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 사이, 그 속에서의 禮의 의미
- 藏書閣 所藏 小學諸家集注를 中心으로 - 房 世 英*1
목 차
1. ‘순임금의 성인됨’ 엿보기
2. 자연에서 와서 인간으로 살기 : 日常의 이중성
3. 禮를 습득하여 天理와 하나 되기 : 日益工夫
4. 禮를 통해 사사로운 마음을 덜어내기 : 日損工夫
5.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균형 잡기 : 中道
6. 효자로 살아가기
1. ‘순임금의 성인됨’ 엿보기
유학에서는 순임금을 성인이라 칭한다. 유학이 치밀한 논증을 통해 순임금의 성인됨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유자들에게 ‘순임금=성인’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어느 누군가가 이 사실을 의심한다면 그는 斯文亂賊이거나 순임금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순임금은 어떤 인물이었나?
상고시대의 ‘순임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려지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아마도 요임금에게 선양을 받은 임금으로서의 순의 모습 보다는 인간의 평범한 일상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묵묵히 섬긴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순의 아비 고수는 무도했고 어미는 험담을 잘했고 동생 상은 교만방자했다. 이들은 모두 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순은 언제나 아우에게는 형의 도리를, 부모에게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그리하여 순은 나이 스물에 향당에서 지극한 효자라고 소문이 났었다.
요 임금이 만년에 이르러 “누가 내 政事를 계승할 수 있을꼬?”라고 묻자, 모두 입을 모아서 순을 추천하였는데 그 이유가 한결 같이 그가 지극한 효자라는 것이었다.1)
맹자도 순임금만이, “천하 사람들이 크게 좋아하면서 장차 자신에게 돌아오려 하였는데, 천하 사람들이 자신에게 귀의함을 草芥를 보는 듯이 여기셨다. 또 어버이에게 기쁨을 얻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고,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면 자식이 될 수 없다고 여기셨다”2)고 말한다.
여기서 맹자는 순임금이 천하가 자신에게 귀의함을 보기를 草芥처럼 하찮게 여기고 오직 그 어버이를 곡진히 받들어서 그 마음의 기쁨을 얻고 어버이의 말씀에 따르게 하려고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자식의 사람됨됨이(爲人)와 자식됨됨이(爲子)가 결정되는 것이다.
순을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심 때문에 성인이라 칭한다. 사실 필자는 효자라는 이유만으로 순을 임금의 자리에 천거하고, 게다가 그를 성인이라고 칭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도대체 儒者들은 어떤 이유로 지극한 효심이 성인됨의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래에서 본 논문은 순의 논의를 시론으로 自然과 人間의 사이에 거주하는 인간 일상의 이중성3)을 초점으로 하여 유학에서의 禮 공부의 이중적 의미, 孝의 이중적 의미, 中道의 의미를 밝힐 것이다.
유학은 일상과 초월, 자연과 인간, 집 안과 집 밖, 日益 공부와 日損 공부의 두 축을 인간의 현실적 운명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孝를 중심에 놓고 ‘자연으로의 회귀’와 ‘사회로의 진출’ 사이에서 中道의 윤리학을 지향하고 있다.
1) 司馬遷 著, 정범진 외 다수 譯, 「五帝本紀」史記本紀(까치, 1994), pp. 14~15.
2) “孟子曰 天下大悅而將歸己 視天下悅而歸己 猶草芥也 惟舜爲然 不得乎親 不可以爲人不順乎親 不可以爲子” 孟子「離婁 上」28장.
3) 이중성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동전의 앞 뒷면처럼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나타내는 의미이다. ‘不一而不二’는 이중성을 표현한 말이다.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윤리학전공 통합과정 수료.
2. 자연에서 와서 인간으로 살기 : 인간존재의 이중성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유학에서 성인이라 불리는 舜은 일상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舜은 일상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에서 與民同樂한 인물이었다.
가족 안에서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가족 밖에서 타인과 교제하고 일하는 인간의 현실적 삶은 아주 평범하다. 이러한 평범한 삶이 바로 우리들의 日常이다. 주희는 내 몸이 항상 쓰고 행하는 日常에서 聖賢이 말한 신실한 이치를 다 볼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4).
道는 나의 몸이 움직이는 日用間에서 끊임없이 流行하고 있다.5) 그리하여 그는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구하고, 아래에 거처하면서 높은 것을 엿보며, 한결같이 허공에 떠 있는 말을 하는 무리들을 모두 양다리를 들어 올려서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다.6)
다시말해 그 무리들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고, 그래서 진실적이지 않은 공중에 붕 뜬 담론들을 즐겨한다는 것이다. 明道 역시 세상의 배우는 자들이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에 나아가며, 아래에 있으면서 높음을 엿보아 이 때문에 가벼이 스스로 대단한 듯 여겨 끝내 얻음이 없음을 걱정하였다.7)
진리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다(身近). 灑掃應對하는 곳이 바로 上達處 8)이며, 먹고 자고 일하는 바로 그 일상의 행위 속에 道가 깃들어 있다.
4) “聖人語言甚實, 且卽吾身日用常行之間可見” 『朱子語類』권7, (中華書局, 1981), p.2748.
5)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중용』 1장.
6) “不期今日學者乃捨近求遠, 處下窺高, 一向懸空說了, 扛得兩脚都不著地?” 『朱子語類』권 7, (中華書局, 1981), p. 2748.
7) “病世之學者, 捨近而趨遠, 處不而闚高. 所以輕自大而卒無得也.” 『小學諸家集注』「嘉言」 8장. 이하에서 『小學諸家集注』는『小學』으로 간략히 표기하며, 번역과 章句는 성백효 선생의 『小學集注』(전통문화연구회, 1996)를 참고로 한다. 장서각에 소장중인 『小學諸家集注』는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明대 何士信이 篇한 책으로 朱子의 註, 자신의 集成, 程愈(明)의 集說을 모아 놓은 판본이다.
