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규범의 공공성에 관한 법가의 인식(1): *1)
한비자(韓非子)의 ‘인·의’(仁·義) 비판을 중심으로
이 승 환(고려대)
<요약문>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인과 의는 보편적인 의의를 갖는 도덕규범이다. 그러나 한비자는 정치영역에서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을 거부하고 오직 법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했다. 본고에서는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이유를 여덟가지로 나누어고찰해 보았다. 그가 인의를 배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신하에 의한 ‘인의’의 시행은 군주의 권위를 손상케 한다.
② 공이 없는 자에게 ‘인의’를 베풀게 되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
③ ‘인의’는 사회적 이익관계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규범이다.
④ 백성들의 인성은 비열하기 때문에 ‘인의’로 교화할 수 없다.
⑤ ‘인의’라는 사적 도덕은 법 제도의 공공성을 파괴한다.
⑥ 효율적인 지배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인의’보다 중형(重刑)이 더욱 효율적이다.
⑦ 공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법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⑧ 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인의’를 통한 도덕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
주제: 철학/동양철학/중국철학
검색어: 인의, 덕치, 법, 중형, 한비자,
* 이 논문은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지원사업(KRF - 2002 - 074 - AM1031)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공동연구의 한 부분임.
1. 서론: 인의(仁義)는 '법치’와 양립할 수 없는가?
‘사회규범’이란 인간이 질서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준수하도록 기대되는 행위 양식이나 기준을 말한다. 만일 이와 같은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사회질서는 무너지고 안정된 생활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규범은 사회 안에서 (소극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행위의 범위를 규정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행위의 양식을 지시하는 규칙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사회규범은 성립의 근거 혹은 발생의 기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적 관행과 문화적 전통에서 유래한 규범으로서 ‘예’(禮)와 같은 관습적 규범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인간의 본성이나 실천적 이성에서 도출된 규범으로서 ‘인의’(仁義)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들 수 있다. 셋째는 권력자의 의지나 지배계급의 이익 또는 기타의 공리적 목적을 위해 국가에서 제정한 규범으로서 ‘법’과 같은 강제규범이 이에 속한다.
한비자(韓非子: B.C. 280-233)가 살았던 전국시대의 사회규범 역시 이러한 세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즉 서주(西周) 이래 전해 내려오던 문화적 관습과 사회적 관행에 입각한 ‘예’(禮), 인간의 본성과 실천적 이성에서 도출된 ‘도덕’(仁義), 그리고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행위 지침으로 마련된 ‘법’(法)1)이 그것이다. 전국 시대에는 철기의 보급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와 소유욕의 확대로 인하여 제후국들은 주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이행을 서두르고, 각국내에서도 기존의 지배질서에 도전하여 새로운 계급질서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주 이래 국제 관계와 국내 질서를 규정하던 ‘예’는 규제력을 상실하고, 각국간에는 토지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국제 관계와 국내 영역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극심한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가(儒家)와 법가(法家)는 각기 다른 규범적 처방을 제시하였다. 유가와 법가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의 차이와 당시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결국 실천적 처방에 있어서도 ‘덕치’와 ‘법치’라는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1) 고대 중국에서 法은 律이나 刑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자의 덕치사상을 이어받은 맹자는 당시의 혼란이 지배계급의 탐욕과 포학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도덕성의 자각과 덕성의 함양을 통하여 ‘인한 정치’(仁政)를 실행하도록 촉구하였다.
반면에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는 당시의 혼란이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힘’들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엄격한 법의 적용과 무거운 형벌을 통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확보하는 길만이 혼란에 대처하는 방책이라고 보았다.
물론 유가학파가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을 앞세웠다고 해서 ‘법’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자는 너그러움(寬)과 사나움(猛) 즉 덕(德)과 형(刑)을 조화롭게 운용할 것을 주장하였고2), 맹자 역시 ‘인의’라는 도덕규범과 ‘법’이라는 강제 규범이 동시에 필요함을 역설 하였다.3)
유가 사상가들은 혼란의 극복을 위해 ‘덕’과 ‘법’의 필요성을 다 같이 긍정하되, 이 중 ‘덕’을 일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법’을 보조적인 것으로 간주했다고 할 수 있다.4)
2) 『春秋左傳』昭公二十年. “仲尼曰, 善哉! 政寬則民慢, 慢則糾之以猛. 猛則民殘, 殘則施之以寬. 寬以濟猛, 猛以濟寬, 政是以和.”
3) 『孟子』離婁上. “徒善不能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
4) 이와 관련해서는 졸고,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고려대출판부, 1998), 169-199쪽 참조.
유가가 ‘덕’을 주로 하고 ‘법’을 보조적 수단으로 삼는 ‘덕주형보’(德主刑補)의 정치이념을 제시한 반면, 한비자는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로지 ‘법’만이 공적 영역에서 관철되어야 할 유일한 규범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한비자의 정치사상에서 흥미있는 것은, ‘법치’의 확립을 위해서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은 반드시 배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 유교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는 ‘인자함’(仁)과 ‘의로움’(義)이라고 하면 보편적인 도덕가치로 승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인들 가운데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이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고 강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는 왜 ‘인의’를 배격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는 왜 ‘인의’ 가 ‘법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한비자는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이 ‘법치’의 확립에 있어서 어떠한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것일까? 과연 ‘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은 법치의 확립을 위해 배격되어야만 할 사항인가?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일은 유가와 법가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아가서는 유교적 가치관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한국사회의 규범문화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보기 위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주리라 생각한다.
