 도가니 속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더라도 우연이나 미망에 사로잡혀 여러 가지 기대에 빠져 움직이거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거나, 행복을 차지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뒤로 물러가 새로 손발이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
삶은 군데군데 서늘한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마치 우리가 끊임없이 그 위를 달려야 하는 벌겋게 타오르는 석탄으로 된 원주(圓周)의 코스로 비유된다. 미망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가 지금 서 있거나, 혹은 눈앞에 보이는 싸늘한 장소를 보고 몸서리치며 다시 삶의 궤도로 위안을 바라며 달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개체화의 원리를 통찰(洞察)하고 물자체(Ding an sich)의 본질, 따라서 전체를 인식한 자는 벌써 이러한 위안을 원치 않는다. 그는 모든 코스를 대뜸 간파(看破)하고, 그 코스로부터 떠난다. 그의 의지는 이탈되고 자기 자신의 현상 속에 반영되는 존재도 이미 긍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현상이야말로 덕에서 금욕에의 이행이다. 즉, 그는 타인을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봉사하는 것만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자기라는 현상으로 표현되는, 즉 삶에의 의지, 고뇌에 충만해 있다고 생각되는 이 세상의 본질 및 핵심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안에 현상하고 이미 그의 육체를 통하여 나타난 존재를 부정하며, 이제야 자기라는 현상이 허위의 덩어리임을 명확히 인식하여 그의 행위는 자기 자신과 분명히 모순 대립한다.
본래 의지의 현상에 불과한 그는 무엇이건 원하기를 그치고 자기의 의지가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모든 사물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한다. 건장한 그의 육체는 생식기를 통하여 성욕을 나타내고 있으나, 그는 의지를 부정하고 자기의 육체가 허위의 덩어리임을 고백한다. 그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성욕의 만족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유의지에 입각한 완전한 동정(童貞)이 금욕, 혹은 삶에서의 의지의 부정의 첫걸음이다.
금욕은 이에 의해 개인의 삶을 초월하여 지속되는 의지의 긍정(肯定)임을 부인하고, 그의 육체의 생명과 함께 이 육체도, 그 현상임에 틀림없는 의지도 끝장이 남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언제나 진실하며 순박한 자연은, 만일 이 격률(格率)이 일반적인 것이 되면 인류는 죽어 없어지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내가 전에 모든 의지의 현상의 관련에 대하여 말한 바와 같이, 최고 단계에 이른 의지의 현상과 함께 의지의 현상의 더욱 약한 반영인 동물성도 없어진다. 이것은 빛이 완전히 없어지면 명암의 차이가 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인식이 완전히 소멸되는 동시에, 자연히 다른 세계도 무(無)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베다의 구절을 인용해 보자.
“세상에서 굶주린 아이들이 어머니의 곁으로 몰려드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성스러운 희생을 기다리고 있다.”(코르불크 著 《베다에 대하여》, 사마 베다로부터의 발췌, 그 밖에 코르불크 著 《여러 가지 수필》)
희생은 단념을 의미하며, 자연은 그 해탈을 승려들과 희생적인 사람들에게서 기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상은 경탄할 만한 그리고 매우 심각한 엥겔스 지레디우스(1624~1677, 독일의 신비주의적 시인-譯註)가 ‘인간은 모든 것을 신에게 드린다’고 읊은 짤막한 시 속에도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꽤 주목할 만한 일이며 여기에 인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여! 만물이 그대를 사랑하고 있노라.
그대의 주위에서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노라.
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그대를 향해 뛰어오고 있노라.
그러나 위대한 신비가의 훌륭한 저작으로, 프란츠 프파이퍼판으로 출간(1867)되어 간신히 일반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은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내가 땅에서 하늘로 오를 때에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오리니’하고 말하였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이것이 사실임을 확신한다. 선한 인간은 모든 것을 그 최초의 모습대로 신의 곁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인류의 스승들은 모든 피조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확증해 주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하나하나가 타자를 위해 유용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풀이 소에게, 물이 물고기에게, 하늘이 새에게, 숲이 동물에게 각각 유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이 인간에게 유용하다. 그리고 선한 인간은 타자 속의 피조물을 신에게 인도해 가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자기 속에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은 생활에 동물을 이용함으로써 동물까지도 구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서 가운데서도 어려운 대목인 <로마서> 제 8장 21~24절* 도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불교에도 이런 내용이 담긴 가르침이 있다. 보살이었을 무렵의 석가가 부친의 성곽에서 황야로 탈출하려고 결심하고 드디어 말에 안장을 얹었을 때, 그는 말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는 이미 오랫동안 여기 있었다. 그러나 이제 너는 등에 짐을 지거나 이끄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다만 이번만은, 오 칸타타여, 나를 이곳에서 떠나게 해다오. 내가 도를 얻으면(불타가 되었을 때) 너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레뮤자의 프랑스 譯에서)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는 열매를 받는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4) 禁慾의 높은 段階
금욕은 자유의지에 의한 의식적인 가난 속에 나타난다. 이를테면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내줌으로써 우연히 발생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사서 얻은 궁핍은 욕망의 만족이나 삶의 즐거움이 의지를 다시 자극하여, 자기 의식의 혐오와 반발을 초래하지 않도록 의지를 끊임없이 학대하기 위해 이용된다.