② 朱子가 지은 小學에 李珥가 諸說을 인용하여 주석한 책이다. 訓練都監 字版刊, 광해군 4(1612). 주자 이
후에 이에 대한 주석이 구구하여 배우는 자들에게 많은 혼란이 따르자 李珥가 이것을 내용에 따라 諸家의 說을 간략하게 혹은 상세하게 註說을 달아 편찬한 것이다. 栗谷 편찬의 이 책이 조선초학자에게 널리 讀誦되었다.
③ 조선 宣政殿에서 訓義한 것으로, 英祖朝에 宣政殿訓義가 만들어져 集注에 대한 간략한 주해가 이루어진 판본이다. 본 논문에서는 小學諸家들의 注를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율곡의 자료를 중점적으로 활용하고 나머지 두 판본은 보조 자료로 이용할 것이다.
8) “程子曰 君子敎人有序 先傳以小者近者而後 敎以大者遠者 非先傳以近小而後不敎以遠大也
又曰 灑掃應對 便是形而上者 理無大小故也 故 君子只在謹獨
又曰 聖人之道 更無精粗 從灑掃應對與精義入神 貫通只一理 雖灑掃應對 只看所以然如何
又曰 凡物有本末不可分本末爲兩段事 灑掃應對是其然 必有所以然
又曰 自灑掃應對上 便可到聖人事
愚按 程子第一條 說此章文意 最爲詳盡 其後四條
皆以明精粗本末 其分雖殊 而理則一 學者當循序而漸進 不可厭末而求本
蓋與第一條之意 實相表裏 非謂末卽是本 但學其末而本便在此也.”
한역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자가 말하길, ①군자를 가르침에는순서가 있다. 먼저 작은 것과 비근한 것을 가르친 뒤에 큰 것과 먼 것을 가르친다.
②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은 곧 형이상의 일인데, 이는 이치에 大小가 없기 때문이다.
③성인의 도는 精과 粗가 없으니 쇄소응대로부터 入神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다한 가지 이치이다.
④모든 사물에는 本末이 있으니, 本과 末을 나누어 두 가지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쇄소응대에도 반드시 所以然이 있다. 쇄소응대의 하학처가 곧 상달처이지만, 반드시 공부 순서는 쇄소응대부터 시작해야 된다.” 즉, 차서가 있다.
『論語』,「子張」12장. “明道先生敎人. 自致知至於知止, 誠意至於平天下, 灑掃應對至於窮理盡性, 循循有序. 病世之學者, 捨近而趨遠, 處下而闚高. 所以輕自大而卒無得也.”
“명도선생은 사람을 가르치시되, 앎을 극진히 함으로부터 머물 곳을 앎에 이르게 하며, 뜻을 성실하게 함으로부터 천하를 평균히 함에 이르게 하며, 쇄소응대로부터 이치를 궁구하고 性을 다함에 이르게 하여, 차례차례 순서가 있었다.” 『小學』「善行」8장.
그렇다면 유학에서의 성인이나 현자는 일용사물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隱微한 道를 잘 살펴 행함으로써 도를 밝히는 자9)들이다. 유학의 聖人은 보통사람과 다른 별개의 인간이 아니다. 성인은 평범한 일상적 세계 안에 사는 보통사람으로 일상적 세계의 질서에 충실한 사람이다. 詩經에서 이르는 것처럼, 성인은 “妻子間에 정이 좋고 뜻이 합함이 금슬을 타는 듯하며, 형제간이 화합하여 화락하며, 자신의 室家를 마땅하게 하여 너의 처자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부모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10)이다. 결국 성인이란 자기 부모의 자식으로서, 자기 군주의 신하로서, 자기 아내의 남편으로서, 자기 자식의 아버지로서, 늘 자신의 다양한 의무들을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수행하는 보통사람이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어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뛰어날 수 있었던 사람일 뿐이다. 성인에겐 평범함과 그로 인한 비범함이 늘 함께 있다. 그리하여 유학에서의 평범한 일상은 비범함과 관계 맺음으로써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비범함은 일상과 관계 맺음으로써 평범한 의미를 지닌다.
유학은 이러한 인간의 일상적 삶을 유학의 가치관에 따라 위계적으로 규율하려고 한다. 그 질서가 바로 禮이다. 따라서 유학의 禮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일상적 삶을 떠날 수 없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통찰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상의 구체적 일들을 익히고 습득하는 일차적 장소가 바로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는 ‘가족’이고, 일상의 구체적 일들을 질서지운 것이 禮이며, 이 禮를 배우는 것이 小學이라는 下學 공부이다. 小學은 禮書인 것이다.11)
9)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注 : 道者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 是以君子之心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중용』 1장.
10) “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耽 宜爾室家 樂爾妻帑. 子曰 父母 其順矣乎.”『중용』 15장.
11) 小學이 禮書임을 밝히고 있는 논문은 최진덕과 정순우의 논문이다.
“소학은 철학서가 아니라 禮書이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도덕적 반성에 의거해서 행위의 규범(norm)을 세우려 하지 않고, 오직 몸으로 따라야 할 행위의 방법(manner)만 가르친다.”
최진덕,「욕망과 예, 그리고 몸의 훈련」유교의 예와 현대적 해석 (청계, 2004), p. 208.
“순암의 경우에는 일상 속에 내재한 궁극적 실체나 본질을 찾고자 하기보다는, 일상을 규정짓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 혹은 그 관계에 최선의 질서를 부여하는 문제 등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그는 하학의 중심으로서 예를 강조한다. 그는 ‘횡거가 남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먼저 예로써 하였다. 예는 근거할 바가 있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의 절실함이 이보다 더 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가 立於禮라고 말한 것이다. 주자의 소학은 곧 횡거의 뜻이다’라고 하여 소학도 禮書의 일부로 간주한다.”
정순우,「실학의 공부론에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이해」유교의 공부론과 덕의 요청 (청계, 2004), p. 132.