2.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여덟 가지 이유
1) `신하에 의한 ‘인의’의 시행은 군주의 권위를 손상케 한다
‘인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한비자의 견해를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우리가 방법론적으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한비자가 배격하고자 하는 ‘인의’는 과연 누구의 ‘인의’인가?”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비자는 군주에 의한 ‘인의의 정치’(덕치)를 배격하고자 했는가? 아니면 그는 신하의 ‘인의’를 배격하고자 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백성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인의’를 통털어 배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비자』전편을 통 털어, 한비자가 가장 강력하게 배격하고자 하는 ‘인의’는 신하에 의해 시행되는 ‘인의’이다. 신하에 의해 ‘인의’가 시행될 경우, 군주의 통치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저 오늘에 이르러 작위나 봉록을 경시하고 나라를 쉽게 버리고 떠나 마음에 드는 군주를 골라서 벼슬하려는 자를 저는 ‘곧은 사람’(廉)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거짓 주장을 내세워 법을 어겨가면서 군주에게 대들어 강력하게 간언하는 자를 저는 ‘충성스런 사람’(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익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명성을 얻으려는 자를 저는 ‘인자한 사람’(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덕목들은 난세에나 통하는 이론으로, 선왕의 법으로 물리쳐야 할 것들입니다.
선왕의 법에 이르기를 “신하가 위엄을 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이익을 꾀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저 왕의 지시대로 따를 뿐이다. 호감을 표시해서도 안 되고 반감을 표해서도 안 된다. 그저 왕의 길을 따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세상이 잘 다스려졌을 때의 사람들은 공법(公法)을 받들고 사적인 술수(私術)를 버리고서 마음과 행동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군주의 명령만을 기다렸습니다.5) "
5)『韓非子』「有度」.
“今夫輕爵祿, 易去亡, 以擇其主, 臣不謂廉。
詐說逆法, 倍主强諫, 臣不謂忠.
行惠施利, 收下爲名, 臣不謂仁.
離俗隱居, 而以非上, 臣不謂義. 外使諸侯, 內耗其國, 伺其危險之陂, 以恐其主曰; 交非我不親, 怨非我不解. 而主乃信之, 國聽之. 卑主之名以顯其身, 毁國之厚以利其家, 臣不謂智.
此數物者, 險世之說也, 而先王之法 所簡也.
先王之法曰: 臣毋或作威, 毋或作利, 從王之指; 毋或作惡, 從王之路.
古者世治之民, 奉公法, 廢私術, 專意一行, 具以待任.”
전통 동양사회에서 염치(廉) · 충성(忠) · 인자함(仁) 등의 덕목은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권장되어온 덕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비자는 이러한 덕목들을 일거에 배격하고 있다. 그가 이러한 덕목을 부정하는 이유는, 이러한 덕목이 신하의 손에 의해 실행될 경우 오히려 군주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공법의 시행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하가 곧음(廉)을 지킨다는 이유로 군주를 버리고 떠나버리거나, 충간(忠諫)의 명목을 내세워 군주의 의지에 역행하는 언행을 하게 된다면, 이는 군주의 권위를 훼손하고 통치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 것이다. 또한 신하된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명성을 얻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세력을 늘려나가게 되면, 이는 결국 군주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는 신하가 베푸는 ‘인의’는 공법(公法)에 위배되는 ‘사사로운 술수’(私術)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한비자는 신하가 ‘인’을 베풀게 되면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게 된다는 예로, 춘추시대 제(齊) 간공(簡公)의 신하였던 전상(田常)을 예로 든다.
전상은 간공에게 청하여 신하들에게 작위와 봉록을 나누어주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도량형의 크기를 표준치보다 늘려서 곡식을 넉넉히 나누어주게 하였다. 전상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제 간공 4년(B.C. 481) 서주(舒州) 땅에서 간공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하였다.6)
한비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여, 개인적으로 덕을 베푸는 신하를 ‘여덟가지 간악한 신하’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신하된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는 간악한 행위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6) 『韓非子』二柄편과 外儲說右上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左傳』哀公14년조와『史記』12諸侯年表, 齊太公世家, 田齊世家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하된 자가 공공의 재화를 흩뿌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자그마한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따르게 하며, 조정이나 민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칭송하도록 하여, 군주를 가로막고 자기의 야욕을 이루는 자를 민맹(民萌)이라 한다.7)"
7)『韓非子』「八姦」. “爲人臣者散公財以說民人, 行小惠以取百姓, 使朝廷巿井皆勸譽已, 以塞其主而成其所欲, 此之謂民萌.”
여기서 한비자는, 신하된 자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은 ‘공공의 재화’를 유용하는 일이며, 백성들의 환심을 얻어 자기 야욕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은혜를 베풀거나(포상권) 형벌을 내리는 행위(형벌권)는 전적으로 군주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덕(德)을 베푼다고 국가의 재물을 방출하거나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일은 반드시 군주의 명을 통해야 하며, 신하가 사사로이 덕을 베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8)
신하는 개인적인 도덕판단에 의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법에 규정된 한계 내에서만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한비자는 주도主道편9)에서 군주의 권위를 해치는 다섯 가지 장애요인을 거론하면서, 그 중 하나로 “신하가 ‘의’(義)를 행하는 일”을 들고 있다. 여기서 ‘의를 행한다’는 말은 신하가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입각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형벌을 시행하는 일을 말한다.
한비자는 신하가 자신의 ‘도덕판단’(義)에 의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행위를 ‘사의’(私義)라고 부른다. ‘사의’란 ‘사사로운 도덕판단’ 혹은 ‘자의적인 도덕판단’이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는 신하의 ‘자의적인 도덕판단’(私義)은 결국 군주의 고유권한인 상벌권을 침해하게 되고, 이는 결국 군주의 권위와 통제력을 상실하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신하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도덕판단을 그치게 하고 오로지 규정된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직무를 수행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8) 『韓非子』八姦. “其於德施也, 縱禁財, 發墳倉, 利於民者, 必出於君, 不使人臣私其德.”
