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理性. logos. ratio. reason. Vernunft)
이성의 의미
사람들은 흔히 일의 이치를 들어 사리(事理)라 일컫고, 물질에도 이치[物理]가 있으며, 마음에도 이치[心理]가 있고, 사람다운 행실의 이치[倫理]가 있으며, 생각과 말에도 이치[論理]가 있다 한다. 수에도 이치[數理]가 있는가 하면, 글 깨우치는 이치[文理]도 있다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이치[天理]와 땅의 이치[地理]도 말하며, 그것을 탐구한다. 무엇인가 이치가 있다면, 이치에도 상하위가 있을 터이고, 상하가 체계를 이룰 때는 최상위의 이치[原理]를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근원적 이치, 이런 원리를 사람 안에서 찾고, 어떤 사람들은 사람 밖에서 찾는다. 사람 안의 원리적 성격을 통칭하여 '이성'(理性)이라 하기도 하고, 사람 밖의 세상 이치를 '천도'(天道)라 부르기도 하며, '천도'는 곧 '이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든 '이성'은 보편적 질서 원리를 뜻한다.
개념이 사태와 부합할 때 그 개념은 참답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그것의 사태와 부합하는지 어떤지를 판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원리적인 개념의 경우에는 그 사태와의 부합 여부를 알아낸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개념들은 사태에 따라 형성되지만, 다른 어떤 개념들은 오히려 사태를 형성시킨다. 가령 '이성'과 그 가족 개념들 - 도(道), 이(理), 로고스(logos), 라티오(ratio), 페어눈프트(Vernunft) 등등 - 이 과연 존재하는 어떤 사태를 표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성'의 개념과 더불어 어떤 사태가 형성되는지를 판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이성' 개념은 긴 세월을 두고 형성되어 왔으며, 그 형성의 역사는 사상의 변천사로 세계관, 인간관, 종교관의 변천 역사와 한 가닥이다. '이성' 개념이 형성 변천되어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성'의 의미가 불변했음을 말한다.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이성'은 '세계와 인간의 보편적 질서'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성은 없다", 곧 "세상과 인간 세계에 보편적 질서 원리란 도무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이성은 상대적이다"거나 "이성은 다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다수의 이성이 주장된다면, 하나의 주장에 대해서 나머지 주장들은 반(反)이성이나 무(無)이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성 개념의 변천은 보편적 질서라는 그것의 의미 변화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질서의 주체 내지는 연원에 대한 견해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이성의 주체 파악을 위한 인간의 노고는 인류 문화를 일구는 온갖 노고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의 근원에 대한 기본적인 또는 근본적인 생각이 바뀔 때 시대가 변했다고 평가한다. 고대와 중세, 중세와 근대는 획기적인 정치·종교적 사건에 의해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성' 개념의 변화는 곧 '주체'[주관, subjectum]·'객체'[객관, objectum] 개념의 변천을 가져왔으며, 그것의 획기적 변천이 시대를 구별하게끔 만든다고 볼 수도 있다. - 그러하기에 오히려 획기적인 정치·종교적인 사건은 '이성'에 대한 생각의 변화와 함께 일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사가 '이성' 개념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사태에 적확할 것이다. 하나의 이성 아래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며, 두 개의 '이성'이 있다면 두 '세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우주(universum)'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성 개념의 형성
우리말 '이성(理性)'의 문자적 유래는 유송(劉宋)의 범엽(范曄, 398-455)이 쓴 『후한서(後漢書)』의 한 귀절["夫刻意則行不肆 牽物則其志流 是以聖人導人理性 裁抑宕佚 愼其所與 節其所偏 雖情品萬區 質文異數 至於陶物振俗 其道一也"(卷六七, 堂錮列전 第五十七 序)]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광범위한 사용은 서양 사상의 유입과 더불어 일단은 그것의 번역어로서라 해야 할 것이고, 그 대표적인 서양 원어는 희랍어 λ?γοs, 라틴어 ratio, 독일어 Vernunft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개념의 의미 천착은 저들 개념의 대의 파악에서 출발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런데 λ?γοs, ratio, Vernunft 혹은 reason의 용처(用處)는 매우 다양하므로, 우리가 이것들 모두를 어우르는 말로 '이성'을 택한다면, 이성의 의미 영역은 전통적으로 도(道), 이(理) 혹은 성(性)이라 표현되던 것까지에 미친다.
λ?γοs나 ratio나 본디 '셈하다'를 뜻하는 λ?γω와 reor의 전성어로서, 셈·계산이라는 기본 의미로부터 비율·관계·추리·개념적 사고·고려·계획·방법·설명·증명·서술·이론·체계·원칙·원리·근거·학설·말·언표까지의 의미를 공유한다.
