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규범의 공공성에 관한 법가의 인식(2):
한비자(韓非子)의 ‘인·의’(仁·義) 비판에 대한 유가의 응답*
이 승 환(고려대 철학과)
<요약문>
한비자는 공적영역에서 인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배격하고자 했다. 인의가 신하의 손에 의해 시행되면 신하의 세력이 확대되어 군주의 권위를 해치게 되고,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공적 세계에 인의라는 사적 도덕이 개입하게 되면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은 비열하여 도덕으로 다스릴 수 없으며, 도덕의 시대는 가고 힘으로 다투는 시대가 되었다는 한비자의 시대인식은 결국 인의를 배격하고 법과 형벌만을 유일한 사회규범으로 여기게 만든다.
한비자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인의와 덕치를 주장하는 유가에서는 어떠한 응답을 할 것인가?
본고에서는 한비자의 인의 비판에 대해 유가에서 내놓을 수 있는 가능한 응답들을 제시해보고자 하였다. 한비자와 유가의 비교적 고찰을 통하여,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양자간의 입장차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으며, 두 사람의 주장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각기 효력을 지닌 주장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주 제 : 철학/동양철학/중국철학
검색어 : 인의, 덕치, 법치, 한비자, 공자, 맹자
* 이 논문은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지원사업(KRF-2002-074-AM1031)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공동연구의 한 부분임.
1. 한비자가 ‘인의’를 비판하는 여덟가지 이유
한비자는 공적 영역에서 ‘인의’와 같은 도덕 가치를 배격하고 ‘법’만을 유일한 사회규범으로 인정하고자 했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1)
① 신하에 의한 ‘인의’의 시행은 군주의 권위를 손상케 한다.
② 공이 없는 자에게 ‘인의’를 베풀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
③ ‘인의’는 사회적 이익관계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규범이다.
④ 백성들의 인성은 비열하기 때문에 ‘인의’로 교화할 수 없다.
⑤ ‘인의’는 사적 도덕으로서 법 제도의 공공성을 파괴한다.
⑥ 효율적인 지배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인의’보다 중형(重刑)이 효율적이다.
⑦ 공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법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⑧ 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인의’에 의한 도덕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며 제시한 이상의 이유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인’과 ‘의’라는 덕목은 과연 공적 영역에서 단연코 추방되어야 할 가치들인가?
과연 한비자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덕치(德治)와 인의(仁義)를 주장하는 유가에서는 어떠한 응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 졸고, 「사회규범의 공공성에 관한 법가의 인식(1): 한비자(韓非子)의 인·의(仁·義) 비판을 중심으로」, 『시대와 철학』 14권 1호(2003)를 참고하시오.
2. 진정으로 좋은 신하는 ‘인의’의 정치를 베푸는 신하이다
먼저 ① “신하에 의한 ‘인의’의 시행은 군주의 권위를 손상케 한다.”라는 한비자의 주장에 대해 유가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응답을 생각해보자.
신하의 세력이 커져서 군주의 지위를 위협하는 일은 유가 사상가들도 당연히 바람직하지않게 여길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를 비판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계손씨는 제후국인 노나라 대부의 신분으로 감히 천자만이 누릴 수 있는 팔일무(八佾舞)를 자기 집 마당에서 추게 하고, 또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여제(旅祭)를 스스로 거행하였다. 공자가 그를 “참월(僭越)하다”고 비판했던 것은 그가 대부의 신분으로 감히 천자의 예(禮)를 넘보는 월권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관중(管仲)을 비판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관중은 군주가 궁전에 세우는 색문(塞門)을 자기 집 문간에도 설치함으로써 ‘예’를 위반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관중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겠는가?”2)라고 힐난하였다.
2)『論語』 「八佾」.
‘예’는 사회의 성원들이 각자의 신분과 역할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규정한 규범체계이다. 이러한 규범체계를 무시한 월권행위는 군신간의 권력질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조화와 안녕을 깨뜨린다.
따라서 공자는 자기 당시에 만연했던 하극상과 월권행위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정명’(正名)을 주장했던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3)라는 공자의 말은 ‘정명’이 시급하게 요구되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신하가 자기에게 부여된 권한을 넘어서서 군주의 지위를 넘본다면 이는 월권행위가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하가 세력을 확장하여 군주의 지위를 위협하는 일은 공자의 입장에서도 당연히 비판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3) 『論語』 「顔淵」. “君君臣臣父父子子.”
그렇다면 신하가 ‘인의’를 시행하는 일에 대해 공자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공자가 자기의 시대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었던 일은 포학한 군주를 교화시켜 덕스런 정치를 시행케 하는 일이었다. 공자는 이를 위해, 군주가 수기(修己)에 입각하여 안인(安人)을 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현명한 사람(賢人)과 어진 사람(仁人)을 신하로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불경치 아니할 것이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불복하려들지 아니할 것”4)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하가 ‘인’과 ‘의’를 베풀어 군주보다 더 큰 명성을 얻게 된다면 공자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사람들 속에서 고요(皐陶)를 신하로 뽑아 쓰자 불인한 사람이 사라졌고, 탕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사람들 속에서 이윤(伊尹)을 신하로 뽑아 쓰자 불인한 사람이 사라졌다.”5)
공자의 이러한 평가에서 살펴볼 때, 군주는 물론이고 신하도 ‘인’하고 ‘의’로워야만 바른 정치를 시행할 수 있다. “정치란 곧 바로잡는 일”6)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신하가 군주보다 더 ‘인의’로 명성을 얻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인하고 의로운 사람은, 인과 의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함축하고 있듯이, 군주의 지위를 넘보는 따위의 월권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하가 군주의 지위를 넘보는 일은 곧 인과 의를 저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공자의 입장에서는, 군주이건 신하이건 간에 가혹한 정치를 멈추고 인자하고 의로운 정치를 펼치는 길만이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는 첩경이라 여겼던 것이다.
물론 한비자가 경계하듯이 현실 정치세계에서는 신하된 자가 인의를 가장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군주의 지위를 넘보려 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사람됨을 잘 파악하여”(知人) 현인을 신하로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4) 『論語』 「子路」. “上好禮則民莫敢不敬, 上好義則民莫敢不服.”
5) 『論語』 「顔淵」.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신하의 세력확대를 경계하는 한비자의 입장은 그가 처했던 전국말기 한(韓)나라의 상황에서 의미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 당시의 한나라는 전국 7웅 가운데 제일 국력이 약한 나라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귀족 중신(重臣)과 권문세가(私家)에 의해 군주의 통치권이 위협받고 있던 실정이었다.
강대국의 틈에 끼어 국가의 존망을 염려하던 한비자의 입장에서는 ‘군권의 강화’를 위하여 신하가 자의적으로 선심을 베풀며 세력을 확장하려는 음모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인의’를 본래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수단으로 파악하는 한비자의 입장에서는, ‘인의’를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하려는 중신(重臣) 세력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공자나 맹자가 한비자의 상황에 처했더라도 신하들이 ‘인의’를 가장하고 세력을 확대하려는 음모에는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인의’를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하는 일은 ‘가인’(仮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7)
맹자 역시 공자 못지않게 신하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인’과 ‘의’를 강조했다.
“탕 임금은 이윤으로부터 배우고 나서 그를 신하로 삼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고도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환공은 관중에게 배우고 나서 신하로 삼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도 패자가 될 수 있었다.”8)
맹자는 성인과 같은 지혜와 덕을 갖추었던 고대의 신하들을 칭송한다. 비록 지위는 군주보다 아래지만 도덕적 권위는 군주보다 높아서, 군주를 보좌하여 선정을 베풀게 하고, 군주가 그릇될 경우에는 옆에서 견제하고 질책할 수 있는 신하야말로 진정 ‘인의’를 갖춘 ‘대인’(大人)이라고 보는 것이다.9)
맹자는 이윤, 백이, 유하혜 등과 같은 사람을 성인에 필적할만한 신하들이라고 본다.10)
결론적으로 말해서 공자와 맹자는 한비자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군주의 지위를 넘보는 일에는 단연코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는 한비자와 달리, 만약 신하가 진정으로 ‘인의’라는 도덕적 동기에서 출발하여 충심으로 군주를 보좌하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려 한다면 여기에 적극 동의할 것이다.
한비자의 궁극적인 관심이 중신(重臣)세력을 견제하고 군주의 통치권을 강화하는데 있었다면, 유가의 궁극적 관심은 현신(賢臣)을 중용하여 군주로 하여금 인의의 정치를 시행하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7)『孟子』 「公孫丑上」. “以力仮仁者覇······ 以德行仁者王.”