그런데 비록 이 경지에 도달한 자라도, 역시 정력을 지닌 구체화된 의지의 현상인 이상, 언제나 어떤 종류의 욕망에 이끌릴 소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에 손을 대지 않고, 반대로 자기가 원치 않는 일, 이것이 의지를 학대하려는 목적밖에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모두 수행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강요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나타나 있는 의지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타인이 그의 의지를 부정하더라도, 즉 그에게 부정한 일을 하더라도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연에 의해서이건 타인의 악의에 의해서이건,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환영한다. 어떠한 위해(危害)‧치욕‧모독도 무방하다. 그는 이미 의지를 긍정하지 않는 이상 이 모든 것을 바로 자기 자신인 의지의 현상의 모든 적의 진영에 스스로 앞장서서 가담하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러한 수치나 고통을 강한 인내심과 온유한 태도로 찾아 나가며 외면을 장식하는 일 없이 선으로 악을 멸하고, 정욕의 불길 따위로 인해 다시금 전신에 일 만큼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 없다.
의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는 의지의 객관화인 자기의 육체를 학대한다. 육체는 의지의 표현이요 거울이므로, 육체가 건전하게 발육하여 의지가 다시금 활동해서 강화되는 일이 없도록 자기에게 영양도 별로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궁핍과 고통에 의해 의지를 점점 좌절시켜 사멸로 인도하기 위해 단식을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苦行)을 한다.
그는 의지가 자기와 세계를 괴롭히는 원인임을 깨닫고 이를 혐오한다. 드디어 그 의지를 해소시키는 죽음이 찾아온다. 하기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금욕자의 존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것 같은 잔존물을 제외하고는 이미 이전부터 거의 사멸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금욕자에게는 죽음이란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그 도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만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달라서 그의 죽음과 동시에 끝나 버리는 것은 단지 현상이 아니라 본질 자체가 해소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질은 현상 속에, 현상을 통하여 간신히 그 허망한 존재를 보존해 온 셈이며*, 이리하여 이제 최후의 연약한 매듭까지도 절단되어 떨어져나간 셈이다. 이와 같이 하여 죽은 자에게는 그와 동시에 세계도 끝나 버리는 것이다.
* 이 사상은 태고의 철학적인 산스크리트(Sanskrit:완성된 언어라는 뜻으로 속어에 대한 잡어란 의미. 기원전 5~4세기경에 된 파니니 문전 이래 그 규격이 확립되어, 전인도의 고급 문장어로서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는데, 인도에서 출판된 불경이나 고대 인도 문학은 대개 이 글로 되어 있다-譯註)의 저작 《산카 카리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비유의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다.
“도공들이 그릇이 완성된 후에도 처음 가해진 타격으로 계속해서 회전하는 것처럼, 영혼은 한동안 육체에 붙어있다. 광명을 얻은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 영혼에게, 자연이 사라지고 나서 비로소 영혼의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코르불크 著 《인도 철학에 대한 여러 가지 수상》 참조)
5) 禁慾의 實例
내가 사용한 개념을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의 밑받침이랄 수 있는 책으로 특히 기욤 부인(1648~1717, 프랑스의 신비가-譯註)의 자서전을 추천하고자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위대한 영혼을 상기할 적마다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사람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그녀의 이성이 보여준 미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그녀의 사상의 훌륭한 점을 공정히 취급하는 것은 뜻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녀의 자서전은 대중, 즉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지 않다. 그 책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 적어도 자기도 다소나마 그와 유사한 소질을 가진 사람밖에는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유명한 프랑스어의 《스피노자 전(傳)》도 이 책을 해명하는 열쇠로서, 스피노자 자신이 쓴 작은 책자인 《지성 개조론》의 그 훌륭한 서두를 아울러 읽으면 어느 정도 내가 든 금욕의 실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 작은 책자의 서두는, 끝없는 정열의 폭풍을 가장 효과적으로 진정시키는 수단으로써 추천할 만한 것이다.
