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순자(荀子)의 자연관과 인간이해

rainbow3 2019. 10. 4. 17:02


순자(荀子)의 자연관과 인간이해 *       최 영 찬 

 

[논문개요]

 

순자는 과학적 사유의 철학자다. 그러므로 순자철학에서는 실증성과 논리성이 돋보인다. 순자는 이러한 과학적 사유 속에서 경험과 사실을 바탕으로한 현상적 자연관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인간을 이해하고 국가사회와 인의(仁義)도덕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본성과 마음으로 나누어 사유되고 있다. 본성은 욕망을 내용으로 하면서 악성(惡性)으로 파악하고 있다. 마음은 인지능력으로 그 내용을 한정하고 있다. 선의 요소는 인간 밖의 제조물로써 마음이 인지하고 경영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본 논문은 순자의 자연관에 관심을 집중하고 본성의 자연성과 마음의 인위성을 분석 검토하고 있다.

 

* 주제분야 : 중국철학, 유가철학
* 주 제 어 : 자연, 인위, 본성, 마음, 현상, 성악

 

* 본 논문은 2011년 전북대학교 연구기반조성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서론 : 과학적 사유의 철학자

 

순자는 당시 사회의 무질서와 편견에 따른 사상난립, 무지와 타락상에 따른 비합리적인 하늘사상, 신비주의, 미신 등과 맞서 고민했던 과학적 사유의 철학자였다. 과학은 아무도 반증하지 못한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한 보편성과 객관성이 요청된 지식체계이다. 순자철학이 아무도 반증할 수 없는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철저한 과학적 사유체계라고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였고 신봉되었던 인격적인 하늘사상이나 터무니없는 미신, 그리고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추지 못한 신비주의나 편견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최소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사유를 시도하고 체계적인 전개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보면 과학적 사유의 철학자였다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중국고대 특히 은대에서는 인간은 물론 모든 자연현상을 종교적인 관념 속에서 이해하고 해명하면서 생활하였다. 하늘은 종교적인 인격신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였고, 인간 앞에서 벌어진 모든 현상들은 신의 의지로 파악되었다. 묵자사상에 이르러 종교적인 하늘사상은 통치를 목적으로 한 인격적인 하늘로서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이러한 하늘관념은 순자시대에 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었다.

순자는 당시의 종교적인 하늘사상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순자는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임금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1)라고 하면서 “하늘을 위대하다고 여기며 그 생성의 힘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과 물건을 저축하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 쪽이 낫겠는가? 하늘을 따르면서 그것을 기리는 것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을 처리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2)라고 묻고 있다.


순자에 의하면 하늘은 아무런 의지도 없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을 따름이며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는 주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위대하게 여기며 사모할 필요도 없고, 또 하늘을 따르며 그것을 기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마침내 순자는 하늘을 비롯한 자연과학적 대상과 그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제시하고 있다.

“하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확실하게 지적될 수 있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범위에 한정한다.
땅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물을 번식시키기에 합당함을 드러내주는 범위에 한정된다.

사계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방도를 드러내주는 범위에 한정된다.

음양에 대해 알 수있는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를 다스릴 수 있는 지식을 드러내주는 범위에 한정한다.”3)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는 경험적 대상인 현상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순자의 경험과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을 하나의 대상물로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중국 고대의 사상가 중에서 순자만의 독자적인 것이고, 서양 근대적 자연 과학의 기본방향과 유사하다.4)

 

하늘사상은 공자에 이르러 도덕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전통이 마련되었다.
공자는 일찍이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天生德於余)”라고 하여 하늘에 대한 관념을 외재적인 지배자로부터 내재적인 도덕원리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하늘과 인간은 도덕성을 매개로 서로 연계되어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자의 하늘관념은 내재적인 초월의 특징을 갖는다. 하늘과 인간의 성명적(性命的) 일관성의 자각을 통해서 하늘을 자아 인격성의 본원적 근거로 이해하는 도덕적 천명사상은 마침내 유가 전통의 인본사상이 형성되는 근본 계기가 되었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도덕형이상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인간의 본성은 하늘로부터 기인한다고 본다. 맹자는 “천지만물의 이치는 모두 나에게 갖추어졌다.”5)라고 하면서 “하늘의 도는 참된 것이고 인간의 도는 참됨을 실천하는 것이다.”6)라고 하였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은 종래의 종교적인 하늘관념을 부정하고 하늘과 인간이 도덕적 본질을 매개로 한 도덕형이상학의 원초적인 관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하늘관념은 유심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사유 속에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묻어있다고 판단한 순자는 맹자의 하늘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부정하면서 소박한 자연사물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과학적 사유 속에서 하늘개념을 현상적 자연개념으로 돌려놓으려 하였다. 따라서 순자는 전통적인 유가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어 왔던 신비주의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7)

 

1)『荀子』天論,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2)『荀子』天論, “大天而思之 孰與物畜而制之 從天而頌之 孰與制天而用之”.

3) 『荀子』天論, “所志於天者  已其見象之可以期者矣  所志於地者  已其見宜之可以息者矣
   所志於四時者  已其見數之可以事者矣  所志於陰陽者  已其見知之可以治者矣”.

4) 趙賢淑, 「荀子思想에 있어서 합리성」 , 『東洋哲學의 체계와 인식』, 아세아문화사, 1998, 57쪽 참조.

5)『孟子』盡心, “萬物皆備於我”.
6)『孟子』離婁, “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
7) 이종성, 「순자철학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 , 『동서철학연구』 제25호, 123~124쪽 참조.

  

순자는 하늘과 인간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면서(天人之分) 하늘에 대한 자연과학적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늘에는 영원불변한 도가 있고, 땅에는 영원불변한 원리가 있고, 군자에게는 영원불변한 몸가짐이 있다.”8)
자연인 하늘과 땅의 도와 사람의 도가 다른 것임을 강조한 내용이다. 하늘에 대한 관념을 소박한 경험대상인 자연현상으로 바꾸어 사유하였다.
순자철학에서는 하늘의 역할과 사람의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는 천인지분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늘을 현상화된 사물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은 서로 따르며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 비추며, 사계절은 순차적으로 찾아오고, 음과 양은 만물을 변화시키며, 바람과 비는 널리 고루 뿌려준다. 만물은 각기 조화를 얻어 생장하고 각각 살아가는 바를 얻어 성장한다. 그러나 생명이 이루어진 과정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이루는 결과는 알 수 있으니 이를 일러 신비하다고 하며,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이루어진 바를 알지만 그 형체 없는 작용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하늘이라고 한다.”9)

 

일월성신의 운행과 사계절의 순환, 음양의 변화, 바람 불고 비 내리는 것은 모두 자연현상이다. 그리고 자연현상이 이루어진 결과는 알 수 있지만 생성의 구체적인 과정은 알 수 없다. 이것을 신비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미 이루어진 사물현상은 알 수 있지만 형체없는 작용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하늘이라고 한다. 있으나 알 수 없는 것은 신비의 대상이고, 있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다. 순자는 자연과학적 대상에만 관심을 두었지 비실증적인 신비의 대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했다. 그리고 순자는 구체적인 생성의 작용이나 과정마저 형이상학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비과학적이라하여 자기철학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이 순자사상의 엄격성과 그에 따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8)『荀子』「天論」, “天有常道矣地有常數矣  君子有常體矣”.

9)『荀子』「天論」, “列星隨旋  日月遞火召  四時代御  陰陽大化  風雨博施  萬物各得其和以生 各得其養以成  不見其事而見其功  夫是之謂神  皆知其所以成  莫知其無形  夫是之謂天”. 