8) 『孟子』 「公孫丑上」.
9) 『孟子』 「離婁」. “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
10)『孟子』 「公孫丑下」.
3. 법정신에 맞는 처벌과 민생의 보장만이 사회적 신뢰를 증진시킨다
한비자가 ‘인의의 정치’를 배격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②“잘못이 있어도 차마 처벌하지 않거나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내리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비자는 “인인(仁人)이 윗자리에 있으면 아랫사람이 방자하여 금제와 법령을 쉽게 범하고 제멋대로 요행을 바라게 된다.”11)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학에서는 한비자의 이러한 경고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먼저 잘못을 범했는데도 차마 처벌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와 관련해서 공자가 노(魯)나라의 판관(司寇)을 맡고 있었을 때 내렸던 판례가 좋은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노나라의 병사가 세 번 전쟁에 나가 세 번 도망쳤다. 공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병사는 대답하기를 “나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어 내가 전사하면 봉양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그 병사를 효자라고 칭찬하고 위로 추천하였다.12)
공자는 또 초(楚)나라 사람 직궁(直躬)이 그의 아버지를 절도죄로 관가에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 마을에서 칭찬하는 정직함이란 이와 다르다. 허물이 있을 때 부모는 자식을 숨겨주고 자식은 부모를 덮어준다. 진짜 정직함이란 이 속에 있는 것이다.”13)라고 응답한다.
공자에 의하면 전장에서 이탈한 죄나 부친의 범죄를 고발하지 아니한 죄도 도덕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성립될 때에는 그 위반을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가족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인륜적 의무가 국가 차원에서 요구되는 공적 의무와 충돌할 때, 공자는 인륜적 의무에 우선성을 두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군집생활의 기초가 되는 인륜질서가 무너져버리면 국가나 사회의 존립도 불가능해지리라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한비자에 비해서 가족윤리(사적 의무)를 국가윤리(공적의무)의 바탕(기초)에 위치시켰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14)
11) 『韓非子』 「八說」. “故仁人在位, 下肆而輕犯禁法, 偸幸而望於上.”
12) 이 일화는 『韓非子』 「五蠹」편에 나온다.
13)『 論語』 「子路」.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壤羊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14) 유학 내에서 사적의무와 공적의무의 충돌 문제에 관해서는 졸고 「한국 및 동양의 공사관과 근대적 변용」, 『정치사상연구』 6집(2002)을 참조하시오.
그러면 한비자는 왜 일체의 인륜이나 도덕을 무시하고 법만을 유일한 사회 규범으로 간주했는가?
이는 그가 처했던 시대상황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한비자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패권을 다투던 전국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였다. 전국 7웅 가운데서 가장 국력이 쇠약했던 한나라의 상황에서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군주권의 강화와 공권력의 확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비자가 가족 내의 인륜 질서보다 국가적 차원의 공법질서를 우선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비자가 당시 상황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일체의 사정(私情)이나 인륜을 고려치 않는 전체주의적 군사국가였다. 따라서 한비자는 탈영범과 불고지범은 위반자의 동기나 정황과 관계없이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탈영범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전쟁에서 매번 패배할 것이고, 만약 불고지범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면 간악한 범죄는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5)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는 유가에서 높이 치는 효(孝)는 ‘사사로운 애비 사랑’(私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사적 의무와 공적 의무가 상충할 때는 당연히 공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5)『韓非子』 「五蠹」. “令尹誅而楚姦不上聞, 仲尼賞而魯民易降北.”
한비자와 공자의 이러한 입장차는 ‘인륜질서’와 ‘공법질서’라는 두 차원의 의무가 동시에 충족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두 사상가가 처했던 시대적 조건을 떠나서는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
공자는 아직 제후국들의 독립국가를 향한 염원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춘추시기에 살았기 때문에, 인륜질서와 종법체계의 회복을 통해 천하의 질서가 바로 잡힐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공자 당시에는 주례(周禮)의 복원에 대한 희망이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비자는 주 왕실이 몰락해버리고 영역국가 사이에 약육강식이 극에 달했던 전국 말기에 살았다. 이들이 처했던 상이한 시대적 조건은 인륜질서와 공법질서가 충돌할 때 피치 못하게 어느 한쪽에 우선순위를 매기도록 강요하였다.
한비자와 공자의 입장차는 ‘판관의 재량권’ 혹은 ‘법해석’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한비자는 엄격한 법형식주의에 입각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는 법해석과 엄격한 법적용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법조문의 배후에는 ‘법 목적’과 ‘법 정신’이 깔려있는 법이다. 세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법조문에 다 담아놓을 수는 없으므로, 법조문은 가능한 한 간결하고 일반적인 문장으로 제정되어, 판관에 의해 재해석됨으로써 비로소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법해석과 법적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법 목적’과 ‘법 정신’에 대한 판관의 사려깊은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탈영범을 용서했던 것도 바로 법 목적과 법 정신에 대한 판관의 사려깊은 이해력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가 법해석의 필요성과 판관의 재량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려는 입장이라면, 한비자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는 아무리 좋은 동기에서 나온 행위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가 정해진 규정을 넘어서거나 직분을 위반한 것이라면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며16), 심지어는 “법에 규정된 것보다 더 잘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 말한다.17)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비자는 ‘법해석’의 의의 자체를 부정할 정도로 엄격한 법형식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16) 한비자는 한(韓)나라 소후(昭侯)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든다. 한의 소후가 술에 취하여 잠이 든 적이 있었다. 관(冠)을 담당하는 시종이 군주가 추울 것을 염려하여 몸위에 옷을 덮어주었다. 소후가 잠에서 깨어나 옷을 덮어준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좌우가 “관을 담당하는 자”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소후는 옷을 담당하는 시종과 관을 담당하는 시종을 함께 처벌하였다. 옷을 담당하는 시종을 처벌한 것은 그가 수행해야할 직무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며, 관을 담당하는 시종을 처벌한 것은 그가 직분을 넘어서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韓非子』 「二柄」)
17) 『韓非子』에서는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예로, 오기(吳起)와 그의 처에 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오기가 그의 처에게 맬 끈을 하나 보여주며 똑같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주기를 부탁했다. 맬 끈이 완성되어 그것을 써보니 자기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것보다 유달리 좋았다.
오기가 처에게 “자네에게 보여준 것과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달리 좋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처가 말하기를 “사용한 재료는 한가지이나 제가 정성을 더하여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오기가 말하기를 “내가 부탁한 것과 다르다”하고는, 처를 친정으로 쫓아보냈다. 이에 장인이 달려와 용서해줄 것을 청하자, 오기는 “저의 집안은 거짓말을 못합니다”라고 하며 용서해주기를 거절하였다.(『韓非子』, 「外儲說右上」)
물론 법해석과 관련하여 판관에게 지나치게 많은 재량권이 주어지면 한비자가 우려하는 것처럼 사회적 신뢰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
그러면 공자는 법해석과 법적용에 있어서 ‘판관의 무한한 재량’과 ‘너그러움’만을 주장하는가?
공자는 법 해석과 법 적용에 있어서 너그러움만 주장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너그러움(寬)과 사나움(猛)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정치가 너무 너그러우면 백성이 태만해지고, 너무 태만해질 때에는 사나움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가 너무 사나와지면 백성이 쇠잔해진다. 백성이 쇠잔해지면 너그러움으로 베풀어야 한다.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바로잡고, 사나움으로 너그러움을 바로잡는다. 정치는 이렇게 조화로 해야 한다.18)"
18) 『春秋左傳』 「昭公」 二十年. “仲尼曰, 善哉! 政寬則民慢, 慢則糾之以猛. 猛則民殘, 殘則施之以寬. 寬以濟猛, 猛以濟寬, 政是以和.”
