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문학

그리스 비극

rainbow3 2019. 9. 29. 00:25


그리스 비극 ➊ 민족의 청년기(융성한 시대)에 비극이 유행

 

그리스 비극은 조우현과 여석기 등이 옮긴 ‘그리스 비극 1, 2(현암사)’를 추천한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작품 33편 가운데 16편이 실려 있다. 이디스 해밀턴의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은 비극을 읽기 전이나 후에 읽으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 비극에 대한 철학적 이해도 가능하다.

 

 

세제스타 원형극장(위), 그리스 델포이 극장 (아래)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한 장은 산 중턱에 있는 극장으로 아폴론 신전과 신탁이 행해지던 고대 그리스의 배꼽(중심)으로 불린 델포이 극장이다.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원형 극장. 관람석에 앉아 아폴론 신전과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 어머니의 아늑한 품이 생각날 정도로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시민들에게 최적의 ‘힐링’ 장소였을 것이다.

 

또 한 장은 시칠리아섬 산 정상에 있는 세제스타 원형극장으로 기원전 5세기에 지어졌다. 시칠리아는 BC 5세기 중엽 이전부터 아테네와 관계를 맺었다. BC 409년 이후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BC 263년에는 로마의 판도에 들어갔다. 세제스타 원형극장은 그리스 지배 시절에 들어섰는데 이로 미뤄 고대 그리스가 얼마나 연극을 장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세제스타 극장은 제천행사가 열렸던 신전이 있는 곳에서 무려 2㎞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에 지어졌다. 수천 명의 관람객들은 산길을 올라 산 정상에 있는 극장에서 연극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을 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대인들의 나들이인가! 이들은 그곳에서 연극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돼서야 산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여름날에는 깜깜한 어둠을 무대로 밤새 연극이 공연되지 않았을까.

 

지금은 바람만 머무는 이 원형극장들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의 중심지이자 삶과 행복의 충전소 역할을 했을 성싶다. 조명도 없던 당시 야외극장에서 동이 틀 무렵부터 몰려든 관객은 하루 일곱 시간 이상 돌계단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며 그들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그려보지 않았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국가적인 행사로 우대받았다. 국가는 연극을 보는 관객들에게 지원금도 줬다. 연극 경연제 운영도 국가가 맡았다.

 

아테네는 기원전 535년 참주정을 실시한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추방에서 돌아와 다시 집권한 무렵부터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연극 경연제도가 제정됐고 국가적인 행사로 발전했다. 독재자에 의해 연극이 인간의 축제로 발전했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아테네가 연극 경연을 주최하고 지원한 것은 연극이 국가와 사회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 우리나라도 독재를 경험했듯, 독재자일수록 사회통합이 더 절실한 법이다.

 

야외극장이 대부분 신전이 있는 곳에 세워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통합이 문화적인 통합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크로폴리스 신전 밑에 그 유명한 디오니소스 원형극장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최대 1만7000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던 이 극장은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극 경연 대회였던 ‘디오니소스 축연’을 개최하기에 이상적이었다.

 

디오니소스 축연은 3~4월에 걸쳐 5~6일 동안 계속됐는데 마지막 날에 연극 경연이 벌어졌다. 이 연극 경연을 통해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가 탄생됐다.

 

이디스 해밀턴은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이라는 책에서 “길고 긴 연극사에서 참다운 비극의 시대는 두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스 비극 시대와 셰익스피어 비극 시대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역사상 위대한 비극 작가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그리스 3대 작가와 셰익스피어 네 명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 유독 위대한 비극 작가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로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를 꼽을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세기의 시대 산물이다. 아테네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융성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전해서 싸운 용사였다. 소포클레스는 소년합창단의 선창자로 활약하면서 마라톤 전투의 승리에 감사하는 찬미가를 주도했다. 에우리피데스는 전투가 있던 바로 그날 세상에 태어났다. 셰익스피어 시대도 엘리자베스 왕조가 영국 역사상 가장 융성하던 시절이었다.

 

비극은 바로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의해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은 민족의 청년기, 민족의 젊은 시절에 유행했다”고 했다. 젊은 날에는 자신감이 강하지만 또한 실패나 격정으로 인해 그만큼 상처도 많기에 위안도 더 필요한 법이다. 젊은 날에는 오히려 비극이 필요하고 장년 이후에는 희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편으로는 절정에 오르기까지의 노고를 치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희생당한 이들을 위로하는 진혼가가 필요한 것도 융성한 시대에 도리어 비극이 각광을 받은 배경이다. 비극은 페르시아 전쟁으로 찢긴 마음과 사회를 통합하는 묘약이었다.