9) 1) 신하가 군주의 이목을 닫아 버리는 것(臣閉其主曰壅制),
2) 신하가 나라의 재정을 장악하는 것(臣制財利曰壅),
3) 신하가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臣擅行令曰壅),
4) 신하가 제멋대로 상벌권을 행사하는 것(臣得行義曰壅),
5) 신하가 사사로이 작당하는 것(臣得樹人曰壅)이 그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신하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법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고, 또 사사로운 은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 들여서 베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행동이 법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10)"
10)『韓非子』「有度」. “明主使其群臣不遊意於法之外, 不爲惠於法之內, 動無非法.”
2) 공이 없는 자에게 인애(仁愛)를 베푸는 일은 사회적 신뢰를 훼손시킨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주된 이유는 신하가 개인적으로 ‘인’을 베풀게 되면 군주의 권위에 손상을 가져온다는 점 때문이었지만, 그는 군주가 직접 백성들에게 ‘인’을 베푸는 일에도 반대한다. 군주가 ‘인’을 쉽게 베푼다면,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게 되고 죄지은 자가 사면받게 되어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비자가 공자의 ‘인정’(仁政) 이념을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공자는 섭공(葉公) 자고(子高)가 정치의 비결을 물어올 때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정치의 비결은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을 다가오게 하는데 있다.”11)
그러나 한비자에 의하면 공자의 이러한 대답은 나라를 망치기에 딱 좋은 말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면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게 되고 죄지은 자가 사면받게 되어서, 장차 법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12)
한비자는 자기 당시에 유가학파에 의해 주장되던 인정(仁政)의 이념을 이렇게 비판한다.
11) 『論語』子路. “葉公問政, 子曰: 近者悅, 遠者來.”
12) 『韓非子』難三. “惠之爲政, 無功者受賞, 則有罪者免, 此法之所以敗也.”
"세상의 학자들은 군주에게 자기 의견을 말할 때, “권력의 위세를 사용하여 간사(姦奢)한 신하를 혼내주라”고 말하지 많고, 모두가 인의(仁義) 라든지 은혜(惠)나 사랑(愛)을 강조하곤 한다.
또한 세상의 군주들은 ‘인의’라는 명분에 이끌려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심하면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죽게 되며, 그만 못할 경우에는 영토가 깎이고 군주의 권위가 낮아진다.
······빈곤한 자에게 물질적 혜택을 베풀어 주는 일이 세상에서 말하는 ‘인의’이고, 백성을 가엽게 여겨 차마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은혜와 사랑이다.
그런데 막상 빈곤한 자에게 베풀어주게 되면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는 셈이 되고, (동정심 때문에) 차마 처벌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난폭한 일이 끊이지 않게 된다.
나라에 공이 없이 상받는 자가 있게 되면 백성은 적과 맞서 목을 베려고 힘쓰지 않게 되며, 안으로는 농사짓는 일도 부지런히 하지 않게 될 것이다.13)"
13) 『韓非子』姦劫弑臣. “世之學者說人主, 不曰乘威嚴之勢, 以困姦之臣, 而皆曰仁義惠愛而已矣.
世主美仁義之名而不察其實, 是以大者國亡身死, 小者地削主卑
····· 夫施與貧困者, 此世之所謂仁義; 哀憐百姓, 不忍誅罰者, 此世之所謂惠愛也.
夫有施與貧困, 則無功者得賞; 不妨誅罰, 則暴亂者不止.
國有無功得賞者, 則民不外務當敵斬首, 內不急力田疾作······.”
한비자에 의하면, 군주가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때는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공적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응하는 공적이 없는데도 은혜를 베푸는 일은 결국 ‘신상필벌’이라는 사회적 신뢰의 훼손을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군주가 ‘인’을 쉽게 베풀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위(魏) 혜왕(惠王)14)과 그의 신하인 복피(卜皮)의 대화를 예로 든다.
위 혜왕이 복피에게 “자네가 들은 나의 평판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복피가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로는 왕께서 인자롭고 은혜롭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장차 성과가 어느 정도에 이르겠는가?” 대답하기를 “왕의 성과는 망하는데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인자하고 은혜로운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선을 행하여 망한다 함은 무슨 까닭인가?”
복피가 대답하기를 “대저 인자하다는 것은 동정하는 마음씨이며, 은혜라는 것은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씨입니다. 그러나 동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측은히 여기게 되어 잘못이 있어도 처벌하지 않게 되고,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면 공이 없어도 상을 주게 됩니다. 잘못이 있는데도 죄를 받지 않고, 공이 없는데도 상을 받는다면 망한다 하여도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15)
이로 볼 때, 한비자가 군주의 ‘인’이나 ‘덕’에 반대했던 이유는 ‘신상필벌’의 원칙에 의하여 사회적 신뢰를 엄격하게 확립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14) 魏惠王은 곧 梁惠王을 가리킨다.
15)『韓非子』內儲說上.
“魏惠王謂卜皮曰: 子聞寡人之聲聞亦何如焉? 對曰: 臣聞王之慈惠也.
王欣然喜曰: 然則功且安至? 對曰: 王之功至於亡.
王曰: 慈惠, 行善也. 行之而亡, 何也?
卜皮對曰: 夫慈者不忍, 而惠者好與也. 不忍則不誅有過, 好予則不待有功而賞. 有過不罪, 無功受賞, 雖亡, 不亦可乎?”
3) 인(仁)과 애(愛)는 이득을 얻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다.
유학에서 ‘인’이나 ‘애’는 공리적 조건을 전제로 하지 않는 본래적 가치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치는 특히 맹자의 ‘유자입정’(孺子入井)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물질적 보상이나 세속적 명예를 전제로 하지 않는 순수한 도덕의지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의 ‘인’이나 ‘애’에 대한 인식은 이와 다르다.