알크마이온(Alkmaion, BC c. 500)이 "인간은 개념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것들과 구별된다"(H. Diels/W.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Verlag Weidmann, 1951, Bd. I, S. 215, Fr. 1a)는 것을 설파한 이래 일찍부터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ζωον λ?γον ?χον)로 규정되었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기능은 이성과 일치하는 혹은 적어도 이성과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1097b 22-1098a 18)
이로부터 '이성'이라는 개념도 그 의미가 차츰 충전되어 갔다. 키케로(Cicero, BC 106-43)는 "인간은 이성을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이성을 통해 귀결을 예상하고, 사물들의 원인들을 통찰하며, 그것들의 전개 단계들과 이를테면 선행하는 근거들에 무지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또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유사한 현상들을 비교하고 결합하며, 현재하는 것과 다가올 것을 연결하며, 전 생(生)의 과정을 쉽게 통찰한다"(Cicero, De officiis, I, 4)고 파악함으로써, 이성의 기능을 규정함과 동시에 이성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지시하였다. 이런 사정의 파악은 "이성적 동물임이 인간의 특성"(proprium hominis est esse animal rationale: Th. Aquinas, Summae contra gentiles, III/1, cap. 39)이라 논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게서도, 자연상태에서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animal rationabile)인 인간은 자기 형성의 노고를 거쳐 자신을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로 만든다(Kant, 『전집』 VII, S. 321)고 본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논리학 교과서에서 개념의 논리적·본질적 정의의 한 예로 흔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가 제시될 정도로, 이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성질로 얘기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성이란 우주 세계의 질서 자체이며, 이 우주 질서에 인간이 참여하는 한에서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는 그 좋은 사례를 고대 중국의 유가나 도가 사상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상에서도, 오늘날 가히 세계적인 보편적 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역(周易)』의 '乾爲天 卦爻辭'에서 "하늘의 법도가 변화하니, 만물은 각기 자신의 본성을 바르게 하면서, 서로 합하여 큰 조화를 보전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는 언명과 함께, 「계사전(繫辭傳)」(上, 十二)에서는 "형태를 가진 세상 만물을 그릇이라 한다면, 이것을 주재하는 형태 위에 있는 것을 도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는 규정을 우리는 본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우주 전체의 운행 원리로서의 '도'(道)에 대하여, 이 도의 분수(分殊) 내지는 세목(細目)으로서 개개 사물에 내재하여 각기 그 사물을 주재하는 원리가 '이'(理)라고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 도리(道理)는 하나로 이해되었다.9)
도리는 또한 우주 자연의 운행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운행 원리를 가늠하여 인간이 그 행실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이고, 이 법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참다울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하늘이 정해준 바가 본성이며, 본성을 따르는 것이 법도요, 이 법도를 마름질하여 격(格)을 세우는 일이 가르침이다. 법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떨어질 수 있으면 법도가 아니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 須臾難也 可離 非道也)는 『中庸』의 첫 구절은 그런 생각을 담고 있는 한 예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세계관도 이런 생각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4-483) 이래로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로고스(λ?γοs)는 무엇보다도 우주의 원리를 의미했고,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 주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계는 온갖 것들의 무질서한 무더기가 아니라 질서 정연한 전체 곧 코스모스(κοσμοs)이다. 인간 안에 깃든 로고스는 인간에게 진리에 이르는 바른 길을 지시하는 사고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자세의 척도로 납득되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에게서 사고(διανοεισθαι)란 영혼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말, λ?γοs]이다(Platon, Theaitetos, 189e-190a 참조). 또한 타자와의 대화는 대화 상대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진리를 자각하도록 촉발하는 매체이다(같은 책, 157c 참조).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진리의 척도를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대화 참여자는 한결 같이 중요한 위치를 가지며, 참된 대화를 이끄는 것은 언제나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에게서는 곧바로 도덕적 정도(正道, ?ρθοs λ?γοs, recta ratio)이다. 정도를 따라 사는 것이 윤리적 태도이며, 그 정도란 다름 아닌 중용(中庸, μ?σοs)의 길이다(Aristoteles, Ethica Nichomachea, 1138b 18f. 참조). 도덕적 인간의 징표는 그의 정념(情念)이 로고스의 지도에 따른다는 점이며, 이런 경우에 인간은 최고 완전성에 도달한다. 그런데 아는 자만이 행할 수 있고, 행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아는 자인만큼 인간의 최고 완전성은 그의 이성(λ?γοs)이 완전하게 발달하는 데에 있다(같은 책, 1144b 30f. 참조). 로고스의 이런 의미는 스토아 사상을 거치면서 더욱 풍부함을 얻는다.
스토아 사상에서 로고스는 일차적으로 세상사를 결정하는 내적 원리로서 우주의 정기(精氣, Geist)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에서처럼 불에 비유될 수 있는 질료 원리로서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며, 확고 부동한 법칙성에 따라 우주의 전개를 이끄는 것이다. 역사는 로고스가 관통하는 이성적 과정이며, 이 우주의 정연한 질서와 단계 내에서 각양 각색의 만물은 각기 자기의 위치를 가지며,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보편적인 이성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이 그러나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는 만물이 이성을 구유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 사물 가운데 인간만이 이성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성을 담지하고 있는 개개 인간의 영혼은 보편적 이성의 한 부분들이다(Seneca,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Ep. XLI 참조). 인간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이성 능력이 보편적인 이성 능력으로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인간은 자연 안에서 최선의 것이다(Seneca, Naturales quaestiones, I, 13 참조). 이성은 세상에서 가장 신적인 것이며,(Cicero, De legibus, I, 22 참조) 그것은 인간과 신들을 연결시킨다(Cicero, De natura deorum, II, 62 참조).