대 괴테도 이 인간성의 아름다운 측면을, 사물을 선명히 하는 시라는 거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치 않은 하찮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괴테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속에 있음-譯註)에서, 크레텐베르크 양의 생활을 이상화하여 표현하고, 나중에 자서전인 《시와 진실》 속에서 그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성 필리포네리의 생애를 두 차례에 걸쳐 서술했다.
6) 聖者들
세계사는 지금까지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그의 생애야말로 우리의 관찰의 가장 중요한 점을 잘 해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계속해서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사의 소재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 아니 전혀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사가 취급하는 것은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나 포기가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삶에의 의지의 현상과 그 긍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개인 속에서, 삶에의 의지의 자기 분열이 그 객체화의 최고 단계에 있어서 완전하게 그리고 분명히 나타나는 세계사 속에서는, 때로는 개인이 머리를 잘 써서 우위를 차지하고, 때로는 대중이 수적인 우세를 무기 삼아 폭력을 행사하며, 또 때로는 운명으로서 인격화된 우연이 맹위를 떨치기도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다 어떤 노력도 결국은 허망한 것임을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시간 속의 여러 현상의 흐름을 추구하지 않고 철학자로서 여러 가지 행위의 윤리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이 의미심장하고 중요한가를 추정하는 유일한 척도라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평범하고저속한 사람들의 의견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하며 또한 의미심장한 현상은 세계 정복자가 아니라 세계 극복자임을 감히 고백하고자 한다.
세계 극복자는 만물 속에 충만하고, 만물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며 작용하는 삶에의 의지를 버리고 부정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며, 이러한 사람들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채 조용히 살아간다. 또한 세계의 극복자 속에서만 의지의 자유는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속인들의 행동과는 정면으로 대립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자기 자신을 부정한 성인들의 생활 기록은 거의 전부가 딱딱하게 씌어져 있으며, 그 중에는 미신이나 공상이 섞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소재의 의미의 깊이로 보아 철학자들에게는 플루타르코스나 리비우스보다도 훨씬 배울 바가 많은 중요한 것이다.
7) 어느 僧侶의 이야기
이 장을 마치기 전에 「제 2의 길」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제 2의 길」은 의지의 부정을 스스로 크게 느낀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단지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와 같은 정신의 고양이 이루어질 경우에, 그리고 이에 의해 정화작용이 시작되었을 때 당사자의 내면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이러한 정신작용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비극을 감상할 때, 감수성이 강한 사람이 경험하는 일을 머릿속에 그려봄으로써 알 수가 있다. 즉, 이런 사람은 비극의 제 3막과 제 4막에서 주인공의 행복이 점차 사라지고 위협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요되어 큰 불만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제 5막에서 주인공의 행복이 완전히 뒤집혀 무너져 버리면 감수성이 강한 관객은 자기의 심정이 어느 정도 고양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인공이 대단히 행복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고상한 종류의 만족감이다. 이러한 느낌은 분명히 뚜렷이 의식된 환각을 불러일으키더라도 역시 공감(共感)이라는 매우 담백한 감각에 불과하다. 이것은 인간을 완전히 체념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는 커다란 불행 때문에 자기의 운명이 현실적인 거대한 힘에 좌우되는 것을 피부로 느낀 사람의 감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을 뿌리로부터 변화시키는 회심(回心)이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라임트 루리우스의 회심의 경위에 대하여 서술했지만, 이와 매우 유사하고 또한 끼친 영향의 크기로 보더라도 크게 주목할 만한 수도원장 란세가 회심한 이야기를 여기 간단시 소개하는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는 청년 시절에 오락과 쾌락으로 나날을 보내었다. 급기야 그는 몬바존 부인과 뜨거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밤에 부인을 찾아간 그는 그녀의 방에 인기척이 없고 주위가 캄캄했지만 매우 지저분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발길에 무엇이 걸렸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잘려진 부인의 머리였다. 그렇게 동강을 내지 않으면, 갑자기 변사(變死)한 부인의 시체를 옆에 놓인 납으로 된 관 속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63년, 끔찍한 고통을 참아넘긴 란세는 그 당시에 엄격하던 규율에서 완전히 이탈해 버린 트라피스트 수도회(修道會)의 개혁자가 되었다. 란세는 곧 이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란세에 의해 본래의 매우 엄격한 금욕주의의 위대성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트라피스트는 이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면서, 오늘날에도 라트라프에 엄존해 있다. 여기서는 매우 엄격한 금욕이 실시되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생활을 하며, 의지의 부정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자는 이미 입구에서 인사를 나눌 때부터 단식과 추위, 불침번(不寢番), 기도 그리고 노동을 하여 메마른 수도사들이 속인(俗人)이며 죄인인 자기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축복을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으며, 또한 수도사들이 의지를 부정하는 태도에 신성한 전율을 느끼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많은 변혁이 있은 후에 모든 수도회 중에서 이 트라피스트만이 완전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이 수도회에서는 다른 모든 의도를 버리고 엄격한 규율을 지니게 된 것은, 이 수도회에서는 다른 모든 의도를 버리고 엄격한 규율을 그대로 실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가 타락하더라도 이 수도회만은 상처를 받지 않고 제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수도원의 토대가 기성 어느 신앙보다도 깊은 인간성에 의거해 있기 때문이다.