그렇다면 禮가 실현되는 바탕인 일상의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사실상 일상의 범위를 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인간의 ‘일상’ 자체가 무위적인 자연환경과 유위적인 인간사회의 交織을 기반으로 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경계를 나누기가 애매하다. 인간의 모든 삶은 탄생 이전에 이미 수동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연과 탄생 이후에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인간의 문화사이에 있다. 자연과 인간을 떠나 존재하는 ‘일상’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일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남녀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결합, 자녀의 탄생과 그들의 성장, 부모의 교육과 양육을 기반으로 한 사회로의 진출이 모두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가족은 집 밖의 사회로 나가기 위한 원심점의 역할을 하며, 동시에 다시 사회에서 집 안으로 복귀하게 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 가족은 원심점의 역할과 구심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유학에서의 일상의 터전, 즉 삶의 터전은 바로 이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하기에 가족을 기반으로 한 유학의 핵심 원리인 ‘孝悌’ 역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孝悌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가족 안에서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 행해져야 하는 원리이며, 그 적용 범위를 조금 넓힌다 해도 향촌을 벗어나서 적용되는 원리는 아니다. 일상의 중심은 가족이며, 가족 안에서의 孝悌는 나라에서의 忠으로 확장되는 원리가 아니라 가족 안으로 수렴되는 원리이다.
따라서 孝悌와 忠 사이에는 긴밀한 연속성 보다는 불연속성이 존재한다.12) 그러나 동시에 孝悌의 원리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또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바탕이 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향촌에서의 어른은 아버지 모시듯 대해야 하고, 국가의 임금 역시 아버지 모시듯 대해야 하는 것이다.13) 이 경우 孝悌의 원리는 사회와 국가로 유비되어 확장 적용될 수 있는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14)
12) “微子曰, 父子有骨肉, 而臣主以義屬, 故父有過, 子三諫而不聽則隨而號之. 人臣三諫而不聽, 則其義可以去矣. 於是遂行.” 『小學』,「稽古」22장.
父子 사이에는 骨肉의 친함이 있고, 君臣 사이는 義理로써 연결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과실이 있을 때 자식이 세 번 간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울부짖으며 따르지만,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 때 신하가 세 번 간언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임금을 떠나갈 수 있다. 부자의 관계는 혈연적이고, 군신의 관계는 계약적이다. 따라서 군신 사이의 의무보다 부자 사이의 명령이 더 절대적이다.
13) “禮記曰, 君賜車馬, 乘以拜賜. 衣服, 服以拜賜. 君未有命, 弗敢卽乘服也.” 『小學』「明倫」44장.
이 구절은 ‘나아가라 하면 나아가지 않고, 묻지 않거든 감히 대답하지 않는’ 事親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구절은 다음과 같다.
“呂氏童蒙訓曰, 事君如事親, 事官長如事兄, 與同僚如家人, 待群吏如奴僕, 愛百姓如妻子, 處官事如家事, 然後能盡吾之心. 如有毫末不至, 皆吾心有所未盡也.” 『小學』「嘉言」 29장.
14) 김형효는 孝와 忠의 연속성을 ‘중심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설명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남성중심주의와 말중심주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말의 논리는 단일주의의 논리, 하나주의의 사고, 자기중심의 수사학, 자가 애정의 감정학과 다르지 않다. 하나의 말이 다른 말과 동시에 중복되면 인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자학은 말씀학과 달라서 一義 중심이 아니고 음양처럼 서로 상반된 것을 동시에 표시한다. 그런 점에서 말중심주의는 오로지 자기 종자의 승계만을 중시하고 아버지의 권위 아래 말을 잘 듣는 아들이 자기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중심주의나 남성중심주의와 닮았다. 아버지중심주의는 스승중심주의이고 동시에 임금중심주의이다. 군사부일체라는 격언은 유교 문화가 우연히 흘린 하찮은 군더더기 말이 아니다. 군사부일체는 빛나면서 드높은 태양중심주의의 사상과 깊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아버지의 문화, 남성의 문화는 자기 자식만을 잉태하고 자기 것만을 보호하려는 울타리의 논리를 갖고 있는 한에서 자가 애정의 윤리, 자가성의 논리를 벗어 날 수 없다. 아버지와 남자는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김형효,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청계, 1999), pp. 109~110.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에게 효도를 잘하면 잘할수록 집 안으로 향함으로써 사회․국가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아버지의 모습이 집 밖의 비혈연적인 연장자와 임금에게 유비됨으로써 사회․국가의 세계로 진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孝悌의 원리는 ‘자연으로의 회귀’와 ‘사회로의 진출’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日常의 이중성과 家族의 이중성, 그리고 孝悌의 이중성 속에서 과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유학자들의 실천적인 탐구가 다음에서 다루어질 日益 공부와 日損 공부,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中道라 할 수 있다.
3. 禮를 습득하여 天理와 하나 되기 : 日益工夫
그렇다면 孝悌를 기반으로 한 질서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자연에서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이 물음은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일상을 규율하는 질서의 所從來를, 맹자는 자연이라고 하고 순자는 인간(성인)이라고 한다.15)
이와 관련된 복잡한 논의는 이 논문에서 생략하기로 한다.16) 다만 맹자류의 유학을 신봉하는 주자는 일상의 질서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라 믿는다(天理之節文).
일상의 질서들이 자연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보던지 아니면 인간들이 만든 것이라고 보던지 간에, 인간의 탄생과 생존을 생각해 볼 때 수동적인 ‘받아들임(受容)’이 우선되어야 한다.
學이 선행되어야 習할 수 있다(學而時習). 이것은 유학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날 수밖에 없고, 나의 탄생 이전에 이미 모종의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초학자는 소학 공부을 통해 몸과 관련된 질서를 습득한다. ‘수용’은 내 몸에 기존의 질서를 쌓는 것(日益)이다. 이것은 사람의 인격과 삶에 반드시 구체화되기 마련이다. 바로 體化이다. 體化는 천리가 내 몸 뼈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듦을 의미하며, 동시에 공허한 앎이 아닌 변화를 동반한 깨달음이다.