행위에 있어서 이성은 도덕적 행위의 규준으로서 곧 자연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자연에 맞게 살라"(naturae convenienter vive)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도덕 명령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사를 순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란 두루 이성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되어가는 일을 거부하거나 생(生)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 세계의 이성[合理性]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세계, 더 완전한 세상을 건설한다는 것은 인간의 과제가 아니며, 부질없는 짓이다. 세계의 완전함은 결코 의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이성을 의심하는 일로, 이성 자체를 의심할 척도는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도덕적 완전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이성을 우주의 보편적 이성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모든 비도덕적 행실은 종국에는 우주질서에 대한 비이성적 반발이다. 이런 반발은 정념의 규제 받지 않는 출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각자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이성화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전적으로 로고스가 되도록, 바꿔 말하면, 심정(pathos)의 동요를 완전히 절멸시키도록 전념해야만 한다. 거기에 바로 무감정(apatheia)의 이상이 있다(Diogenes Laertius, VII[Zenon], 117 참조). '무감정'이란 단지 정념이 이성에 굴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념이 완전히 제거되어 인간이 전적으로 로고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자체의 이법(理法)이요, 자연물 가운데 특별한 생물인 인간의 생명 원리이자 사고와 행위의 규준으로 이해되던 이성은 기독교 사상에 와서 당초에는 초월적인 신 안에 그러니까 인간 위에, 그러나 예수의 육화(肉化) 사건을 통하여 인간 안에도 있는 것으로 납득된다.
"태초에 말씀[道·理性]이 있었다(?ν ?ρκη ? λ?γοs). 말씀은 하느님[神]께 있었으며, 말씀이 하느님이었다. […] 만물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며, 말씀 없이는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말씀 가운데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 그것은 이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을 비추는 참다운 빛이었다."(공동번역 『성서』, 요한복음 1:1-9)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ho Alexandria, BC 24-AD 50)이 파악했고,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이 이해했듯이, 로고스는 신적인 것이지만 신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제2의 신이며, 신과 세계 사이의 일종의 매개자이다.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것도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신의 계시이며, 신을 공표하는 말씀이며, 그 말씀은 인간을 지혜로 인도하고 때로는 강제하고, 약한 자에게 치유를 준다. 인간을 위한 신의 계명으로서 로고스는 올바른 길(?ρθοs λ?γοs)이며, 사람들의 관습에서 생긴 법과는 대조되는 자연법이다. 신의 형상으로서 로고스는 또한 인간 안에, 곧 지성 안에 자신의 모상(模像)을 가진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달리 말하면, 로고스는 세계를 창조한 주(主) 하느님의 세계 창조의 근본틀(forma principalis)이자 운행 원리이며, 그것은 이성 자체 곧 순수 이성(ratio pura)이다. 이 신의 이성(ratio divina)에 인간이 참여(μ?θεξιs)한 그 만큼 인간도 이성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이성은 신의 이성과 유사하고 그것의 모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이성과는 달리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고, 그런 점에서 신의 이성과 인간의 이성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가 조금 할당받아 가지고 있는 이성의 힘으로 신의 이성의 길을 따라 걸음으로써 신의 은혜를 입어 최선에 이를 수 있다.
이성 개념의 변이
자연에 내재하는 이성, 자연을 주재하는 신의 이성은, 인간도 자연물 가운데 하나인 까닭에 인간을 또한 관통하는 이성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참다운 이성의 주체는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 위에 있는 이성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성은 인간의 이성이며, 이성의 주체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은 '계몽(啓蒙)'이라는 이름과 함께 퍼졌다.
"이성 혹은 양식(良識)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고 우리를 짐승과 구별되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므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I, 2)
'근대' 혹은 '현대'라는 시대 구분을 하면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이성의 주체라는 생각은 개명된 것이고, 자연 이성 또는 초자연적 이성을 생각하는 것은 덜 깨인 짓이라는 게 광범위하게 납득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철학적 결정판은 아마도 칸트(I.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순전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1793)에서 표현된 이성 개념일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XVI)의 중심에는 바로 이성의 주체에 대한 생각의 대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초월적 이성의 세계 주재 사상은 인간 한계에 대한 절실한 자각과 그 한계의 극복을 타력(他力)에나마 의존하려는 희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 체계에서 이 '희망'은, 신은 자연 만물의 근원이자 근거이고 주(主)이며, 반면에 그 안에 인간도 포함하는 만물은 신의 피조물로서 세상에 잠시 머무는 객(客)이고, 신이 그의 사업을 하는 데 쓰는 도구적 존재임을 수용해야 하는 대가를 치른다.