한비자는 ‘인’을 공을 이룬 사람에게 제공하는 상(賞)의 의미로 파악하고, ‘애’를 조건부적 보답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인’이나 ‘애’는 그 자체로 추구할만한 본래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적에 대한 대가’ 또는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한비자는 ‘인’이나 ‘애’가 물질적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에 말을 잘 다루던 왕량(王良)16)이 말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유는 말을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월(越) 왕 구천(勾踐)이 백성을 사랑했던 이유도 결국은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또한 의원이 다른 사람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나쁜 피를 빨아내는 것도 환자를 아끼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가마를 만드는 사람은 가마를 만들면서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사람은 관을 짜면서 사람들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도, 가마를 만드는 사람이 어질고 관 짜는 사람이 잔혹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존귀해지지 않으면 가마가 팔리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17)
16) 춘추시대 趙襄子를 섬겼던 말 잘 다루는 사람.
17)『韓非子』備內』.
“故王良愛馬, 越王勾踐愛人, 爲戰與馳. 醫善吮人之傷, 含人之血, 非骨肉之親也, 利所加也.
故輿人成輿, 則欲人之富貴; 匠人成棺, 則欲人之夭死也. 非輿人仁而匠人賊也,
人不貴, 則輿不售; 人不死, 則棺不買. 情非憎人也, 利在人之死也.”
이로 볼 때, 한비자가 파악하는 ‘인’이나 ‘애’는 인간 내면의 ‘측은지심’에서 발현되는 순수한 도덕적 감정이 아니다. 한비자의 ‘인’과 ‘애’는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얼룩진 ‘이익사회’에서 통용되는 ‘물질적 대가’ 혹은 ‘조건부적 보답’에 지나지 않는다. 유학에서는 정치를 가족윤리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백성 돌보기를 아기 돌보듯 하라”(若保赤子)거나, “백성 보기를 아픈 사람 보듯 하라”(視民如傷)라는 식의 도덕적 권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소유욕의 확산으로 국가들 간에 겸병전이 일상화되어 있던 한비자의 시대에 유가적인 도덕정치의 이념은 너무도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바탕하여, 한비자는 유가의 인정(仁政) 이념을 이렇게 비판한다.
"유가와 묵가는 모두 말하기를 “선왕은 천하를 두루 사랑했으므로 백성보기를 부모가 자식보듯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그들은 말하기를 “법관이 형을 집행하면 군주가 (그를 측은히 여겨)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고, 사형 보고를 들으면 그 때문에 군주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도대체 법을 가지고 형을 집행하면서 군주가 그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이것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는 할 수 없다.
대저 눈물을 흘리며 형벌을 원치 않는 것은 ‘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이다. 선왕이 법을 앞세우고 눈물에 따르지 않았으니, 인을 정치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은 또한 분명한 일이다.18)"
18)『韓非子』五蠹.
“今儒·墨皆稱先王兼愛天下, 則視民如父母何以明其然也?
曰: 司寇行刑, 君爲之不擧樂; 聞死刑之報, 君爲流涕.
·····此所擧先王也. 夫以君臣爲如父子則必治, 推是言之, 是無亂父子也. 人之情性莫先於父母, 父母皆見愛而未必治也, 君雖厚愛, 奚遽不亂? 今先王之愛民, 不過父母之愛子, 子未必不亂也. 則民奚遽治哉?
·····且夫以法行刑, 而君爲之流涕, 此以效仁, 非以爲治也.
夫垂泣不欲刑者, 仁也; 然而不可不刑者,法也. 先王勝其法, 不聽其泣, 則仁之不可以爲治亦明矣.”
한비자가 유가적 인정(仁政)을 거부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인’은 가족과 같은 사적 관계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규범이지, 군/신과 같은 이익관계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비현실적 이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 부자지간과 같은 정은 없다. 그런데 의(義)와 같은 도덕규범을 가지고 신하를 다스리려한다면 그 관계에 반드시 틈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아들을 낳으면 서로 축하하지만, 딸을 낳으면 죽여버린다.
이들이 다같이 부모의 품안에서 나왔지만 아들은 축하받고 딸은 죽여버리는 것은, 노후의 편의를 생각하여 먼 이득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오히려 계산하는 마음으로 상대한다. 그런데 하물며 부자지간의 정도 없는 (군신)관계에 있어서랴.19)"
19) 『韓非子』「六反」.
“今上下之接, 無子父之澤, 而欲以行義禁下, 則交必有郄矣.
且父母之於子也, 産男則相賀, 産女則殺之.
此俱出父母之懷衽, 然男子受賀, 女子殺之者, 慮其後便, 計之長利也.
故父母之於子也, 猶用計算之心以相待也, 而况無父子之澤乎?”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한비자는 군/신 관계는 부/자 관계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자와 같은 혈연관계에서도 노후의 편의를 생각하여 이득을 계산하는데, 하물며 군/신과 같은 관계에서는 정(情)이나 인(仁)과 같은 도덕규범이 적용될 리 만무하다고 본 것이다.20) 이와 같은 한비자의 현실인식은 생산력의 발달과 소유권의 분쟁으로 ‘계약적 관계’가 확산되어가던 전국시대 말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한비자의 ‘법’은 종법 관계에 기초한 ‘예’(禮)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이익과 계약으로 이행하는 역사변천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사회규범인 것이다. 그는 이익분쟁으로 얼룩진 당시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 대신 신상필벌이라는 ‘공리적’(功利的) 기준에 의거하여 법치사상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20) “군주의 화는 사람을 신뢰하는데서 생긴다. 다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으로부터 제압을 받게 된다. 신하는 군주에 대해 혈육간의 친함 때문이 아니라 세력관계에 매어서 어찌할 수 없이 섬기는 것이다. ······처만큼이나 가까운 사이와 자식만큼이나 친밀한 사이까지도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나머지는 신뢰할만한 자가 있을 수 없다.”