 

순자는 편견의 비과학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 집중적인 언급이 「해폐」편의 내용이다.

“모든 사람의 병폐는 한 모퉁이에 가려져 있어 큰 이치에 어둡다는 데 있다. 잘 다스리면 곧 정상으로 되돌아오지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둘 다 의심하면 미혹될 것이다.”10)

순자는 큰 이치를 모르게 된 병폐의 가장 큰 이유를 편견이라고 하였다. 편견은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안목이 아니라 자기만의 집착이나 욕심에 빠져 한쪽에 치우친 판단이나 사유를 말한다. 이러한 인식주체 앞에서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나 인식이 불가능하며 결국은 오류에 빠지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순자는 오행설을 비판하고 있다.

“기묘하고 모순되어 기준이 없고 불분명하여 논리적 근거가 없고 난삽하여 해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11)

모순이 없고 분명한 논리적 근거의 확실성이 과학적 사유의 기본정신임을 밝히고 있다. 순자는 현상 속에서 흔히 경험된 사례들을 들어 말하고 있다.

“마음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희고 검은 것이 바로 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눈은 보지를 못하고, 천둥소리 북소리가 옆에서 나더라도 그의 귀는 듣지 못한다. 하물며 마음이 딴 것에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야 어떻겠는가?”12)라고 말하였다.
‘마음이 딴 것에 부림을 당한다.’는 말은 마음이 그릇된 질투나 편견에 부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마음이 편견에 빠져 있으면 보고 듣는 감각적인 대상마저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순자는 미신을 무지몽매의 소치라 하여 철저하게 타파하고 있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우는 소리를 내면 나라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괴상하게 여기는 것은 괜찮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식과 월식이 생기고 철에 맞지 않는 비바람이 일고 이상한 별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있었던 일이다.”13)
괴이하게 여긴 것은 과학의 태도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미신의 태도다. 자연의 괴이한 현상 앞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며 놀라는 태도는 바로 지적 작위로 연결된 과학의 태도이며 또 철학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순자가 자연의 괴이한 현상은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말한 것은 미신을 반대하고 과학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순자는 말하고 있다.

“하수 어귀의 남쪽에 연촉량(涓蜀梁)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무서움을 많이 탔다. 밝은 달밤에 길을 가다가 몸을 숙여 자기 그림자를 보고는 귀신이 엎드려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또 우러러 그의 머리를 보고는 도깨비라 생각하여 등을 돌려 뛰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도착해서는 숨이 끊어져 죽어버렸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사람들이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정신이 멍할 때와 의심으로 혼란스러울 때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할 때가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사물의 판단을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기 때문에 병이 나면 냉증이 걸리는 것인데, 그 냉증이 귀신 때문이라 생각하고 북을 두드리며 돼지를 삶아 놓고 푸닥거리를 하지만 틀림없이 북만 헤어지고 돼지만 낭비하게 될 뿐 병이 낫는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14)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 미신이며, 터무니없는 원인의 결과라고 확신하는 것이 미신이다. 순자는 이러한 미신을 무지의 소치이거나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빚어진 비과학적인 판단이라 단언하고 강력 부정했다.

 

10)『荀子』 解蔽, “凡人之患  蔽於一曲  而闇於大理  治則復經  兩疑則惑矣”.

11)『荀子』 非十二子, “甚僻違而無類  幽隱而無說  閉約而無解”.

12)『荀子』 解蔽, “心不使焉  則白黑在前而目不見  雷故在側而耳不聞  況於使者乎”.

13)『荀子』 解蔽, “星隊木鳴  國人皆恐  曰是何也  曰無何也  是天地之變  陰陽之化  物之罕至者也  怪之可也  而畏之非也  夫日月之蝕  風雨之不時  怪星之黨見  是無世而不當有之”.

14)『荀子』 解蔽, “夏首之南有人焉  曰涓蜀梁  其爲人也  愚而善畏  明月而宵行  俯見其影  以爲伏鬼也  仰視其髮  以爲立魅也  背而走比至其家  失氣而死  豈不哀哉  凡人之有鬼也  必以其感忽之間  疑玄之時正之  此人之所以無有而有無之時也  而已以正事  故傷於涇而擊鼓鼓痺  則必有蔽鼓喪䐁之費矣  而未有兪疾之福也”. 

 

순자는 불충분한 자료나 불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어떤 일을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비합리에 대해서도 용납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관상이나 복점과 같은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그것이다.

순자는 “사람의 형상과 안색을 보고서 그의 길흉과 화복을 알아낸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칭송하지만 옛 사람들에게도 없었고 학자들도 얘기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상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은 행동규범을 잘 가리는 것만 못하다.”15)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순자는 관상으로 운명을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인 일임을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과 태도인 것이지 겉모양이 아니라는 순자의 합리적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순자는 『역경』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역술인 점복(占卜)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 “역을 잘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16) 라고 말하였다. 순자는 운명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회적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그와 같은 극단적인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순자의 이러한 비합리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비판정신은 그의 확고한 과학적 사유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고, 과학적 사유의 기반위에서 이루어진 순자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철저한 분리(天人之分)를 대전제로 선언하면서 전개된 철학이다.
2장과 3장에서 순자의 자연관과 인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15)『荀子』 非相, “相人之形狀顔色  而知吉凶妖祥  世俗稱之  古之人無有也  學者不道也  故相形不如論心

論心不如擇術”.

16)『荀子』大略, “善爲易者不占”. 

 

2. 현상적 자연관

 

순자는 하늘을 소박한 자연현상으로 이해하고 자연과 인간의 존재성과 역할을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편견이나 미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인 하늘사상이나 신비주의적인 철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구분은 자연과 사회, 물질과 정신, 객관과 주관의 구별을 수반한다. 순자의 자연관에서는 특히 객관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현상사물에 대한 경험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게 부각된다. 하늘과 사람의 구분은 순자철학 전반을 통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관념이면서 대전제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계의 운행은 그 자체의 법칙이 있는 것으로 결코 사회에 선인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있어서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17)

하늘, 즉 자연계의 운행은 그 자체의 독립적인 법칙이 있어 인간계와 전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고 운행한다는 것이다. 하늘을 인격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법칙으로 파악한 것이며,인간계와 철저하게 독립된 자연관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하늘에는 일정한 도가 있고 땅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하늘은 계절을 갖고 땅은 재원을 갖고 사람은 이것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늘과 땅의 일에 나란히 참여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18) 라고 하였다.

자연계와 인간계의 구분을 분명히 하면서 종래의 주종적이고 상하관념의 하늘과 인간관계를 부정하고 천지와 나란히 존재하는 인간의 위상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하늘은 만물을 생장시키기는 하지만 만물을 분리하지는 못한다. 땅은 사람들을 그 위에 살게 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19)라고 하였다. 하늘과 땅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천인지분에서 분리의 의미는 구분이나 분별의 뜻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단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17)『荀子』 「天論」,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18)『荀子』 「天論」, “天有其時  地有其財  人有其治  夫是之謂能參”.

19)『荀子』 「禮論」, “天能生物  不能辨物  地能載人  不能治人也”. 