신은 만물의 중심이고 그의 이성은 세계의 질서 자체이고, 그런 의미에서 '순수 이성'이다. 신은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뜻에 따라 만물을 운행한다는 의미에서는 '순수 의지'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自由) 자체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 만물이 그 존재 생성에서 무엇엔가로부터 비롯한 것(ens ab alio)이라면, 신은 그리고 오직 신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ens a se)이니, 신은 만물의 궁극의 원천 곧 제일 원인[causa sui]이고, 이 궁극의 원인은 자연 인과 계열 너머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신은 우리 인식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연의 존재 생성 계열에 대해서도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재료 없이도 있지 않던 것을 있도록 하게 하기도 하고, 이미 있는 것을 달리 있도록 하게 하기도 하고, 있는 것을 없도록 하게 할 수도 있는 순수한 활동(actus purus)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순수 이성'이나 '자유 의지'는 매인 데 없는 존재자 곧 신에게나 타당한 술어라 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몽'의 기치 아래 순수 이성과 자유 의지를 인간의 술어로 돌리고 인간을 만물의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주체'(subjectum)이고 기체(基體, substantia)로 주장되었다. 이 주장의 정점에 칸트가 서 있다.
인간은 철두철미 신체적 존재이고 그런 한에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자연이란 무엇인가? 질료[내용]적으로 볼 때 자연(natura materialiter spectata)은 물질의 집합이지만, 형식적으로 볼 때 자연(natura formaliter spectata)은 수학적-역학적 법칙 체계임을 '계몽된' 자연과학자들은 들춰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수학과 역학의 원리, 그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자명하게도 수학을 하고 역학을 하는 인간, 곧 '나'의 이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니까 자연의 질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기반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문자 그대로 그에 의해 인식되는 자연의 이치, 원리로 간주된다.
인간 이성이 그것의 형식적 원리인 자연은 인간에게 그러하게 파악된 자연이라는 뜻에서 칸트는 그것을 '현상'(Erscheinung)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인간에게 그밖에 달리 있을 수는 없는 현존하는 것 자체 곧 실재이다. 자기 비판을 거친 인간 이성은 이른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 '사물 자체'란 우리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임을 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그것 그대로 파악하는 인간의 인식 방식이 자연과학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진리의 학문인 자연과학을 통해 존재자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데 자연과학은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무엇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가를 가장 권위 있게 밝혀 내는 것은 자연과학인데, 이 자연과학은 있는 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가는 인간의 인식 방식에 의존되어 있으며, 적극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인식 방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실재하는 것을 인식하며, 이 인식을 통해 실재하는 것은 그 실재하는 것으로 정(定)해지고 위치 지어진다. 인간이야말로 모든 실재하는 것의 중심이며, 그런 의미에서 주체이다. 이것은 인간의 학적 인식이란 인간에 독립적인 사물에로의 동화(assimilatio ad rem: Th. Aquinas, De veritate, qu. I, art. 1 참조)가 아니라, "그가 그의 개념들에 맞게 사물 안에 집어넣었던 것"(Kant, K.d.r.V., BXII) 도출하는 일이다.
자연과학의 성과에 자신을 얻은 인간의 이성은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가려내는 판관(判官)임을 자부하고, 실재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실재'는 곧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나타난 것이란 의미에서 '대상'(對象, Gegenstand)이다. 그래서 이제 '사물'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이성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이런 관계는 '인식하는 이성=주관·인식된 대상=객관'으로 설정(positio)된다. 그리고 여기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조(theoria)하고 인식하는 이성은 이론 이성 또는 사변 이성으로 이해되고, 이 이론 이성은 자신이 '이미 갖추고 있는'[선험적인, a priori] 기능에 따라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을 대상으로 가능케 하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초월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이라 불린다(같은 책, A346=404 참조).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주관으로서의 이성이 경험에 앞서 이미 갖추고 있는 인식 기능은 그것의 선험적 구조에 기반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을 가능하게 한 인식 형식을 말한다. 인간 이성은 사물을 시간·공간 질서 위에서 양(量)·질(質)·관계(關係)·양태(樣態)의 개념에 맞춰 인식한다. 우리가 자연 세계를 수학적-역학적 질서 체계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방식이 시간·공간상의 것만을 감각하고, 그 내용을 수량과 힘의 관계로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이성은, 무엇인가가 (혹시 신이 보기에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초시간적·초공간적이어서 감각될 수 없고, 수량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힘의 영향 관계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이라면, 바꿔 말해 그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함은 그것의 무엇임(essentia)과 있음(existentia)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고, 우리에 의해서 이렇게 규정된 것만이 '우리에 대해서 있는 것' 곧 대상(對象)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의 면에서 그러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자가 주관에 의존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존재자의 존재 형식, 나아가서 존재자들의 총체인 자연의 법칙 체계의 원리의 면에서만 그러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물의 하나로서 그 안에서 터잡고 살고 있는 자연은 단지 법칙체계일 뿐만 아니라 질료적인 자연인만큼, 인간은 여전히 - 적어도 질료적인 면에서는 - 자연에 의존되어 있고 예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요컨대 인식 주관으로서의 인간은 질료를 수용한다는 점에서는 감수적(sensibel)이고 수동적이다. 그러면서도 수용된 질료를 규정한다 즉 그 질료에 형식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 이성은 굳이 표현하자면 "부분적으로 (자연) 현상의 창조자"(Kant, 『전집』 XV: 조각글 254)다.