(『韓非子』備內. “人主之患在於信人。信人, 則制於人。人臣之於其君, 非有骨肉之親也, 縛於勢而不得不事也.... 夫以妻之近與子之親而猶不可信, 則其餘無可信者矣.“)
"현명한 군주가 신하를 제어하기 위하여 의존할 것은 두개의 권병(權柄)뿐이다. 두개의 권병이란 형(刑)과 덕(德)이다. 무엇을 일컬어 형과 덕이라 하는가?
처벌하여 죽이는 것을 ‘형’이라하고 칭찬하여 상주는 일을 ‘덕’이라 한다. 신하된 자는 처벌을 두려워하고 상받는 것을 이득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군주 자신이 직접 형을 집행하고 덕을 베푼다면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이득을 얻는 쪽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21)"
21)『韓非子』「二柄」. “明主之所導制其臣者, 二柄而已矣. 二柄者, 刑德也. 何謂刑德?
曰: 殺戮之謂刑, 慶賞之謂德. 爲人臣者畏誅罰而利慶賞, 故人主自用其刑德, 則群臣畏其威而歸其利矣.”
‘권병’(權柄)이란 ‘권력의 수단’을 의미한다. 한비자가 ‘덕’의 의미를 “칭찬하여 상주는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서 우리는 그의 ‘덕’ 개념이 이미 유가적인 ‘내면으로부터 발현되는 도덕의지’의 범주에서 벗어나서 ‘공리적 수단’의 의미로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비자의 어법을 관찰해볼 때, 그가 ‘덕’을 부정할 때는 ‘내면에서 발현되는 도덕의지’의 공소성(空疎性)을 가리키지만, ‘공적에 상응하는 대가’(賞)의 의미로 여전히 ‘덕’ 개념을 운용한다. 그가 사용하는 ‘덕’ 개념은 인간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도덕의지가 아니라 객관적 공적에 상응하는 물질적 대가임을 알 수 있다.
4) 백성들의 인성(人性)은 비열하기 때문에 ‘인애’(仁愛)로 교화할 수 없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성에 대한 불신에서 연유한다. 한비자에 의하면, 부모가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불초한 자식이 바르게 고쳐지는 것은 아니며, 군주가 ‘인’을 베푼다고 해서 백성들이 질서를 지키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초한 자식을 길들이기 위해서 부모의 사랑이나 스승의 가르침과 같은 ‘교화’의 방식은 별 효과가 없으며 차라리 ‘법’이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고 본다. 그는 백성들이란 사랑해주면 오히려 기어오르려 하고, 힘으로 위압할 때 비로소 고개를 조아리는 비열한 존재라고 여긴다.
"불초한 자식이 있어 부모가 노해도 고치려 하지 않고, 마을 사람이 꾸짖어도 움직이지 않으며, 스승이나 어른이 가르쳐도 바뀌려하지 않는다고 하자.
부모의 사랑이나 마을 사람의 지도와 스승과 어른의 지혜라는 세가지 미덕이 가해져도 움직이지 않고 고치지 않다가, 지방관청의 관리가 관병을 이끌고 공법(公法)을 내세워 간악한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그 연후에야 비로소 두려워하며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고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도 자식 가르치기에는 부족하며, 반드시 관청의 엄한 형벌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백성은 본래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라면 법을 험준하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한다.22)"
22)『韓非子』五蠹.
“今有不才之子, 父母怒之弗爲改, 鄕人譙之弗爲動, 師長敎之弗爲變.
夫以父母之愛, 鄕人之行·師長之智, 三美加焉, 而終不動, 其脛毛不改. 州部之吏, 操官兵, 推公法, 而求索姦人, 然後恐懼, 變其節, 易其行矣.
故父母之愛不足以敎子, 必待州部之嚴刑者, 民固驕於愛, 聽於威矣.
..... 故明主峭其法而嚴其刑也.”
‘인’이나 ‘사랑’에 의한 도덕적 교화가 불가능하다는 한비자의 입장은, 자연히 ‘형벌과 포상’ 즉 ‘당근과 채찍’이라는 두 수단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제어하는 통치방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형벌과 포상이라는 두 수단 가운데, 한비자는 형벌을 주된 수단으로 삼아야 하며 포상은 자주 내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형벌을 가함은 백성을 미워함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이 된다. 형벌을 우위로 하면 백성이 안정되고, 포상을 빈번히 하면 간악이 생긴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릴 때 형벌을 우위로 함이 다스림의 첫째이며, 포상을 빈번히 함은 혼란의 근본이다. 도대체 백성의 심성은 혼란을 좋아하고 법에 친숙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포상을 분명히 하면 백성이 공을 세우려고 힘쓰고, 형벌을 엄격히 하면 백성이 법에 친숙해 진다.23)"
23)『韓非子』心度. “故其與之刑, 非所以惡民, 愛之本也. 刑勝而民靜, 賞繁而姦生.
故治民者, 刑勝, 治之首也; 賞繁, 亂之本也. 夫民之性, 喜其亂而不親其法.
故明主之治國也, 明賞, 則民勸功; 嚴刑, 則民親法.”
백성들의 본성을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굴복하는 비열한 존재”로 여기거나 “혼란을 좋아하고 법에 친숙하지 않은 존재”로 파악하는 한비자의 관점은 자연스럽게 ‘상과 벌’이라는 두 수단을 가장 유효한 통치 방법으로 채택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한비자는 “군주가 ‘불인’(不仁)해야 오히려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4)
24)『韓非子』六反. “君不仁,...... 則可以覇王矣.”