여기서 ‘너그러움’이란 판관의 재량권을 대폭 인정하여 범죄자의 정황과 사정을 참작하여 법해석과 법적용을 너그럽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사나움’이란 일체의 정황과 사정을 참작하지 않고 엄격한 법해석에 입각하여 법적용을 무겁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해석과 법적용 그리고 판관의 재량권과 관련해서 공자는 ‘너그러움’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그러움과 사나움은 사회의 분위기와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조화롭게 해야 한다고 공자는 여기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기기만 하고 늦추지 않는 것은 문왕과 무왕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늦추기만 하고 당기지 않는 것은 문왕과 무왕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당겨주고 때로는 늦춰주는 것이 문·무의 통치 방법이다.19)"
19) 『禮記』 「雜記」. “子曰······ 張而不弛, 文武不能也. 弛而不張, 文武不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
“당긴다”(張)함은 엄형과 중벌로 백성을 통제하는 일을 말하고, “늦춘다(弛)”함은 덕과 은혜로 백성들의 민생을 보살피는 일을 말한다. 활시위를 오랫동안 당겨 늦추지 않으면 활줄이 끊어지듯, 백성들을 무거운 형벌과 가혹한 사역으로 핍박하기만 하면 백성의 노동력(民力) 또한 피폐해진다. 또 활시위를 오랫동안 풀어놓고 당기지 않으면 활의 몸체가 망가지듯, 백성을 덕과 은혜로 감싸주기만 한다면 풍기가 방종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활의 사용에 있어서 당김과 풀어줌을 조화롭게 하듯이, 법의 해석과 형의 적용에 있어서도 너그러움과 사나움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운용할 것을 공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인의의 시행은 사회적 신뢰를 훼손시킨다”라는 한비자의 주장이 공자의 덕치사상을 무력화시킬 정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번에는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내리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라는 한비자의 주장에 대해 유가에서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사회적 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포상과 훈장은 공이 있는 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과연 공자나 맹자는 공이 없는 자에게도 상을 내려야 한다고 보았는가? 과연 공이 없는 자에게도 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유가의 ‘인한 정치’(仁政)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인한 정치’란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기 전에 먼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르쳐주고, 백성들이 가혹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지 않도록 최저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민생 안정 정책을 가리킨다.
공자는 “먼저 무엇이 옳은지 가르치지도 않고 죄를 범했다고 하여 바로 사형에 처해버리는 일은 학살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20)고 하며 당시의 가혹한 정치를 비판한다.
공자는 이러한 가혹한 정치 대신에, 백성들의 민생 보장을 골자로 하는 ‘인한 정치’를 당시의 군주들에게 권고한다.
농번기와 바쁜 시기를 피하여 “때에 맞게 백성을 부려야 한다.”21)고 권하기도하고, 백성들의 생계를 먼저 풍족하게 해주고 그 다음에 교육을 통하여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22)
맹자 역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의 개선을 통한 항산(恒産)의 보장, 농업장려에 의한 민생의 안정, 세율 경감에 의한 상업경제의 활성화, 지배계층의 절검 등을 내세우며 군주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촉구하였다.23) 과연 세율을 경감시켜주는 일, 토지제도를 개선하여 백성의 최저생계를 보장해주는 일, 농번기를 피하여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는 일, 그리고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일 등으로 요약되는 ‘인한 정치’는 한비자가 말하는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일’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일까?
20) ꡔ論語ꡕ 「堯曰」. “不敎而殺之爲虐.”
21) ꡔ論語ꡕ 「學而」. “使民以時.”
22) ꡔ論語ꡕ 「堯曰」. “冉由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23) 이와 관련하여서는 졸저 ꡔ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ꡕ(고려대학교 출판부, 1998),
한비자는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복지를 증진시켜주려는 유가의 ‘인한 정치’를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일’과 같다고 보았다. 그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중농정책과 세율의 조정을 강조한다. 그의 조세 정책의 기본 내용은 빈민에게는 가벼운 세금을 부과하고 부민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24) 물론 이러한 조세 정책이 당시의 빈민들에게 유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비자의 최종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爲民)이라기보다 “국가를 위한 것”(爲國)이었다. 그가 부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할 것을 주장한 것은 결국 부자는 힘으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보아 그 힘을 미리 약화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부민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약민’(弱民) 정책은 전기 법가인 상앙의 노선을 이어받은 것이며,25) 한비자 당시에 중신(重臣) · 사가(私家) 등으로 지칭되던 귀족-대지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비자는 비록 빈민의 세금을 경감해주고 부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조세정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빈민 구제를 위한 복지 시혜에는 단연코 반대한다. 빈민에 대한 시혜는, 공이 없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땀 흘려 일하지 않는 자를 부자로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로 하여금 노력을 통하여 부를 얻게 하고··· 자애로운 시혜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이 제왕의 정치이다.”26)
한비자는 정당한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에 대해서만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는 일체의 복지 혜택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4) 『韓非子』 「六反」. “論其稅賦以均貧富.”
25) 『商君書』 「弱民」. “民弱國彊, 國彊民弱. 故有道之國, 務在弱民.”
26) 『韓非子』 「六反」. “故明主之治國也···· 使民以力得富····不念慈惠之賜. 此帝王之政也.”
"지금 국가가 부자에게서 거두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다면, 이는 노력하고 검약하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사치하고 게으른 자에게 주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한다면 백성이 열심히 일하고 씀씀이를 절약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27)"
27)『韓非子』 「顯學」. “今上徵歛於富人以布施於貧家, 是奪力儉而與侈惰也, 而欲索民之疾作而節用, 不可得也.”
한비자의 이러한 견해는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어서는 안된다는 19세기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와도 일치한다. 한비자는 노력하는 자가 보상받지 못하고 노동하지 않는 자가 무위도식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의 자식은 굶주리며 길가에서 구걸하지만, 광대나 술 시중드는 부류는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는다. ···전쟁에 나가 영토를 쟁취한 병사는 고생하고서도 상을 받지 못하지만, 점치고 손금이나 보며 교활하게 손님 앞에서 마음에 드는 말만 하는 자들은 날마다 하사받는다.”28)
한비자가 묘사하는 이러한 부정의한 상황에 대해 묵자(墨子) 역시 분노를 표시한 적이 있다. 묵자가 호화스런 장례식과 사치스런 음악 연주회를 비판한 것도 한비자와 비슷한 이유에서였으며,29) 한비자가 묵자를 부분적으로나마 옹호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30)
28) 『韓非子』 「詭使」. “今死士之孤飢餓乞於道, 而優笑酒徒之屬乘車衣絲····· 今戰勝攻取之士勞而賞不霑, 而卜筮·視手理·狐蟲爲順辭於前者日賜.”
29) 이와 관련해서는 『墨子』 「非禮」편과 「非樂」편을 참조하시오.
30) 이와 관련해서는 『韓非子』 「顯學」편을 참조하시오.
한비자가 살았던 전국말기는 빈번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논공행상(論功行賞)과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대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이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전쟁터에 나가려하지 않을 것이며, 편안하게 앉아서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상을 가로챈다면 군대의 사기는 저하될 것이다. 따라서 한비자는 농사일과 전투를 겸할 수 있는 ‘경전지사’(耕戰之士)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합당한 댓가를 보장해주고자 했다.
“군주의 창고는 텅비어있는데 중신들의 창고는 가득 차 있고, 농사짓는 사람은 빈곤한데 빌붙어 사는 사람은 부유하며 ‘경전지사’(耕戰之士)는 빈궁한데 장사꾼은 이득을 남기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된다.”31)
따라서 한비자는 ‘경전지사’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고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는 일체의 복지 혜택을 주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노동없이 이윤만 챙기려는 상인들의 영리활동도 제한하고자 하였다.
31) 『韓非子』 「亡徵」. “公家虛而大臣實, 正戶貧而寄寓富, 耕戰之士困, 末作之民利者, 可亡也.”
“공이 없는 자에게 시혜를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한비자의 이러한 견해는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여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던 한나라의 상황에서는 피치 못하게 선택해야만 하는 경제정책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면 한비자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유가에서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공자야 한비자보다 2백5십여년이나 앞선 춘추시기에 살았으니 이러한 약소국의 곤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한비자보다 앞서 전국(戰國)의 혼란상을 경험했던 맹자는 한비자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맹자가 생전에 각국을 주유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느꼈던 것은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군주를 부추겨서 토지 쟁탈전을 벌이는 대신들을 향하여 맹자는 “사람고기를 먹는 자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제일 큰 형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고 극언하기도 했다.
"공자는 인정을 행하지도 않는 군주를 위하여 부를 축적하게 도와준 제자 염구(冉求)를 파문시켰다.
하물며 (불인한) 군주를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켜 땅을 쟁탈하느라 사람을 죽여 들에 가득 차고, 성을 쟁탈하느라 싸워 사람을 죽여서 성에 가득차게 함에랴!
이것은 이른 바 토지를 몰아다가 사람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니, 그 죄는 죽여도 모자란다.