자연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이론 이성은 주어지는 것을 자신의 인식 방식대로 수용, 하나의 대상으로 규정할 뿐, 자연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실천 행동을 통해 자연에 변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인간은 특히 도덕 행위를 통해 삶의 조건으로서 자연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연 속에서 자연 존재자로 살고 있는 인간이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의 '자연스런' 흐름과는 달리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이상(理想)에 따라 행위한다. 이때 '마땅히 해야 함'은 감성적 자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표상이므로, 그것은 순수한 이성의 이념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순수한 이념에 따라 도덕 행위를 주도하는 인간의 힘을 칸트는 순수한 실천 이성이라고 부른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인간이 인격적 존재자로서 모든 도덕 행위에서 준수해야 할,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전집』 V, S. 30)는 원칙을 제시하고,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전집』 IV, S. 429) 실천 강령을 자율적으로 세운다.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지는 오로지 이성이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 행위할 뿐 그 행위의 동기에서 어떤 자연적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간의 실천적 행위로서 도덕 행위는 자연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 중의 연쇄적 기계적 인과 원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지의 자유 원인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때 실천 의지가 준수해야 할 도덕 법칙을 세운 이성, 이를테면 순수한 실천 이성의 주체인 인간은 자연의 인과 계열 밖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해에서 칸트는 신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연 세계에 속하지만,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은 예지 세계(mundus intelligibilis)에 속한다고 본다.
자연적인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소질로 인하여 자주 감성적 동기에 따르며, 그것은 순수 이성이 세운 도덕법칙과 흔히 충돌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때로 인간은 자연적 성향(propensio)을 뒤로하고 도덕법칙을 준수하기도 함으로써 그가 자유로운 행위 주체, 곧 인격(persona)임을 보여 준다. 이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수많은 욕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인 우리로 하여금 […] 그런 욕구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만큼 그토록 높이 고양되도록 하는 것일까?"(Kant, Religion: 『전집』 VI, S. 49)하고 물어 볼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칸트는 "개념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적인 유래를 알려 주는 어떤 (우리 안의) 소질이 심성에 작용해 감동을 일으켜서"(같은 책, S. 50) 도덕 법칙을 준수케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의 궁극목적'에 부합하기 때문(Kant, Kritik der Urteilskraft: 『전집』 V, S. 455 참조)이 아닐까 반성하면서, 인간 행위뿐만 아니라 자연 전체를 주재하는 인간 위에 있는 어떤 힘, 질서 원리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이내 내리막길이라던가. 이로써 계몽주의는 그 정점에서 다시 인간 이성 너머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세계 이성' 내지는 '정신'과 마주친다.
자유 없이는 실천의지도 미적 상상력도 불가능한 것이고, 자유는 현실적으로는 의지를 통해, 이상적으로는 상상력을 통해 현실화한다. 의지와 상상력은 선(善)과 미(美)의 이상이나 전형(典型)을 그리고 지향하며, 인식하는 지성은 진리의 이상을 세우고 그에 이르려고 애쓴다. 그것이 정신의 제 현상,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이다.
정신은 자기 정립적이며 자기 활동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유이자 주체이므로 본래 무엇에 관하여 상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자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삼라만상과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하면 개념으로서의 정신, 절대자가 매체를 통하여 전개 실현될 때, 그것은 여러 모습[相]을 보이고 그런 한에서 전변(轉變)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정신은 실재에서는 이를테면 '상대적인 절대자'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중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은 원래 절대자이건만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신의 모습은 언제나 가상(假象, Schein)이고 그런 만큼 정신은 본래의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곧 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그때 그때의 모습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래서 헤겔은 자주 정신이란 "순전히 스스로 하는 운동의 절대적 불안정"(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9, S. 100) 또는 "절대적 부정성"이라 말한다.
정신은 현실에서 결코 안정 중에 있는 일이 없으며, "항상 전진하는 운동"(같은 책, S. 14)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전진 운동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계기에서 '진상'으로 현상하는 정신은 다음의 계기에 현상하는 정신에 의해 부정되고 가상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진정한 '진상'이 아니었기에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부정은 필연적이고, 이 부정은 그러나 바로 정신 자신의 힘이라는 점에서는 자유 자체이다. 자유로서 "정신의 힘은 그것이 표출되는 꼭 그 만큼 큰 것이며, 정신의 깊이는 그의 펼쳐 냄 중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상실해 갈 수 있는 그 만큼의 깊이를 갖는다."(같은 곳) 정신에 의한 정신 자신의 이 부정을 통한 확장 운동 과정이 "정신의 생(生)"이며, 정신은 이 끊임없는 자기와 자기의 "분열" 중에서 완성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정한 "진상"을 마침내 획득한다(같은 책, S. 27 참조).