내 몸을 天理化 하는 것, 그게 바로 소학공부이다. 그러므로 “天理가 나와 더불어 두눈이니 조금이라도 禮가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하고, 天理가 나와 더불어 두 귀이니 조금이라도 禮가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하고, 天理가 나와 더불어 한 개의 입이니 조금이라도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고, 天理가 나와 더불어 한몸이니 조금이라도 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아야 한다.”17)
15) 최진덕은 전자를 ‘자연주의적 유학’, 후자를 ‘인간주의적 유학’이라 불렀다. “주자학에서 仁은 천지인물을 관통하는 自然之理 혹은 天理로서 인간의 행위에 앞서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善의 원천이다. 반면 다산학에서 仁은 오직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윤리적 행위를 축적함으로써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다. 다산학에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善의 원천이다. 주자학에서 孝悌의 실천은 天理를 체득하여 천지만물과 일체화됨을 목표로 삼지만, 다산학에서 孝悌의 실천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엮어지는 인간세계의 治理를 목표로 삼는다. 양자의 예학에도 마찬가지의 해석학적인 차이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주자예학이 자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다산예학은 인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최진덕, 「주자예학과 다산예학」다산학의 국제적 지평 (다산학술문화재단, 2000), pp. 268~269.
16) 이에 대한 논의는, 김형효, 물학, 심학, 실학 (청계, 2003)을 참조하라.
17) “又如說‘非禮勿視’, 自是天理付與自家雙眼, 不曾敎自家視非禮; 纔視非禮, 便不是天理. ‘非禮勿聽’, 自是天理付與自家雙耳, 不曾敎自家聽非禮; 纔聽非禮, 便不是天理. ‘非禮勿言’, 自是天理付與自家一箇口, 不曾敎自家言非禮; 纔言非禮, 便不是天理. ‘非禮勿動’, 自是天理付與自家一箇身心, 不曾敎自家動非禮; 纔動非禮, 便不是天理.” 朱子語類권7, (中華書局, 1981), p. 2759.
그러나 논자는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주자는 맹자류의 유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맹자의 牛山之木18)에 따르면 아이들은 이미 완성된 본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性을 방해하는 요소만 제거해주면 저절로 알아서 잘 자란다. 능동적이고 인위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소극적이기 때문에 교재를 만들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가르칠 충분한 이유를 말하기 곤란하다.
자연주의적 유학 가운데에서도 理의 직접적인 체득을 강조하는 유학일수록 내면적 心學을 더 강조하고 외면적 禮學을 덜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性善을 믿는 맹자는 禮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았고, 無爲한 自然으로의 退行을 강조했던 퇴계 역시 禮에 대한 언급이 율곡에 비해 훨씬 적다.
최진덕은 이에 대해 도가처럼 인간세계에의 참여보다는 자연세계로의 퇴행을 더 근본적인 인간의 자세로 여기는 자연주의적 유학의 필연적 귀결일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계열에 서 있는 주자가 禮書인 小學이라는 교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주자는「小學題辭」에서 학문의 근원으로서 天道․人性․人倫을 제시하고, 敎學의 체계와 방법을 제시하며, 敎學의 쇠퇴한 현실 상황과 그 대응책으로 小學을 편찬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元亨利貞의 天道는 인간에게 仁義禮智의 性으로 내림한다. 그리고 그 性이 외물에 감하면 愛親敬兄 忠君悌長으로 나타나고, 이 본성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발현된다20). 하지만 이 본성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은 그러하지만 衆人은 그러하지 않다. 그래서 성인은 소학과 대학을 세우고 스승을 모시는 것이다. 바로 스승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차차 학문을 닦으면 처음의 인간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순선한 인간 본성의 회복은 하루아침에 완성되고 또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순선한 인간본성은 개인적 욕망을 자제하는 훈련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주자는 理를 체득한 성인이 되기를 희망하면서도 초학자가 理에로 一超直入하려는 것을 몹시 경계한다.
주자는 늘 단계를 뛰어넘는 獵等을 금지한다. 그래서 주자의 예학은 성인이 되기 위해 지리할 정도로 세세한 단계를 밟아야 하는 점수적 공부론이다. 주자는 공부론의 기초로서, 집 안팎 일상적 공간 속에서의 예의 실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수렴하는 소학의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학은 초학자가 제일 먼저 익혀야 할 아동용 초급교과 즉 ‘어린이의 배움(小人之學)’에 그치지 않는다. 소학은 주자의 공부론에 있어서 모든 공부의 기초에 해당한다.21) 바로 이 소학에 대한 관심이 주자 예학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18) 孟子「告子 上」8장.
19) 최진덕, 「주자예학과 다산예학」다산학의 국제적 지평 (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p. 274.
20) 화담 서경덕은 인간의 도덕윤리라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몸이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만나면 효도하게 되고 어른을 만나면 공경하게 된다. 이른바 자연성과 도덕성을 연속적으로 보았다. 人間事에서 ‘이루어져야할 어떤 일’과 人間事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일’ 사이에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흐름에선 사실과 당위가 일치한다. 이러한 본인의 의견은, 한형조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세계사, 1996년)에 힘입었음을 밝힌다.
21) 최진덕, 위의 논문, p. 274.
그렇다고 해서 주자가 돈수적 공부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배우는 것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가는 것이고, 하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것은, 일에 나아가 그 도리를 찾아 모으고 합하여 가는 것으로 위의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역시 一理일뿐이다.
위로부터 아래로 가는 것은 먼저 하나의 大體를 얻어서 오히려 이것으로부터 사물을 보니 그 하나의 마땅한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음을 보게 된다. 이것을 소위 큰 근본으로부터 미루어 도에 통달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공부하는 것을 안다면, 반드시 큰 근본을 따라서 이해하여 가는 것이 좋다.”22)
22) “曰:大凡爲學有兩樣:一者是自下面做上去, 一者是自上面做下來. 自下面做上者, 便是就事上旋尋箇道理湊合將去, 得到上面極處, 亦只一理.