8) 기독교의 倫理
우리에게 우선 친근한 것은 기독교이며, 그 윤리는 모두가 전술한 정신에 가득 차 있고, 단지 최고도의 인간애뿐만 아니라 금욕에로 이끌어간다. 금욕은 이미 사도들이 쓴 글에도 그 짝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지만, 나중에 비로소 완전히 제자리를 잡아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사도들을 통하여 명령한 것은 자기애와 맞먹는 이웃에 대한 사랑, 복지, 증오에 대해 사랑과 선행을 베풀 것, 인내, 유화, 모든 모욕을 순순히 참아나갈 것, 정욕을 억제하기 위해 영양을 조금만 취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완전히 성욕에 저항하는 것 등이다.
이미 이러한 점에서도 금욕의 최초의 단계, 혹은 본래의 의지 부정을 찾아볼 수 있다. 의지의 부정에 대해서도 복음서 속에서는 자기 자신의 부정과 십자가의 수용으로서 불리우고 있다(마태복음 16, 24, 25, 마가복음 8, 34, 35, 누가복음 9, 14, 23, 26, 27, 33장 참조). 이러한 방향은 이윽고 점차로 발전되어 속죄자‧은자(隱者)‧승단(昇段)의 기원을 이루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분명히 순수하고 신성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단지 위선과 불미한 것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선한 것을 악용함은 가장 몰염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발전에 있어서, 그 금욕의 씨앗은 기독교의 성자나 신비가의 저작에서 꽃을 피웠다. 그들은 가장 순수한 사랑과 아울러 완전한 금욕, 자유의지에 의한 철저한 빈곤, 참된 평온, 세속적인 사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자기 의지의 소멸과 신 속에서의 재생, 자기 자신을 모조리 망각하고 신의 직관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완벽한 묘사는 페누론의 《내면적인 생활에 대한 성자의 격률(格率)의 해명》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한 기독교의 정신은 독일 신비가들의 저작,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저작과 누구에게나 인정받음으로써 유명해진 <독일신학> 이상으로 강력하게 표현된 것은 없다. 루터는 몸소 집필한 이 책의 서문에서, 자기는 성서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하고 이 책 이상으로 신, 그리스도 및 인간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운 책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진정한, 따라서 위조되지 않은 텍스트는 1851년의 프파이퍼에 의한 슈투트가르트 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 속에 씌어있는 규칙이나 가르침은 내가 삶에의 의지의 부정으로서 표현한 것을 가장 완전하고 깊은 내면적인 확신으로 해명하고 있다.
유태적‧신교적 확신에만 의존해서 이 책을 거부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이 책을 충분히 정독해야 한다. 이 책과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훌륭한 정신으로 씌어진 책으로서 타울러의 《그리스도의 가난한 생활을 본받아서》 및 《마음의 심연》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들 진정한 기독교 신비가들의 가르침과 신약성서의 가르침의 관계는 알코올과 포도주의 관계와 비슷하다. 혹은 신약성서 속에서 마치 베일과 안개를 통해 본 것이, 신비가들의 저작에서는 아무런 베일도 없이 매우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 또한 신약성서를 제 1의 영감, 신비가들을 제 2의 영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작은 그리고 커다란 신비로서 말이다.