정신은 전변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나, 그러나 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운동 중에서도 정신은 항상 '자기동일성' - 이른바 비동일성의 동일성 - 을 유지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변의 절대자이자 실체이다. 또한 이 절대자는 "살아있는 실체"(같은 책, S. 18) 곧 "주체"이며, 언표 상에서는 "주어"이다(같은 곳 참조). 전개되는 모든 계기들, 전상(展相)들은 이 주체에 속하는 것이며, 이 주어에 속하는 술어들이다. 속성들은 언제나 주체 내지 기체(基體)인 실체에 속하며, 술어들은 언제나 주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실체 내지 주체는 속성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며, 술어 없이 주어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이 속성들이 바로 그 실체는 아니지만, 속성들 곧 전개되는 계기들을 통해서 실체는 그러나 자신의 참모습[眞相]을 드러낸다. 정신의 한 계기 한 계기, 한 전상 한 전상은 정신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각각 진상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진상은 전체"(같은 책, S. 19) 뿐이다. 물론 이 "전체는 그것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같은 곳. 또 Hegel, Wissenschaft der Logik[WdL] I: GW11, S. 355 참조) 정신은 이렇게 다수이면서 하나[一者]이며, 보편적인 것[普遍者]이고, 이런 의미에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로서의 정신은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의 주체이며, 이 점에서 자유인 정신은 "달리 되어감"에서 자신임을 유지하고, "달리 있음"에서 "자기와 같음[同一性]을 재생산"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오직 매개적으로만 현상하며, 따라서 실체 내지 주체로서, 그리고 절대자로서 정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는 이 부정 운동의 "종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이 "종점"은 정신이 자기 부정 운동을 막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살아 있음을 보일 때부터 "목표"로 가진 "이념"[개념]이자 긴 도정을 매개로 한 "결실"이다(Hegel, WdL I: GW11, S. 376 참조).
정신의 자기완성의 긴 도정이 세상의 역사, 세계사이며, 그런 점에서 세계사의 주체인 이 정신은 "세계정신" 또는 "세계이성"이라 부를 수 있다(Hegel, PdG: GW9, S. 25 참조). 그러니까 이 세상, 세계란 세계정신의 자기인식 내용이며, 자기 기투(企投)와 노역(勞役)의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이 세계정신의 대표적인 매체는 인간이며, 세계정신은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대상 인식과 자기 인식 그리고 실천을 통하여 가장 잘 발현된다.
헤겔이 세계정신의 탁월한 매체는 인간이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 세계이성이 구현된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의 활동은 대상 의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 의식, 자연 인식 활동보다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 따라서 타자 의식,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인식과 타자와 관계 맺는 활동에 의해 세계 역사는 전개되는 것이다.
자기의식적 존재자로서 개인은 개체이고, 그런 한에서 그 자기의식은 독립성을 지향하고, 그것은 욕구를 가진 생명체로 현상한다. 이 자기의식은 최초에는 '나는 나다'라는 순전히 자신을 향해 있음·스스로 있음(Fürsichsein)으로서 개별자이지만, 그러나 이 개별자로서 자기의식은 그에 맞서 있는 또 다른 자기의식을 발견한다. 이 복수(複數)의 자기의식은 서로 독립성을 내세우며 인정(認定) 싸움을 벌인다. 승자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고 패자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식 사이의 싸움은 생명을 건 투쟁이며, 이긴 자만이 자유를 확보한다.
노예는 자기의식의 독립성을 상실한 자로, 노예는 단지 사물적 존재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독립성 없이 그러니까 사물처럼 주인에게 종속해 있다. 노예는 주인의 의사대로 움직여야 하며, 노예는 주인이라는 타자의 자아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노예가 하는 행동은 실은 그 주인이 하는 행동이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기의식 간의 인정 싸움이 생명을 건 투쟁으로 발전하여 승자와 패자 사이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승자가 힘이 강한 탓이라기보다 패자가 목숨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 예속될 처지에 놓여 있는 자가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성을 지키려 들면, 승자는 있어도 주인은 없을 터이다. 패자가 복종 대신에 죽음을 택하고 나면, 노예는 세상에 존재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노예는 독립성을 잃고서라도 생명을 지속시키려는 욕구로 인해 생긴 것으로, 노예는 '주인의 노예'라기보다 이를테면 '생(生)의 노예'라 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비단 우리는 두 자기의식 사이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념의 노예도 적지 않으며, 저편에 있는 하느님을 주(主)로 받들고 기꺼이 그의 종(從)으로서 영생(永生)을 얻고자 하는 자도 많다. 또한 목숨 부지를 위해 금전[物神]의 노예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도 쉽게 볼 수 있다. 인간 사회에는 이렇게 여러 종류, 여러 형태의 주-종 관계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든 한 인간이 종(從)의 위치에 놓이는 한, 그는 자기의식으로서 독립성을 상실하고 사물로 전락한다.
인간에게서 구현되는 이성은 그러나 "이성이 바로 실재성이라는 의식의 확신"(같은 책, S. 133)으로서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을 저편의 것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으려 한다. 의식은 저편의 것 자체를 지양하고 저편의 것 안에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이렇게 이성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할 때, 한 자기의식의 "타자임과의 부정적 관계"(같은 책, S. 132)는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이제까지 자기의식은 타자나 세계를 대가로 해서 자기 자신을 구하고 유지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확인한 이성으로서 자기의식은 세계와 자기 자신의 고유한 현실에 대해서 안정을 되찾으며, 이것들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그의 생각[意識]이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현실임으로써 자기의식은 현실에 대한 이상주의[觀念論]의 태도를 취한다."(같은 곳) 자기의식이 이런 태도를 취할 때, 이성은 이제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입장을 보인다. 이 서로 다른 존재 형태들은 상호 공존적으로 간섭하며, 서로 배제하고 제한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호 보완한다.