그러므로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극형을 받아야 하고, 제후를 연합하여 연합전선을 만드는 자는 그 다음 형벌을 받아야 하며, 숲을 개간하여 농민에게 경작을 시키는 자는 그 다음 형벌을 받아야 한다. 32)"
32) 『孟子』 「離婁」. “君不行仁政而富之, 皆棄於孔子者也,
況於爲之强戰? 爭地以戰, 殺人盈野, 爭城以戰, 殺人盈城,
此所謂率土地而食人肉, 罪不容於死.
故善戰者服上刑, 連諸侯者次之, 辟草萊 任土地者次之.”
한비자는 국세가 쇠약했던 한나라에 살았지만, 맹자는 당시의 강대국인 제(齊) · 연(燕) · 위(魏) 등을 돌아다니며 군주들을 상대로 ‘무력’이 아닌 ‘인’(仁)에 의해 천하를 통일하도록 권유하였다. 맹자는 강대국 군주들의 호전성33)과 패권욕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설득과 대화를 통해서 ‘측은지심’을 자각시키고 ‘인한 정치’를 시행하도록 권유하였다.
맹자가 추(鄒)의 목공(穆公)과 대면했을 때의 일이다. 목공이 맹자에게 물었다.
“노나라와 전쟁할 때 내 지휘관이 서른 세 명이나 죽었지만, 백성들은 전사한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을 죽이자니 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죽이지 않으면 윗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구해주지 않는 것이 분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임금님의 백성 중에는 노약자들이 도랑에 굴러들어가 죽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가버린 것이 수천 명에 달합니다. 그런데도 임금의 곡식창고는 가득 차있고 물자 창고는 꽉 차있었지요.
···백성들은 지금부터 자기네가 당한 것을 되갚으려는 것이니 그들을 허물치 마십시오. 임금께서 인정을 실시하면 그 때에는 백성들이 윗사람들에게도 잘 대하고,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34)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맹자가 당시 상황에서 가장 염려한 것은 군주들의 영토 확장욕 때문에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맹자는 백성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와 통제는 역으로 군주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인한 정치’의 정당성과 효용성을 군주들에게 주지시켜주고자 하였다.
아무리 전쟁을 통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다 하여도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올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인한 정치’를 통하여 인구의 유입을 유도하고 노동력의 확보에 정책의 우선성을 두려는 맹자의 주장은 나름대로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정치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한 군주만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는 맹자의 생각은 단순히 도덕적 당위성만을 천명한 것이 아니다. 항산(恒産)의 보장과 세금 경감이라는 경제정책을 실행한다면 자연히 민력(民力)이 증진될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민심(民心)이 확보된다면 저절로 국력 또한 신장되리라 본 것이다.
33) 그 예로 제 선왕은 맹자에게 “자신이 용감함을 좋아한다”(寡人好勇)고 토로한다. 맹자는 제 선왕에게 ‘필부의 용기’를 넘어서 천하를 덕으로 감싸는 ‘커다란 용기’를 가지라고 충고한다. (『孟子』 「梁惠王」)
34)『孟子』 「梁惠王下」
“鄒與魯鬨. 穆公問曰: 吾有司死者三十三人, 而民莫之死也. 誅之, 則不可勝誅, 不誅, 則疾視其長上之死而不救, 如之何則可也?
孟子對曰: 凶年饑歲, 君之民老弱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而君之倉廩實, 府庫充,
有司莫以告, 是上慢而殘下也. 曾子曰: 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也.
夫民今而後得反之也. 君無尤焉! 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
한비자는 취약했던 한나라의 안보 상황과 경제 조건 때문에 빈민구제와 복지시혜에 반대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군비의 증강과 재정의 긴축이 요청되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빈민을 향한 복지 혜택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빈민구제와 복지시혜에 반대하는 한비자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이해가 간다.
하지만 맹자의 시선은 ‘일국’이 아니라 ‘천하’라는 넓은 곳에 머물고 있다. 강대국 사이의 패권다툼에서 빚어지는 인명의 살상과 전쟁의 참화. 이러한 약육강식의 무질서에서 벗어나 천하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맹자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覇道)를 비판하고 인자(仁者)에 의한 평화통일을 염원했던 것이다. 일국의 존망을 염려하는 한 애국자의 식견과 천하의 평화를 염원하는 천하주의자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4. 무력과 형벌보다 복지와 교육으로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③‘인의’와 같은 도덕규범은 정치적 세계 특히 군/신 관계나 군/민 관계에서는 통용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군/신 관계나 군/민 관계를 이익관계로 보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자식관계도 ‘이익’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았다.
한비자는 이렇게 모든 인간관계를 ‘이익’의 관점에서 파악하였기 때문에, ④‘덕’이나 ‘예’에 의해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한비자가 지닌 인성에 대한 불신의 태도는 결국 효율적인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인의’를 배격하고 엄격한 법적용과 무거운 형벌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유가는 한비자의 인성 불신에 대하여 어떠한 응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많은 언급을 남기지 않았지만, 맹자는 명확하게 성선설을 지지함으로써 한비자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성론을 제시하였다. 맹자의 성선설과 한비자의 인성 호리설(好利說)에 대해서는 이미 풍부한 연구가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서 특별히 두 학파의 인성론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맹자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떤 관계로 파악했으며, 군/신 관계를 이익관계로만 파악하는 한비자의 견해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리고 백성들을 기회주의적 속성을 지닌 비열한 존재로 파악하여 일체의 교화가능성을 부정하는 한비자에 대하여 맹자는 어떠한 응답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한번 부언하지만, 한비자는 강대국의 틈 사이에 끼어 일국의 존망을 염려하던 애국자였다.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며 군주의 통치권을 위협하는 중신(重臣) 집단과 사문(私門) 세력을 그는 여덟가지 부류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들을 ‘팔간’(八姦)이라 불렀다.35)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의 눈에 비친 중신 세력은 호시탐탐 사적 이익을 도모하며 군주의 지위를 훔쳐보는 승냥이 같은 존재들이었다. 발호하는 신하의 세력을 억누르고 군주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비자는 법(法)· 세(勢) · 술(術)이라는 세 가지 통치방법을 강구해냈고, 심지어 암살술(暗殺術)을 승인하기도 했다.36)
그는 신하와 병사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으로 ‘신상필벌’ 즉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도록 군주에게 권고했으며, 이는 ‘이익’을 탐하는 인간성의 한쪽 측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35) 『韓非子』 「八姦」편 참조.
36) 谷方, 『韓非與中國文化』 (貴州人民出版社, 1996), 154쪽 참조.
그러면 맹자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떠한 관계로 파악했는가?
맹자는 한비자와 달리 일국(一國) 중심의 시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천하주의자였다. 그가 본 세상의 혼란은 근본적으로 강대국 군주들의 탐욕과 호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러한 탐욕과 호전성은 군주 자신의 도덕적 각성과 현명한 신하에 의한 보좌와 견제를 통하여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군주를 각성시키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며 잘못을 견제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연히 군주보다 뛰어난 식견과 혜안을 지닌 현신(賢臣)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맹자는 “탕(湯) 임금은 이윤(伊尹)에게 배워서 힘들이지 않고 왕노릇할 수 있었으며, 제 환공(桓公)도 관중(管仲)에게 배워서 힘들이지 않고 패자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것이다.37)
맹자는 자기 당시의 군주들이 지닌 커다란 문제점은 “자기가 가르침을 받을 사람을 신하로 삼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가르칠 사람을 신하로 삼으려는데 있다.”고 지적한다.38)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맹자는 신하를 지배의 대상이나 부림의 대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맹자는 현신(賢臣)에 의한 보좌와 견제만이 폭군의 탐욕과 호전성을 완화시키고 왕도정치로 나아가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39) 따라서 맹자는 군왕에 대한 견제나 보좌의 역할로 이름 난 백이(伯夷)나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신하들을 ‘성인’(聖人)이라는 극존칭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40)
37) 『孟子』 「公孫丑下」.
38) 위의 책, 같은 곳. “今天下也····· 好臣其所敎, 而不好臣其所受敎.”
39) 졸저,『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61쪽 참조.
40) 『孟子』 「盡心下」. “聖人, 百世之師也, 伯夷․柳下惠是也.”