 

맹자가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고 본성을 알면 하늘은 안다.(盡心知性知天)”라고 말할 때의 천인합일론은 천부적인 인성 상에서 구체화된 이고, 노자가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라고 말할 때의 천인합일론은 자연의 도에 합하는 것이며, 장자가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萬物皆一也)”, “도를 통해 하나가 된다.(道通爲一)”라고 말할 때는 곧 사람과 자연의 통일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천인합일의 입장에서는 공통적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하늘사상에서 보면 순자의 “천인의 구분을 밝힌다.(明於天人之分)”는 사상은 획기적이고 특별하다고 할 것이다.20)

 

순자철학에서 하늘(天)에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다. 좁은 의미로는 하늘도 땅과 대조를 이루는 해와 달과 별이 있는 하늘이고, 넓은 의미로는 현재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자연이란 말에 가까운 개념이다.21)

그러나 순자철학 전반에서 사용되는 하늘에 대한 개념을 종합해보면,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하늘 개념이 통합된 자연현상의 의미로 이해된다. 순자는 자연을 의미하고 있는 하늘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작위하지 않아도 성취되며 추구하지 않아도 획득되는 것을 일컬어 하늘의 직분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누가 아무리 심오할지라도 더 이상 사려할 수 없고,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더 이상 작위할 수 없고, 아무리 정밀할지라도 더 이상 살필 수 없다.

무릇 하늘과 더불어서는 직분을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22)

22) 『荀子』 「天論」, “不爲而成   不求而得   夫是之謂天職   如是者   雖深其人不可慮焉   雖大不可能焉   雖精不可察焉   夫是之謂不與天爭職”.

 

작위하지 않아도 성취되며 추구하지 않아도 획득된다는 것은 저 스스로가 ‘저절로 그러함’을 뜻하는 자연을 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작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과 전혀 상관없는 독립적인 경지임과 아울러 하늘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순자의 하늘에 대한 정의는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저 스스로가 되어지는 것이 하늘이다.”23)라고 한 맹자의 하늘에 대한 정의와 같다. 모두가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자연의 변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20) 錢遜著, 백종석 역, 『선진유학』, 學古房, 2009, 312쪽 참조.

21) 金學主譯, 『荀子』, 大洋書籍, 1972, 42쪽 참조.

23)『孟子』 「萬章」, “莫之爲而爲者天也”. 

 

순자는 또 “배울 수도 없고 도모할 수도 없는 인간의 천성적인 것을 본성이라고 한다.”24)라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도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자연의 의미를 ‘배울 수도 없고 도모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작위를 가할 수 없는 절대 독립적인 것이 하늘, 즉 자연이다. 그리고 또 순자는 “본성은 원시질박한 바탕을 뜻한다.”25)라고 하여 본성의 자연성을 원시질박한 바탕’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자철학에서 자연을 의미하고 있는 하늘은 ‘저절로 이루어진 원시질박한 바탕’을 뜻한다. 질박한 바탕은 어떠한 문식의 꾸밈이 없는 본래의 상태다. 그러므로 하늘은 신령스럽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순수한 자연현상인 것이다.

순자는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면 재난을 막는 의식을 행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며 점을 쳐 큰일을 결정하는 것은 형식을 갖추어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고 백성들은 신령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일을 한다.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면 길하지만 신령스러운 일이라 여기고 그런 일을 하면 흉하다.”26)

자연현상 앞에서 신에게 빌고 점을 치는 행위는 위안을 얻기 위한 문화적 행사이거나 형식적인 일에 불과한 것일 따름이다. 이에 대해 군자는 형식으로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신령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형식으로 생각한다면 길한 일이지만 신령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면 흉한 일이다. 자연은 전혀 문식이 더해지지 않는 순수질박한 본연의 자연형상에 불과한 것임을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24) 『荀子』 「性惡」, “不可學  不可事  在人者  謂之性”.

25) 『荀子』 「禮論」, “性者  本始材朴也”.

26) 『荀子』 「天論」, “日月食而救之  大罕而雩  卜筮然後決大事  非爲得求也  以文之  君子以爲文  而百姓以爲神  以爲文則吉  以爲神則凶也”. 

 

순자철학에서 하늘, 즉 자연은 철저하게 자연현상적인 것이다. 별, 해와 달, 만물, 사계절, 비바람, 사물의 생성변화 등은 모두 자연현상들이다. 순자는 오직 이와 같은 자연현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의 내면적인 작용이나 생성과정 자체는 자연 그 자체의 직분이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만물이 궁극적인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원천에 대해서는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으며, 현상의 배후에 놓여있는 자연의 직분에 대해서는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순자가 전통철학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형(無形)의 도를 탐구하는 신비적인 태도이다. 이들은 현실적인 사물들을 이용하고 유익하게 다루기보다는 발생하는 원인과 합일되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순자의 자연관이 반영된 「천론」 첫 머리는 “하늘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 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천은 상도를 갖는다.(天有常道矣)”라고 할 때의 도는 자연현상의 운행과 법칙이라는 뜻이다.27)

순자는 도를 인식의 객관적 표준으로 말하고 있으며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 원칙과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28) 순자는 다음 글에서 자신의 현상적 자연관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27) 尹武學, 荀子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동일 ,『東洋哲學硏究』 제23집, 2002, 275쪽 참조.
28)『荀子』「正名」, “心合於道  道者治之經理  道者古今之正權也”. 

 

“하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확실하게 지적할 수 있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범위에 한정된다. 땅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물을 번식시키기에 합당함을 드러내주는 범위에 한정된다.”29)

29)『荀子』「天論」, “所志於天者  已其見象之可以期者矣  所志於地者  已其見宜之可以息者矣”.

 

하늘에 대해서는 단지 절기와 기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천체현상을 인식하면 될 뿐이고, 땅에 대해서는
단지 동식물이 번식되고 생식될 수 있는 조건만 인식하면 될 뿐이다. 자연계의 오묘함은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 천지운행의 소이연(所以然)의 도라고 할 수 있는데, 순자는 이것에 대하여는 결코 탐구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은 마땅히 탐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순자는 “하늘과 관장하는 직무를 놓고 다투지 않는다.(不與天爭職)”30) “오직 성인만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唯聖人爲不求知天)”31)라고 한것이다.

“군자는 천지만물을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길 뿐이고, 천지만물이 그렇게 된 까닭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는다.”32)
그렇게 되어있는 천지만물은 현상이고 그 까닭(所以然)은 배후의 근원자이다. 이것이 순자의 현상적 자연관의 결론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30)『荀子』 「天論」.
31) 錢遜著, 백종석 역, 『선진유학』, 學古房, 2009, 309쪽 참조.
32)『荀子』 「天論」, “君子其於天地萬物也  不務說其所以然”. 

 

순자의 현상적 자연관은 그의 과학적 사유와 연결된 것이다. 순자가 말하고 있는 자연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상적인 사물들일 뿐, 근원이나 원인적인 실체, 혹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아니다.

“하늘에는 사계절이 있고 땅에는 재물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다스림이 있다.”33)

하늘을 때로 말하고 땅을 재물로 말하고 사람을 다스림, 즉 경영자로 말한 것은 자연현상을 말한 것이다. 종래와 같이 하늘・땅・사람을 우주의 기본 요소로 생각하면서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하려는 태도와는 다르다. 순자가 견지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가 갖는 의미는 인간이 하늘을 인식할 수 없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불가지론적 관점과 하늘의 역할, 즉 천직(天職)의 영역은 인간계의 영역과 완전히 다르며, 하늘 그 자체 이외의 어떠한 것도 첨가할 수 없다는 철저한 객관주의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 유포되어 있는 괴이한 자연현상에 대한 미신적・신비주의적인 태도를 철저히 부정하고 그 모두를 자연현상으로 파악하면서 예외적인 드믄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식과 월식이 있고 때 아닌 바람이 일고 이상한 별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세상이나 있었던 일이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에 소리가 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변화요 음양의 변화이며 그런 일들은 드물게 일어난 현상들이다.”