 

해밀턴은 “비극은 우리에게 고통을 보여주고 그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며 이를 ‘비극적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괴로움이 더 심하게 묘사될수록, 사건이 더 끔찍할수록 우리의 즐거움은 더욱 강렬하다. 작가가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공연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은 강렬한 기쁨을 느낀다.” 인간은 행운의 절정에서 벅찬 기쁨을 느끼지만 또한 비통함도 느낀다. 이게 바로 ‘비극적 기쁨’이다.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던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비극적 기쁨’을 노래한 최초의 비극 작가다. 그는 페르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그리스인의 용기와 융성함을 작품에 반영하면서 운명 앞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영웅적인 행동을 노래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는 체념이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들을 도와줌으로써 나는 고난을 자초했던 것”이라면서 “후회 없이 나는 현재의 이 불행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실 것이오”라고 말한다.

 

아이스킬로스는 영웅적인 용기를 그리는 한편으로 재앙으로 인한 고통을 담아낸다. 마라톤 전투의 용사였던 아이스킬로스는 전쟁의 영광을 벗겨버리고 전쟁이 얼마나 죄악과 비참함을 가져오는지 들려준다.

 

“참아낼 만한 힘을 넘어선 그런 슬픔이 모든 병사들의…. 집집마다 돌아오는 것은 다 타버린 갑옷과 유해뿐이다.” (‘아가멤논’에서)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트로이 전쟁을 무대로 한 아가멤논 일가의 처참한 배신과 보복, 저주, 살육에 이어 종국에 ‘화해’로 귀결된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남편이나 자식을 잃고 가정이 파괴된 그리스 여인들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공연을 보면서 전쟁으로 덧난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고 또 화해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리스 비극은 당시 페르시아 전쟁으로 찢긴 마음들과 사회를 통합하는 묘약으로 작용했다.

 

아이스킬로스의 성공에 힘입어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가 가세하면서 그리스는 비극의 전성시대를 열 수 있었다.

  


 

그리스 비극 ➋모든 비극은 ‘하마르티(판단착오)아’에서 비롯된다

 

 

오이디푸스를 테베 밖으로 이끄는 안티고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런 명제를 던졌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부연한다. 비극에서 인물의 행동을 통해 전달되는 연민과 두려움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어떤 정신세계로 고양시켜 준다는 것이다.

즉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주인공의 운명을 통해 그 비극이 들려주고자 하는 보편성을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주인공의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는 한 인간이 겪는 ‘중대한 과실’이 반드시 포함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의 운명과 관련해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非行)이 아니라 하마르티아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혹은 판단 착오 때문에 행복한 삶이 불행을 당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하마르티아다.

이 단어는 궁술에서 나온 것으로 ‘과녁에서 빗나간 것’ ‘표적을 빗맞춘 것’을 뜻한다. 하마르티아를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흠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비극의 주인공이요, 주인공이 겪는 하마르티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이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왕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눈마저 찌르는 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오이디푸스 왕을 가장 완벽한 비극 작품으로 보고 대표적인 하마르티아의 예로 오이디푸스 왕을 든다.

 

이 비극은 테베에 신의 노여움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재앙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싸운다. 델포이의 신탁은 페스트라는 재앙이 테베에 내린 것은 이 도시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보임으로써 신들의 분노를 산 사나이(오이디푸스)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오이디푸스에게 말한다.

 

“이 땅에서 생기고 키워진 더러운 일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씻어 없애라.”

 

더러운 일은 바로 오이디푸스의 친부 살해와 친모와의 결혼이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재앙을 유발한 이 사나이를 찾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그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이 바로 중대한 과실, 즉 하마르티아에 해당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범인임을 알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스스로 눈을 찌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때까지 눈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이었을 때 눈이 멀었었지만 정작 지금 눈먼 자가 되고서야 제대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마지막 코러스(노래)는 이렇게 울려 퍼진다.

 

“테베 사람들이여, 명심하고 보라. 이이가 오이디푸스이시다.

그야말로 저 이름 높은,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마셨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운명으로 정해진 마지막 날을 볼 수 있도록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 하지 마라.”

 

소포클레스는 이어 ‘오이디푸스 왕’의 속편 격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도 썼다. 오이디푸스가 떠나고 난 뒤 테베 왕국의 권력을 놓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쌍둥이 아들과 새로운 권력자 크레온이 벌이는 반목과 질시를 다룬 이야기다.

오이디푸스가의 저주는 오이디푸스 자신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 어머니이자 아내, 그의 두 아들, 나아가 딸 안티고네까지 이어지는데 결국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다.

 

누구든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를 할 수 있고 뜻하지 않게 거대한 운명의 바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소포클레스는 조화와 규범, 억제 등 아폴론적인 질서를 중시한 보수적인 작가였다. 그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내면의 성채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내면의 성채는 권력자에 대항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목을 매 자살을 택한 ‘안티고네’와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 대한 남매의 보복살해가 내용인 ‘엘렉트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하녀처럼 살며 분노를 태우지만 정작 ‘그 여자(어머니)’에게 모욕당하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그러다 엘렉트라는 남동생인 오레스테스를 만나면서 억눌려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고 어머니를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한다.

 

“세게 내려쳐. 한 번 더 그럴 수 있다면! 죄를 진 자가 이제 죽었다.”