신하를 견제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한비자의 입장은 그가 처했던 한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매우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하를 군왕에 대한 견제와 보좌의 역할로 파악하는 맹자의 시각 역시 군주들의 탐욕과 호전성에 의해 천하의 안정이 위협받던 전국시대의 상황에서 보자면 또한 정당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군/신 관계에 관한 한비자와 맹자의 차이는 단순히 현실주의 대 도덕주의의 대립만은 아니다. 이들의 차이는 당시 현실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욱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서있던 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신들이 발호하는 쇠약한 일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한 애국자의 입장과 강대국 군주들의 탐욕을 비판하면서 천하의 안정을 염원하는 천하주의자의 문제의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맹자는 신하를 군주에 대한 보좌와 견제의 역할로 설정하기는 했어도, 신하가 무도하고 포악한 군주를 향하여 끝없이 충성을 바쳐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군주가 잘못이 있을 때, 동성(同姓) 신하의 경우에는 두 번 간언하여 듣지 않으면 군주를 갈아버리고, 이성(異姓) 신하일 경우에는 두 번 간하여 듣지 않으면 군주를 버리고 떠나 버려도 좋다고 말한다.41) 이런 예로 볼때, 맹자의 군/신 관계에 대한 입장은 이익관계라기보다 같은 길(道)을 걷는 동반관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41) 『孟子』 「萬章下」. “齊宣王問卿. 孟子曰: 王何卿之問也?
王曰: 卿不同乎? 不同. 有貴戚之卿, 有異姓之卿. 王曰: 請問貴戚之卿.
曰: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 王勃然變乎色.
曰: 王勿異也. 王問臣, 臣不敢不以正對. 王色定, 然後請問異姓之卿. 曰: 君有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去.”
이제 백성을 “사랑해주면 오히려 기어오르려 하고 힘으로 위압할 때 비로소 고개를 조아리는 존재”로 파악하여, 인의에 의한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한비자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맹자는 한비자의 이러한 백성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억압받고 굶주리는 사회적 약자들은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생물학적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될 때는 도덕이나 염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교양이나 체면도 사치스런 것이 되고 만다. 맹자는 한비자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백성들이 ‘일정한 마음’(恒心)을 지니지 못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처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사’(士)뿐이라고 보았다.
맹자는 “백성들은 ‘일정한 생계’(恒産)가 보장되지 않으면 ‘일정한 마음’(恒心)도 기대할 수 없다”고 피력한다. 백성들에게 ‘일정한 마음’이 없게 되면, 제멋대로 행동하거나(放), 삐뚜러지거나(辟), 사악해지거나(邪), 충동적으로 행위하기(侈) 마련이라고 맹자는 인정한다.42)
그러나 맹자는 한비자와 달리 백성들의 비열한 속성을 무력과 형벌로 진압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속성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 그 자체를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에게 먼저 ‘항산’을 보장해주고 그 다음에 ‘염치’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42) 『孟子』 「梁惠王上」.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 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放辟邪侈, 無不爲已. 及陷於罪, 然後從而刑之, 是罔民也. 焉有仁人在位罔民而可爲也?”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의 생계를 마련해주되, 위로는 넉넉히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넉넉히 처자를 먹여살릴 수 있게 하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한 후에 그들을 인도하여 선한 길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따라오기 쉽습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계가 위로는 부모 섬기기에도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 먹여살리기에도 부족하며, 풍년에도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죽음에서 구해주기도 어려운데, 무슨 여가에 예의와 염치를 닦도록 하겠습니까?43)"
43) ꡔ孟子ꡕ 「梁惠王上」.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
然後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
今也制民之産, 仰不足以事父母, 俯不足以畜妻子, 樂歲終身苦, 凶年不免於死亡.
此惟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
백성들의 비열한 행태를 무력과 형벌로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복지와 교육으로 바로잡을 것인가? 어느 종류의 통치방식이 더욱 인도적이며 동시에 근본적인 치유책인가?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란이 필요 없으리라고 본다. 공자는 이 두 가지 치유책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법령으로 통제하고 형벌로써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법망을 뚫고 요행히 형을 면함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한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한다면 수치심도 알게 되고 바르게 될 것이다.”44)
이처럼 유가 사상가들은 백성들의 비열한 속성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력과 형벌보다는 복지와 교육이 더욱 근본적인 치유책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생활수준의 향상과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요구된다. 생산력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농업 사회에서 토제제도와 조세제도를 개선하고 생산력을 증가시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던 한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장기 전략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빠른 시일 안에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재조직하여 경제생산과 국토방위에 전념케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한비자의 당면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44)『論語』 「爲政」.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5. 인의는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덕성이지만 이는 제도를 통하여 구현된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했던 또 다른 이유는, ⑤“인의라는 사적 도덕은 법·제도의 공공성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⑥“효율적인 지배 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인의’보다 중형(重刑)이 효율적”이며, ⑦“공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인’과 ‘의’는 ‘사적 도덕’인가? 과연 ‘인’과 ‘의’는 공적 영역에서 추방되어야할 부정적 가치들인가? 그리고 ‘인의’와 덕치를 강조하는 유학에서는 법을 무시하거나 법의 중요성을 소홀히 여겼는가?
한비자가 인의를 사적 도덕이라고 본 이유는, 당시의 세력있는 신하들이 사사로이 국고를 풀어서 은혜를 베풂으로써 개인의 세력을 확대하거나,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집단이나 세력에게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소위 ‘공적 자금 유용’이나 ‘연고주의’ 혹은 ‘특혜’라고 불릴만한 이러한 작태가 한비자 당시의 한나라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모양이다. 한비자는 당시의 관직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던 정실주의와 연고주의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훌륭한 인물인지 아닌지 검토도 하지 않고, 공로가 있는지 논하지도 않고, 다만 군주가 아끼는 사람이라 하여 그대로 등용하고, 좌우 측근의 청탁이라 하여 그대로 받아들인다.
부형이나 대신들은 군주에게 작록을 부탁해서 그것을 아래에 팔아 재물을 끌어모으고, 마침내 사당(私黨)을 결성한다. 이에 따라 돈많은 자는 돈으로 관직을 사서 귀한 자리에 오르고, 인간관계와 친분이 넓은 자는 청탁을 해서 권세를 강화한다.
결과적으로 공로가 있는 신하는 인정받지 못하고 관직의 임명도 정당성을 잃고 있다. ···이것은 망국의 풍조이다.45)"
45) 『韓非子』 「八姦」. “不課賢不肖, 論有功勞, 用諸侯之重, 聽左右之謁,
父兄大臣上請爵祿於上, 而下賣之以收財利及以樹私黨. 故財利多者買官以爲貴, 有左右之交者請謁以成重.
功勞之臣不論, 官職之遷失謬····· 此亡國之風也.”
한비자가 묘사하는 부패한 공직사회의 모습은 오늘날의 소위 ‘낙하산 인사’ ‘연고주의’ ‘특혜’ ‘매수’ ‘알선 수재’ 등에 해당하는 비윤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을 저지르는 인사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인정’(仁)이나 ‘의리’(義)와 같은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정실주의적 특혜는 유가에서 말하는 ‘인’이나 ‘의’와 동일시될 수 있는가?
과연 공자와 맹자는 이러한 특혜 인사와 정실주의를 ‘인의’라고 했던 것인가?
다음에 인용하는 『孟子』의 구절에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정실주의나 연고주의를 비판하는 맹자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제 나라의 대신 심동(沈同)이 맹자에게 연나라를 공격해도 좋은지 물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심동의 견해에 반대한다.
“여기 한 관리가 있는데 당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하여 왕에게 고하지도 않고 사적으로 봉록과 작위를 그에게 넘겨주고, 그 사람 역시 왕의 허락없이 사적으로 당신한테 그것을 받으면 괜찮겠소?”46)
맹자의 견해에 의하면 오로지 하늘의 명을 받은 인왕(仁王)만이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 것이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일은 ‘사적으로 작록을 주고받는 일’과 다름없는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편적인 예이지만, 공직사회에서 사적으로 작위를 주고받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는 맹자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46) 『孟子』 「公孫丑下」. “有仕於此, 而子悅之, 不告於王而私與之吾子之祿爵, 夫士也, 亦無王命而私受之於子, 則可乎? 何以異於是?”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인’은 특정집단에 대한 시혜나 정실주의적적 특혜가 아니다. ꡔ논어ꡕ나 ꡔ맹자ꡕ의 문장 속에서 ‘인’은 백성(民) 일반에 대한 보편적인 배려를 지칭한다.47) 『孟子』의 다음 구절에는 이러한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군자는 금수나 초목과 같은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어여삐 여기지만 ‘인’으로 대하지 않고, 백성을 대함에 있어서 ‘인’하게 대하지만 ‘친’으로 대하지 않는다. 혈친에게는 ‘친’으로 대하고 백성에게는 ‘인’으로 대하며 금수와 초목에게는 어여삐 여기는 것이다.”48)
맹자의 어법에 드러나 있듯이, 혈친에게 잘 대해주는 일이 ‘친’(親)이라는 덕목이고, 백성에게 잘 대해주는 일이 ‘인’(仁)이며, 다른 온갖 사물과 존재를 어여삐 여기는 일이 ‘애’(愛)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 이라는 덕목은 특정 집단이나 가문에 특혜를 주는 일이 아니라 통치자의 ‘백성’(民) 일반에 대한 보살핌을 의미한다.