당시에 일반화된 미신의 대상이었던 모든 기이한 자연 변이를 자연현상으로 이해한 것은 철저한 과학정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순자는 일상적인 자연현상을 설명하면서 “봄・ 여름에는 만물이 생장하고 가을・겨울에는 거두고 보관하는 것 또한 우임금 때나 걸임금 때나 마찬가지이다.”34)라고 하였다.

자연현상의 항상성을 말한 것이다. 자연계의 운동 변화하는 현상은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하여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작위와 상관없이 저절로 자연의 질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사계의 움직임, 만물의 생장 등의 일을 순자는 자연의 직분이 라고 했다. 순자의 철학에서는 자연의 직분이 곧 자연 개념이다.

순자는 “흙이 쌓여 산이 이루어지면 바람과 비가 있게 되고, 물이 모여 못이 이루어지면 교룡과 용이 생겨나며, 선함이 쌓여 덕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선명함을 얻게 되고 성스러운 마음이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반걸음이 쌓이지 않으면 천리 길을 갈 수 없고, 작은 흐름이 쌓이지 않으면 강과 바다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35)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험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순자의 현상적 자연관은 계속되어 인간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33) 『荀子』 「天論」, “天有其時  地有其財  人有其治”.

34) 『荀子』 「天論」, “繁啓蕃長於春夏  畜積收臧於秋冬  是又禹桀之所同也”.

35) 『荀子』 「勸學」, “積土成山  風雨興焉  積水成淵  蛟龍生焉  積善成德  而神明自得  聖心備焉  故不積蹞步  無以至千里  不積小流  無以成江海”. 

 

3. 인간의 자연성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요소와 인위적인 요소가 있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인간에 대한 탐구는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자연은 무엇이며 인위는 무엇인가? 자연의 영역은 어디까지이며 인위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등의 물음에 관한 견해는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인간이 갖는 자연성과 인위성에 관한 문제는 복잡하게 전개된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게 되는 인위적인 요소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 자체도 자연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자철학에서 하늘(天)은 현상세계 그 자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현상사물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36) 그러므로 순자철학의 핵심이 자연과 인위의 구분이지만 「천론」에서의 하늘은 자연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연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두 측면으로 규정된다.

첫째, 자연에 의하여 생성되고 자연에 의하여 생명이 유지되는 생명체로서의 존재이고 둘째, 자연을 바르게 이해하고 관리하여 생존욕망을 충족시키며 나아가 인간 안에 있는 자연성을 잘 판단하고 절제하여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성에 맞게 조직 관리하는 존재이다.37)

순자의 인간관은 인간을 기타 사물, 더 나아가 하늘, 즉 자연과의 구별로부터 시작한다.

 

36)『荀子』 天論, “萬物爲道之一偏  一物爲萬一偏  愚者爲一物一偏”.

37) 李海英, 순자의 인간 이해 , 『東洋哲學의 자연과 인간』, 아세아문화사, 1998, 124쪽 참조.

 

순자는 인간을 기타 사물들과 구별하고 있다.

 

“물과 불은 기운은 있으나 생명이 없고, 초목은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새와 짐승은 지각은 있으나 의로움이 없다. 사람은 기운도 있고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고 의로움도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38)

38)『荀子』 「王制」,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人有有氣有生有知 亦且有義 故最爲天下貴”.

인간은 무생물・초목・금수 등과 동질적인 점이 있으나 결정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존재 특성이 다름 아닌 의로움, 즉 사회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순자도 인간을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하였다. 순자는 인간의 존귀성을 능력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힘은 소만 못하고 달리기는 말 보다 못하는데 소와 말은 어째서 사람에게 부림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곧 사람은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살 수 있으나 소나 말은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살 수 없기 때문이다.”39)

39)『荀子』「王制」, “力不若牛 走不若馬 而牛馬爲用何也 曰人能群 彼不能群也”.

인간은 군집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인간의 사회성이 바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특성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순자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절대적인 요건을 도덕질서로 파악하였다.

“사람은 어째서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분별은 어째서 능히 행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로움이 있기 때문이다.”40)라고 말하고 있다.

사회적 존재의 가능근거는 분별과 의로움, 즉 도덕질서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도덕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인간의 직분과 역할을 특히 강조하면서 ‘하늘과 인간의 구분’을 자기 철학의 출발점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순자는 먼저 “하늘에는 하늘의 질서가 있고 땅에는 땅의 자원이 있고 사람에게는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대저 이것을 일러 능참(能參:대등하게 참여함) 이라고 한다.”41)라고 말하였다.

인간은 역할 면에서 하늘・땅과 독립하면서 대등한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과 관계하면서 자연과 대등한 독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다. 이를 순자는 “하늘은 낳고 인간은 완성한다.”42), “천지는 군자를 낳고 군자는 천지를 다스린다.”43)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40)『荀子』「王制」, “人何以能群  曰分  分何以能行  曰義”.

41) 『荀子』 「天論」, “天有其時地有其財  人有其治  夫是之謂能參”.
42) 『荀子』 「富國」, “天地生之  聖人成之”.
43) 『荀子』 「王制」, “天地生君子  君子理天地”.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철저하게 구분한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인간 속에서 자연적인 요소와 인위적인 요소를 구별한다. 기본적으로 순자는 인간 속의 자연적 요소를 본능과 마음에서 찾고, 마음의 기능에 의하여 판단・ 선택되어 이루어진 인의법정(仁義法正)을 인위적인 요소로 보았던 것 같다.
순자는 “하늘의 직무가 성립되고, 하늘의 공적이 이루어진 뒤에 사람의 형체가 갖추어지고 정신이 생겨나서 좋아함과 싫어함,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깃들게 된다. 이것을 자연적 감정(天情)이라고 한다.”44) 라고 하였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게 된 감정의 자연성을 밝히고 있다. 순자는 감정 이전의 감각 본성과 마음을 분석하고 있다.

“이목구비와 육체는 각기 사물에 접하기 때문에 그 작용을 서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을 자연적 감각기관(天官)이라고 한다. 마음(心)은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린다. 이것을 자연적 주재자(天君)라고 한다.”45) 순자는 감각 기관의 독립성과 개별성을 밝히고, 동시에 마음의 주재성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선천적 자연성을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인간의 인간된 소이가 된 사회적 도덕질서의 인위적 요소를 강조하기에 이르게 된다. 본성과 마음을 나누어 논해보기로 한다.

 

44)『荀子』 天論, “天職旣立  天功旣成  形具而神  好惡喜怒哀樂臧焉  夫是之謂天情”.

45)『荀子』 天論, “耳目鼻口形  能各有接而不相能也  夫是之謂天官  心居中虛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 

 

(1) 본성

 

『荀子』 「천론」 편에서 천정(天情)・천관(天官)・천군(天君)을 말하고 있. 이때의 하늘은 선천적이라는 뜻의 자연성을 의미한다. 순자철학에서는 천군인 마음까지도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본성에 해당된 것은 천관과 천정이다.

“사람의 형체가 갖추어지고 정신이 생겨나서 좋아함과 싫어함,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깃들게 된다. 이것을 천정이라고 한다. 귀・눈・코・입과 육체는 각각 밖의 사물들과 접촉하면서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기능을 함께할 수는 없다. 이것을 천관이라고 한다.”라고 순자는 천정과 천관을 설명하였다.