 

어머니에 대한 엘렉트라의 복수심에 찬 대사가 가슴을 전율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다.

 

엘렉트라는 3대 비극 작가 모두 약간씩 다른 플롯으로 썼는데 비교하며 읽을 만하다. 비극은 가장 잔인한 이야기들의 원형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까지 들춘다.

추악을 통해 선한 인간, 광기를 통해 합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마치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해준다는 것이다. 이게 비극이 지닌 ‘예방적 치료력’이며 비극이 지닌 최고의 가치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스의 마지막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디오니소스의 로마식 표기)의 여신도들’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엿볼 수 있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새롭게 등장한 디오니소스 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오만한 행동으로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어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자식을 짐승으로 착각하고 갈기갈기 찢어 죽인 어머니를 보고 관객들은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전율하며 그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삶의 광기를 경계했을 것이다.

 

니체는 비극은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빌려 현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보라! 잘 보라! 이것이 그대들의 삶이다. 이것이 그대들 생활의 시곗바늘이다.”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신화에 예술적 상상력을 가미해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고 인간 존재의 밑바닥까지 꿰뚫고 들어가 우리들 실재의 세계, 본질의 세계를 찾으려고 했다. 비극 작가들은 공포와 허무, 무서움에 직면하면서도 이를 아폴론적인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바코스의 여신도들’에서 여성들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일상적인 규범과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억제된 충동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다 플라톤 시대에 이르러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모방으로 저급한 것이라며 ‘시인 추방론’을 제기한다. 당시 젊은 비극 작가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그의 비극 작품을 불살라 버렸다. 소크라테스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리스 비극은 몰락하고 이와 함께 신화 시대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고전에서 배우는 경영전략 -

‘하마르티아’라는 함정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이른바 ‘하마르티아(Hamartia)’로 인해 비극적인 사건이 야기된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그리스 비극에서는 훌륭한 덕목을 갖춘 행운의 주인공이 돌연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 원인을 바로 주인공의 하마르티아로 설명한다.

하마르티아는 도덕적 및 성격적 결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와 달리 도덕적인 의미없이 단순히 주인공의 판단 착오나 실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마르티아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나온 말일 것이다. 행운의 주인공이 하마르티아에 빠지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석유왕’으로 불린 존 D. 록펠러는 어쩌면 히브리스로 인한 파멸 직전에 극적으로 구원받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록펠러는 30세에 이미 100만 달러를 가진 부자였고 40세에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립해 50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 빌 게이츠보다 무려 3배나 많은 재력을 보유할 정도였다.

 

돈에 배고픈 록펠러

 

록펠러는 늘 돈에 배고픈 부자였다. 어떤 돈벌이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빼고는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돈을 벌었을 때는 모자를 바닥에 내던지며 의기양양 좋아했지만, 손해를 보았을 때는 금방 병이 나곤 했다. 한번은 가격이 4만 달러나 되는 곡물을 5대호를 경유해 실어 나르게 되었는데, 보험료 150달러가 아까워 보험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폭풍이 엄습했다. 그는 짐을 잃어버리지나 않았을까 몹시 번민했다. 다음날 아침에 급히 보험을 들었다. 그런데 아무런 피해 없이 짐이 무사히 목적지에 닿았다는 전보가 왔다. 그는 150달러가 낭비된 것이 아까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몸져누웠다고 한다.

황금이 축적될수록 록펠러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또한 그의 왕국은 하루아침에 붕괴 직전에 놓였다. 언론이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번민이 극도에 달해 죽어가고 있었다.

53세에 번민, 탐욕, 공포가 그의 건강을 좀먹고 있었다. 마침내 의사는 “돈이든 번민이든 생명이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은퇴하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은퇴를 택했다.

 

돈이 행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걱정은 빨리 늙게 만들고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심장병은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미국의 2차 대전 전사자 수는 30만명가량이지만 같은 시기에 심장병 사망자는 2백만명에 달했다. 그 중 절반은 고민과 극도의 긴장이 그 병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의사는 록펠러에게 번민을 피할 것, 편안히 쉴 것,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둘 것 등 세 가지 규칙을 내렸다. 그는 이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반성도 하면서 남의 일도 생각했다. 골프도 배우고 이웃과 잡담도 하고 노름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마쯤 돈을 벌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돈이 사람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막대한 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시카고대학이 빚으로 차압당하자 이를 갚아주었다. 다시 태어난 그는 행복했다. 번민하지 않았고 잠도 잘 잤다. 록펠러재단은 5000개 교회에 기부를 했다. 50대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석유왕’ 록펠러는 98세까지 살았다. 한편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역시 85세까지 장수했는데, 록펠러와 카네기의 공통점이라면 미국에 기부문화를 만든 원조들이라는 것이다.

 

존 듀이는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가장 깊은 충동은 ‘인정받는 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The desire to be impor-tant)’이라고 했다. 록펠러는 ‘돈의 축적’이 아니라 ‘돈의 나눔’으로 사람들에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이게 장수의 요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게 자신도 살고 사회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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