"이성적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을 통한 실현"(같은 책, S. 193)의 최고 형태는 도덕의 왕국이다. 도덕의 세계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은 개인들 상호 간의 일방적 인정이 피해질 뿐만 아니라, 개개인은 전체로 지양된다. 헤겔이 보기에 비로소 여기에서 개개인은 "그들이 각자의 특성을 희생시키고 [전체라고 하는] 보편적인 실체가 그들의 영혼이며 본질이 됨을 통하여 - 이 보편적인 것이 그들 개개인들의 행위이며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작품이 됨을 통하여 각자가 독자적인 존재자임을 의식한다."
도덕의 왕국에서 전체와 개인,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는 한낱 당위적인 것도 아니고, 한 반성하는 이성이 만들어낸 이론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체 안에서 살고 있는 개개인이 항상 자신들에서 체험하는 바다. 개개인은 자신을 성찰하자마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행동의 방식과 내용이 전체라는 보편적 실체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행위의 "내용이 비록 완전히 개별화되어 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이러한 내용도 그 구체적인 사실에 비추어 보면 만인(萬人)의 행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뒤얽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 하는 개인의 노동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타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더 나가서 개인은 사실 타자의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개인은 자기의 개별적인 노동을 함에 있어서 이미 부지불식간에 일반적인 노동을 하고, 또한 그는 모름지기 이러한 일반적인 노동을 자기의 의식적인 대상으로 삼고 이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전체란 어디까지나 개별자에 의한 전체라는 점에서 결국 이 개별자의 작업이고 그 작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개별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거꾸로 그 자신을 전체로부터 되돌려 갖는 것이다."(같은 책, S. 194f.)
이로써 '타자를 위한 존재'(Sein für Anders)와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Fürsichsein)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 통일이 한 민족, 한 국가에서 "보편적 실체"의 기능이며, 이 보편적 실체는 윤리 도덕과 법률에서 그것의 보편적 언어를 발견한다. 이 보편적 언어는 '보편적'이면서도 다름 아닌 개별성을 표현하고 있다. 윤리 도덕과 법률은 모두 "개개인이 행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도덕법칙과 법률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개인은 이 '보편적 정신'에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에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할" 확신을 갖는다. 좀더 풀어 표현하면, "나는 타자들 중에서 그들과의 통일을, 그들이 나를 통해서 존재하고 내가 그들을 통해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직관하며, 즉 나 자신으로서 타자들을, 타자들로서 나 자신을 직관한다."(같은 책, S. 195) 그래서, 한 자유로운 민족·국가의 윤리 도덕적 사회 생활에서 '자기의식의 이성의 실현이라는 개념'이 그것의 완성된 실재성을 갖음이 확인된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 속에서 '우리'를 의식할 때, 의식은 '보편적 실체'와 하나가 되고, 그로써 "참된 정신"이 된다. 여기에서 이성의 "자기 자신이 모든 실재성이라는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며, 이성이 자기 세계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세계를 의식함으로써, 이성은 정신이다."(같은 책, S. 238)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절대자로서 이성은 비로소 구체적이 된다. 이성은 절대자로서 현실(성)의 숨겨진 배후가 아니라, 인간 세계 자체 안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아니 이성은 인간 세계에서 자신을 실현시키고, 실현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성이 절대자이고 세계정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의 행위의 불요 부동의 확고한 근거이자 출발점이며, 목적이자 목표"(같은 책, S. 239)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자기를 보이고,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활동이 결과하는 "보편의 작품"(같은 곳)이기도 하다.
세계정신은 개개인들의 이해 관심과 욕구와 정열을 매체 삼아 자신을 전개해 간다. 그렇기에 개인들의 욕구가 다양하고 열정이 뜨거울수록 그리고 상상력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세계정신은 그 풍성함을 내비친다. 상충하는 이해 관심에 매인 개별자로서 개인들은 서로 제한하고 대립하고 투쟁하지만, 그것을 통해 보편자인 이성은 자신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성의 책략"(Hegel, Vorlesung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PG], TW 12, S. 49)이다. 그럼에도 개인들을 전적으로 수단만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어떤 그 자체로 영원하고 신(神)적인 것" 곧 "도덕성, 윤리성, 종교성"(같은 책, S. 50)이다. 이런 성격들의 주체는 한낱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보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윤리적 전체의 성원으로 될 때 보편적 이성과 하나가 되고,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이 동시에 세계의 목적에 부합될 때 신성(神性)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런 만큼 그의 개성 하나 하나도 존엄하고 신성하다. 아니 인간이 신성(神性)에 참여함은 필연적이고 또 그로써 인간은 고양된다. 그래서 헤겔에서 신은 초월적이라기보다는 자연 내재적이고 인간에게 임재(臨在)적이다. 칸트의 비판적 사변이성에서 그 존재가 유보되었다가 실천이성에서 요청되었고, 반성적 판단력에서 '자연적 합목적성'의 실체로서 암시되었던 신은 이로써 헤겔에 이르러 정신으로서의 보편이성에서 현현한다.