천관은 감각기관을 말한 것이다. 감각기관은 외부대상, 즉 사물들과의 접촉을 통해 기능이 발휘되며 발휘된 기능은 각각 독립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천정은 자연적으로 갖추어진 육체와 정신, 즉 오관과 정신의 조화속에서 발생된 감정이다. 따라서 본성에는 감각기관과 그 기능, 그리고 오관과 정신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 대상사물에 대한 감정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본성의 일차적인 특성은 선천적인 자연성이다. 순자는 배우지도 일삼아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람에게 갖추어진 것을 본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본래 그러한 것이 본성이다.”46)

선천적으로 태어난 순수한 자연성이 본성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순자가 말한 자연적인 본성은 초월적인 신성(神性)이나 천부적인 도덕성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연현상적인 본성, 즉 인간이 현실생활의 현장 속에서 발휘되어 드러난 감각적인 본능이다.

순자가 말한 “사물을 볼 수 있는 지각은 눈을 떠날 수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은 귀를 떠날 수 없다. 눈의 시각, 귀의 청각은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47)라는 내용 속에서 밝히고 있는 본능기관과 그 기능을 의미한 것이니 본성은 일차적으로 본능인 감각기관과 그 기능인 것이다.

 

46)『荀子』 正名, “生之所以然者  謂之性”.

47)『荀子』 性惡, “今人之性  目可以見  耳可以聽  夫可以見之明不離目  可以聽之聰不離耳 目明耳聰不可學明矣”. 

 

순자는 본성에 대하여 감정과 욕망을 연결시켜 그 특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것을 본성이라고 한다. 감각기관의 생리기능으로 생긴 감각기관의 능력(시각・청각)이 사물과 접촉하여 감응하며, 이러한 감응은 억지로 행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으로 본성이라고 한다. (사물과 접촉한 후) 본성은 호・오・희・노・애・락의 반응이 있게 되는데 이것을 감정이라고 한다.”48)

48)『荀子』 正名, “生之所以然者 謂之   性之和所生精合感應 不事而自然 謂之性   性之好惡喜怒哀樂 謂之”.

 

순자가 본성과 감정을 제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감각기관의 본능적 기능으로 생긴 감각기관의 감응력, 즉 시각이나 청각이 사물과 접촉하여 감응하고 있는 감각능력이 바로 본성이며, 본성의 감응내용인 호・오・희・노・애・락 등이 감정이다. 순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은 선천적인 것이다. 정은 성의 본질이다. 욕망은 정의 반응이다.”49)

49)『荀子』 正名, “性者 天之就也 情者 性之質也 欲者 情之應也”.

 

감정은 본성의 본질이고 욕망은 감정의 반응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본성과 감정과 욕망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바탕과 반응은 존재 개념과 작용 개념으로 의미가 같지 않다. 감정을 본성의 본질이라고 규정한 것은 존재성으로 말한 것이니, 본성이 감응한 현상적인 내용이 감정, 즉 희・노・애・락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욕망은 감정이 사물과의 접촉 속에서 발생된 구체적인 상태, 즉 심리적인 반응작용이다. 즉, 좋은 것은 취하고 싫어한 것은 버리는 반응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해보면, 감각기관의 고유능력, 즉 귀의 청력, 눈의 시력 등은 본성이고 감각기관의 감응력, 즉 호・오・희・노・애・락 등은 감정이며, 감정을 통해 좋은 것은 가지려 하고 나쁜 것은 버리려 하는 것은 욕망이다.50)

순자가 “이익을 좋아하고 그것을 얻기 바라는 것은 인간의 성정이다.”51)라고 한 말은 욕망이 바로 본성의 반응작용이라는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본성의 현상적인 자연성이라 할 수 있다.

“눈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고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좋아하고, 입은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이익을 좋아하며, 육체는 편안함을 좋아한다. 이것은 인간의 성정에서 나온 것이다.”52) 라고한 순자의 말이 바로 본성의 현상적 자연성을 밝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눈・귀・입 등의 감각기관이 아름다운 색과 소리, 맛있는 것 등을 좋아하는 것은 욕망이다.

 

“굶주리면 먹고 싶어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고 싶어하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하고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한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것이다.”53)

53)『荀子』 榮辱, “飢而欲食 寒而欲煖 勞而欲息 好利而惡害 是人之所生而有也”.

 

이 말도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설명이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 중에서 특히 욕망을 부각시킨 것은 자기 철학의 궁극목표인 도덕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이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의 악함을 말하여 인간 본성 밖에 있는 선을 인위적으로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자철학에서 본성의 욕망적 특성은 매우 중요하다.

 

50) 천병돈, 인간의 자연성과 사회성 , 『동양철학연구』 제26호, 169쪽 참조.

51)『荀子』 性惡, “夫好利而欲得者  此人之情性也”.

52)『荀子』 性惡, “若夫目好色耳好聲口好味心好利  骨體膚理好愉佚  是皆生於人之性情也”. 

 

순자는 “성인이 일반 백성들과 다르지 않는 것은 본성이다.”54)라고 말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공통성을 본성에서 찾고, 또 “욕망의 많고 적음을 통해 서로 다른 류가 구분된다.”55)라고 하여 인간의 차이성, 더 나아가 사람과 짐승 간의 차이성도 욕망의 많고 적음에서 찾고 있다.

순자철학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적인 존재이다. 욕망의 특성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익을 좋아한 욕망에서 기인된 쟁탈성(爭奪性), 고운 얼굴과 목소리를 좋아한 욕망에서 기인된 음란성(淫亂性), 질투하고 증오하는 욕망에서 기인된 잔적성(殘賊性) 등이라고 할 수 있다.56)

순자는 「성악편」에서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고 그 선하게 된 것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하였다.”57)

순자철학 전체를 아울러 볼 때,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악하다고 단정하기에는 그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논거 역시 정합성이 부족하다. 욕망 그 자체가 반드시 악하다고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자철학의 목표가 욕망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치유하는 데 있으므로 인간을 기본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욕망의 주체로 파악한 것은 인간본성을 현상적인 자연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욕망을 감각본능의 현상적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54)『荀子』 性惡, “聖人之所以同於衆  其不異於衆者性也”.

55)『荀子』 正名, “欲之多寡  異類也”.

56)『荀子』 性惡, “人之性  生而有好利焉  順是故爭奪生  生而有疾惡焉  順是故殘賊生  生而有好聲色焉  順是故淫亂生”.

57)『荀子』 性惡, “人之性惡  其善者僞也”. 

 

(2) 마음

 

순자철학에서는 인간의 자연적 본질성을 본성으로 규정하고, 본성을 악의 래원으로 파악한다. 본성은 욕망과 그에 따른 질투와 증오심 등을 내용으로 하며, 그것이 발휘된 결과가 악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자철학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욕망을 전적으로 악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그 근거 자료나 논리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도 반드시 악한 것이라고 확정하기 보다는 악으로 흐를 수 있는 경향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순자철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다. 인간 본성의 현상적인 특성은 욕망과 욕망 충족을 위한 쟁탈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악의 요소가 더 강렬하게 표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자철학에서는 도덕질서가 확립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사법지화(師法之化)나 화성기위(化性起僞)가 강조되며, 그것은 인간본성을 악, 즉 부정적으로 파악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순자는 인간의 자연성인 본성과 인위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혀놓고 있다.