自上面做下者, 先見得箇大體, 卻自此而觀事物, 見其莫不有箇當然之理, 此所謂自大本而推之達道也.
若會做工夫者, 須從大本上理會將去, 便好.” 朱子語類권7, (中華書局, 1981), p. 2762.
주자 역시 돈수적 공부론을 긍정하고, 이를 점수적 공부론 보다 좋은 것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돈수적 공부론은 타고난 기질이 아주 맑은 성인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는 자들은 사욕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막히고, 말이 꼬이고, 움직임이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사욕을 제거하는 점수적 공부를 거쳐야 한다. 학자와 성인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양자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인은 本末의 구분이 없는 사람으로 그에겐 ‘下學이 곧 上達’이다. 성인에겐 시작과 끝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학자의 경우엔 반드시 시작에서부터 차곡 차곡 해나가야 비로소 얻는 바가 있다. 이것은 곧 시작과 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희가 獵等을 가장 경계23)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3) 그러나 理에 大小가 없다면 가르치는데 순서가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공부의 목표가 어디까지나 本(理一)에 있지만 공부의 과정은 반드시 末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몸’이 하학 공부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일단 인간의 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의 몸은 公的 자리를 차지한다. 주역 序卦에 이르기를, “천지가 있고 나서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고 나서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고 나서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고 나서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고 나서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고 나서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고 나서 예의를 둘 곳이 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수직적 계보를 갖는 몸 발생 순서로 인해 몸은 公的 자리를 차지한다. 예컨대 우리의 몸은 아버지로서의 자리, 신하로서의 자리, 남편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개인이 인간 사회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몸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주어져 있는 공적 자리에 몸담을 수밖에 없다.
둘째, 몸은 언어적이다. 인간의 몸은 인간 사회에서 상징체계의 부분을 이룬다. 예를 들어 머리를 숙이는 행위는 인사, 수긍, 양보, 겸손 등의 내용을 나타내는 신체적 상징이다. 城에 올라가서 손가락질 하지 않으며 城 위에서 고함치지 않는 이유는, 손짓하는 바가 있으면 보는 사람을 의혹하게 하고, 고함치는 바가 있으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24) 몸가짐은 모두 언어적이다. 그래서 소학에서는 손짓, 눈짓, 걸음걸이 등의 몸짓과 옷차림, 어조, 발 모양, 손 모양, 눈 모양 등의 몸가짐을 단속한다.
셋째, 몸은 윤리적이다. 몸은 윤리적 질서의 단위이다. 인간이 위치하고 있는 공적 자리와 몸짓의 언어성으로 짜여진 인간사회의 그물망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역할을 제시한다. 임금은 임금의 자리에서 임금의 역할을 해야 하고, 부모는 부모의 자리에서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하고, 자식은 자식의 자리에서 자식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리에 합당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함축한다.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에 몸은 윤리적일 수 밖에 없다. 몸은 바로 윤리적 질서의 단위이다. 그리하여 군자는 자신의 현재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위치를 넘어서는 것들은 원치 않는다.25) 즉 군자는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바의 위치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그 밖의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자이다. 富貴에 처해서는 富貴대로, 貧賤에 처해서는 貧賤대로,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잡아당기지 않는 것이다.
24) “登城不指, 城上不呼.” 小學「敬身」15장.
25) “君子 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中庸14장.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를 종합하면, 몸은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 자리에서의 움직임이 곧 언어의 역할을 하기에, 각각은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으로 짜여진 전체적 그물망 속에서의 개인의 의무이다. 그래서 ‘몸’ 닦기가 필요하다. 또 나의 몸의 계보학26)을 소급해 올라가보면, 禮義→上下→君臣→父子→夫婦→男女→萬物→天地에 이른다. 결국 나의 생각,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든 천지만물들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산중 골방에 앉아 있어도 자기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으면 그것이 곧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이다. 우주와 내가 한 몸이기 때문이다.
中庸首章에서처럼 “내가 中과 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여기며 만물이 잘 생육된다.” 이러하기에 中庸에 있는 成己成物27)도 ‘자신을 이룩하고 만물을 이룩한다’라는 순차적 의미보다는, ‘자기를 이루는 것과 만물을 이루는 것이 맞물려 있다’라고 관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몸이 사회적 一物로서 존재하고 동시에 자연적 一物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몸을 대상으로 하학공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26) 최진덕,「욕망과 예, 그리고 몸의 훈련」유교의 예와 현대적 해석 (청계, 2004),pp. 195~208. 이 논문에서 최진덕은 몸은 다수성 ․ 상호성 ․ 순환성을 특징으로 하며, 특히 몸의 순환성에 내재해 있는 질서가 곧 몸의 계보학적 질서라고 이야기한다.
27)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中庸25장.
그렇다면 몸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구슬에 끼어있는 때와 먼지를 닦는데에 특별한 방법은 없다. 다만 매일매일 쌓아나가고(日益공부), 날마다 갈고 닦는 공부를 하면 된다.「嘉言」에서는 日益 工夫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呂舍人이 말하였다. 대체로 후생들은 학문을 함에 우선 반드시 학문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를 이해하여, 한번 가고 한번 머물며,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함을 다 道理에 합치되게 하여야 한다. 학업은 곧 課程을 엄격히 세울 것이요, 하루라도 방만해서는 안 된다.
매일 마땅히 한 가지 經書와 한 가지 子書를 읽되, 많이 읽지 말고 다만 정밀하고 익숙하게 하여야 한다. 조용한 방에 꿇어앉아 2~3백 번을 읽어야 하며, 字字句句를 분명히 해야 한다. 또 매일 3일 내지 5일 전에 수업한 내용을 이어서 50~70번을 통독하여 반드시 외워야하고, 한 글자라도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史書는 매일 한 권, 혹은 반 권 이상 읽어야 비로소 공효를 볼 수 있으니, 마땅히 사람을 따라 수업하여 읽되, 의심나고 어려운 곳을 곧 질문하여 옛 성현의 마음 쓰신 것을 찾아 힘을 다해 따라야 한다.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은 스승의 일이요, 행하여도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조용히 바로잡아 경계하는 것은 친구의 임무이니, 뜻을 결정하여 나아감은 반드시 자신의 힘을 쓰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기 어렵다.28)”
28) “呂舍人曰, 大抵, 後生爲學, 先須理會所而爲學者, 何事. 一行一住一語一嘿須要盡合道理. 學業則須是嚴立課程, 不可一日放慢.