48) 『孟子』 「盡心上」. “孟子曰: 君子之於物也, 愛之而弗仁, 於民也, 仁之而弗親.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
백성에 대한 보살핌은 군주의 사적 시혜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세 제도와 형벌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맹자는 통치자가 백성에게 사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일은 “은혜롭기는 하지만 정치를 모르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맹자는 그러한 사례로 정(鄭) 나라의 대부였던 자산(子産)의 경우를 든다.
자산은 백성들이 추운 겨울에 발을 벗고 내를 건너는 것이 안쓰러워 자기가 타는 수레에 백성들을 태워서 건네주었다. 자산의 은혜로운 행위를 맹자는 이렇게 꼬집는다.
“자산은 은혜롭기는 하지만 정치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농사철이 끝난 11월에 다리를 놓아 완공시키면 백성들이 추운 겨울에 내 건너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된다. 군자가 정치를 공평하게 하면 길 가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일일이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한사람 한사람을 다 건네주겠다는 말인가?
정치하는 자가 모든 사람을 일일이 다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면 날마다 그 일만 하여도 모자랄 것이다.”49)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맹자가 이야기하는 ‘인한 정치’는 통치자가 특정집단에게 편파적 특혜를 주는 일도 아니며, 백성들에게 사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일도 아니다. ‘인자한 정치’는 ‘편파적인 특혜’나 ‘사적인 시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제도 · 형벌제도 · 토지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의 개선을 통해서 백성들의 복지(민생)와 문화(교육)적 수준을 향상시켜주는 일을 말한다.50)
49) 『孟子』 「離婁下」. “子産聽鄭國之政, 以其乘輿濟人於溱洧. 孟子曰: 惠而不知爲政. 歲十一月, 徒杠成, 十二月, 輿梁成, 民未病涉也. 君子平其政, 行辟人可也, 焉得人人而濟之? 故爲政者, 每人而悅之, 日亦不足矣.”
50) 『孟子』 「梁惠王上」. “王如施仁政於民, 省刑罰, 薄稅斂, 深耕易耨, 壯者以暇日修其孝悌忠信, 入以事其父兄, 出以事其長上, 可使制梃以撻秦楚之堅甲利兵矣.”
흔히 사람들은 유가와 법가의 차이를 인치와 법치의 차이로 잘못 인식하곤 한다. 양계초에서 비롯된 이러한 오해에 따르면, 유가의 덕치사상은 일체의 법이나 제도를 무시한 군주 개인에 의한 자의적인 무단통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51) 그러나 유가의 덕치는 ‘법’이나 ‘제도’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법’이나 ‘가혹한 제도’를 배격하고 ‘덕스런 법’이나 ‘덕스러운 제도’를 옹호하려는 것임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지도자가 선한 마음만 가진다고 해서 정치가 되지 않으며, 한갓 법에만 의지한다고 해서 나라가 절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점을 이렇게 말한다.
51) 梁啓超, 『先秦政治思想史』 (東方出版社, 1966), 제2장, 77-78쪽 참조.
"이루(離婁)의 밝은 시력과 공수자(公輸子)의 교묘한 기술로도 규구(規矩)를 쓰지 않으면 네모와 원을 만들 수 없다. 사광(師曠)의 예민한 청력으로도 6률(六律)을 쓰지 않으면 5음(五音)을 바로 다룰 수 없다.
······한갓 ‘선’만으로는 정치를 하기에는 부족하고, 한갓 ‘법’만으로는 나라가 저절로 굴러가지 못한다.52)"
52) 『孟子』 「離婁上」. “離婁之明 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圓, 師曠之聰, 不以六律, 不能正五音,
···· 故曰: 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
이루는 황제(黃帝) 때 눈이 밝았다는 전설상의 인물로, 백보 밖에서 가을 터럭의 끝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공수자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기술자로서, 기계제작에 기가 막힌 재주를 가졌다고 한다. 맹자는 아무리 이루나 공수자와 같이 눈이 밝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컴퍼스와 자(規矩)가 없으면 원과 네모를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사광은 진(晉) 평공(平公)의 악사로서 귀가 너무도 밝아서 음률의 미세한 차이라도 귀신처럼 알아맞혔다고 한다. 맹자는 이렇게 귀가 밝은 사람이라 해도 표준음을 규정해주는 육률(六律) · 육려(六呂)의 죽관(竹管)이 없다면 궁·상·각·치·우의 다섯 음정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에 있어서도 아무리 지도자가 선한 덕성을 가졌더라도 ‘선(善)함’만 가지고는 제대로 정치가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반드시 여기에 더불어 법이라는 외재적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볼 때, 맹자가 전적으로 ‘법’만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의 덕성과 더불어 법을 ‘인한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맹자는 다른 곳에서도 “현명한 사람이 벼슬자리에 있고 유능한 인재가 직책을 맡게되면 국가가 한가하게 된다. 그렇게 된 때에 이르러 정교(政敎)와 형벌을 밝게 한다면 큰 나라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나라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53)고 말한다. 여기서 ‘정교’와 ‘형벌’이란 정치공동체의 성원들이 준수해야 하는 일체의 객관적 규범과 처벌규정을 말한다. 이는 법가에서 강조하는 ‘법’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 맹자가 말하는 법은 법가에서 말하는 법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53) 『孟子』 「公孫丑上」. “賢者在位, 能者在職, 國家閒暇, 及是時, 明其政刑. 雖大國, 必畏之矣.”
"위에 있는 임금이 도(道)로써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에 있는 백성들은 법(法)을 지키지 않으며,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도의를 믿지 않고, 기술자들이 척도(度)를 어기며, 군자가 의(義)를 어기고 소인들은 형법(刑)을 범하면서도 그 나라가 존속되는 것은 요행이다.54)"
54) 『孟子』 「離婁上」. “上無道揆也, 下無法守也, 朝不信道, 工不信度, 君子犯義, 小人犯刑, 國之所存者幸也.”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법’(法) ‘도’(度) ‘형’(刑) 등의 개념은 ‘법’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그리고 ‘도’(道)와 ‘의’(義) 등의 개념은 ‘도덕’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맹자는 이러한 두 가지 범주를 구분치 않고 뒤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맹자가 말하는 법은 ‘도덕’이나 ‘정의’의 원칙에 의해 제정된 법이며, 법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탈도덕적인 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맹자가 곳곳에서 말하는 ‘옛날의 헌장’(舊章)이나 ‘선왕의법’(先王之法)과 같은 것도 고대의 성왕(聖王)에 의해 만들어진 불문법적 헌장제도를 의미한다.55)
이러한 예로 볼 때, 유가에서 법을 무시하고 인치를 주장했다는 견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유학에서는 사회규범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법’이 필요하다는 한비자의 견해에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법’만을 유일한 사회규범으로 여기려는 한비자의 입장과 달리, 유학에서는 법만으로는 안된다고 여기고 “법과 통치자의 덕성”을 동시에 요구할 것이다. 또한 법을 군주의 통치권 확보를 위한 가치중립적 도구로 여기려는 한비자의 입장과 달리, 유학에서는 ‘인의’라는 도덕적 기준을 법정신과 법목적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55) 위의 책, 같은 곳. “詩云, ‘不愆不忘, 率由舊章.’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6.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인의’와 ‘도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한 마지막 이유는 ⑧“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도덕 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한비자는 역사의 변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주 옛날(上古)에는 도덕(道德)을 가지고 경쟁했고, 중세 때는 지모(智謀)를 가지고 겨루었지만, 오늘날에는 기력(氣力)으로 다툰다. ···(지금 시대에) 인의(仁義)나 변지(辯智)는 나라를 지탱하는 수단이 못된다.”56)
이처럼 한비자는 인간의 역사가 도덕의 시대 → 지모의 시대 → 기력의 시대의 순으로 변천해왔다고 보고, 자기가 처했던 전국 시대는 ‘힘으로 다투는 시대’로 파악했다. 한비자의 이러한 시대인식은 국제협약이 휴지조각처럼 변해버리고 하나의 군사-자본 초강대국이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56)『韓非子』「五蠹」. “上古競於道德, 中世逐於智謀, 當今爭於氣力。
齊將攻魯, 魯使子貢說之。齊人曰: 子言非不辯也, 吾所欲者土地也, 非斯言所謂也. 遂擧兵伐魯, 去門十里以爲界。故偃王仁義而徐亡, 子貢辯智而魯削。以是言之, 夫仁義辯智, 非所以持國也.”