“인간은 본래의 본성을 따르고 본래의 정욕을 좇으면 반드시 쟁탈전이 발생하고 자연히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하게 되어 결국 흉포한 난동에 귀착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의한 교화와 예절이나 의리에 바탕한 교도를 실시해야 비로소 사양심이 생기고 법식과 사리에 부합하고 태평성세에 귀착하게 된다. 이로써 보건데, 인간의 본성은 악함이 분명하고 선하게 된 것은 인위의 덕분이다.”58)라고 한 것이다.

58)『荀子』 「性惡」, “然則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而歸 於暴故必將有師法之化 禮義之道 然後出於辭讓合於文理 而歸於治 用此觀之 然則人之性惡 明矣 其善者僞也”.

 

순자철학에서 성악은 인위의 절대조건이다.

 

“무릇 사람이 선해지고자 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59)

59)『荀子』 「性惡」, “凡人之欲爲善者 爲性惡也”.

 

인간은 본성만으로 인간이 될 수 없다. 인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며, 인간의 인간된 소이가 인위에 있다. 그러므로 인위는 인간의 존재 특성이 된다. 순자는 인간을 인위에 의하여 다른 존재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하여 순자는 무생물・초목・금수 이상의 본질성을 갖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인간에게는 기운도 있고 생명도 있고 지능도 있고 의로움도 있다. 그러므로 최고로 고귀한 존재이다.”60)

60)『荀子』 「王制」, “人有氣有生有知亦且有義   故最爲天下貴也”.

다른 존재와 비교할 때 인간은 의로움을 갖는 존재이다. 순자철학의 최대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인간의 존재 특성을 작위(僞)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고 있다.

 

배우면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것을 작위라고 한다.”61)

61)『荀子』 「性惡」, “可學而能 可事而成之 在人者 謂之僞”.

 

작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은 변별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변별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털이 나지 않는 동물이라는 특징이 아니라 분별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62)

62)『荀子』「非相」, “人之所以爲人者 以其有辨也 人之所以爲人者 非特以二足而無毛也 以其有辨也”.

 

변별능력은 판단능력이며 작위의 기본 능력이다. 인간은 이익과 불이익뿐만 아니라 호오나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힘쓰는 것은 소만 못하고 달리는 것은 말만 못한데 소와 말은 어째서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가? 그것은 곧 사람은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살 수 있기 때문이다.”63)

사회를 이루어 모여 사는 것이 작위의 궁극목표이다. 인간은 군집생활, 즉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적 존재이기 위한 필요조건이 도덕질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 존재인 것이다.64)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이나 도덕성은 선천적인 본성에서 기인된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인 작위에서 기인되는가? 하는 물음 이전에 이미 인간을 규정하는 존재 특성일 수밖에 없다. 순자는 사회의 존립을 위한 도덕적인 선의 실현을 후천적인 작위성에서 찾고, 인간의 또 하나의 존재 특성으로 스스로 노력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강조하게 된다.

순자는 이러한 가변성을 마음(心)의 능력으로 보면서 마음의 작위를 인위로 규정하고 있다.

 

63)『荀子』 王制, “力不若牛  走不若馬  而牛馬爲用  何也  曰人能群  彼不能群”.

64)『荀子』 王制, “人何以能群  曰分  分何以能行  曰義”. 

 

순자는 “길 위의 보통사람들도 우임금과 같이 될 수 있다.”65)라고 하면서

“우임금이 우임금으로서 존경받는 까닭은 그 어짊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짊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는 알 수 있는 것이고 행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길 위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어짊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 수 있는 자질이 있고, 모두 어짊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그들도 우임금과 같이 성인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66)

순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우임금과 같이 될 수가 있다고 하여 인간의 가변성을 말하면서, 인간은 모두가 어짊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 수 있는 자질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의로움과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을 사람이면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67)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의로움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68)라고 하였다. 순자는 인간에게 선의 실천가능성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의 성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손(錢遜)은 순자가 성선의한 측면을 인정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69)

 

65)『孟子』 性惡, “塗之人可以爲禹”.
66)『孟子』 性惡, “凡禹之所以爲禹者  以其爲仁義法正也  然則仁義法正有可知可能之理  然而塗之人也  皆有可以知仁義法正之質  皆有可以能仁義法正之具  然則其可以爲禹明矣”.
67)『孟子』大略, “義與利  人之所兩有也”.
68)『孟子』大略, “然而能使其欲利不克其好義也”.
69) 錢遜著, 백종석 역, 『선진유학』, 學古房, 2009, 279쪽 참조. 

 

순자는 선천적으로 자기의 주체성에 따라 자기를 결정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누구든 요임금 우임금이 될 수 있고, 걸왕이나 도척이 될 수도 있으며 공인과 목수가 될 수 있고 농사꾼이나 장사꾼이될 수도 있다. 이것은 형세와 마음가짐과 행동과 배움과 버릇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사람들이 태어날 때 가지게 되는 것이며 외부의 영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70)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인간에 있어서 자기결정의 주체성을 선천적인 성향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어찌 사람들의 성정(性情)이 본래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71)라고 하였다. 선하게 될 수도 있고 불선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시 본성의 성향으로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순자는 사람의 본성 속에 선하게 될 수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악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것이다.72)

그러나 순자는 인간의 현상적인 특성을 본성의 측면에서 악단(惡端)으로 파악했고 마음의 입장에서는 총명한 재능, 즉 인지능력으로만 파악하면서 적선(積善)과 성인교육을 강조하였다.

“길거리의 백성이라도 선을 쌓아 완전함을 다하게 되면 그를 성인이라 한다.”73)

이것은 인간의 총명한 재능을 설명한 말이다. 순자철학에서는 재능, 즉 인지능력이 아직 선일 수는 없다. 총명한 재능을 발휘하여 판단하고 선택한 결과 도달된 인의법정의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선이 된다. 그렇다고 인의법정의 선과 선을 판단하고 선택해서 실천할 수 있는 인지능력은 결코 무관한 것 일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처리에 있어 순자는 성실성이 없어 보인다.

 

순자는 성인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학문과 습속의 영향을 들어 말하고 있다.

“푸른 물감은 쪽풀에서 얻어지지만 쪽풀보다 더 파랗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지지만 물보다 차다.”74)

스승의 교육을 강조한 말이다.
“쑥대가 삼대밭 속에서 자라면 부축해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75)

이것은 환경과 습속의 영향을 강조한 말이다. 쪽풀이나 물속에는 본래부터 푸른색과 차가움의 근원적인 요소가 갖추어져 있고, 삼대의 영향을 받은 쑥대는 결코 삼대가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순자가 “노력으로 습속을 바로 잡아간다면 본성을 교화시킬 수 있다.”76)고 하였고, 또 “성인은 사람들의 본성을 교화시켜 작위를 일으키고 작위를 일으켜 예의를 만들어내고, 예의를 만들어내어 법도를 제정한다.”77)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본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고 악의 성향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화성기위(化性起僞)를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정욕이 있으나 마음도 있으니 욕망은 꼭 제거할 필요는 없고 단지 마음으로써 절제하면 된다. 마음은 사려하고(慮) 인식할(知) 수 있으므로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78)

순자는 화성기위의 근거가 되는 마음을 밝히는데 집중하고 있다.

 

70)『荀子』  榮辱, “可以爲堯禹  可以爲桀跖  可以爲工匠  可以爲農賈  在勢注錯習俗之所積耳  是又人之所生而有也  是無待而然者也”.

71)『荀子』  榮辱, “豈非人之情  固可與如此  可與如彼也哉”.
72) 錢遜著, 백종석 역, 『선진유학』, 學古房, 2009, 280쪽 참조.
73)『荀子』  儒效, “塗之人百姓  積善而全盡  謂之聖人”.