每日須讀一般經書一般子書, 不須多. 只要令精熟. 須靜室危坐, 讀取二三百遍, 字字句句須要分明. 又每日須連前三五授, 通讀五七十遍, 須令成誦. 不可一字放過也. 史書每日須讀取一卷或半卷以上. 始見功. 須是從人授讀, 疑難處便質問, 求古聖賢用心, 竭力從之.
夫指引者, 師之功也. 行有不至, 從容規戒者, 朋友之任也. 決意而往, 則須用己力, 難仰他人矣.”
小學「嘉言」86장.
매일매일 조금씩 꾸준히 쌓아나가는 방법으로 공부하면 자연스레 저절로 얻는 것이 있다. 오늘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행하고 내일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행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히 견고해져서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실천하는 공부가 날이 쌓이고 달이 쌓여갈수록 점점 익숙해지고 점점 자연스럽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나의 몸과 이치가 하나가 되고, 인위적 노력과 자연스러운 발현 사이에 틈을 좁히는 것이다.
이렇게 쌓아나가는 공부는 주희에게 곧 자신을 비워내는 공부이다. 다시 말해, 學을 통해 쌓아나가는 공부는 道를 행하여 이르는 비움의 공부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주희는 ‘道에 이르기 위해선 반드시 學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29) 하학을 통해 상달을 꾀하는 주희의 기획이 이미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29) 주희와 달리 老子는 爲學工夫(日益工夫)와 爲道工夫(日損工夫)가 별개의 것이라 이야기한다. 노자는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인 ‘學’을 통해서는 무위의 ‘道’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자는 인간이 기억과 학습으로 쌓은 지식(爲學日益)에 의거하기 때문에 늘 자기 생각에 집착하여 변화에 제대로 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의 의견에 집착하지 않고 늘 마음을 비우는 경지를 실천함으로써 언제나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즉, 마음을 지식으로 채워가는 학문보다 마음의 견문각지를 덜어내는 공부를 빈 마음에 이르는 성인 공부의 본질로 보았다(爲道日損). 노자가 보기에 유가들은 文을 통하여 道를 추구했기 때문에 결국 언어에 매이고 마음의 깨달음에서 멀어졌다고 할 것이다. 그는 마음의 성찰을 통해 마음을 채우고 구속하는 것을 비워나감으로써 만물과 하나가 되는 與物同體를 말하고 있다.
4. 禮를 통해 사사로운 마음을 덜어내기 : 日損工夫
그렇다면 소학에서 제시하는 자신을 비워내는 공부도 예의 실천, 특히 효의 실천과 관계를 맺고 있다. 소학은 전체적으로 ‘자신을 낮춤’에 초점을 두어 기술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 마음을 비워가는 쪽으로 定向되어 있다. ‘비워내는 공부’와 ‘몸을 낮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실 몸의 낮춤이 마음의 낮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주희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을 다스림(治心)과 몸을 닦음(修身)이 모두 음식과 남녀에 대한 욕심을 절제함에 달려있다”30)고 말한 것을 보니, 治心과 修身을 각기 다른 것이라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일상경험을 돌아보더라도, 몸의 어떠한 상태도 특정한 마음의 상태를 필요로 하고, 마음의 어떠한 상태도 몸의 특정한 상태를 필요로 한다. 지루함이나 나른함은 각기 특정한 마음의 상태가 몸의 상태로 나타난 경우이지 않은가.
마음의 상태는 몸의 상태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몸의 상태는 마음의 상태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몸을 낮추지 않고서는 마음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소학에서의 몸의 낮춤은 주로 ‘孝’를 기반으로 한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30) “胡文定公與子書曰, 立志以明道希文, 自期待. 立心以忠信不欺, 爲主本. 行己以端莊淸愼, 見操執. 臨事以明敏果斷, 辨是非. 又謹三尺, 考求立法之意而操縱之, 斯可爲政, 不在人後矣. 汝勉之哉. 治心修身, 以飮食男女, 爲切要. 從古聖賢, 自這裏做工夫. 其可忽乎.” 『小學』「嘉言」13장.
몸이 거주하는 일차적 장소는 집 안이다. 집 안에서 자식이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인 禮는 “겨울에는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밤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리는 것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투지 않는 것”31)이다.
여기에서의 예는 부모의 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밤과 낮의 교대와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부모의 몸을 잘 봉양하는 것을 두고 “사람의 자식된 자의 예(爲人子之禮)”라고 말한다. ‘冬溫夏凊 昏定晨省’에 나타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엄격한 상하관계이다.
유학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신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효자의 효행은 집안에서 부모와 時空을 같이 할 때 뿐만 아니라 집밖에서 부모와 時空을 달리할 때에도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에 대한 제사는 부모가 돌아가시어 幽明을 달리하게 됨으로써 時空을 달리하게 되었을 경우의 효행 가운데 하나이다. 부모는 시공을 넘어서 존재하고 효자는 ‘언제 어디서나’ 부모의 명령을 듣고 부모의 모습을 뵙는다(聽於無聲, 視於無形). 즉, 자식은 한시라도 부모를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들리는 곳에서나 들리지 않는 곳에서나 늘 부모의 마음을 보고 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도가 日用間에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戒愼하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恐懼하는 것32)과 상당히 유사한 자세이다.
31) “曲禮曰, 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 『小學』「明倫」5장.
32)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中庸』1장.