맹자 역시 도덕이 통하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던 당시의 현실에 대해 한비자와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맹자는 춘추시대에 일어난 전쟁 가운데 ‘의로운 전쟁’(義戰)이란 없다고 보았으며, 전국시대는 춘추시대보다 더욱 포학한 침탈전이 자행되고 있다고 보았다.57) 그의 묘사에 의하면, 당시는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토지쟁탈전으로 인해 젊은 남자는 전쟁터에 나가서 죽고, 노약자와 부녀자는 피난하다 얼어죽거나 굶어죽어 시체가 구덩이에 굴러다니는 비참한 상황이었다.58) 이런 점에서 맹자는 ‘도덕’이 사라지고 ‘힘’(氣力)으로 싸우는 시대가 되었다는 한비자의 현실인식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감할 것이다.
57) ꡔ孟子ꡕ 「盡心下」. “孟子曰: 春秋無義戰. 彼善於此, 則有之矣. 征者, 上伐下也, 敵國不相征也.”
58) ꡔ孟子ꡕ 「梁惠王下」. “凶年饑歲, 君之民老弱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而君之倉廩實, 府庫充, 有司莫以告, 是上慢而殘下也.”
문제는 해결책이다.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보고 여기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가?
한비자와 맹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한비자는 인간의 문화가 도덕의 시대 → 지모의 시대 → 기력의 시대의 순으로 변천해가는 것을 역사의 필연법칙으로 여긴다. 옛날처럼 인구가 적고 삶의 조건이 소박했던 시대에는 ‘인의’나 ‘도덕’이 가능했지만,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발전하여 서로 이익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인의’나 ‘도덕’ 대신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59)
이렇게 ‘힘’으로 다투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한비자는 생산체제(耕)와 국방체제(戰)를 일원화하고 군주를 정점으로 한 강력한 군사국가를 수립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객관화된 법체계와 강력한 통제 시스템의 구축, 통치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체계의 확립, 그리고 일체의 사적 논의를 금지하고 사(私)집단을 해체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물론 한비자의 이러한 정책권고안 속에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전제주의적이고 비인도적인 요소도 많이 들어있지만) 약소국이었던 한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실하게 요청되는 정책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59)『韓非子』「八說」 “古者人寡而相親, 物多而輕利易讓, 故有揖讓而傳天下者。然則行揖讓, 高慈惠, 而道仁厚, 皆推政也. 處多事之時, 用寡事之器, 非智者之備也; 當大爭之世, 而循揖讓之軌, 非聖人之治也.”
한비자가 자국중심의 시각에서 이러한 단기적이고 효과적인 처방을 제시했다면, 맹자는 천하주의적인 시각에서 인도적이고 장기적인 처방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맹자는 한비자의 직선적 역사관과 달리, 역사는 한번 다스려지고(一治) 한번 어지러워지는(一亂) 순환과정을 겪으며 전개된다고 보았다.60)
양(梁)의 양왕(襄王)이 맹자에게 “천하는 어떻게 정해질 것인가?”하고 묻자, 맹자는 “하나로 정해질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양왕이 다시 “누가 천하를 통일할수 있을 것인가?”하고 묻자, 맹자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고 대답한다.61)
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종식시키기 위한 맹자의 입장은 ‘인자’(仁者)에 의한 천하통일론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는 수많은 나라를 주유하며 천하를 덕으로 통일해 낼만한 ‘인자한 인물’ 을 발굴해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맹자의 이런 천하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견해와 반대로, 한비자와 같은 약소국의 군주는 매우 절박한 심정으로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강대국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계속 ‘인의’만 주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실제로 당시의 약소국 군주였던 등(縢) 나라의 문공(文公)이 맹자에게 물었던 말이다.
60) 『孟子』 「公孫丑下」. “彼一時, 此一時也. 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
61) 『孟子』 「梁惠王上」. “孟子見梁襄王, 出, 語人曰: 望之不似人君, 就之而不見所畏焉. 卒然問曰: 天下惡乎定? 吾對曰: 定於一. 孰能一之? 對曰: 不嗜殺人者能一之.”
"등문공이 물었다. “등나라는 작은 나라로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있으니, 제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아니면 초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맹자가 대답하기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득이하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성의 주위에) 호수를 파고 성곽을 쌓고서 백성과 더불어 지키되, 죽기에 이르더라도 백성들이 떠나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번 해볼만한 일입니다.”62)"
62) 『孟子』 「梁惠王下」. “滕文公問曰: 滕, 小國也, 間於齊楚. 事齊乎? 事楚乎?
孟子對曰: 是謀非吾所能及也. 無已, 則有一焉,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 效死而民弗去, 則是可爲也.”
등문공의 절박한 질문에 비해, 맹자의 대답은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맹자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국제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권고는 임금과 백성이 한 몸이 되어 끝까지 버틸 수 있다면 버티어보라는 말뿐이었다. 등문공과 같은 약소국의 군주는 맹자의 이러한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등문공은 기회를 보아 맹자에게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등은 작은 나라로서 온 힘을 다해서 큰 나라를 섬겨도 그 압박을 면할 수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등문공의 질문에 대해 맹자는 다시 두 가지 가능한 방안을 내놓는다.
강대국이 원하는 것은 결국 토지이니 땅을 내주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다른 곳으로 가서 살던지, 아니면 죽기를 무릅쓰고 한 번 끝까지 싸워보라는 권고가 바로 그 것이다.63)
맹자의 이러한 대답이 등문공의 입장에서는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자신의 영토를 내주고 외딴 곳에 가서 살거나, 한번 버티어볼 수 있으면 끝까지 버티어보라는 식의 권고는 듣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면 맹자는 과연 현실을 모르는 관념적 도덕주의자였던가?
63) 『孟子』 「梁惠王下」. “滕文公問曰: 滕, 小國也, 竭力以事大國, 則不得免焉, 如之何則可?
孟子對曰: 昔者大王居邠, 狄人侵之. 事之以皮幣, 不得免焉, 事之以犬馬, 不得免焉, 事之以珠玉, 不得免焉. 乃屬其耆老而告之曰: 狄人之所欲者, 吾土地也. 吾聞之也, 君子不以其所以養人者害人. 二三子何患乎無君?
我將去之. 去邠, 踰梁山, 邑于岐山之下居焉. 邠人曰: 仁人也, 不可失也. 從之者如歸市. 或曰: 世守也, 非身之所能爲也. 效死勿去. 君請擇於斯二者.”
맹자는 제(齊) 선왕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외교관계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오직 인자한 군주만이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수 있고, 오직 지혜로운 군주만이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다.
····큰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즐기는 것이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존하고,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는 자는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64)
64) ꡔ孟子ꡕ 「梁惠王下」. “齊宣王問曰: 交鄰國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爲能以大事小······智者爲能以小事大·
····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맹자의 이 말은 일단 강대국과 약소국이라는 현실속의 역학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면 강대국과 약소국의 외교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맹자에 의하면, 강대국은 약소국을 감싸 안아줌으로써 천하의 중심으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고, 약소국은 강대국을 섬김으로써 자국의 영토와 백성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외교관계는 모두가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대국에게는 ‘인’(仁)이라는 포용력이 필요하고, 약소국에게는 생존을 위한 ‘지혜’(智)가 필요하다는 것이 맹자의 입장이다.
맹자의 이러한 입장에 따른다면, 힘이 약한 나라는 지혜를 동원하여 강대국을 섬기며 생존을 도모해야 하고, 만약 이것마저 불가능하다면 나라를 포기하고 백성을 살리는 것이 순리이다.