74) 『荀子』 勸學,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75) 『荀子』 勸學, “蓬生麻中不扶而直”.
76) 『荀子』 儒效, “注錯習俗所以化性也”.

77) 『荀子』 性惡, “聖人化性起僞  僞起而生禮義  禮義生而制法度”.
78) 풍우란 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 상, 까치, 1997, 467쪽 참조. 

 

순자는 인간의 마음을 감정이나 감관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의식기능의 한 가지로 규정하면서 특별히 천군(天君)이라고 하여 감관과 구별하고 있다.

 

“마음은 가운데 텅 빈 곳을 차지하고 귀・눈・코・입・육체의 오관(五官)을 다스린다. 이것을 천군이라고 한다.”

79)  79)『荀子』 天論, “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

천군은 인간의 모든 의식기관을 관리 통솔하는 임금으로 주체나 주인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순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음은 신체의 지배자이고 정신의 주관자로서 신체에 명령을 내리기만 하고 명령을 받지 않는다.”80)

80) 『荀子』 解蔽, “心者 形之君也 而神之主 出令而無所受令”.

마음은 명령을 내리기만 하는 신체의 지배자이고 정신의 주관자이다. 그래서 마음은 자유의지를 갖는 절대권자가 된다.

 

“마음은 스스로 제한하고 스스로 부리고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멈추는 능력을 갖고 있다.”81)

81) 『荀子』 解蔽, “自禁也 自使也 自奪也 自取也 自行也 自止也”.

순자철학에서의 마음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식심의 자유의지를 갖는 의식기능이다.82)

82) 蔡仁厚著, 천병돈 역,『 순자철학』, 예문서원, 2002, 96쪽 참조. 

 

순자는 마음의 인지능력을 징지(徵知)로 설명하고 있다.

 

“마음에 징지(徵知:인지능력)가 있다. 징지는 귀를 통해 소리를 인지하고 눈을 통해 형체를 인지한다. 그러나 징지는 반드시 오관이 사물의 여러 가지 종류들을 주관해 정리하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알 수 있다.”83)

83)『荀子』正名, “心有徵知  徵知則緣目而知形可也  緣耳而知聲可也  然而徵知必將待  天官之當簿其類然後可也”.

 

징지는 감각내용을 인지하는 기능이다. 감각의 내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해명(說)・연고(故)・기쁨・노함・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망은 마음으로 그 차이를 구별한다.”84)

84)『荀子』 正名, “說故喜怒哀樂愛惡欲以心異”.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은 감정에 속한다. 설과 고는 이성의 사유에 속한다. 설은 감각지각의 여러 가지 재료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 고는 각종 현상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감성적인 재료를 얻은 이후의 심리적인 활동이고 마음의 기능에 속한다.85)

순자철학에서의 징지, 즉 인지능력은 사려와 인위의 개념과 통하고 있다.

 

“성의 호・오・희・노・애・락을 정이라고 한다. 정이 이러하고 마음이 선택 판단하는데 이것을 사려라고 한다. 마음이 사려한 후에 (오관의) 기능이 활동하는 것을 작위라고 한다. 사려가 쌓이고 기능이 익혀진 후에 이루어진 것을 인위(僞)라고 한다.”86)

86)『荀子』正名, “性之好惡喜怒哀樂謂之  情然而心爲之擇謂之  心慮而能爲之動謂之  慮積焉能習焉而後成謂之僞”.

 

오관의 활동은 마음이 감정을 선택 판단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오관의 기능은 반드시 어느 정도의 인위성(의식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僞)는 초보적인 것으로서 예의(禮義)에 부합하는 위가 아니다. 오관 각각의 기능은 독립성과 비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비독립성 측면에서 오관의 기능은 반드시 마음의 징지능력에 의지해야 한다.87)

칸트의 인식이론이 연상된다. 순자철학에서 인위는 사려에서 발단하며, 사려는 마음이 감각내용인 감정을 선택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인위, 곧 마음의 기능에서 발생된다.

 

85) 錢遜著, 백종석 역, 『선진유학』, 學古房, 2009, 315쪽 참조.

87) 천병돈, 인간의 자연성과 사회성 , 『동서철학연구』 제26호, 178쪽 참조.

  

마음에는 절제의 기능이 있다.

 

“욕망 자체는 충족의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는 맹목적인 것이지만 욕망의 추구자는 타당한 욕망만을 추구한다. 욕망이 그 충족의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연으로부터 품부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추구자가 타당한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그가 마음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천성으로 존재하는 욕망을 마음이 절제하는 것이다.”88)

88)『荀子』正名, “欲不待可得  而求者從所可  欲不待可得  所受乎天也  求者從所可受乎心也  天性有欲心爲之制節”. 


마음은 저지하고 부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넘치지만 행동이 미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저지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내키지 않지만 행동으로 옮긴 것은 마음이 시키기 때문이다.”89)

89) 『荀子』正名, “欲過之而動不及 心止之也 欲不及而動過之 心使之也”.

 

마음은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욕망은 비록 모두 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추구는 사려있는 자라면 조절할 수 있다.”90) 90) 『荀子』正名, “欲雖不可去 所求不得 慮者欲節求也”.

 

마음은 판단의 기능을 갖고 있다.

“세상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은 마음의 판단에 달려있는 것이지 감정에 딸린 욕망과는 상관없는 것이다.”91) 91) 『荀子』正名, “治亂在於心之所可 亡於情之所欲”..

 

마음은 인식의 주체이다.
“마음은 정도(正道)의 주재자다.”92)

“도는 고금의 올바른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다.”93)

92) 『荀子』正名, “心也者 道之工宰”.
93) 『荀子』正名, “道者 古今之正權也”.

 

인간에게는 욕망도 있고 마음도 있다. 마음은 사려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또 판단하고 절제하고 저지하며 조절하는 기능이 있으므로 욕망을 잘 다스려 도에 맞도록 교정할 수 있다. 순자철학에서 도는 예의문리(禮義文理)와 인의법정(仁義法正)이다.

"도는 하늘의 도도 아니고 땅의 도도 아니고 인간의 도이기 때문이다."94)

94) 『荀子』儒效, “道者  非天之道  非地之道  人之所以道也”. 

 

도의 인식능력은 마음이다. 순자는 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심(虛)과 전일(壹)과 고요(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마음이 이미 저장된 기억 때문에 장차 받아들일 것을 해치지 않는 것을 허심이라고 한다.

마음속에 이미 동시에 함께 아는 대립적인 앎이 있는데 저 한가지로 이 한 가지를 해치지 않는 것을 전일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잡생각 때문에 분별력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을 평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허심・전일・평정의 마음상태를 대청명(大淸明)이라고 한다.”95)

95)『荀子』解蔽,

“人生而有知  知而有志  志也者臧也  然而有所謂虛  不以已臧害所將受謂之 

 心生有知  知而有異  異也者  同時兼知之  同時兼知之  兩也  然而有所謂一  不以夫一害  此一謂之 

不以夢劇亂知謂之靜 

虛壹靜謂之大淸明”.

 

이러한 대청명의 마음으로 도, 즉 인의법정을 인식하고 판단하여 본성을 변화시키고 인위를 일으켜(化性起僞) 선을 실현함으로서 유익한 사회가 이루어진다. 본성이 인의도덕으로 변화되는 것은 인의도덕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의도덕은 인간의 제2의 천성이 된다.96)

 

순자는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본성이다.”9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익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이 곧 사회구성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96) 풍우란 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 까치, 1999, 471쪽 참조.