예컨대 효자는 “나아가라 하지 않으면 감히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라 하지 않으면 감히 물러나지 않는다.”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는다.” 효자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고, 능동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효자는 주체적으로 행동하여 자신을 드러내거나, 적극적으로 말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한 효자의 行住坐臥는 모두 부모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부모가 계시거든 먼 곳에 가지 않으며, 가게 되면 반드시 일정한 곳이 있어야 한다.”33) 사람의 자식된 자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전혀 없다.
부모에 대해 이처럼 헌신적인 공경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학은 왜 孝를 이토록 강조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우선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나를 태어나게 해주고 살아가게 양육해 준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측면에서 그러할 수 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셨으니 그의 뜻을 계승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고, 나를 길러주시니 은혜의 두터움이 이것보다 큰 것이 없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悖德이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悖禮이다.34)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는 자기 생명의 직접적인 원천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부모에 의해 양육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위적으로 맺어질 수도 없고 인위적으로 파기할 수도 없는 天倫이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아무도 자신의 부모를 통하지 않고는 태어날 수 없다.35) 그래서 나의 몸은 부모의 가지이고, 부모는 나의 뿌리이다. 따라서 나의 몸을 傷하지 않게 하여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결국 나의 몸을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를 傷하게 하면 가지인 내 몸 역시 傷하고, 내 몸을 傷하게 하면 뿌리인 부모를 傷하게 되는 것이다.36)
33) “孔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小學』「明倫」8장.
34) “孔子曰, 父母生之, 續莫大焉. 君親臨之, 厚莫重焉. 是故不愛其親, 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 而敬他人者, 謂之悖禮.” 위의 책,「明倫」35장.
35) “曾子曰, 身也者, 父母之遺體也.” 위의 책,「明倫」38장.
36) “孔子曰, 君子無不敬也, 敬身爲大. 身也者, 親之枝也. 敢不敬與. 不能敬其身, 是傷其親. 傷其親, 是傷其本. 傷其本, 枝從而亡. 仰聖模, 景賢範, 述此篇, 以訓蒙士.” 위의 책,「敬身」首章.
둘째, 孝는 집 밖에서의 모든 행동에 근본이 된다.
다음의 인용문은 孝가 왜 百行의 근본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증자가 말씀하였다. …… 거처함에 장엄하지 않음은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김에 충성하지 않음은 효가 아니며, 벼슬에 임하여 공경하지 않음은 효가 아니며, 친구 간에 신의가 없음은 효가 아니며, 싸우거나 진을 칠 때에 용맹이 없음은 효가 아니다. 다섯 가지를 완수하지 못하면 재앙이 그 어버이에게 미치니,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37)
37) “曾子曰, 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莅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者不遂, 灾及其親. 敢不敬乎.” 위의 책, 같은 장.
“군자는 어버이를 사랑한 뒤에 미루어 남을 사랑하니 이것을 순한 德이라 하며, 어버이를 공경한 뒤에 미루어 남을 공경하니 이것을 순한 禮라이른다.”38)
38) “君子愛親以後 推以愛人 是之謂順德 敬親而後 推以敬人 是之謂順禮
苟或反此 則爲悖逆而非所以爲孝矣.” 위의 책,「明倫」35장, 范氏의 注.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위에 거해서는 교만하지 않으며, 아래가 되어서는 亂을 일으키지 않으며, 동료간에 있어서는 다투지 않아야 한다.”39)
39) “事親者, 居上不驕, 爲下不亂, 在醜不爭.” 위의 책, 같은 장.
효자의 禮에 따른 효행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친척, 관직에 같이 있는 동료들, 스승을 같이 하는 동학들, 함께 교유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칭찬받는다. 효행은 부모친척 간의 사랑, 함께 벼슬살이하는 동료들 간의 유대, 뜻을 같이한 동학들 간의 동지애, 친구들 간의 신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효는 百行의 근본이다.”
부자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효행이 百行의 근본이 된다는 것은 부자관계가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이며, 또한 부자관계에서 자식이 지켜야 하는 禮가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서 지켜야하는 禮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라고 하는 가정의 중심과 자식과의 관계는 형제친척, 동료들, 동학들, 친구들과의 관계를 결정하고, 향당에서의 관계를 결정하고, 더 나아가 군주와의 관계를 결정한다. 한 발 더 나아가, 天子가 사랑과 공경을 부모 섬김에 극진히 하면 德敎가 백성에게 가해져서 四海의 본보기가 된다40)고 하니, 親體를 대상으로 한 자식의 孝가 얼마나 중시되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 가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합하면, 孝의 실천이란 인간 자신의 생명을 부여해준 부모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동시에 자신에게 사회적 질서를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질서가 곧 사회적 질서라고 생각할 경우 이 두 가지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생명의 원천에 대한 감사는 곧 사회적 질서를 수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모 앞에서 자식은 신 앞의 인간처럼 자신의 크기를 작게 하고 자신의 위치를 낮춘다.
부모를 모시는 효성스러운 자식의 禮란 자신을 한없이 작게 낮게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식은 이처럼 부모 앞에서 자신을 작게 낮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부모를 넘어 천지자연의 세계로 소급할 수 있게 되고 동시에 인간사회로 자신을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식은 자신을 작고 낮게 함으로써 도리어 자신을 크고 높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孝로 시작하고, 입신양명으로 孝를 마침’ 이 가능한 것이다.41)
40) “愛敬盡於事親, 而德敎加於百姓, 刑于四海. 此天子之孝也.” 위의 책,「明倫」34장.
41) “孔子謂曾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위의 책, 같은 장.