사직과 국가의 보존을 염려해야했던 등문공이나 한비자와 달리, 천하주의자였던 맹자에게 사직과 국가란 어찌 보면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국경선으로 둘러싸인 국가 공동체를 유지하고 핏줄로 이어지는 사직을 보존하는 일보다는, ‘인의’에 의해 떠받쳐지는 ‘도덕 천하’의 수립이 맹자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일국의 보존을 위해 고심하던 등문공이나 한비자와 달리, 맹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강대국의 군주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가 방문했던 나라나 체류기간을 살펴보면, 맹자는 아마도 제(齊) 나라에 가장 큰 희망을 품었다고 여겨진다. 비교적 국세가 강하고 토지가 넓은 나라를 골라 그 나라의 군주를 설득하여 ‘인’이라는 포용력으로 천하를 평화적으로 통일하게 만들려는 염원을 맹자는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맹자의 희망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상앙과 한비자 등 법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던 진(秦) 나라는 결국 ‘다투는 나라들’(戰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토를 처음으로 통일하였다.
하지만 진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잔혹한 형벌로 인해 길가는 사람의 절반이 불구자였고,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농민들은 개나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65)
고통을 견디다 못한 민중은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고, 진나라는 결국 천하를 통일한지 1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덕치와 인정을 강조하는 맹자의 정치 이념은 분열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유효한 것이 아니라 통일된 천하를 유지하기 위해 유효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덕치와 인의를 부정하는 한비자의 정치이념은 통일된 천하를 유지하기 위해 유효한 것이 아니라 분열된 천하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유효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충은 한비자를 비판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중 길러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덕을 기르는 것이고, 둘째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덕에만 의지해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힘에만 의지해도 적을 이길 수 없다. 한비자의 술책은 덕을 기르지 않는 것이고, 서(徐) 언왕(偃王)의 정책은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한 쪽에 치우쳐서 각기 부족한 점이 있다.” 66)
65)『漢書』 「殖貨志」. 서연달 외 지음, 중국사연구회 옮김, ꡔ중국통사ꡕ(청년사, 1989), 156-157쪽 참조.
66)『論衡』 「非韓」. “治國之道, 所養有二. 一曰養德, 二曰養力······ 夫德不可獨任以治國, 力不可直任以御敵也. 韓子之術不養德, 偃王之操不任力, 二者偏駮, 各有不足.”
7. 덕(德)과 힘(力) 그리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갈림길에서
한비자는 정치 영역에서 ‘인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배격하고 법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강조하였다. ‘인의’를 배격하는 한비자의 입장에는 비인도적이고 전제주의적인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강대국에 둘러싸여 국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한나라의 상황에서는 타당한 제안이었다고 여기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사 집단의 발호에 의해 군주의 통치권이 위협받고, 세력집단 사이의 정실주의와 연고주의로 사회규범의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비자의 이러한 제안은 상당히 호소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영역에서 ‘인의’의 시행을 주장하는 맹자의 입장 역시, 비록 너무도 인도적이고 도덕적인 제안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강대국 간의 쟁탈전으로 인하여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통치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잔혹한 형벌과 무자비한 수탈을 종식시키고 군주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맹자의 입장은 당시의 상황에서도 정당한 주장이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인의’를 배격하는 한비자와 ‘인의’를 옹호하는 맹자의 입장은 겉으로 볼 때 서로 정면적으로 충돌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사상가가 발언하는 담론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는 주장 가운데 어떤 것들은 결코 화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하가 ‘인의’를 가장하고 세력을 확대하여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한비자뿐 아니라 유가 역시 비판적 눈길로 바라볼 것이다. 또한 인정(仁)과 의리(義)라는 이름으로 사 집단 사이에 특혜를 주고받는 정실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한비자뿐 아니라 공·맹 역시 비판의 화살을 보낼 것이다.
한비자와 맹자의 상충하는 듯 보이는 입장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각기 정당성을 확보한다. 한비자는 군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발호하는 중신(重臣) 세력과 사가(私家) 집단을 약화시키고자 했지만, 맹자는 군주를 선정(善政)으로 이끌기 위해 어진 신하를 중용하여 군주권을 견제하고자 했다. 군주권을 강화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려는 한비자의 입장과 군주권을 견제하여 선정으로 이끌려는 맹자의 입장은 각기 ‘자국의 안전 도모’와 ‘폭정의 방지’라는 합목적성을 지닌다. 이러한 두 가지 목적은 평면적인 차원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주장은 각기 다른 차원에서 정당성을 지닌다.
한비자와 맹자가 지녔던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은 오늘날에도 유효성을 지닌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약육강식적 침략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현실에 직면해서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며 동시에 도덕적인 길인가? 우리는 한비자의 입장과 맹자의 입장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한편으로는 자국의 사회규범을 투명하고 객관적인 모습으로 개혁해나가면서 국방력과 경제력을 강화시켜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국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힘과 힘이 다투는 냉엄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약자는 한편으로 힘을 기르면서 동시에 강자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이 두 가지 방안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차원에서 요구되는 해결책일 따름이다.
한비자와 맹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평면적인 차원에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맹자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군주들의 내면에 ‘가능성’(端)으로만 잠재하고 있는 측은지심을 계발하여 인정(仁政)의 형태로 실현해내고자 유도하였다. 반면에 한비자가 자기 시대의 인간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세를 확보하고자 연고집단끼리 결탁관계를 맺는 중신세력들의 정실주의,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기회를 엿보는 백성들의 비열한 행태였다. 인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맹자의 주된 관심이 군주의 측은지심을 계발하여 선정으로 유도하는데 있었다면, 한비자의 관심은 중신 집단과 백성들의 속성을 간파해서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맹자의 인성은 ‘가능성’ 혹은 ‘잠재태’로서의 인성이지만, 한비자의 인성은 현실 속에 드러난 ‘실현태’로서의 인성이다. 서로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한비자와 맹자의 인성관은 “누구의 인성인가?” 그리고 “왜 인성이 문제인가?”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인간의 모습인가, 앞으로 계발 가능한 잠재적 인성인가?”라는 물음이 풀릴 때 비로소 평면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님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물론 한비자와 맹자에게는 결코 화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인성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한비자의 입장은 인성의 교화가능성을 신뢰하는 맹자의 입장과 상충한다.
탐욕과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를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이라고 보는 한비자의 입장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맹자의 입장과 상충한다.
도덕과 인의를 도구적 수단으로 간주하려는 한비자의 입장은 도덕과 인의를 궁극적 가치라고 믿는 맹자의 입장과 상충한다.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두 입장은 단지 한비자와 맹자의 시대에만 제기되었던 특수한 대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입장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적 세계’에 속한 모든 인간들이 숙명적으로 부닥쳐온 문제이며 헤어나고자 고뇌했던 문제이다. 우리는 후대의 지성사 속에서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을 하나의 체계 안으로 융섭하려는 끈질긴 노력들을 발견한다.
법가의 법치 이념과 유가의 덕치 이념을 하나의 체계 안으로 융회하려는 한대 이후의 ‘유법합류’(儒法合流)의 흐름, 인성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의리지성(義理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설명하려는 성리학자들의 노력, 그리고 왕도정치와 패도정치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는 주희-진량 사이의 왕패논쟁 등은 그러한 고뇌의 작은 흔적들이다.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던 진나라의 단명(短命)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교훈을 남겨주었다.
힘으로 천하를 잡을 수는 있어도 힘만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의’가 결여된 세상은 동물의 세계이지 인간의 세계는 아니다. ‘공적 세계의 합리화’는 도덕을 배제한 힘의 논리만으로는 안되며 힘을 무시한 도덕적 호소만으로도 안된다. ‘공적 세계의 합리화’는 힘과 탐욕이 난무하는 세계의 현실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질서지울 것인가 하는 질문에 올바로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천지는 세월이 어지럽다고 하여 봄날을 없애지 않듯이, 좋은 군주는 세상이 쇠락했다고 하여 덕을 버리지 않는다.”67)
67) 『論衡』 「非韓」. “天地不爲亂歲去春, 人君不以衰世屛德.”
참고 문헌 - 제외
'동양사상 >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활인심방(活人心方)의 마음공부법 (0) | 2019.10.14 |
---|---|
'九正易因' 에서 본 李贄의 易學과 그 세계관 (0) | 2019.10.12 |
사회규범의 공공성에 관한 법가의 인식(1) (0) | 2019.10.06 |
음양오행론의 해석체계에 관한 연구 (0) | 2019.10.06 |
유가의 예 사상과 규범적 질서의 문제 (0) | 2019.10.06 |