97)『荀子』非相, “好利惡害  是人之所生而有也”.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예절과 의리는 필수조건이다. 예절과 의리가 세워져 있지 않으면 무질서요 혼란이며, 무질서와 혼란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유해한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것 자체가 이익된 삶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를 떠날 수가 없는데 사회에 분별이 없으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혼란이 생기고, 혼란하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만물을 제압할 수 없다. 따라서 가옥을 짓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 즉 잠시라도 예절과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98)

98)『荀子』王制, “人生而不能無群 群而無分則爭 爭則亂 亂則離 離則弱 弱則不能勝物 故官室不可得而居 不可少頃舍禮義之謂也”.

 

예의 제정자는 성왕이다. 순자는 “예에는 성왕이 가장 중요하다.”99)라고 하였다.

순자는 성왕이 예를 제정하게 된 동기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면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추구할 때 일정한 법도와 한계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분쟁이 생긴다. 분쟁하면 혼란되고 혼란하면 궁해지는바 선왕(先王)은 이러한 무질서를 우려하여 예절과 의리(禮義)를 제정하였다.”100)

99)『荀子』非相, “禮莫大於聖王”.

100)『荀子』禮論,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有欲 欲而不得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則不能不爭 爭則亂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 

 

화성기위(化性起僞)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예의법도를 일으키는 것을 내용으로 한 순자철학의 핵심이다. 위(僞)는 예의에 부합되는 혹은 예의를 포함한 행위이며, 또한 성(性) 즉 욕망이 사회 안에서 적절하게 드러난 활동형식이다.101) 그러므로 자연성인 본성과 인위성인 위(僞)는 상대적인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반면 위는 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의 특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희・로・애・락은 본성이고, 이 본성이 발하여 도에 부합되는 것이 위이다.102)

 

순자는 “성은 자연적인 재질이고 위는 예법의 조리가 융성한 것이다. 성이 없으면 위를 더할 데가 없고 위가 없으면 성이 아름다워질 수가 없다. 성과 위가 결합한 후에 성인의 이름이 이루어지고 천하의 통일이 성취된다.…… 성과 위가 결합하여 천하가 다스려진다.”103)

 

성이 동물적인 본성이라면 위는 인간적인 특성이다. 동물적 본성을 인간적 특성으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존재특성이 인위이다. 그러므로 본성과 인위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위를 반자연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인간이 본성, 즉 욕망에 머물러버린다면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인간적 자질과 특성이 곧 위(僞), 즉 인위(人爲)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순자철학에서는 선의 요소를 인간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인의법도를 성왕의 제정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인의법도는 인위의 결과물일 뿐이지 인위성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순자가 말하고 있는 바, ‘심이 사려하여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인위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의법정을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질과 도구를 갖추고 있다.’, ‘길거리의 백성이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 등의 언설들을 보면, 선의 요소가 인간의 선천적인 자연본질과 전혀 무관할 수가 있을까? 하는 회의와 물음 앞에서 또 한 번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파악하고, 마음을 선택과 판단능력, 즉 인지능력으로 한정한 것은 자연과학적 사유에 따라 본성이나 마음이 현상으로 표출된 것에 관심을 집중했던 현상적 자연관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닌가 한다.

 

101)『荀子』性惡, “聖人化性而起僞  僞起而生禮義  禮義生而制法度  然則禮義法度者  是聖人之所生也”.

102) 천명돈, 인간의 자연성과 사회성 , 『동서철학연구』 제26호, 184쪽.

103)『荀子』禮論, “性者本始材朴  僞者文理隆盛也  無性則僞之無所加  無僞則性不能自美  性僞合然後成聖人之名…… 性僞合而天下治”. 

 

4. 결론 : 인간의 본성은 악한가?

 

진례(陳澧)는 순자가 말한 길거리의 사람들이 다 우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인 즉 요순을 우로 바꿨을 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또 하나의 설을 수립할 필요가 있을까?104) 라고 하여 순자의 성악설을 맹자의 성선설과 내용상 일치한 것으로 평가하여 성악설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풍우란은 “그러나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 속에 선단(善端)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악단(惡端)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인성 속에 선단이 없을지라도 인간은 상당히 총명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이 재능이 있음으로 해서 가령 부자간의 도리나 군신간의 법도 등을 알려주면 배워서 행할 수 있다.”105)라고 하여 순자가 인간의 직접 선한 본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선해질 수 있는 지능을 인정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약간 우회해서 성악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노사광은 “순자의 가치철학은 주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정신은 객관적인 질서위에 내려와 있다. 그러나 주체의 뜻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언급된 객관화 역시 근거가 없다.”106)라고 말하고 또 “순자는 보통사람(塗之人)도 모두 일종의 바탕(質)과 재능(具)을 가지고 있어서 인의법정을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바탕과 재능은 성품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악인가 선인가? 어디에서 생겨나온 것인가?

만약 이 바탕과 재능을 심령(心靈)이 본래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바탕과 재능을 심령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본디부터 성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악의 가르침을 유지하겠는가?”107)라고 묻고 있다.

 

104) 東塾讀書記卷3, 2쪽.

105) 풍우란 저, 박성규 옮김, 『중국철학사』 상, 까치, 1999, 463쪽.
106) 勞思光著, 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古代篇, 探究堂, 1986, 330쪽.
107) 勞思光著, 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古代篇, 探究堂, 1986, 335쪽. 

 

벤자민 슈월츠는 “순자의 성악설이 순자사상의 중심이라는 설명에 대하여 과거와 현대의 중국 및 다른 곳에서 부정하는 학자들이 존재해왔다. 심지어 「성악」편이 후대의 첨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 왔다. 본성이 악하다는 명제가 순자의 인간관을 요약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108)라고 하였다.

홍원식은 “순자는 타고난 본성을 그냥 내버려두면 끝내 잃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한다. 순자의 이 말에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은 도출되지도 논증되지도 않는다.”라고 하면서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타고난 그대로의 질박함에서 떠나지 않는 상태를 아름답고 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맹자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109)고 비교적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종성・이해영은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기 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능동성인 위(僞)와 그 결과물로서의 예의(禮義)의 의의를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110)

이 이외의 많은 학자들이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여러 가지의 논란들을 해오고 있다.이러한 논란의 소지는 순자철학이 본래부터 안고 있는 이론적 특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본성의 기본적인 특성을 욕망으로 파악한다. 욕망 그 자체는 아직 악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욕망이 끼친 결과가 악의 경우일 수는 있다. 그리고 선에 대한 욕망도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으며 또 존재할 수 있다. 다만 현상론적인 안목으로 보면 본성의 강렬성은 본능이며, 본능의 주된 특성은 이기적인 성질이고, 이기적인 것의 충돌은 쟁탈과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마음을 인지능력으로 한정하고 있다.
인지능력 그 자체가 선은 아니다. 밖에 있는 선의 요소를 인지하고 선택하며 판단하고 실천하는 재능이다. 마음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이러한 재능은 선의 요소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다. 다만 마음의 기능이 일차적이고 또렷하게 현상으로 드러난 것은 인지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자의 철학사상은 자연과학적 사유와 현상적 자연관의 기반위에서 형성된 철학으로 이해되어진다.

 

108) 벤자민 슈월츠 저, 나성 역, 『중국고대사상의 세계』, 살림, 1996, 404쪽.

109) 중국철학연구회,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 ,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1994, 60쪽.
110) 이종성, 「순자철학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 , 이해영, 「순자의 인간 이해」 .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