9) 인도인의 倫理
인도의 문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미 이해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인도인의 윤리관은 베다나 프라나에서 시인들의 작품, 신화, 성자의 전설, 격언 그리고 생활규칙 등에 여러 가지로 그것도 매우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도인의 윤리관 속에 인간이 지켜야 할 사항으로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자기에의 사랑을 모조리 부인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과, 인간에게만 한정시키지 말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할 것, 자기가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간신히 손에 넣은 것까지도 모조리 버리고 남을 위해 이바지할 것, 자기에게 위해를 끼치는 자에게도 무한한 인내심을 가질 것, 어떤 봉변을 당하더라도 악에 대하여 신과 사랑으로 보답할 것, 모든 치욕을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기꺼이 참아나갈 것, 모든 동물성 음식을 피하고 참으로 거룩한 것을 숭상하기 위해 동정(童貞)을 지키며 모든 육욕을 버리는 것 등등이다.
그리고 인도인의 윤리는 자기의 재산을 버리고 거처를 정하지 않은 채 가족들과 떨어져 깊은 사색에 잠기는 고독 속에 살며, 자유의지에 의한 속죄와 서서히 자기에게 고통을 가하여 의지를 학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는 굶기 시작하여 악어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 히말라야의 신성한 바위산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는 것, 스스로 생매장을 당하는 것, 무희(舞姬)들의 노래와 탄성과 춤과 함께 신상(神像)을 싣고 가는 수레에 깔리는 것 등등 자유의지로 죽음에 이르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인의 가르침의 기원은 4000년도 더 된 옛날부터이다. 오늘날에도 분명히 인도인의 많은 종족들 속에서 상당히 변질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정한 개인에게는 이것이 극단적인 형태로 실시되고 있다.*
오랜 시일에 걸쳐 몇백만에 이르는 민족 사이에서 매우 큰 희생을 치르면서 실시해 온 것은, 과거에 멋대로 이루어진 즉흥적인 소산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의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속죄자 혹은 성자와, 인도교의 속죄자나 성자의 생활을 읽으면 양자가 너무나 일치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리나 풍속이나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양자의 노력이나 내면적인 생활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양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규범 또한 마찬가지다. 가령 타울러는 인간이 요구해야 할 완전한 빈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빈궁은 어떤 위안이나 세속적인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남에게 주고 포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히 이것들은 모두가 완전히 사멸시키기를 원하는 의지에게 언제나 새로운 영양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불교의 규범은 수행자에게 자기 집과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심지어는 수행자가 나무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지 않도록 같은 나무 아래 가지 말라고까지 권유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비가들과 베다철학의 스승들 중에서 완성의 단계에 도달한 자들은, 외부적인 활동이나 종교적인 행사에 종사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은, 이러한 행동이 낙천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즐겨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사물의 사고방식이 그릇되었거나 이상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훌륭하기도 하지만 좀처럼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인 성격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1840년 자가나무트에서 시위행진이 있었을 때, 인도인 11명이 열차 아래 몸을 던져 모두 즉사하였다(1840년 12월 3일 <타임즈>지 게재).
10) 내면적인 희열
이런 희열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여기서 몇가지 사실을 첨가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악한 자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언제나 심한 내면적인 고뇌에 가득 차게 되며 미친 듯이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지만, 일단 욕망의 대상이 없어지면 이번에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삶에의 의지의 부정에 투철한 자는 분명히 밖에서 보았을 경우에는 가난하고 아무런 즐거움도 없고 궁핍한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희열과 티없이 푸른 하늘과 같은 참된 평안에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한 고통에 선행되는 불안한 삶의 충동이나 터무니없이 기쁨에 잠기거나, 혹은 삶의 쾌락을 탐내는 자의 생애에 따르는 기쁨 후의 고뇌에 빠지는 일도 있다.