5) ‘인의’라는 사적 도덕은 법 제도의 공공성을 파괴한다
한비자는 신하에 의해 시행되는 ‘인’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파악했다. 이런 관점에서 파악된 ‘인’은 보편적 도덕규범의 성격을 띠지 못하고 편파적이거나 파당적인 사덕(私德)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관리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지인이나 친인척에게 베푸는 은덕은 공적 규범이 지니는 객관성을 파괴하고 특정집단에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정실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는 공직에 몸담고 있는 관리로서 ‘인’과 ‘사랑’을 베푸는 일은 곧 ‘공공재화의 유용’과 ‘편파적인 특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오랜 친구라 하여 사적 은혜를 베풀면 ‘자기를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공공의 재화를 마구 뿌리면 이를 가리켜 ‘인자한 사람’이라 한다. 봉록을 가볍게 여기고 처신을 중시하면 이를 가리켜 ‘군자’라고 한다. 법을 왜곡하여 친족을 곡진하게 대하면 이를 가리켜 ‘덕이 있다’고 한다.
······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 자는 관리로서 악을 저지르는 자이다. 인자한 사람이란 공공의 재화를 손상시키는 자이다. 군자는 백성을 부리기 어렵게 만드는 자이다. 친족에게 곡진히 대하는 자는 법을 훼손시키는 자이다.25)"
25)『韓非子』八說.
“爲故人行私謂之‘不棄’, 以公財分施謂之‘仁人’, 輕祿重身謂之‘君子’, 枉法曲親謂之‘有行’
······ 不棄者, 吏有姦也; 仁人者, 公財損也; 君子者, 民難使也; 有行者, 法制毁也.”
신하가 사사로이 덕(德)을 베푸는 일도 불공정성의 의혹을 낳지만, 군주 자신에 의해 시행되는 ‘인’(仁)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초래한다. 한비자는 성환(成驩)과 제왕(齊王)의 대화를 통하여, 군주에 의한 ‘인’의 시행은 특정 집단에게만 특혜를 가져다줌으로써 사회질서의 공정성을 파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환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께서는 너무 인자(仁)하시고 지나치게 남을 동정하십니다(不忍)”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인자함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성환이 답하기를 “왕께서는 설공(薛公)26)에게 너무 인자하시고, 전(田)씨 일족에 대해서 지나치게 동정을 베푸십니다. 설공에게 너무 인자하시면 (설공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다른 중신들의 권위가 없어지고, 전씨 일족에게만 지나치게 동정을 베푸시면 그 일족의 장로들이 법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 이는 나라가 망하는 원인입니다.”라고 하였다.27)
26) 孟嘗君의 아버지인 田嬰을 가리킨다. 薛땅에 봉후받았으므로 薛公이라 한 것이다.
27)『韓非子』內儲說上.
“成驩謂齊王曰: 王太仁, 太不忍人。王曰: 太仁, 太不忍人, 非善名邪?
······ 對曰: 王太仁於薛公, 而太不忍於諸田. 太仁薛公, 則大臣無重; 太不忍諸田, 則父兄犯法. 大臣無重, 則兵弱於外; 父兄犯法······ 此亡國之本也.”
이상에서 볼 때 한비자가 ‘인’을 배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서 ‘인애’(仁愛)라는 사적 규범이 작동하게 되면, 편파성과 파당성이 발생하여 객관성과 공정성을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특정 가문이나 집단에 힘을 실어주는 효과를 낳게 되어, 결국은 공적 질서가 무너지고 군주의 권위가 약화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는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서 관철되어야 할 유일한 규범은 오직 ‘법’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6) 효율적인 지배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인애(仁愛)보다 중형(重刑)이 효율적이다
백성들의 본성을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굴복하는 비열한 존재”로 파악하는 한비자의 입장은 자연히 ‘인애’에 의한 교화 대신 관료체제의 ‘위엄’과 형벌제도의 ‘엄격함’에 의거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선호하기 마련이다.28)
28) “애정이 많을 경우는 법이 서지 않으며, 위엄이 적을 경우는 아랫사람이 위를 범하게 된다.”(『韓非子』內儲說上. “愛多者, 則法不立; 威寡者, 則下侵上.”)
"백성을 법으로 금하지 염치(廉)로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의 곱절이나 되지만, 아버지의 명령이 자식에게 행해지는 것은 어머니의 열배나 된다. 관리가 백성들에게 애정은 없지만 명령이 백성들에게 행해지는 것은 아버지의 만 배나 된다.
어머니가 사랑을 쌓더라도 명령이 잘 통하지 않지만, 관리는 ‘위엄’을 사용하므로 백성이 따른다. 위엄의 방법과 애정은 방법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29)"
29)『韓非子』六反. “使民以法禁而不以廉止.
母之愛子也倍父, 父令之行於子者十母; 吏之於民無愛, 令之行於民也萬父母.
父母積愛而令窮, 吏用威嚴而民聽從, 嚴愛之筴亦可決矣.”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애정’보다는 ‘위엄’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위하주의(威嚇主義)적 통치이념은 자연히 엄격한 법집행과 무거운 형벌을 선호하는 중형주의적 통치방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중형주의는 전기 법가인 상앙(商鞅)에 그 기원을 둔다. 한비자는 상앙의 법을 예로 들어 중형주의적 통치방식을 이렇게 정당화한다.
"공손앙(公孫鞅)30)의 법에서는 작은 잘못도 무거운 형벌로 다루었다.
중죄는 사람이 범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작은 잘못은 사람이 쉽게 피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쉽게 피할 수 있는 작은 잘못을 피하도록 함으로써 범하기 어려운 죄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잘 다스리는 길이다.