5.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균형 잡기 : 中道
주자는 日益 工夫와 日損 工夫가 교차하면서 공존하는 자신의 공부론에서 초학자가 제일 처음 배워야 하는 것은 소학이며, 소학은 敬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학에 나타난 敬은 주로 몸가짐, 의복제도, 음식예절 등과 관련된 몸의 수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敬은 몸을 수렴하는 방식인 예의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다. 敬은 나의 몸을 낮추어 남을 높이는 것이며, 禮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학은 敬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러한 몸의 낮춤으로서의 敬은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겸손을 지향하고 있다. 성인이 아닌 衆人들은 사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단번에 비울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몸을 낮추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결국 敬은 心身의 수렴이며, 이 수렴의 방법이 整齊嚴肅(몸의 수렴)과 主一無適(마음의 수렴)으로 나눠진다. 그러나 主一無適보다는 整齊嚴肅을 더 중시한다. 주희는 이 敬이 성학의 시작과 끝이라고 말한다.42)
「敬身」첫머리에서는 禮記 「曲禮」편을 인용하여 “그 용모를 반드시 단정히 하고 엄숙히 하여 생각하듯이 하고, 그 말을 반드시 안정되게 하여 급박하지 않게 해서 이로써 백성에게 임한다면 백성이 편안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43)라고 말한다.
‘毋不敬’은 行禮의 근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신의 엄숙함(敬)이 民을 편안하게 할 것이라고 한 점이다.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나의 태도와 말의 엄숙하고 신중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禮가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禮를 잘 시행하고 있는 성인, 곧 천리와 하나 된 자의 깨달음은 日常에 기반을 둔 것이며, 그 깨달음은 하늘이 아니라 현실을 향해, 시장을 향해, 나를 향해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는 敬이 日常을 떠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敬도 자연(無爲)과 인간(有爲)의 사이에 있는 것이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공부이다. 그렇다면 敬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禮는 욕망의 확장과 욕망의 축소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42) 퇴계는「숙흥야매잠」을 그의 敬論의 가장 중심적인 해설서로 잡았다. 퇴계는 「숙흥야매잠」을 철저히 성리학적 공부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 즉 「숙흥야매잠도」에 나타난 퇴계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 평범한 일상의 삶을 어떻게 하면 道의 세계와 연결시킬 수 있을 까 하는 점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이치를 배우는 下學의 세계가 필경 上達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구실을 한다는 믿음을 그는 「숙흥야매잠도」에 실어 두고 있다. 敬이 그 고리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정순우,「실학의 공부론에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이해」유교의 공부론과 덕의 요청 (청계, 2004), p. 135쪽.
43) “曲禮曰, 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위의 책,「明倫」2장.
유학은 욕망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욕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만함을 키워서는 안 되며, 욕심을 방종하게 해서는 안 되며, 뜻을 자만하게 해서는 안 되며, 즐거움을 극도로 해서는 안 된다.”44)
44) “敖不可長, 欲不可從, 志不可滿, 樂不可極.” 위의 책,「敬身」2장.
이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오만함, 욕심, 의지, 즐거움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지나치게(過) 추구되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敬의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중용적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賢者는 (상대와) 친하면서도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며, 사랑하면서도 그 악함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선함을 알며, 재물을 쌓되 (남에게도) 능히 흩어주며, (자신이 생각하는) 편안함을 편안히 여기되 義에 따라서 편하게 여기는 것을 옮긴다.”
현자가 친하면서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사랑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모두 고려했기 때문이다. 친함만이 다 인줄 알고, 공경함만이 다 인 줄 아는 사고에서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선함을 알지만 선의 이면에 있는 악도 알고, 친하게 지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소원함을 알기에 善과 惡, 親과 疏, 畏와 愛 사이에서 중용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도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다(中無定體). 중용은 변하는 事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中道가 현실적으로 가능키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비울 필요(心虛)가 있다. 無心해야 하는 것이다.
6. 효자로 살아가기
옷을 어떻게 입고, 갓 끈을 어떻게 매고, 시선을 어디에 두며, 어떤 동작으로 걸어가야 하고 물러나야 하는가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 그리고 남의 자리를 밟지 말며, 발 모양을 무겁게 하며, 손 모양을 공손하게 하라는 등등의 것들, 이것들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가?
논자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에서 禮에는 ‘참 아름다움’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어떤 힘의 원천 같은 것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小學에 나타난 자잘한 禮들은 천박함과 가벼움이 아닌 어떤 엄숙함과 경건함을 풍기고 있었다. 禮記의 작자는 인간이 짐승이 아니기에 개나 돼지처럼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니라 밥상을 차려 식사를 한다는 사실, 즉 ‘밥상을 제대로 차리는 禮의 존재’ 그 자체가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禮는 인간의 본질을 형식화해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어떤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禮가 없으면 부모를 섬길 수도 없고, 친구와 교제할 수도 없고, 임금을 모실수도 없다. 단, 禮가 인간의 본질을 형식화한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위해선 日益 공부와 日損 공부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精誠이 필요하다(盡心).
주자는 禮를 실천하는 과정이 곧 인간 본래의 모습인 仁義禮智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말해 天理가 드러나는 과정이다. 天理와 하나 된 자(聖人)의 깨달음은 日常에 기반을 둔 것이며, 그 깨달음은 하늘이 아니라 현실을 향해, 시장을 향해, 나를 향해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희가 생각하는 日常은 곧 上達處이고, 日常의 질서를 가장 잘 실천하는 자가 聖人인 것이다.
小學은 衆人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성인되기’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小學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걸쳐 있는 日常의 이중성, 家族의 이중성, 工夫의 이중성에 충실하며, 그 사이에서 中庸을 취하는 방법을 담고있다. 이것들의 중심에는 바로 孝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논자는 가족 안에서의 禮(孝)의 습득과 禮(孝)의 실천이라는 小學의 과정을 통해 성인에 이르고자 하는 주자의 기획을 밝혔다.
필자가 앞에서 ‘도대체 유자들은 어떤 이유로 지극한 효심이 성인됨의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라고 던졌던 물음이 어느 정도 풀렸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유학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 가족과 사회, 집 안과 집 밖이라는 두 점 사이에서 구체화된 禮를 통해 中道를 걷고자 한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효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세계로의 귀의와 인간세계로의 확장을 동시에 의미하며, 사실상 효는 자연으로부터 와서 인간으로 사는 모든 사람의 운명적 사실에 충실한 행동 원리가 되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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