반(反)이성주의 동향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이성 비판을 통한 인간 이성의 본질 구명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의 정체에 대한 철학적 해명 노력이다. 그 노력 끝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자로서 신체적으로는 매우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바꿔 말해 이성적으로는 자유로운 존재자이며, 그 점에서 정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연도 그 전체에서 볼 때는 자기 운동하는 것으로서, 그 만큼 정신의 표현이자 전상(展相)이며, 이 자연 형성에 인간은 이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연 정신의 대표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인간 이성의 실현 과정이 세상의 역사 곧 세계사이며, 그러니까 인간은 정신의 외현(外現)의 주요 매체이며, 세계사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상주의적 사상에는 반추해야 할 몇 가지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비록 물질적 질료를 빌어 현실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도 따라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정신이고, 다시 말하면 자기 정립적이고 자기 운동적인 실체이고, 게다가 목적 지향적 활동을 하는 주체라는 생각이다.
둘째, 자연과 인간은 그 뿌리에 있어서 ?? 곧 정신에 있어서 ?? 하나인데, 정신의 외현은 그것의 절대적 부정성에서 기인하므로, 자연도 인간도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형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셋째, 인간은 그러므로 목적 지향적인 따라서 자기 입법적이고 실천적이며 이성적이되 역사적인 존재자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함축하는 바는 많다. 특히,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자라는 파악은 인간 사회를 개인 주체들의 집합체(compositum)로 이해하는 근래의 경향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반성할 점을 야기한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위에서 형성되어 가는 것이고, 또한 여러 사람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곧 역사는 집단적 사회적이며, 제한된 공간과 시간을 넘어 이상을 현실로 바꿔 가는 도정이다. 인간이 역사적인 한에서, 인간은 이상을 동경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유(類)적 생활을 한다. 인간이 인류라 함은, 아버지와 앞 세대의 종점을 나와 뒷 세대는 그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는 존재자임을 뜻함과 아울러, 개별자인 그 '나'는 결코 단독자가 아니고 이미 전체(totum) 안의 부분임을 뜻한다.
개별자인 '나'가 전체의 부분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이성도 그의 자유도 전체 이성 또는 전체 자유 내에서만 의미를 얻음을 뜻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세계이성' 또는 '세계정신', 같은 어법을 사용하여 '역사이성'이나 '시대정신', '국가이성'이나 '민족정신'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낼 때, 개인의 주체성과 이성은 그 독립성 곧 개별성을 상실한다. 이런 생각의 방향이 반 전체주의, 반 보편 이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주의는 인간의 착오에 대한 자기 교정 능력을 믿으며, 따라서 유(類)로서의 인간은 착오에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씩 전진하여 자신을 완성하여 마침내 세계를 완성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세계가, 세상이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고 싶어할 때, 우리에게 '인류의 역사'보다도 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역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시시각각 갖가지 양상을 보인다. 발전이라는 말이 일정한 목표에로의 접근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 퇴락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변전(變轉)하는 것일까? 보편 이성주의는 이 물음에 인류사는 발전한다고 응답한다.
한 개인을 전체로 놓고 볼 때 그는 단계를 거쳐 그리고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듯이, 인류 또한 다양한 개개인들 또는 민족들을 통하여 발전한다. 어떤 개인들 어떤 민족들은 패망하지만, 개별자의 수많은 패망조차도 오히려 인류사 발전의 토대를 이룬다. 전체 인류는 개개인을 요소로 갖기에 개개인들의 성격 곧 개성이 다양할수록 인류는 더욱 더 풍부해진다. 그러나 인류는 개개인들의 단순한 수적인 집합도 아니고, 인류를 대변하는 것이 평균적 인간도 아니다.
인류사는 현실의 역사이지만, 현실은 단지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활동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것이고, 인류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선한 인간, 좋은 세계를 지향해 왔다. 우리가 이제껏 진정으로 선한 인간, 좋은 세상을 만난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 해서 우리에게 그에 이르려는 목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선한' 인간, '좋은 세상', 활동의 '목표'를 얘기하는 데는 불가피하게 보편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선함'이나 '좋음'이 사람마다 시시때때로 또 상황마다 다르게 이해된다면, 도대체 '얘기'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터이다. '우리'는 "1-1=0"이 자명하듯이, 누구나 사람은 물건처럼 취급되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 곧 인격으로 응대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동시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전체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 되는 그런 일만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사실로 납득하는 능력을 보편적 이성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 같은 보편 이성주의는,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지만, 인간의 '보편적 이성'은 세계이성의 표현이며, 그것은 장구한 시간을 두고 인류의 무진장한 노고를 거쳐 마침내 현실화한다는 인간 중심적 점진적 발전론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 대 인간,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은 오히려 '전체'의 내적 생명력이고, 이런 자기 보완적 생명 활동을 매개로 시초에 한낱 개념이던 절대자·무한자는 내용을 얻고 구체화한다는 현실 긍정의 역사철학이자 낙관적 세계관이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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