작은 잘못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큰 죄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혼란도 발생하지 않게 될 것이다.31)"
30) 전국 중기에 秦孝公을 섬겨서 법치의 질서를 확립한 商鞅을 말한다.
31)『韓非子』「內儲說上· 七術」. “公孫鞅之法也重輕罪.
重罪者, 人之所難犯也; 而小過者, 人之所易去也. 使人去其所易, 無離其所難, 此治之道.
夫小過不生, 大罪不至, 是人無罪而亂不生也.”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작은 잘못에도 무거운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작은 잘못과 큰 잘못 모두를 사전에 예방하자는 것이 중형주의의 요점이다.
한비자는 백성을 가엾게 여겨 형벌을 감면해준 제(齊) 경공(景公)의 예를 들면서, 인애(仁愛)의 정치는 오히려 악한 자를 이롭게 하고 선량한 자를 해치게 되어, 사회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비판한다.
한비자가 제시하는 일화에 의하면, 제 경공에게 안영(晏嬰)이 형벌을 낮추어 주기를 청했다.
‘다리 잘리는 형벌’(刖刑)을 받은 사람이 늘어나 의족값이 등귀하고 신발값은 폭락할 정도로 형벌받은 사람이 많아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제 경공은 자신의 포학함에 놀라며 형벌의 단계를 낮추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비자는 경공의 처사를 이렇게 비판한다.
“형벌이 정당하다면 많더라도 많은 것이 아니며, 정당하지 못하다면 적더라도 적은 것이 아니다.
······형벌을 느슨히 하고 너그럽게 은혜를 베푼다면 이는 간악한 자를 이롭게 하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게 된다. 이는 잘 다스리는 길이 아니다.”32)
32)『韓非子』難二. “夫刑當無多, 不當無少. 無以不當聞, 而以太多說, 無術之患也.
.....今緩刑罰, 行寬惠, 是利姦邪而害善人也, 此非所以爲治也.”
한비자는 공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엄격한 법집행’과 ‘무거운 형벌’을 제안하는 이외에도, 주민들 사이에 ‘상호 감시체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훗날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한비자의 이러한 주장이 채택되어 ‘연좌제’(連坐制)의 형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봉건시대의 악법이라고 평가되는 이러한 제도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7) 공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법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사회규범의 공공성은 ‘규범의 보편적 적용’이라는 절차적 합리성에서 찾아진다. 상과 벌은 반드시 공정하고 엄격한 원칙에 따라 시행되어야 하며, 신분의 상/하나 친분관계의 친/소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한비자는 법 적용의 엄격성에 대하여 이렇게 설파한다.
"상을 아무렇게나 주면 공신도 그가 할 일을 게을리 하게 되고, 형벌을 용서하면 간신이 쉽게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말 공이 있다면 비록 멀고 낮은 신분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어야 하며, 정말로 허물이 있다면 비록 친근하고 총애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33)"
33) 『韓非子』主道. “賞偸, 則功臣墮其業, 赦罰, 則姦臣易爲非. 是故誠有功, 則雖疏賤必賞; 誠有過, 則雖近愛必誅.”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엄격한 법적용이 이루어져야한다는 예로, 한비자는 초(楚) 장왕(莊王)의 태자가 규정을 어긴 일을 든다.
초 나라에는 궁전 출입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규정에 의하면 “여러 신하와 대부 그리고 공자들이 조회에 들어올 때 말발굽으로 빗물받이를 밟는 자가 있으면 그 수레채를 자르고 수레 모는 종을 죽인다.”고 되어있었다. 어느 날 태자가 조회에 들어올 때 잘못하여 말발굽으로 빗물받이를 밟자, 지키던 관리가 태자의 수레채를 자르고 종을 죽였다. 이에 태자가 왕에게 달려가 그 관리를 죽여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왕은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하가 군주를 넘보게 되고, 신하가 군주를 넘보게 되면 사직이 망하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태자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태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삼일동안이나 집밖에서 자면서 죽을죄를 청하였다.34)
이처럼 지위의 상/하나 친분관계의 친/소에 상관없이 엄격한 법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한비자의 정치사상은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34) 『韓非子』外儲說右上.
“荊莊王有茅門之法曰: 羣臣大夫諸公子入朝, 馬蹏踐霤者, 廷理斬其輈戮其御. 於是太子入朝, 馬蹏蹄踐霤, 廷理斬其輈, 戮其御. 太子怒, 人爲王泣曰: 爲我誅戮廷理.
王曰:法者, 所以敬宗廟, 尊社稷. 故能立法從令尊敬社稷者, 社稷之臣也, 焉可誅也? 夫犯法廢令不尊敬社稷者, 是臣乘君而下尙校也. 臣乘君, 則主失威; 下尙校, 則上位危. 威失位危, 社稷不守, 吾將何以遺子孫? 於是太子乃還走, 避舍露宿三日, 北面再拜請死罪.”
한비자는 엄격한 법집행과 관련하여, 아무리 ‘좋은 동기’에서 나온 행위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가 정해진 규정을 넘어서거나 직분을 위반한 것이라면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고 본다. 한비자는 그 예로 한(韓)나라 소후(昭侯)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든다.
한의 소후가 술에 취하여 잠이 든적이 있었다. 관(冠)을 담당하는 시종이 군주가 추울 것을 염려하여 몸 위에 옷을 덮어주었다. 소후가 잠에서 깨어나 옷을 덮어준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좌우가 “관을 담당하는 자”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소후는 옷을 담당하는 시종과 관을 담당하는 시종을 함께 처벌하였다. 옷을 담당하는 시종을 처벌한 것은 그가 수행해야 할 직무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며, 관을 담당하는 시종을 처벌한 것은 그가 직분을 넘어서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35)
한비자는 이러한 예를 들면서, 아무리 좋은 동기에서 나온 선행일지라도 직분을 넘어서거나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에는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35) 『韓非子』二柄.