이 사람들이 도달한 경지는 누구에게도 훼방을 받지 않는 평화와 깊은 평정 그리고 내면적인 명랑성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우리에게 망설임 없이 ‘현명해지기 위해 행동하라’고 외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지를 목격하거나, 혹은 상상력을 다하여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무한한 동경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손에 넣은 욕망 같은 것은 거지에게, 이틀이면 그가 다시 굶주리게 되는데도 오늘 하루의 목숨을 보존케 하기 위해 던져주는 푼돈과 같은 것임을 통감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금욕은 세습(世襲)의 영지(領地)이며, 영주는 언제나 이일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1) 聖人의 내적 고투
육체는 단지 객체화의 형식 속에 있어서의, 혹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속에 나타난 의지 자체인 이상, 육체가 살아 있는한 삶에의 의지도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면서 언제나 현실 속에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며 다시금 그 열화(烈火)를 불타오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나타난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은 다만 의지를 부단히 극복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러한 성과를 가져온 땅에서는 삶의 의지와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영속적인 마음의 평화는 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인의 내면생활을 다룬 기사 속에서 영혼의 투쟁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개를 치켜드는 의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금욕에 힘쓰고, 자기의 죄과를 보상하기 위해 엄격한 생활을 하며, 불쾌한 일을 일부러 원하는 등 여러모로 애쓰고 있다.
그들은 해탈의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이미 획득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또한 향락을-남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도-누리거나 조금이라도 허영심이 꿈틀거리면 이에 대하여 엄격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모든 욕구 속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이면서도 가장 활발히 움직이며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허영심도 사라져 버리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용해 온 낱말인 금욕에 대하여 나는 좁은 의미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의지를 끊임없이 학대하기 위해 쾌적한 것을 거부하고 불쾌한 것을 원하며, 스스로 속죄의 생활을 보내면서 자기를 괴롭힘으로써 의식적으로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12) 苦惱에서의 解脫
우리는 이미 의지의 부정에 도달한 자가 이를 간직하기 위해 힘쓰는 일, 즉 금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운명에 의해 정해진 괴로움도 일반적으로 말해서 의지를 부정하기 위한 제 2의 길이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은 오직 이 제 2의 길에 의해서만 의지의 부정에 도달할 수 있으며, 단지 인식된 괴로움이 아니라 거의가 몸소 피부로 느낀 괴로움에 의해, 때로는 죽음에 접근해 감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체념(諦念)의 경지에 들어가게 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객체화의 원리를 통찰하고, 인식을 통하여 완전한 선의(善意)를 지니게 되며, 모든 사람에 대하여 애정을 품으며, 드디어 이 세상의 괴로움을 모두 자기 자신의 괴로움으로 인정하고 의지를 부정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지에 접근한 자라도 언제나 간신히 살아나가는 형편이며, 한동안 남들이 찬양하여 흐뭇하게 생각하게 되면 어떤 희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의지의 만족을 도모하는 등, 요컨대 쾌락이 의지를 부정하는 데 장해가 되어 다시금 의지를 긍정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모든 유혹은 악마로서 인격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은 스스로 더이상 괴로울 수 없을 정도로 시달림을 받음으로써 의지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전에 의지가 타파(打破)되어 있어야 한다. 그때, 즉 점점 더 가혹해지는 고뇌의 모든 단계를 거쳐서 매우 완강하게 저항하면서도 절망하기 바로 직전에 놓인 사람이 그 후에 갑자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자기와 세계를 인식하고, 자기의 모든 본질을 변경시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고뇌를 초월해서 마치 고통으로 정화(淨化)되어 신성하게 된 것처럼 그 무엇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과 지복(至福) 그리고 숭고하 ㄴ경지에 들어가게 되며, 종전에는 악착같이 집념(執念)하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죽음을 기꺼이 맞아들이게 된다.
이 경지는 고뇌를 정화하는 불길이 가져온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은빛 눈초리로 세상을 보는 것으로, 곧 해탈이다. 매우 악질이던 사람도 때로는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경지에까지 정화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에 범한 여러 가지 악행들도 이미 그들의 양심을 불안에 몰아넣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과거의 악행을 기꺼이 죽음으로써 보상하려고 하며, 이제는 그들에게 이질적(異質的)인 혐오스럽기 짝이 없던 의지의 현상의 종말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커다란 불행에 의해, 그리고 구원을 얻는 데 절망함으로써 이루어진 이 의지부정(意志否定)의 모습을 분명히 묘사한 시로서는, 대 괴테의 불멸의 걸작 《파우스트》에 등장한 그레첸의 고난의 이야기를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구한 세계의 고뇌를 단지 인식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제 1의 길이 아니라, 과도의 고뇌를 몸소 체험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제 2의 길의 전형(典刑)이다. 분명히 아욕(我慾)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나중에는 완전한 체념(諦念)의 경지에 도달하며, 그때 삶에의 의지가 그 현상이 소멸되는 모습을 취급한 비극은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변신의 본질적인 점을 앞에서 말한 《파우스트》의 경우처럼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순수하게 눈앞에 볼 수 있도록 전개한 작품은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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