“昔者韓昭侯醉而寢, 典冠者見君之寒也, 故加衣於君之上, 覺寢而說,
問左右曰: 誰加衣者? 左右答曰: 典冠. 君因兼罪典衣殺典冠。其罪典衣, 以爲失其事也; 其罪典冠, 以爲越其職也.”
엄격한 법집행과 관련된 한비자의 언급 가운데 흥미있는 점은 “규정보다 더 잘해도 안 된다”는 점이다.
『한비자』에서는 이와 관련된 예로, 오기(吳起)와 그의 처에 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오기가 그의 처에게 맬 끈을 하나 보여주며 똑같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주기를 부탁했다. 맬 끈이 완성되어 그것을 써보니 자기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것보다 유달리 좋았다.
오기가 처에게 “자네에게 보여준 것과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달리 좋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처가 말하기를 “사용한 재료는 한가지이나 제가 정성을 더하여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오기가 말하기를 “내가 부탁한 것과 다르다”하고는, 처를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이에 장인이 달려와 용서해줄 것을 청하자, 오기는 “저의 집안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라고 하며 용서해주기를 거절하였다.36)
엄격하다 못해 인간의 선한 동기까지도 부정하려는 이러한 법집행의 자세는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36)『韓非子』外儲說右上.
“一曰: 吳起示其妻以組曰: 子爲我織組, 令之如是. 組已就而效之, 其組異善.
起曰: 使子爲組, 令之如是, 而今也異善, 何也? 其妻曰: 用財若一也, 加務善之.
吳起曰: 非語也. 使之衣而歸. 其父往請之, 吳起曰: 起家無虛言.”
8) 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인과 예의 도덕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
한비자는 ‘인’이나 ‘예’에 의한 도덕정치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시대의 변천’을 든다. 옛날처럼 인구가 적고 소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친하게 지내던 시절에는, 자원도 풍부하고 이기심도 적어서 서로 양보하는 일이 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시절에는 ‘예’를 중시하고 임금 자리를 선양(禪讓)하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나 ‘인’과 ‘예’는 이처럼 소박한 시대에나 가능했던 덕목이지, 현재의 시대적 조건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발달하여 서로 이익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인’이나 ‘예’ 대신 ‘법’과 같은 객관적 규범이 요청된다는 것이다.37)
한비자는 상고(上古)에서 중세(中世)를 거쳐 자기 시대에 이르는 역사의 변천을 이렇게 파악한다.
“상고 때는 도덕(道德)을 가지고 경쟁했고, 중세에는 지모(智謀)를 가지고 겨루었지만, 오늘날에는 기력(氣力)으로 다툰다. ······(지금 시대에) 인의(仁義)나 변지(辯智)는 나라를 지탱하는 수단이 못된다.”38)
37)『韓非子』八說. “古者人寡而相親, 物多而輕利易讓, 故有揖讓而傳天下者. 然則行揖讓, 高慈惠, 而道仁厚, 皆推政也. 處多事之時, 用寡事之器, 非智者之備也; 當大爭之世, 而循揖讓之軌, 非聖人之治也.”
38)『韓非子』五蠹. “上古競於道德, 中世逐於智謀, 當今爭於氣力. 齊將攻魯, 魯使子貢說之. 齊人曰:子言非不辯也, 吾所欲者土地也, 非斯言所謂也. 遂擧兵伐魯, 去門十里以爲界. 故偃王仁義而徐亡, 子貢辯智而魯削. 以是言之, 夫仁義辯智, 非所以持國也.”
‘도덕’의 시대는 가고 ‘기력’(氣力)으로 다투는 시대가 되었다는 한비자의 역사인식은 매우 현실적인 시대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가 파악하는 것처럼, 혈연 공동체에 기초한 서주(西周) 시대에는 ‘인’이나 ‘예’와 같은 도덕규범을 확장하여 정치적 영역에까지 적용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혈연 공동체와 종법제도가 무너져버린 전국 말의 상황에서는 ‘이익 분쟁’과 ‘힘의 다툼’이라는 객관 현실에 기반한 새로운 규범의 탄생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이익’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객관성’과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규범으로 ‘법’이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한비자는 이러한 역사 인식에 의거하여, ‘인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더 이상 효율적인 사회규범으로 작동될 수 없다고 본다.
3. 한비자의 ‘인의’ 비판에 대해 유가에서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이상에서 우리는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이유를 여덟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한비자가 제시한 이유들은 나름대로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처했던 현실 속에서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제안이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강대국 틈 사이에 끼어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던 한(韓) 나라의 공자였던 한비자로서는 공권력을 확보하고 군비를 강화하기 위해 ‘인의’(덕치) 대신에 ‘신상필벌’을 골자로 하는 공리(功利)적 사회규범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한비자와 같이 전국시기를 살았던 맹자는 ‘인의’를 부정하는 한비자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과연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삼는 유가학파는 신하가 ‘인’을 베풂으로써 군주의 권위가 침해되는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또한 고통받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위민(爲民)과 애민(愛民)을 외쳤던 유가학파는 인애(仁愛)를 베풂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의 훼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리고 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인의’의 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한비자해에 대하여 유가에서는 어떠한 응답을 내놓을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일은 유가와 한비자의 사상적 차이를 규명하는 데도 중요하지만, 나아가서는 한비자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데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 논문의 후속편에서는 “한비자의 ‘인의’ 비판에 대한 유가의 응답”이라는 제목으로, 한비자의 입장에 대해 유가에서는 어떠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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